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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리비>


고대사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재음하면 새빨간 거짓말로 들통나는 일이 한둘이 아니어니와, 신라 문자 생활사로 국한해 말한다면, 현재까지 발견된 초기 신라 금석문에 드러난 문장을 그들의 초기 문자 생활자료로 설명하는 압도적 견해도 그것을 대표하는 거짓말 중 하나다. 


현재까지 신라 금석문 발견 현황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그 초기 자료들을 볼진대, 포항 영일 냉수리 신라비(이하 냉수리비)가 추정대로라면 신라 지증왕 재위 4년(503), 울진 봉평 신라비가 대략 이십년가량 늦은 법흥왕 11년(524)으로 건립시기가 추정되거니와,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 초기 금석문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몇년 빠른 걸로 본다. 


이후 신라인이 남긴 금석문으로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시대 창녕 척경비가 따르며, 그 이후엔 명활산성비가 대표하는 금석문들이 있고, 중하대로 내려갈수록 실물자료는 많아진다. 

무엇이 새빨간 거짓말인가?


저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 금석문이다. 나아가 그 문장을 보면 전자 셋은 소위 신라식 한문이라 정통 한문, 그러니깐 진흥왕 순수비 기준으로 보면 투박하기 짝이 없게 보인다. 그래서 말하기를 저들 초기 금석문을 신라 초기 문자 생활사의 문물로 간주하는 한편, 그 문장 혹은 서사 수준이 형편없음을 들어 신라가 문서 행정을 지증왕 무렵 이후 계우 흉내나 내기 시작한 것으로 간주한다. 신라사 논문 백편 중 아흔아홉편이 저런 주장을 펴거나 그런 전제를 깐다고 보아도 대과가 없다. 


나는 이를 왜 새빨간 거짓이라 하며, 그렇기에 그것을 허무맹랑하다 하는가?


냉수리비와 봉평비와 중성리비는 신라 지배층이 신민을 통치하기 위해 구사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어느 하나 흠결없이 완벽한 문장이다. 천오백년 지난 지금에 그 문서를 읽는 자들에게 저 문서가 어려울 뿐이지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과 그 문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이상한 문서가 아니었다. 


<봉평비>


저것을 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정통 한문으로 적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문서를 통용하고 소비하는 사회환경 때문이었다. 저 시대에는 저런 문장 혹은 행정문서를 요구했으며, 저들 문서는 그런 시대환경에 충실히 복무했다. 물론 저 시대 문맹률을 따져야겠지만, 적어도 저 문서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저 문서는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그런 수수께끼가 전연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시대 이두는 물론이고 신라시대 이래 전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활용한 이두니 석독이며 구결은 한문 한자에 기반한 문자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단계의 또 다른 성취다. 다시 말해 종래 정통 한문을 몇 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정통 한문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이두며 하는 문자 표기 체계가 브로컨 잉글리시의 대표주자인 피전 잉글리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긴 브로컨 잉글리시도 이두에 해당하기도 하다만, 어찌됐건, 그것은 정통 한문으로는 전달할 수 없거나, 전달하기 힘든 그 난관을 타개하고자 몸부림친 인간 노력의 위대한 성취라는 점이다. 이 점이 고대사학계, 혹은 일반의 통념과 내가 바라보는 지점이 대척을 형성한다. 


이두가 그렇듯이, 현재까지 발견된 봉평비 냉수리비 중성비는 신라의 초기 문자생활, 그런 까닭에 그 저급한 문자수준을 증언하는 유물이 아니라 외려, 그것이 더욱 더욱 고도화한 문자 생활의 표식이다. 따라서 저들 세 금석문 중에서도 그것을 전시 홍보하기 위한 전문 박물관을 갖춘 오직 유일한 사례인 울진 봉평비 전시관은 저 위대한 성취를 선전해야 하는 기관이다.


봉평비 봐라. 이 문서는 전체가 398字라고 당당히 밝혔다. 이는 이 문서를 단 한 줄이라고 곤치는 놈이 있다면 물고는 내겠다는 경고다. 때려 죽인다는 경고문이다. 이것이 유래한 뿌리 중 하나는 내가 늘 지적하듯이 《상군서商君書》다. 그리고 그 저층 혹은 심연을 흐르는 사상 기조는 당연히 법가法家요, 그것을 뒷받침한 논거 중 하나가 바로 《주례(周禮)》다. 


봉평비 냉수리비 중성비가 건립된 신라 지증왕~법흥왕 시대에 이미 《상군서》가 통용하고, 《주례》가 유통하고, 《한비자》가 읽혔다. 


신라? 당신들 눈엔 눈엔 신라가 그리 우습게 보일지 모르나, 신라는 이미 저 시대에 그 시대 동아시아 사상을 지배한 주요한 텍스트가 다 들어와 있었다. 냉수리비 봉평비를 푸는 열쇠는 《삼국사기》도 아니요 《삼국유사》도 아니며 《상군서》이며, 《주례》이며, 《한비자》다. 


내가 오래전에 지적한 것이지만, 신라에는 누층적, 혹은 간단히 추려 이중적 문자 서사체계가 있었다. 냉수리비 봉평비 중성비가 신라 신민을 대상으로 하는 마이크라면, 그 직후 등장한 유려한 정통 한문 텍스트인 진흥왕 순수비는 독자가 천지신이라 정통 한문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냉수리비와 봉평비가 대표하는 신라식 한문과 그 직후 정통 한문인 진흥왕 순수비문을 계승 관계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지증왕 법흥왕 시대까지는 정통 한문도 몰라, 그 찌꺼기인 브로컨 차이니즈(Broken Chinese)를 사용하다가 진흥왕 시대가 개막하면서 비로소 한문다운 한문을 하는 지식을 배출하기 시작해 그것이 순수비로 '발전'했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또 강조하거니와, 이는 독자가 다른 데 따른 다른 서사 체계의 채택이지 결코 사승 관계가 아니다. 종래 압도적인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금석문으로 보건대 진흥왕 이후 신라 한문이 도로 냉수리비 시대로 돌아간 사정을 전연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우리가 소화할 수 없거나, 소화하기 힘든 한문이라 해서, 그런 한문을 구사한 저 시대 신라인들의 문자 생활 수준이 저급했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들이 구사한 한문을 천오백년 지난 지금의 우리가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사고체계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제도를 알아야 하며, 그것이 운용된 시스템을 알아야 하지만, 이와 관련해 우리한테 알려지거나 주어진 정보는 태부족이다. 시간의 간극과 이런 여러 차이가 텍스트의 난독성을 초래하는 것이지, 저들이 구사한 한문이 저급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 중 저들이 가장 초기 것이라 해서 그것이 그들의 초기문자 생활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채택할 수는 결코 없다. 이는 실은 고고학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 혹은 패착이거니와, 이 친구들은 엉뚱한 언론을 향해 최고最古 최초最初 최대最大의 삼최(三最)를 좋아한다 비아냥대고, 키득키득거리지만, 세상 어떤 유적 유물도 내가 이런 類로는 세계 최초라고 선언하는 경우는 없다. 삼최는 그것이 그때까지 알려진 시간과 공간의 상한선을 알려주기에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삼최는 언제나 열린 것이며, 열려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우리네 고고학을 보니, 시건방이 하늘을 찔러, 강고한 이 삼최가 어느 순간 정답으로 고정한 그 강고한 폐쇄성에 심대한 문제가 도사린다. 


이 꼴이 신라사학계에도 도져서 저들을 신라생활 초기 문자자료라고 본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신라문자자료라는 말이 신라인들이 문자생활을 한 가장 이른 시기 증거물일 수는 결코 없다. 


봉평비며 냉수리비며 중성리비는 그에 구사한 한문이 그것을 독자로 상정한 동시대 신라인을 철저히 겨냥한 서사체계라는 점에서 나는 저들을 한문을 수용하고 습득하고서 시간이 상당히 흘러 나온 결과물, 다시 말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 한문 수용 단계에서 몇 단계 수십 단계를 지난 단계의 발전형태라고 본다. 


바꿔야 한다. 관점을 바꾸고, 고정과 인습을 타파 훼멸해야 한다. 

<울진 봉평 신라비 앞에서>


울진 봉평비에 등장하는 노인을 부곡, 혹은 그 원류로 지적한 것은 아마 이 기사가 처음이 아닐까 한다. 이건 내 발견이라 자부하는데, 기자가 지랄 같은 것은 본인의 발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항상 객관화하는 형식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본격적으로 다룬 논문은 고려시대 부곡 전공인 국민대 박종기 선생에 의해 2년 뒤에 제출되었다. 나는 지금도 봉평비에 보이는 노인奴人이 부곡이거나, 혹은 그 전신이라 확신한다. 


내가 기억하기에 박종기 선생은 문제의 발표를 한국고대사학회 주최 학술대회에서 발표했는데, 이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있었다 하며, 그 논쟁은 시종 일관 부곡설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 발표는 나중에 한국고대사학회 기관지에 실렸다.  



<6세기대 신라의 노인(奴人)과 부곡(部曲)>

연합뉴스 | 입력 2004.03.04. 10:23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88년 발견된 경북 울진 봉평 신라비(524년 건립)에 이어 최근 경남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6세기대 신라목간에서 "노인"(奴人)이란 말이 거푸 확인됨으로써 그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재연될 전망이다.


이 "노인"(奴人)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로 압축된다. 첫째, 신라가 새로 정복한지역 주민들을 집단적, 강제적으로 재편한 노비나 노예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봉평비에 기초를 둔 이런 견해는 울진 지역이 원래는 고구려 영토였다는 것과 "노인"(奴人)이라는 말을 주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奴를 노비로 본 셈이다.


이런 견해가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노인"은 6부(六部)로 대표되는 신라 중앙에 대비되어 차별적으로 만든 특수 지방 촌락이라는 다른 견해도 있다. 경북대 이문기 교수가 대표적이다.


이기백 전 서강대 교수의 경우, 울진 봉평비 발견 직후에 발표한 논문에서 명확한 견해 표명은 유보한 채 "신라 영토에 편입되었기 때문에 "노인"이라고 표현된 것이 아닌가 싶다"라고 하면서도 "단순히 국왕에 대한 신민(臣民)의 뜻으로 사용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말한 바 있다.


다만 이들 견해 중 어느 쪽이나 "노인"이 예속적이며 차별적인 성격이 있다는 데는 일치한다. 奴라는 글자가 차별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데 "奴人"을 둘러싼 지금까지 논쟁이 기이한 것은 고려시대 전공자들 사이에서 치열한 "부곡"(部曲) 논쟁의 판박이라 할 만큼 닮아있다는 사실이다.


"부곡"은 신라시대(주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 군현제(郡縣制)에 집중적으로 확인되는 특수 행정 구역 중 하나로서 흔히 향(鄕)ㆍ소(所)와 나란히 거론된다.


즉, 신라와 고려는 전국을 군(郡)과 현(縣)으로 나누어 통치하는 "군현제"를 실시했는데 군ㆍ현 외에도 향ㆍ소ㆍ부곡 등의 특수 행정촌을 전국적으로 두었다.


국민대 박종기 교수는 이런 시스템을 "부곡제"(部曲制)라고 규정한다.


향ㆍ소 등을 포함한 부곡제와 관련해 이들 특수촌락(또는 이 지역 주민)이 다른 일반 군현(郡縣)에 비해 신분적 차별을 받은 노예적인 천민(賤民)집단이었는가, 아닌가를 둘러싼 논쟁이 특히 고려사 연구자들 사이에서 치열하다.


그동안 압도적 다수는 "향ㆍ소ㆍ부곡=천민촌"이었으나 최근에는 이들도 국가에 각종 공물을 부담하는 양민(良民)이었다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되고 있다.


부곡을 둘러싼 논쟁과 6세기대 신라에서 확인되는 노인(奴人)을 둘러싼 그것이 이처럼 흡사하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노인"(奴人)이 상대적으로 늦은 시기에 확인되는 부곡(部曲) 그 자체이거나, 그 원류일 가능성을 강하게 시사한다.


이와 관련해 주목을 요하는 대목이 봉평비의 "奴人"은 특정 개인이나 그런 사람들을 한데 묶어 지칭하는 집합명사가 아니라, 촌락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이 비문에는 "거벌모라(居伐牟羅)의 남미지(南彌只)는 본디 노인(奴人)이었다. 비록 노인(奴人)이었으나..."(居伐牟羅南彌只本是奴人雖是奴人)라고 하고 있다.


문맥으로 보면 "남미지(南彌只)=노인(奴人)"이 되므로 "노인"이 사람(의 일종)임이 분명하다면 남미지(南彌只)는 분명 사람 이름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뜻밖에도 이 비문 뒤에 가면 "남미지촌(南彌只村)"이라는 말이 등장하고 있다. 남미지는 사람 이름이 아니라 촌락 이름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봉평비에서 "노인"은 남미지라는 촌락 그 자체를 지칭하는 용어이지, 결코 사람이 아니며, 따라서 이 마을 성격을 규정하는 특수 용어임이 드러난다.


이런 현상에 대해 고려시대 부곡제 연구 전문가인 박종기 교수는 "노인이 촌락그 자체를 지칭한다면 부곡 그 자체이거나 그 원류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에서 확인되는 부곡(部曲)이란 용어는 개인에게 소속된 노비 등의 사람을 지칭하는 중국의 사례와는 달리 예외 없이 촌락을 의미하며, 거기에 거주하는 사람을 지칭할 때는 "부곡인"(部曲人)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이런 박 교수의 견해를 존중해 울진 봉평비문을 신라후기 혹은 고려시대에 익숙한 용법으로 바꾸면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거벌모라(居伐牟羅)의 남미지(南彌只)는 본디 부곡(部曲)이었다. 비록 부곡(部曲)이었으나..."(居伐牟羅南彌只本是部曲雖是部曲)" 6세기 신라시대 금석문의 노인(奴人)이 부곡이라면 그 성격 또한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노인(奴人)은 향(鄕)ㆍ소(所)ㆍ부곡(部曲)이 그런 것처럼 국가에 대해부담해야 할 특정 공물(貢物) 생산 등을 담당한 특수 행정촌락이었을 것이다.

taeshik@yna.co.kr(끝)


  1. 연건동거사 2018.08.06 10:05 신고

    九年己亥 百殘違誓與倭和通. 王巡下平穰. 而新羅遣使白王云. "倭人滿其國境 潰破城池 以奴客爲民 歸王請命." 太王恩慈 矜其忠誠 □遣使還告以□計.

    봉평비의 "노인"과 광개토왕비에 신라매금이 이야기 한 부분에 나오는 "노객"이 같은 존재일까요?
    어찌 보시는지요.

  2. 연건동거사 2018.08.06 10:07 신고

    위 구절의 "노객"을 신라매금이 자기 자신을 낮추어 부르는 것이라고 해석하던데 정말 그럴지 좀 의문입니다. 그런 해석 대로면 이미 신라매금은 왜군의 포로가 되어 복속된 상태여야 하는데 비문 내용을 보면 이때까지 신라는 왜군에게 밀릴 망정 항복한 상태는 아니었던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노객이란 신라매금 스스로를 낮춰 부른것이 아니라 제 3의 존재를 가리킨것인가 의심스럽기도 합니다.

  3. yisabu 2018.08.06 12:34 신고

    사람 이름을 딴 촌락 일수는 없는가요?

<봉평비>


敎란 무엇인가? 가르친다는 뜻이요 이에서 비롯하여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행정명령, 법원 결정문 따위 전반을 敎라고 했다. 이 경우 敎는 가르친다기 보다는 명령한다에 가깝다. 그래서 敎가 지닌 여러 가지 의미 중에는 사역과 강제를 의미하는 使의 뜻이 내포하는 일이 많다. 이것이 정치 행정무대로 전용해서는 왕이 내리는 명령 전반을 敎라고 지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敎를 내리는 주체가 누구냐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신라사, 특히 중고기 신라사에서는 왕권이 확립되었네 아니네 하는 문제가 빈발하고, 이를 주제로 하는 논문만 수십편 수백편에 이른다. 


무엇이 문제인가?


근자에 발견된 501년 무렵 포항 중성리비를 필두로 영일 냉수리비, 울진 봉평비 따위에서는 주로 이해관계를 다투는 쟁송 문제와 관련한 신라 조정의 판결문을 담았거니와, 조정에서 이를 심판한 결정문을 敎라는 이름으로써 판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한데 그 판시 주체를 보면 당시 신라왕이 아니라, 그 왕을 포함한 관료집단, 혹은 특정한 지위에 있던 어떤 신하로 표현되곤 한다. 간단히 말해 이 시대 신라의 문서, 특히 법률 행정 문건을 보면 


(무슨 왕, 무슨 갈문왕, 어떤 신하들)敎....


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니, 이를 발견한 신라사 연구자들이 요란을 떨기를


"봐라. 신라왕은 중고기만 해도 단독으로 敎를 내리지 못하고 다른 놈들과 함께 敎를 내리니 그 지위와 권력이 신하들에 견주어 초월적이 못했다"


고 오도방정을 뜰곤 한다. 이에서 비롯되어 요즘에는 부체제설이라는 실로 요망한 이론이 등장해 지증왕 당시에는 신라에 지증왕 뿐만 아니라 그외에도 6명의 왕이 동시에 병렬적으로 더 존재했다는 황당무계한 주장을 서슴지 않기에 이른다.  이렇게 육갑뜨는 무대가 작금 신라사다.  왕이 단독으로 敎를 내려야 그 시대 왕권이 확립되었다는 이 밑도끝도 없는 발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뿌리를 뽑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봉평비(부분)>


그렇다면 왜 이 시대 敎를 내리는 주체는 집합명사인가? 그 내용을 잘 봐라. 이런 敎가 등장하는 문건은 예외없이 쟁송 관련 문건이다. 재판 판결문 혹은 법령문이다. 이런 판결에 이르기까지에는 실무자에서 중간급 간부, 그리고 부서 장관, 그리고 그 위로 갈문왕과 왕에 이르는 '결재라인'이 있기 마련이다. 敎의 주체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이 결재라인에 위치하는 사람들이다. 


왕권이 확립되어야 한다는 지표를 오직 왕 혼자서 제 멋대로 해야 한다는 발상에 충실한 자들은 다른 놈들 다 제끼고 왕 혼자서 敎를 발표해야 그 시대 왕권이 확립된 징표로 본다. 왕이 얼마나 등신 같았으면 지 혼자서 敎도 못내리고 신하들과 함께 내리냐는 이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신라사회는 결코 왕 단독으로 敎의 주체로 내세우지 않았다. 결재 라인에 있는 모든 자를 敎의 주체로 표시했다. 이런 성향은 특히나 쟁송 문서에서 두드러진다. 


왜 이러했는가? 이를 묻지 않으니 저 허무맹랑한 설이 난무하기 마련이다.


쟁송은 첨예한 이해 다툼이다. 그 결과에 따라 한쪽은 모든 것을 얻지만 다른 한쪽은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다. 이런 첨예한 판결을 내리 주체로 王 혼자서 등장한다는 것은 왕을 그만한 반발의 위험에 노출한다는 뜻이다. 왕 혼자서 내린 결정은 그 모든 책임이 왕 한 사람에게 귀결하기 마련이다. 


<냉수리비>


어찌하여 왕이 이런 모든 책임을 혼자서 져야 하는가? 敎의 주체가 집합명사가 되는 것은 왕에게 집중하는 책임을 회피하는 전형의 방법이다. 반면 국가 유공자를 포상하는 따위의 일은 오로지 왕 혼자서 해야 한다. 왜? 백성에게 시혜를 베푸는 일은 왕이 독점해야 왕이 빛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왕권이다. 좋은 일은 왕 혼자서 해야 하며, 나쁜 일, 피를 묻히는 일은 책임을 분산해 되도록이면 실무진으로 전가해야 한다.


왕이 모든 敎를 독점하는 일. 그것은 칼을 부르는 행위다. 

신하들더러 날 죽여주십시오 하는 호출에 다름 아니다. 


이상은 2016년 6월 3일, 김태식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몇몇 오타와 일부 대목에서는 바로잡은 데가 있지만, 골격은 같다. 



나는 이런저런 곳에 문득문득 생각한 바를 글로써 싸지르는 스타일이라, 어찌하다가 페이스북에서 '상군서'로 검색어를 넣으니, 회원제로 운영하는 그 그룹 중 하나인 '문헌과문물(文獻與文物)' 2012년 2월 6일자에 올린 다음과 같은 내 포스팅이 걸린다.  

 

위조 방지 禁令과 울진 봉평신라비


상군서(商君書)권 제5 정분(定分)에 이르기를 


有敢剟定法令,損益一字以上,罪死不赦。


감히 법령을 삭제하거나 한 글자 이상을 빼거나 보태는 일이 있으면 사형에 처하고 사면하지 말아야 한다


고 하고, 같은 편에서


及入禁室視禁法令,及剟禁一字以上,罪皆死不赦。


(만약 법령집을 보관하는) 금실에 들어가 금지된 명령을 살펴보거나 한 글자 이상을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고 사면하지 말아야 한다


고 했다. 


이 정신이 가장 투철한 텍스트가 바로 봉평비다.


내가 늘상 지적하듯이 우리 고대사 사료가 없는 것이 아니라 중국사 일본사 모든 문헌이 한국사 사료임을 믿어 의심치 말아야 한다.



이에서 말하는 봉평비란 울진 봉평 신라비를 1988년 경북 울진군 죽변면 봉평2리에서 우연히 발견되어 지금은 그 인근에 세운 울진봉평신라비전시관에 전시 중인 상고시대 신라 비석을 말한다. 높이 204cm 변성화강암을 울뚱불퉁하니 대강 사면으로 만들되 앞면만 밀어서 글자를 새겼으니, 이에서는 10행 398글자가 확인되거니와, 이는 신라 법흥왕 11년(524)에 건립한 것이거니와, 학계 통설에 의하면 비문 핵심요지는 


모즉지 매금왕(법흥왕)을 비롯한 14명의 6부귀족들이 회의를 열어서 어떤 죄를 지은 '거벌모라(居伐牟羅) 남미지촌' 주민들을 처벌하고, 지방 몇몇 지배자들을 곤장 60대와 100대씩 때릴 것을 판결한 것이다. 


고 하거니와, 이는 오독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비석 마지막에는 "字三百九十八"이라는 문구가 보이거니와, 이중에서도 字라는 글자를 어처구니없이 子로 오독해서는 파천황을 방불하는 주장이 버젓이 행해졌으니, 이 글자는 첫째 글자 모양으로 봐도 그렇고, 둘째 문맥으로 봐도 字임이 너무나 명백하다. 


다시 말해, 398이라는 숫자는 이 비석에 새긴 총글자 '숫자'가 398자라는 뜻이다. 


문자를 제대로 판독하지 못했으니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셈이다. 


이 '글자수 398'이라는 문구가 왜 튀어나왔는지를 아무도 해명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이 비석은 발견 당시에도 잠깐 398이라는 숫자가 비석에 적힌 글자 수를 의미한다는 말이 있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장님 코끼리 코 우연히 만지듯, 그런 말이 잠깐 나왔다가는 쑥 들어가고 말았다. 


"字三百九十八"을 포함해서 이 비석에 적힌 총 글자수를 398이라고 밝힌 이유를 푸는 열쇠가 바로 《상군서》인 것이다. 저 《상군서》를 모르면, 저 답을 풀 수가 없다. 


하지만 신라사 전공자 중에 《상군서》를 읽은 이가 없다. 《상군서》가 무슨 똥개 이름인 줄 안다. 저 《상군서》 말대로 법률 조문은 한 글자만 바뀌어도 전체 맥락이 바뀌어 버리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하여 위조 방지를 천명했으니, 398이라는 숫자를 밝힌 첫째도, 둘째도 이유는 바로 법률 조문 위조방지였다. 


이건 법령집이니, 이걸 바꾸는 놈은 가만 안 두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우리는 저 봉평비가 특정한 사건에 대한 판결문이라는 학계 압도적인 해설 역시 잘못임을 알 수 있다. 저 봉평비는 법률 포고문이다. 개별 사건에 대한 판결문일 수가 없다. 













Trespassing the police line to encounter Silla Monument in Bongpyeong-ri, Uljin at the Museum of Silla Monument in Bongpyeong-ri, Uljin


Having been buried for a long time, this stele is much effaced and is thus difficult to decipher accurately, but it seems that it was erected in 524, the 11th year of the reign of King Beopheung(514-540) of Silla Kingdom(57 B.C.- A.D.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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