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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顯忠祠)의 여러 층위와 박정희 현판 문제(1)

‘이충무공 유허’와 ‘현충사’, 그 괴리 


그의 탄강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해군 총독으로 맹활약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시설이 있으니, 이를 우리가 현충사(顯忠祠)라 하거니와, 현재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이 시설은 우선 면적이 방대하기 짝이 없어, 개인 사당으로 이토록 큰 규모는 없다.

 

시민공원을 겸한 이 현충시설은 또 하나의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첫째,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곳이 중앙정부요, 둘째 그것이 보존정비된 내력이 이미 그런 특성이 농후하게 관철되었으며, 셋째 그 연례 제례를 관장하는 기관 역시 중앙정부인 까닭이다. 제관은 대통령이 하다가 김영삼 정부 이래 현재까지는 국무총리가 집도한다.

도대체 이런 국가현충시설은 어찌해서 어떤 내력으로 탄생했는가?


현충사 전면 주차장 이순신 기념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곧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고 만다는 그의 필적을 새겼다.

   

이를 위해 우선 우리는 이 현충시설의 명패부터 새삼 확인해야 한다. 어떤 시설의 정체성을 간판만큼 적확히 표현하는 존재는 드문 까닭이다.

 

우리는 이곳에 당연히 현충사라는 간판이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막상 그 입구 한 켠을 장식한 안내판을 보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李忠武公遺墟)’라는 대문 편액을 발견한다. 이곳이 더불어 국가 사적 제155호임을 적시한다. ‘현충사’가 아니다.

 

유허란 무엇인가? 남은 흔적이라는 뜻이다. 본래의 시설은 이미 망실되고, 그 터만 남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현충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시설은 왜 이름이 현충사가 아닌가? 그 해명을 위해 우선 이 안내판 본문을 보자.

 

아산 충무공 유허 안내판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십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일제시대인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공의 위업을 기리고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을 시행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 정비 사업을 통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자, 이를 통해 우리는 왜 이곳이 현충사가 아닌 ‘충무공 유허’임을 안다. 이곳은 그의 넋을 기리는 현충사라는 사당만이 아니라, 그가 기거한 옛집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안내판의 충무공 유허 배치도


  1. 신건지 2018.01.25 10:47 신고

    한량 ㅋㅋㅋ

주말인 오늘 현충사에 볼 일이 있어 들른 김에 온양민속박물관으로 행차했다.
여러번 들린 곳이나 기왕 바람이나 쐬자 해서 상경하는 길에 찾아 혹이나 해서 문칸에서 신탁근 선생 계시냐 했더니 출근하셨단다.

선생은 이 박물관 산증인이다.
박물관 창업주인 계몽사 선대 회장 뜻을 받들어 사십년 전 개관을 준비하고, 지금은 비록 관장직을 놓고는 고문이란 직함으로 물러 앉았으나 여전히 왕성히 활동 중이다.

오천원짜리 입장권을 끊고 들어서 석물들을 어루만지며 박물관으로 가노라니 그 정문 소나무 가지치기가 한창이라 미세먼지 마스크를 쓴 선생이 반가이 맞는다.

뭐하시냐 했더니 뜻 있는 지역 조경업자가 일주일째 무료 조경공사를 해주고 있단다.
설립자 막내따님인 관장은 출근안하셨단다.

듣자니 박물관이 올해 시월로 설립 사십주년이라 올해는 이를 기념하는 사업을 준비 중이라 한다.
다행히 이곳 유지들이 도와주어 올해는 이를 위한 시비도 삼억원을 확보했다 하니 내가 적이 안심이다.

아다시피 우리 사립박물관은 그 어떤 곳이나 운영난에 직면 중이거니와 온양민속박물관도 예외가 아니다.
이제는 더는 버티기 힘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내심 안타깝기 짝이 없었는데 적어도 올해는 돌파구를 찾은 듯 하니 적이 안심이다.

부디 이번과 같은 재정지원이 장기적으로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박물관 창업주는 1921년생이니 내 선친과 같다.
그가 2000년 타계하면서 그의 사후 박물관을 어찌할지를 적은 유언장을 신 관장께 남겼다는데 그 유언장은 창업주 타계 이후 유족한테 공개했단다.

그 정확한 내용은 정확히 옮길 수 없으나 아무튼 박물관을 잘 운영할 데가 나타나면 거기에 맡기라 했다 하니, 창업주 정신이 고결하기만 하다.

대략 십년전쯤인가 국립민속박물관 주변에서 온양민속박물관을 인수해 그 분관으로 만든다는 말이 돈 적 있다.
그 일을 여쭈니 실제 그런 일이 있어 김홍남 민박 관장 시절 민박에서 그런 제의가 와서 두번 실제로 만나기도 했단다. 당시 문화부인지 담당 과장이 지금은 퇴직하고 한국관광공사 자회사에 복무 중인 윤남순 선생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는 온양민속박물관 운영이 그만큼 힘들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박물관은 창업주가 타계하고 모기업인 계몽사까지 와해되는 바람에 어려움이 처해있다.
더구나 이명박 정부시절 최광식 중박 관장 주도로 시행한 국립박물관 무료 관람이 시행되면서 더욱 곤란에 처하는 지경이다.

무료 관람 여파가 사립박물관 운영에 끼친 악영향은 그 이전과 이후 관람객 추이를 봐도 뚜렷하단다.

국립박물관을 무료로 개방하는 마당에 누가 비싼 관람료 내고 사립박물관을 오겠느냐는 것이다.

뭐 말을 하다 보니 푸념 비슷하게 되었지만 온양민속박물관이 남긴 족적은 누구도 넘볼 수 없다.

좋은 유물 찾아 전국을 싸돌아 다닌 이야기들은 필설로 다하기 어렵다.

그런 이야기들을 이제는 당신이 회고록으로 정리하셔야 한단 말을 나는 여러번 했다.

나는 글재주가 없다 번번이 사양하기에 구술하시면 내가 정리하겠다 해서 오늘 구두합의가 이뤄졌다.

나 역시 그 역사는 채록해야 한다는 강박이 작동한지 오래니 한 번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아직은 강녕하시니 서둘러야겠다.
나 스스로 담금질해본다.

이번에 보니 탈 자료들을 잔뜩 새로 내놓았으니 장관이다.
민속학자 고 이두현 교수 수집품이라 들은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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