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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金)이 재갈을 잡고 놓지 아니하므로, 임금이 그만두었다. 

上如果州, 相壽陵地。 將還, 都評議使司享于豆毛浦船上, 群臣以次獻觴。 鄭道傳進曰: "天佑聖德, 肇建丕基, 臣等蒙恩至厚, 常願千萬歲壽。 今日相地, 臣不勝感愴。" 因泣下, 上曰: "欲於平安之日, 預定之耳, 何泣爲!" 至徃尋 村路上, 上欲馳馬射獐, 僕隷朴夫金執鞚不放, 上乃止。 

같은 실록을 더 따라가면 같은 해 7월 11일 임인에는 

“상께서 판삼사사 정도전(鄭道傳)과 좌사 남재(南在)와 참지문하 남은(南誾)과 중추원사 이직(李稷)에게 명하여 광주(廣州)에 가서 수릉(壽陵)을 살피게 했다” 

上命判三司事鄭道傳、左使南在、參知門下南誾、中樞院使李稷, 相壽陵地于廣州。 

고 하며, 이듬해 5년 4월 6일 계사에는 “상이 광주(廣州)를 지나다가 수릉(壽陵)의 땅을 보았다(上過廣州, 相壽陵之地。)”고 했으며, 이어 같은 해 9월 28일 계미에는 “전라도 역부(役夫)들이 수릉(壽陵)의 개석(蓋石)을 운반하다가 넘어져서 손발을 부러뜨린 자가 89인이나 되었다(全羅道役夫輸壽陵蓋石, 顚仆傷折手足者, 八十九人。)”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광주에다가 묏자리를 정하고, 그 조성에 나섰음을 본다. 

또 같은 해 11월 19일 계유에는 이성계가 직접 “태평관에 거둥하여 사신을 연회하고, 수릉(壽陵)에 갔다(幸太平館宴使臣, 遂如壽陵。)”고 하니, 떡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바깥 행차를 이용해 냅다 자기가 묻힐 곳을 직접 돌아봤다. 

이어 같은 해 12월 24일 무신에 다시 한 번 수릉(壽陵)에 직접 거둥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성계는 자신이 직접 골라 만든 땅에 묻힐 수가 없었다. 태종 8년 5월 24일, 그가 죽었다. 태종실록을 보면 태종 8년 6월 12일 기축에 산릉 자리 물색에 나선 조정의 부산한 움직임이 감지된다. 이에 의하면 검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유한우(劉旱雨)·전 서운 정(書雲正) 이양달(李陽達) 등이 원평(原平)의 예전 봉성(蓬城)에서 길지(吉地)를 얻었다는 말을 듣고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직접 해당 지역을 돌아본 결과 봉성 땅은 쓸 수 없고, 해풍(海豐)의 행주(幸州)에 있는 땅이 쓸 만하다고 보고한다. 하지만 이방원 맘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산릉 자리를 물색할 것을 주문한다. 

산릉 자리는 6월 28일 을사에야 정해진다. 이 날짜 실록에는 

“산릉을 양주(楊州)의 검암(儉巖)에 정하였다. 처음에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 등이 다시 유한우(劉旱雨)·이양달(李陽達)·이양(李良) 등을 거느리고 양주(楊州)의 능 자리를 보는데,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가 하윤 등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사는 검암(儉巖)에 길지(吉地)가 있다“고 하므로 하윤 등이 가서 보니 과연 좋았다. 조묘 도감 제조(造墓都監提調) 박자청(朴子靑)이 공장(工匠)을 거느리고 역사(役事)를 시작했다.” 

고 한다. 

실제 산릉 공사는 7월에 시작했다. 이달 5일 신해 실록에 “여러 도(道)의 군정(軍丁)을 징발하여 산릉 역사(役事)에 부역(赴役)케 하니, 충청도에서 3천 5백 명, 풍해도(豐海道)에서 2천 명, 강원도에서 5백 명이었다. 7월 그믐날을 기(期)하여 역사를 시작하게 하였다.”고 하거니와, 아마도 제반 징발 과정 등을 거쳤기 때문으로 보인다. 

공사는 한창 진행되어 7월 26일 임신에는 마침내 석실을 만들라는 명령이 나온다. 이 날짜 실록은 陵制와 관련해 매우 중대한 증언이다. 

“석실(石室)을 만들라고 명하였다. 산릉의 기일(期日)이 가까웠는데 고사(故事)를 따르는 자는 석실을 만들자고 하고, 《가례(家禮)》에 의거하는 자는 회격(灰隔)을 쓰자 해서 두 설 중 어느 것을 택할지가 결정되지 않았다. 임금이 세자(世子) 이제(李禔)를 명하여 종묘에 나아가 점[栍]을 쳐서 석실로 정했다.” 

命造石室。 山陵期近, 遵故事者, 欲作石室; 據《家禮》者, 欲用灰隔, 兩說未定, 上命世子禔詣宗廟探栍, 定爲石室。 

주자가례도 관습 앞에는 이때까지만 해도 맥을 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이 이제는 점점 세력을 확보해 이데올로기로 정착해 가는 과정을 우리는 목도한다. 

이어 7월 29일 을해에는 “산릉의 재궁(齋宮)에 개경사(開慶寺)라는 이름을 내려주고 조계종(曹溪宗)에 붙여서 노비(奴婢) 1백 50구(口)와 전지(田地) 3백 결(結)을 정속(定屬)시켰다. 연경사(衍慶寺)의 원속(元屬) 노비(奴婢)가 80구(口)인데 이번에 20구를 더 정속(定屬)시켰다. 임금이 황희(黃喜)에게 이르기를, ‘불씨(佛氏)의 그른 것을 내 어찌 알지 못하랴마는, 이것을 하는 것은 부왕(父王)의 대사(大事)를 당하여 시비(是非)를 따질 겨를이 없다. 내 생전에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자세히 제정하여 후손에게 전하겠다’고 했다”고 했으니, 이를 통해 우리는 조선왕국 건국 이후에도 불교가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장면을 목도한다. 더불어 산릉을 관리하는 사찰인 원찰(願刹)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그 장면도 같이 본다. 

이어 같은 날에 이방원은 산릉 수호군(守護軍) 1백 명을 두라고 했으므로, 이들이 일종의 수릉인임은 말할 나위가 없겠다. 

8월 7일 임오에는 이성계에게 계운 성문 신무 대왕(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이라는 존호와 태조(太祖)라는 廟號를 올렸으며, 8월 25일 경자에는 산릉사(山陵使) 이직(李稷)을 보내 산릉의 참초제(斬草祭)와 개토제(開土祭)를 행한다. 

9월 4일 기유에는 대신을 보내 산릉의 발인(發引)을 종묘(宗廟)·사직(社稷)에 고했는가 하면, 섭태부(攝太傅) 예조판서(禮曹判書) 이지(李至)와 섭중서령(攝中書令) 한성윤(漢城尹) 맹사성(孟思誠)을 보내어 시책(諡冊)·시보(諡寶)를 빈전(殯殿)에 올리니, 시보(諡寶)에는 전자(篆字)로 ‘지인 계운 성문 신무 대왕 지보(至仁啓運聖文神武大王之寶)’라 썼다. 

9월 5일 경술에는 백일재(百日齋)를 흥덕사(興德寺)에 베풀고, 이틀 뒤인 7일 임자에는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빈전(殯殿)에 나아가 견전례(遣奠禮)를 행하고, 영구(靈柩)를 받들어 발인(發引)했다. 같은 날 오시(午時)에는 영구가 검암(儉巖) 동구(洞口)에 이르러서, 시신은 악차(幄次)로 옮겨진다. 

이튿날인 8일 계축에는 임금이 상왕 정종과 함께 산릉을 살피고, 그 이튿날인 9일 마침내 이성계는 건원릉(健元陵)에 영원히 잠든다. 이 장면을 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시(子時)에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임광제(臨壙祭)를 행하고 현궁(玄宮)을 봉안(奉安)하고 나서, 곧 하직하고 신주(神主)를 썼다. 백관은 최복을 벗고 오사모(烏紗帽)에 흑각대(黑角帶)로 입시(入侍)했다. 다음에 반혼 동가제(返魂動駕祭)를 행하고 우주(虞主)를 받들고 돌아오는데, 길장(吉仗)이 앞서고 문무백관이 앞에서 인도하며, 상왕과 주상은 소연(素輦)을 타고 반혼거(返魂車) 뒤를 따르고, 군위(軍威)는 뒤에서 옹위(擁衛)하였다. 사헌집의(司憲執義) 이관(李灌)을 머물게 하여 현궁(玄宮)의 봉함을 감독케 하고 엄광제(掩壙祭)를 행하게 하였다. 도성에 머물러 있던 각사(各司)와 한량(閑良)·기로(耆老) 등이 동교(東郊)에서 봉영(奉迎)하여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와, 오시(午時)에 우주(虞主)를 문소전(文昭殿)에 봉안하고,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초우제(初虞祭)를 행하고 환궁(還宮)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권도(權道)로 최질(衰絰)을 벗고 소복(素服)을 입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子時, 上率百官行臨壙祭, 奉安于玄宮, 遂奉辭題神主。 百官釋衰服, 以烏紗帽黑角帶入侍, 次行返魂動駕祭, 奉虞主而還。 吉仗居前, 文武百官前導, 上王及上乘素輦, 隨返魂車之後, 軍威擁後。 留司憲執義李灌, 監鎖玄宮, 行掩壙祭。 留都各司閑良耆老等, 奉迎于東郊, 入自興仁門, 午時, 奉安虞主于文昭殿。 上率百官行初虞祭, 還宮。 議政府請權釋衰絰著素服, 從之。

 

 

2017년 2월, 경주 傳 황복사지 인근을 발굴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미완성 왕릉을 발굴했다면서, 그 성격을 가릉(假陵)이라 규정한 조사성과를 공개했다. 보통 제왕이 자기가 죽어 묻힐 곳으로 생전에 미리 만든 무덤을 수릉壽陵이라 하는데, 그런 용어가 싫다 해서 가릉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는 가묘(假墓)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그것이 왕릉에 대한 버전이 가릉일 것이므로, 그 명칭이 가릉이건 가묘건, 임시 무덤을 말한다는 점에서 저 용어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분명 조사단에서는 저 무덤이 만들다가 어찌된 이유로 중단하고 폐기한 왕릉이라 해서 저리 이름을 붙였지만, ‘미완성 왕릉’이라 하는 편이 훨씬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달한다고 본다. 가릉이나 가묘는 temporary tomb라는 뜻이지, unfinished tomb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사단이 사용한 가릉은 맥락으로 보아, 후자다.

그것이 설사 조사단 추정 혹은 주장처럼 미완성이라 해도, 그것 역시 수릉일 가능성은 농후하다. 생전에 자기 묻힐 곳으로 만든 무덤 일종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릉이란 대체 무엇일까? 

수릉은 우선 그 개념어가 장수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으니, 壽란 단순한 목숨이 아니요, 여기서는 longevity를 말한다. 역설을 빌려 장수를 기원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수릉은 연원이 아주 깊다. 춘추전국시대 이전에는 내가 확실한 증거를 지금 이 단계에서는 포착하지 못하나, 진 시황제는 확실히 그 생전에 그 자신의 무덤을 대대적으로 만들었으니, 이후 역대 중국 제왕은 이 패턴을 공식화한다. 

한국사를 보면 내가 보고 들은 바가 짧은지 모르나, 조선 태조 이성계는 확실히 자기 무덤을 자기가 만들었다. 하지만 실제와 계획은 달라, 이성계는 그가 잡은 곳이 나중에 문제가 있다 해서, 다른 곳에 묻혔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사례로써 고려시대 역시 수릉이 일반 패턴이었음을 안다. 이성계는 내가 누차 지적했듯이 고려인이다. 

신라시대는 기록이 엉성해 알 수는 없으나, 장례 기간으로 보아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죽 수릉이었다. 이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이월역일제以日易月制’라 해서, 거상 기간 27개월 혹은 25개월을 하루 한달을 치는 시스템이 보편화하기 때문이다. 

왕건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죽은 지 27일 만에 매장하고 상복을 벗었다. 이를 처음 도입하기는 내 기억에 한 경제景帝인가 文帝거니와, 27개월 거상기간이 지나치게 길어 생활에 여러 모로 불편하다는 반론은 이미 공자 시대에 있었다.

공자는 이 경우 무대포 원리주의에 가까워 3년상을 주장했다.

하지만 제왕이 3년 동안 상복 입고 있으면 생활 불편을 차치하고라도 권력누수가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고심책으로 나온 것이 이일역월제다. 

문제는 이런 단축이 급속도로 능제陵制 시스템에서는 수릉의 가속화를 불러왔다는 점이다. 

25일, 혹은 27일 만에 매장까지 끝내려면 제왕릉은 규모가 크고 돈이 열나 들고 공역이 엄청나므로, 막상 죽음과 더불어 곧바로 시작한다고 해도 도저히 이 기간에 무덤을 만들 수는 없다. 그래서 이런 시스템에서는 무덤을 미리 만들어 놓아야 한다. 

두 번째로 무덤 구조의 변화를 불러왔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수릉이 되기가 무척이나 힘들다. 일본의 전방후원분도 수릉이 될 수는 없다. 미리 만들어 놓을 수 없거나 그렇기는 무척이나 힘든 구조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럴 수는 있으나, 이 경우 저 거대한 봉분을 다시 파제끼고 묻어야 하기 때문에 수릉일 수가 없거나 곤란하다. 

신라 적석목곽분이나 일본의 전방후원분은 그 계획에서 완공에 이르는 시간이 居喪기간이다. 왜인가? 미리 만든 무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제 천마총이나 황남대총 발굴결과를 봐도 이들 무덤이 미리 만들어 놓고 나중에 해당 피장자가 죽어서 그 시체를 묻기 위해 다시 봉토를 판 흔적이 없다. 따라서 결론은 하나다. 

적석목곽분은 사람이 죽어서 비로소 입지 선정을 비롯한 공사 계획에 착수했으며, 그가 묻힌 시점이 바로 묘지 조성이 끝나는 시점이었으며, 그것이 바로 상복을 벗는 시점이었다. 

신라의 경우 아마도 태종무열왕 무렵 이후 석실분으로 간 듯한데, 중국식 예제가 확실히 상장제에도 도입되었다는 증거다. 석실분이어야 생전에 미리 무덤을 맹글어 놓았다가 왕이 죽으면 간단히 대문을 열고 왕을 안치할 수 있게 된다. 

석실분 도입은 합장 시스템을 일반화했다. 대문만 따면 되므로, 이 석실분은 여러 모로 경제적 편익이 있었으니 봉분을 두 개 만들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무덤이 열라 크다 해서 그것을 만든 사회 혹은 국가, 혹은 그를 대표하는 군주가 진정한 고대국가에 돌입했니 하는 말은 허무맹랑 낭설에 지나지 않는다. 

소위 고총高塚 고분의 등장을 국가 권력자의 등장 지표로 삼은 고고학도들 말은 경청할 필요가 전연 없다. 

  1. 한량 taeshik.kim 2018.02.11 11:46 신고

    《后漢書·光武紀下》:“初作壽陵。將作大匠竇融上言園陵廣袤,無慮所用。” 李賢 注:“初作陵未有名,故號壽陵,蓋取久長之義也。 漢自文帝以后皆預作陵,今循舊制也。”《三國志·魏志·武帝紀》:“(建安二十三年)六月,令曰:‘古之葬者,必居瘠薄之地。其規西門豹祠西原上為壽陵,因高為基,不封不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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