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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 김춘추가 죽어 받은 시호이며 태종무열왕 줄임말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태종춘추공 : 제29대 태종대왕(太宗大王)은 이름이 춘추(春秋)이며 성(姓)은 김씨(金氏)다. 룡수(龍樹. 룡춘<龍春> 각간(角干)으로 추봉(追封)된 문흥대왕(文興大王)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眞平大王) 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며 비(妃)는 문명황후(文明皇后) 문희(文姬)이니 곧 유신공(庾信公) 끝누이다.


삼국사기 권 제8(신라본기 8) 신문왕 : 7년(687)…여름 4월에 음성서(音聲署)의 장관을 고쳐 경(卿)이라 하였다. 대신을 조묘(祖廟)에 보내 제사를 올리고 아뢰었다. “왕 아무개는 머리 숙여 재배(再拜)하고 삼가 태조대왕(太祖大王), 진지대왕(眞智大王), 문흥대왕(文興大王), 태종대왕(太宗大王), 문무대왕(文武大王) 영전에 아룁니다. 저는 재주와 덕이 없이 숭고한 유업을 계승하여 지킴에 자나깨나 걱정하고 애쓰느라 편안하게 지낼 겨를이 없었습니다. 종묘의 돌보심과 하늘과 땅이 내리는 복에 힘입어 사방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화목하며,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은 보물을 실어다 바치고, 형벌이 밝고 송사(訟事)가 없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요즈음 임금으로서 할 바 도(道)를 잃고 의리가 하늘의 뜻에 어그러졌음인지, 별의 형상에 괴변(怪變)이 나타나고 해는 빛을 잃고 침침해지니 몸이 벌벌 떨려 마치 깊은 못과 골짜기에 떨어지는 것만 같습니다. 삼가 아무 관직에 있는 아무개를 보내 변변치 못한 것을 차려 놓고 살아 계신 듯한[如在] 영혼 앞에 정성을 올리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미미한 정성을 밝게 살피시고 하찮은 이 몸을 불쌍히 여기시어 사철 기후를 순조롭게 하시고 오사(五事)의 징후에 허물이 없게 하시며 곡식이 잘되고 질병을 없게 하며 입고 먹는 것이 넉넉하고 예의를 갖추며 안팎이 편안하고 도적이 사라지며 넉넉한 것을 자손들에게 남겨 길이 많은 복을 누리게 하여 주십시오. 삼가 아룁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 2 성덕왕(聖德王) : 제33대 성덕왕(聖德王) 신룡(神龍) 2년 병오(丙午. 706)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몹시 굶주렸다. 그 이듬해인 정미년(丁未年. 707) 정월 초하루부터 7월 30일에 이르기까지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나누어 주는데, 한 식구에 하루 서 되(三升)씩으로 정했다.  일을 마치고 계산해 보니 도합 30만 500석이었다. 왕이 태종대왕(太宗大王)을 위해서 봉덕사(奉德寺)를 세우고 7일간 인왕도량(仁王道場)을 열고 대사령(大赦令)을 내렸다. 이때 비로소 시중(侍中)이라는 직책을 두었다(다른 책에는 효성왕孝成王 때의 일이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원성왕 : 원년 2월에…성덕대왕(聖德大王)과 개성대왕(開聖大王)의 두 사당을 헐고 시조대왕, 태종대왕, 문무대왕 및 할아버지 흥평대왕과 아버지 명덕대왕으로써 5묘(五廟)를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10(신라본기 제10) 애장왕 : 2년(801) 봄 2월에 왕이 시조묘에 배알했다. 태종대왕과 문무대왕 두 사당을 따로 세우고 시조대왕(始祖大王)과 왕의 고조부 명덕대왕(明德大王), 증조부 원성대왕, 할아버지 혜충대왕, 아버지 소성대왕으로 5묘(五廟)를 삼았다. 병부령 언승을 어룡성(御龍省) 사신(私臣)으로 삼았다가, 얼마 안 있어 상대등으로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김양 열전 : 김양(金陽)은 자가 위흔(魏昕)이고, 태종대왕 9세손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이찬 주원(周元), 할아버지는 소판 종기(宗基), 아버지는 파진찬 정여(貞茹)이니 세력있는 집안으로써 모두 장수와 재상이 되었다.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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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 아버지 용수·용춘은 형제 사이 

[중앙선데이] 입력 2016.12.18 00:42 | 510호 23면 


서기 654년 봄, 진덕여왕이 죽자 신라엔 성골(聖骨)이 더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선덕여왕 즉위(632년) 때부터 남자 성골이 씨가 말랐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성골 여인인 선덕과 진덕을 차례로 왕으로 세운 것이었는데,이는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다. 


신분제 사회인 신라에서 성골은 품계가 없는, 더 정확히는 품계를 초월하는 신분이었다. 그 다음 신분인 진골(眞骨)은 신하들이 차지했다. 성골이 멸종했으므로 신하 중 누군가가 왕위에 올라야 했다. 이때 등장한 인물이 김춘추다. 그의 후견인은 처남 매부가 되어 끈끈한 인연을 다진 맹장 김유신. 처남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고 김춘추가 마침내 권좌를 차지하니, 그가 훗날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이다. 김춘추의 계보를 『삼국사기』 본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태종무열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다.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伊飡) 용춘(龍春, 혹은 용수라고도 함)의 아들이다. 어머니 천명부인은 진평왕의 딸이다. 왕비는 문명부인으로 각찬(角飡) 서현(舒玄)의 딸이다.” 


그의 할아버지 진지는 진흥왕의 둘째아들로 형 동륜(銅輪)태자가 일찍 죽자 왕위를 이었지만 재위 4년 만에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해서 쫓겨났다. 원래 이름이 금륜(金輪)인 진지왕은 지도(知道)를 아내로 맞아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용춘이다. 


한데 무슨 사연이 있기에 『삼국사기』는 김춘추의 아버지를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다”(龍春[一云龍樹]之子也)고 했을까? 용수와 용춘은 같은 인물인가, 아니면 다른 인물인가. 단순한 한자 표기의 차이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면 이 구절은 뜻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것을 판별할 결정적인 증거가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진평왕본기 44년(622)조를 보면 “이해 2월에 이찬 용수를 내성사신(內省私臣)으로 삼았다”는 귀절이 있다. 이찬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 체계에서 더 이상 오를 데가 없는 제1등급을 뜻한다. 그러나 이보다 7년이 지난 진평왕본기 51년(629)조를 보면 “이해 가을 임금이 대장군 용춘(龍春)과 서현(舒玄), 부장군 유신(庾信)을 보내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용춘이 김유신 아버지인 김서현과 함께 고구려군에 맞선 신라군 총사령관이 됐다는 의미다. 다만 이때 용춘의 관위가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대장군은 전시에 임금이 임명하는 임시 군사직이었기 때문이다. 


의문의 열쇠는 다시 『삼국사기』에서 풀린다. 김유신 열전(上)에 다음과 같이 대목이 보인다. “건복(建福) 46년(629) 기축 가을 8월, 왕이 이찬 임말리(任末里)와 파진찬 용춘(龍春)·백룡(白龍), 소판 대인(大因)·서현 등을 보내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낭비성을 치게 했다.” 


낭비성 전투 당시 신라군 총사령관은 이찬 임말리였으며, 용춘과 서현은 그를 보좌하는 부사령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파진찬은 4등, 소판은 3등이었다. 낭비성 전투가 신라에는 얼마나 큰 전쟁이었는지, 그에 대응하면서 짠 진용을 보면서 실감한다. 


유관한 세 개의 기록을 통해 용수와 용춘이 다른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622년에 관위가 1등 이찬이었던 사람이 7년이 지난 629년에 4등 파진찬으로 떨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용수와 용춘은 별개의 인물로 보는게 상식적이다. 


우리 사학계에서 어떤 학자도 용수와 용춘이 별개 인물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기이하기만 하다. 같은 인물에 대한 약간 다른 표기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같은 사람에 대한 두 가지 이상의 다른 표기를 소개할 적에 ‘龍春[一云龍樹]’와 같은 식으로 흔히 적기 때문이었다. 두 책 모두에서 용춘 혹은 용수가 곳곳에 등장하거니와 그때마다 “용춘은 용수라고 한다”거나 “용수는 용춘이라고도 한다”고 적었으니, 둘을 동일인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렸던 것이다. 


여기서 다시 『화랑세기』로 눈을 돌려보자. 여기선 용수를 형, 용춘을 동생으로 그리고 있다. 김춘추와의 관계를 보면, 용수가 생물학적인 아버지요, 용춘은 작은 아버지이자 양아버지이기도 하다. 이에 의하면 김춘추는 용수와 천명 부인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용수는 죽으면서 부인과 아들을 모두 동생에게 맡겼다. 이렇게 해서 김춘추는 작은아버지 보호를 받고 자라서는 나중에 권좌에 오르게 되고, 그리하여 즉위하자마자 양아버지를 문흥대왕(文興大王)에 추봉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용수와 용춘을 헷갈린 사연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두 사람은 부모가 같은 형제였던 데다 공교롭게도 ‘용(龍)’이라는 돌림자를 썼으며, 더 나아가 김춘추에게는 생부와 양부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본기에서 김춘추를 일러 “진지왕의 아들인 이찬 용춘(혹은 용수라고도 한다)의 아들”이라고 한 이유를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인 풍월주(風月主)를 차례로 역임한 32명에 대한 전기다. 이에 의하면 그 열세 번째 풍월주가 용춘이다. 그는 아버지가 금륜왕(金輪王), 곧 진지왕이고 어머니는 지도태후(知道太后)다. 형으로 용수(龍樹)가 있고, 누나로는 용명(龍明)이 있다.용명은 나중에 진평왕에게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 용수와 용명이 언제 태어나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용춘에 대해“태화(太和) 원년(647) 8월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0세였다”는 기록이 있어, 아버지 진지왕이 임금이 된 지 3년째인 578년에 출생했음을 알 수 있다. 


진지왕은 579년, 쿠데타로 쫓겨난다. 『화랑세기』는 “(용춘)공은 아직 어려서 그(아버지 금륜왕) 얼굴을 몰랐다. (어머니인) 지도태후가 태상태후의 명령으로 다시 새로운 왕(진평왕)을 섬기게 되자 공은 새로운 왕을 아버지라 불렀다. 이 때문에 왕이 가엽게 여겨 총애하고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고 돼있다. 하지만 용춘은 나중에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고, 이에 격분해 화랑으로 들어가 풍월주에까지 오른다. 


그렇다면 형은 어찌 되었을까? 이 과정에서 천명이라는 여인과 용수-용춘 형제를 둘러싼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이는 곧 김춘추의 출생 비밀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롭다. 


진흥왕 손자인 진평왕은 재위 기간이 장장 53년(579~632)에 달했지만, 왕위를 물려줄 적통 왕자를 오랫동안 생산하지 못했다. 그 결과 ‘한국 역사 최초의 여왕’이라는 선덕이 탄생하게 됐다. 진평은 애초에는 다음 보위를 이을 인물로 용수를 점찍었다. 진평은 진흥왕의 큰 아들인 동륜태자의 아들이고, 용수는 진흥왕의 둘째아들인 금륜태자(진지왕)의 아들이니, 진평과 용수는 사촌이다. 용수는 아버지가 폐위되지 않았으면 아마도 다음 보위를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지왕이 폐위되면서 용수는 성골 적통 왕자에서 한 단계 떨어져 진골이 되었던 것같다. 거주지도 아버지가 왕위에 있을 적에는 당연히 궁궐 안이었겠지만, 쿠데타로 쫓겨난 뒤에는 궁궐 밖에 마련했을 것이다. 왕위 계승권이 없는 왕자를 전군(殿君)이라 부른다. 신분이 강등된 용수 역시 전군이었다. 이런 용수를 진평왕이 후계자로 만들기 위해서는 다른 자격을 구비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진평이 생각한 것이 그를 사위로 만드는 일이었다. 사촌인 용수를 사위로 만듦으로써 자신의 직계 가족 일원으로 편입시키려 했던 것이다. 


진평왕은 마야(摩耶) 부인과 사이에 두 딸, 천명(天明)과 선덕(善德)을 뒀다. 마야부인은 석가모니 부처의 어머니한테서 따온 이름이다. 진평왕 부부는 장녀인 천명을 용수와 짝 지워 주려했지만 천명이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랑세기』 용춘공전에 이런 기록이 있다. “공주는 마음속으로 (용춘)공을 사모하여 (마야) 황후에게 조용히 말하기를 ‘남자는 용숙(龍叔)과 같은 사람이 없습니다’고 했다. 황후가 용수로 생각해서 시집을 잘못 보낸 것이다.” 


용숙이란 ‘용(龍)자를 쓰는 아재비’를 말한다. 용수건 용춘이건 천명에게는 오촌 당숙이다. 천명의 말을 잘못 알아들어 용수와 짝지어 주었다는 대목을 곧이곧대로 믿을 이유는 없다. 마야부인이 일부러 그리했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천명의 마음엔 오매불망 용춘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천명의 꿈’은 남편 용수가 죽고 나서 풀린다. 동생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안 용수는 죽으면서 천명을 용춘에게 맡기고, 용춘도 하는 수 없이 천명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를 따라 용춘에게 간 용수의 아들, 그가 바로 김춘추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 치고는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하기야 그런 김춘추 역시 훗날 김유신의 계략에 말려들어,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를 받아들여 혼전 임신을 해서 아들(문무왕 김법민)을 낳았으니 말이다. 이런 장면들을 보면 출생의 비밀로 얼룩진 막장 드라마가 단순히 상상의 소산만은 아닌 듯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4월11일 13시55분이다. 


 1. 서악동의 신라 시대 귀부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무덤을 비롯한 중고시대 신라 왕릉 밀집지역인 서악고분군에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그 전면에 봉분 두 기가 붙었으니, 하나는 김춘추 9세손으로 신라 하대 인물인 김양(金陽)이 857년 향년 50세로 졸하고는 묻힌 곳이라고 하며, 다른 하나는 김춘추의 둘째아들 김인문(金仁問) 묘라고 전한다. 이 두 봉문 앞에는 몸돌과 머릿돌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그것을 받쳤을 거북 모양 받침돌만 덩그러니 남았으니 이를 서악동 귀부(龜趺)라 한다.


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서악동 귀부와 김인문 묘


 보물 제70호인 이 귀부에 대한 현지 안내판은 김인문 묘비를 받치던 것이라 기술한다.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역사학도 중에는 김양 묘와 함께 선 무덤을 김인문 묘라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이는 실은 김유신 묘이며 따라서 이 귀부는 김유신의 그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나로서는 따르기가 심히 힘들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김유신의 장송(葬送)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지에 기술되었거니와, 그 어디에도 그의 무덤이 무열왕릉 인근에 있다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악동 귀부의 귀두서악동 귀부의 귀두


 그 인근에 제작 연대가 확실한 태종무열왕비 귀부가 있으니, 그것과 비교할 적에 비슷한 시대 작품임이 분명한 느낌을 준다. 어떻든 김인문 묘비 귀부 중 머리 부분을 유심히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그 전면 땅바닥 쪽에서 이 귀부를 올려다보면 남자의 성기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점을 알아챌 것이다. 하기야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거북 머리를 ‘귀두(龜頭)’라고 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생김새가 이 성기의 꼭지 부분과 유난히 상사(相似)한 데서 비롯한다. 쭈글쭈글한 목덜미 주름은 흡사 포경수술 하지 않은 남자 성기의 껍데기가 뭉친 모습이고, 돌출한 머리는 완연히 귀두 그것이다. 귀두와 다른 점은 오직 두 눈만 표현했다는 데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사정은 그 인근 서악동 고분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오른편 비각(碑刻) 안에서 만나는 태종무열왕비에서도 사정이 마찬가지다. 이 귀부가 그 전면 김인문 묘의 그것과 다른 점은 거북 받침돌 말고도 사람으로 치면 머리 혹은 모자에 해당하는 이수(螭首)도 비교적 온전한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았다는 사실이다. 사실 이 이수가 압도적인 느낌을 주거니와 그 장식이 무엇보다 찬란하기 때문이다. 역시 왕의 그것에 어울리는 장식이라 할 만하다. 그런 까닭에 그 전면 김인묘 귀부는 문화재 지정 명칭이 ‘서악동 귀부’인데 견주어 이는 ‘경주 태종무열왕능비’가 정식 명칭이다. 그렇지만 이에도 문제는 없지 않아, 사람으로 치면 발바닥과 머리 부분만 남고 정작 몸통에 해당하는 비신(碑身)은 달아났으니 말이다. 


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태종무열왕비 귀부와 태종무열왕릉


 이를 갈라보면 귀부는 길이 약 3.33m에 폭 2.54m이며, 이수는 높이 약 1.1m다. 이수에는 여섯 마리 용이 좌우에서 세 마리씩 엉킨 채 여의주를 문 모습을 연출했으니, 그 자태는 보는 이의 찬탄을 자아낸다. 이수 전면 중앙에는 이 무덤 주인공을 밝히는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왕지비)’라는 글자를 전서(篆書)체로 양각했으니, 글씨는 그의 아들 김인문이 썼다고 하지만 확실치는 않다.  


 장방형 기단돌 위에 올려 앉은 귀부의 거북은 이런 비석에 사용하는 비석에서는 으레 그렇듯이 네 발을 쫙 벌린 채 엎드린 자세로 고개를 쳐들고 입은 다문 채 전면을 응시한다. 머리는 전면에서 선 채로 바라보면 사각에 가까워 뱀의 그것을 연상케 하기도 한다. 한데 이 거북 머리를 측면, 혹은 전면 바닥에서 쳐다보면 역시나 ‘귀두’다. 목덜미에는 부처님의 그것처럼 삼도(三道)를 표현했다. 콧구멍 두 개는 완연하거니와, 옆으로 다문 입술 표현 역시 섹슈얼 코너테이션(sexual connotation)이 짙다. 


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태종무열왕릉비의 귀두



2. 음경을 대신한 거북 대가리 


 요즘 내가 휴대하고 다니면서 다시 읽는 문고본 중에 《일본인의 사랑과 성》이 있다. 일본 와세다대 교수를 역임한 일본 근세 문학 연구가 데루오카 야스타카(暉峻康隆. 1908~2001) 원저로 단국대 인문학부 정형 교수가 번역해서 한림대 일본학연구소가 기획한 ‘한림신서 일본학총서’ 60권째로 국내에서는 2001년 10월에 초판이 도서출판 소화에서 나왔다. 이 초판을 독서대본으로 삼거니와, 이 책은 아마도 국내 출판 직후인지 그 얼마 뒤에 서점에서 우연히 보고는 제목이 마음에 들어 손에 들었다가 순식간에 일독한 기억이 있다. 데루오카는 가고시마 현 태생으로 와세다대 문학부를 졸업하고 모교 교수로 부임해 그곳에서 오래도록 봉직하다가 퇴임 뒤에는 명예교수가 되었다고 한다. 보니 그 일본어 원서는 ‘日本人の愛と性’이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유서 깊은 출판사인 이와나미서점(岩波書店)에서 1989년에 초판이 나왔다 한다. 


 제목 그대로 일본문화에서 사랑과 성 관념이 어떻게 변해왔는지를 참으로 평이하지만 유려한 문체로 그려냈다. 이런 문체로 일본 학계가 내놓은 저작 중에 기념비적인 것으로 이시다 미노스케의 《장안의 봄》(국내에서는 이동철·박은희 번역으로 2004년 도서출판 이산에서 출간)이 있거니와, 그에 견주어 데루오카 이 책 역시 그에 못지않은 역작이다. 책 전편에 걸쳐 데루오카는 헤이안 시대 이전으로 사랑과 성 문화가 돌아가야 함을 역설하거니와, 간통죄가 대표하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 이래의 성에 대한 억압 체계에는 시종 비판적이다. 


 이에는 13세기 중엽, 호조 도키요리(北條時賴) 집권시대에 성립한 《고금저문집(古今著聞集)》이라는 설화집 중 제16권에 나오는 다음 이야기 하나를 그 시대 성 풍조를 증언하는 자료로 소개한다. 이야기의 원활한 전개를 위해 내가 번역문 문장을 조금 가다듬었다.


옛날 조정에서 잡무를 담당하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그의 아내는 유난히 질투가 강해 그 때문에 항상 괴로워했다. 어느 날 남편이 궁리 끝에 거북이 한 마리를 구해 그 목을 12센티미터 정도로 잡아 빼내고는 잘라 종이에 감추어 두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다시 아내의 질투로 말다툼을 하게 되자 남편은 “이렇게 싸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이 물건 때문”이라 하고는 허리에 찬 작은 칼을 꺼내어 앞을 걷어 올리고는 자기 마라(魔羅)를 자르는 척하며 품안에서 거북이 목을 꺼내어 내던졌다. 아내는 몹시도 기분이 언짢아하며 그것을 집어 들고 물러났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내가 한가로이 앉아 바느질을 하는데 무릎을 세우고 앉은 다리 가랑이 사이를 보니 검은 천 조각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그 검은 천은 무엇이오”라고 물으니 아내는 “아니, 별 것 아니에요”라고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남편이 줄곧 다그쳐 묻자 그제야 아내는 마지못하면서 “숨겨도 소용없으니 사실대로 말씀드리지요. 이 검은 천은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입니다”라고 했다. 어안이 벙벙한 남편이 “고인이라니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라고 반문하자 부인은 “지난번 잘려 고인이 되어 버린 마라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제 음부에 상복을 입혀야 한다고 생각했기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는 “세상에 별난 상복(喪服), 재미는 있는 일이야”라는 말로 끝난다. 남편이 자신의 그것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실제로는 거북이 대가리로 대체한 ‘마라’는 무엇인가? 그 정확한 의미를 지금 단계에서는 모른다 해도 볼 짝 없이 음경(陰莖)이다. 이 말은 원래 불교를 타고 넘어온 범어다. 즉, 불교에서는 ‘수행을 방해하는 악마’가 바로 이것이니, 아마도 성욕이 그런 기능이 있다고 보아 남근(男根)을 지칭하는 은유로 일본에서는 사용하기 시작한 것 같다. 로마나이즈 하면 ‘māra’이며 ‘魔羅’ 혹은 ‘摩羅’ 등으로 표기한다. ‘魔’에는 그 자체 악마라는 뜻이 있으니, 전자가 더욱 그럴 듯한 번역어라는 느낌을 준다. 남편이 잘라낸 이 마라, 실제는 거북 대가리를 그 아내가 검은 천으로 싸서 다녔다는 말은 그것을 주검으로 간주해 입힌 상복이라는 뜻이며, 더구나 그것을 음부에 싸서 다녔다고 하니, ‘귀두’가 가야 할 곳은 음부 말고 어디가 있겠는가? 


 이 관리가 잘라낸 거북 대가리는 길이를 12센티미터라 했는데, 당시에 일본에 미터법이 있었을 리는 만무하니, 이는 데루오카가 틀림없이 당시에 쓰던 단위를 현대 미터법으로 환산한 수치일 터이다. 유감스럽게도 내가 그에 해당하는 원문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그건 그렇고 12센티미터라는 환산치가 정확하다고 가정할 때 더 재미있는 사실은 이것이 실은 한·중·일 성인 남성의 평균 음경 길이라는 점이다. 고교 학창 시절에 30센티미터 대나무 자로 자기 음경을 잰 어떤 친구가 22센티미터라고 해서 한바탕 웃은 일이 있는데, 항문 쪽에서 잰 길이였다. 그 놈 말이 더 가관이었는데, 음경 뿌리가 거기에서 시작하니 거기에서 재야 한다나 어쩐다나 한 기억이 있다.  


 앞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데루오카는 “남근의 끝을 귀두(龜頭)라고 하니 자못 그럴싸한 이야기다”라고 말한다. 이 이야기가 나온다는 《고금저문집》이 궁금해 내가 조금 더 찾아보았더니, 가마쿠라(鎌倉)시대 사람으로 이하(伊賀)라는 지방을 다스리는 지방관인 이하수(伊賀守)를 역임했지만 정확한 생몰년은 미상인 다치바나노 나리스에(橘成季)가 편찬한 설화집으로 간단히는 ‘저문집(著聞集)’이라고도 한다. 제목을 풀면 ‘옛날과 지금 있던 일로서 들은 이야기 모음집’ 정도를 의미한다. 전체 20권 30편으로 목차가 편제됐으며, 이에 수록한 이야기는 총 726개. 건장(建長) 6년(1254) 10월 무렵에 대략 완성을 보았다가 나중에 보완되었다고 하며,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우치습유물어(宇治拾遺物語)》와 더불어 일본 3대 설화집으로 일컫는다. 


 이로써 실제의 거북 대가리 귀두가 남근의 대가리로 인식되기도 했다는 내 말은 여실히 증명되었다고 본다. 나아가 구지가(龜旨歌)는 귀두가(龜頭歌)였음도 싱겁게 드러났다고 본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이에 대해 강진아 선생의 다음과 같은 논평이 있었다.(2018.7.18)  


마라mara는 팔리pali어입니다. 팔리어는 인도 초기불교경전에서만 발견되는 범어의 방언 중 하나입니다. 팔리경전은 붓다생전부터 기원 일세기까지 오백년에 걸쳐 형성되었고, 이 중 맨 나중에 형성된 논장을 제외한 경장과 률장에는 약 오십여개의 길고 짧은 다양한 구성의 마라신화가 담겨있습니다. 제가 공들인 논문 주제입니다. 범어로는 무르티유Mrtyu입니다. 리그베다에 나오는 죽음의 신 야마 Yama가 후기에 속하는 카타 우파니샤드에서 무르티유Mrtyu와 결합하여 죽음의 나라를 다스리는 야마무르티유 Yama Mrtyu가 됩니다.(r밑에 ㆍ점있는 r입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의 성gender이 불분명합니다. 단어 자체는 남성이지만 범어나 팔리어에서는 문법적인 이유로 성을 구분하는 것에 불과해서요. 명사의 어미가 24가지로 바뀌는데 남성형ㆍ여성형이 있는거죠. 오히려 마라는 정체를 바꾸는 기술이 있어서 여자 혹은 남자로 둔갑을 잘 합니다. 초기경전에는 마라를 음경과 동일시한 경우는 없습니다만 이야기의 정황상 '정액'이 아닐까 추측을 하게끔 하는 경우는 꽤있습니다. 붇다나 출가승이 명상수행할 때 비..가 내리면 꼭 마라가 나타나거든요. ㅋㅋ 저 일본책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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