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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릉3

[무령왕릉과 쌍릉 사이, 백제 장인들의 눈물겨운 생존투쟁] 수릉壽陵, 대권 잡은 군주가 맨 먼저 만든 자기 집 구미권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동아시아권 군주, 특히 중국의 경우 대권을 잡으면서 가장 먼저 착수한 일 중 하나가 자기가 죽어서 살 집, 곧 제 무덤을 만드는 일이었다. 이렇게 생전에 미리 만든 왕릉을 수릉壽陵이라 한다. 이런 전통이 한반도 문화권에서는 어떻게 발현되는지 모호한 측면들이 있다. 죽을 때를 대비해 미리 만든 무덤은 그 죽을 시점에 무덤 문을 따고 들어가야 하는데, 신라의 경우 중고기 이전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있으니, 경주분지를 장식하는 저 거대한 무덤들은 적석목곽분이라 해서, 개중 몇 기를 발굴하기는 했지만, 수릉 흔적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문을 따고 들어가 시신을 나중에 안치하기 위한 시설은 아무래도 적석목곽분은 구조상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으며, 그런 전통은 중고.. 2023. 4. 13.
이성계의 장송의례와 수릉壽陵 태조실록 권제7,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첫 번째 기사로 이성계가 자기가 묻힐 묏자리를 둘러본 일이 다음과 같이 실렸다. 상께서 과주(果州)로 거둥하여 수릉(壽陵) 자리를 살폈다. 돌아올 때 도평의사사 주최로 두모포(豆毛浦) 선상(船上)에서 술상을 차리고 여러 신하가 차례로 술잔을 올렸다. 정도전이 나와서 말하기를 “하늘이 성덕(聖德)을 도와 나라를 세웠으매, 신들이 후한 은총을 입고 항상 천만세 향수(享壽)하시기를 바라고 있사온데, 오늘날 능 자리를 물색하오니, 신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옵니다” 하고 흐느껴 눈물 흘리니, 임금이 말했다. “편안한 날에 미리 정하려고 하는 것인데 어찌하여 우는가?” 왕심촌(往尋村) 노상(路上)에 이르러 임금이 말을 달려 노루를 쏘려 했지만, 마부 박부금(朴夫.. 2018. 2. 11.
수릉壽陵, 자기가 만든 자기 무덤 2017년 2월, 경주 傳 황복사지 인근을 발굴한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 성림문화재연구원은 이곳에서 통일신라시대 미완성 왕릉을 발굴했다면서, 그 성격을 가릉(假陵)이라 규정한 조사성과를 공개했다. 보통 제왕이 자기가 죽어 묻힐 곳으로 생전에 미리 만든 무덤을 수릉壽陵이라 하는데, 그런 용어가 싫다 해서 가릉이라 부르기로 했다고 한다. 아마도 현대 한국사회에서 널리 쓰는 가묘假墓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은 듯한데, 그것이 왕릉에 대한 버전이 가릉일 것이므로, 그 명칭이 가릉이건 가묘건, 임시 무덤을 말한다는 점에서 저 용어 역시 문제는 없지 않다. 분명 조사단에서는 저 무덤이 만들다가 어찌된 이유로 중단하고 폐기한 왕릉이라 해서 저리 이름을 붙였지만, ‘미완성 왕릉’이라 하는 편이 훨씬 그 의미를 명료하게 전.. 2018. 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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