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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곳에서 영정조 때 활약한 이용휴(李用休.1708~1782)-이가환(李家煥.1742~1801) 부자의 글을 소개했거니와, 이번에는 이용휴가 두 살 아래 친동생 이병휴(李秉休.1710~1776)가 향년 67세로 먼저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도하면서 지은 제문(祭文) 두 편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 당시 용휴는 서울에 머물고, 동생은 고향인 충청도 덕산현(德山縣) 고산면(高山面) 장천리(長川里)라는 곳으로 낙향해 있다가 그곳에서 병들어 죽었다. 아우가 죽은지 한 달이 지났으나 병이 들고 길이 멀어 가지 못하고 제문을 지어 애도하는 마음을 드러냈다.


이병휴는 字가 경협(景協)이요 號는 정산(貞山)이다. 성호 이익의 수제자로 역학(易學)과 예학(禮學)에 뛰어났다.


둘째 제문은 첫 대목에서 서울과 장천이 멀어 아우의 상에 가서 직접 영결하지 못하는 심정을 서술했다. 죽음에 임박해 벼슬과 문집과 자식 가운데 무엇이 가장 소중하냐는 토론은 당시 사대부의 가치 관념을 엿보는데 귀중하다.


제문 1 : 아우 정산처사(貞山處士)를 여의고(祭舍弟貞山處士文)


아아! 너는 경인년(庚寅年. 1710)에 태어나 나보다 두 살 아래다. 그러나 내가 병을 잘 앓고 허약하여 3년이 지나도록 어머니 품을 벗어나지 못했으므로 너와 함께 한 젖을 먹어야 했으며, 한 강보에 누워야 했다. 조금 커서는 같은 책을 공부했고, 같은 제목의 글을 써야 했다.

장성해서는 행동과 학업을 서로 본보기 삼아 실천했으며, 도리와 의로움을 서로 권장했다. 몸은 비록 나뉘어 있었으나 기상과 뜻은 서로 통했다. 늙은 뒤로는 나는 황화방(皇華坊) 옛 집에 살고, 너는 호서(湖西)의 이산(伊山)에 사니 300리나 떨어져 지냈으므로 늘 울적하게 지내는 쓸쓸함을 느껴야 했다. 그렇지만 때때로 서찰을 주고받으며 목소리를 전하곤 했는데 이제 삶과 죽음이 영원히 갈렸으니 슬프도다!

형제라는 이름이 적지 않다. 과거에 같이 합격한 사람도 형제라 부르고 의형제를 맺은 사람도 형제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은 인위적인 결합일 뿐이요 인위적 결합은 잃게 되면 다시 얻을 수도 있다. 또 사촌형제도 있고 고종사촌, 이종사촌 형제도 있다. 이들은 하늘이 맺어준 형제이긴 하나 입는 상복(喪服)에 차등이 있는 것처럼 그들과 얽힌 감정 또한 차등이 있게 마련이니 모든 게 친형제와 같지는 않다.

나는 기묘년(己卯年.1759)에 누님을 여의었고 신사년(辛巳年.1761)에 형님을 여의었다. 그래도 그분들이 나이 순서를 따라 돌아가심을 위안으로 삼았다. 이번에는 또 너를 잃었으니 순서를 거스른 일이라 위안을 삼을 길이 없구나. 태평한 세상에서는 형이 아우를 잃고 哭하는 일이 없다 하더니 그 말도 빈발이구나.

너는 나이 67세이니 벌써 하수(下壽)를 넘겼다, 우리 10대조 부승공(副丞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라 아무런 유감이 없기는 하다. 그러나 네가 남긴 고아는 겨우 네 살. 네가 계사년(癸巳年.1713)에 고아라 칭하던 나이와 공교롭게도 똑같구나. 이것이 떠나는 너를 가슴 아프게 하고 살아남은 자에게 무궁토록 눈물을 떨구게 하는 이유가 아니더냐?

오호라! 너는 하늘이 부여한 자질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집압에서 학문을 물려받아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가 깊었다. 그 학문을 세상에 펼쳤다면 필시 볼 만했으련만 때를 만나지 못해 숨기고 감추어 버렸다. 세상에 펼치고 펼치지 못한 것이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만 군자들이 사적으로 한탄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아! 무시(無始) 이래로 다행히 자네와 함께 한번 만났으니 무종(無終) 이전에 혹시라도 다시 자네와 만날 수는 없을런지? 그 여부를 기약할 수 없구나.

오직 저 덕풍(德豊) 한 구비에 산은 고요하고 구름은 한가로이 떠 있을 터인데 그 모습이 네가 뒤로 남긴 초상이로구나. 그것을 보면서 네 모습을 상상이나 할 뿐이니 아아! 슬프도다.


제문 2 : 다시 아우를 애도하며(再祭舍弟文)


서울에서 덕산(德山)까지 가려면 열 한 번은 쉬어야 한다. 비록 네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내가 즉시 길을 나선다 해도 네 살아있는 얼굴은 보지 못하고 네 죽은 얼굴만 볼 수 있을 것이다. 부고가 도착한 뒤에 아무리 빨리 말을 달려간다 해도 죽은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벌써 염습하고는 입관(入棺)했을 것이다. 지금 시간에는 또 관을 들어올려 무덤에 집어 넣었을 터이니 사람으로서의 일은 벌써 끝이 났으련만 나는 묘혈(墓穴)을 내려다보 보고 슬픔을 쏟아내지도 못하겠구나. 비록 밥을 먹고 숨을 쉬며 세상에 몸을 붙여 산다고 하나 눈을 감은 채 아무 것도 모르는 자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아아! 우리 현제가 어머니 어굴을 뵙지 못한 지가 벌써 한 세대가 흘렀다. 네가 이번에 가는 길에는 반드시 어머님을 뵈올 수 있으련만. 30년 동안 어슴푸레 떠올리며 한숨을 쉬던 일이 시원스레 풀릴 테고 이 못난 자식의 지금 살아가는 꼴도 그 김에 들으실 수 있으리라.

아! 내 일찍이 너와 더불어 죽고 사는 것의 우열을 논할 때 이렇게 물었다.

“사람이 죽음에 임박했을 때 최고위 직책과 제 키 높이의 문집과 슬하의 자식 세 가지 가운데 무엇이 가장 소중하겠는가?”

너는 그 때 대답했다.

“관직은 외물(外物)에 불과하고 자식 역시 나를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문집은 이름을 영원히 남기는 데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글은 입으로 토해내긴 했으나 자식은 피를 나눠준 것이니 크게 차이가 날걸쎄”라고 응답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7월 27일 신시(申時)에 두 눈을 힘겹게 뜨고 원아(元兒)를 쳐다보았다고 하니 응당 내 말이 옳다는 것을 깨달았으련만. 내 너를 마주하고 그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으니 안타깝구나.


아아! 너는 장천(長川)에서 태어나 장천에서 죽고 또 장천에 묻힌다. 그 중간에 노닌 곳으로는 아현동(阿峴洞), 정동(貞洞), 구호(鷗湖), 섬리(剡里)가 있긴 하지만 모드 그저 지나친 곳이요 뜬구름 같은 풍경일 뿐이다. 네 신기(神氣)가 내려오고 네 넋을 묻을 곳으로 모두 장천에 있다. 그곳은 바닷가에 있는 작은 마을에 지나지 않으나 우리 두 사람을 태어나게 했으니, 땅의 신력을 욕되게 하지는 않았다 하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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