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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제21대 왕으로 재위기간은 455~475년이다. 이름이 경사(慶司) 혹은 경(餘)이며, 근개루(近蓋婁)라 부르기도 한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가수리군(加須利君)으로 나타난다.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며 부왕이 죽자 왕위를 이었다.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와 충돌해 그 정벌을 위해 북위에 사신을 보내 군사를 청하기도 했다. 이는 결국 고구려 반격을 불러 장수왕이 이끄는 3만 대군에 서울이 함락당하고 그 자신은 포로로 잡혀 아차산 아래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 권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 조 : 개로왕(蓋鹵王)<근개루(近蓋婁)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경사(慶司)이고 비유왕(毗有王) 맏아들이다. 비유왕이 재위 29년에 죽자 왕위를 이었다. 14년(468) 겨울 10월 초하루 계유에 일식이 있었다.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겨울 10월에 쌍현성(雙峴城)을 수리하였고, 청목령(靑木嶺)에 큰 목책[大柵]을 설치하여 북한산성(北漢山城)의 군사들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다. 18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제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首丘之心]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王略]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공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있다.』[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월(越)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가 있었지만 나라[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했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눠 양쪽에서 공격하는 한편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 혹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했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했다. 이 때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며 말했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난 것이 늦었음을 한탄했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상(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습니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다”고 말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했다. 논한다.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 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1대 개로왕(盖鹵王)은 근개로왕(近盖鹵王)이라고도 한다. 이름을 경사(慶司)다. 을미년에 즉위해 20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제48 (열전 제8) 도미 : 도미(都彌)는 백제 사람이다. 비록 호적에 편입[編戶]된 하찮은 백성이었지만 자못 의리를 알았다. 그의 아내는 아름답고 예뻤으며 또한 절조있는 행실을 하여 당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개루왕(蓋婁王)이 이를 듣고 도미를 불러 더불어 말하기를 “대저 부인의 덕은 비록 지조를 지킴을 앞세우지만 만약 그윽하고 어두우며 사람이 없는 곳에서 교묘한 말로 유혹하면 능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드물다.” 하니, 대답하였다.“무릇 사람의 정이란 헤아리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내와 같은 사람은 비록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왕이 이를 시험하여 보기 위하여 도미에게 일을 시켜 잡아두고는 한 명의 가까운 신하로 하여금 거짓으로 왕의 의복을 입고 말을 타고 밤에 그 집에 가게 하였다. 사람을 시켜 왕이 오셨다고 먼저 알렸다.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나는 오래 전부터 네가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도미와 내기를 걸어서 이겼다. 내일 너를 들여 궁인(宮人)으로 삼기로 하였다. 지금부터 네 몸은 내것이다.”드디어 난행을 하려 하자 부인이 말하였다.“국왕께서는 헛말을 하지 않으실 것이니 제가 어찌 따르지 않으리요! 청컨대 대왕께서는 먼저 방에 들어가소서. 제가 옷을 갈아 입고 들어오겠습니다.”물러나 계집 종을 번거롭게 치장시켜 바쳤다. 왕이 후에 속임을 당한 것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도미를 왕을 속인 죄로 처벌하여 두 눈알을 빼고 사람을 시켜 끌어내 작은 배에 태워 강에 띄웠다. 그리고 나서 그 아내를 끌어다가 강제로 음행을 하고자 하니, 부인이 말하였다.“지금 낭군을 이미 잃었으니 홀로 남은 이 한 몸을 스스로 지킬 수가 없습니다. 하물며 왕을 모시는 일이라면 어찌 감히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금 월경 중이라서 온 몸이 더러우니 청컨대 다음 날 목욕을 하고 오겠습니다.”왕이 이를 믿고 허락하였다. 부인이 곧바로 도망쳐 강어귀에 갔으나 건널 수가 없었다.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니 문득 외로운 배가 물결을 따라 이르렀으므로 이를 타고 천성도(泉城島)에 다달아 남편을 만났는데 아직 죽지 않았었다. 풀뿌리를 캐 씹어 먹으며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의 산산(山) 아래에 이르니 고구려 사람들이 불쌍히 여겼다. 옷과 음식을 구걸하며 구차히 살아 나그네로 일생을 마쳤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문주왕 즉위년 : 문주왕(文周王)<문주(汶洲)라고도 한다>은 개로왕(蓋鹵王) 아들이다. 처음 비유왕(毘有王)이 죽고 개로가 왕위를 잇자 문주는 그를 보필하여 지위가 상좌평(上佐平)에 이르렀다. 개로가 재위한 지 21년에 고구려가 쳐들어 와서 한성(漢城)을 에워쌌다. 개로는 성문을 닫고 스스로 굳게 지키면서 문주로 하여금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문주가) 군사 1만 명을 얻어 돌아오니 고구려 군사는 비록 물러갔지만 성은 파괴되고 왕은 죽었으므로 드디어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은 문주(文州)라고도 한다. 개로(盖鹵)의 아들이다. 을묘년에 즉위했다. 도읍을 웅주(熊川)로 옮겼다. 2년을 다스렸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동성왕 23년(501) : <책부원귀(冊府元龜)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제(南齊) 건원(建元) 2년(480)에 백제 왕 모도(牟都)가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니 조서(詔書)를 내려 말했다. 「보배로운 명령이 새로와 은택이 먼 지역에까지 미쳤다. 모도는 대대로 동쪽 변경의 번국(蕃國)이 되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직분을 지켰으니 곧 사지절(使持節) 도독백제제군사(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을 수여하노라.」 또 영명(永明) 8년(490)에 백제 왕 모대(牟大)가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렸다. [남제는] 알자복야(謁者僕射) 손부(孫副)를 보내 모대를 책명(冊命)하여 돌아가신 조부 모도의 작호를 잇도록 하고 백제왕으로 삼아 말하였다. 「아아 그대는 대대로 충성과 근면을 이어받아 정성(精誠)이 먼 지역에서도 드러났고, 바다 길이 조용하게 되어 조공을 바침에 변함이 없었다. 떳떳한 법전[彛典]에 따라 천명을 이어가도록 하니 경계하고 조심할지어다[往敬]. 아름다운 위업을 받는 것이니 가히 삼가지 않으랴. 행도독백제제군사(行都督百濟諸軍事)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 백제왕(百濟王)을 삼는다.」』그러나 삼한고기(三韓古記)에는 모도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이 없었다. 또 살펴보니 모대는 개로왕(蓋鹵王) 손자요, 개로왕 둘째 아들인 곤지(昆支)의 아들로서 그 할아버지를 모도라고 하지 않았으니 제서(齊書)에 실린 것은 의심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삼국사기 권 제18( 고구려본기 제6) 고국원왕 41년 : 41년(371) 겨울 10월에 백제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해 왔다. 왕은 군대를 내어 막다가 흐르는 화살에 맞아 이 달 23일에 죽었다. 고국(故國)의 들에 장사지냈다.<백제 개로왕(蓋鹵王)이 위(魏)나라에 표(表)를 보내기를 『쇠(釗)의 머리를 베어서 달아 매었다.』고 하였으나 지나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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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제21대 문자명왕(재위 492∼519) 이름이다. 장수왕 손자로, 아버지 조다가 죽자 대손(大孫)으로 조부 사망과 더불어 즉위했다.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 즉위년 : 문자명왕(文咨明王)<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라운(羅運)이고 장수왕 손자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이어 즉위했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1대 문자명왕(文咨明王)은 이름이 명리호(明理好)이니 개운(个雲)이라고도 하며 고운(高雲)이라고도 한다. 임신년에 즉위해 27년을 다스렸다.

☞문자명왕(文咨明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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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 한 장면...아버지가 제때 안 죽으면 아들이 죽을 수밖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은 이름대로 백수를 했다. 그의 아들로 세자는 조다助多. 아버지가 무려 왕위에만 79년간 있다 죽었을 때 조다는 죽고 없었다. 조다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니 그가 문자명왕이다. 아버지가 하도 왕 노릇 오래하는 바람에 먼저 죽었으니 이름이 쪼다인가 보다. 

그보단 못하지만 조선 세종 역시 장장 32년이나 왕위에 있었다. 문종은 세종의 장자로 아버지가 재위 3년째인 142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때만 해도 아버지 세종은 모든 실권은 아버지 이방원에게 그대로 두어야 했다. 그러니 세종이 왕위에 재위한 기간과 문종이 세자로 있은 기간은 같다. 내가 놀랍기만 한 것은 이 긴 기간 문종이 내리 죽죽 세자로 있었다는 점이다. 

세자나 태자 생활은 왕보다 더 힘들다. 언제건 틈만 나면 끌어내리려는 시도가 일어나기에 어정쩡한 넘버 투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너무 똑똑하면 똑똑해서 아비를 잡아 먹을 놈이라 해서 쫓겨나고, 등신 같으면 등신같다 해서 쫓겨나고, 방탕하면 방탕하다 해서 쫓겨난다. 아주 가깝게는 그의 형 양녕이 그렇지 아니했는가? 이 천하의 망나니는 방탕하다 해서 아비한테 쫓겨났으니 말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보면, 장장 37년을 재위한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은 처음에 동륜(銅輪)을 태자로 삼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너무 왕노릇 많이 하자, 기다리기 지쳐 그랬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태자 자리는 그의 동생 금륜(金輪)에게로 가니, 이가 훗날 신하들한테 쫓겨난 진지왕이다. 

근자 화랑세기가 공개되었다. 보니, 진흥에게는 태자가 세 명이었다. 조강지처 숙명한테서 둔 아들 정숙(貞肅)을 처음에 태자를 삼았지만, 어미가 행실이 곱지 못해, 혹은 열정이 넘쳐 그랬는지 모르지만 딴 남자한테 홀딱 빠져 스스로 왕비 자리를 버리자, 애꿎은 정숙 또한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진흥은 후실로 들인 사도(思道)에게서 동륜과 금륜을 두었던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동륜이 왜 죽었는지가 없지만, 화랑세기는 뜻밖에도 동륜이 아버지 후궁이랑 밤마다 놀다가 하루는 그 후궁 건물을 지키는 사냥개 종류한테 물려죽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이로써 보건대도 아버지는 제때 죽어주거나, 혹은 일찍 자리를 내놔야 한다. 소위 말하는 세대교체다. 

조선 임금으로 가장 오랜 53년인가를 재위한 영조 역시 중간에 세자 바꿔치기를 해야했다. 하지만 이 아비는 불행하기 짝이 없어, 자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굶어죽여야 했으니, 막상 죽인 다음 아들은 없고 덜렁 손자 하나만 남았으니, 그가 여든 몇살까지 장수한 이유는 오로지 의지 때문이었다고 나는 본다. 내가 오래 살아 저 손자놈이 성년되는 모습을 봐야 한다는 그 일념 하나로 그리 오래살았다고 본다. 

문종은 병약하다 하지만, 내 보기엔 이는 장기간의 스트레스에 따른 병약이다. 아버지 죽기만 30년을 기다렸으니, 오죽이나 돌아버렸겠는가? 이 땅의 아비들은 제때에 죽어줘야 그 자신도 봉변을 당하지 않고 아들을 죽였다는 말을 듣지 않는다. 

나는 아비가 죽자 너무 통곡해 문종이 건강을 해쳤다는 말 믿지 않는다. 왜 지금에야 돌아가셨소 하는 원망으로 건강을 망쳤다고 본다. 

일찍 죽자, 아니다 제때 죽자 아버지들아. 오래 생명만 부지해 부자관계 파탄나는 꼴 정 보기 싫으면 그 권한은 제때 자식들한테 물려주어야 한다. 하긴 이 말도 내가 아비이니 할 수 있지, 아비 아녔으면, 호로자식 후레자식 소리 듣기 딱 좋았을 성 싶다. 

각중에 산소로 아버지를 찾고 싶다. 


☞고련(高璉) ☞장수왕(長壽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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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광개토왕본기 : 18년(408) 여름 4월에 왕자 거련(巨連)을 태자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즉위년 : 장수왕(長壽王)의 이름은 거련(巨連)<또는 련(璉)이라고도 썼다>이고 광개토왕 맏아들이다.


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18년(472)에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고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중략…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련(璉)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중략...또 련(璉)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 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 


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삼국사기 권제 3(신라본기 제3) 자비마립간본기 : 17년(474) 일모성(一牟城), 사시성(沙尸城), 광석성(廣石城), 답달성(沓達城), 구례성(仇禮城), 좌라성(坐羅城) 등을 쌓았다. 가을 7월에 고구려왕 거련(巨連)[장수왕]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를 공격하였다. 백제왕 경(慶)[개로왕]이 아들 문주(文周)를 보내 도움을 요청하였으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구원하였으나,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에 백제는 이미 함락되고 경(慶)[개로왕] 역시 살해당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6(백제본기 제4) 동성왕본기 :  6년(484) 봄 2월에 왕은 남제(南齊)의 태조[祖]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을 책봉(冊封)하여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삼았다는 것을 듣고 사신을 보내 표(表)를 올리고 복속[內附]되기를 청하니 허락했다.


☞장수왕(長壽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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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문자명왕(文咨明王)<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한다>은 이름이 라운(羅運)이고 장수왕 손자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 만에 죽자 이어 즉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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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이 거련(巨連)<련(璉)이라고도 했다>이고 광개토왕 맏아들이다. 신체가 크고 기개가 호탕하며 뛰어났다. 광개토왕이 18년에 태자로 삼았으니 22년에 왕이 죽자 즉위했다. 원년(413)에 장사(長史) 고익(高翼)을 진(晉)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리고, 붉은 무늬있는 흰 말을 바쳤다. 안제(安帝)가 왕을 고구려왕(高句麗王) 낙랑군공(樂浪郡公)에 봉했다. 2년(414) 가을 8월에 이상한 새가 왕궁에 모여들었다. 겨울 10월에 왕이 사천(蛇川)의 들로 사냥나가 흰 노루를 잡았다. 12월에 서울에 눈이 다섯 자나 내렸다. 7년(419) 여름 5월에 나라의 동쪽에 홍수가 나자 왕이 사신을 보내 위문했다.12년(424) 봄 2월에 신라가 사신을 보내 예방했다. 왕은 그들을 특별히 후하게 위로했. 가을 9월에 크게 풍년이 들었다. 왕은 왕궁에서 뭇 신하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13년(425)에 위(魏)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15년(427)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겼다. 23년(435) 여름 6월에 왕이 사신을 위(魏)에 보내 조공하고, 또 그 나라의 휘(諱)를 [알려달라고] 청했다. 세조(世祖)가 그 정성을 가상히 여겨 황실의 계보와 휘를 적어 주고, 원외산기시랑(員外散騎侍郞) 이오(李敖)를 보내 왕을 도독요해제군사(都督遼海諸軍事) 정동장군(征東將軍) 영호동이중랑장(領護東夷中郞將) 요동군개국공(遼東郡開國公) 고구려왕(高句麗王)으로 삼았다. 가을에 왕이 위에 사신을 보내 사은했다. 위나라 사람들이 연(燕)나라를 자주 치므로, 연나라가 날로 위급해지게 되자, 연나라 왕 풍홍(馮弘)이 “만약 사태가 급하면 동쪽으로 고구려에 의지하다가 후에 일어나기를 도모하겠다”고 하고, 상서(尙書) 양이(陽伊)를 몰래 보내 우리에게 맞이해 줄 것을 청했다. 24년(436) 연왕이 사신을 위에 보내 조공하고 시자(侍子)를 보내겠다 했으나, 위왕이 허락치 않고 군사를 일으켜 (연을) 토벌하려 했으며,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와 [그 뜻을] 통고했다. 여름 4월에 위가 연의 백랑성(白狼城)을 공격해 이겼다. 왕은 장수 갈로(葛盧)와 맹광(孟光)을 보내 무리 수만 명을 거느리고 양이를 따라 화룡(和龍)으로 가서 연왕을 맞이하게 했다. 갈로와 맹광이 성에 들어가 군사들에게 명하여 헤진 옷을 벗게 하고, 연나라의 무기 창고에서 예리한 무기를 가져다가 나누어 주었으며, 성 안을 많이 약탈했다. 5월에 연왕이 용성(龍城)에 거주하는 가호(家戶)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옮기면서 궁전을 불태웠는데, 불은 열흘이 되도록 꺼지지 않았다. 부인들은 갑옷을 입고 가운데 있게 하고, 양이 등은 정예군을 통솔하며 바깥에 서게 하고, 갈로와 맹광은 기병을 거느리고 대열의 맨 뒤에 섰다. [그들은] 벌린 대열을 하고 나아갔는데 앞뒤가 80여 리나 되었다. 위나라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산기상시(散騎常侍) 봉발(封撥)을 보내 연왕을 보내라 했다. 왕은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표(表)를 올려서, 마땅히 풍홍과 함께 왕의 가르침을 받들 것이라고 핑계[稱]를 댔다. 위나라 왕이 명령을 어겼다 해서 공격할 것을 의논하여, 농우(右)의 기병을 보내려 했는데, 유결(劉)과 낙평왕(樂平王) 비(丕) 등이 간하자 그만두었다. 25년(43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했다.26년(438) 봄 3월. 이전에 연나라 왕 [풍]홍이 요동으로 왔을 때 왕은 사신을 보내 위로하고 “용성왕(龍城王) 풍군(馮君)이 벌판으로 행차하느라고 군사와 말이 피곤하겠습니다.”고 말하였다. [풍]홍은 부끄럽고 화가 나서 천자를 칭하면서 왕을 꾸짖었다. 왕은 그를 평곽(平郭)에 두었다가 곧 북풍(北)으로 옮겼다. [풍]홍이 평소 우리 나라를 업신여겼는데, 여전히 정형(政刑)과 상벌을 마치 제 나라에서 하듯이 하였으므로, 왕은 그의 시자를 빼앗아 버리고 그 태자 왕인(王仁)을 잡아와 인질로 삼았다. [풍]홍이 이것을 원망해서 송(宋)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표(表)를 올려 맞이해 줄 것을 구하였다. 송나라 태조(太祖)가 사신 왕백구(王白駒) 등을 보내 그를 맞이하고, 아울러 우리에게 명령하여 [연나라 왕에게] 노자(路資)를 마련해 주어서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장수 손수(孫漱)와 고구(高仇) 등을 보내 [풍]홍을 북풍에서 죽이고, 아울러 그 자손 10여 명도 죽였다. [왕]백구 등은 [자신이] 거느리고 온 군사 7천여 명을 이끌고 손수와 고구를 습격하여, 고구를 죽이고 손수를 사로잡았다. 왕은 [왕]백구 등이 제멋대로 사람을 죽였으므로 사신을 시켜 그를 잡아 [송나라로] 보내었다. 태조는 [고구려가] 멀리 있는 나라이므로 그 뜻을 거스르지 않기 위하여, [왕]백구 등을 감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후에 풀어주었다. 27년(439) 겨울 11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1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38년(450)에 신라사람들이 변경의 장수를 습격해서 죽였다. 왕은 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토벌하려고 하였으나, 신라 왕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42년(454) 가을 7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였다. 43년(455)에 사신을 송(宋)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0년(462)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1년(463)에 송나라 세조(世祖) 효무황제(孝武皇帝)가 왕을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책봉하였다. 53년(465)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54년(466)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위나라의 문명태후(文明太后)가 현조(顯祖)의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못하였으므로 왕에게 교서를 내려 왕녀를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니 아우의 딸로써 응하겠습니다.”고 하였다. [태후가] 허락하고 이에 안락왕(安樂王) 진(眞), 상서 이부(李敷) 등을 보내 국경에까지 폐백을 보내왔다. 어떤 사람이 왕에게 권하여 말하였다. “위(魏)나라는 예전에 연나라와 혼인하고도 얼마 안 되어 [연나라를] 정벌하였습니다. [이것은] 사신을 통해서 그 나라 지형의 평탄하고 험함을 다 알았기 때문입니다. 거울삼아 경계해야 할 전례가 멀지 않으니, 적당한 구실로 거절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왕은 마침내 글을 올려 [아우의] 딸이 죽었다고 핑계하였다. 위나라는 그 말이 거짓이라고 의심하고 가산기상시(假散騎常侍) 정준(程駿)을 보내 심히 꾸짖으며 “[아우의] 딸이 참으로 죽었다면, 종실의 딸을 다시 뽑아 보내라”고 하였다. 왕은 “만약 천자께서 이전의 허물을 용서한다면, 삼가 명령을 받들어 따르겠습니다”고 하였으나, 마침 현조가 죽자 중지하였다. 55년(46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6년(468) 봄 2월에 왕은 말갈(靺鞨) 군사 1만 명으로 신라의 실직주성(悉直州城)을 쳐서 빼앗았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7년(469)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군이 남쪽 변경으로 쳐들어 왔다. 58년(470)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59년(471)에 백성 노구(奴久) 등이 위나라로 달아나 항복하였다. [위나라가] 이들에게 각각 전택(田宅)을 주었다. 이 때가 위나라 고조(高祖) 연흥(延興) 원년이었다. 60년(472)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이후로 공물 바치는 것이 이전의 배가 되었고, 그 보답으로 [위나라가] 주는 것도 또한 조금 늘어났다. 61년(473) 봄 2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62년(474)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3년(475)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왕은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를 침략하여, [백제]왕이 도읍한 한성(漢城)을 함락시키고, 그 왕 부여경(扶餘慶)[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천 명을 사로잡아서 돌아왔다. 64년(476)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5년(477)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6년(478)에 사신을 송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백제의 연신(燕信)이 항복해 왔다. 67년(479) 봄 3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하였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하게 하였는데, 위나라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냈다. 위나라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하였다. 『[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 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69년(481)에 사신을 남제(南齊)에 보내 조공하였다. 72년(484)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때 위나라 사람들은 우리 나라가 강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의 숙소를 두는데, 제(齊)나라 사신을 첫번째로, 우리 사신을 그 다음으로 두었다. 73년(485)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74년(486)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5년(487)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6년(488)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4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윤8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7년(489) 봄 2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여름 6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군사를 보내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하고 호산성(狐山城)을 함락시켰다. 겨울 10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8년(490) 가을 7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79년(491) 여름 5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가을 9월에 사신을 위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나이 98세였으며, 왕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위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이것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謁者) 복야(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왕을] 거기대장군 태부(太傅)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0대 장수왕(長壽王)은 이름이 신련(臣連)이다. 계축년에 즉위해 79년을 다스렸다. 정묘년에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37(잡지 제6) 지리 : 국내(國內)에 도읍하여 425년을 지내고, 장수왕 15년(427)에 서울을 평양(平壤)으로 옮겨 156년을 지냈다. 평원왕 28년(586)에 서울을 장안성(長安城)으로 옮겨 83년을 지내고 보장왕 27년(668)에 멸망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19(고구려본기 제7) 문자명왕본기 : 문자명왕(文咨明王)<또는 명치호왕(明治好王)이라고도 하였다.>의 이름은 나운(羅運)이고 장수왕의 손자이다. 아버지는 왕자이며 고추대가인 조다(助多)인데, 조다가 일찍 죽자 장수왕이 궁중에서 기르면서 대손(大孫)으로 삼았다. 장수왕이 재위 79년만에 죽자 이어서 즉위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25(백제본기 제3) 개로왕본기 : 15년(469) 가을 8월에 장수를 보내 고구려의 남쪽 변경을 쳤다. 18년(472)에 사신을 위(魏)나라에 보내 조공하고 표(表)를 올렸다. "신은 나라가 동쪽 끝에 서 있고 승냥이와 이리[豺狼]가 길을 막아, 비록 대대로 신령한 교화를 받았으나 번병(蕃屛)의 [예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멀리 천자의 대궐[雲闕]을 바라보면 달리는 정이 끝이 없습니다.서늘한 바람이 가볍게 부는 이 때에 생각컨대 황제 폐하는 천명[天休]에 화합하시니 우러러 사모하는 정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삼가 사사로이 임명한 관군장군(冠軍將軍) 부마도위(駙馬都尉) 불사후(弗斯侯) 장사(長史) 여례(餘禮)와 용양장군(龍將軍) 대방태수(帶方太守) 사마(司馬) 장무(張茂) 등을 보내 험한 파도에 배를 띄워 아득한 나루터를 찾아 헤매며 목숨을 자연의 운수에 맡겨 만 분의 일의 정성이라도 드리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하늘 신[神]과 땅 신[祇]이 감응을 드리우고 황제의 신령이 크게 살피셔서 황제의 궁궐에 능히 도달하여 신의 뜻을 펴 드러낼 수 있다면 비록 「[그 소식을] 아침에 듣고 저녁에 죽는다.」고 하더라도 길이 여한이 없겠습니다.』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은 고구려와 더불어 근원이 부여(夫餘)에서 나왔습니다. 선세(先世) 때에는 옛 우의를 두텁게 하였는데 그 할아버지 쇠(釗)[고국원왕]가 이웃 나라와의 우호를 가벼이 저버리고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臣)의 국경을 함부로 짓밟았습니다. 제 할아버지 수(須)[근구수왕]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잽싸게 공격하니, 화살과 돌(矢石)로 잠시 싸운 끝에 쇠(釗)의 목을 베어 달았습니다. 이로부터 [고구려는] 감히 남쪽을 돌아다보지 못하였습니다. 풍씨(馮氏)의 운수가 다하여서 남은 사람들이 도망해 오자 추악한 무리들[醜類]이 점차 성해져서 드디어 [우리는] 능멸과 핍박을 당하게 되었으며, 원한을 맺고 병화[禍]가 이어진 지 30여 년에 재물도 다하고 힘도 고갈되어 점점 약해지고 위축되었습니다.만일 폐하의 인자하심과 간절한 긍휼(矜恤)이 멀리 가없는 데까지 미친다면 속히 한 장수를 신의 나라에 보내 구해 주십시오. 마땅히 저의 딸을 보내 후궁에서 모시게 하고 아울러 자제를 보내 바깥 외양간에서 말을 기르게 하며 한 자(尺)의 땅도 한 명의 백성[匹夫]이라도 감히 스스로 가지지 않겠습니다.』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연(璉)은 죄가 있어 나라가 스스로 으깨어지고[魚肉], 대신(大臣)과 힘센 귀족들을 죽이고 살해하기[戮殺]를 마지않아, 죄가 차고 악이 쌓여 백성들은 무너지고 흩어졌습니다. 이는 멸망시킬 수 있는 시기요 손을 쓸[假手] 때입니다. 또 풍족(馮族)의 군사와 말들은 새와 짐승이 주인을 따르는 정[鳥畜之戀]을 가지고 있으며, 낙랑(樂浪)의 여러 군(郡)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首丘之心]을 품고 있으니,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치면 정벌은 있을지언정 싸움은 없을 것입니다. 신은 비록 민첩하지 못하나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마땅히 예하 군대를 거느리고 위풍을 받들어 호응할 것입니다. 또 고구려는 의롭지 못하여 반역과 속임수가 하나만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외효(嵬)가 번국으로서 낮추어 썼던 말을 본받으면서 속으로는 흉악한 재앙과 저돌적인 행위를 품어, 혹은 남쪽으로 유씨(劉氏)와 내통하였고 혹은 북쪽으로 연연()과 맹약하여 서로 입술과 이[脣齒]처럼 의지하면서 왕법[王略]을 능멸하려 꾀하고 있습니다. 옛날 요임금[唐堯]은 지극한 성인이었지만 단수(丹水)를 쳐서 벌주었으며, 맹상군(孟嘗君)은 어진 사람이라고 일컬어졌지만 길에서 욕하는 말을 못들은 채하지 않았습니다. 졸졸 흐르는 물도 마땅히 빨리 막아야 하는데 지금 만일 [고구려를] 치지 않으면 장차 후회를 남기게 될 것입니다. 지난 경진년(庚辰年) 후에 우리 나라 서쪽 경계의 소석산북국(小石山北國) 바다 가운데서 시체 10여 개를 발견하고 아울러 의복(衣服)과 기물(器物)과 안장(鞍裝)과 굴레[勒] 등을 습득하였는데 살펴보니 고구려의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후에 들으니 이는 곧 황제의 사신이 신의 나라로 내려오던 중 큰 뱀[長蛇:고구려]이 길을 막아 바다에 빠진 것이라 합니다. 비록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깊이 분노를 품게 됩니다.옛날 송(宋)나라가 신주(申舟)를 죽이니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맨발로 뛰어 나갔고, 새매가 놓아준 비둘기를 잡으니 신릉군(信陵君)이 식사를 안했다고 합니다. 적을 이겨 이름을 세우는 것은 아름답고 높기가 그지없습니다. 저 구구한 변방의 나라들도 오히려 만대의 신의를 사모하는데 하물며 폐하는 기개가 하늘과 땅에 합하고 세력은 산과 바다를 기울이는데 어찌 더벅머리 아이[小竪:고구려 왕]로 하여금 황제의 길을 걸터막게 하겠습니까. 이제 습득한 안장을 올리니 이 하나로서 사실을 징험하십시오.』 현조(顯祖)는 [백제가] 궁벽하고 먼 곳에서 험난을 무릅쓰고 조공하였으므로 예우를 더욱 후하게 하고, 사자 소안(邵安)을 보내 백제의 사신과 함께 돌아가게 하면서 조서(詔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표(表)를 받고 별탈 없음을 들으니 매우 기쁘도다. 경(卿)이 동쪽 한 구석 먼 곳[五服] 밖에 처해 있으면서도 산과 바다 길을 멀다 하지 않고 위(魏)나라의 궁궐에 정성을 바치니 지극한 뜻을 흔쾌히 가상하게 여겨 가슴에 거두어 두었도다. 짐은 만세의 위업을 이어 받아 천하[四海]에 군림하고 모든 백성들을 다스리니, 지금 세상[宇內]이 깨끗이 하나로 되고 팔방 끝[八表]에서까지 의(義)에 귀순하여 업고[襁負] 오는 자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으며, 풍속이 평화롭고 군사와 군마가 강성함은 모두 여례(餘禮) 등이 직접 듣고 본 바이다. 경은 고구려와 화목하지 못하여 여러 번 능멸과 침범을 입었지만 진실로 능히 의(義)에 순응하고 인(仁)으로써 지킨다면 원수에 대해 또한 무엇을 근심하겠는가? 앞서 보낸 사신은 바다를 건너 황복(荒服) 밖의 나라를 위무하였는데 이제까지 여러 해가 되었지만 가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살았는지 죽었는지, 도달했는지 못했는지를 자세히 알 수 없도다. 그대가 보낸 안장은 옛날 타던 것과 비교해 보았더니 중국의 물건이 아니었다. 비슷한 일로써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는 과오를 일으켜서는 안된다. 경영(經營)하고 공략(經略)하는 요체는 별지(別旨)에 갖추어 있다.』[현조는] 또 조서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고구려가 강함을 믿고 경의 국토를 침범하며, 선군(先君)의 옛 원한[舊怨]을 갚으려고 백성을 쉬게 하는 큰 덕을 버렸다. [그래서] 전쟁이 여러 해에 걸치고 환난이 변경에 맺혔으며, 사신은 신서(申胥)의 정성을 겸하게 되고 나라에는 초(楚)나라·월(越)나라와 같은 급함이 있음을 알겠다.이에 응당 의를 펴고 약한 자를 도와 기회를 타서 번개처럼 쳐야 할 것이지만 다만 고구려는 선조(先朝)에 번국(蕃國)을 칭하면서 직공(職貢)을 바치는 것이 오래 되었다. 그[고구려]에게는 비록 예로부터 틈새[]가 있었지만 나라[魏]에 대해서는 [고구려가] 명령을 범한 허물이 없었다. 경이 사신을 처음 통하면서 곧장 정벌할 것을 요구하는 데 사정과 기회[事會]를 검토하여 보니 이유가 또한 충분치 못하다. 그러므로 지난해에 예(禮) 등을 보내 평양(平壤)에 이르러 그 사유와 정상을 징험하려 하였다.그러나 고구려가 상주하여 청원하는 것이 빈번하였고 말과 이치가 모두 맞으니, 사신[行人]이 그 청을 억제할 수 없었고 법관[司法]은 그 죄책을 만들 수가 없었다. 그 때문에 그 아뢰는 바를 들어주고 예(禮) 등에게 조칙을 내려 돌아가게 하였다. 만일 이제 다시 명령을 어긴다면 잘못과 허물이 더욱 드러날 것이므로 뒤에 비록 몸소 진술한다고 하더라도 죄를 벗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런 연후에 군사를 일으켜 친다면 의에 합당할 것이다. 구이(九夷)의 나라들은 대대로 해외에 살면서 도(道)가 창달되면 번국(蕃國)으로서의 예를 받들고, 은혜를 그치면 자기 경토(境土)를 보전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속박해 묶는 일[羈靡]은 옛 전적(典籍)에 드러났으되 호시(槁矢)를 바치는 것[貢]은 연중 때때로[歲時] 비었도다. 경이 강하고 약한 형세를 갖추어 아뢰고 과거의 행적을 일일이 열거하였는데, 풍속이 다르고 사정도 달라 비기고 견주는 것이 적당하지 않으나 [우리의] 넓은 규범과 큰 책략의 뜻은 아직 그대로 있도다.지금 중국[中夏]이 평정되고 통일되어 천하에 근심이 없으므로 매양 동쪽 끝까지 위엄을 높이고 국경밖에 정기(旌旗)를 달며, 외딴 나라[偏方]에서 백성[荒黎]을 구하고 먼 지방에까지 황제의 위풍을 펴려고 하였다. [그러나] 진실로 고구려가 제 때에 [사정을] 말하였기 때문에 미쳐 정벌을 결정하지 못하였다.지금 만일 [고구려가] 조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경이 전달해준 계책이 짐의 뜻에 합당하여 대군[元戎]이 출동하는 것도 장차 멀다고 할 수 없다. [경은] 마땅히 미리 군사를 함께 일으킬 것을 갖추어 일을 기다릴 것이며, 수시로 소식을 전하는 사신[報使]을 보내 속히 저쪽의 정황을 구명(究明)하도록 하라.군사를 일으키는 날에 경이 향도(嚮導)의 우두머리가 되면 크게 승리한 뒤에는 또 으뜸가는 공훈의 상을 받을 것이니 또한 좋지 않겠는가. 바친 금포(錦布)와 해산물은 비록 모두 도달하지는 않았으나 그대의 지극한 마음을 밝혀주는도다. 이제 여러 가지 물건들을 내리는데 별지(別旨)와 같다.』[현조는] 또 연(璉)[장수왕]에게 조서를 내려 소안(邵安) 등을 [백제로] 호송케 하였다. [그러나] 안(安) 등이 고구려에 이르니 연(璉)은 이전에 여경(餘慶)[개로왕]과 원수진 일이 있다고 하면서 동쪽으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안 등이 이에 모두 돌아오자 곧 조서를 내려 준절히 책망하였다.뒤에 [소]안(安) 등으로 하여금 동래(東萊)로부터 바다를 건너가서 여경에게 조서[璽書]를 내리고 그의 정성과 절조를 포상하게 하였다. 안 등이 바닷가에 이르렀으나 바람을 만나 떠다니다가 끝내 도달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왕은 고구려 사람이 누차 변경을 침범하므로 표를 올려 군사를 청하였는데 [위나라가] 듣지 않았다. 왕은 이를 원망하여 드디어 조공을 끊었다.21년(475) 가을 9월에 고구려 왕 거련(巨璉)[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서울[王都] 한성(漢城)을 포위하였다. 왕은 성문을 닫고 능히 나가 싸우지 못했다. 고구려인이 군사를 네 길로 나눠 양쪽에서 공격하는 한편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아 성문을 불태웠다. 인심이 대단히 불안해져서 혹 나가 항복하려는 자도 있었다. 왕은 곤궁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기병 수십을 거느리고 성문을 나가 서쪽으로 달아나려 했으나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했다. 앞서 고구려 장수왕이 몰래 백제를 도모하려 백제에서 간첩(間諜)할 만한 자를 구했다. 이 때 승려 도림(道琳)이 모집에 응하며 말했다. “어리석은 이 승려가 아직 도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생각합니다. 원컨대 대왕은 신(臣)을 어리석다 하지 마시고 지시하여 시키신다면 기약코 왕명을 욕되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이 기뻐하여 비밀리에 백제를 속이게 하였다.이에 도림은 거짓으로 죄를 짓고 도망하여 온 것 같이 하여 백제로 들어왔다. 이 때에 백제 왕 근개루(近蓋婁)가 바둑과 장기[博]를 좋아하였다. 도림이 대궐 문에 나아가 고하였다. “신은 어려서 바둑을 배워 자못 신묘한 경지에 들었습니다. 원컨대 곁[左右]에서 알려 드리고자 합니다.” 왕이 불러들여 바둑을 두어 보니 과연 국수(國手)였다. 드디어 그를 높여 상객(上客)으로 삼고 매우 친근히 지내면서 서로 만난 것이 늦었음을 한탄했다. 도림이 하루는 (왕을) 모시고 앉아 있다가 조용히 말했다. “신은 다른 나라 사람인데 상(上)께서 저를 멀리하지 않으시고 은총을 매우 두터이 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오직 한가지 기술로써 보답하였을 뿐 일찍이 털끝만한 도움을 드린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한 말씀을 드리려 하는 데 왕의 뜻이 어떠하실 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왕이 “말해 보시오. 만일 나라에 이로움이 있다면 이는 선생에게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말했다. 도림이 말했다. “대왕의 나라는 사방이 모두 산과 언덕과 강과 바다입니다. 이는 하늘이 베푼 험한 요새요 사람의 힘으로 된 형국(形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방의 이웃 나라들이 감히 엿볼 마음을 먹지 못하고 다만 받들어 섬기고자 하는데 겨를이 없습니다. 그런즉 왕께서는 마땅히 존귀하고 고상한 위세와 부강[富有]한 업적으로써 남의 이목[視聽]을 두렵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성곽은 수선(修繕)되지 않았고 궁실도 수리되지 않았으며, 선왕의 해골은 맨 땅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고, 백성의 집은 자주 강물에 허물어지고 있으니 신은 대왕을 위해 찬성할 수 없습니다.” 왕이 “옳습니다. 내가 장차 그렇게 하리다”고 말했다.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두 징발하여 흙을 쪄서 성을 쌓고, 안에는 궁실과 누각(樓閣)과 대사(臺) 등을 지었는데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음이 없었다. 또 욱리하(郁里河)에서 큰 돌을 가져다가 곽(槨)을 만들어 부왕의 뼈를 장사하고, 강을 따라 둑을 쌓았는 데 사성(蛇城) 동쪽에서 숭산(崇山) 북쪽에까지 이르렀다. 이로 말미암아 창고가 텅비고 백성들이 곤궁해져서 나라의 위태로움은 알을 쌓아 놓은 것보다 심하였다. 이에 도림이 도망쳐 돌아와서 보고하니 장수왕이 기뻐하여 [백제를] 치려고 군사를 장수[帥臣]에게 내주었다. 근개루(近蓋婁)가 이를 듣고 아들 문주(文周)에게 말하였다. “내가 어리석고 밝지 못하여 간사한 사람의 말을 믿고 썼다가 이 지경에 이르렀다. 백성은 쇠잔하고 군사는 약하니 비록 위태로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누가 기꺼이 나를 위하여 힘써 싸우겠는가? 나는 마땅히 사직(社稷)을 위하여 죽겠지만 네가 이곳에서 함께 죽는 것은 유익함이 없다. 어찌 난을 피하여 나라의 계통[國系]을 잇지 않겠는가?” 문주는 이에 목협만치(木=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 <목협(木)과 조미(祖彌)는 모두 복성(復姓)이었다. 수서(隋書)에는 목협을 두개의 성(姓)으로 하였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와 함께 남쪽으로 갔다. 이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로(對盧)인 제우(齊于)· 재증걸루(再曾桀婁)· 고이만년(古萬年)<재증(再曾)과 고이(古)는 모두 복성이었다.>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북성(北城)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남성(南城)으로 옮겨 공격하니 성안은 위태롭고 두려움에 떨었다. 왕이 나가 도망가자 고구려의 장수 걸루(桀婁) 등은 왕을 보고는 말에서 내려 절한 다음에 왕의 얼굴을 향하여 세 번 침을 뱉고는 그 죄를 꾸짖었다. 왕을 묶어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였다. 걸루와 만년(萬年)은 백제 사람[本國人]이었는 데 죄를 짓고는 고구려로 도망했다. 논한다. 초(楚)나라 명왕(明王)이 [운() 땅으로] 도망하였을 때에 운공 신(隕公辛)의 아우 회(懷)가 왕을 시해하려고 하면서 말하였다. “평왕(平王)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므로 내가 그 아들을 죽이는 것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신(辛)이 말하였다. “임금이 신하를 토죄(討罪)하는 데 누가 감히 원수로 삼겠는가? 임금의 명령은 하늘이니 만일 하늘의 명에 죽었다면 장차 누구를 원수로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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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79년(491)…겨울 12월에 왕이 죽었다. 나이 98세였으며, 왕호를 장수왕이라고 하였다. 위나라 효문제(孝文帝)가 이것을 듣고, 흰 위모관(委貌冠)과 베 심의(深衣)를 지어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를 표했으며, 알자(謁者) 복야(僕射) 이안상(李安上)을 보내 [왕을] 거기대장군 태부(太傅) 요동군 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 책봉하고, 시호(諡號)를 강(康)이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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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68년(480) 여름 4월에 남제(南齊)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왕을 표기대장군으로 책봉했다. 왕은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남제에 조빙케 했는데, 위나라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대궐로 보내니 위 고조가 왕에게 조서를 보내 책망했다. “[소]도성이 친히 그 임금을 죽이고 강남에서 [황제의] 칭호를 도용하였다. 짐은 망한 나라를 옛 땅에서 다시 일으켜, 끊긴 대를 유씨(劉氏)에게 잇게 하려 한다. [그런데] 경은 우리 국경을 넘어 외국과 교섭하고, 찬탈한 도적과 멀리 통교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蕃臣)이 절개를 지키는 의리하고 하겠느냐? 이제 한 번의 잘못으로 경의 이전의 정성을 덮을 수 없어 사신을 돌려보내니, 그 용서함에 감사하고 잘못을 새겨 법도를 받들어 지킬 것이며, 그대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동정을 보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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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18(고구려본기 제6) 장수왕본기 : 66년(478) 백제의 연신(燕信)이 항복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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