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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국원왕 이름이다. 사유라고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은 이름이 사유(斯由)<쇠(釗)라고도 했다>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국원왕(國原王)은 이름이 쇠(釗)인데 사유(斯由)라고도 하며 강상(岡上)이라 일컫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18년(472)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고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 수(須)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고국원왕(故國原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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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고국원왕 이름이다. 미천왕 태자로 즉위해 다스리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흐르는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삼국사기 권 제17(고구려본기 제5) 미천왕본기 : 15년(314)봄 정월에 왕자 사유(斯由)를 태자로 세웠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본기 즉위년 : 고국원왕(故國原王)<국강상왕(國罡上王)이라고도 한>은 이름이 사유(斯由)<쇠(釗)라고도 했다>다. 미천왕이 15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 봄에 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16대 국원왕(國原王)은 이름이 쇠(釗)인데 사유(斯由)라고도 하며 강상(岡上)이라 일컫기도 한다.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근초고왕본기 : 24년(369)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보병과 기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치양(雉壤)에 와서 진을 치고는 군사를 나누어 민가를 약탈하였다. 왕이 태자를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치양에 이르러 고구려 군사를 급히 쳐서 깨뜨리고 5천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는데, 그 사로잡은 적[虜獲]들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나누어주었다. 26년(371)에 고구려가 군사를 일으켜 왔다. 왕이 이를 듣고 패하(浿河) 가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이] 이르기를 기다려 급히 치니 고구려 군사가 패하였다. 겨울에 왕이 태자와 함께 정예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쳐들어가서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왕 사유(斯由)가 힘을 다해 싸워 막았으나 빗나간 화살[流矢]에 맞아 죽었다. 왕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났다.

삼국사기 권 제24(백제본기 제2) 근구수왕본기 즉위년 : 근구수왕(近仇首王)<수(須)라고도 한다>은 근초고왕 아들이다. 이에 앞서 고구려 국강왕(國岡王) 사유(斯由)가 친히 쳐들어 왔다. 근초고왕이 태자를 보내 이를 막게 하였다. [태자가] 반걸양(半乞壤)에 이르러 장차 싸우려 하였다. 고구려 사람 사기(斯紀)는 본래 백제 사람이었는데 잘못하여 왕이 쓰는 말[國馬]의 발굽을 상하게 하였다. [그는]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고구려로 도망하였다가 이때 돌아와 태자에게 말하였다. “저쪽 군사가 비록 많기는 하나 모두 숫자만을 채운 허위의 군사[疑兵]일 뿐입니다.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오직 붉은 깃발의 부대뿐입니다. 만일 먼저 이를 깨뜨리면 그 나머지는 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 태자가 그 말을 좇아 나아가 쳐서 크게 이기고는 도망쳐 달아나는 자들을 추격하여 수곡성(水谷城)의 서북에 이르렀다. 장군 막고해(莫古解)가 간하여 말하였다. “일찍이 도가(道家)의 말을 들으니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얻은 바도 많은데 어찌 기필코 많은 것을 구합니까?” 태자가 그 말을 옳게 여겨 추격하기를 중지하고는 이에 돌을 쌓아 표지(標識)를 만들었다. [태자는] 그 위에 올라가 좌우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지금 이후에 누가 다시 여기에 이를 수 있을까?” 하였다. 그 곳에는 말발굽 같이 틈이 생긴 바위가 있는 데 사람들이 지금[고려]까지도 ‘태자의 말발자국’이라고 부른다.

☞고국원왕(故國原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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