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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수리비>


고대사로 먹고산다는 사람들이 하는 말 중에 재음하면 새빨간 거짓말로 들통나는 일이 한둘이 아니어니와, 신라 문자 생활사로 국한해 말한다면, 현재까지 발견된 초기 신라 금석문에 드러난 문장을 그들의 초기 문자 생활자료로 설명하는 압도적 견해도 그것을 대표하는 거짓말 중 하나다. 


현재까지 신라 금석문 발견 현황을 간단히 정리하면서 그 초기 자료들을 볼진대, 포항 영일 냉수리 신라비(이하 냉수리비)가 추정대로라면 신라 지증왕 재위 4년(503), 울진 봉평 신라비가 대략 이십년가량 늦은 법흥왕 11년(524)으로 건립시기가 추정되거니와,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 초기 금석문으로는 가장 최근에 발견된 포항 중성리비는 냉수리비보다 몇년 빠른 걸로 본다. 


이후 신라인이 남긴 금석문으로 진흥왕 순수비와 같은 시대 창녕 척경비가 따르며, 그 이후엔 명활산성비가 대표하는 금석문들이 있고, 중하대로 내려갈수록 실물자료는 많아진다. 

무엇이 새빨간 거짓말인가?


저들은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 금석문이다. 나아가 그 문장을 보면 전자 셋은 소위 신라식 한문이라 정통 한문, 그러니깐 진흥왕 순수비 기준으로 보면 투박하기 짝이 없게 보인다. 그래서 말하기를 저들 초기 금석문을 신라 초기 문자 생활사의 문물로 간주하는 한편, 그 문장 혹은 서사 수준이 형편없음을 들어 신라가 문서 행정을 지증왕 무렵 이후 계우 흉내나 내기 시작한 것으로 간주한다. 신라사 논문 백편 중 아흔아홉편이 저런 주장을 펴거나 그런 전제를 깐다고 보아도 대과가 없다. 


나는 이를 왜 새빨간 거짓이라 하며, 그렇기에 그것을 허무맹랑하다 하는가?


냉수리비와 봉평비와 중성리비는 신라 지배층이 신민을 통치하기 위해 구사한 커뮤니케이션 도구다. 따라서 그것은 그 자체로 어느 하나 흠결없이 완벽한 문장이다. 천오백년 지난 지금에 그 문서를 읽는 자들에게 저 문서가 어려울 뿐이지 그 문서를 작성한 사람과 그 문서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이상한 문서가 아니었다. 


<봉평비>


저것을 왜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정통 한문으로 적지 않았던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문서를 통용하고 소비하는 사회환경 때문이었다. 저 시대에는 저런 문장 혹은 행정문서를 요구했으며, 저들 문서는 그런 시대환경에 충실히 복무했다. 물론 저 시대 문맹률을 따져야겠지만, 적어도 저 문서를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저 문서는 지금의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그런 수수께끼가 전연 아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조선시대 이두는 물론이고 신라시대 이래 전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활용한 이두니 석독이며 구결은 한문 한자에 기반한 문자문화가 고도로 발달한 단계의 또 다른 성취다. 다시 말해 종래 정통 한문을 몇 단계 더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정통 한문의 눈으로 그것을 바라볼 때 이두며 하는 문자 표기 체계가 브로컨 잉글리시의 대표주자인 피전 잉글리시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하긴 브로컨 잉글리시도 이두에 해당하기도 하다만, 어찌됐건, 그것은 정통 한문으로는 전달할 수 없거나, 전달하기 힘든 그 난관을 타개하고자 몸부림친 인간 노력의 위대한 성취라는 점이다. 이 점이 고대사학계, 혹은 일반의 통념과 내가 바라보는 지점이 대척을 형성한다. 


이두가 그렇듯이, 현재까지 발견된 봉평비 냉수리비 중성비는 신라의 초기 문자생활, 그런 까닭에 그 저급한 문자수준을 증언하는 유물이 아니라 외려, 그것이 더욱 더욱 고도화한 문자 생활의 표식이다. 따라서 저들 세 금석문 중에서도 그것을 전시 홍보하기 위한 전문 박물관을 갖춘 오직 유일한 사례인 울진 봉평비 전시관은 저 위대한 성취를 선전해야 하는 기관이다.


봉평비 봐라. 이 문서는 전체가 398字라고 당당히 밝혔다. 이는 이 문서를 단 한 줄이라고 곤치는 놈이 있다면 물고는 내겠다는 경고다. 때려 죽인다는 경고문이다. 이것이 유래한 뿌리 중 하나는 내가 늘 지적하듯이 《상군서商君書》다. 그리고 그 저층 혹은 심연을 흐르는 사상 기조는 당연히 법가法家요, 그것을 뒷받침한 논거 중 하나가 바로 《주례(周禮)》다. 


봉평비 냉수리비 중성비가 건립된 신라 지증왕~법흥왕 시대에 이미 《상군서》가 통용하고, 《주례》가 유통하고, 《한비자》가 읽혔다. 


신라? 당신들 눈엔 눈엔 신라가 그리 우습게 보일지 모르나, 신라는 이미 저 시대에 그 시대 동아시아 사상을 지배한 주요한 텍스트가 다 들어와 있었다. 냉수리비 봉평비를 푸는 열쇠는 《삼국사기》도 아니요 《삼국유사》도 아니며 《상군서》이며, 《주례》이며, 《한비자》다. 


내가 오래전에 지적한 것이지만, 신라에는 누층적, 혹은 간단히 추려 이중적 문자 서사체계가 있었다. 냉수리비 봉평비 중성비가 신라 신민을 대상으로 하는 마이크라면, 그 직후 등장한 유려한 정통 한문 텍스트인 진흥왕 순수비는 독자가 천지신이라 정통 한문을 사용했다. 지금까지 우리는 냉수리비와 봉평비가 대표하는 신라식 한문과 그 직후 정통 한문인 진흥왕 순수비문을 계승 관계로 간주했다. 다시 말해 지증왕 법흥왕 시대까지는 정통 한문도 몰라, 그 찌꺼기인 브로컨 차이니즈(Broken Chinese)를 사용하다가 진흥왕 시대가 개막하면서 비로소 한문다운 한문을 하는 지식을 배출하기 시작해 그것이 순수비로 '발전'했다고 간주했다.  


하지만 또 강조하거니와, 이는 독자가 다른 데 따른 다른 서사 체계의 채택이지 결코 사승 관계가 아니다. 종래 압도적인 논리대로라면 적어도 금석문으로 보건대 진흥왕 이후 신라 한문이 도로 냉수리비 시대로 돌아간 사정을 전연 설명할 수 없다. 


지금의 우리가 소화할 수 없거나, 소화하기 힘든 한문이라 해서, 그런 한문을 구사한 저 시대 신라인들의 문자 생활 수준이 저급했다고 간주할 수는 없다. 그들이 구사한 한문을 천오백년 지난 지금의 우리가 단번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의 사고체계를 알아야 하고, 그들의 제도를 알아야 하며, 그것이 운용된 시스템을 알아야 하지만, 이와 관련해 우리한테 알려지거나 주어진 정보는 태부족이다. 시간의 간극과 이런 여러 차이가 텍스트의 난독성을 초래하는 것이지, 저들이 구사한 한문이 저급해서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아가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석문 중 저들이 가장 초기 것이라 해서 그것이 그들의 초기문자 생활을 보여주는 증거물로 채택할 수는 결코 없다. 이는 실은 고고학이 자주 저지르는 실수 혹은 패착이거니와, 이 친구들은 엉뚱한 언론을 향해 최고最古 최초最初 최대最大의 삼최(三最)를 좋아한다 비아냥대고, 키득키득거리지만, 세상 어떤 유적 유물도 내가 이런 類로는 세계 최초라고 선언하는 경우는 없다. 삼최는 그것이 그때까지 알려진 시간과 공간의 상한선을 알려주기에 무척이나 중요하다. 하지만 이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삼최는 언제나 열린 것이며, 열려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우리네 고고학을 보니, 시건방이 하늘을 찔러, 강고한 이 삼최가 어느 순간 정답으로 고정한 그 강고한 폐쇄성에 심대한 문제가 도사린다. 


이 꼴이 신라사학계에도 도져서 저들을 신라생활 초기 문자자료라고 본다.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랜 신라문자자료라는 말이 신라인들이 문자생활을 한 가장 이른 시기 증거물일 수는 결코 없다. 


봉평비며 냉수리비며 중성리비는 그에 구사한 한문이 그것을 독자로 상정한 동시대 신라인을 철저히 겨냥한 서사체계라는 점에서 나는 저들을 한문을 수용하고 습득하고서 시간이 상당히 흘러 나온 결과물, 다시 말해 진화론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초기 한문 수용 단계에서 몇 단계 수십 단계를 지난 단계의 발전형태라고 본다. 


바꿔야 한다. 관점을 바꾸고, 고정과 인습을 타파 훼멸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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