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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보면, 삼국 각왕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을 발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이는 생일(生日)의 탄생과 밀접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누구나 기념하는 생일이 삼국시대 당시에는 의미가 없거나, 거의 없었으니, 개인 일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해 어느 날에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느 해 어느 달 며칠에 죽었느냐가 더욱 중요했으니, 이는 바로 기일(忌日) 때문이었다.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으되, 제삿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무령왕릉 묘권(墓卷)을 봐도, 무령왕이 죽을 때 62세였다는 사실만 적기했을 뿐, 정확히 몇월 며칠 몇시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반면, 죽은 시점은 정확히 기록했으니, 이 역시 기제사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중국사를 봐도 위진남북조시대 이전까지 황제 나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의외로 드물어, 한 고조 유방만 해도 언제 태어나 죽을 때 몇 살이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신라사를 볼 적에도 각 왕들의 정확한 생몰년이 없어 애를 먹는 일이 많으니, 그런 점에서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은 좀 묘하다. 익히 알려졌듯이 그의 생년을 추정하는 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 증언을 하거니와, 즉위할 때 나이에 대해 전자는 7살이라 하고, 후자는 15살이라 한다. 이걸 왜 밝혔느냐 하면, 7살이건 15살이건 너무 어려서 직접 통치는 하지 못하고, 이런 경우 대개 거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그 어머니가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까닭이다. 법흥왕 외손자요 조카인 진흥은 외할아버지가 죽었을 적에 엎혀서 왕이 되었으니, 그 힘은 법흥왕 딸로서 삼촌한테 시집간 그의 어머니 지소부인에 있었다. 지소는 눈물 나는 권력투쟁에서 마침내 이겨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힌 것이다. 

저 두 가지 상이한 나이 중에서 《삼국사기》가 매우 우세한 지위를 점하며, 나 역시 즉위할 때 나이가 7살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또 많은 지적이 있듯이, 나 역시 같은 이유를 달거니와, 그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본기 12년(551) 봄 정월에다가 저록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는 흔적 때문이다. 

왜 하필 이해에 신라는 연호를 바꾸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해에 진흥왕이 친정(親政) 체제에 비로소 돌입했기 때문이다. 7살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를 따를 때 이해에 진흥왕은 18살이 된 것이며, 이것이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제왕이 성년이 되는 보편 나이다. 반면 15살을 따른다면, 이해에 진흥왕은 벌써 25살이나 된 시점이다. 

나아가 우리는 진흥이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개시한 시점이 그가 18살이 되는 해 정월이라는 점을 주시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대목을 선학들은 전연 주목하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서도 앞서 내가 말하는 생일이 이때까지만 해도 의미가 없거나, 거의 없었다는 내 추정은 다시금 정당성을 확보한다. 물론 진흥왕이 태어난 달이 정월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무래도 그가 18살이 되는 '해'를 기점으로 친정 개시 연도를 따랐다고 보는 편이 순리일 것이다. 

그의 손자 진평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혹은 기타 여느 문헌에도 즉위 당시 나이가 없다. 각종 인명사전에서 생몰년 중 몰년만 있고 생년은 항용 퀘스쳔 마크(?)를 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진흥왕한테서 그의 나이를 밝혀낸 바로 그 수법으로 진평왕 역시 나이를 추정할 근거가 있다. 

그것을 본격적으로 파기 전에 하나 확인할 사안이 있다. 진평왕은 어린 나이, 아마도 성년에 도달하기 전에 즉위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에 대해서는 번다하므로 자세한 논의는 略한다. 암튼 진평 역시 그의 할아버지 진흥이 그랬듯이 어린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즉위 초반 한동안은 그의 어미 만호부인(萬呼夫人)이 섭정했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 다음 진평왕본기 대목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6년(584) 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이를 진흥왕본기에 대입하면, 이때 진평왕 역시 18살에 도달해 친정을 개시하고, 그 상징 조치의 하나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에서 연호를 할아버지 진흥왕 때 이래 죽 쓰기 시작한 홍제(鴻濟)를 버리고 건복이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연호를 개정한 시점이 하필 2월이다. 물론 이 경우 정월에 개정한 진흥왕과 대비할 적에 한 달 차이는 있지만, 이는 두 가지 가능성도 합치를 꾀할 수 있다. 

첫째, 이 기간에 책력이 변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책력이 2월을 새해 첫 달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 신라사를 보면 정월과 2월이 새해 첫 시작을 왔다리갔다리 하는 모습을 완연히 보인다는 점이다. 그 대표 사례가 새로운 왕이 즉위한 다음 그 이듬해 예외없이 신궁(神宮)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이거니와, 2월인 경우가 많다. 이로써 본다면, 정월이건 2월이건 큰 차이는 없다. 정월이건 2월이건, 그달이 신라인들에게는 새해 시작으로 간주된 것이다. 아무튼 진흥왕에 대비되어 살핀다면, 생년을 알지 못하는 진평왕은 즉위할 때 13세였다가 18세가 된 즉위 6년째에 친정을 개시한 셈이다. 

한데 놀랍게도 《화랑세기》에는 이 점이 명확히 보인다. 22세 양도공(良圖公) 전에는 "진평제가 즉위할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치니 (할머니) 사도태후가 보명(寶明)과 미실(美室) (두 후궁한테) 제를 이끌도록[導] 했다."

이에서 보이는 '導했다'는 말은 섹스 양육을 말한다. 양기(陽氣)를 길러주도록 섹스 보모 노릇을 했다는 뜻이거니와, 어린 진평을 수청들면서 그에게 여자 맛을 알도록 가르쳤다는 뜻이다. 왜 어린 왕을 이리 양육해야 하는가? 후손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빨리 성에 눈이 뜨야, 왕자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진평은 딸만 두고 적통 왕자를 두지 못했으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상 이 이야기는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김영사, 2002 중 제15장 '진평왕과 연호 건복'(356~368쪽)에 이미 상세히 다룬 것으로, 그것을 토대로 하되 몇 가지 새로운 항목을 보강해 다시 쓴 것이다.) 

신라 진평왕 딸로서 훗날 왕이 된 선덕의 언니로서, 룡수(龍樹)와 혼인해 김춘추를 낳았다. 남편 사후엔 룡수 동생 룡춘(龍春)과 살았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 아들인 이찬 용춘(龍春)<용수(龍樹)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했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 딸이다. 

삼국유사 권제1 왕력 : 제29대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니 김씨다. 진지왕(眞智王) 아들인 룡춘(龍春) 탁문흥갈문왕(卓文興葛文王) 아들이다. 룡춘(龍春)은 룡수(龍樹)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니 시호가 문정태후(文貞太后)이니, 진평왕 딸이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간오(刊誤) : 선덕왕 남편은 갈문왕(葛文王) 김인평(金仁平)이고, 진덕왕 남편은 갈문왕 김기안(金基安)이다. 무열왕(武烈王) 어머니는 선덕 동생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읍(邑)에 세보(世譜)가 있으니 그 전하는 바가 이와 같다. 여러 사서에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2 기이2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고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이라고도 한다) 각간(角干)이니,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의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문정(文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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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원년(579) 8월에 이찬 노리부(弩里夫)를 상대등으로 삼았다. 친동생 백반(伯飯)을 진정갈문왕(眞正葛文王)으로, 국반(國飯)을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으로 봉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진안갈문왕(眞安葛文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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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비 김씨 마야부인 아버지라는 점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 신라시대 금석문에 보이는 복동지(服冬知 혹은 服冬智), 혹은 복등지(福登知)와 동일인물일 수도 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평왕 : 진평왕(眞平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백정(白淨)이고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다. 왕비는 김씨 마야부인(摩耶夫人)으로 갈문왕 복승(福勝)의 딸이다. 왕은 태어날 때부터 기이한 용모였고 신체가 장대하고 뜻이 깊고 굳세었으며, 지혜가 밝아 사리에 통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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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권제4 신라본기4 진평왕본기 : 46년(624)…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와서 우리의 속함성(速含城), 앵잠성(櫻岑城), 기잠성(暫城), 봉잠성(烽岑城), 기현성(旗縣城), 혈책성(穴柵城) 등 여섯 성을 에워쌌다. 이에 세 성은 함락되거나 혹은 항복하였다. 급찬 눌최(訥催)는 봉잠성, 앵잠성, 기현성의 세 성 군사와 합하여 굳게 지켰으나 이기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삼국사기 권제47(열전 제7) 눌최 열전 : 눌최(訥崔)는 사량 사람으로 대나마 도비(都非)의 아들이다. 진평왕 건복(建福) 41년 갑신(진평왕 46: 624) 겨울 10월에 백제가 대거 내침하여 군사를 나눠 속함(速含)[현재의 경남 함양군], 앵잠(櫻岑), 기잠(岑), 봉잠(烽岑), 기현(旗懸), 혈책(穴柵) 등 여섯 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왕이 상주(上州), 하주(下州), 귀당(貴幢), 법당(法幢), 서당(誓幢) 등 5군에게 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5군이] 이미 도착하여 백제 군사가 진영을 갖춘 것이 당당함을 보고 그 예봉을 당해낼 수 없을 것 같아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못하였다. 어느 사람이 주장하였다.“대왕께서 5군을 여러 장군에게 맡겼으니 국가의 존망이 이 한 싸움에 달렸다. 병가(兵家)의 말에 ‘승리가 판단되면 진격하고, 어려울 것 같으면 후퇴하라.’ 하였으니 지금 강적이 앞에 있으니 계략을 쓰지 않고 직진하였다가 만일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다.”장군과 보좌관들이 모두 그렇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미 명을 받아 출동하였으므로 그냥 돌아갈 수도 없었다. 이보다 앞서 국가에서 노진(奴珍) 등 여섯 성을 쌓으려고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는데 드디어 그 곳에 성을 다 쌓고 돌아왔다. 이에 백제의 침공이 더욱 급박하여져 속함, 기잠, 혈책의 세 성이 함락되거나 또는 항복하였다. 눌최가 남은 세 성으로써 굳게 지키다가 5군이 구원하지 않고 돌아간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병졸에게 말하였다. “봄날의 따뜻한 기운에는 모든 초목이 꽃을 피우지만 추위가 닥치면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만이 늦게 낙엽진다. 지금 외로운 성에 구원이 없어 날로 더욱 위험하다. 지금이 바로 진실로 뜻있는 병사와 의로운 사람이 절조를 다 바쳐 이름을 날릴 수 있는 때이다. 너희들은 장차 어떻게 하겠는가?”병졸들이 눈물을 뿌리며 말하기를 “감히 죽음을 아끼지 않고 오직 명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성이 장차 함락되려 할 때 군사들이 거의 다 죽고 몇 사람 밖에 남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싸워 구차히 살아 보겠다는 마음이 없었다. 눌최에게 종이 한 명 있었는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다. 어느 사람이 일찍이 말하기를 “소인(小人)이 특이한 재주를 가지면 해롭지 않은 경우가 없으니, 이 종을 마땅히 멀리하라!” 하였다. 그러나 눌최는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 때에 성이 함락되어 적이 들어오자 그 종은 활을 당기어 화살을 끼워 눌최의 앞에서 쏘는데 빗나가는 바가 없었다. 적이 두려워하여 앞으로 나오지 못하다가 어느 적군 한 명이 뒤에서 와서 도끼로 눌최를 쳐 눌최가 쓰러지니 종이 돌아서서 싸우다가 주인과 함께 죽었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비통해 하고 눌최에게 급찬의 관등을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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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아버지 용수·용춘은 형제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2016.12.18 00:42 | 510호 23면 


서기 654년 봄, 진덕여왕이 죽자 신라엔 성골(聖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선덕여왕 즉위(632년) 때부터 남자 성골이 씨가 말랐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성골 여인인 선덕과 진덕을 차례로 왕으로 세운 것이었는데,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성골은 품계가 없는, 더 정확히는 품계를 초월하는 신분이었다. 그 다음 신분인 진골(眞骨)은 신하들이 차지했다. 성골이 멸종했으므로 신하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김춘추다. 그의 후견인은 처남 매부가 되어 끈끈한 인연을 다진 맹장 김유신. 처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김춘추가 마침내 권좌를 차지하니, 그가 훗날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김춘추의 계보를 『삼국사기』 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다.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용수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角飡) 서현(舒玄)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 진지는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형 동륜(銅輪)태자가 일찍 죽자 왕위를 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해서 쫓겨났다. 원래 이름이 금륜(金輪)인 진지왕은 지도(知道)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용춘이다. 


한데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龍春[一云龍樹]之子也)고 했을까? 용수와 용춘은 같은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인물인가. 단순한 한자 표기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판별할 결정적인 증거가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진평왕본기 44년(622)조를 보면 “이해 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는 귀절이 있다. 이찬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 체계에서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제1등급을 뜻한다. 그러나 이보다 7년이 지난 진평왕본기 51년(629)조를 보면 “이해 가을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용춘이 김유신 아버지인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군에 맞선 신라군 총사령관이 됐다는 의미다. 다만 이때 용춘의 관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장군은 전시에 임금이 임명하는 임시 군사직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의 열쇠는 다시 『삼국사기』에서 풀린다. 김유신 열전(上)에 다음과 같이 대목이 보인다. “건복(建福)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와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치게 했다.” 


낭비성 전투 당시 신라군 총사령관은 이찬 임말리였으며, 용춘과 서현은 그를 보좌하는 부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진찬은 4등, 소판은 3등이었다. 낭비성 전투가 신라에는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 그에 대응하면서 짠 진용을 보면서 실감한다. 


유관한 세 개의 기록을 통해 용수와 용춘이 다른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622년에 관위가 1등 이찬이었던 사람이 7년이 지난 629년에 4등 파진찬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용수와 용춘은 별개의 인물로 보는게 상식적이다. 


우리 사학계에서 어떤 학자도 용수와 용춘이 별개 인물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기이하기만 하다. 같은 인물에 대한 약간 다른 표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같은 사람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를 소개할 적에 ‘龍春[一云龍樹]’와 같은 식으로 흔히 적기 때문이었다. 두 책 모두에서 용춘 혹은 용수가 곳곳에 등장하거니와 그때마다 “용춘은 용수라고 한다”거나 “용수는 용춘이라고도 한다”고 적었으니, 둘을 동일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화랑세기』로 눈을 돌려보자. 여기선 용수를 형, 용춘을 동생으로 그리고 있다. 김춘추와의 관계를 보면, 용수가 생물학적인 아버지요, 용춘은 작은 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에 의하면 김춘추는 용수와 천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죽으면서 부인과 아들을 모두 동생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작은아버지 보호를 받고 자라서는 나중에 권좌에 오르게 되고,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양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에 추봉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용수와 용춘을 헷갈린 사연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부모가 같은 형제였던 데다 공교롭게도 ‘용(龍)’이라는 돌림자를 썼으며, 더 나아가 김춘추에게는 생부와 양부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에서 김춘추를 일러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를 차례로 역임한 32명에 대한 전기다. 이에 의하면 그 열세 번째 풍월주가 용춘이다. 그는 아버지가 금륜왕(金輪王), 곧 진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다. 형으로 용수(龍樹)가 있고, 누나로는 용명(龍明)이 있다.용명은 나중에 진평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용수와 용명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용춘에 대해“태화(太和) 원년(647) 8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는 기록이 있어, 아버지 진지왕이 임금이 된 지 3년째인 578년에 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은 579년, 쿠데타로 쫓겨난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은 아직 어려서 그(아버지 금륜왕) 얼굴을 몰랐다.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새로운 왕(진평왕)을 섬기게 되자 공은 새로운 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엽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고 돼있다. 하지만 용춘은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에 격분해 화랑으로 들어가 풍월주에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형은 어찌 되었을까? 이 과정에서 천명이라는 여인과 용수-용춘 형제를 둘러싼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이는 곧 김춘추의 출생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진흥왕 손자인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장장 53년(579~632)에 달했지만, 왕위를 물려줄 적통 왕자를 오랫동안 생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선덕이 탄생하게 됐다. 진평은 애초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인물로 용수를 점찍었다. 진평은 진흥왕의 큰 아들인 동륜태자의 아들이고, 용수는 진흥왕의 둘째아들인 금륜태자(진지왕)의 아들이니, 진평과 용수는 사촌이다. 용수는 아버지가 폐위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다음 보위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용수는 성골 적통 왕자에서 한 단계 떨어져 진골이 되었던 것같다. 거주지도 아버지가 왕위에 있을 적에는 당연히 궁궐 안이었겠지만, 쿠데타로 쫓겨난 뒤에는 궁궐 밖에 마련했을 것이다.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를 전군(殿君)이라 부른다. 신분이 강등된 용수 역시 전군이었다. 이런 용수를 진평왕이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자격을 구비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진평이 생각한 것이 그를 사위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촌인 용수를 사위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직계 가족 일원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평왕은 마야(摩耶) 부인과 사이에 두 딸, 천명(天明)과 선덕(善德)을 뒀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한테서 따온 이름이다. 진평왕 부부는 장녀인 천명을 용수와 짝 지워 주려했지만 천명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랑세기』 용춘공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공주는 마음속으로 (용춘)공을 사모하여 (마야)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고 했다. 황후가 용수로 생각해서 시집을 잘못 보낸 것이다.” 


용숙이란 ‘용(龍)자를 쓰는 아재비’를 말한다. 용수건 용춘이건 천명에게는 오촌 당숙이다. 천명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용수와 짝지어 주었다는 대목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는 없다. 마야부인이 일부러 그리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의 마음엔 오매불망 용춘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천명의 꿈’은 남편 용수가 죽고 나서 풀린다. 동생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 용수는 죽으면서 천명을 용춘에게 맡기고, 용춘도 하는 수 없이 천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를 따라 용춘에게 간 용수의 아들, 그가 바로 김춘추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치고는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런 김춘추 역시 훗날 김유신의 계략에 말려들어,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받아들여 혼전 임신을 해서 아들(문무왕 김법민)을 낳았으니 말이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출생의 비밀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가 단순히 상상의 소산만은 아닌 듯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8 00:46 | 497호 23면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라든가 즉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적었습니다. 하늘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법이니, 어찌 늙은 할망구(??)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는 실로 난세(亂世)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먼저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之晨)’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암퇘지가 두리번두리번 거린다’고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 최초의 여주(女主)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재위 16년째인 647년 봄 정월 8일에 죽은 사실을 『삼국사기』가 적으면서 그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이 덧붙인 역사평론인 사론(史論) 전문이다. 아주 혹독한 평가다. 한데 같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에는 원래 이름이 덕만(德曼)인 그가 아버지 진평(眞平)을 이어 즉위한 사실을 전하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니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해서 이율배반의 평가를 한다. 성조황고는 그 의미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닌 후덕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존재 정도를 의미한다.

  

여자가 군주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불만은 당시 신라 내부에서도 팽배했던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선덕이 여자라 해서, 당 황실에서 배필을 골라줄 테니 정치는 그 남자한테 맡기라 빈정대기도 했다. 선덕이 죽음을 앞두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이들이 왕좌 탈취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해 봄 정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上大等) 직위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일으킨 내란이 그것이다. 비담이 내세운 논리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였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와중에 그 후임을 같은 여자인 진덕(眞德)으로 확정하자 다시 여자가 임금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권좌를 탈취하고자 했던 듯하다. 

  

비담 “여왕은 나라 못 다스려” 난 일으켜하지만 혹평과는 달리 선덕은 매우 똑똑한 여자였던 듯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년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하다. 김부식 사론에선 그를 ‘늙은 할망구(??)’라 했고, 그가 즉위하자 신라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선덕은 노련하면서도 덕을 갖춘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란히 등재돼 있다. 특히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이야기는 아예 제목부터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다시 말해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이다. 두 가지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으로 백제군이 몰래 침습한 걸 알아내 그들을 몰살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왕이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나머지 하나가 모란 사건이다. 먼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 첫 대목에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앞선 왕(진평왕-인용자)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지극히 요염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에게 국색(國色)이 있으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고 했다. 그것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선덕이 진평왕의 공주이던 시절의 일화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 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명하여 뜰에다 (그 씨를) 심게 했다가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중략) 이로써 대왕이 신령스럽고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뭇 신하가 왕께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 꽃과 개구리 두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으니 거기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곧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놀린 것이오.’ (중략) 이에 뭇 신하가 모두 그의 성스러운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 꽃 세 가지 색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덕·진덕(眞德)·진성(眞聖)이 그들이니 당나라 황제도 미래를 아는 명석함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몇 가지 미세한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또 『삼국유사』 쪽 기술이 훨씬 생생하며 문학적이다. 이런 차이는 참조한 원전이 각기 달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원전을 참조하면서 이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차이가 빚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이 역사성을 반영한 것일까. 필자는 이 일이 선덕여왕 혹은 선덕공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는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모란 때문이다. 공주 시절이건, 여왕 시절이건 이 시대에는 모란이 등장할 수 없었다. 모란은 이보다 대략 100년 뒤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모란 씨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세민 시대에 중국에 모란은 없었다는 역사성의 차이를 어찌 증명할 것인가.

  

중국사에서 볼 때 당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진평왕, 혹은 선덕여왕 시대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인 서기 750년 무렵 이후다. 아무리 일러도 730년 이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국의 관련 기록을 모조리 검토하면 모란은 중국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서 이 무렵에 들어왔으며, 더구나 그런 모란이 광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은 800년 이후, 백거이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 무렵이다. 실제 중국 청나라 때 당나라 시인 2200여 명이 남긴 시 4만8900여 수를 묶은 방대한 시집 『전당시(全唐詩)』를 훑어봐도 당 현종 개원 연간(713~741) 이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하는 시가 단 한 편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란이 그 무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봐도 이 꽃은 개원 연간에 장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진평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모란씨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여왕 둘러싼 ‘삼서지제’ 소개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가 선덕왕(혹은 선덕공주)을 감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고, 그래서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거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가 없거나, 남자가 있어도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색깔의 모란씨를 심었지만 향기가 없다는 것은 혹시 선덕왕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의문의 실마리는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본 형태로 남긴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을 역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물이다.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선덕여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서지제(三?之制)’라는 제도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선덕) 공주가 즉위하자 (용춘) 공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왕을 보좌토록 했다. (용춘) 공은 본디 (아버지인) 금륜(金輪)이 색(色)에 빠져 폐위된 일을 슬퍼하여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로 삼고는 태종(太宗·김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선덕왕은 아들을 두고자 용춘·흠반·을제 세 명의 남자를 잠자리로 불러들였으나,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삼서지제’는 여자가 적통 아들을 두기 위해 남자를 세 명까지 불러들이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남편이 아니라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해서 나중에 모란 이야기로 둔갑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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