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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26 04:00:05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제사상에 뒤켠에 안치하는 지방, 혹은 신주(神主)는 그것이 신체(神體)임은 두 말이 필요 없으니, 이를 쓰는 방법에서 주목할 것은 부부 중심이라는 점이다. 즉, 부부가 모두 돌아가셨을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모, 고조와 고조모를 반드시 함께 짝을 지어 지방을 쓰니, 이 경우 다시 조심할 점은 神主 주체로써(다시 말해 남쪽을 향해 앉은 신주가 주체가 되었을 때)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을 따진다는 점이다. 이를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볼 때는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가 된다. 


조선시대 무덤을 보면 그 묘주(墓主)를 밝히는 돌덩이(이를 묘표墓表라 한다)를 발견하거니와, 그에 적힌 문구를 보면 ◎◎之墓라 하면서 그 옆에 작은 글씨로 '配 ◎◎夫人 金海金氏 祔左(부좌)'라는 식의 표현을 발견하거니와, 이는 그 부인을 남편 왼쪽에다가 묻었다는 뜻이다. 신주나 무덤은 원리가 마찬가지라, 죽은 이를 기준으로 해서 그 왼편에 부인이 자리를 잡는다. 


신주를 쓸 때 남자로서 이렇다 할 벼슬을 역임하지 않았을 때는 顯考學生府君 神位(현고학생부군 신위-아버지), 顯祖考學生府君 神位(현조고학생부고 신위-조부), 혹은 顯曾祖考學生府君 神位(현증조고학생부군 신위-증조), 顯高祖考學生府君 神位(현조고학생부군 신위-고조)라는 식으로 반드시 ‘考’를 쓰거니와, 


반면 그에 대한 여성은 顯妣孺人金海金氏 神位(현비유인김해김씨 신위-어머니), 顯祖妣孺人星山裵氏 神威(현비유인성산배씨 신위-할머니) 따위로 현비(顯妣), 현조비(顯祖妣), 현증조비(顯曾祖妣), 현고조비(顯高祖妣)라는 식으로 반드시 ‘妣’를 쓴다.


그렇다면 신주에서 남자는 考, 여자는 妣를 쓰는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중국 고대 각종 의례(儀禮)를 집성한 《예기(禮記)》 중 일상생활 소소한 각종 예절을 기록했다 해서 곡례(曲禮)라고 일컫는 章이 있거니와, 이는 다시 분량이 많아 上·下로 나눠지거니와, 이 중 곡례(曲禮) 下에 이르기를, 


生曰父, 曰母, 曰妻; 死曰考, 曰妣, 曰嬪.


이라 했다. 생전에 아버지는 父, 어머니는 母, 아내는 妻라 부르지만, 사후에는 아버지는 考, 어머니는 妣, 아내는 嬪이라 부른다.


는 뜻이다. 이로써 본다면, 혹여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그 남편이 제사를 지낸다면, 顯嬪孺人金海金氏 神位 따위로 지방을 쓰야 할 듯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지방 쓰는 법을 소개한 각종 인터넷 자료에 의할 지면


亡室孺人金海金氏 神位 따위로 쓴다고 하니, 나는 그 유래가 몹시도 궁금하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체로 부인이 오래 사는 일이 많고, 더구나 그 부인이 먼저 죽는다 해도, 자식이 있으면, 대체로 그 자식이 제사한는다는 점에서 亡室孺人金海金氏 神位와 같은 지방을 쓰는 일은 그다지 없으리라. 


이 땅의 남자들이여 오래살지어다. 추석이 다가와 객설을 늘어놔 봤다.



무덤에 가서 조상을 제사하는 행위인 묘제墓制 혹은 묘를 살피는 성묘省墓는 실은 각종 의례서에서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는 아마도 어느 일정 시기까지 무덤에다가 그 표식인 봉분을 만들지 않은 데서 비롯한 것으로 나는 본다. 중국사를 보면 공자 이전에는 봉분이 없어, 일단 무덤을 쓰고 나면, 그 위치는 후손도 이내 잊어버린다. 그런 까닭에 장소도 모르는 묘제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묘제의 제1 성립 조건은 그 위치 확인이다. 묘제를 둘러싼 이렇다 할 규정이 없는 까닭은 나는 이런 역사성에서 말미암는다고 본다. 묘제 혹은 성묘는 때마다 무덤을 소제하는 행위인 소분掃墳 혹은 잡초를 베어내는 벌초伐草와도 밀접하다. 

봉분이 없던 시대, 조상숭배는 자연 조상의 혼이 깃들었다고 간주하는 사당인 종묘宗廟 혹은 가묘家廟, 그 신체神體가 깃들었다는 밤나무 막대기인 신주神主 문화 발달을 불러온다. 종묘와 가묘는 시체와 혼의 분리를 위한 시설이다. 이 시대 무덤은 저 먼 곳에다가 만드는 일이 보통이니, 하기야 거리가 문제가 되었으리오? 어차피 무덤 제사가 없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이 점이 조선시대 일부 지식인 사회에서도 궁금했던 모양이다. 조선 중기 때 문사文士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명절 중에 설날ㆍ한식(寒食)ㆍ단오(端午)ㆍ추석(秋夕)에는 묘제(墓祭)를 지내고, 3월 3일(상사일)과 4월 8일(석탄일), 그리고 9월 9일(중양절)에는 술 마시고 논다.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묘제는 3월 상순에 지낸다’고 했으며, 중국에서는 지금도 이같이 행한다. 우리나라 풍속에는 네 명절에 지내는데, 그 출처는 어느 때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다. 《(국조)오례의(五禮儀)》에는 ‘설날ㆍ단오ㆍ추석에는 사당에서 제사지낸다’고 해서 한식은 빠졌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모두 묘제는 지내니, 또한 그 어찌 된 까닭인지 모르겠다. 중국에서는 한식에 그네를 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단오에 그네를 타니, 명절에 행하는 풍속 역시 무슨 연유로 다르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라에서 지내는 능묘(陵墓) 제사가 지극히 번거롭고, 사삿집 묘제(墓祭) 역시 번거롭지만 예(禮)를 어기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임진난 후에는 나라의 제사가 감해졌으니, 사삿집 묘제도 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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