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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ing has finally come over a twin-mounded tomb from the Silla kingdom period at Daereungwon, or the Great Tumuli Park , Gyeong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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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왕, 경쟁자가 폭우에 발 묶인 틈타 대권 차지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5.07 02:44 | 530호 23면 

  

대권(大權)은 우연의 소산일까 아니면 운명의 장난일까? 혹은 하늘의 의지일까? 이런 물음에 전근대 동아시아 이데올로그들은 언제나 천명(天命)을 거론했다. 실제로 천명이 작동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론 그러했다. 하지만 추잡한 권력투쟁을 천명이란 이름을 빌려 포장한 데 지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선덕왕 후계 언급 없이 타계하자

김경신·김주원 치열한 왕권 경쟁

김주원, 큰 비 내려 건너 오지 못해

하늘의 뜻이라며 김경신 왕위 계승

김주원을 명주군의 왕에 책봉


신라는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과 그에 따른 세계 제국 당(唐)과의 일전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절대 번영을 구가했지만, 소나무가 언제나 푸를 수는 없었다. 그 피로감이 극에 달하자 체제가 흔들리는 징후를 곳곳에서 보였다. 마침내 100년 정도가 흐르자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기 시작하면서 낯선 장면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왕위 계승전쟁이 그것이다. 제38대 원성왕(元聖王·재위 785~798년) 역시 이 와중에 힘으로 대권을 쟁취한 인물이다.


그를 일컬어 삼국사기 그의 본기에는 “이름은 경신(敬信)이며, 내물왕(奈勿王) 12대손이다. 어머니는 박씨 계오부인(繼烏夫人)이며, 왕비는 김씨이니 각간(角干·신라시대 최고 관위) 신술(神述)의 딸이다”고 했다. 이어 그가 대권을 쥐게 된 과정을 다음과 같이 이어 간다.


“혜공왕(惠恭王·재위 765~780년) 말년에 신하들이 반역하여 날뛰니 선덕(宣德)이 당시에 상대등이 되어 임금의 측근 중 나쁜 무리를 제거할 것을 앞장서 주장하니 경신이 그를 도와 반란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자, 선덕이 왕위에 오르자마자 바로 상대등으로 삼았다.”


36대 혜공왕은 신라사의 마지막 평화기라 일컬을 시대를 구가한 경덕왕의 아들로 즉위했지만, 재위기간 내내 평안한 해가 없다시피 했다. 게다가 경주 일대를 대지진이 여러 차례 덮쳐 막대한 피해를 내니 더욱 뒤숭숭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은 언제나 이런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혹은 그것을 조장하면서 싹을 틔우게 마련이다. 왕은 유약한 데다 환락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재위 16년(780)에 접어들어 정월에는 누런 안개가 끼고, 2월에는 흙비가 내리더니, 마침내 이찬(伊飡·신라 17등관계 중 둘째) 김지정(金志貞)이라는 고위 관료가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포위한 채 왕을 공격했다.


반란 진압하고 왕위에 오른 선덕왕


이 반란은 여름 4월에야 끝난다. 일인지하 만인지상에 해당하는 상대등(上大等·국무총리) 김양상(金良相)이 이찬 김경신과 함께 쿠데타군을 진압했다. 그러나 이 와중에 임금과 왕비는 살해된다. 난세는 영웅을 낳는다. 이제 차기 대권이 누구로 가느냐가 남았다. 당연히 힘을 쥔 이는 반란 진압에 혁혁한 공을 세운 김양상과 김경신 일당이었다. 이들은 제3자를 세우는 대신 자신들이 직접 전면에 나서는 길을 선택했다. 김양상이 먼저 왕위에 오르니, 그가 죽은 뒤 선덕(宣德)이라는 시호를 받은 인물이다.


김양상이 즉위할 때 나이가 얼마였는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직전 직위가 원로대신의 대표자에 해당하는 이에게 주어지는 상대등이었던 사실에 견주어 볼 때 상당한 고령이었다고 짐작할 뿐이다. 그런 까닭에 그가 장기간 재위하면서 안정된 국정을 이끌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었다. 더구나 권력을 다른 쿠데타 주도 세력들과 사실상 분점한 상태나 다름없었으니, 정권기반은 취약했던 듯하다.


예상대로 그는 재위 6년 만 인 785년 봄에 타계한다. 한데 이상한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그의 유언이 있지만, 후계자에 대해선 어떤 언급도 없다. 이는 곧 왕위계승을 둘러싼 내분의 예고편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와중에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등장한 이가 김경신과 김주원(金周元)이었다. 둘은 선덕왕 말년에 이르러 치열한 왕권투쟁을 벌인다. 이 전투에서 마침내 김경신이 승리하니 이가 곧 원성왕이다.


이 권력투쟁이 처음부터 김경신에게 유리하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는 김주원이 주도권을 쥐었다는 것을 『삼국사기』 원성왕본기 기록이 증언한다.


“선덕왕이 죽자 아들이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논의한 끝에 왕의 조카뻘인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했다. 이때 주원은 서울(京) 북쪽 20리 되는 곳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閼川) 물이 불어 주원이 건널 수가 없었다. 어느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이라는 큰 자리는 본디 사람이 어찌할 수 없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앞선 임금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모가 있다’고 했다. 이에 여러 사람의 의논이 일치되어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케 했다. 이윽고 비가 그치니 경성 사람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


어쩐지 개운찮은 조작의 냄새가 난다. 폭우가 조작됐다는 뜻이 아니라, 그 일을 빌미로 천명이란 명분을 앞세워 정권이 김경신에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음을 정당화한 구절이란 의심이 가시지 않는 대목이다. 알천이란 경주 분지를 관통하는 형산강으로 흘러드는 지류 중 하나다. 북쪽을 관통한다 해서 북천(北川)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상류를 막은 덕동댐과 보문호 때문에 평소 수량은 ‘도랑’ 수준을 넘지 못하지만, 신라시대에는 홍수 피해가 극심했던 모양이다. 공교롭게도 선덕왕 김양상이 죽자 폭우가 쏟아져 알천이 범람하고, 이는 김주원에게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작용했다. 유감스럽게도 신라왕궁 월성은 알천 남쪽에 있었던 것이다. 문헌에는 그런 기록이 없지만, 그의 경쟁자인 김경신은 월성 가까운 곳에 근거지가 있었던 듯하다. 결국 김주원은 폭우로 불어난 알천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며, 대권의 꿈을 접어야 했다.


좀 더 상세한 일화가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원성대왕(元聖大王)’ 조에 전해 온다. 이에 따르면 선덕왕이 죽을 무렵 김주원은 이찬이자 상재로, 각간인 김경신보다 직위도 높았다고 한다. 이런 김경신이 하루는 꿈을 꾸었다. 그가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쓰고 열두 줄 가야금을 들고 천궁사(天官寺)라는 사찰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이었다. 꿈에 대한 해석은 달랐다. 한 점쟁이는 “복두를 벗은 것은 관직을 잃을 징조요, 가야금을 든 것은 칼을 쓸 징조요, 우물 속으로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징조”라고 해몽을 했다.


하지만 이 꿈을 들은 아찬(阿飡신라 17등 관제 중 여섯째) 여삼(餘三)이라는 사람이 전연 다른 해석을 내놨다. “복두를 벗은 것은 위에 앉는 이가 없다는 뜻이요, 흰 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요, 열두 줄 가야금을 든 것은 12대손(代孫)이 왕위를 이어받을 징조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궐에 들어갈 상서로운 징조입니다.”


이 해몽을 들은 김경신이 “내 위에 주원(周元)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상위(上位)에 있을 수가 있단 말이오?”라고 반문하니, 여산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 지내면 좋은 일이 생길 것이다”고 하니 이에 따랐다고 한다. 북천신은 말할 것도 없이 북천인 알천을 지배하는 신이다. 이런 북천신에게 기도했더니, 북천이 홍수로 넘쳐 라이벌인 김주원을 제치고 김경신이 왕이 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김주원, 오늘날 강릉 김씨 시조


그렇다면 김경신에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어찌 되었을까. 또 왕이 된 김경신은 김주원을 어떻게 처리했을까. 하늘에 태양이 둘일 수 없으므로, 보통은 경쟁자를 각종 명목을 달아 처단 멸족해야 한다. 하지만 김경신은 김주원을 그리 대접하지 않았다. 아니,그리할 힘이 없었다. 어느 한 쪽이 압도적인 힘의 우위를 확보하지 못할 땐 서로가 사는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요즘 정치권에서 유행하는 협치(協治)나 연정(聯政)쯤에 해당하는 공생의 길을 선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인물 조에는 김주원이 왕위에서 밀려난 후 “화를 당할까 두려워해서 명주(지금의 강릉 일대)로 물러나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뒤에 (원성왕이)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책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근을어·울진 등의 고을을 떼서 식읍(食邑·신하에게 내린 토지)으로 삼게 했다. 자손이 이로 인해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것이 오늘날 강릉 김씨의 탄생 배경이다.


이렇게 해서 명주는 그 아들 김종기(金宗基), 손자 김정여(金貞茹), 증손 김양(金陽)에 이르기까지 4대에 걸쳐 김주원 후손의 작은 왕국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김주원은 강릉을 선택했을까? 그곳이 아마 그의 가문과 인연이 깊었던 곳이었던 것 같다. 더구나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던 데다 신라로서는 북방이었던 까닭에 원성왕 김경신으로서도 그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해로울 건 없다고 판단한 것 같다. 1200여 년 전의 일이지만 협치의 도량이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막은 경우로 봐야 할 것 같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오빠 김유신 빼다박은 야망가, 남편 죽자 태후 돼 권력 농단

[중앙선데이] 입력 2017.03.05 02:03 | 521호 23면 

  

페르시아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로 키루스(Cyrus) 2세, 또는 키루스 대제라 일컫는 인물이 있다. 기원전 576년경 제위에 올라 기원전 530년에 사망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를 개창한 그는 성서에는 고레스 왕으로 등장한다. 그의 치세에 페르시아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리디아를 무너뜨리고 중동의 패자가 된다.영웅에게는 어울리는 탄생담이 있게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언니의 오줌 꿈 사 춘추와 결혼

큰아들 법민은 통일 후 당 축출

나머지 아들 8명은 각간 등 지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목표 이뤄


키루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지방을 다스리던 군주 캄뷔세스(Cambyses) 1세와 메디아 제국 마지막 황제 아스튀아게스(Astyages)의 딸 만다네(Mandane)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스튀아게스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만다네가 어마어마한 양의 오줌을 누어 그의 도시가 잠기고 온 아시아가 범람하는 내용이었다.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버지는 해몽가들에게 물었다.『 역사』에서는 “그들의 해몽을 자세히 들은 그가 겁이 났다”고 한다. 이는 온 세상을 뒤엎을 영웅을 딸이 낳는다는 예고이면서 아스튀아게스에게는 자신의 왕조와 왕국을 외손자에게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러자 아버지는 메디아인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지 않고, 캄뷔세스라는 페르시아인에게 딸을 시집보낸다.


시집간 첫 해,아스튀아게스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딸의 생식기에서 포도 한 그루가 자라나더니 온 아시아를 덮는 것이 아닌가. 이 역시 해몽가들이 말하는 내용은 오줌 꿈과 같았다. 이에 더욱 불안해진 아버지는 임신 중인 딸을 페르시아에서 불러들여 감시하면서 딸이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그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다. “딸이 낳은 아이가 그를 대신해 왕이 될 것이란 마고스들의 해몽 때문이었다”고 헤로도토스는 말한다. 하지만 영웅은 언제나 이런 위기를 벗어난다.


문명왕후 된 김서현의 막내딸

 

이와 흡사한 오줌 꿈 이야기가 신라에도 있다. 아버지 유업을 이어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한 문무왕 김법민(金法敏)이 주인공이다. 그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니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자 김유신의 동생이다. 문명은 문희가 왕비가 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탄생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그 언니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소’라고 했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렀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언니인)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매게 했다. 하지만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매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렀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이다.”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수록된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이야기에도 나오는 것으로 볼때, 오줌 꿈 이야기는 제법 유명했던 듯하다. 이로 빚어진 언니 보희와 동생 문희 사이의 엇갈린 운명은 연재 첫 머리 ‘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2016년 6월26일자)에서 다뤘거니와, 이 자리에서는 꿈 이야기를 통해 동생 문희에 집중하고자 한다.


언니의 꿈을 가로챈 동생의 이야기는 문희의 정치적 야망을 느끼게 한다.당초 김유신이 김춘추의 짝으로 염두에 둔 건 보희였지만, 거사를 치를 그날 하필 보희가 달거리 중이었으므로,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언니가 얻을뻔한 기회, 혹은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이용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쩌면 오빠 김유신의 짙은 그림자를 본다. 그만큼 김문희는 언니 김보희에 견주어 맹랑한 여성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 오줌 꿈 무대를 『삼국사기』에서는 서형산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서악(西岳)이라 해서 다른 곳을 연상할 수 있으나 실상은 같은 곳이다.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진산(鎭山)인 선도산(仙桃山)을 말한다. 서형산은 서쪽에 있는 산 중에 상위에 위치한다는 뜻이요, 서악은 글자 그대로 당시 신라 서울 금성(金城) 혹은 계림(鷄林)의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이렇게 불렸다.선도산이라고도 신라시대에 부른 까닭은 이곳에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가 진좌(鎭坐)하는 곳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죽어서 신라라는 국토를 지키는 신으로 화한 이 어머니를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라 한다.


보희가 이곳에 올라 금성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하는 오줌을 눴다는 이 꿈은 천하를 호령할 아들을 낳을 것이란 전조(前兆)이자 예언이다.말할 나위 없이 김법민이다.문무왕 김법민은 태자시절엔 백제 정벌 전쟁에 참전하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왕으로서 당군과 연합해 고구려를 멸했으며, 곧이어 한반도 직접 지배라는 야욕을 노골화한 당 제국과 일전을 치러 그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이야기 말미에서는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니, 전날에 꿈을 산 징조가 이에서 나타난 것이다”고 적고 있다.법민을 비롯,기라성같은 아들들을 둔 전조가 바로 서악 오줌 누기 꿈이었음을 분명하게 한다.


김유신과 김문희는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금관가야 김수로에게 닿는다. 이들의 증조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仇衡)이고, 그 아들 김무력(金武力)이 김서현(金舒玄)을 낳으니, 이 서현이 만명(萬明)이라는 신라 왕실 여인을 취해서 김유신 이하 형제 자매들을 낳았다. 그런 까닭에 김문희 소생인 문무왕 김법민 역시 가야 피가 흐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문헌을 인용한 다음 대목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라 제30대 법민왕이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인 세종(世宗)의 아들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았으니 종묘에 합해 계속 제사를 지내게 하라.’”


김유신은 금관가야 구형왕 증손자 


『가락국기』는 고려시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를 지낸 사람의 문인(文人)이 썼다. 이것이 말하는 가야사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데, 앞에 보이는 계보 역시 그렇다. 김수로에게서 시작하는 금관가야는 건국이 서기 42년이고, 마지막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할 때는 이미 500년 뒤라, 그 중간 왕들 계보가 많은 탈락이 있어 겨우 남은 이는 9명에 지나지 않는다. 구형왕 이래 문명에 이르는 계보에서도 혼란이 있다. 김유신은 구형왕 증손자로서, 그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니, 서운(庶云)이라고도 한다. 서현이 만명(萬明)이라는 신라 왕실 여인에게서 김유신과 김문희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을 낳는다. 이것이 정확한 김유신의 계보다.


역사상 언니와 동생간 싸움이 적지 않다.때로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끔찍한 혈투가 되기도 한다. 자매의 난이 왕자의 난 못지 않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전한시대 말기 황제 성제(成帝)를 사이에 두고 총애를 다툰 조비연(趙飛燕)·합덕(合德) 자매 역시 그러했다. 비연은 동생 합덕을 후궁으로 들였다가 나중에 동생에게 성제의 총애를 뺏겨버리면서 쟁투를 벌인다. 

  

보희와 문희 역시 그러하다. 이들 자매는 김춘추라는 걸출하면서도 잘 생긴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쟁투를 벌이다가 결국은 여동생 차지가 되고 만다. 이렇게 원하는 남자를 손아귀에 넣은 문희는 남편이 왕이 되자 왕후가 되고, 남편이 죽고 아들이 즉위하자 태후가 되어 권력을 농단(壟斷)한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희는 오빠 김유신을 빼닮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하나의 신라』 『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춘추가 임신한 문희와 혼인 미적거리자 “태워죽여라”

[중앙선데이] 입력 2016.07.24 00:44 | 489호 23면 

  

김유신은 월경(月經)이라는 난관을 눈부신 ‘대타 작전’으로 돌파했다. 애초엔 큰 누이동생 보희(寶姬)를 김춘추와 짝지어줄 요량이었지만 ‘거사(巨事)’를 준비한 그날 보희가 월경 중임을 알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은누이 문희(文姬)를 찢긴 옷고름을 걸치고 바느질을 기다리는 김춘추가 있는 방으로 밀어 넣었다. 방에 들어설 때 문희 모습을 『삼국사기』는 “담백한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과 빛나는 요염함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淡粧輕服光艶炤人)”고 묘사했다. 그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22세 청년 김춘추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에 김춘추가 “혼인하자고 해서 혼례식을 치르고 이내 임신해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법민(法民)이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법민은 문무왕의 이름이다. 

  

문무왕 법민은 혼전임신으로 태어나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김유신의 계략에 따라 방에 단둘이 같이 있게 된 김춘추와 문희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전연 언급이 없고, 그 모습을 보고는 춘추가 마음에 쏙 들어 혼인을 하고는 법민을 낳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법민이 정식 혼인을 통해 태어난 아들이란 점을 부각한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의 구성은 전후맥락으로 보아 얼토당토않다. 법민은 혼전 임신으로 태어난 아들이다. 하마터면 아비도 모르는 싱글맘의 아들이 될 처지였다. 아니 엄마 뱃속에서 그대로 어머니와 함께 장작불에 태워 죽임을 당할 뻔한 운명이었다.

  

두 사람의 결합과 그에 따른 혼전 임신은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이야기가 훨씬 설득력이 있고 생생하다. 이에 따르면 김유신이 문희를 자기가 있는 방으로 들이자 “춘추공은 유신의 의도를 알고 마침내 문희와 사랑을 나누게 되고 이후 자주 유신 집을 왕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김춘추는 김유신이 무엇을 하려는 속셈인지 간파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김춘추의 빈번한 왕래 끝에 마침내 문희는 임신을 하게 된다. 요즘 말로, 소위 싱글맘이 된 것이다.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사뭇 다른 대목이다.

  

한데 김춘추의 행동에 수상한 점이 발견된다. 자기 씨를 밴 문희와의 혼인을 무슨 이유에서인지 계속 미뤘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는 김춘추가 결혼을 회피했다는 명확한 언급은 없다. 하지만 김유신이 그 시점에 저 유명한 장작불 쇼를 기획했다는 점에서 김춘추의 책임회피 행각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유신공은 누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는 꾸짖기를 ‘네가 부모님께 아뢰지도 않고 임신을 했으니 어찌된 일이냐?’고 하고는 이내 서울 안에다가 소문을 내기를 동생 문희를 불태워 죽이겠다고 했다. 어느 날 선덕왕이 남산에 행차할 때를 기다려서 마당에 장작을 쌓아놓고 불을 붙여 연기가 나게 하니, (남산에 행차한) 왕이 그것을 바라보고는 무슨 연기냐고 묻자, 주변에 있던 신하들이 아뢰기를 ‘아마 유신이 그 누이동생을 불 태우려나 봅니다’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묻자 ‘그 누이동생이 남편도 없이 임신했기 때문입니다’고 했다. 왕이 다시 묻기를 ‘이는 누구 짓이냐?’고 하니 마침 춘추공이 왕을 모시고 있다가 얼굴색이 크게 변하니 왕이 말하기를 ‘네 짓이구나. 빨리 가서 구하라’고 했다. 춘추공이 명을 받고 말을 달려 왕명을 전하고는 화형을 중지시켰다. 그 후에 세상에 드러내놓고 혼례를 올렸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이 내용에는 바로잡을 대목이 하나 있다.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기라는 기록과 달리 당시 왕은 진평이었고 그 딸인 선덕은 공주였다. 최근에 공개된 『화랑세기』는 문희를 구출케 한 선덕을 ‘공주’의 신분이라고 명확히 적고 있다.

  

김유신은 정말로 누이동생을 태워 죽이려 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무슨 연유로 장작을 쌓아놓고 연기를 피웠을까. 여기에 김유신과 김춘추,그리고 문희로 이어지는 드라마가 펼쳐진다. 김유신이 기획·감독하고 주연까지 맡은 1인3역 드라마였다. 김춘추와 문희의 결합이 순탄했다면 김유신이 이런 축국 드라마를 연출하지 않았을 것이다. 김유신이 화형이라는 가장 극단적인 카드를 꺼내 든 것은 김춘추를 향한 ‘최후통첩’이었다. 그것은 “내 동생을 데려가라”는 겁박이었다. 김유신과 김춘추는 평생 혈맹을 방불하는 동지적 관계였다고 하지만, 혼인 전 문희와 김춘추가 관계를 맺던 이 무렵에는 둘의 긴장 관계가 계속됐음을 알 수 있다. 김유신은 혼전 임신까지 하게 된 여동생을 정식 부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김춘추를 극단으로 몰아간 것이다. 김유신이 기획한 ‘드라마’는 먹혀들었고 둘은 마침내 혼인에 성공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서 김법민이라는 일세의 영웅을 낳았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한데 여기에도 궁금증은 남는다. 도대체 김춘추는 왜 문희와의 혼인을 차일피일 미뤘던 것일까. 적잖은 역사학자들은 김유신을 말할 때 항용 전가의 보물처럼 인용하는 도구, 곧 김유신이 가야계라는 혈통 출신이었다는 신분적 한계를 들고 나오곤 했다. 다시 말해 김유신과 문희가 가야계라는 점이 신라의 주류로 진입하려는 김유신과 그의 가문에는 결정적인 하자로 작용했으며, 그러한 집안 내력의 여인을 아내로 받아들인다는 것이 비록 폐위는 되긴 했지만 진지왕의 직계 손자로서 정통 신라왕족의 혈통인 김춘추에게는 대단한 모험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가야계라 혼인 망설였다고? 하지만 이러한 설명도 자가당착을 면치 못한다. 김유신은 이미 그 조부인 무력(武力)이 혁혁한 전과를 세워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는 백제 성왕을 사로잡아 죽이는 대전공을 세웠다. 이런 공로를 발판으로 관직 품계도 최고인 각간(角干)에 이르렀다. 그 아들이자 김유신 아버지인 서현(舒玄) 또한 이미 진평왕 51년(629년) 8월에 벌어진 백제와의 낭비성 전투 때 관위가 이미 제3위 소판(蘇判)이었다. 신분이나 혈통으로 보아 김유신은 당대 신라 주류의 어느 정통 혈통에도 뒤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김서현은 신라 왕실 공주인 만명(萬明)과의 결합으로,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으나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김유신에게는 신라 정통의 혈통, 그것도 가장 존귀하다는 정통 왕족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신분이나 혈통에서 김유신은 절대우위와 비교우위를 아울러 확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가야계라는 신분·혈통상 한계를 근거로 김춘추가 문희와의 혼인을 미적거렸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김춘추는 문희를 피하려고만 했을까. 오랫동안 베일에 쌓여있던 의문이 1989년과 1995년에 각각 필사본 형태로 발견된 『화랑세기』가 공개됨으로써 드러나게 됐다. 『화랑세기』는 일제 강점기, 궁내청 사서로 일했던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붓으로 베낀 것이다. 한데 이 필사본이 이름만 전하던 신라사람 김대문(金大問)의 그 『화랑세기』를 베낀 것인가 아닌가를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그 진위(眞僞) 논란은 이 글에선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신라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風月主)를 역임한 32명의 전기를 담고 있는 『화랑세기』에 우리의 의문을 명쾌히 풀어주는 단서가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18세 풍월주를 역임한 춘추공(春秋公) 열전에 실린 글이다.

  

“유신이 일부러 (춘추) 공의 치마(裙)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고는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꿰매자고 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바느질을) 시키고자 했지만 병 때문에 할 수가 없어 문희가 이에 나아가 바느질을 해 주었다. 유신은 자리를 피하고 (그 장면을) 보지 않았다. 공이 이에 (문희와) 사랑을 나누었다. 1년쯤 되자 임신을 했다. 그때 공의 정궁부인(正宮夫人)인 보량 궁주(寶良宮主)는 (16세 풍월주인) 보종공(寶宗公)의 딸로서 아름답고, 공과 몹시 금슬이 좋아 딸 고타소(古陀炤)를 낳아 공이 몹시도 사랑해서 감히 문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밀로 부쳤다. 유신이 이에 장작을 마당에 쌓아놓고는 막 누이를 태워 죽이려 하며 임신한 아이 아버지가 누구냐고 따져 물었다.”

  

일부일처제 신라, 조강지처 있어 혼인 고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 비할 수 없는 생생한 기록이다. 축국 경기를 통해 김유신이 일부러 찢은 김춘추 옷이 치마이며, 그에 달린 옷고름을 찢었다는 대목도 그 중 하나다. 당시에는 남자도 치마를 걸쳤다. 나아가 누이동생을 춘추가 머무는 방에 밀어 넣고는 김유신이 슬쩍 자리를 피했다는 사실도 추가한다. 또한 김춘추와 문희가 사랑을 나누었다는 사실, 1년쯤 지나 문희가 훗날의 문무왕 김법민을 임신했다는 대목도 분명히 밝히고 있다.

  

김춘추가 문희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까닭도 비로소 드러나고 있다. 다름아닌 보량이라는 김춘추의 정실 부인 때문이었던 것이다. 아름다울 뿐 아니라 금슬이 좋은 조강지처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더구나 둘 사이에는 딸이 있었기에 자기 애를 밴 문희를 부인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신라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정식 부인은 한 명밖에 둘 수 없었으며, 나머지는 첩이었다. 하지만 김춘추는 차마 김유신의 여동생을 첩으로 들일 수는 없어 번민했던 것이다.

  

욕망이 동해 몸을 섞고 임신까지 시켰으나, 조강지처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김춘추 . 그런 김춘추를 향해 김유신은 장작불 태워 죽이기라는 칼을 빼든 것이다. 김유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2016.06.26 00:40 | 485호 23면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혈통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는 불완전한 민족 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김춘추와 김유신(595~673)을 싸잡아 비난했다. “김유신은 지용(智勇·지혜와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陰險鷲悍)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隣國)을 난(亂)한 자”라고 했다. 음험취한은 요컨대 음흉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단재는 그 보기로 그가 김춘추와 처남 매부가 된 사연인 소위 ‘축국(蹴鞠) 사건’을 들었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이런 평가는 그 이전까지 천 수백 년가량 지속된 만고의 충신이라는 김유신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붕괴시켰다. 단재의 평가가 얼마나 타당한지는 논외로 부친다. 다만, 그 포폄(褒貶)의 정치적 목적성이야 무엇이건, 김유신이 대단한 모략가적 기질을 지닌 군인이요 정치가였음은 분명하다.

  

김유신이라고 하면 거개 가야계라는 그의 출신이 핸디캡으로 유별나게 강조된 까닭도 이에서 말미암을 것이다. 즉, 김유신은 소위 ‘골품제’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신라사회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김춘추라는 신라 정통 진골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음모가 성공함으로써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재가 김유신이 음험취한하다고 한, 대표적인 증좌로 거론한 저 유명한 사건, 다시 말해 김유신이 기획한 축국 사건은 어떠한 내막이 있었을까.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떠했기에 김유신은 저런 악평을 들어야 했던가. 정말로 김유신은 음험취한했던가.

  

김유신에겐 보희(寶姬)와 문희(文姬)라는 여동생 자매가 있었다. 이 중 동생 문희가 보희 대신 김춘추와 혼인하게 된 사연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이에 걸맞게 이 일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전한다. 이는 최근 공개된 필사본 『화랑세기』에도 보이니, 이곳 18세 풍월주 춘추공(春秋公) 전에 그 전말이 나온다.

  

각 문헌별로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다음 골자는 같다. 김유신이 정월 기오일(烏忌日·15일)에 자기 집 앞에서 김춘추를 불러 축국(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놀이)을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찢었다. 유신은 이를 기워준다면서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리고 고즈넉한 방에 몰아넣고는 처음에는 보희더러 춘추가 있는 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보희는 하필 이날 무슨 일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유신은 문희더러 들어가게 하니 역사는 이에서 이뤄졌다. 이때 시작한 둘의 밀회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문무왕 김법민이다. 말하자면 문희는 보희의 대타였던 셈이다.

  

춘추가 문희를 처음 본 순간을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즉위년(661년) 조에서는 “옅은 화장과 날렵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사람을 부시게 하니 춘추가 보고 기뻐하며 결혼을 청하고 예를 올렸다”고 표현한다. 이 이야기가 문무왕 즉위년 조에 나오는 까닭은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문무왕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춘추가 문희에게 첫눈에 반해 이내 결혼한 것처럼 기술됐지만 너무 많은 비약이 숨겨있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결합을 고리로 김춘추는 김유신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대권을 쥐니 그가 태종무열왕(재위 654~660년)이다. 문희 또한 덩달아 정비가 되어 문명(文明)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사실 단재는 이러한 춘추와 문희의 결합을 비상히 주목하면서 김유신의 모략가적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단재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빛나는 김유신의 계략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결합을 보면서 궁금하기 짝이 없는 대목은 도대체 보희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파악하기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즉위원년 조에서는 “언니(보희)는 무슨 일이 있어(有故) 나오지 못하고, 그 동생(문희)이 나와서 꿰매어 드렸다”고 해서 ‘유고(有故)’ 사태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보희에게 일어난 ‘유고’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다만 유의해야 할 대목은 김유신이 원래는 보희를 염두에 두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보희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김유신은 보희에게 사고가 생긴 사실을 이때서야 비로소 알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삼국유사』에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이야기이니, 이에는 춘추가 문희를 얻게 된 사정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다. 이에는 보희가 “어찌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경솔히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면서 오빠의 뜻을 거부했다고 한다. 한데 보희가 내세운 논거가 소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 윤리관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설혹 그 시대에 이런 유교적 도덕관념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해도, 동생 문희는 왜 춘추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국유사』 또한 『삼국사기』와 동일하게 김유신이 애초에 보희를 점찍었음은 주목해야 한다.

  

셋째, 앞서 인용한 『삼국유사』 이야기 중간에 달린 협주(挾註·주석)에는 “옛 책에는 (보희가) 병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고 했다. 보희에게 도대체 무슨 ‘병’ 혹은 ‘유고’가 있었기에 김유신은 그러한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다가 병든 혹은 사고 난 보희에게 김춘추를 시중들라고 했다는 말인가.

  

넷째, 『고려사』 첫 대목에 실린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탄생 신화다. 앞선 시대 각종 사화(史話)를 섞어 만든 이 설화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년) 때 인물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실린 내용이라 한다. 이에 녹아들어간 설화 중의 하나가 바로 보희와 문희 이야기다. 이 작제건 탄생 설화는 그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김유신과 김춘추, 보희와 문희라는 신라 역사상 실제 인물을 장소와 배경 및 이름만 바꾼 채 고스란히 표절했다. 즉, 김유신은 신라의 송악(松嶽)에 사는 보육(寶育)이라는 인물이며, 김춘추는 당나라 황제로 바뀌어 있는가 하면, 시간적 배경 또한 신라 말로 옮겨져 있으며, 공간은 송악(개경)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보희가 서형산(西兄山·경주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서울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꿈을 꾸었고,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동생 문희가 언니에게서 꿈을 샀다는 이야기조차 작제전 탄생설화에는 반복한다. 이 설화에는 “중국 황제가 신라 송악의 보육 집에 와서 묵다가 찢어진 옷을 깁는데 언니는 코피가 나서 나오지 못하고 아우가 대신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황제는 (동생인) 진의(辰義)와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작제건이다”고 한다.

  

한데 보희의 변신임이 분명한 언니가 하필 이날 코피가 났다고 한다. 『삼국사기』 말한 ‘유고’, 『삼국유사』의 협주에 인용한 옛 책의 ‘병’이 작제건에 와서는 ‘코피’가 되었다. 보희에게 피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화랑세기』 춘추공 전에는 “유신이 일부러 (춘추)공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했으나 병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문희가 나아가 바느질을 해 드렸다”고 한다. 『화랑세기』에서도 분명히 유신이 처음에는 보희를 지목했으나 병 때문에 할 수 없어 그 동생 문희가 대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희에게 일어난 ‘유고’ 혹은 ‘병’으로 표현된 실체는 무엇인가. 이는 월경(月經)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작제건 탄생 설화의 코피는 결정적이다.

  

이처럼 이 사건을 전하는 다섯 가지 기록이 모두 김유신이 애초에 보희에게 병, 혹은 사고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야 알았다고 한다. 이때 보희가 정말로 사고를 당했거나, 병을 앓고 있었다면, 어떻게 김유신이 처음에 이런 보희에게 바느질을 빙자해 김춘추를 시중드는 일을 맡기려 했다는 말인가.

  

김유신. 그는 참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애초에 김춘추의 짝으로 큰 누이를 생각하고 거사를 준비했지만,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작은 누이로 교체를 했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냉혈한의 냄새가 풍긴다.

  

- 흔히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하지만 숱한 사연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은 자명하다. 한국사 변곡점의 순간을 짚어보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언론인 출신 사학자가 풀어가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를 새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본기에 의하면 그 재위 4년(664) 


"봄 정월에 김유신이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벼슬에서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안석과 지팡이를 내려주었다"


고 하거니와, 이때 김유신은 70세가 되는 해였다.

예기 왕제王制편에 70세가 되면 치정致政한다 했거니와, 이는 정확히 그 예법이 문무왕 당시에 통용함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 시대 신라는 예기가 대표하는 예법이 그대로 법률 혹은 관습으로 강제되고 있음을 본다.


한데 이에서 주목할 점이 있거니와 하필 김유신이 치정을 요청한 때가 그해 시작 시점인 정월인가 하는 대목이다.

고래로 70 치정에 관련해서는 70세가 되는 시점을 어디로 잡을 것이냐가 문제로 대두했다.

70세가 되는 그해 첫날인가 아니면 70세를 꽉 채운 그해 마지막인가 하는 논쟁이 그것이었다.

후자를 따르면 71세가 되기 전날이 퇴직 시점이 된다.

김유신을 볼 때 70세에 도달한 그 해 첫날에 치정을 결행하고자 했으니 당시 신라 사회 공무원 정년 퇴직은 69세였다.


또 하나 유의할 대목은 이때 신라 사회엔 아직 생일이 없다는 사실을 유추한다는 점이다.

김유신은 생일을 기점으로 따지지 않았다.

생일은 훨씬 후대에 생긴 통과의례다.

하기야 중국에서 생일은 당 현종 이륭기 때 비로소 생겼다.


허심한 기술 하나로도 역사는 이리 풍부해진다고 나는 말하고 싶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4월11일 13시55분이다. 


 1. 서악동의 신라 시대 귀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을 비롯한 중고시대 신라 왕릉 밀집지역인 서악고분군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전면에 봉분 두 기가 붙었으니, 하나는 김춘추 9세손으로 신라 하대 인물인 김양(金陽)이 857년 향년 50세로 졸하고는 묻힌 곳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 묘라고 전한다. 이 두 봉문 앞에는 몸돌과 머릿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받쳤을 거북 모양 받침돌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이를 서악동 귀부(龜趺)라 한다.


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


 보물 제70호인 이 귀부에 대한 현지 안내판은 김인문 묘비를 받치던 것이라 기술한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역사학도 중에는 김양 묘와 함께 선 무덤을 김인문 묘라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이는 실은 김유신 묘이며 따라서 이 귀부는 김유신의 그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따르기가 심히 힘들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김유신의 장송(葬送)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지에 기술되었거니와, 그 어디에도 그의 무덤이 무열왕릉 인근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악동 귀부의 귀두서악동 귀부의 귀두


 그 인근에 제작 연대가 확실한 태종무열왕비 귀부가 있으니, 그것과 비교할 적에 비슷한 시대 작품임이 분명한 느낌을 준다. 어떻든 김인문 묘비 귀부 중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그 전면 땅바닥 쪽에서 이 귀부를 올려다보면 남자의 성기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하기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북 머리를 ‘귀두(龜頭)’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생김새가 이 성기의 꼭지 부분과 유난히 상사(相似)한 데서 비롯한다. 쭈글쭈글한 목덜미 주름은 흡사 포경수술 하지 않은 남자 성기의 껍데기가 뭉친 모습이고, 돌출한 머리는 완연히 귀두 그것이다. 귀두와 다른 점은 오직 두 눈만 표현했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그 인근 서악동 고분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편 비각(碑刻) 안에서 만나는 태종무열왕비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귀부가 그 전면 김인문 묘의 그것과 다른 점은 거북 받침돌 말고도 사람으로 치면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이수(螭首)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이수가 압도적인 느낌을 주거니와 그 장식이 무엇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역시 왕의 그것에 어울리는 장식이라 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그 전면 김인묘 귀부는 문화재 지정 명칭이 ‘서악동 귀부’인데 견주어 이는 ‘경주 태종무열왕능비’가 정식 명칭이다. 그렇지만 이에도 문제는 없지 않아, 사람으로 치면 발바닥과 머리 부분만 남고 정작 몸통에 해당하는 비신(碑身)은 달아났으니 말이다. 


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


 이를 갈라보면 귀부는 길이 약 3.33m에 폭 2.54m이며, 이수는 높이 약 1.1m다. 이수에는 여섯 마리 용이 좌우에서 세 마리씩 엉킨 채 여의주를 문 모습을 연출했으니, 그 자태는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이수 전면 중앙에는 이 무덤 주인공을 밝히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왕지비)’라는 글자를 전서(篆書)체로 양각했으니, 글씨는 그의 아들 김인문이 썼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장방형 기단돌 위에 올려 앉은 귀부의 거북은 이런 비석에 사용하는 비석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네 발을 쫙 벌린 채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쳐들고 입은 다문 채 전면을 응시한다. 머리는 전면에서 선 채로 바라보면 사각에 가까워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한데 이 거북 머리를 측면, 혹은 전면 바닥에서 쳐다보면 역시나 ‘귀두’다. 목덜미에는 부처님의 그것처럼 삼도(三道)를 표현했다. 콧구멍 두 개는 완연하거니와, 옆으로 다문 입술 표현 역시 섹슈얼 코너테이션(sexual connotation)이 짙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



2. 음경을 대신한 거북 대가리 


 요즘 내가 휴대하고 다니면서 다시 읽는 문고본 중에 《일본인의 사랑과 성》이 있다. 일본 와세다대 교수를 역임한 일본 근세 문학 연구가 데루오카 야스타카(暉峻康隆. 1908~2001) 원저로 단국대 인문학부 정형 교수가 번역해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기획한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60권째로 국내에서는 2001년 10월에 초판이 도서출판 소화에서 나왔다. 이 초판을 독서대본으로 삼거니와, 이 책은 아마도 국내 출판 직후인지 그 얼마 뒤에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손에 들었다가 순식간에 일독한 기억이 있다. 데루오카는 가고시마 현 태생으로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부임해 그곳에서 오래도록 봉직하다가 퇴임 뒤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보니 그 일본어 원서는 ‘日本人の愛と性’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1989년에 초판이 나왔다 한다.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에서 사랑과 성 관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참으로 평이하지만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다. 이런 문체로 일본 학계가 내놓은 저작 중에 기념비적인 것으로 이시다 미노스케의 《장안의 봄》(국내에서는 이동철·박은희 번역으로 2004년 도서출판 이산에서 출간)이 있거니와, 그에 견주어 데루오카 이 책 역시 그에 못지않은 역작이다. 책 전편에 걸쳐 데루오카는 헤이안 시대 이전으로 사랑과 성 문화가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거니와, 간통죄가 대표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래의 성에 대한 억압 체계에는 시종 비판적이다. 


 이에는 13세기 중엽,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 집권시대에 성립한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이라는 설화집 중 제16권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 하나를 그 시대 성 풍조를 증언하는 자료로 소개한다.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내가 번역문 문장을 조금 가다듬었다.


옛날 조정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유난히 질투가 강해 그 때문에 항상 괴로워했다. 어느 날 남편이 궁리 끝에 거북이 한 마리를 구해 그 목을 12센티미터 정도로 잡아 빼내고는 잘라 종이에 감추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아내의 질투로 말다툼을 하게 되자 남편은 “이렇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이 물건 때문”이라 하고는 허리에 찬 작은 칼을 꺼내어 앞을 걷어 올리고는 자기 마라(魔羅)를 자르는 척하며 품안에서 거북이 목을 꺼내어 내던졌다. 아내는 몹시도 기분이 언짢아하며 그것을 집어 들고 물러났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한가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무릎을 세우고 앉은 다리 가랑이 사이를 보니 검은 천 조각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그 검은 천은 무엇이오”라고 물으니 아내는 “아니, 별 것 아니에요”라고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남편이 줄곧 다그쳐 묻자 그제야 아내는 마지못하면서 “숨겨도 소용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이 검은 천은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남편이 “고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라고 반문하자 부인은 “지난번 잘려 고인이 되어 버린 마라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제 음부에 상복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세상에 별난 상복(喪服), 재미는 있는 일이야”라는 말로 끝난다. 남편이 자신의 그것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실제로는 거북이 대가리로 대체한 ‘마라’는 무엇인가? 그 정확한 의미를 지금 단계에서는 모른다 해도 볼 짝 없이 음경(陰莖)이다. 이 말은 원래 불교를 타고 넘어온 범어다. 즉, 불교에서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가 바로 이것이니, 아마도 성욕이 그런 기능이 있다고 보아 남근(男根)을 지칭하는 은유로 일본에서는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로마나이즈 하면 ‘māra’이며 ‘魔羅’ 혹은 ‘摩羅’ 등으로 표기한다. ‘魔’에는 그 자체 악마라는 뜻이 있으니, 전자가 더욱 그럴 듯한 번역어라는 느낌을 준다. 남편이 잘라낸 이 마라, 실제는 거북 대가리를 그 아내가 검은 천으로 싸서 다녔다는 말은 그것을 주검으로 간주해 입힌 상복이라는 뜻이며, 더구나 그것을 음부에 싸서 다녔다고 하니, ‘귀두’가 가야 할 곳은 음부 말고 어디가 있겠는가? 


 이 관리가 잘라낸 거북 대가리는 길이를 12센티미터라 했는데, 당시에 일본에 미터법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니, 이는 데루오카가 틀림없이 당시에 쓰던 단위를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한 수치일 터이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12센티미터라는 환산치가 정확하다고 가정할 때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이 실은 한·중·일 성인 남성의 평균 음경 길이라는 점이다. 고교 학창 시절에 30센티미터 대나무 자로 자기 음경을 잰 어떤 친구가 22센티미터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는데, 항문 쪽에서 잰 길이였다. 그 놈 말이 더 가관이었는데, 음경 뿌리가 거기에서 시작하니 거기에서 재야 한다나 어쩐다나 한 기억이 있다.  


 앞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데루오카는 “남근의 끝을 귀두(龜頭)라고 하니 자못 그럴싸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고금저문집》이 궁금해 내가 조금 더 찾아보았더니, 가마쿠라(鎌倉)시대 사람으로 이하(伊賀)라는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이하수(伊賀守)를 역임했지만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인 다치바나노 나리스에(橘成季)가 편찬한 설화집으로 간단히는 ‘저문집(著聞集)’이라고도 한다. 제목을 풀면 ‘옛날과 지금 있던 일로서 들은 이야기 모음집’ 정도를 의미한다. 전체 20권 30편으로 목차가 편제됐으며, 이에 수록한 이야기는 총 726개. 건장(建長) 6년(1254) 10월 무렵에 대략 완성을 보았다가 나중에 보완되었다고 하며,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우치습유물어(宇治拾遺物語)》와 더불어 일본 3대 설화집으로 일컫는다. 


 이로써 실제의 거북 대가리 귀두가 남근의 대가리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내 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구지가(龜旨歌)는 귀두가(龜頭歌)였음도 싱겁게 드러났다고 본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이에 대해 강진아 선생의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었다.(2018.7.18)  


마라mara는 팔리pali어입니다. 팔리어는 인도 초기불교경전에서만 발견되는 범어의 방언 중 하나입니다. 팔리경전은 붓다생전부터 기원 일세기까지 오백년에 걸쳐 형성되었고, 이 중 맨 나중에 형성된 논장을 제외한 경장과 률장에는 약 오십여개의 길고 짧은 다양한 구성의 마라신화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공들인 논문 주제입니다. 범어로는 무르티유Mrtyu입니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 Yama가 후기에 속하는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무르티유Mrtyu와 결합하여 죽음의 나라를 다스리는 야마무르티유 Yama Mrtyu가 됩니다.(r밑에 ㆍ점있는 r입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의 성gender이 불분명합니다. 단어 자체는 남성이지만 범어나 팔리어에서는 문법적인 이유로 성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해서요. 명사의 어미가 24가지로 바뀌는데 남성형ㆍ여성형이 있는거죠. 오히려 마라는 정체를 바꾸는 기술이 있어서 여자 혹은 남자로 둔갑을 잘 합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를 음경과 동일시한 경우는 없습니다만 이야기의 정황상 '정액'이 아닐까 추측을 하게끔 하는 경우는 꽤있습니다. 붇다나 출가승이 명상수행할 때 비..가 내리면 꼭 마라가 나타나거든요. ㅋㅋ 저 일본책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이며 기사 입력시간은 2016년02월22일 14시15분이다. 


고려를 창건한 신라인 

 

 왕건은 고려 왕조를 개창한 까닭에 그 이름만 들으면 우리는 대뜸 ‘고려인’으로 단정하기 십상이지만, 실은 뼛속까지 신라인이다. 그가 태어나기는 당 희종(僖宗) 건부(乾符) 4년이니 이해는 신라 헌강왕(憲康王) 3년(877)이다. 청장년기를 신라에서 배반한 궁예에서 복무하기는 했지만, 그가 자발적 헌납이라는 형식으로 신라를 접수한 때가 59살 때인 935년이며, 그로부터 8년 뒤인 943년 향년 67세로 눈을 감는다. 다시금 강조하지만 왕건은 신라인이다. 이런 그가 고려라는 새로운 왕조 혹은 국가를 만들 때 그 절대적 토대는 신라의 그것이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그가 죽어 묻힌 곳을 현릉(顯陵)이라 하거니와, 이에는 그의 무수한 부인 중에서도 조강지처는 오직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한 명뿐이니 같이 묻힌 여인은 오직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왕건이 복지겸, 신숭겸, 홍유 등과 더불어 쿠데타로 궁예 정권을 타도하고자 도모할 적에 그 반란 모의를 몰래 듣고는 장막을 걷어차고 나타나 남편한테 갑옷을 입혀 주었다는 그 여인이다. 유씨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왕건보다 먼저 떠나 다른 어딘가에 묻혀 있었음에는 틀림없다. 왕건이 세상을 떠나면서 내린 유언에 따라 유씨를 합장했다 하기 때문이다. 


 이들 부부가 묻힌 현릉이 정식 발굴조사나 도굴 등을 통해 타율적으로 외부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없으므로, 그 내부 구조를 우리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무덤이 석실분(石室墳)임을 안다. 더 정확히는 석실로 통하는 무덤길을 별도로 마련한 소위 횡혈식(橫穴式) 석실분임을 안다. 


 그것은 첫째, 그가 9~10세기를 살다간 신라인이기 때문이요 둘째, 그 무덤이 부부 합장릉이며 셋째, 이후 유사시에 툭하면 무덤 문을 따고는 그 재궁(梓宮)을 걷어냈기 때문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무덤은 석실분밖에 없다. 


 아직도 한국고고학계에는 밑도 끝도 없는 신화가 횡행하니, 무덤은 보수성이 강해서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도 개중 하나다. 쉽게 말해 무덤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덤처럼 유행에 민감한 것도 없다. 말한다. 무덤은 유행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팽팽 옷을 잘도 갈아입어 그 형식은 순식간에 변모한다. 무덤이라고 유행을 싫어할 줄 아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석실분은 엄밀히는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라고 해야 한다. 석실분이라는 말은 무덤 주인공을 매장하는 무덤방 내부 구조가 돌로 만들어 쌓아올린 점만을 드러낸 것으로써, 이런 석실 위로는 흙으로 덮어 대체로 둥근 봉분을 만들기 마련이다. 나아가 그 전면에는 비교적 넓은 평탄 대지를 만들어 왕릉의 경우 이곳에다가 정자각이며 하는 각종 제향 관련 시설들을 만든다.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무슨 고대 일본의 전매특허처럼 선전하지만, 동아시아 고대 무덤은 거의가 실은 전방후원분이다. 현릉 역시 이에서 크게 어긋남이 없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1편 묻힌 다음날 털린 원 제국 공주의 무덤

2018/01/18 - [기고문/기타] -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2편 왕건, 날아라 슈퍼보드 툭하면 문을 따는 왕릉 도굴에 응전하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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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굳게 닫힌 현릉은 안쪽으로 통하는 무덤길을 어디에다가 마련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내가 현장을 둘러본다면 낌새를 채지 않을까 하는 느낌도 있지만, 자신은 없다. 하지만 무덤길은 틀림없이 석실 남쪽에다가 마련했을 것이다. 다만 정남방인지 혹은 한쪽으로 비켜난 남쪽인지는 알 수가 없다. 현재 그 앞에 혼유석이 놓인 점으로 보아 여타 이 무렵 석실분 발굴 사례를 견주어 볼 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다가 마련하지 않았을까 조심스럽게 상상해 본다. 여담이지만 이런 궁금증이 결국은 멀쩡한 무덤을 무수하게 파헤치지는 데 이르렀다. 고고학 발굴조사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왕건릉 구조가 어떠했을지 그것을 직접 들여다볼 수 없는 지금 그것을 짐작하기 위해서는 동시대 왕릉급 신라 무덤을 볼 필요가 있다. 다행히 근자에 이런 발굴조사가 몇 군데서 이뤄졌기 때문이다. 


 먼저 경주 남산 능선이 동쪽으로 흘러내린 한지봉 구릉 말단부에 소재한 헌강왕릉이 있다. 이곳이 헌강왕릉이라 알려졌지만 정말로 그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왕릉이 아니라 해도 그에 준하는 신라 말기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다. 1993년 8월 초순 집중호우에 봉분 일부가 붕괴하면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발굴조사를 벌였다. 그 결과 이미 무덤은 무참한 도굴 피해를 여러 차례 본 것으로 드러났다. 그에 따라 돌로 만든 시신 발 받침대와 베개 그리고 금판과 금실 조각 말고는 내부에서는 이렇다 할 유물을 건지지는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무덤 구조는 확실히 들여다보게 되었으니, 역시나 석실분으로 드러났다. 봉분은 밑지름 기준으로 15.6m이니 그다지 규모가 크지는 않다. 석실은 남북 길이 2.9m, 동서 너비 2.9m이니 정방형에 가까우며 그 바닥에는 관을 놓는 시설인 시상(尸床)은 화강암 판석 2매로 만들었다. 이 무덤방으로 통하는 무덤길은 역시 남쪽이지만, 동쪽으로 치우친 지점에서 발견됐다. 아마도 합장분이었을 것이다.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경주 천북 신당리 신라고분


 또 다른 신라 시대 왕릉급 석실분으로는 계림문화재연구원이 2013년 공장 부지에 포함된 경주시 천북면 신당리 산7번지 일대에서 확인한 무덤이 있다. 원형 봉토 안에 석실을 마련한 이 고분은 봉분 바깥에다가 3단 석축으로 호석(護石)을 쌓아 돌리고, 일정한 구간마다 받침돌을 세웠다. 무덤 주인공을 매장한 석실은 봉토 중앙에서 발견됐다. 호석 기준으로 고분은 지름 14.7m이며, 둘레는 현재 4분의 1 정도가 유실되고 35.5m가량 남았지만 원래는 46.3m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라 받침돌은 원래 정확히 몇 개가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재 남은 상태를 감안할 때 모두 24개를 안치했을 것으로 보인다.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보아 출토 유물은 거의 없다. 호석에서 120㎝ 떨어진 남동쪽 지점에서는 돌로 만든 상석(동서 216㎝, 남북 133㎝)의 바닥 흔적도 완연히 드러났다. 이 고분은 8세기 무렵 축조했다고 추정됐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발굴전경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이런 통일신라 시대 석실분이 2013년에 들어 울산-포항 복선 전철 구간에 포함된 경북 경주시 현곡면 소현리 야산에서도 발견됐다. 한울문화재연구원 조사 결과 호석 기준 동-서 11m, 남-북 11.2m 규모의 원형 봉분을 갖춘 이 무덤에서는 봉분 주위를 따라 12개 띠 동물을 넣었다는 점이 특징이다. 묘역(墓域)을 갖추었으며, 암반을 굴착해 대규모 배수로까지 완비한 것으로 드러났다. 호석은 정교하게 6단 이상을 축조했으며, 그 바깥으로 따라가며 일정한 간격으로 덧댄 돌인 지대석은 24개 받쳤지만 일부는 훼손되고 17개가 확인됐다. 12지 동물 조각은 방위별로 지대석 2칸마다 1개씩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경주 소현리 신라고분 추정 토끼상 (사진제공=한울문화재연구원)


 일부는 결실돼 말을 비롯한 7개 동물 조각이 드러났다. 남쪽에 마련한 무덤으로 통하는 길인 묘도(墓道) 입구에는 호석에 잇댄 상태로 만든 제단 흔적도 드러났다. 시신은 봉분 중앙쯤에 마련한 석실에다가 안치했다. 이곳에서는 대퇴골로 추정되는 인골까지 발견됐다. 내부에서는 극심한 도굴로 다른 출토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들 신라 시대 왕릉급 무덤이 바로 왕건 시대에는 해당한다고 볼 수는 없어 곧바로 이를 기준으로 왕건릉 구조를 대입할 수는 없다. 하지만 왕건이 신라인이요, 고려 건국 초기에는 대부분 신라의 유산을 계승했으며, 여타 기록으로 보아 이와 비슷한 석실분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나아가 이런 석실분이었기에 처음 무덤을 만들어 무덤 문을 봉한 다음에도 수시로 열었던 것이며, 이런 편리성에서 주로 부부 합장에 사용됐다. 그에 더해 현릉의 경우 전란이나 반란과 같은 일단 유사시에 관을 통째로 꺼내어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살아있는 신 


 그렇다면 왜 역대 왕 중에서 고려 사람들은 유독 왕건에 그리 집착했을까? 더러 왕건의 아버지로서 나중에 고려 건국 뒤에는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은 왕륭(王隆) 역시 같은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왕건의 그것에 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단순히 고려 태조이기에? 이렇게 만은 설명하기 힘든 그 무엇이 있다. 그것은 왕건은 결코 죽을 수도 없고, 죽어서도 아니 되는 생신(生神)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귀신이 아니었다. 죽어서도 의지가 있고, 그런 까닭에 무엇인가 결단이 필요한 시점에는 후세들에게 그 방향을 점지하는 막강의 신이었다.


 역대 왕의 신주를 봉안하는 제사 시설을 종묘(宗廟) 혹은 태묘(太廟)라 한다. 한데 이 종묘 시스템은 역대 왕조가 조금씩은 달라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왕조는 어쩌면 가장 무식한 방법을 썼다. 태조 이성계 이래 역대의 왕들과 그 왕비에다가 각각 신실(神室) 하나씩을 주게 되니 무한정 폭이 늘어나는 기현상을 빚게 된다. 지금의 종묘 정전은 동서 폭이 120m에 달하게 된 이유는 조선왕조가 500년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종묘에 천자는 7묘(廟), 제후는 5묘라 해서 종묘에는 최대 7명까지만 신주를 모셨다. 신라가 신문왕 시대에 중국식 종묘 제도를 처음 도입하고는 오묘제를 도입한 이유가 당의 제후국으로 자처했기 때문이었다. 고려 왕조 역시 제6대 성종 시대에 종묘를 처음으로 만들면서 5묘제를 도입했다. 한데 실제 종묘 각 실(室)을 어떻게 꾸몄으며, 어떻게 안치했는지는 500년 장구한 왕조 역사만큼이나 변화가 무쌍해 나로서는 도대체 그 변화상을 종잡기가 힘들다. 종묘에 신주가 들었다가 나중에는 들어내기도 하는 등의 변화가 많다. 내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등을 살피니 신주가 종묘에 들었다가 나중에는 산릉(山陵)으로 옮겨가는 일도 있는가 하면, 정전에는 들지 못한 왕들의 신주를 위한 별묘(別廟)도 있었던 듯하다. 조선 시대 종묘에 정전과 더불어 이런 왕들을 위한 신주 안치 공간인 영녕전이 따로 있듯이 말이다. 시대별로 넘다듦이 이렇게 변화무쌍하지만 단 한 사람만큼은 변동이 있을 수 없다. 조선 시대 가묘(家廟) 관점에서 보면 불천위(不遷位)에 해당하는 사람이다. 그가 바로 태조 왕건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이 왕건에 대한 추숭 작업은 누층적이었다. 종묘에다 모시고, 산릉인 현릉에다가도 모시며, 궁궐 안에는 그를 비롯한 역대 왕들의 어진각인 경령전(景靈殿)이 있었는가 하면, 그만을 위한 어진각인 효사관(孝思觀)도 있었다. 나아가 주요 사찰과 서경을 비롯한 주요 거점 도시마다 어진각을 별도로 세워 때마다 제사를 지냈다. 또한 이상하게도 왕건의 조각을 만들어 마치 부처님처럼 봉향하기도 했다. 이는 역대 왕 중에서도 태조가 차지하는 위치가 난공불락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런 면모들을 편년체 고려사인 《고려사절요》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숙종 7년(1102) 12월에는 동전을 주조 유통케 하고는 그 사유를 태묘와 여덟 개 역대 왕릉에 고했다. 이어 예종(睿宗) 재위 2년(1107) 겨울 10월에는 북방의 골칫거리로 등장한 여진 문제를 어떻게 해야 할지를 태묘에 물어 결정한다. 좋게 달랠 것인가 아니면 군사를 동원해 토벌할 것인가를 두고 난상토론이 벌어진 것이다. 양쪽 의견이 하도 팽팽히 갈리니 왕이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이럴 때 묘약은 역시나 태조 왕건이었다. 이 대목을 “왕이 망설이며 결정을 짓지 못하고는 최홍사에게 명하여 태묘에서 점치게 하였더니, 감(坎)이 기제(旣濟)로 변하는 괘를 얻자 드디어 출병하기로 의논을 결정”했다고 한다. 


 이 점괘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나, 이 자리에서는 태묘에서 점을 친 결과 출병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기로 한다. 이에 의해 그 유명한 윤관과 오연총에 의한 여진 정벌이 있게 되고 그 결과 이른바 윤관 9성을 쌓게 된다. 태조가 중앙에 정좌한 태묘는 이처럼 죽어도 결코 죽지 않은 결단의 신이었다. 


 인종 4년(1126)에는 거란을 대신하고 북방의 패자로 등장한 여진족의 금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섬길 것인지 가부를 태묘에서 점을 쳐서 결정했다. 이어 고종 8년(1221), 점점 군사적 압박을 높이며 조여 오는 몽고에 어떻게 대처할지를 몰라 문하시중 이항(李抗)과 사천감(司天監) 박강재(朴剛材)를 태묘에서 점치게 했으며, 몽고의 군사적 압박이 극에 다다른 같은 왕 41년(1254) 겨울 10월에는 재신들을 보내 태묘에 빌며 “큰 재앙이 거듭 이르렀습니다”라고 고하면서 선령들이 하늘의 위엄을 내려주시어 “오랑캐 군사가 스스로 무너져 섣달이 되기 전에 돌아가고, 백성의 힘은 여유가 있어 봄이 되면 농사지어 안도하기를 전과 같이 하여 배부르게 먹고 모두 화평토록”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공민왕 2년(1360) 가을 7월에는 왕이 임진현 북쪽 5리 지점 백악(白岳)에 거둥해 이곳이 도읍을 옮길 만한 곳인가를 알아보았다. 이보다 앞서 공민왕은 지금의 서울인 남경(南京)으로 천도하려고 대대적인 공사를 일으켰다. 하지만 그에 따른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게 일자 할 수 없이 태묘에 사람을 보내 점을 친 결과 불길하다는 점괘를 얻어 남경을 포기했다. 그 대타로 고른 곳이 백악이었으니, 그런 까닭에 이곳을 신경(新京)이라 불렀다고 한다. 백악 천도 계획도 결국 무산되었지만, 도읍 옮기는 일에도 왕건을 포함하는 조상신들이 관여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핀 일화가 왕건이 다른 후대왕들과 더불어서 함께 결정한 사안이라면, 이제는 그 혼자서 내린 사안들을 본다.  


 공민왕은 재위 6년(1357) 봄 정월에 봉은사(奉恩寺)로 거둥해 그곳에 마련된 태조 진전을 배알하고는 한양 천도가 옳은 일인지 친히 점을 친다. 그 결과 안 된다는 ‘정(靜)’이라는 글자를 얻자, 다시 이제현한테 점을 치게 한 결과 천도해도 좋다는 ‘동(動)’ 자를 얻어 천도를 단행한다. 공민왕이 이미 남경 천도를 결정한 상태에서 점괘가 처음에는 안 된다고 나오자 당혹했을 것이다. 


 우왕 시대인 신우(辛禑) 원년(1375) 여름 4월에는 당시 실권자 이인임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태조 어진 봉안처인 효사관에 나아가 태조의 혼령한테 맹세하기를 “본국의 무뢰배들이 심왕(瀋王)의 손자를 끼고 북쪽 변방에 와서 왕위를 엿보니, 우리 동맹하는 신하들은 힘을 다하여 막아서 새 임금을 돕고 받들겠나이다. 이 맹세에 변함이 있으면, 천지와 종묘 사직이 반드시 은밀한 주벌을 내릴 것입니다”라고 한 일도 있다. 심왕은 원나라가 임명한 제후왕 중 하나로서 언제가 그 혈통은 고려왕의 잠재적 경쟁자였다.  


 이성계가 옹립한 공양왕은 즉위 원년(1389) 12월 계해일에 효사관에 나아가서 신돈의 아들들이라고 매도되어 쫓겨난 우왕과 창왕을 죽인 일을 태조 어진을 바라보며 고하기도 했다. 


 이는 왕건이 고려왕조가 계속하는 한 그 왕국과 후손 왕들을 보호하는 살아있는 신이었음을 보이는 증거들이다. 그런 까닭에 비단 신주와 어진뿐만 아니라 아예 그 생전 모습을 본뜬 동상을 만들어 봉향하기도 했다. 



송충이를 잡는 고려 태조 


 이런 전통은 종교로 보면 도교의 색채가 무척이나 짙다. 동상을 만들어 추숭하는 일로 보면 불교의 전통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죽어서도 죽지 않은 사람, 생전에 무수한 공덕을 쌓고는 죽어서도 천상의 절대 신이 되어 누군가를 보호하는 존재는 신선(神仙)에 다름 아니다. 실제 도교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무수한 신을 만들어냈다. 생전에도 신선이 되고자 하는 욕망이 드높았던 역대 제왕 중에서도 진 시황제와 한 무제 같은 이는 위진남북조 시대 도교에서는 천상을 지배하는 중요 신선들이기도 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왕건 역시 천상의 신이 되어 고려라는 왕국을 보호하는 후견인 노릇을 한 것이다. 


 이런 면모가 도교와 밀접하다는 점은 우선 왕건이 팔관회 개최와 구요당(九曜堂)이라든가 신중원(神衆院)과 같은 각종 도교 사원 창건으로 대표하듯이 도교에 심취했던 데다가, 그의 어진을 모신 궁궐 전각을 효사관(孝思觀)이라 했으니, 이는 효사관을 도교의 사원인 도관(道觀)으로 인식했다는 단적인 증거다. 


 이런 점에서 특이한 사건이 창궐하는 송충이 퇴치에도 왕건이 동원된다는 점이다. 《고려사절요》 숙종 7년(1102)조를 보면 이해 5월에 송충이가 무성하게 출현하자 왕이 금중(禁中), 곧 궁중에서 뭇 신하를 거느리고 상제에게 친히 초제(醮祭)를 올리는데 태조를 배향하고 사흘 밤 만에 파했다고 한다. 초제란 밤에 지내는 별 제사의 일종으로 도교를 대표하는 종교 행사다. 한데 이런 도교 행사에 태조를 초대해서 그 위신을 빌려 송충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다. 왕건이 도교의 신격으로 숭배받았다는 내 지적은 이래서 단적으로 증명된다. 


 송충이 얘기 나온 김에 그래서 어찌 되었을까? 왕건까지 동원했지만 송충이 퇴치는 실패한 듯, 그 다음달에는 재상에게 명해 5방(五方)의 산신과 해신에게 세 곳으로 나누어 제사 지내어 송충이 없어지기를 빌면서 죄수들을 사면했는가 하면, 그래도 여의치 못했던 듯 이번에는 군졸 5백 명을 풀어 송악산의 송충이를 잡도록 했다. 이 장면을 보면서 박정희 시대에 송충이 잡으러 나간 어린 시절 기억이 새록새록 하기만 하다. 



<참고문헌>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헌강왕릉보수수습조사보고서》, 199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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