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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進三國史記表金富軾

臣某言古之列國亦各置史官以記事故孟子曰晉之乘楚之擣扤魯之春秋一也惟此海東三國歷年長久宜其事實著在方策乃命老臣俾之編集自顧缺爾不知所爲中謝伏惟聖上陛下性唐堯之文思體夏禹之勤儉宵旰餘閒博覽前古以謂今之學士大夫其於五經諸子之書秦漢歷代之史或有淹通而詳說之者至於吾邦之事却茫然不知其始末甚可歎也况惟新羅氏高句麗氏百濟氏開基鼎峙能以禮通於中國故范曄漢書宋祁唐書皆有列傳而詳內略外不以具載又其古記文字蕪拙事迹闕亡是以君后之善惡臣子之忠邪邦業之安危人民之理亂皆不得發露以垂勸戒宜得三長之才克成一家之史貽之萬世炳若日星如臣者本匪長才又無奧識洎至遟暮日益昏蒙讀書雖勤掩卷卽忘操筆無力臨紙難下臣之學術蹇淺如此而前言往事幽昧如彼是故疲精竭力僅得成編訖無可觀祗自媿耳伏望聖上陛下諒狂簡之裁赦妄作之罪雖不足藏之名山庶無使墁之醬瓿區區妄意天日照臨(出自東文選卷第四十四表箋)

 

<삼국사기 신라 법흥왕본기>


삼국사기를 올리는 글 

김부식 

신 부식이 아룁니다. 옛적 여러 나라에서도 각기 사관(史官)을 두어 일을 기록했으니, 그런 까닭에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의 승()과 초()의 도올(檮杌)과 노()의 춘추(春秋)는 한가지다라 했습니다. 바다 동쪽 세 나라가 지난 세월이 장구하니 마땅히 그 일들을 사책에 실어야 한다며, 늙은 신하에게 명하시어 그것을 엮게 하셨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어찌할 바를 모르겠사옵니다. 감히 말씀드립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성상 폐하께서는 당요(唐堯)의 문사(文思)를 타고나시고, 하우(夏禹)의 근검을 체득하시어, 밤낮 여가에 앞선 옛날을 널리 보시고는 이르시기를 오늘날 학사 대부가 오경(五經)과 제자(諸子) 같은 책과 진()()이 지난 내력에는 더러 두루 통하고 자세히 설명하는 이가 있으나 우리나라 일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아득하여 그 시종을 알지 못하니 매우 통탄할 만하다. 하물며 신라고구려백제는 나라를 세워 솥발처럼 맞서며 능히 예로써 중국과 통하니, 범엽(范曄)한서(漢書)나 송기(宋祁)당서(唐書)에 모두 그들의 열전이 있기는 하나, 국내 일은 자상하게 다루고 국외의 일은 허술하게 만들었으므로 갖추어 싣지 아니한데다, 더구나 고기(古記)는 문자가 너무도 졸렬하고 사적도 빠진 것이 많은 까닭에 군왕(君王)의 옳고그름과 신하들의 충성됨과 삿됨과 국가의 편안함과 위기에 처함과 인민의 다스림과 혼란스러움을 모두 들추어내어 교훈으로 삼을 수 없으니, 마땅히 세 가지 능력을 갖춘 인재를 구하여 일가(一家)의 역사를 이루어 만세에 물려주어, 해와 별 같이 빛나게 해야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신 같은 자는 본디 삼장의 재주가 아니옵고 또 깊은 학식도 없으며, 늘그막에 이르러서는 날로 더욱 몽매하여 글 읽기는 비록 부지런히 하나 책을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고, 붓대를 잡으면 힘이 없어 종이에 대고 써내려가기가 힘듭니다. 신은 학술이 천박하기가 이와 같고, 예전 말과 지난 일은 깜깜함이 저와 같으니, 이런 까닭에 정력을 소모하고 힘을 다하여 겨우 엮기는 했지만, 별로 보잘것없어 스스로 부끄러울 따름이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상폐하께서 뜻만 원대한 재주를 살피시고 함부로 만든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면, 비록 이름난 산에 간직할 만하지는 못하겠지만, 아마도 장독대 덮개가 되는 일을 없을 듯하니, 신의 이런 뜻을 하늘도 훤히 보고 있습니다


方策 : 即方冊簡冊典籍後亦指史冊。《禮記·中庸》:哀公 問政子曰文 武 之政布在方策其人存則其政舉其人亡則其政息’” 鄭玄注版也簡也孔穎達 疏言 文王 武王 爲政之道皆布列在於方牘簡策陸德明 釋文作南朝 宋 顏延之 三月三日曲水詩序》:夫方策既載皇王之跡已殊鍾石畢陳舞詠之情不一宋書·後廢帝傳》:方筴所不書振古所未聞明 宋濂恭題禦制文集後》:仁民愛物之心隨感而見布於方策章炳麟 文學總略》:是故繩線聯貫謂之經簿書記事謂之專比竹成冊謂之侖各從其質以爲之名亦猶古言方策漢 言尺牘今言劄記參閱 清 李惇 群經識小·方策》。


中謝 : 古代臣子上謝表例有誠惶誠恐頓首死罪一類的套語表示謙恭後人編印文集往往從略而旁注中謝二字。《文選·羊祜》:夙夜戰栗以榮受憂中謝李善 注中謝言臣誠惶誠恐頓首死罪宋 周密 齊東野語·中謝中賀》:今臣僚上表所稱誠惶誠恐及誠歡誠喜頓首稽首者謂之中謝中賀自 唐 以來其體如此蓋臣某以下略敍數語便入此句然後敷陳其詳


狂簡志向高遠而處事疏闊。《論語·公冶長》:吾黨之小子狂簡斐然成章不知所以裁之朱熹 集注狂簡志大而略於事也晉 葛洪 抱樸子·吳失》:筆不狂簡而受駁議之榮低眉垂翼而充奏劾之選宋 司馬光 又和並寄楊樂道》:狂簡昧大體所依官長賢清 孔尚任 桃花扇·偵戲》:小子翩翩皆狂簡結黨欺名宦風波動幾番

 

區區職微小自稱的謙詞憨愚死心眼等左傳·襄公十七年》:宋國區區而有詛有祝禍之本也


妄意


天日 : 讀音tiān rì漢語詞語指天空和太陽喻指光明。《三國志·吳志·胡綜傳》:款心赤實天日是鑒唐杜牧 阿房宮賦》:覆壓三百餘裏隔離天日清 陳夢雷 丁巳秋道山募建普度疏》:雲霓在望海澨歡騰天日重光神人喜溢杜鵬程 保衛延安第三章部隊從遮蓋天日的森林中日夜行進喻天理或光明。《老殘遊記續集遺稿第二回怎麼外官這們利害咱們在京裏看禦史們的摺子總覺言過其實若像這樣還有天日嗎巴金 雪峰》:他們妄想用這個決定讓我一輩子見不了天日喻帝王。《宋書·武帝紀中》:鎮北將軍臣 宗之 青州 刺史臣 敬宣 並是 裕 所深忌憚欲以次除蕩然後傾移天日於事可易

(주석은 정리해 가는 중이다. 번역 역시 하나씩 바로잡고, 고치는 중이다)  

정절 탐하는 개로왕에게 월경 핑계 대고 도망쳐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04 01:44 수정 2017.06.04 16:23 | 534호 23면

  

서기 475년. 이 해는 백제 제21대 개로왕(蓋然性鹵王) 재위 21년째요, 고구려는 100세 장수를 누린 장수왕 재위 63년째가 되는 해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본기를 보면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들이쳐 그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몰하고 백제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아 돌아왔다”고 돼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까닭에 왕족은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부여경이란 개로왕의 이름이다. 500년 사직이 거의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백제는 신라의 도움을 얻어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충남 공주 부근 웅진에 터를 새로 잡았다.


개로왕, 남편에게 누명 씌워 추방

도미 부인 불러 욕보이려던 순간

“온 몸 더러우니 다른 날 …” 모면

남편과 극적 상봉, 고구려로 도망


많은 죽음이 그렇듯이 한성백제의 최후 또한 비참하기만 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 그 처참한 광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군이 한성을 네 갈래로 나누어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성문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결국 지금의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개로왕, 고구려군에 잡혀 참수

그런데 백제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적국 고구려군 수뇌부에는 뜻밖에도 백제에서 도망친 두 사람이 있었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개로왕은 참수 직전 이들에게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는다. 그것을 개로왕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제1등 관직)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의) 북쪽 성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자 성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지니 임금이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임금 얼굴에다가 세 번 침을 뱉고는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개로왕에게 치욕을 가한 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 2음절 이상으로 된 성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본래 백제에서 어떤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쳐야 했는지 언급이 없다. 한데 그렇게 도망쳐 고구려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이 개로왕을 사로잡은 뒤 침을 뱉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따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로서는 백제에서 대단히 억울한 일을, 그것도 개로왕에게서 직접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깊게 한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한때의 주군을 그리 대했겠는가.


같은 개로왕 시대, 재증·고이와 비슷한 운명을 걸어온 부부가 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구려로 도망친 일은 같으나, 이들은 복수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점이 다르다. 『삼국사기』에 열전 형태로 그 행적이 정리된 그 유명한 도미(都彌) 부부가 그들이다. 이 열전은 도미라는 남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주인공은 그 부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도미는 개로왕 시대를 산 평범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에겐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있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미모가 그만 비극의 씨앗이되고 말았다. 소문이 퍼져 나가 마침내 왕이 아내를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개로왕은 단순히 도미 부인의 아름다움을 탐한데 그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특유의 ‘여성 정절 파괴 본능’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왕은 도미부인에 앞서 도미를 먼저 불러 이렇게 말한다. “흔히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제아무리 정절을 외치지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왕이 부르는데 정절을 바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투였다. 개로왕은 그 정절을 거꾸러뜨리고 싶은 심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이런 개로왕이지만 막상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달이 난 그는 남편인 도미에게 죄를 덮어씌워 두 눈을 뽑아 버리고는 강배에 실어 강제 추방해 버렸다. 그러고는 기어이 부인을 불러다가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그러나 지혜로웠던 도미 부인은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도미 열전에 따르면 도미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는 부지할 수 없는데다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몸을 씻고 오겠습니다.”


이 말을 곧이 믿은 왕은 그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미 부인은 그 길로 배를 타고 강물로 탈출해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풀뿌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장님이 된 남편과 극적으로 재상봉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는 배를 타고 고구려 땅 산산(䔉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구차하게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열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엔 월경 중인 여성의 몸은 더럽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온몸이 더럽다’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혼신오예(渾身汚穢)’다. 오예란 간단히 말해 오물(汚物)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소설 중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는데, 예덕 선생이란 수도 한양에서 인분을 푸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극화한 표현이다. ‘예덕’은 글자 그대로는 ‘똥의 덕’이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떠오른다. 첫째, 월경을 지금 흔히 쓰는 용어 그대로 ‘월경(月經)’이라 했다. 둘째, 그러한 월경이 혼신오예라 해서 더러운 일로 인식됐다는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그대로 전재됐지만 용어에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저 도미 열전을 그대로 베끼면서도 ‘월경’ 대신에 ‘월사(月事)’라는 말을 썼다. 이러한 용어 변경이 시대별 단순한 선호도 때문인지, 혹은 ‘월경’에 비해 ‘월사’라는 말이 덜 직설적이었다고 생각했음인지는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또한 월경 중인 몸은 더러우며, 그런 까닭에 그런 여자는 남자를 모시지 못한다는 스토리는 고대 일본 정사인 『일본서기』에도 보인다. 이곳 제7권 경행천황(景行天皇) 4년 봄 2월 갑자일(甲子日) 조에는 미농(美農)이라는 곳으로 행차한 천황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추측되는 팔판입언(八坂入彦)이라는 황자(皇子)의 첫째 딸인 팔판입원(八坂入媛)을 만나 비로 삼게 된 사연이 흥미롭게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천황은 입원(入媛)의 동생인 제원(弟媛)을 먼저 만나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장막까지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제원은 막상 다음과 같은 말로 천황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다.


“첩은 성격이 교접(交接)의 도를 바라지 않으니, 지금은 황명(皇命)의 위엄에 못 이겨 잠시 장막 안으로 들었습니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모습 또한 더럽고 누추해 오래도록 후궁에서 모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첩의 언니 팔판입원은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이 정결하니, 후궁에 넣게 해 주십시오.”


『일본서기』 형자예루도 월경의 은유


이에 마침내 그 언니가 천황비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이 추하고 더럽다는 말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형자예루(形姿穢陋)’다. ‘형자’란 몰골이란 뜻인데 그것이 예루하다 했으니, 도미 열전에서 본 ‘오예(汚穢)’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형자예루’라는 말은 ‘월경 중’이라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 의 제1편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2016년 6월 26일자)편에서 다룬 바 있다. 김유신이 처음에는 큰누이 보희를 김춘추와 짝지어 주려 했으나 그가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작은누이 문희를 대타로 삼았다는 내용이었고, 이 대타 작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김춘추의 배필이 될 뻔한, 나아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꺼번에 날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를 짐작케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 전에 보인다.


“(춘추와 문희가) 포사(鮑祀·포석정)에서 길례(吉禮·결혼식)를 치렀다. 얼마 안 있어 (김춘추 조강지처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풍월주 부인)이 되어 아들(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일을 후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았다. (춘추)공이 이에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원성왕, 경쟁자가 폭우에 발 묶인 틈타 대권 차지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5.07 02:44 | 530호 23면 

  

대권(大權)은 우연의 소산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혹은 하늘의 의지일까? 이런 물음에 전근대 동아시아 이데올로그들은 언제나 천명(天命)을 거론했다. 실제로 천명이 작동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론 그러했다. 하지만 추잡한 권력투쟁을 천명이란 이름을 빌려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덕왕 후계 언급 없이 타계하자

김경신·김주원 치열한 왕권 경쟁

김주원, 큰 비 내려 건너 오지 못해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 왕위 계승

김주원을 명주군의 왕에 책봉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과 그에 따른 세계 제국 당(唐)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절대 번영을 구가했지만, 소나무가 언제나 푸를 수는 없었다. 그 피로감이 극에 달하자 체제가 흔들리는 징후를 곳곳에서 보였다. 마침내 100년 정도가 흐르자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면서 낯선 장면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왕위 계승전쟁이 그것이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 역시 이 와중에 힘으로 대권을 쟁취한 인물이다.


그를 일컬어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이름은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왕비는 김씨이니 각간(角干·신라시대 최고 관위) 신술(神述)의 딸이다”고 했다. 이어 그가 대권을 쥐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어 간다.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년)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날뛰니 선덕(宣德)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의 측근 중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하니 경신이 그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상대등으로 삼았다.”


36대 혜공왕은 신라사의 마지막 평화기라 일컬을 시대를 구가한 경덕왕의 아들로 즉위했지만, 재위기간 내내 평안한 해가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경주 일대를 대지진이 여러 차례 덮쳐 막대한 피해를 내니 더욱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은 언제나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혹은 그것을 조장하면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왕은 유약한 데다 환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재위 16년(780)에 접어들어 정월에는 누런 안개가 끼고, 2월에는 흙비가 내리더니, 마침내 이찬(伊飡·신라 17등관계 중 둘째) 김지정(金志貞)이라는 고위 관료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한 채 왕을 공격했다.


반란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


이 반란은 여름 4월에야 끝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해당하는 상대등(上大等·국무총리)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임금과 왕비는 살해된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이제 차기 대권이 누구로 가느냐가 남았다. 당연히 힘을 쥔 이는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양상과 김경신 일당이었다. 이들은 제3자를 세우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 김양상이 먼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죽은 뒤 선덕(宣德)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김양상이 즉위할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직전 직위가 원로대신의 대표자에 해당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대등이었던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상당한 고령이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장기간 재위하면서 안정된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었다. 더구나 권력을 다른 쿠데타 주도 세력들과 사실상 분점한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정권기반은 취약했던 듯하다.


예상대로 그는 재위 6년 만 인 785년 봄에 타계한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유언이 있지만, 후계자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다. 이는 곧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장한 이가 김경신과 김주원(金周元)이었다. 둘은 선덕왕 말년에 이르러 치열한 왕권투쟁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마침내 김경신이 승리하니 이가 곧 원성왕이다.


이 권력투쟁이 처음부터 김경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김주원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원성왕본기 기록이 증언한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논의한 끝에 왕의 조카뻘인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때 주원은 서울(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라는 큰 자리는 본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앞선 임금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가 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케 했다. 이윽고 비가 그치니 경성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어쩐지 개운찮은 조작의 냄새가 난다. 폭우가 조작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빌미로 천명이란 명분을 앞세워 정권이 김경신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한 구절이란 의심이 가시지 않는 대목이다. 알천이란 경주 분지를 관통하는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중 하나다. 북쪽을 관통한다 해서 북천(北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상류를 막은 덕동댐과 보문호 때문에 평소 수량은 ‘도랑’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신라시대에는 홍수 피해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선덕왕 김양상이 죽자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하고, 이는 김주원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유감스럽게도 신라왕궁 월성은 알천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문헌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은 월성 가까운 곳에 근거지가 있었던 듯하다. 결국 김주원은 폭우로 불어난 알천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좀 더 상세한 일화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에 전해 온다. 이에 따르면 선덕왕이 죽을 무렵 김주원은 이찬이자 상재로, 각간인 김경신보다 직위도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김경신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그가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라는 사찰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한 점쟁이는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고 해몽을 했다.


하지만 이 꿈을 들은 아찬(阿飡신라 17등 관제 중 여섯째) 여삼(餘三)이라는 사람이 전연 다른 해석을 내놨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이 해몽을 들은 김경신이 “내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라고 반문하니, 여산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 지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고 하니 이에 따랐다고 한다. 북천신은 말할 것도 없이 북천인 알천을 지배하는 신이다. 이런 북천신에게 기도했더니, 북천이 홍수로 넘쳐 라이벌인 김주원을 제치고 김경신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주원, 오늘날 강릉 김씨 시조


그렇다면 김경신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어찌 되었을까. 또 왕이 된 김경신은 김주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으므로, 보통은 경쟁자를 각종 명목을 달아 처단 멸족해야 한다. 하지만 김경신은 김주원을 그리 대접하지 않았다. 아니,그리할 힘이 없었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할 땐 서로가 사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정치권에서 유행하는 협치(協治)나 연정(聯政)쯤에 해당하는 공생의 길을 선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인물 조에는 김주원이 왕위에서 밀려난 후 “화를 당할까 두려워해서 명주(지금의 강릉 일대)로 물러나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뒤에 (원성왕이)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책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근을어·울진 등의 고을을 떼서 식읍(食邑·신하에게 내린 토지)으로 삼게 했다. 자손이 이로 인해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강릉 김씨의 탄생 배경이다.


이렇게 해서 명주는 그 아들 김종기(金宗基), 손자 김정여(金貞茹), 증손 김양(金陽)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김주원 후손의 작은 왕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김주원은 강릉을 선택했을까? 그곳이 아마 그의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곳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던 데다 신라로서는 북방이었던 까닭에 원성왕 김경신으로서도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해로울 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12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협치의 도량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막은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신라 왕실 뒤흔든 비처왕비 간통 스캔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2.05 05:35 수정 2017.02.05 06:40 | 517호 23면


조선 초기에 완성된 편년체 역사서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해당 연월(年月)을 보면 안정복이 말한 사건과 분명히 대응되는 사건이 보인다. 한데 자세히 살피면 이는 『삼국유사』기이(紀異)편에 ‘사금갑(射琴匣)’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것과 같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사냥 갔던 비처왕 까마귀 말 듣고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상자에 화살

사랑 나누던 왕비 선혜·승려 적발

승려는 죽이고 왕비는 폐위 시켜


사금갑은 신라를 배경으로 한 설화성 짙은 이야기다. 간단히 골자를 추리면 비처왕(毗處)이라고도 하는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 때, 궁주(宮主)가 왕궁 내부에 설치한 불당에서 일하는 승려인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몰래 정을 통하다가 함께 복주(伏誅·목 베어 죽임을 당함)되었다는 내용이다. 사금갑은 ‘거문고 박스를 쏘라’라는 뜻이다.


이에 의하면 소지왕은 이해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井)이라는 곳에 행차했다가 까마귀가 하는 말을 따라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보관 상자를 향해 화살을 쏘았더니, 그 안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던 궁주와 승려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죽음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찹쌀로 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소위 약밥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정월 대보름날 약밥의 유래 설명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도 이 같은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다만 간통을 하다 목베어 죽음을 당한 왕실 여인을 『삼국유사』에서는 ‘궁주(宮主)’라 했지만,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왕비(王妃)’라고 표기한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궁주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고려시대에 널리 쓰이다가 조선 초기에 와서 사라지기 시작한 궁주는 처음에는 후궁을 지칭하다가 후기에 가면 왕비를 지칭하게 된다. 따라서 사금갑 이야기에 등장하는 궁주는 소지왕의 후궁일 수도 있고, 왕비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실체가 무엇이건 『삼국유사』와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은 내전분수승과 간통 사건을 일으킨 여인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데 이보다 훨씬 뒤에 나온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은 대담하게 그가 바로 소지왕비인 선혜라고 선언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소지왕비가 누구이며, 또 선혜는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즉위년조를 보면 왕은 “자비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는 선혜부인(善兮夫人)으로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이다”고 돼 있다. 소지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王曆)편에서는 비처마립간(소지마립간)이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사흔 각간의 딸이다. 기미년에 왕위에 올라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왕비는 기보 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다”고만 했을 뿐,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왕의 장인은 갈문왕 기보라고 해서, 이벌찬 내숙이라고 밝힌 『삼국사기』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처왕비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동일한 인물을 지칭했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벌찬 내숙과 기보 갈문왕은 동일인이 된다. 다시 말해 이벌찬 내숙이 죽고 난 뒤에 갈문왕으로 추봉되고 이름도 기보로 바뀌었다는 얘긴데, 여러모로 봐도 비합리적이다.


다음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비처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일 수도 있고, 이름은 알 수 없는 기보 갈문왕의 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라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따라서 한 남자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면 이는 시기를 달리하는 부인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누가 먼저이고, 나중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비처왕에게는 선혜와 기보 갈문왕의 딸이라는 부인 두 명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혜가 언제 비처왕비로 간택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신라 소지왕본기 8년(486) 조에는 “2월에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삼아 나라 정치에 참여케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내숙은 선혜의 아버지다. 신라 관위 체계 중 제1위인 이벌찬에 내숙이 임명됐다는 건, 딸 선혜가 왕비로 간택됐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숙은 왕의 장인이자 왕비의 아버지라는 혈연관계를 발판으로 이벌찬까지 오른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혜가 왕비로 간택되는 소지왕 재위 8년 이전까지 소지왕비는 누구였는가. 그가 바로 『삼국유사』가 말하는 기보 갈문왕의 딸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선혜는 왕비에 간택되고 나서 불과 2년 뒤인 소지왕 10년(488) 정월 15일에 발생한 소위 사금갑 사건으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셈이 된다.


사금갑 사건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 『화랑세기』엔 여럿 보인다. 비처왕비 선혜가 폐위된 사실이 곳곳에 나오는데, 이를 종합하면 선혜 황후는 묘심랑(妙心郞)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왕비가 간통 사건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대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꽃미남 묘심과 왕비, 딸까지 낳아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 전기는 설화랑의 어머니인 금진(金珍)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금진은 아버지가 위화랑(魏花郞)이고, 어머니는 오도 낭주(吾道娘主)다. 오도는 어머니가 선혜 황후이고, 아버지는 묘심랑이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묘심랑은 “천주공(天柱公) 아들인데 얼굴이 잘 생기고 색사(色事)를 잘 해서 (비처왕의) 후궁들과 사사로이 정을 통한 일이 많았다. (선혜 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으로써 약속하기를 삼생(三生)…. 묘심이 주살됐다”고 한다. 중간에 텍스트가 뭉개져 나가 아쉽기만 하지만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묘심랑은 요즘 말하는 소위 ‘얼짱’ 청년으로, 여자들을 후리고 놀아났다. 선혜 또한 그에게 반했다. 둘이 만난 곳을 절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묘심랑은 아마도 절의 스님이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절에서 몰래 왕비를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이다. 한데 이 사건이 그만 발각되어 묘심랑은 목 베임을 당하고, 선혜는 왕비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만다. 둘 사이에는 오도라는 딸까지 있었다고 한다.


묘심이 사찰 혹은 승려와 관계있는 인물이었다는 다른 증거는 『화랑세기』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묘심사(妙心事)’와 ‘천주사(天柱事)’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둘은 지칭하는 대상이 같다. 똑같은 사건을 문맥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묘심이라는 남자와 관련되는 사건’이라 하고, 다른 곳에서는 ‘천주사(天柱寺)라는 사찰을 무대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묘사했을 뿐이다. 사금갑 관련 기록을 참조해보면 천주사는 신라의 궁궐 안에 있던 불당이다.


이런 『화랑세기』의 내용을 종합해보면,사금갑 이야기를 비로소 역사적 사건으로 완전하게 풀 수 있게 된다. 즉, 간통 사건이 발생한 주된 무대는 천주사라는 궁궐 내 사원이며, 왕비의 간통 상대는 그곳 승려인 묘심이라는 남자였고, 간통이 발각됨으로써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왕비는 폐위됐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신라 왕실을 뒤흔든 간통 스캔들이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후대에 ‘사금갑’이라는 설화성 짙은 이야기로 포장돼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김유신, 조카이자 사위인 반굴 제물 삼아 계백 이기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1.08 00:44 | 513호 18면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이 표제로 내세운 인물 중 김영윤(金令胤)의 전기는 실은 그를 중심으로 그의 아버지 김반굴(金盤屈),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 김흠춘(金欽春)에 이르는 3대에 걸친 가문 이야기다. 비록 짧은 분량에 지나지 않으나, 반굴과 흠춘에 대한 생애의 몇 가지 중요한 단락을 보충한다. 김영윤에 앞서 등장하는 반굴과 흠춘의 행적은 다음과 같다.

  

“김영윤은 사량(沙梁) 사람으로 급찬 반굴(盤屈)의 아들이다. 할아버지인 각간(角干) 흠춘(흠순·欽純이라고도 한다)은 진평왕(眞平王) 때 화랑이 됐는데 인덕이 깊고 신의가 두터워 뭇 사람의 마음을 얻었다. 장성하자 문무대왕이 발탁해 재상으로 삼았는데,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고 백성을 너그럽게 대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어진 재상이라고 칭송했다.”

  

김흠춘은 태종무열왕 7년(660) 가을 7월, 신라가 5만 대병을 동원해 백제를 정벌할 때에는 총사령관 김유신을 수행하는 부사령관 중 한 명으로 참전했다. 백제 영역에 들어간 신라군은 같은 달 9일, 황산 벌판에 이르러 계백(階伯)이 이끄는 이른바 백제 오천 결사대의 거센 도전에 직면했다. 신라군은 백제군과 네 번을 싸웠지만 모두 졌다. 이렇게 해서는 백제를 멸망시키는 꿈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신라군 진영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를 타개할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김유신은 김흠춘을 비롯한 수뇌부를 소집해 긴급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군사들을 격발케 하자는 전법을 채택했다. 거듭된 패배에 사기를 잃은 군사들을 분연히 떨쳐 일어나게 한다는 방침을 정한 것이다. 소위 가미가제식 자폭이었다. 용맹한 군사를 뽑아 적진에 뛰어들게 해서 혼자 싸우다 죽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군사들의 분노를 유발키로 한 것이다. 참으로 섬뜩한 작전이었다.


[아들 출전했더라면 내보냈을 것]

문제는 누구를 뽑을 것인가였다. 김유신은 극약처방을 생각했다. 효과를 극대화하려면 솔선수범해야 했다. 그러려면 자신과 가장 가까운 피붙이여야 했다. 만약 김유신의 아들이 출전했더라면, 서슴지 않고 아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럴 만큼 김유신은 냉혹한 사령관이었다. 국가를 위해서는 아들조차 희생물로 바칠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미 66세의 노장 김유신에게 장성한 아들이라고는 오직 김삼광(金三光) 한 명이 있을 뿐이었다. 한데 삼광은 이때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 진영에서 그들을 돕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피붙이는 조카밖에 없었다. 그가 바로 반굴이었다. 부사령관 김흠춘은 김유신의 친동생이다. 김유신은 반굴을 희생하기로 한 것이다. 아무리 형의 결정이라 해도, 자기 자식을 희생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장면을 김영윤 열전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흠춘이 아들 반굴을 불러 말하기를 ‘신하가 되어서는 충성이 으뜸이요 자식의 도리로는 효성이 제일이니, 위급함을 보면 목숨을 바쳐야 충과 효가 모두 온전해진다’고 하니, 반굴이 ‘알겠습니다’라고 하고는 곧 적진으로 들어가 힘껏 싸우다가 죽었다.”

  

영화 ‘황산벌’에서는 이 장면을 약간 코믹하게 그렸다. 그러나 실제 전투에선 참혹하기 짝이 없었을 것이다. 조카를 희생시킨 김유신은 또다른 부사령관으로서 좌장군인 김품일(金品日)의 아들 관장(官狀)도 성전의 제물로 삼기로 한다. 기록에 따라 관창(官昌)이라고도 하는 이 아들은 당시 겨우 열여섯 살 애송이었다.

  

한데 품일은 아들을 앞에 세우고는 여러 장수가 일부러 지켜보는 가운데 “내 아들은 나이가 겨우 열여섯이지만 의지와 기개가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삼군의 모범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고 하고는 홀로 적진에 뛰어들게 했다고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는 적고 있다. 하지만 계백이 애송이 관창을 다시 신라군영으로 살려 보내니, 이를 치욕으로 여긴 관창은 우물물을 떠서 마시고는 다시금 적진에 뛰어들어 맹렬히 싸우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싸늘한 시신이 되어 돌아온 아들을 본 김품일은 “내 아이 얼굴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구나. 임금을 위해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스런 일이로다”고 말했다고 한다.

  

무열왕 본기에 이르기를 “삼군이 이를 보고는 분기가 북받쳐올라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백제의 무리를 크게 쳐부수니 계백은 그곳에서 죽었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을 사로잡았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격발의 전법이다. 볼수록 섬뜩한 장면이다.

  

이 황산벌 전투는 한국사의 가장 비장한 장면으로 꼽힐 만하다. 이 전투의 결과 백제 700년 사직이 문을 닫고 말았기 때문이다. 김흠춘은 형과 마찬가지로 무수한 전쟁에 참전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는 김수로에게서 시작하는 금관가야 직계 왕족 후손이다. 이 가문이 정착한 곳은 당시 신라 서울 금성(金城)을 구성하는 여섯 개 부 중에서도 사량부(沙梁部)다. 김흠춘과 김유신 할아버지 김무력(金武力)은 진흥왕 시대 금석문에도 등장하거니와, 거주지가 같은 사량부다. 그러니 김유신 가문은 김무력 이래 줄곧 사량부가 터전이었다.

  

김흠춘을 일러 김영윤 열전에는 “진평왕때 화랑이 되었다”고만 돼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엔 김흠춘이 역대 화랑 교단의 우두머리인 32명의 풍월주(風月主) 중 당당히 제19대 풍월주로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여기서 잠깐 야전 사령관으로서의 김유신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살펴보자. 『삼국사기』열전 제7에 나오는 열기(裂起) 전기에 해답이 있다. 이렇다 할 내세울 가문 배경이 없는 열기는 문무왕 원년(661)에 당이 고구려 정벌을 위해 평양성을 포위하자 대각간 김유신을 수행해 쌀 4000섬과 조 2만2255 섬을 당군에 수송하는 작전에 징발됐다. 하지만 마침 눈보라 몰아치는 겨울이라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고 고구려군까지 막아서자 행로가 막혔다. 우선 신라군은 이런 사정을 평양성 공격에 나선 당군 진영에 알릴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을 자청하고 나선 이가 보기감(步騎監)으로 참전한 열기였다. 이에 김유신은 열기와 군사(軍師) 구근(仇近)을 비롯한 열다섯 사람을 특공대로 조직해 당군 진영에 파견했다. 열기는 작전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이틀 만에 다시 신라군 본진으로 돌아왔다.

  

열기 열전은 “유신이 그들(열기와 구근)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 벼슬을 주었다”고 적고 있다. 직권으로 관위를 승진시킨 것이다. 한데 이것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는지 경주로 복귀한 김유신은 왕에게 “신이 편의에 따라 급찬 직위를 허락했지만 공로에 비하면 미흡하오니 사찬 벼슬을 더해 주시기 바라나이다”고 주청한다. 이에 문무왕은 “사찬이라는 관직은 너무 과분하지 않겠소”라고 하니, 유신이 말하기를 “벼슬과 녹봉은 공공의 그릇으로 공로에 보답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이니 어찌 과분하다 하겠습니까”고 하고는 기어이 윤허를 받아내고 만다. 이를 볼 때 김유신은 냉혹한 군인이지만 노력에 대한 보상을 할 줄 아는 사령관이었다.


[반굴의 아들 영광도 전장서 장렬히 전사]

다시 반굴로 돌아가보자. 『화랑세기』를 보면 반굴은 김유신의 조카이자 사위이기도 했다. 관창에 앞서 왜 반굴이 나서야만 했는지, 그 비밀이 마침내 『화랑세기』를 통해 풀린다. 19세 풍월주 흠순공(欽純公) 전의 한 대목이다.

  

“공의 셋째 아들만이 홀로 (염장공의 딸들을) 버리고 유신공의 딸 영광(令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영윤(令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반굴공(盤屈公)이다. 부자가 마침내 전쟁에서 죽었으니 아름다운 이름이 백세에 남으리라.”

  

이것이다. 황산벌 전투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5만 신라군 중에서 반굴은 김유신에게 가장 가까운 피붙이였다. 조카이자 사위를 희생시킴으로써 그는 패배감과 위기감에 젖은 신라군을 향해 “너희들은”이라는 무언의 시위를 벌인 것이다. 근친혼이 흔하던 신라에서 사촌끼리의 혼인은 일반적인 패턴이기도 했다.

  

김반굴은 김흠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김유신의 사위로 희생되었다고 보는 편이 더욱 정확할 것이다. 김유신은 사위를 희생케 함으로써 자기 딸을 일순간에 과부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승전해 집에 돌아왔을 때, 남편을 잃은 딸 영광은 심정이 어떠했을까. 오열하면서 냉혹한 아버지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한데 그의 자식 김영윤 또한 전장에서 장렬히 죽었으니, 그때까지 영광이 살아있었다면 또 한 번 가슴이 찢어졌을 생각을 하니 가슴 저편이 저며 온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김춘추 아버지 용수·용춘은 형제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2016.12.18 00:42 | 510호 23면 


서기 654년 봄, 진덕여왕이 죽자 신라엔 성골(聖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선덕여왕 즉위(632년) 때부터 남자 성골이 씨가 말랐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성골 여인인 선덕과 진덕을 차례로 왕으로 세운 것이었는데,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성골은 품계가 없는, 더 정확히는 품계를 초월하는 신분이었다. 그 다음 신분인 진골(眞骨)은 신하들이 차지했다. 성골이 멸종했으므로 신하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김춘추다. 그의 후견인은 처남 매부가 되어 끈끈한 인연을 다진 맹장 김유신. 처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김춘추가 마침내 권좌를 차지하니, 그가 훗날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김춘추의 계보를 『삼국사기』 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다.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용수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角飡) 서현(舒玄)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 진지는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형 동륜(銅輪)태자가 일찍 죽자 왕위를 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해서 쫓겨났다. 원래 이름이 금륜(金輪)인 진지왕은 지도(知道)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용춘이다. 


한데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龍春[一云龍樹]之子也)고 했을까? 용수와 용춘은 같은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인물인가. 단순한 한자 표기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판별할 결정적인 증거가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진평왕본기 44년(622)조를 보면 “이해 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는 귀절이 있다. 이찬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 체계에서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제1등급을 뜻한다. 그러나 이보다 7년이 지난 진평왕본기 51년(629)조를 보면 “이해 가을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용춘이 김유신 아버지인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군에 맞선 신라군 총사령관이 됐다는 의미다. 다만 이때 용춘의 관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장군은 전시에 임금이 임명하는 임시 군사직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의 열쇠는 다시 『삼국사기』에서 풀린다. 김유신 열전(上)에 다음과 같이 대목이 보인다. “건복(建福)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와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치게 했다.” 


낭비성 전투 당시 신라군 총사령관은 이찬 임말리였으며, 용춘과 서현은 그를 보좌하는 부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진찬은 4등, 소판은 3등이었다. 낭비성 전투가 신라에는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 그에 대응하면서 짠 진용을 보면서 실감한다. 


유관한 세 개의 기록을 통해 용수와 용춘이 다른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622년에 관위가 1등 이찬이었던 사람이 7년이 지난 629년에 4등 파진찬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용수와 용춘은 별개의 인물로 보는게 상식적이다. 


우리 사학계에서 어떤 학자도 용수와 용춘이 별개 인물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기이하기만 하다. 같은 인물에 대한 약간 다른 표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같은 사람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를 소개할 적에 ‘龍春[一云龍樹]’와 같은 식으로 흔히 적기 때문이었다. 두 책 모두에서 용춘 혹은 용수가 곳곳에 등장하거니와 그때마다 “용춘은 용수라고 한다”거나 “용수는 용춘이라고도 한다”고 적었으니, 둘을 동일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화랑세기』로 눈을 돌려보자. 여기선 용수를 형, 용춘을 동생으로 그리고 있다. 김춘추와의 관계를 보면, 용수가 생물학적인 아버지요, 용춘은 작은 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에 의하면 김춘추는 용수와 천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죽으면서 부인과 아들을 모두 동생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작은아버지 보호를 받고 자라서는 나중에 권좌에 오르게 되고,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양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에 추봉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용수와 용춘을 헷갈린 사연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부모가 같은 형제였던 데다 공교롭게도 ‘용(龍)’이라는 돌림자를 썼으며, 더 나아가 김춘추에게는 생부와 양부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에서 김춘추를 일러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를 차례로 역임한 32명에 대한 전기다. 이에 의하면 그 열세 번째 풍월주가 용춘이다. 그는 아버지가 금륜왕(金輪王), 곧 진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다. 형으로 용수(龍樹)가 있고, 누나로는 용명(龍明)이 있다.용명은 나중에 진평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용수와 용명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용춘에 대해“태화(太和) 원년(647) 8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는 기록이 있어, 아버지 진지왕이 임금이 된 지 3년째인 578년에 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은 579년, 쿠데타로 쫓겨난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은 아직 어려서 그(아버지 금륜왕) 얼굴을 몰랐다.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새로운 왕(진평왕)을 섬기게 되자 공은 새로운 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엽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고 돼있다. 하지만 용춘은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에 격분해 화랑으로 들어가 풍월주에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형은 어찌 되었을까? 이 과정에서 천명이라는 여인과 용수-용춘 형제를 둘러싼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이는 곧 김춘추의 출생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진흥왕 손자인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장장 53년(579~632)에 달했지만, 왕위를 물려줄 적통 왕자를 오랫동안 생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선덕이 탄생하게 됐다. 진평은 애초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인물로 용수를 점찍었다. 진평은 진흥왕의 큰 아들인 동륜태자의 아들이고, 용수는 진흥왕의 둘째아들인 금륜태자(진지왕)의 아들이니, 진평과 용수는 사촌이다. 용수는 아버지가 폐위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다음 보위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용수는 성골 적통 왕자에서 한 단계 떨어져 진골이 되었던 것같다. 거주지도 아버지가 왕위에 있을 적에는 당연히 궁궐 안이었겠지만, 쿠데타로 쫓겨난 뒤에는 궁궐 밖에 마련했을 것이다.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를 전군(殿君)이라 부른다. 신분이 강등된 용수 역시 전군이었다. 이런 용수를 진평왕이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자격을 구비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진평이 생각한 것이 그를 사위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촌인 용수를 사위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직계 가족 일원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평왕은 마야(摩耶) 부인과 사이에 두 딸, 천명(天明)과 선덕(善德)을 뒀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한테서 따온 이름이다. 진평왕 부부는 장녀인 천명을 용수와 짝 지워 주려했지만 천명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랑세기』 용춘공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공주는 마음속으로 (용춘)공을 사모하여 (마야)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고 했다. 황후가 용수로 생각해서 시집을 잘못 보낸 것이다.” 


용숙이란 ‘용(龍)자를 쓰는 아재비’를 말한다. 용수건 용춘이건 천명에게는 오촌 당숙이다. 천명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용수와 짝지어 주었다는 대목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는 없다. 마야부인이 일부러 그리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의 마음엔 오매불망 용춘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천명의 꿈’은 남편 용수가 죽고 나서 풀린다. 동생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 용수는 죽으면서 천명을 용춘에게 맡기고, 용춘도 하는 수 없이 천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를 따라 용춘에게 간 용수의 아들, 그가 바로 김춘추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치고는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런 김춘추 역시 훗날 김유신의 계략에 말려들어,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받아들여 혼전 임신을 해서 아들(문무왕 김법민)을 낳았으니 말이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출생의 비밀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가 단순히 상상의 소산만은 아닌 듯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8 00:46 | 497호 23면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라든가 즉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적었습니다. 하늘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법이니, 어찌 늙은 할망구(??)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는 실로 난세(亂世)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먼저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之晨)’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암퇘지가 두리번두리번 거린다’고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 최초의 여주(女主)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재위 16년째인 647년 봄 정월 8일에 죽은 사실을 『삼국사기』가 적으면서 그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이 덧붙인 역사평론인 사론(史論) 전문이다. 아주 혹독한 평가다. 한데 같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에는 원래 이름이 덕만(德曼)인 그가 아버지 진평(眞平)을 이어 즉위한 사실을 전하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니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해서 이율배반의 평가를 한다. 성조황고는 그 의미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닌 후덕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존재 정도를 의미한다.

  

여자가 군주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불만은 당시 신라 내부에서도 팽배했던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선덕이 여자라 해서, 당 황실에서 배필을 골라줄 테니 정치는 그 남자한테 맡기라 빈정대기도 했다. 선덕이 죽음을 앞두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이들이 왕좌 탈취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해 봄 정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上大等) 직위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일으킨 내란이 그것이다. 비담이 내세운 논리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였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와중에 그 후임을 같은 여자인 진덕(眞德)으로 확정하자 다시 여자가 임금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권좌를 탈취하고자 했던 듯하다. 

  

비담 “여왕은 나라 못 다스려” 난 일으켜하지만 혹평과는 달리 선덕은 매우 똑똑한 여자였던 듯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년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하다. 김부식 사론에선 그를 ‘늙은 할망구(??)’라 했고, 그가 즉위하자 신라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선덕은 노련하면서도 덕을 갖춘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란히 등재돼 있다. 특히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이야기는 아예 제목부터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다시 말해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이다. 두 가지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으로 백제군이 몰래 침습한 걸 알아내 그들을 몰살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왕이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나머지 하나가 모란 사건이다. 먼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 첫 대목에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앞선 왕(진평왕-인용자)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지극히 요염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에게 국색(國色)이 있으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고 했다. 그것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선덕이 진평왕의 공주이던 시절의 일화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 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명하여 뜰에다 (그 씨를) 심게 했다가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중략) 이로써 대왕이 신령스럽고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뭇 신하가 왕께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 꽃과 개구리 두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으니 거기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곧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놀린 것이오.’ (중략) 이에 뭇 신하가 모두 그의 성스러운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 꽃 세 가지 색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덕·진덕(眞德)·진성(眞聖)이 그들이니 당나라 황제도 미래를 아는 명석함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몇 가지 미세한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또 『삼국유사』 쪽 기술이 훨씬 생생하며 문학적이다. 이런 차이는 참조한 원전이 각기 달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원전을 참조하면서 이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차이가 빚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이 역사성을 반영한 것일까. 필자는 이 일이 선덕여왕 혹은 선덕공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는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모란 때문이다. 공주 시절이건, 여왕 시절이건 이 시대에는 모란이 등장할 수 없었다. 모란은 이보다 대략 100년 뒤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모란 씨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세민 시대에 중국에 모란은 없었다는 역사성의 차이를 어찌 증명할 것인가.

  

중국사에서 볼 때 당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진평왕, 혹은 선덕여왕 시대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인 서기 750년 무렵 이후다. 아무리 일러도 730년 이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국의 관련 기록을 모조리 검토하면 모란은 중국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서 이 무렵에 들어왔으며, 더구나 그런 모란이 광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은 800년 이후, 백거이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 무렵이다. 실제 중국 청나라 때 당나라 시인 2200여 명이 남긴 시 4만8900여 수를 묶은 방대한 시집 『전당시(全唐詩)』를 훑어봐도 당 현종 개원 연간(713~741) 이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하는 시가 단 한 편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란이 그 무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봐도 이 꽃은 개원 연간에 장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진평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모란씨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여왕 둘러싼 ‘삼서지제’ 소개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가 선덕왕(혹은 선덕공주)을 감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고, 그래서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거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가 없거나, 남자가 있어도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색깔의 모란씨를 심었지만 향기가 없다는 것은 혹시 선덕왕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의문의 실마리는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본 형태로 남긴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을 역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물이다.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선덕여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서지제(三?之制)’라는 제도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선덕) 공주가 즉위하자 (용춘) 공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왕을 보좌토록 했다. (용춘) 공은 본디 (아버지인) 금륜(金輪)이 색(色)에 빠져 폐위된 일을 슬퍼하여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로 삼고는 태종(太宗·김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선덕왕은 아들을 두고자 용춘·흠반·을제 세 명의 남자를 잠자리로 불러들였으나,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삼서지제’는 여자가 적통 아들을 두기 위해 남자를 세 명까지 불러들이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남편이 아니라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해서 나중에 모란 이야기로 둔갑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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