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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 중성리비 발견자 김헌도씨(오른쪽)를 인터뷰하는 김태식. 2009. 9. 3



사진은 2009년 9월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열린 포항 중성리비 조명 학술대회장에서 이 비 발견자 김헌도씨(오른쪽)를 내가 인터뷰 하는 장면이다. 오세윤 작가한테 부탁해서 찍었다. 이 중성리 신라비는 이때를 즈음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된 까닭에 이 분야 직업적 학문종사자를 비롯해 지역사회에서도 관심이 지대했다. 당시 학술대회장에 그가 참석했다. 이 인터뷰는 다음과 같이 기사화했다. 기사에서는 차마 토로하지 못했지만, 김씨는 뭔가 불만이 많았다. 


<사람들> 最古 신라비 발견 김헌도씨

"로또 당첨된 기분, 개인 아닌 국가의 보물"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금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신라비석인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지난 5월 현지 주민이 발견해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존재를 드러냈다.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국립경주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가 마련한 이 비석 발견 기념 학술대회에 발견자인 김헌도(金憲道·46)씨가 참석했다.


비석이 발견된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가 고향이냐는 질문에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과 같은 (포항) 덕실마을"이라고 대답했다. 비석 발견지점과 덕실마을은 대략 10리 정도 떨어졌으니 그가 비석을 발견한 곳이 그의 고향이라고 해도 무방한 셈이다.


어릴 때 고향을 떠났다가 5년 전쯤에 귀향했다는 그는 지금의 직업을 "1일 노동자"라고 소개했다.


5월 초순 어느날, 김씨는 포항시가 주민개선생활개선사업 일환으로 그가 사는 중성리 일대에서 추진하는 도로개설 작업장 한쪽에 놓인 넓적한 판돌 하나를 주목한다.


"파낸 흙을 모두 트럭이 실어나갔는데, 이틀이 지나도 그 돌은 그대로 있더군요. 생긴 게 조경석 돌로 쓸만하다 생각해서 집으로 옮겨다 놓았습니다. 집사람이 왜 그런 걸 쓸데 없이 가져왔느냐고 핀잔을 주더군요." 

그러다가 5월11일 김씨는 이 돌을 씻게 된다.


"물조리로 물을 뿌리면서 빗자루로 흙을 쓸어냈습니다. 한데 이상하게 (돌) 표면에서 뭔가 느껴졌습니다. 가만히 보니 한자가 잔뜩 적힌 비석이었습니다. 이에 제 친구인 지방신문 편집국장에게 제보를 하고, 포항공대 초빙교수인 배용일 선생을 비롯한 전문가가 탁본을 하고 판독을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비석 발견 사실은 5월13일 포항시에 공식 신고가 이뤄지고, 포항시에서는 이튿날 오전 문화재청에 보고함으로써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한 공식 조사가 시작됐다.


이 포항 중성리 신라비는 추후 조사를 거쳐 최고의 신라비일 것이 확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이런 성과에 김씨는 "로또 당첨된 것과 같은 기분"이라고 말했다.


"제가 비석을 발견했다고 하니깐 주변에서는 큰 돈을 벌게 된 것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비석은 개인 재산이 아니라 국가의 재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라사를 밝히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 이상 제가 바랄 것은 없습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이날 학술대회 관련 기사는 다음과 같이 처리됐다. 


"포항 중성리비는 신라 지증왕의 판결문"

이성시 교수 "비문 첫줄에 '只折盧' 보여"


송고시간 | 2009-09-03 16:1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돼 현존 최고(最古) 신라비로 분석된 '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 中城里新羅碑)는 재산 분쟁과 관련한 판결 내용을 담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발견 직후 이 비석을 경주로 옮겨 분석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2일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이 비석 실물을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하기 시작한 데 이어, 3일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는 이 비석의 가치를 조명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비석의 발견 경위 보고와 그 발견 지역인 포항 흥해의 역사 및 고고학적 고찰에 이어 중성리비가 신라 금석학에서 차지하는 위치(선석열.부산대)와 비문의 어문학적 검토(권인한.성균관대), 비문 내용과 건립연대(이우태.서울시립대), 비문의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고광의.동북아역사재단)과 같은 개별 발표와 이에 대한 개별 및 종합토론이 있었다.


몇 글자가 깨져 없어지고, 다른 몇몇 글자가 판독에 논란을 빚은 점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비문은 각 글자가 양호한 상태임에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어떤 발표자나 토론자도 자신있는 답을 내 놓지 못했다.


발표자 중 한 명인 이우태 교수는 "이런 의미로 생각했다가 돌아서면 다른 의미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말로 해석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렇지만, 이 중성리비가 지금의 포항 흥해 지역에서 당시에 발생한 모종의 소송에 대해 신라 조정이 관여해, 그것을 결정한 판결문을 새겼다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과연 이 비가 정확히 언제 건립되었으며, 소송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다.


건립 시기에 대해 비문 첫 줄 맨 앞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보이고, 그 내용이 20년 전에 같은 흥해에서 발견됐으며 503년(지증왕 4년)에 건립됐다고 추정되는 영일 냉수리비와 흡사하다는 점에서 이 '신사년'이라는 해가 지증왕 때인 501년 혹은 그 이전이라는 데도 이견은 없었다.


이와 관련해 몇몇 발표자와 토론자는 신사년이 501년(지증왕 2년)일 것이며, 비문 첫줄 중간 이하에 보이는 글자를 지증왕을 지칭하는 이름일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


예컨대 선석렬 박사와 이우태 교수는 첫줄에 보이는 '○折盧'(○는 불확실한 글자)의 '折盧'(절로)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지증왕의 다른 이름 표기들인 '지철로'(智哲老)나 '지대로'(智大路), 혹은 '지도로'(智度路)의 '철로'나 '대로' 혹은 '도로'와 같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들이 가능성을 제기한 것과는 달리 이성시 교수는 이에서 한발 더 나아가 '○折盧'의 불완전한 첫 글자를 '只'라고 보면서, 결국 '只折盧'(지절로)는 지증왕의 다른 이름임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이 교수는 재판 소송의 대상으로 비문에 보이는 '宮'(궁)이라는 글자를 고대 일본에서 흔히 보이는 '미야케'('宮'이라고는 말로 자주 표기)와 같은 개념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면서, 결국 비문에서 말하는 '宮'은 경주에 기반을 둔 진골 유력 귀족의 식읍(食邑)과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기존 냉수리비에서는 '교(敎)', 즉, 판결 내용(결정 사항)을 내린 주체가 갈문왕을 비롯한 고위급 관리가 7명인 데 비해, 이 중성리 비문에서는 그 주체로 중간급 관위(官位)인 아간지(阿干支.6등) 2명만 등장하는 현상을 비교하면서, 이우태 교수는 "냉수리비문이 대법원 전원재판 판결(문)인 데 비해, 중성리비문은 대법원 단독심리 판결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그에 앞서 나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송고하기도 했다. 


"현존 最古 신라비는 재판 판결문" 

'포항 중성리신라비' 조사결과 발표


2009/09/01 10:05 송고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지난 5월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에서 발견돼 현존 최고(最古) 신라비로 분석된 '포항 중성리신라비'(浦項 中城里新羅碑)는 재산 분쟁과 관련한 판결 내용을 담았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발견 직후 이 비석을 경주로 옮겨 분석 중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지병목)는 이에 적힌 비문을 판독한 결과 기존에 발견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와 마찬가지로 "재물(또는 토지 등 재산)과 관련된 소송의 평결문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1일 밝혔다.


 

연구소는 비석에는 "과거에 모단벌(牟旦伐.인명으로 추정)의 것(재물)을 다른 사람이 빼앗았는데 그 진상을 조사하여 진실을 밝혀 본래의 주인에게 되돌려 주며, 향후 이에 대한 재론을 못하도록 한다"는 평결 내용을 적었으며, 이런 평결에 나오기까지의 과정과 관련 인물 등을 밝혀 현지인 등과 후세에 경계를 삼는 내용을 담았다고 덧붙였다.


이 '중성리비'는 발견 당시에는 '학성리비'로 보고됐지만, 정확한 발견 지점이 학성리가 아니라 중성리로 확인돼 명칭이 교체됐다.


이 중성리비는 최대 높이 104㎝, 최대 폭 49㎝, 두께 12~13㎝, 무게 115kg인 부정형 자연석 화강암 판돌 중 한 면에만 음각으로 한자를 새겨 넣었다.


글자는 전체 12행이지만, 각 행(行)별로 새긴 글자 수는 차이가 있어 최대 20자까지, 모두 203자 정도가 확인됐고, 비석 하단부 약 20㎝ 정도의 공간에는 글자를 새기지 않았다.


비면 맨 위쪽 일부와 우측면 일부가 결실됐을 뿐, 글자 대부분은 판독 가능할 정도로 양호한 상태라고 연구소는 밝혔다.


이 비문이 제작 시기는 논란이 있지만 비문 첫 대목에 신사(辛巳)라는 간지가 보이며, 비문 내용이나 표기법 등으로 볼 때, 신라 지증왕 2년(501)보다 늦을 수는 없고, 이보다 60년이 빠른 또 다른 신사년인 441년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됐다.


이 중성리비는 "지금까지 최고(最古) 신라비로 알려진 영일 냉수리비가 50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에서 현존하는 최고 신라비가 된다"고 연구소는 덧붙였다.


연구소는 이 비문에 대한 조사 결과를 '포항 중성리신라비'라는 보고서로 발간하는 한편, 1일자로 연구소 홈페이지(www.gcp.go.kr)에 이 책자 원문을 모두 공개해 누구나 무료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연구소는 관련 학술 심포지엄을 오는 3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경주 보문단지 내 드림센터 대회의실에서 개최한다.


이 자리에서는 비문에 대한 금석학적 검토(선석렬), 어문학적 고찰(권인한), 내용과 제작시기(이우태), 서체와 고신라 문자생활(고광의)에 대한 연구결과가 발표될 예정이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소불알..지증왕은 이 황소보다 거시기가 컸다>


오늘 이 자리에 선 나는 당돌하지만, 이 《화랑세기》 진위 논쟁 한 축이다. 1989년과 1995년에 두 종류가 알려진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그 《화랑세기》를 베낀 데 토대를 둔 것이라는 이른바 진본론에 나는 섰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이 《화랑세기》 진위 논쟁을 공정하게 평가할 만한 인물은 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그에 따라 내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이와 관련되는 언급은 자연히 위서론僞書論의 논리적 근거를 옥쇄玉碎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내가 웹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름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지도로 1자5치’이며 다른 하나는 ‘모란씨 서되’다. 전자는 《삼국유사》가 전하는 신라 지증왕의 陰莖 길이를 말한다. 이 자(尺)라는 개념이 주척周尺이니 당척唐尺이니 영조척營造尺이니 해서 시대와 공간을 따라 다르지만, 그 근본은 남자 성인 한 뼘이 기준이라는 점이다. 대체로 22~33센티미터 정도로 보아 대과가 없을 것이며, 대략 30센티미터로 잡아도 지증왕은 음경이 무려 45센티미터에 달하는 셈이다. 이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말이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증왕의 실제 음경이 이만했느냐 하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우리에게 홀연히 주어진 《화랑세기》는 화랑 중의 화랑, 대표화랑인 풍월주風月主 역대 32명에 대한 전기다. 하지만 단순히 이들 풍월주 전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당대 新羅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노출한다. 이것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이은 이른바 진본으로 판정난다면(물론 나는 결판났다고 생각하지만) 신라사는 물론이려니와 한국 고대사 전반은 수술이 불가피하다. 그만큼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그 중 하나가 지증왕 음경 얘기가 나온 김에 이와 관련한 《화랑세기》의 언급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에 의하면 11번째 풍월주는 하종夏宗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새주璽主인 미실美室과 세종世宗 사이에서 난 아들로 나오는 그 인물이다. 이 夏宗 傳에 의하면 묘도妙道라는 법흥왕 후궁 이야기가 엿보인다. 이 妙道라는 이름이 벌써 심상치 않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妙道가 점점 자라매 “帝(법흥제. 법흥왕)가 약속한 대로 (묘도를 후궁으로 맞아들여) 섹스[幸]를 했지만, 협착불능칭(幺窄不能稱)한 데다, 帝는 또한 太陽이라 故로 妙道는 당석(當夕)할 때마다 그것을 괴로워하니 帝가 그다지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모든 남자는 대물을 꿈꾼다> 


이 기술의 묘미는 ‘요착불능칭’(幺窄不能稱)에 있으니, 이를 이종욱은 “작고 좁아 맞을 수 없었고”라고 옮겼거니와, 비루鄙陋하다고 생각했음인지, 무엇이 작고 좁은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妙道의 陰莖이 작고 좁았다는 뜻이니, 이 경우 칭(稱)은 《이아爾雅》 석고釋詁에 보이는 “稱, 好也”로 보아 사랑하다고 보거나,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 중 여인輿人에 대한 기술 “爲車輪崇車廣衡長, 參如一謂之參稱”에 대한 註인 “稱, 猶等也”로 보아, 묘도를 좋아하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법흥왕의 陰莖 크기에 상응하는 만큼 妙道의 陰莖이 크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화랑세기》는 밤마다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妙道에 실증이 나서는 왕 자신이 아끼는 신하 미진부未珍夫에게 내려주어 아내를 삼게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를 계속 따라가면 이렇게 해서 같이 살게 된 妙道와 未珍夫는 알콩달콩 잘 살았다 하며, 이 사이에서 貴女를 낳으니 그가 바로 요물 美室이라고 한다. 


이런 기술을 볼 때마다 나는 妙道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명 《화랑세기》에서는 妙道가 幺窄(요착)하여 밤이면 밤마다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그 고통의 원인이 妙道의 구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법흥왕의 지나치게 비대한 陰莖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라면, 법흥왕과는 그렇게 괴로워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妙道가 어찌 未珍夫와는 그리도 금슬 좋은 알콩달콩한 삶을 끌어갔겠는가? 아니, 그렇지도 않다면, 未珍夫는 당시 신라 성인 남성보다 陰莖이 작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에다가 그다지 혐의를 주고픈 생각은 없다. 


내가 처음에 《화랑세기》 이 대목을 접하고는 퍼뜩 지증왕을 떠올렸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元子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이에 비뇨기과 전문은 아니지만, 평소 친분이 있는 어떤 서울대 의대 교수에게 “아버지 ○지가 크면 그 아들 ○지도 클까요?”라고 물은 기억이 있다. 한데 이 교수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대물을 향하여!!!>


“아버지가 큰 데 아들이 작다면 그거야말로 기네스북 감입니다.” 


이것이 내가 본 《화랑세기》가 폭로한 新羅史像의 하나다.


고신라 금석문에서 확인한 갈문왕이다.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즉위년조에서 왕을 ‘이름이 지대로(智大路-지철로智度路라고도 하고 지철로智哲老라고도 한다)'라 하고, 삼국유사 왕력편 지증마립간조에서는  그를 일러 ‘지철로왕(智哲老王)'이라 한다고 해서, 금석문에 보이는 지도로가 곧 지증왕이라 보는 견해가 압도적이다.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지증왕4년․503년 추정) : <전면> 斯羅의 喙 ○夫智王과 내지왕(乃智王) 두 왕이 敎示를 내려 진이마촌珍而麻村의 절거리節居利로써 증거를 삼아 그 로 하여금 재물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癸未年 9월 25일, 사탁沙喙 지도로 갈문왕至都盧葛文王·○德智 阿干支·자숙지 거벌간지子宿智居伐干支와 喙의 이부지 일간지尒夫智壹干支·지심지 거벌간지只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두복지 간지頭腹智干支와 斯彼의 暮○智 干支, 이들 일곱 왕 등이 함께 의논하여(共論) 교시하였으니, 前世 두 王의 교시로써 증거를 삼아 財物을 모두 절거리로 하여금 얻게 하라고 하셨다. 또 敎示하셨으니 節居利가 만약 먼저 죽으면 그 집 아이 사노斯奴로 하여금 그 財物을 얻게 하라고 하셨다. 다시 교시하셨으니 말추末鄒와 ○申支 이 두 사람은 뒤에 다시는 이 재물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後面> 만약 다시 말썽을 일으키면 重罪를 준다고 교시하셨다. 전사인典事人은 沙喙의 일부지 나마壹夫智奈麻․지노불到盧弗·수구휴須仇休와 喙의 탐수 도사眈須道使 심자공心訾公과 喙의 사부沙夫·那○利, 沙喙의 소나지蘇那支이다. 이들 일곱 사람이 삼가 사뢴 바 일이 완결되어 소를 잡고 널리 고하였기에 이에 기록한다. <上面> 촌주村主 유지 간지(臾支干支)와 수지 일금지(須支壹今智) 이 두 사람이 世中에 일을 마쳤으므로 이에 기록한다. 


(前面)

斯羅喙夫智王乃智王此二王敎用珍而」

麻村節居利爲證尒令其得財敎耳」

未年九月廿五日沙喙至都盧葛文」

王德智阿干支子宿智居伐干支」

喙尒夫智壹干支只心智居伐干支」

本彼頭腹智干支斯彼暮智干」

支此七王等共論敎用前世二王敎」

爲證尒取財物盡令節居利」

得之敎耳別敎節居利若先」

死後令其弟兒斯奴得此財」

敎耳別敎末申支」

此二人後莫更噵此財」

(後面)

若更噵者敎其重罪耳」

典事人沙喙壹夫」

智奈麻到盧弗須 仇」

休喙耽須道使心 訾公」

喙沙夫那利沙 喙」

■那支此七人■ 踪所白了」

  事煞牛拔 誥故記」

(上面)

村主臾支干」

支須支壹」

今智此二人世中」

了事」

故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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