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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日本書紀》가 인용한 백제계 관련 사서로 짐작되는 《백제기百済記》 《백제신찬百済新撰》 《백제본기百済本記》 세 가지를 합칭하는 말이다. 이들 삼서가 《日本書紀》에서는 신공황후기神功皇后紀 이래 흠명천황기欽明天皇紀에 인용되는 모습을 보인다. 이들 삼서가 무엇인지를 두고 각종 주장이 난무하거니와, 세 가지가 각기 다른 사서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하다. 그것이 《日本書紀》에 인용된 양상을 차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神功皇后)卌七年〔367〕夏四月(中略)因以千熊長彦爲使者, 當如所願. 千熊長彦者, 分明不知其姓人. 一云, 武蔵國人, 今是額田部槻本首等之始祖也. 【百濟記云職麻那々加比跪者, 蓋是歟也.】於是, 遣千熊長彦于新羅, 責以濫百濟之獻物.

○ (神功皇后)六十二年〔382〕, 新羅不朝. 即年, 遣襲津彦擊新羅. 【百濟記云, 壬午年, 新羅不奉貴國. 々々遣沙至比跪令討之. 新羅人莊飾美女二人, 迎誘於津. 沙至比跪, 受其美女, 反伐加羅國, 々々々王己本旱岐, 及兒百久至・阿首至・國沙利・伊羅麻酒・爾汶至等, 將其人民, 來奔百濟. 百濟厚遇之. 加羅國王妹既殿至, 向大倭啓云, 天皇遣沙至比跪, 以討新羅. 而納新羅美女, 捨而不討. 反滅我國. 兄弟人民, 皆爲流沈. 不任憂思. 故, 以來啓. 天皇大怒, 即遣木羅斤資, 領兵衆來集加羅, 復其社稷.】一云, 沙至比跪, 知天皇怒, 不敢公還. 乃自竄伏. 其妹有幸於皇宮者. 比跪密遣使人, 問天皇怒解不. 妹乃託夢言, 今夜夢見沙至比跪. 天皇大怒云, 比跪何敢來. 妹以皇言報之. 比跪知不免, 入石穴而死也.

○ (応神天皇)八年〔397〕春三月, 百濟人來朝. 【百濟記云, 阿花王立无禮於貴國. 故奪我枕彌多禮, 及峴南・支侵・谷那・東韓之地. 是以, 遣王子直支于天朝, 以脩先王之好也.】

○ (応神天皇)廿五年〔414? 420?〕, 百濟直支王薨. 即子久爾辛立爲王. 王年幼. 木滿致執國政. 與王母相婬, 多行無禮. 天皇聞而召之. 【百濟記云, 木滿致者, 是木羅斤資, 討新羅時, 娶其國婦, 而所生也. 以其父功, 專於任那. 來入我國, 往還貴國. 承制天朝, 執我國政. 權重當世. 然天朝聞其暴召之.】

○ (雄略天皇)二年〔458〕秋七月(中略)【百濟新撰云, 己巳年, 蓋鹵王立. 天皇遣阿禮奴跪, 來索女郎. 百濟莊飾慕尼夫人女, 曰適稽女郎. 貢進於天皇.】


○ (雄略天皇)五年〔461〕(中略)夏四月, 百濟加須利君【蓋鹵王也.】, 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郎也.】, 而籌議曰, 昔貢女人爲采女. 而既無禮, 失我國名. 自今以後, 不合貢女. 乃告其弟軍君【昆支也.】曰, 汝宜往日本以事天皇. (中略)六月丙戌朔, 孕婦果如加須利君言, 於筑紫各羅嶋産兒. 仍名此兒曰嶋君. 於是, 軍君即以一船, 送嶋君於國. 是爲武寧王. 百濟人呼此嶋曰主嶋也. 秋七月, 軍君入京, 既而有五子.【百濟新撰云, 辛丑年, 蓋鹵王遣弟昆支君, 向大倭, 侍天王. 以脩先王之好也.】

○ (雄略天皇)廿年〔476〕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中略)寡人聞, 百濟國者爲日本國之宮家, 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遂止之. 【百濟記云, 蓋鹵王乙卯年冬, 狛大軍來, 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慰禮. 國王及太后, 王子等, 皆沒敵手.】

○ (武烈天皇)四年〔501〕(中略)是歳, 百濟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遂除, 而立嶋王. 是爲武寧王. 【百濟新撰云, 末多王無道, 暴虐百姓. 國人共除. 武寧王立. 諱斯麻王. 是琨支王子之子. 則末多王異母兄也. 琨支向倭. 時至筑紫嶋, 生斯麻王. 自嶋還送, 不至於京, 産於嶋. 故因名焉. 今各羅海中有主嶋. 王所産嶋. 故百濟人號爲主嶋. 今案, 嶋王是蓋鹵王子之子也. 末多王, 是琨支王之子也. 此曰異母兄, 未詳也.】


○ (継体天皇)三年〔509〕春二月, 遣使于百濟. 【百濟本記云, 久羅麻致支彌, 從日本來. 未詳也.】括出在任那日本縣邑, 百濟百姓, 浮逃絶貫, 三四世者, 並遷百濟附貫也.


○ (継体天皇)七年〔513〕夏六月, 百濟遣姐彌文貴將軍・洲利即爾將軍, 副穗積臣押山, 【百濟本記云, 委意斯移麻岐彌.】貢五經博士段楊爾. 別奏云, 伴跛國略奪臣國己汶之地. 伏願, 天恩判還本屬.

○ (継体天皇)九年〔515〕春二月甲戌朔丁丑, 百濟使者文貴將軍等請罷. 仍勅, 副物部連, 闕名. 遣罷歸之. 【百濟本記云, 物部至々連.】

○ (継体天皇)廿五年〔531〕春二月, (中略)冬十二月丙申朔庚子, 葬于藍野陵. 【或本云, 天皇, 廿八年歳次甲寅崩. 而此云廿五年歳次辛亥崩者, 取百濟本記爲文. 其文云, 大歳辛亥三月, 軍進至于安羅, 營乞乇城. 是月, 高麗弑其王安. 又聞, 日本天皇及太子皇子, 倶崩薨. 由此而言, 辛亥之歳, 當廿五年矣. 後勘校者, 知之也.】

○ (欽明天皇)二年〔541〕(中略)秋七月, 百濟聞安羅日本府與新羅通計, 遣前部奈率鼻利莫古・奈率宣文・中部奈率木刕眯淳・紀臣奈率彌麻沙等, 紀臣奈率者, 蓋是紀臣娶韓婦所生, 因留百濟, 爲奈率者也. 未詳其父. 他皆效此也. 使于安羅, 召到新羅任那執事, 謨建任那. 別以安羅日本府河内直, 通計新羅, 深責罵之. 【百濟本記云, 加不至費直・阿賢移那斯・佐魯麻都等, 未詳也.】乃謂任那曰, 昔我先速古王・貴首王, 與故旱岐等, 始約和親, 式爲兄弟. 於是, 我以汝爲子弟, 汝以我爲父兄. 共事天皇, 倶距強敵. 安國全家, 至于今日.

○ (欽明天皇)五年〔544〕(中略)二月, 百濟遣施德馬武・施德高分屋・施德斯那奴次酒等, 使于任那, 謂日本府與任那旱岐等曰, 我遣紀臣奈率彌麻沙・奈率己連・物部連奈率用奇多, 朝謁天皇. 彌麻沙等, 還自日本, 以詔書宣曰, 汝等, 宜共在彼日本府, 早建良圖, 副朕所望. 爾其戒之. 勿被他誑. 又津守連, 從日本來, 【百濟本記云, 津守連己麻奴跪. 而語訛不正. 未詳.】宣詔勅, 而問任那之政. 故將欲共日本府・任那執事, 議定任那之政, 奉奏天皇, 遣召三廻, 尚不來到. 由是, 不得共論圖計任那之政, 奉奏天皇矣. 今欲請留津守連, 別以疾使, 具申情状, 遣奏天皇. 當以三月十日, 發遣使於日本. 此使便到, 天皇必須問汝. 々日本府卿・任那旱岐等, 各宜發使, 共我使人, 往聽天皇所宣之詔. 別謂河内直, 【百濟本記云, 河内直・移那斯・麻都. 而語訛未詳其正也.】自昔迄今, 唯聞汝悪. 汝先祖等, 【百濟本記云, 汝先那干陀甲背・加獵直岐甲背. 亦云那奇陀甲背・鷹奇岐彌. 語訛未詳.】倶懷姧僞誘説. 爲哥可君, 【百濟本記云, 爲哥岐彌, 名有非岐.】專信其言, 不憂國難. 乖背吾心, 縱肆暴虐. 由是見逐. 職汝之由. 汝等來住任那, 恆行不善. 任那日損, 職汝之由. 汝是雖微, 譬猶小火燒焚山野, 連延村邑. 由汝行惡, 當敗任那. 遂使海西諸國宮家, 不得長奉天皇闕. 今遣奏天皇, 乞移汝等, 還其本處. 汝亦往聞. 又謂日本府卿・任那旱岐等曰, 夫建任那之國, 不假天皇之威, 誰能建也.

○ (欽明天皇)五年〔544〕(中略)三月, 百濟遣奈率阿乇得文・許勢奈率奇麻・物部奈率奇非等, 上表曰, 奈率彌麻沙・奈率己連等, 至臣蕃, 奉詔書曰, 彌等宜共在彼日本府, 同謀善計, 早建任那. 爾其戒之. 勿被他誑. 又津守連等, 至臣蕃奉勅書, 問建任那. 恭承來勅, 不敢停時, 爲欲共謀. 乃遣使召日本府【百濟本記云, 遣召烏胡跛臣. 蓋是的臣也.】與任那. 倶對言, 新年既至. 願過而往. 久而不就. 復遣使召. 倶對言, 祭時既至. 願過而往. 久而不就. 復遣使召. 而由遣微者, 不得同計. 夫任那之, 不赴召者, 非其意焉. 是阿賢移那斯・佐魯麻都, 二人名也. 見上文. 姧佞之所作也. 夫任那者, 以安羅爲兄. 唯從其意. 安羅人者, 以日本府爲天. 唯從其意. 【百濟本記云, 以安羅爲父. 以日本府爲本也.】今的臣・吉備臣・河内直等, 咸從移那斯・麻都指撝而己. 移那斯・麻都, 雖是小家微者, 專擅日本府之政. 又制任那, 障而勿遣. 由是, 不得同計, 奏答天皇. 故留己麻奴跪, 蓋是津守連也. 別遣疾使迅如飛鳥, 奉奏天皇. 假使二人, 二人者, 移那斯與麻都也. 在於安羅, 多行姧佞, 任那難建, 海西諸國, 必不獲事. 伏請, 移此二人, 還其本處. 勅喩日本府與任那, 而圖建任那. 故臣遣奈率彌麻沙・奈率己連等, 副己麻奴跪, 上表以聞. 於是, 詔曰, 的臣等, 等者, 謂吉備弟君臣・河内直等也. 往來新羅, 非朕心也. 曩者, 印支彌【未詳.】與阿鹵旱岐在時, 爲新羅所逼, 而不得耕種. 百濟路迥, 不能救急. 由的臣等往來新羅, 方得耕種, 朕所曾聞. 若已建任那, 移那斯・麻都, 自然却退. 豈足云乎. 伏承此詔, 喜懼兼懷. 而新羅誑朝, 知匪天勅. 新羅春取[口彔]淳. 仍擯出我久禮山戌, 而遂有之. 近安羅處, 安羅耕種. 近久禮山處, 斯羅耕種. 各自耕之, 不相侵奪. 而移那斯・麻都, 過耕他界, 六月逃去. 於印支彌後來, 許勢臣時, 【百濟本記云, 我留印支彌之後, 至既洒臣時. 皆未詳.】新羅無復侵逼他境. 安羅不言爲新羅逼不得耕種. 臣嘗聞, 新羅毎春秋, 多聚兵甲, 欲襲安羅與荷山. 或聞, 當襲加羅. 頃得書信. 便遣將士, 擁守任那, 無懈息也. 頻發鋭兵, 應時往救. 是以, 任那隨序耕種. 新羅不敢侵逼. 而奏百濟路迥, 不能救急, 由的臣等, 往來新羅, 方得耕種, 是上欺天朝, 轉成姧佞也. 曉然若是, 尚欺天朝. 自餘虚妄, 必多有之. 的臣等, 猶住安羅, 任那國, 恐難建立.

○ (欽明天皇)五年〔544〕(中略)冬十月, 百濟使人奈率得文・奈率奇麻等罷歸. 【百濟本記云, 冬十月, 奈率得文・奈率奇麻等, 還自日本曰, 所奏河内直・移那斯・麻都等事, 無報勅也.】

○ (欽明天皇)六年〔545〕(中略)是歳, 高麗大亂, 被誅殺者衆. 【百濟本記云, 十二月甲午, 高麗國細群與麁群, 戰于宮門. 伐鼓戰鬪. 細群敗不解兵三日. 盡捕誅細群子孫. 戊戌, 狛國香岡上王薨也.】

○ (欽明天皇)七年〔546〕(中略)是歳, 高麗大亂. 凡鬪死者二千餘. 【百濟本記云, 高麗以正月丙午, 立中夫人生子爲王. 年八歳. 狛王有三夫人. 正夫人無子. 中夫人生世子. 其舅氏麁群也. 小夫人生子. 其舅氏細群也. 及狛王疾篤, 細群・麁群, 各欲立其夫人之子. 故細群死者, 二千餘人也.】

○ (欽明天皇)十一年〔550〕春二月辛巳朔庚寅, 遣使詔于百濟【百濟本記云, 三月十二日辛酉, 日本使人阿比多, 率三舟, 來至都下.】曰, 朕依施德久貴・固德馬進文等所上表意, 一々敎示, 如視掌中. 思欲具情. 冀將盡抱. 大市頭歸後, 如常無異. 今但欲審報辭. 故遣使之. 又復朕聞, 奈率馬武, 是王之股肱臣也. 納上傳下, 甚協王心, 而爲王佐. 若欲國家無事, 長作宮家, 永奉天皇, 宜以馬武爲大使, 遣朝而已. 重詔曰, 朕聞, 北敵強暴. 故賜矢卅具. 庶防一處.

○ (欽明天皇)十一年〔550〕(中略)夏四月庚辰朔, 在百濟日本王人, 方欲還之. 【百濟本記云, 四月一日庚辰, 日本阿比多還也.】百濟王聖明, 謂王人曰, 任那之事, 奉勅堅守. 延那斯・麻都之事, 問與不問, 唯從勅之. 因獻高麗奴六口. 別贈王人奴一口. 皆攻爾林, 所禽奴也.

○ (欽明天皇)十七年〔556〕春正月, 百濟王子惠請罷. 仍賜兵仗良馬甚多. 亦頻賞祿. 衆所欽歎. 於是, 遣阿倍臣・佐伯連・播磨直, 率筑紫國舟師, 衞送達國. 別遣筑紫火君, 【百濟本記云, 筑紫君兒, 火中君弟.】率勇士一千, 衞送彌弖. 彌弖津名. 因令守津路要害之地焉.



고대일본이 편찬한 다음 6개 정사(正史)를 총칭하는 말이다.


1. 일본서기(日本書紀) : 신대(神代)에서 지통천황(持統天皇. 697년)까지 역사를 정리한다. 전 30권. 720년(養老 4)에 완성. 찬자는 도네리 친왕(舍人親王) 


2. 속일본기(續日本紀) : 문무천황(文武天皇)부터 환무천황(桓武天皇)에 이르기는 시대(697-791)를 다룬다. 전 40권. 797년(延曆 16) 완성. 찬자는 菅野眞道와 藤原繼繩 등이다.


3. 일본후기(日本後紀) : 환무천황(桓武天皇)부터 순화천황(淳和天皇)까지(792-833)를 다룬다. 전 40권이다. 하지만 4분의 3 정도가 일실되어 현재는 10권 분량만 남았다. 840년(承和 7) 완성. 찬자는 藤原冬嗣와 藤原緖嗣 등이다.


4. 속일본후기(續日本後紀) : 인명천황(仁明天皇) 시대(833-850년)를 다룬다. 전 20권. 869년(貞觀 11)에 완성. 찬자는 藤原良房과 春澄善繩 등.


5. 일본문덕실록(日本文德天皇實錄) : 문덕천황(文德天皇) 시대(850-858년)를 다룬다. 전 10권. 879년(元慶 3) 완성. 찬자는 藤原基經과 菅原是善과 嶋田良臣 등이다. 


6.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実録) : 세이와천황(清和天皇 청화천황)에서 고코천황(光孝天皇 광효천황)에 이르는 시기(858~887)를 다룬다. 전 50권, 901년 완성. 편찬자는 후지와라 토키히로(藤原時平)・오오쿠라 요시유키(大蔵善行)・스가와라 미치자네(菅原道真) 등이다. 


개별 문헌에 대한 상세한 소개는 별도 자리를 마련한다. 


이 이야기도 내가 늘쌍 하는 말이다.
일본서기가 대표하는 고대 일본이 하는 논법은 작금 북한의 행태와 같다.
일본서기 이래 저들의 각종 기록을 보면 한반도 모든 사신 행차는 목적이 조공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모든 사절을 조공사로 표현한다.

하도 저리 뻥을 쳐놓으니 진짜일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역사연구자가 의외로 많다.
하지만 다 헛소리다.

작금 북한이 하는 꼴과 같다.
저들의 눈에는 모든 외교사절이 그들에 대한 조공 행렬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 특사 방문도 저들을 알현하러 온 조공사에 지나지 않는다.
개뿔도 없으면서 한반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줄기차게 주장한다.

북한이 땡깡부릴수록 인근 국가의 사신 행렬이 줄을 이을 수밖에 없다.
어찌 이것이 조공 행렬이리오?

일본서기는 지금의 북한 노동신문에 지나지 않는다.

이 논리를 간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절 탐하는 개로왕에게 월경 핑계 대고 도망쳐

[중앙선데이] 입력 2017.06.04 01:44 수정 2017.06.04 16:23 | 534호 23면

  

서기 475년. 이 해는 백제 제21대 개로왕(蓋然性鹵王) 재위 21년째요, 고구려는 100세 장수를 누린 장수왕 재위 63년째가 되는 해였다. 『삼국사기』 고구려 장수왕본기를 보면 “(가을 9월에) 왕이 군사 3만을 이끌고 백제를 들이쳐 그 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몰하고 백제왕 부여경(扶餘慶)을 죽이고 남녀 8000명을 포로로 삼아 돌아왔다”고 돼 있다. 백제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까닭에 왕족은 부여를 성씨로 삼았다. 부여경이란 개로왕의 이름이다. 500년 사직이 거의 문을 닫을 위기에 놓인 백제는 신라의 도움을 얻어 허겁지겁 남쪽으로 내려가 지금의 충남 공주 부근 웅진에 터를 새로 잡았다.


개로왕, 남편에게 누명 씌워 추방

도미 부인 불러 욕보이려던 순간

“온 몸 더러우니 다른 날 …” 모면

남편과 극적 상봉, 고구려로 도망


많은 죽음이 그렇듯이 한성백제의 최후 또한 비참하기만 했다. 『삼국사기』 백제 개로왕본기에 그 처참한 광경이 생생히 묘사돼 있다. 이를 보면, 고구려군이 한성을 네 갈래로 나누어 포위하자 개로왕은 성문을 걸어 잠근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다가 기병 수십 명만 데리고 성문을 탈출해 도망가다가 사로잡혀 결국 지금의 서울 광진구 아차산 아래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개로왕, 고구려군에 잡혀 참수

그런데 백제를 누란의 위기로 빠뜨린 적국 고구려군 수뇌부에는 뜻밖에도 백제에서 도망친 두 사람이 있었다. 고구려군에 사로잡힌 개로왕은 참수 직전 이들에게서 죽음보다 더한 치욕을 겪는다. 그것을 개로왕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이때 고구려의 대로(對盧·제1등 관직)인 제우(齊于)와 재증걸루(再曾桀婁)·고이만년(古尒萬年)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왕도 한성의) 북쪽 성을 공격해 7일 만에 함락시키고, 군사를 옮겨 남쪽 성을 공격하자 성안이 위기와 공포에 빠지니 임금이 탈출해 달아났다. 고구려 장수 걸루 등이 임금을 발견하고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는 임금 얼굴에다가 세 번 침을 뱉고는 죄를 헤아린 다음 묶어서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은 원래 백제 사람으로서 죄를 짓고 고구려로 도망한 자들이다.”


개로왕에게 치욕을 가한 재증과 고이는 복성(複姓, 2음절 이상으로 된 성씨)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들이 본래 백제에서 어떤 죄를 지어 고구려로 도망쳐야 했는지 언급이 없다. 한데 그렇게 도망쳐 고구려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돌아온 그들이 개로왕을 사로잡은 뒤 침을 뱉고 어떤 죄를 지었는지 따졌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이들로서는 백제에서 대단히 억울한 일을, 그것도 개로왕에게서 직접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심증을 깊게 한다. 얼마나 원한이 사무쳤으면 한때의 주군을 그리 대했겠는가.


같은 개로왕 시대, 재증·고이와 비슷한 운명을 걸어온 부부가 또 있었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고구려로 도망친 일은 같으나, 이들은 복수는커녕 비참한 최후를 맞은 점이 다르다. 『삼국사기』에 열전 형태로 그 행적이 정리된 그 유명한 도미(都彌) 부부가 그들이다. 이 열전은 도미라는 남편을 주인공으로 내세웠지만, 주인공은 그 부인이라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도미는 개로왕 시대를 산 평범한 백성이다. 그러나 그에겐 매우 아름답고 지조가 있는 아내가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미모가 그만 비극의 씨앗이되고 말았다. 소문이 퍼져 나가 마침내 왕이 아내를 탐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사실 개로왕은 단순히 도미 부인의 아름다움을 탐한데 그치지 않았다.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에게는 특유의 ‘여성 정절 파괴 본능’ 같은게 있었던 것 같다. 왕은 도미부인에 앞서 도미를 먼저 불러 이렇게 말한다. “흔히 부인의 덕은 정결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으슥하고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달콤한 말로 유혹하면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여자는 드물다”고 말이다. 제아무리 정절을 외치지만 유혹에 넘어오지 않는 여자는 없다는 뜻이다. 더구나 왕이 부르는데 정절을 바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느냐는 투였다. 개로왕은 그 정절을 거꾸러뜨리고 싶은 심리가 발동했던 것이다.


이런 개로왕이지만 막상 쉽사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안달이 난 그는 남편인 도미에게 죄를 덮어씌워 두 눈을 뽑아 버리고는 강배에 실어 강제 추방해 버렸다. 그러고는 기어이 부인을 불러다가 강제로 욕보이려 했다. 그러나 지혜로웠던 도미 부인은 이 위기에서 빠져나온다. 도미 열전에 따르면 도미부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 남편을 잃어 혼자는 부지할 수 없는데다 왕을 모시게 되었으니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 하지만 지금 제가 월경으로 온몸이 더러우니 다른 날을 기다려 깨끗이 몸을 씻고 오겠습니다.”


이 말을 곧이 믿은 왕은 그리하라고 했다. 하지만 도미 부인은 그 길로 배를 타고 강물로 탈출해 천성도(泉城島)라는 섬에 이르러 풀뿌리를 캐 먹으며 연명하다가 장님이 된 남편과 극적으로 재상봉했다고 한다. 이후 부부는 배를 타고 고구려 땅 산산(䔉山)이라는 곳으로 가서 그곳에서 구차하게 살다가 생을 마친 것으로 열전은 전하고 있다. 비장함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당시엔 월경 중인 여성의 몸은 더럽다고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온몸이 더럽다’에 해당하는 『삼국사기』 원문을 보면 ‘혼신오예(渾身汚穢)’다. 오예란 간단히 말해 오물(汚物)이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자 연암 박지원의 소설 중에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이 있는데, 예덕 선생이란 수도 한양에서 인분을 푸는 일로 살아가는 사람을 극화한 표현이다. ‘예덕’은 글자 그대로는 ‘똥의 덕’이다.


몇 가지 흥미로운 점이 떠오른다. 첫째, 월경을 지금 흔히 쓰는 용어 그대로 ‘월경(月經)’이라 했다. 둘째, 그러한 월경이 혼신오예라 해서 더러운 일로 인식됐다는 사실이다. 이와 유사한 내용이 조선시대에 편찬된 문헌들에도 그대로 전재됐지만 용어에 미묘한 차이를 보인다. 예컨대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저 도미 열전을 그대로 베끼면서도 ‘월경’ 대신에 ‘월사(月事)’라는 말을 썼다. 이러한 용어 변경이 시대별 단순한 선호도 때문인지, 혹은 ‘월경’에 비해 ‘월사’라는 말이 덜 직설적이었다고 생각했음인지는 언뜻 판단이 서지 않는다.


또한 월경 중인 몸은 더러우며, 그런 까닭에 그런 여자는 남자를 모시지 못한다는 스토리는 고대 일본 정사인 『일본서기』에도 보인다. 이곳 제7권 경행천황(景行天皇) 4년 봄 2월 갑자일(甲子日) 조에는 미농(美農)이라는 곳으로 행차한 천황이 이곳에 근거지를 두었다고 추측되는 팔판입언(八坂入彦)이라는 황자(皇子)의 첫째 딸인 팔판입원(八坂入媛)을 만나 비로 삼게 된 사연이 흥미롭게 소개돼 있다. 이에 의하면 천황은 입원(入媛)의 동생인 제원(弟媛)을 먼저 만나 추파를 던졌다. 하지만 장막까지 불러들이는 데 성공한 제원은 막상 다음과 같은 말로 천황의 수청 요구를 거부한다.


“첩은 성격이 교접(交接)의 도를 바라지 않으니, 지금은 황명(皇命)의 위엄에 못 이겨 잠시 장막 안으로 들었습니다만, 마음이 내키지 않고 모습 또한 더럽고 누추해 오래도록 후궁에서 모실 수는 없을 듯합니다. 하지만 첩의 언니 팔판입원은 얼굴이 아름답고 마음이 정결하니, 후궁에 넣게 해 주십시오.”


『일본서기』 형자예루도 월경의 은유


이에 마침내 그 언니가 천황비가 되었다고 한다. 모습이 추하고 더럽다는 말에 해당하는 『일본서기』 원문을 보면 ‘형자예루(形姿穢陋)’다. ‘형자’란 몰골이란 뜻인데 그것이 예루하다 했으니, 도미 열전에서 본 ‘오예(汚穢)’라는 말과 같은 의미다. 다시 말해 ‘형자예루’라는 말은 ‘월경 중’이라는 은유적 표현인 것이다.


이와 유사한 스토리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 의 제1편 ‘김춘추와 문희의 혼인’(2016년 6월 26일자)편에서 다룬 바 있다. 김유신이 처음에는 큰누이 보희를 김춘추와 짝지어 주려 했으나 그가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급히 작은누이 문희를 대타로 삼았다는 내용이었고, 이 대타 작전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다.


김춘추의 배필이 될 뻔한, 나아가 왕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한꺼번에 날린 보희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이를 짐작케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 전에 보인다.


“(춘추와 문희가) 포사(鮑祀·포석정)에서 길례(吉禮·결혼식)를 치렀다. 얼마 안 있어 (김춘추 조강지처인) 보량궁주(寶良宮主)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문희가 뒤를 이어 정궁(正宮)이 되었다. 이에 이르러 화군(花君·풍월주 부인)이 되어 아들(법민)을 낳았다. 보희는 꿈을 바꾼 일을 후회해서 다른 사람에게는 시집가지 않았다. (춘추)공이 이에 (보희를) 첩으로 삼아 아들 지원(知元)과 개지문(皆知文)을 낳았다. 이 이야기는 『문명황후사기(文明皇后私記)』에 나온다.”



김태식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 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 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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