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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한 장면...아버지가 제때 안 죽으면 아들이 죽을 수밖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이름대로 백수를 했다. 그의 아들로 세자는 조다助多. 아버지가 무려 왕위에만 79년간 있다 죽었을 때 조다는 죽고 없었다. 조다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문자명왕이다. 아버지가 하도 왕 노릇 오래하는 바람에 먼저 죽었으니 이름이 쪼다인가 보다. 

그보단 못하지만 조선 세종 역시 장장 32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로 아버지가 재위 3년째인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세종은 모든 실권은 아버지 이방원에게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러니 세종이 왕위에 재위한 기간과 문종이 세자로 있은 기간은 같다. 내가 놀랍기만 한 것은 이 긴 기간 문종이 내리 죽죽 세자로 있었다는 점이다. 

세자나 태자 생활은 왕보다 더 힘들다. 언제건 틈만 나면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일어나기에 어정쩡한 넘버 투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너무 똑똑하면 똑똑해서 아비를 잡아 먹을 놈이라 해서 쫓겨나고, 등신 같으면 등신같다 해서 쫓겨나고, 방탕하면 방탕하다 해서 쫓겨난다. 아주 가깝게는 그의 형 양녕이 그렇지 아니했는가? 이 천하의 망나니는 방탕하다 해서 아비한테 쫓겨났으니 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장장 37년을 재위한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은 처음에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왕노릇 많이 하자, 기다리기 지쳐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태자 자리는 그의 동생 금륜(金輪)에게로 가니, 이가 훗날 신하들한테 쫓겨난 진지왕이다. 

근자 화랑세기가 공개되었다. 보니, 진흥에게는 태자가 세 명이었다. 조강지처 숙명한테서 둔 아들 정숙(貞肅)을 처음에 태자를 삼았지만, 어미가 행실이 곱지 못해, 혹은 열정이 넘쳐 그랬는지 모르지만 딴 남자한테 홀딱 빠져 스스로 왕비 자리를 버리자, 애꿎은 정숙 또한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진흥은 후실로 들인 사도(思道)에게서 동륜과 금륜을 두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동륜이 왜 죽었는지가 없지만, 화랑세기는 뜻밖에도 동륜이 아버지 후궁이랑 밤마다 놀다가 하루는 그 후궁 건물을 지키는 사냥개 종류한테 물려죽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이로써 보건대도 아버지는 제때 죽어주거나, 혹은 일찍 자리를 내놔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세대교체다. 

조선 임금으로 가장 오랜 53년인가를 재위한 영조 역시 중간에 세자 바꿔치기를 해야했다. 하지만 이 아비는 불행하기 짝이 없어,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여야 했으니, 막상 죽인 다음 아들은 없고 덜렁 손자 하나만 남았으니, 그가 여든 몇살까지 장수한 이유는 오로지 의지 때문이었다고 나는 본다. 내가 오래 살아 저 손자놈이 성년되는 모습을 봐야 한다는 그 일념 하나로 그리 오래살았다고 본다. 

문종은 병약하다 하지만, 내 보기엔 이는 장기간의 스트레스에 따른 병약이다. 아버지 죽기만 30년을 기다렸으니, 오죽이나 돌아버렸겠는가? 이 땅의 아비들은 제때에 죽어줘야 그 자신도 봉변을 당하지 않고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아비가 죽자 너무 통곡해 문종이 건강을 해쳤다는 말 믿지 않는다. 왜 지금에야 돌아가셨소 하는 원망으로 건강을 망쳤다고 본다. 

일찍 죽자, 아니다 제때 죽자 아버지들아. 오래 생명만 부지해 부자관계 파탄나는 꼴 정 보기 싫으면 그 권한은 제때 자식들한테 물려주어야 한다. 하긴 이 말도 내가 아비이니 할 수 있지, 아비 아녔으면, 호로자식 후레자식 소리 듣기 딱 좋았을 성 싶다. 

각중에 산소로 아버지를 찾고 싶다. 


김유신이 신라의 미래 동량으로 두각을 드러나기 시작할 무렵, 한반도는 시종 전운이 감도는 데서 한 발 더 나아가 단 한 해도 전쟁이 없는 시대로 돌입했다.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본기에서 그 흔적을 추려보면, 38년(616) 겨울 10월, 백제가 모산성(母山城)을 쳤는가 하면, 40년(618)에는 북한산주 군주 변품(邊品)이 가잠성을 되찾고자 병사를 일으켜 백제와 싸웠지만 패배하고 해론(奚論)이 전사했다.


45년(623)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늑노현(勒弩縣)을 습격하더니 이듬해 46년(624) 겨울 10월에는 백제가 군사를 일으켜 속함(速含)ㆍ앵잠(櫻岑)ㆍ기잠(歧暫)ㆍ봉잠(烽岑)ㆍ기현(旗縣)ㆍ혈책(穴柵)  여섯 성을 포위한 결과 세 성이 함락되고 급찬 눌최(訥催)가 전사하는 대패를 기록했다. 


시종 백제 공세에 시달린 신라는 47년(625) 겨울 11월에는 당에 보낸 사신 편을 통해 고구려가 길을 막고서 조공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자주 자기네 국경을 침입한다고 호소했다. 48년(626) 가을 7월에도 당에 사신을 보내 같은 호소를 하니 당 고조 이연이 고구려와 화친을 권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장 그 다음달에 백제가 주재성(主在城)을 공격해 성주 동소(東所)를 전사케 했다. 


49년(627) 가을 7월에는 장군 사걸(沙乞)이 이끄는 백제군이 서쪽 변방 성 두 곳을 함락하고 남녀 3백여 명을 사로잡아 갔다. 50년(628) 봄 2월에는 백제가 다시 가잠성을 포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이 기간 기상재해도 빈발해 이해 가을에는 백성들이 주려서 자식들을 파는 지경에 이르기도 했다. 


백제와 고구려 협공에 내내 시달리던 신라는 당에 호소해 외교력으로 그들의 예봉을 피하고자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그런 신라가 마침내 선제 공격으로 전환을 선언한다. 


진평왕 51년(629) 가을 8월, 신라는 대병을 일으켜 고구려 공략에 나서니, 점령 대상지는 낭비성(娘臂城)이었다. 왜 낭비성인가? 이를 엿볼 직접 자료가 현재 우리한테는 없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낭비성이 어디인지를 알아야, 그 지정학적 중요성을 간취하는 한편, 이곳을 점령하고자 한 신라의 의도를 어느 정도 간파하겠지만, 이를 알아낼 방도가 현재로서는 없다. 


다만, 신라가 이 전쟁에 얼마나 많은 공력을 투입했는지는 이때 신라군 진용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한다. 이와 관련해 진평왕본기에서는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침공했다"고 하지만, 같은 사건을 전하는 김유신 열전(上)을 보면, 이 전쟁이 신라로서는 훨씬 더 심대한 사안이라, 그야말로 국운을 걸다시피했음을 엿볼 수 있으니, 이에 이르기를 


건복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 파진찬 용춘(龍春)ㆍ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ㆍ서현 등을 파견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케 했다. 


고 했고, 이에서 김유신은 "중당 당주(主)"라 했으니, 신라 정벌군 예하 부대 하나를 이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 김유신은 35살, 군인으로서는 한창 혈기방장하던 때라, 아마 요즈음으로 치자면 영관급 대대장 정도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진평왕본기에 견주어 김유신 열전 기록이 훨씬 더 상세하며, 이를 통해 신라군 진용 편성도 더 확연히 드러난다. 이에서 총사령관은 임말리였으니, 그의 관위가 17단계 중 넘버 투인 이찬이었다. 재상이었다. 나아가 그 예하 각 부대를 이끈 장군들을 보면 대인과 서현이 3등 소판이었고, 용춘과 백룡은 4등 파진찬이었다. 이런 군부대 편성은 이보다 대략 30년 뒤, 신라가 대대적인 백제 정벌 전쟁을 일으킨 그때 신라군 진용에 견줄 만하다. 


임말리는 아마도 총사령관으로서 중앙군을 맡았을 수도 있고, 혹은 총사령관으로서 각 군단을 지휘하기만 했을 수도 있다. 이에 김유신이 예하 부대장으로 참전한 것이다. 나머지 소현과 대인, 용춘과 백룡은 각기 군단을 거느렸을 것이니, 이로써 본다면, 신라군은 아마도 4군, 혹은 5군으로 편성되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이 전쟁에 투입된 신라군이 얼마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만명 이상을 헤아리는 대군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까닭에 신라로서는 반드시 이 전쟁에서 이겨야만 했다. 그런 대상지로 낭비성을 고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그곳이 바로 신라로 진격하는 고구려 남방 전진기지의 최중심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곳을 점령하면, 당분간은 고구려의 예봉은 피할 수 있으리라는 판단에서 신라는 마침내 군사를 일으켰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전개된 전투는 신라군에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고구려군 반격에 신라군은 전사자가 속출했다. 김유신 열전에 이르기를 "그때 고구려인들이 병사를 내어 맞받아치자 우리 편이 불리해져 전사자가 매우 많았고 사기도 꺾여서 더 이상 싸울 마음이 없어졌다"고 한 대목이 그런 사정을 웅변한다. 


이 전투가 공성전은 아니었음이 확실하다. 그것은 이 사정을 전하는 진평왕본기에서 "고구려인이 성에서 나와 진을 쳤는데, 군세가 매우 강성하여 우리 병사가 그것을 바라보고 두려워하며 싸울 생각을 못했다"고 하기 때문이다. 실제 이후 전개된 전투 양상을 봐도 양국 군대는 평야 혹은 구릉지대에서 싸웠다. 


패배가 목전에 다가온 이때 김유신이 나선다. 이 대목을 열전에서는 "유신이 이때 중당 당주였는데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 투구를 벗고 고하였다"고 하고, 진평왕본기에서는 


"나는 '옷깃을 잡고 흔들면 가죽옷이 바로 펴지고 벼리를 당기면 그물이 펼쳐진다'고 들었다, 내가 벼리와 옷깃이 되겠노라!” 라는 말을 남기고는 그 즉시 말에 올라 칼을 빼들고 적진으로 향해 돌진했다. 이렇게 세 번을 들어갔다 나왔는데 매번 들어갈 때마다 장수 목을 베거나 군기를 뽑았다. 여러 군사가 승세를 타고 북을 치고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여 5천여 명을 목 베어 죽이니, 낭비성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고 했다. 이를 통해 이 전투가 평야전이었음을 다시금 확인한다. 외우 서영일 박사는 낭비성을 파주 칠중성으로 지목했거니와, 낭비성이 칠중성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전투지는 칠중성 자체가 아니었고, 그 근처 평야지대였다. 


나아가 이 전투가 얼마나 규모가 컸던지, 고구려군 전사자가 5천 명에 달했다. 신라로서는 명운을 건 전투에서, 다름 아닌 김유신이 대전과를 올렸으니, 그의 명성은 이젠 누구도 넘볼 수 있는 정상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이 낭비성 전투는 만호태후와 미실궁주가 후원한 미래의 동량 김유신이 역사의 전면에, 이제는 최고 실력자로, 그것도 본인 실력으로 등장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한반도엔 김유신이라는 깃발이 마침내 펄럭이기 시작했다. 


나아가 낭비성 전투는 김서현과 김용춘 시대가 이제는 막을 내렸음을 고하는 사건이기도 했다. 이들이 비록 승리를 이끌기는 했지만, 이제는 늙어 뒷방으로 물러날 시대가 온 것이다. 장강 물길을 밀어내는 것은 뒷물이다. 그렇게 서현과 용춘은 김유신이라는 뒷물에 떠밀려 조용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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