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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경쟁자가 폭우에 발 묶인 틈타 대권 차지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5.07 02:44 | 530호 23면 

  

대권(大權)은 우연의 소산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혹은 하늘의 의지일까? 이런 물음에 전근대 동아시아 이데올로그들은 언제나 천명(天命)을 거론했다. 실제로 천명이 작동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론 그러했다. 하지만 추잡한 권력투쟁을 천명이란 이름을 빌려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덕왕 후계 언급 없이 타계하자

김경신·김주원 치열한 왕권 경쟁

김주원, 큰 비 내려 건너 오지 못해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 왕위 계승

김주원을 명주군의 왕에 책봉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과 그에 따른 세계 제국 당(唐)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절대 번영을 구가했지만, 소나무가 언제나 푸를 수는 없었다. 그 피로감이 극에 달하자 체제가 흔들리는 징후를 곳곳에서 보였다. 마침내 100년 정도가 흐르자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면서 낯선 장면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왕위 계승전쟁이 그것이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 역시 이 와중에 힘으로 대권을 쟁취한 인물이다.


그를 일컬어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이름은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왕비는 김씨이니 각간(角干·신라시대 최고 관위) 신술(神述)의 딸이다”고 했다. 이어 그가 대권을 쥐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어 간다.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년)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날뛰니 선덕(宣德)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의 측근 중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하니 경신이 그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상대등으로 삼았다.”


36대 혜공왕은 신라사의 마지막 평화기라 일컬을 시대를 구가한 경덕왕의 아들로 즉위했지만, 재위기간 내내 평안한 해가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경주 일대를 대지진이 여러 차례 덮쳐 막대한 피해를 내니 더욱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은 언제나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혹은 그것을 조장하면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왕은 유약한 데다 환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재위 16년(780)에 접어들어 정월에는 누런 안개가 끼고, 2월에는 흙비가 내리더니, 마침내 이찬(伊飡·신라 17등관계 중 둘째) 김지정(金志貞)이라는 고위 관료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한 채 왕을 공격했다.


반란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


이 반란은 여름 4월에야 끝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해당하는 상대등(上大等·국무총리)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임금과 왕비는 살해된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이제 차기 대권이 누구로 가느냐가 남았다. 당연히 힘을 쥔 이는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양상과 김경신 일당이었다. 이들은 제3자를 세우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 김양상이 먼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죽은 뒤 선덕(宣德)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김양상이 즉위할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직전 직위가 원로대신의 대표자에 해당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대등이었던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상당한 고령이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장기간 재위하면서 안정된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었다. 더구나 권력을 다른 쿠데타 주도 세력들과 사실상 분점한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정권기반은 취약했던 듯하다.


예상대로 그는 재위 6년 만 인 785년 봄에 타계한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유언이 있지만, 후계자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다. 이는 곧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장한 이가 김경신과 김주원(金周元)이었다. 둘은 선덕왕 말년에 이르러 치열한 왕권투쟁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마침내 김경신이 승리하니 이가 곧 원성왕이다.


이 권력투쟁이 처음부터 김경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김주원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원성왕본기 기록이 증언한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논의한 끝에 왕의 조카뻘인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때 주원은 서울(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라는 큰 자리는 본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앞선 임금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가 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케 했다. 이윽고 비가 그치니 경성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어쩐지 개운찮은 조작의 냄새가 난다. 폭우가 조작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빌미로 천명이란 명분을 앞세워 정권이 김경신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한 구절이란 의심이 가시지 않는 대목이다. 알천이란 경주 분지를 관통하는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중 하나다. 북쪽을 관통한다 해서 북천(北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상류를 막은 덕동댐과 보문호 때문에 평소 수량은 ‘도랑’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신라시대에는 홍수 피해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선덕왕 김양상이 죽자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하고, 이는 김주원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유감스럽게도 신라왕궁 월성은 알천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문헌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은 월성 가까운 곳에 근거지가 있었던 듯하다. 결국 김주원은 폭우로 불어난 알천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좀 더 상세한 일화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에 전해 온다. 이에 따르면 선덕왕이 죽을 무렵 김주원은 이찬이자 상재로, 각간인 김경신보다 직위도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김경신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그가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라는 사찰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한 점쟁이는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고 해몽을 했다.


하지만 이 꿈을 들은 아찬(阿飡신라 17등 관제 중 여섯째) 여삼(餘三)이라는 사람이 전연 다른 해석을 내놨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이 해몽을 들은 김경신이 “내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라고 반문하니, 여산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 지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고 하니 이에 따랐다고 한다. 북천신은 말할 것도 없이 북천인 알천을 지배하는 신이다. 이런 북천신에게 기도했더니, 북천이 홍수로 넘쳐 라이벌인 김주원을 제치고 김경신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주원, 오늘날 강릉 김씨 시조


그렇다면 김경신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어찌 되었을까. 또 왕이 된 김경신은 김주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으므로, 보통은 경쟁자를 각종 명목을 달아 처단 멸족해야 한다. 하지만 김경신은 김주원을 그리 대접하지 않았다. 아니,그리할 힘이 없었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할 땐 서로가 사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정치권에서 유행하는 협치(協治)나 연정(聯政)쯤에 해당하는 공생의 길을 선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인물 조에는 김주원이 왕위에서 밀려난 후 “화를 당할까 두려워해서 명주(지금의 강릉 일대)로 물러나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뒤에 (원성왕이)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책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근을어·울진 등의 고을을 떼서 식읍(食邑·신하에게 내린 토지)으로 삼게 했다. 자손이 이로 인해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강릉 김씨의 탄생 배경이다.


이렇게 해서 명주는 그 아들 김종기(金宗基), 손자 김정여(金貞茹), 증손 김양(金陽)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김주원 후손의 작은 왕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김주원은 강릉을 선택했을까? 그곳이 아마 그의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곳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던 데다 신라로서는 북방이었던 까닭에 원성왕 김경신으로서도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해로울 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12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협치의 도량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막은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문무왕, 초강대국 唐에 당당히 맞서 한민족 토대 마련

[중앙선데이] 입력 2017.04.02 02:39 수정 2017.04.02 03:47 | 525호 23면 

  

신라가 일통삼한(一統三韓)을 위해 국운을 건 전쟁에 나섰을 때, 당(唐)은 유일한 세계제국이었다. 당시 당은 냉전시대 동서 양쪽을 양분한 맹주들인 미국과 구소련을 합친 것보다 더 큰 힘을 비축한 세계제국이었다. 혼자 힘으론 숙적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하기 버거웠던 신라는 이 세계제국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일통삼한 전쟁으로 나아가기로 하고, 이를 위한 가속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당과 연합한 신라는 660년 백제를 정복하고, 668년에는 마침내 고구려마저 쓰러뜨림으로써 통일을 달성한다.


‘평양 이남의 백제 땅은 신라 차지’

밀약 깨고 야욕 드러낸 당에 맞서

일진일퇴의 기나긴 전투 끝에 승리

  

이민족 당 끌어들여 통일했지만

대동강 이북의 고구려 영토 상실

“사대주의, 불완전한 통일” 시각도


이런 신라의 정복 전쟁이 단재 신채호를 비롯한 한국 근대 역사가들에게는 못마땅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신라가 독자적으로 통일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민족인 당을 끌어들인데다가, 그 전쟁이 끝났을 무렵 고구려 영토 중 대동강 이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단재는 신라를 사대주의 국가라고 몰아붙였고, 김춘추와 김유신을 사대주의자의 전형으로 폄훼하기에 이르렀다. 이런 시각은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을 불완전한 민족통일로 규정하는 사관(史觀)의 토대가 됐다. 그리하여 한국사는 백제·고구려 멸망 이후에도 ‘통일신라시대’가 되지 못하고, 당이 차지한 대동강 이북 옛 고구려 땅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한 발해를 신라와 병렬로 놓고는 ‘남북국 시대’라 부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의한 일통삼한은 한국사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지닌 사건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말하는 ‘한민족’은 이때 와서 비로소 생성 토대를 마련했으며, 비록 대동강 이북 옛 고구려 땅 상당 부분을 상실하기는 했지만, 북한을 합친 현재의 대한민국 영토는 이때 사실상 그려졌기 때문이다. 신라·고구려·백제를 아울러 ‘한민족의 고대국가’로 부르는 시대 구분 인식은 신라가 일통삼한을 달성한 이후 형성된 개념이다. 삼국은 무려 700년이나 각기 다른 역사문화 전통을 유지한 별개의 국가였다. 당시의 삼국 관계는 오늘날 대한민국과 일본의 관계에 비유할 수 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하는 적대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외교특사 김춘추, 당 태종에게 읍소


당시의 동북아 정세를 살펴보면, 당이 유일 제국으로 군림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삼국은 치열한 각축을 벌이고 있었다. 신라가 급속도로 당과의 결합을 강화하는 가운데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협공했으며, 배후에선 왜(이후 일본으로 개칭)가 백제와 밀착해 신라를 압박했다. 신라로서는 당 외엔 우군이 없다시피 했다. 이 난국을 타개하고자 김춘추는 험한 바닷길을 이용해 당과 왜국을 오가면서 국익을 지키기 위한 외교를 벌였고, 국내에선 김유신이 전장을 누비며 국토를 수비했다. 그러나 신라는 당에 대해 굴종과 아부만 일삼은 사대주의자가 아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하던 당 역시 신라의 맹방은 아니었다. 『삼국사기』 신라 진덕왕본기는 진덕왕 2년(648), 외교 특사로 당 태종 이세민을 만난 김춘추가 읍소한 장면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신의 나라는 멀리 바다 모퉁이에 치우친 채 천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한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해 여러 차례 침략을 자행하다가 더욱이 지난해에는 병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 성을 함락하고는 (신라가) 대국에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폐하께서 대국의 병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적들을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 백성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과 바다를 거쳐 조공을 드리는 일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은 김춘추의 읍소가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 파견을 허락했다고 한다. 그에 대한 급부로 신라는 당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맹세한 듯하다. 신라는 관리들의 복식을 중국식으로 고칠 것을 맹세했는가 하면, 김춘추는 데리고 간 아들 문왕(文汪)을 눌러앉혀 황제를 호위하는 숙위(宿衛)로 삼기도 했다. 신라의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던 김춘추에게 이는 인질 공작이었다. 아들까지 인질로 받치면서 당을 배반할 뜻이 없음을 공표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외교는 주고받는 것이다. 이쪽에서 무엇을 약속하면 그에 대한 반대급부가 있게 마련이다. 진덕왕본기가 전하는 이때 외교전 모습은 실로 단순하지만 이후 전개된 사태와 그 와중에 폭로된 신라-당 간 외교 밀약 중 하나를 보면 신라도, 당도 매우 계산적이었다. 힘을 합쳐 백제와 고구려를 같이 멸한 신라와 당은 직후 기나긴 전쟁에 돌입한다. 당은 애당초 백제도, 고구려도 신라에 내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직접 통치나 다름없는 괴뢰국을 백제와 고구려에 세웠는가 하면, 우방국 신라조차도 다 먹을 속셈임이 점점 확실해졌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한 당은 비록 실질적 권한이 없기는 했지만, 신라를 계림도독부로 편제하고, 문무왕을 그 도독으로 임명하는 초강수를 뒀다. 이제 신라에 남은 카드는 두 가지밖에 없었다. 자주 외교와 자주 국방은 포기한 채 당 제국에 편입되어 제후국으로 전락하든가, 아니면 칼을 들고 결사항전하든가 해야 했다. 문무왕을 필두로 하는 신라 수뇌부는 결사항전의 길을 택했다. 세계제국 당을 향해 칼과 창을 빼어든 것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신라는 마침내 당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이 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신라 문무왕 .11년(671), 각자의 선전 포고 정당성을 주장하는 외교문서가 문무왕과 당군 사령관 설인귀(薛仁貴) 사이에 오가던 중, 외교 특사 김춘추가 이세민과 합의한 외교 밀약의 일단이 폭로된다. 이보다 33년 전인 648년에 있던 일이다. 『삼국사기』 문무왕본기에 실린 설인귀에게 보낸 문무왕 외교 답서 한 구절은 이러하다.

  

“선왕(先王·태종무열왕)께서 정관(貞觀) 22년(648)에 입조하여 태종 문황제(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습니다. 그 조칙에서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있어서가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늘 침범을 당하여 평안한 날이 없는 것을 딱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산천과 토지는 내가 탐하는 바가 아니며, 재물과 사람은 내가 이미 지닌 것들이니,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모두 너희 신라에게 주어 영원토록 평안하게 하리라’고 하시고는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를 낼 기일을 정해 주셨습니다.”


648년 신라와 당 사이에 오간 외교 밀약은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데서 성사되었음을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신라로서는 숙적 백제 정벌이 염원이었으며, 당은 연개소문이 철권통치를 휘두르며 시종 당에 대항한 고구려 정벌이 오랜 꿈이었다. 당으로서는 고구려 배후에 있는 신라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밀약에는 이행 약속이 따르게 마련이다. 이른바 전후처리 협상도 진행되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현재의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영유하고, 그 이북은 당이 차지한다는 약속이 그것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이 약속이 30여 년이 지나서도 여전히 양국 관계를 구속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는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맹방이요, 어쩌면 주군이라 할 세계제국 당을 향해 칼을 빼들고는 결사항전에 임하는 정당성을 선전하는 구호가 된 것이다. 신라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직접 통치를 꾀하는 당을 향해 “약속을 지키라”고 요구했던 것이며, 그것이 이행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마침내 전쟁에 돌입한 것이다.


김유신 “개도 주인이 다리 밟으면 무는 법”


신라는 한반도 곳곳에서 당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기나긴 전투에서 마침내 승자가 되었다. 문무왕 15년(675), 신라는 칠중성(七重城) 전투에서는 유인궤(劉仁軌)에게 패했지만, 설인귀가 이끄는 대군을 천성(泉城) 해상에서 만나 대파했는가 하면,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20만 대군을 매초성(買肖城)에서 철저히 무너뜨렸다. 완전히 승기를 잡은 신라는 마침내 이듬해 겨울 11월, 사찬(沙飡) 시득(施得)이 이끈 수군이 설인귀 휘하 당 수군을 소부리주 기벌포(伎伐浦)에서 만나 4000여 명을 수장함으로써 기나긴 나당(羅唐)전쟁의 승자가 되었다.

  

그에 앞선 660년, 백제를 함께 정벌한 직후 당군에서는 이참에 동맹국 신라조차 정벌할 마음을 품었다. 이를 간파한 김춘추는 군신을 불러 대책을 숙의했다. 화의책이 논의되자 김유신이 나서 쐐기를 박는다. “개는 주인을 두려워하지만, 주인이 자기 다리를 밟으면 무는 법입니다. 어찌 어려움을 당하여 자구책을 마련하지 않겠습니까? 대왕께서는 이(당과의 전쟁)를 허락하소서.”


강대국에 둘러싸인 채 ‘새우등 터지는’ 신세가 된 작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을 보며 세계 제국이던 당을 향해 칼을 빼들었던 신라의 담대함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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