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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隋) 제국 마지막 황제인 황태주(皇泰主)는 글자 그대로는 ‘황태皇泰’라는 연호를 쓴 왕조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수 제국 마지막 황제지만, 실은 허울에 지나지 않은 꼭두각시였다. 본명은 양동(楊侗), 죽은 뒤에 얻은 이름인 시호諡號는 공황제(恭皇帝)였으니, 황제 시호에 ‘恭’자가 들어간 글자 치고 끝이 좋은 이가 없다. 604년, 수 제국을 개창한 문제(文帝)의 증손이면서, 2대 황제 양제(煬帝)의 손자로 태어나 619년 7월에 사망했다. 그가 재위한 기간은 618년 6월 22일 이래 이듬해 5월 23일이니, 11개월 남짓하다. 재위 기간 황태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아버지는 원덕태자(元德太子) 양소(楊昭)이니 그의 둘째 아들이다. 어미는 소유량제(小劉良娣)다.



사약 마시는 단종. 연합DB



양동은 월왕越王에 책봉되어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에 있었다. 그러다가 618년 4월 11일, 양제煬帝가 우문화급(宇文化及)한테 시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런 소식이 동도에 전해진 뒤인 같은 해 5월 24일 무진일에 이 일대 실력자 왕세충(王世充)이 원문도(元文都), 노초(盧楚) 등과 더불어 황제로 옹립하니, 이에서 그를 황태주皇泰主라 일컫는다.


황제 취임과 더불어 왕세충을 이부상서吏部尚書로 삼고 정국공鄭國公에 봉했다. 세충과 더불어 진국공陳國公 단달段達, 내사령內史令 원문도元文都, 내사시랑內史侍郎 곽문의郭文懿, 황문시랑黃門侍郎 조장문趙長文, 내사령內史令 노초(盧楚), 병부상서兵部尚書 황보무일(皇甫無逸)이 새로운 황제를 보필하며 국정을 장악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칠귀七貴’라 불렀다.


하지만 왕세충이 전횡하자 공신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원문도가 세충을 암살하려다가 그 계획이 단달段達에게 누설되고 이를 통해 세충에게 역습을 받아 패몰했다. 원문도는 죽음 직전 황태주에게 말하기를 “신은 오늘 아침에 죽습니다만 폐하는 저녁에 그리 될 것입니다”고 하니 황태주 역시 흐느껴 울었다.


그런 그가 황태(皇泰) 2년 4월 초 계묘일에 마침내 왕세충에게 밀려 폐위되고 함량전(含涼殿)으로 유폐됐다. 그 이틀 뒤 왕세충은 “대정황제大鄭皇帝”라 자칭하고는 “개명開明”이라 연호를 확정하고는 황제에 취임했다. 그러고는 황태주 양동을 격하해 노국공(潞國公)으로 삼으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양동은 부처에게 의지할 뿐이었다.


5월에 이르러 배인기(裴仁基)와 배행엄(裴行儼) 부자가 왕세충을 시해하려다가 계획이 사전에 누설되어 죽임을 당하자, 그 화근이 양동에게 있다고 판단한 왕세충에게 마침내 죽임을 당한다.


그해 6월, 왕세충은 조카 왕인(王仁)과 가복家僕 양백년(梁百年)을 황태주 처소에 보내 짐독으로 죽음을 내렸다. 이 자리에서 황태주는 왕세충이 나중에 황제 자리를 돌려준다는 약속을 했다는 말을 상기하면서 죽음을 피하려 했으니 그 모습이 자못 비장하게 남아 있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황태주는 짐독을 마셨지만, 죽지 않자 목졸림을 당해 생을 마쳤다. 죽음에 이르러 황태주는 향을 사르고 예불하면서 “부디 제왕의 존귀한 가문에서는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다”고 했으니, 이때가 겨우 16세였다. 





한시, 계절의 노래(108)


봉모가(鳳艒歌)


 수(隋) 양제(煬帝) / 김영문 選譯評 


삼월 삼일 삼짇날

강머리에 당도하여


잉어가 상류로

오르는 걸 보았네


낚싯대 잡고 다가가

낚아채려 하면서도


돌아와 쉬는 교룡일까

두려운 마음 들었네 


三月三日到江頭, 正見鯉魚波上遊. 意欲持釣往撩取, 恐是蛟龍還復休.


1960년대 후반에 활동한 가수 배호는 탄식이 섞인 듯한 저음으로 당시에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만 29세에 세상을 떠나 팬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호사가들은 「안개 속으로 가버린 사람」이나 「마지막 잎새」를 들먹이며 그가 이미 노래로 자신의 운명을 드러냈다고 숙덕이곤 했다. 조선시대 가장 뛰어난 천재에 속하는 이율곡은 「화석정(花石亭)」 시 마지막 구절에서 “기러기 소리 저녁 구름 속에 끊긴다(聲斷暮雲中)”라고 읊었다. 이 또한 그의 생이 길지 않음을 드러낸 구절로 식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곤 한다. 이처럼 자신의 노래나 시에 은연중 자신의 운명이 담긴다는 괴담은 오랜 연원을 갖고 있다. 그것을 전문 용어로 시참(詩讖)이라 한다. 위의 시를 지은 작자는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을지문덕 장군에게 일패도지하여 결국 망국의 군주가 된 수 양제다. 그는 대운하를 완공한 후 걸핏하면 화려한 배(鳳艒)를 타고 강도(江都: 揚州)로 순행을 갔다. 위의 시는 그런 과정에서 지은 작품이다. 시는 천박하기 짝이 없지만 시참의 실례로 자주 거론되면서 유명세를 탔다. 즉 둘째 구에 나오는 ‘리어(鯉魚)’는 잉어이지만 기실 ‘리(鯉)’가 ‘리(李)’와 발음이 같기 때문에 당 고조 이연(李淵)을 가리키고, 마지막 구에서 그를 또 교룡(蛟龍)에 비유함으로써 결국 그가 왕이 되는 운명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럴 듯하면서도 다소 의아하다. 그럼 글 쓰는 사람들이 좋은 말만 가려 쓰면 평생 좋은 운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시참의 논리에 의하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말과 좋은 운명만으로 좋은 작품을 쓸 수 없음은 확실하다.

고구려 제26대 왕으로 재위는 590~618. 평양왕(平陽王) 혹은 대흥왕(大興王)이라고도 했다. 이름은 원(元) 또는 대원(大元)이며 평원왕 맏아들이다. 수 문제와 수 양제가 각각 30만 대군과 113만 대군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자 을지문덕을 시켜 살수에서 물리쳤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 영양왕(嬰陽王) <영양(嬰陽)은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원(元)<또는 대원(大元)이라고도 한다>이고 평원왕 맏아들이다. 풍채가 뛰어났다. 세상을 잘 다스려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자신의 일로 여겼다. 평원왕이 재위 7년에 태자로 삼았고, 32년에 왕이 훙하자 태자가 즉위했다. 수나라 문제가 사신을 보내 왕을 상개부 의동삼사(上開府儀同三司)로 삼고, 요동군공의 작위를 이어받게 하였으며, 의복 한 벌을 주었다. 2년(591)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 사은하고 왕을 봉해 주기를 청하니, 황제가 이것을 허락하였다. 3월에 [수나라 황제가]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수레와 의복을 주었다.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사은하였다. 3년(592)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8년(597) 여름 5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9년(598) [봄 2월에] 왕은 말갈의 무리 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를 침략하였는데, 영주(營州) 총관(摠管) 위충(韋)이 이를 격퇴시켰다. 수나라 문제가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노하여 한왕(漢王) 양(諒)과 왕세적(王世積)을 모두 원수(元帥)로 삼아서, 수군과 육군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고구려를] 쳤다. 여름 6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왕의 관작을 빼앗았다. 한왕 양의 군사가 임유관(臨關)으로 나와서 홍수를 만나 군량의 운반이 이어지지 못하자, 군사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또 전염병에 걸렸다. 주라후(周羅)가 동래(東萊)로부터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쳐들어 오다가, 역시 바람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았다. 가을 9월에 [수나라의] 군대가 돌아갔으나 죽은 자가 열 명 중 여덟 아홉이었다. 왕도 역시 두려워하여서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표를 올려 ‘요동 더러운 땅의 신하 모(某)’라고 [스스로] 칭하였다. 황제가 이리하여 군진을 풀고 [고구려를] 처음과 같이 대하였다. 백제왕 창(昌)[위덕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서 군대의 길잡이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고구려가 죄를 자복하여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므로 벌할 수 없다.』고 하고, 그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왕은 그 사실을 알고 백제의 변경을 침략하였다. 11년(600) 봄 정월에 사신을 수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대학박사(大學博士) 이문진(李文眞)에게 명하여 옛 역사책을 요약하여 신집(新集) 5권을 만들었다. 국초에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할 때 어떤 사람이 사실을 100권으로 기록하여 이름을 유기(留記)라고 하였는데, 이 때에 와서 깎고 고친 것이다. 14년(603) [가을 8월에]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쳤다. 신라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니, 성안에서는 북치고 소리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은 저들이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18년(607) 이전에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하였을 때 우리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는데, 계민이 감히 숨기지 못하고 함께 황제를 알현하였다. 황문시랑(黃門侍郞) 배구(裵矩)가 황제에게 말하였다. “고구려는 본래 기자(箕子)에게 봉해진 땅으로, 한(漢)나라와 진(晉)나라가 모두 군현으로 삼았습니다. 지금 신하노릇을 하지 않고 따로 이역(異域)이 되었으므로 선제께서 정벌하려고 한 지 오래됩니다. 다만 양량(楊諒)이 불초하여 군대가 출동했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폐하의 때를 당하여 어찌 취하지 않음으로써 예의가 바른 지경을 오랑캐의 고을로 만들겠습니까? 지금 그 사신은 계민이 온 나라를 들어 복종하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해서 위협하여 입조하게 하십시오.” 황제가 그 말에 따라 우홍(牛弘)에게 명하여 칙명을 내리게 하였다. 『짐은 계민이 성심껏 나라를 받들기 때문에 친히 그 장막으로 왔다. 내년에는 마땅히 탁군(=郡)으로 갈 것이다. 네가 돌아가는 날, 너의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회하고 스스로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아뢰어라. 위문하고 양육하는 예는 마땅히 계민의 경우와 같이 할 것이다. 만약 조회하지 않으면 장차 계민을 거느리고 너희 땅으로 순행할 것이다.』 왕은 번신(藩臣)의 예를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황제가 쳐들어 올 것을 두려워하였다. 계민은 돌궐의 가한(可汗)이다. 여름 5월에 군대를 보내 백제 송산성(松山城)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고, 석두성(石頭城)으로 옮겨 습격하여 남녀 3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왔다.19년(608) 봄 2월에 장수에게 명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았다. 여름 4월에 신라 우명산성(牛鳴山城)을 함락시켰다. 22년(611) 봄 2월에 양제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토벌하게 하였다. 여름 4월에 [황제의] 행차가 탁군의 임삭궁(臨朔宮)에 이르니,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으로 모였다. 23년(612) 봄 정월 임오(壬午)에 황제가 조서를 내렸다. 『고구려의 보잘 것 없는 무리들이 미욱스럽고 공손하지 못하여, 발해(渤海)와 갈석(喝石) 사이에 모이고, 요수(遼水)와 예수(濊水)의 경계를 거듭 잠식하였다. 비록 한(漢)나라와 위(魏)나라가 거듭 주륙하여 소굴이 잠시 위태로왔으나, 난리로 막힘이 많자 부족이 다시 모여, 지난 시대에 냇물과 수풀처럼 모여, 지금까지 번창하였다. 돌아보건대 저 중국의 땅이 잘리어 오랑캐의 부류가 되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악이 쌓여 가득차니, 하늘의 도가 음란한 자에게 재앙을 내리고, 망할 징조가 이미 나타났다. 떳떳한 도를 어지럽히고 덕을 무너뜨림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악을 가리고 간사함을 품은 것은 [헤아리기에] 날이 오히려 부족할 정도이다. [조서를] 보내 엄격히 알린 것도 일찍이 면대(面對)하여 받지 않았으며, 조정에 알현하는 예도 몸소 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도망간 반도(叛徒)들을 꾀어냄이 끝닿는 데 모르고, 변방에 가득하여 봉후(烽候)를 괴롭히니, 문빗장과 딱다기가 이로써 조용하지 못하고, 백성이 그로 말미암아 생업을 폐하게 되었다. 옛날에 정벌할 때 하늘의 그물에서 빠졌으며, 이전에 사로잡아 죽일 것도 늦추어주고, 뒷날 복종하여 목베임도 당하지 않게 해주었는데, 일찍이 은혜를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쌓아, 거란의 무리를 합쳐서 바다의 수자리 군사들을 죽이고, 말갈의 습관을 익혀 요서를 침범하였다. 또 청구(靑丘)의 바깥에서 모두 직공(職貢)을 닦고, 벽해(碧海)의 가장자리에서 함께 정삭을 받드는데, 드디어 다시 보물을 빼앗고 왕래하는 길을 막아, 죄없는 사람들에게 잔학함이 미쳤으니, 정성을 바치고도 화를 당하게 되었다. 수레를 탄 사신이 해동에 미치고, 정절(旌節)이 도달하려면, 번국의 경계를 지나야 하는데, 도로를 막고 왕의 사신을 거절하여, 임금을 섬길 마음이 없으니, 어떻게 신하의 예라고 할 수 있느냐? 이래도 참는다면 무엇을 용납하지 못할 것이냐? 또 법령이 가혹하고 부세가 번거롭고 무거우며, 힘센 신하와 호족이 모두 국정의 기틀을 쥐고, 붕당끼리 결탁하는 것으로 풍속을 이루고, 뇌물을 주고 받음이 물건을 사고 파는 것과 같아서, 억울함이 풀어지지 않는다. 해마다 거듭된 재앙과 흉년으로 집집마다 기근이 닥치고, 전쟁이 쉬지 않아 요역이 기한이 없으니, 군량 운반으로 힘이 다하고 [죽은] 몸뚱아리가 도랑과 구덩이를 메웠다. 백성들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우니 누구를 따를 것이냐? 경내(境內)가 슬프고 두려워 그 폐해를 견디지 못하였다. 머리를 돌려 안으로 보고 제각기 생명을 도모할 생각을 품고, 노인과 어린이들도 모두 혹독하다는 탄식을 일으킨다. 풍속을 살피고 유주, 삭주(朔州)에 이르러 사람들을 위로하고 죄를 묻는 일이 두번 걸음하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이리하여 친히 6사(六師)를 거느리고 9벌(九伐)을 펴서, 위태함을 구제하여 하늘의 뜻에 따르며 이 달아난 무리를 멸하여 능히 선대의 교훈을 이으려 한다. 지금 마땅히 군율을 내려 출발하고 지휘를 나누어서 길에 이르러, 발해를 덮쳐 천둥같이 떨치고, 부여를 지나 번개같이 쓸어 버리리라. 방패를 가지런히 하고 갑옷을 살피고, 군사들에게 경계하여 일러둔 후에 출행하며, 거듭 알리고 타일러서 필승을 기한 후에 싸우라. 왼쪽 12군(軍)은 누방(鏤方) ·장잠(長岑) ·명해(溟海) ·개마(蓋馬) ·건안(建安) ·남소(南蘇) ·요동(遼東) ·현도 ·부여 ·조선 ·옥저 ·낙랑 등 길로 나아가고, 오른쪽 12군은 염제(蟬) ·함자(含資) ·혼미(渾彌) ·임둔(臨屯) ·후성(候城) ·제해(堤奚) ·답돈(踏頓) ·숙신 ·갈석 ·동이(東) ·대방(帶方) ·양평(襄平) 등 길로 나아가서, 연락이 끊어지지 않게 길을 이어 가서 평양에 모두 집결하라.』 모두 1,133,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남쪽의 상건수(桑乾水) 가에서 사제(社祭)를 지내고, 임삭궁(臨朔宮) 남쪽에서 상제(上帝)에 제사지내고, 계성(城) 북쪽에서 마조성(馬祖星)에 제사지냈다. 황제가 친히 조절하여 군대마다 상장(上將)과 아장(亞將)을 각각 1명씩 두고, 기병은 40대(隊)로 하고, 각 대는 100명, 10대가 1단(團)이 되게 하였으며, 보병은 80대로 하고 나누어 4단으로 하였으며, 단마다 각각 편장(偏將) 1명을 두었다. 그 갑옷, 투구, 갓끈, 인장끈, 깃발은 단마다 색깔을 다르게 하였다. 매일 1군씩을 보내 서로 40리 떨어지게 하고 진영을 연이어 점차로 나아가니, 40일만에야 발진이 다 끝났다. 앞과 뒤가 서로 이어지고 북과 나팔소리가 서로 들리고 깃발이 960리에 뻗쳤다. 어영(御營) 안에 12위(衛)·3대(臺)·5성(省)·9시(寺)를 합쳐서 나누어 소속시키고, 내외 전후 좌우(內外前後左右) 6군을 뒤에 출발시켜 또 80리나 뻗쳤으니, 근고에 군대 출동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2월에 황제가 군대를 지휘하여 요수(遼水)에 이르니 여러 군대가 모두 모여 물가에 다다라 큰 진을 이루었으나, 우리 군사가 강을 막고 지켰으므로 수나라 군사가 건너오지 못하였다. 황제가 공부상서(工部尙書) 우문개(宇文愷)에게 명하여 요수 서쪽 언덕에서 세 개의 부교(浮橋)를 만들게 하였는데, 완성되자 끌어다 동쪽 언덕으로 갔으나 짧아서 한 길 남짓하게 언덕에 미치지 못하였다. [이때] 우리 군사들이 크게 닥치자 수나라 군사로서 날래고 용감한 자들은 다투어 물가로 나아와 접전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 공격하니, 수나라 군사들은 언덕에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맥철장(麥鐵杖)이 언덕으로 뛰어 올라갔으나 전사웅(錢士雄) ·맹차(孟叉) 등과 함께 모두 전사하니, 이에 군사를 거두어 다리를 끌고 서쪽 언덕으로 돌아갔다. 다시 소부감(少府監) 하조(何稠)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는데, 우리 군사들은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을 포위하니 [이 성은] 곧 한나라의 양평성(襄平城)이었다. 황제가 요하에 이르자 조서를 내려 천하에 사면을 베풀고, 형부상서(刑部尙書) 위문승(衛文昇) 등에게 명하여 요하 동쪽의 백성들을 위무하게 하고, 10년 동안 조세를 면제해주고 군현을 두어 서로 통섭하게 하였다. 여름 5월. 이전에 여러 장수가 동쪽으로 내려올 때 황제가 경계하여 말하였다. “모든 군사 일의 나아가고 멈춤을 반드시 나에게 아뢰어 회답을 기다릴 것이며 제멋대로 하지 말아라.” 요동에서 [우리 군사는] 자주 나가 싸우다가 불리하면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군대에게 명하여 공격하게 하고, 또 여러 장수에게 “고구려가 만약 항복하면 마땅히 어루만져서 받아들일 것이며 군사를 풀지 말라.”고 명하였다. 요동성이 함락되려 하자 성 안의 사람들은 문득 항복을 청한다고 하였다. 여러 장수가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때에 맞추어 바로 가지 못하고, 먼저 [사람을] 시켜 급히 아뢰었는데, 회답이 올 때는 성 안의 방어도 역시 갖추어져 적절히 나가 항거하여 싸웠다. 이렇게 하기를 두세 번 거듭하였으나 황제가 끝내 깨닫지 못하였으며, 그후 성은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았다. 6월 기미(己未)[11일]에, 황제가 요동성 남쪽으로 행차하여 성과 못의 형세를 살펴보고 여러 장수를 불러 힐책하였다. “그대들은 스스로 관직이 높기 때문에 또 가문을 믿고 나를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으로 대접하려 하느냐? 수도에 있을 때 그대들은 모두 내가 오는 것을 원치 않았으니 [그것은] 낭패를 볼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이곳에 온 것은 바로 그대들의 소행을 보고 그대들의 목을 베려는 것이다. 그대들이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여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는 것은, 내가 그대들을 죽이지 못할 것으로 여겨서이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두려워 떨며 얼굴빛을 잃었다. 황제가 이에 [요동]성의 서쪽 수 리 떨어진 곳에 머물러 육합성(六合城)에 거하였는데, 우리의 여러 성들은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다. 좌익위대장군(左翊衛大將軍) 내호아(來護兒)가 강회(江淮)의 수군을 거느리고 배를 수백 리에 뻗쳐서 바다를 건너 먼저 패수(浿水)로부터 들어와서, 평양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우리 군사와 서로 맞닥뜨리자 진격하여 이를 크게 깨뜨렸다. [내]호아가 승세를 타고 성으로 달려오려고 하였으나, 부총관(副摠管) 주법상(周法尙)이 말리며, 여러 군대가 오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갈 것을 청하였다. [내]호아가 듣지 않고 정병 수만 명을 뽑아 곧바로 성 밑에 이르렀다. 우리 장수는 나성 안의 빈 절 속에 군사를 숨겨 두었다가, 군사를 내어 [내]호아와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하였다. [내]호아가 쫓아 성으로 들어와서 군사를 놓아 약탈하느라고 다시 대오를 갖추지 못하였다. [이때] 숨은 군사들이 나가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고 겨우 죽음을 면하였으며, 병졸이 돌아간 자가 불과 수천 명이었다. 우리 군대는 뒤쫓아 배 있는 곳까지 이르렀으나, 주법상이 진영을 정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으므로, 우리 군대는 이에 후퇴하였다. [내]호아가 군사를 이끌고 바닷가 포구로 돌아가 주둔하였으나, 다시는 감히, 머무르면서 여러 군대에 호응하지 못하였다. 좌익위대장군 우문술(宇文述)은 부여도(扶餘道)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右翊衛大將軍) 우중문(于仲文)은 낙랑도로 나오고,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로 나오고, 우익위대장군 설세웅(薛世雄)은 옥저도로 나오고,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은 현도도로 나오고, 우어위장군(右禦衛將軍) 장근(張瑾)은 양평도(襄平道)로 나오고, 우무후장군(右武候將軍) 조효재(趙孝才)는 갈석도로 나오고, 탁군태수 검교좌무위장군(檢校左武衛將軍) 최홍승(崔弘昇)은 수성도(遂城道)로 나오고, 검교우어위호분랑장(檢校右禦衛虎賁郎將) 위문승(衛文昇)은 증지도(增地道)로 나와서 모두 압록수 서쪽에 모였다. [우문]술 등의 군사는 노하(瀘河)·회원(懷遠) 두 진에서부터 사람과 말에게 모두 100일 동안의 군량을 주고, 또 방패, 갑옷, 창과 옷감, 무기, 화막(火幕)을 나누어 주니, 사람마다 3섬 이상이 되어 무거워 능히 운반할 수 없었다. 군중에 명령을 내려 “군량을 버리는 자는 목을 베겠다.”고 하였으므로, 사졸들이 모두 군막 밑에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행군이 겨우 중도에 미쳤을 때 군량이 이미 떨어지려 하였다. 왕은 대신(大臣) 을지문덕(乙支文德)을 보내 그 진영에 가서 거짓으로 항복하였는데, 실은 그 허실을 보려 한 것이었다. 우중문이 앞서 “만약 왕이나 을지문덕이 오면 반드시 사로잡으라.”는 황제의 비밀 명령을 받았다. [우]중문이 그를 잡으려고 하였으나,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이 위무사(慰撫使)로서 굳이 말리므로, [우]중문이 마침내 그 말에 따라 [을지]문덕을 돌아가게 하였다. 얼마 후에 그것을 후회하고 사람을 보내 [을지]문덕을 속여 “다시 이야기하고 싶으니 다시 오시요.”라고 하였으나, [을지]문덕은 돌아보지도 않고 압록수를 건너 가버렸다. [우]중문과 [우문]술 등은 [을지]문덕을 놓치고 속으로 불안하였다. [우문]술은 군량이 떨어졌으므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우]중문이 정예군으로 [을지]문덕을 쫓으면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우문]술이 이것을 굳이 말리니 [우]중문이 성내며 말하였다. “장군은 10만 군사에 의지하고도 작은 도적을 깨뜨리지 못하였으니 무슨 낯으로 황제를 뵈올 것이요? 또한 [나] [우]중문은 이번 걸음에 본래 공로가 없을 것을 알고 있었소. 왜냐하면 예전의 훌륭한 장수가 능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군중의 일을 결정하는 것이 한 사람에게 있었는데, 지금 사람마다 각각 다른 마음을 가졌으니, 어떻게 적을 이길 수 있겠소?” 이때 황제는 [우]중문이 계획이 있을 것으로 여겨, 여러 군대로 하여금 [그에게] 지휘를 묻고 품의하게 하였으므로, 이 말을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우문]술 등이 부득이 그의 말에 따라, 여러 장수와 함께 물을 건너 [을지]문덕을 쫓았다. [을지]문덕은 [우문]술의 군사들에게 굶주린 기색이 있는 것을 보고, 짐짓 그들을 피곤하게 만들려고 매번 싸울 때마다 도망가니, [우문]술이 하루 동안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우문술이] 이미 여러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강제되어, 이리하여 마침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자를 보내 거짓 항복하며 [우문]술에게 청하였다. “만약 군대를 돌리시면 왕을 모시고 [황제의] 행재소로 알현하겠습니다.” [우문]술은 사졸들이 피로하고 쇠약해져 다시 싸울 수 없는 것을 보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튼튼하여서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을 헤아리고, 마침내 그 속임수에 따라 되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형의 진을 이루고 행군하였는데, 우리 군대가 사방에서 습격하니 [우문]술 등이 한편 싸우며 한편 행군하였다. 가을 7월에 [수나라 군대가]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우리 군사가 뒤에서 후군을 쳤으므로,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 압록수에 이르러 450리를 행군하였다. 장군인 천수(天水) 사람 왕인공(王仁恭)이 후군이 되어 우리 군대를 쳐서 물리쳤다. 내호아는 [우문]술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역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으며, 오직 위문승의 1군만이 홀로 온전하였다. 처음 9군이 요하를 건넜을 때는 무릇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으로 돌아가 다달았을 때는 겨우 2천7백 명이었으며, 쌓아둔 기계가 억만을 헤아렸으나 모두 잃어버려 없어졌다. 황제가 크게 노하여 [우문]술 등을 쇠사슬로 묶고 계묘일[25일]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전에 백제 왕 장(璋)[무왕]이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고구려를 칠 것을 청하니, 황제가 [백제를] 시켜 우리 나라의 동정을 엿보게 하였으나, 장은 안으로 우리나라와 몰래 통하였다. 수나라 군대가 장차 출동하려 하자, 장은 그 신하 국지모(國智牟)를 수나라에 들여보내 출병할 시기를 알려줄 것을 청하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후하게 상을 주고, 상서기부랑(尙書起部郞) 석률(席律)을 백제에 보내 모일 시기를 알렸다. 수나라 군대가 요하를 건너자, 백제도 역시 국경에 군사를 엄히 배치하고 말로는 수나라를 돕는다고 하면서, 실은 양다리를 걸치었다. 이 정벌에서 [수나라는] 다만 요수 서쪽에서 우리 무려라(武邏)를 함락시키고, 요동군과 통정진(通定鎭)을 두었을 뿐이다. 24년(613) 봄 정월에 황제가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징발하여 탁군에 모으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로 삼고, 요동 옛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2월에 황제가 가까이 모시는 신하에게 “고구려 같은 보잘 것 없는 오랑캐가 상국을 업신여긴다. 지금 바다를 뽑고 산을 옮길 일이라도 할 수 있기를 바라는데 하물며 이 오랑캐쯤이야?”라고 말하고, 다시 정벌할 것을 의론하였다. 좌광록대부(左光祿大夫) 곽영(郭榮)이 간하였다. “오랑캐가 예의에 벗어나는 것은 신하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천균(千鈞)의 쇠뇌는 새앙쥐를 잡기 위해서 쏘지 않는 법인데, 어찌 몸소 천자의 지위를 욕되게 하면서 작은 도적을 상대하려 하십니까?” 황제가 듣지 않았다. 여름 4월에 황제가 요하를 건너서, 우문술과 양의신(楊義臣)을 보내 평양으로 향하게 하였다. 왕인공이 부여도로 나와서 진군하여 신성(新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 수만 명은 막아 싸웠다. [왕]인공이 굳센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으므로, 우리 군사는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황제가 여러 장수에게 명하여 요동을 공격하였는데 편의에 따라 일을 처리하게 하였으므로, 비루(飛樓)·동차(車)·운제(雲梯)·지도(地道)로 사면에서 함께 진격하여 밤낮으로 쉬지 않았다. 우리는 임기응변으로 막았으므로 20여일 동안 함락되지 않고, 적과 아군에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충제(衝梯)의 장대의 길이가 15길이었는데, 효과 심광(沈光)이 그 꼭대기에 올라가 성을 내려다 보면서 우리 군사와 싸우는데 칼을 가지고 맞붙어 십수 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는 다투어 그를 공격하여 [그가] 떨어지게 되었는데, 미처 땅에 떨어지기 전에 마침 장대에 줄이 늘어져 있어, [심]광이 [거기에] 매달려 다시 올라갔다. 황제가 그것을 보고 장하게 여겨 즉시 조산대부(朝散大夫)에 임명하였다. 요동성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자, 황제가 베 주머니 백여만 개를 만들어 보내 [그 속에] 흙을 가득 넣어 쌓아서 어량대도(魚梁大道)를 만들었는데, 넓이가 30보나 되고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하여 전사들이 올라가 공격하게 하였다. 또 바퀴 여덟 달린 누거(樓車)를 만들었는데, 성보다 높게 하여 어량도를 끼고 성 안을 내려다 보고 쏘면서 기일을 정해 장차 공격하려고 하였으므로, 성 안은 매우 위급하였다. 마침 양현감(楊玄感)이 반역하였다는 글이 오니 황제가 크게 두려워하였으며, 또 고관의 자손들이 모두 [양]현감이 거처하는 곳에 있다는 것을 듣고 더욱 염려하였다. 병부시랑(兵部侍郞) 곡사정(斛斯政)이 본래 [양]현감과 친하였으므로 속으로 불안하여 [우리에게] 도망하여 왔다. 황제가 밤에 여러 장수를 몰래 불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군수품과 기계와 공격용 도구가 산처럼 쌓였고, 보루와 장막이 그대로여서 움직이지 않았으나, 무리의 마음이 떨며 두려워져 다시 부서를 나눌 새도 없이 여러 길로 흩어졌다. 우리 군사는 즉시 이것을 깨달았으나 감히 나가지 못하고 다만 성안에서 북치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다음날 오시(午時)가 되어 그제야 점차 밖으로 나갔으나, 수나라 군사가 속이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의심하였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수천 명의 군사를 내어 뒤를 밟아 쫓았으나, 수나라 군사가 많은 것을 두려워하여 감히 압박하지 못하고, 항상 8, 90리의 거리를 두었다. 요수에 거의 이르러서 황제의 병영이 다 건넌 것을 알고는 그제야 감히 후군을 압박하였다. 이때 후군도 수만 명이나 되었는데 우리 군사는 좇아가 습격하여 수천 명을 죽였다. 25년(614) 봄 2월에 황제가 모든 신하들에게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정벌할 일을 의론하게 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조서를 내려 천하의 군사를 다시 징발하여 여러 길로 함께 진군하게 하였다. 가을 7월에 황제의 수레가 회원진(懷遠鎭)에 행차하였다. 이때 천하가 이미 어지러워져서 징발된 군사들이 기일을 어기고 도달하지 못한 자가 많았으며, 우리 나라도 역시 지쳐 있었다. 내호아가 비사성(卑奢城)에 이르자 우리 군사가 맞아 싸웠으나, 내호아가 쳐서 이기고 평양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왕은 두려워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고, 그에 따라 곡사정을 돌려 보내니, 황제가 크게 기뻐하고 절부를 가진 사신을 보내 내호아를 소환하였다. 8월에 황제가 회원진으로부터 군대를 돌이켰다. 겨울 10월에 황제가 서경(西京)으로 돌아가서 우리 사신과 곡사정을 데리고 대묘(大廟)에 고하고, 이내 왕을 불러 입조하게 하였으나, 왕은 끝내 따르지 않았다. [황제가] 장수에게 명하여 무장을 엄하게 하고 다시 후일의 거사를 꾀하였으나 마침내 실행하지 못하였다. 29년(618) 가을 9월에 왕이 죽었다. 왕호를 영양왕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6대 영양왕(嬰陽王)은 평양(平陽)이라고도 한다. 이름은 원(元)인데 대원(大元)이라고도 한다. 경술년(590)에 즉위해 38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45(열전 제5) 온달 전 : 영양왕(嬰陽王)이 즉위하자 온달이 아뢰었다.“신라가 우리 한강 이북의 땅을 빼앗아 군현을 삼았으니, 백성들이 심히 한탄하여 일찍이 부모의 나라를 잊은 적이 없습니다. 원컨대 대왕께서는 어리석은 이 신하를 불초하다 하지 마시고 군사를 주신다면 한번 가서 반드시 우리 땅을 도로 찾아오겠습니다.” 왕이 허락했다. 떠날 때 맹세하기를 “계립현(鷄立峴)과 죽령(竹嶺) 이서(以西) 땅을 우리에게 귀속시키지 않으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고는 나가 신라 군사들과 아단성(阿旦城) 아래에서 싸우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넘어져 죽었다. 장사를 지내려 하니 상여가 움직이지 아니하므로 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아아 돌아갑시다”고 했다. 마침내 들어 장사하니 대왕이 듣고는 몹시 슬퍼했다.  

삼국사기 권 제20 고구려본기 제8 영류왕 즉위년 : 영류왕(榮留王)은 이름이 건무(建武)<또는 성(成)이라고도 하였다.>이며, 영양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영양왕이 재위 29년에 죽었으므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 45년(598) 가을 9월에 왕은 장사(長史) 왕변나(王辯那)로 하여금 수나라에 들어가 조공하게 하였다. 왕은 수나라가 요동(遼東)에서 전쟁[遼東之役]을 일으킨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표를 올려 군(軍)의 길잡이[軍道]가 되기를 청하였다.황제가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왕년에 고구려가 공물을 바치지 아니하고 신하로서의 예가 없었기 때문에 장수에게 명하여 토죄(討罪)하게 하였다. 고원(高元)[영양왕]의 군신들이 두려워하고 복종하며 죄를 청하기에 짐이 이미 용서하였으니 정벌을 할 수가 없다.』 [수나라는] 우리 사자를 후히 대접하여 돌려보냈다. 고구려가 자못 그 사실을 알고 군사로써 국경에 쳐들어와 약탈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시호를 위덕(威德)이라고 하였다.

☞고원(高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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