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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고려 때에는 다섯 성(省)에 일곱 추(樞)가 있어 재상의 숫자가 적었으므로 서로 번갈아 가면서 직책을 제수하였기 때문에, 벼슬은 높아도 한직에 있는 자가 반수나 되어 70이면 반드시 치사하였고, 연령을 숨기고서 치사하지 않는 자는 여론이 나빴다. 그렇기 때문에 나이가 비록 70이 되지 않았더라도 인끈을 풀고 퇴직을 원하는 자가 많았다. 본조 개국 이래로 비록 치사하는 법이 있었으나 높고 낮은 관원들이 녹을 탐하여 연한을 무릅쓰고 그대로 벼슬하는 자가 거의 전부였다. 요즈음 사헌부에서는 나이가 심히 많은데도 억지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를 미워하여 해당 부처에 공문을 보내어 연령을 상고하여 탄핵하려 했다. 내가 말하기를, “송나라 한위공(한기(韓琦))이 국정을 주관하고 있을 때, 조정의 관원 중에 나이 70이 넘어도 치사하지 않는 자가 있어 동렬들이 이를 탄핵하려 하니 위공이 말하기를, ‘나이를 숨기고 치사하지 않는다면, 과실이 저쪽에도 있지만 남이 은폐하는 일을 심통스럽게 지적하여 죄 망에 둔다면 우리 또한 어찌 잘하는 일이랴.’ 하였더니, 얼마 안 되어 그 관원이 부끄러워하며 치사하고 갔다 한다. 위공의 큰 아량을 우리들은 마땅히 본받아야 할 것이다.” 하니, 그 논의가 드디어 중지되었고, 이로부터 나이 많은 자가 점점 치사하게 되었다.

때 되면 깨끗이 물러나라. 추잡스럽다. 버티다가 패가망신한 이가 내가 몸담은 공장에 최근에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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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수찬 성간(成侃)은 어려서부터 널리 보고 많이 기억하며 읽지 않은 서적이 없었으니, 경사(經史)로부터 제자백가와 천문ㆍ지리ㆍ의약ㆍ복서(卜筮)ㆍ도경(道經)ㆍ석교(釋敎)ㆍ산법(算法)ㆍ역어(譯語)의 모든 법을 두루 섭렵하였으며, 사대부나 붕우의 집에 희귀한 서적이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반드시 구해보고야 말았다. 내가 집현전에 있을 때에, 성간이 장서각 속에 있는 비장 본을 봤으면 하고 원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궁중 비장 본은 경솔히 외인에게 보일 수 없다.” 하고, 난처해했다. 하루는 혼자서 연일 숙직하고 있었는데 홀연히 기침하는 소리가 들리므로 돌아보니 바로 성간이었다. 비장도서 보기를 더욱 간절히 청하므로 비로소 허락하였더니, 밤새도록 등불을 켜고 한번도 눈을 붙이지 않고 거의 다 열람하였는데, 뒤에 장서각 속의 서적 체제와 권질(卷帙)을 말하는 데도 또한 조금도 착오가 없었다. 그 후 10년 후에 성간이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들어왔는데, 항상 장서각 속에 파묻혀 좌우 서적을 밤낮으로 다 열람하니, 동료들이 책을 너무 좋아하는 성벽(性癖)이 있다고 놀렸다. 그러나 독서에 과로하여 몸이 여위고 파리하게 되어 나이 30에 죽었으니, 참으로 애석하다.

미친 듯한 독서열은 한 젊은이 목숨을 앗아갔다. 

미친듯이 시에 혹닉하다 요절한 중당의 천재시인 이하李賀가 자꾸만 오버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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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어떤 사람이 내게 묻기를, “중국에서는 불교와 도교(道敎)가 병행하고 있으나 도교가 더욱 성하고, 우리나라에서는 불교는 비록 성하나 도교는 전무한 형편이다. 만약 두 개의 교가 병행한다면 나라는 작고 백성은 가난한데 장차 어찌 견디겠는가.” 한다. 내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소격서(昭格署)와 마니산(磨尼山) 참성(塹城)에서 지내는 초제(醮祭)같은 것은 곧 도가의 일종이다. 서울과 지방을 통하여 항간에서 도가의 복식을 입고 도가의 말을 하는 사람은 없으나, 사대부 집에서 매년 정월에 복을 빌고, 집을 짓고 수리하는 일에 재앙을 제거하려고 비는데도, 반드시 맹인 5ㆍ6ㆍ7명을 써서 경(經)을 읽는데, 그 축원하는 바가 모두 성수(星宿 성신)와 진군(眞君 신선의 존칭)의 부류이며, 거기에 제공되는 비용이 적지 않으니, 우리나라에 도교가 행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일을 잘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맹인들이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것은 옛 사람에게서 본 바 없고, 중국에서도 행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나라 시속에서 서로 전수되는 하나의 고사이다.”라고, 말하였다.

한국엔 도교가 없다고? 천지사방이 도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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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무절공(武節公) 신유정(辛有定)이 일찍이 왜적을 맞아 여러 번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는데, 왜적이 꿇어앉히고 목을 베려고 했다. 이때 무절공은 왜적의 두 다리 사이에 낭 신이 축 늘어진 것을 보고 갑자기 손으로 잡아당기니, 적이 땅에 엎어지는 것을 칼을 빼어 목을 베었다. 당시에 그를 맹장이라 일컬었는데, 뒤에 병사(兵使)가 되어 변방을 진압하니 용맹과 공업(功業)으로 저명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너무 급하여 남의 옳지 않은 것을 보면 반드시 심하게 꾸짖은 뒤에야 끝맺었다.

辛武節公有定嘗遇倭賊。賊將跪而斬之。武節見賊兩脚間腎囊嚲下。猝以手拉之。賊踣地。抽劍斬之。時稱猛將。後杖鉞鎭邊。以武烈著稱。然性大急。見人不可。必極口怒罵而後止。孫文僖公碩祖每曰。鑑祖性急。佩韋自警。嘗修史春秋館。與一下僚。同事筆硯。下僚悤遽間顧吏高聲語曰。辛碩祖將硯水來。旋卽慙赧低頭不能仰視。文僖遽前執手曰。我輩少時失言於先生長者前。豈止此耶。卽呼酒來。滿酌對飮。人服其弘量。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딱 하나다. 불알을 함부로 보이지 말란 것이다. 불알 함부로 보였다는 목숨까지 잃었다니 말이다. 그런 불운한 사나이 왜놈은 훈도시를 걸쳤을까? 아님 속곳이 타졌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 신유정 항목을 검출했다. 이에 의하면 시호가 무절(武節)인 그는 1347년(충목왕 3)에 태어나 1426년(세종 8)에 몰했다. 본관은 영산(靈山), 혹은 영월이니 지금의 창녕이다. 의주도병마사, 충청도병마도절제사, 평안도도안무사를 역임한 무인이다. 

아버지는 판개성부사 신부(辛富)이니,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1386년(우왕 12)에 정용호군(精勇護軍)이 되어 족형인 충청도도원수 이승원(李承源) 휘하에서, 남해에 출현하여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크게 용맹을 떨쳤다. 그 뒤 이성계(李成桂) 휘하에서 무공을 세워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이성계가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그를 시종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어 크게 총애를 받았다. 1397년(태조 6)에 이산진첨절제사(伊山鎭僉節制使)가 되었고, 1400년(정종 2)에 왕세제가 된 이방원(李芳遠: 후의 태종)의 추천으로 봉상시판관(奉常寺判官)이 되었다. 

이어 공조·예조·형조 전서(典書)를 역임하였으며, 1403년(태종 3)에 강원도에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는 왜구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판강릉대도호부사(判江陵大都護府事) 겸 좌군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가 되었다.

1407년에 의주도병마사가 되었고, 1410년에 야인 우디거(兀狄哈)가 경원에 침입하자 좌군도총제(左軍都摠制)로 부원수가 되어 도원수 조연(趙涓)과 함께 출정하여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충청도병마도절제사·평안도도안무사가 되었다. 1415년에 병으로 사임하였다.

성품이 강직하여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였으며, 가난할 때나 부유할 때나 하루 두끼만 먹었다고 한다. 시호는 무절(武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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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일본(日本)의 대내전(大內殿)은 그 선대가 우리나라로부터 나왔다 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보통과 다르다 한다. 내가 일찍이 널리 전대의 역사책을 상고해 보아도 그 출처를 알 길이 없고, 다만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에 이르기를, “동해 물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迎烏)라 하고 아내는 세오(細烏)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해변에서 수초[藻]를 따다가 홀연히 표류하여 일본 나라 조그만 섬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다. 세오가 그 남편을 찾다가 또 표류하여 그 나라에 이르자 그를 세워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으니, 일관(日官 천문 맡은 관원)이 아뢰기를, ‘영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였는데,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괴이한 현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영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이른 것은 하늘이 뜻이다.’ 하고, 드디어 세오가 짠 비단[綃]을 사자에게 붙여 보내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면 된다.’ 하였다. 드디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을 영일(迎日)이라 이름하고 이어 현(縣 고을)을 두니, 이는 사라아달왕(斯羅阿達王) 4년이었다.”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의 임금이 된 자는 이 뿐이나 다만 그 말의 시비는 알 수 없다. 대내의 선조란 혹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 대내씨(大內氏)는 일본 장문(長門) 지방을 지배하던 호족(豪族)이었다. 전(殿)은 그들을 존칭하는 말인데 옛날 사람들이 일본 풍속을 몰라서 존칭까지 붙여 말한 것이다.

뭐 말할 것도 없이 사가정이 말하는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는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다. 한데 이 필원잡기 대목이 중대한 까닭은 그 출처를 사가정이 신라수이전을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는 출처 기록이 없다고 기억한다. 

내가 항용 역사를 대하는 자세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하는 것이 덮어놓고 선대 문헌에 보이는 기록이면 후대 문헌이 그 선대 문헌을 채록했다고 안이하게 간주하는 현상이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가 신라수이전을 언급 안했다고 하면, 틀림없이 사가정이 채록한 이 이야기는 출처를 삼국유사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사가정이건 일연이건 같은 수이전을 놓고 인용한 것이다.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여장남자(女裝男子), 혹은 여성으로 행세하면서 많은 여성을 기롱한 남자 얘기가 보인다. 이 남자가 바로 사방지(舍方知)라는 자인데, 이 자가 가슴은 여자, 아랫도리는 남자인 소위 shemale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관련 기록을 추리면, 남성인데 여성으로 행세한 단순 남성인 듯한 느낌을 준다. 한데 그 극적 드라마성 때문인지, 이를 모델로 하는 사극 같은 것을 보면, 가슴은 젖소만하고, 아랫도리는 남자인 양성으로 그려지는 일이 많다. 이 사방지가 내 기억에 아주 옛날 TV 사극에도 등장한 적이 있거니와, 사방지로 출현한 인물은 가수 전영록의 이혼한 조강지처가 아닌가 한다. 

근래에 한 사내종 모습이 여자와 흡사한 자가 있었다. 이 사내종은 어려서부터 여자 옷을 입고, 나이 40이 넘도록 사대부 가문에 출입하다가 이 사실이 드디어 탄로되었다. 대간이 법에 의해 논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세조(世祖)는 일이 애매하다 하여 이를 용서하고, 나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의 의사는 어떠하냐.” 하니, 나는 대답하기를, “신이 소시 때에 《강호기문(江湖記問)》을 열람하였는데, 강회(江淮) 사이에 한 비구니(比丘尼)가 수(繡)를 잘 놓았으므로 양가(良家)에서 딸을 보내어 배우게 하였더니, 돌연 임신을 하였습니다. 부모가 이를 힐책하니, 딸은, ‘비구니와 더불어 날마다 서로 잠자리를 같이하자 성(性)의 감각이 있는 것 같더니 드디어 이에 이르렀습니다.’ 하였습니다. 양가에서 지방관에 호소하여 비구니를 자세히 조사해 살펴보니, 음양(陰陽) 두 생식기가 모두 없었습니다. 지방관이 장차 이를 관대히 용서하려 하자, 한 늙은 할미가 말하기를, ‘소금물로 양경(陽莖 자지) 뿌리 위를 적신 다음 누런 개를 데려다가 이를 핥게 하면 양경이 튀어나옵니다.’ 하므로, 지방관이 시험하니 과연 그러하였습니다. 지방관이 판단하여 말하기를, ‘천도(天道)에 있어서는 양과 음이요, 인도(人道)에 있어서는 남자와 여자이다. 이제 이 비구니는 남자도 아니며 여자도 아니니, 인도의 바른 것을 어지럽히는 자이다.’ 하고 마침내 죽이니, 강회 사람들이 모두 통쾌하게 여겼다 하오니, 대개 천하의 사리(事理)가 무궁함이 이와 같사옵니다.” 하였더니, 세조는 웃으며 말하기를, “경은 부디 억지로 무슨 일을 밝히려고 하지 말라.” 하였다.

유의할 대목은 이에서는 사방지라는 실체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조선 중종 때 인물로 율곡 이이보다는 선배임이 확실한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 권1에는 이보다 상세한 버전이 있다.  

점필재(佔畢齋) 김문간공(金文簡公 김종직)이 사방지(舍方知)에 대한 시를 지었는데, 그 서문에 이르기를, “사방지는 사천(私賤)으로 어려서부터 그의 어미가 계집애의 옷을 입히고 연지와 분을 칠하고 바느질을 시켰다. 장성하자 자주 사대부(士大夫) 집에 드나들면서 여자종들과 함께 자는 일이 많았다. 진사(進士) 김구석(金九石)의 아내 이씨는 판원사(判院事) 이순지(李純之)의 딸인데, 과부로 지내면서 사방지를 데려다가 바느질을 시키고 밤낮으로 거의 10여 년이나 함께 거처하였다. 천순(天順) 7년 봄에 사헌부에서 이 사실을 듣고 그를 국문하여 그가 평소에 사통(私通)하던 한 여승(女僧)을 심문하니, 여승이 말하기를, ‘그의 남경(男莖)이 매우 장대(壯大)하더라.’ 하므로, 여의사 반덕(班德)으로 하여금 더듬어 만져 보게 하였더니 과연 그러하였다. 임금이 승정원 및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하성위(河城尉) 정현조(鄭顯祖) 등에게 알아보게 하였는데 하성위의 누이가 이씨의 며느리였다. 하성위도 말하기를 ‘어쩌면 그리도 장대하냐.’ 하니, 임금이 웃고 이순지의 가문을 더럽힐 염려가 있으니 따지지 말라고 특명을 내렸다. 사방지를 이순지에게 넘겨 주어 처리하게 하였는데, 이순지는 다만 곤장 10여 대만을 치고 기내(畿內)에 있는 노복의 집으로 보냈다. 얼마 안 되어 이씨가 몰래 사방지를 도로 불러들여 이순지가 죽은 뒤에 더욱 마음대로 놀아났다. 금년 봄에 재상들이 연회 석상에서 이 사실을 아뢰니, 임금이 사방지에게 매를 치고 신창현(新昌縣)으로 귀양보냈다.” 한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시 두 수를 짓기를,

아녀자의 깊숙한 방에 몇 번이나 몸을 숨겼는고 / 縫羅深處幾潛身

치마와 비녀 벗기니 문득 탄로되었네 / 脫却裙釵便露眞

물건이 본래 변환하니 / 進物從來容變幻

세상에는 양성을 가진 사람이 있구나 / 世間還有二儀人

또 다음과 같이 읉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산파에게 물을 필요 있으랴 / 男女何煩問産婆

여우굴 있는 곳에는 민가가 망하는 법 / 妖狐穴地敗人家

거리에서는 하간전을 시끄럽게 외우고 / 街頭喧誦河間傳

규방에서는 양백화를 슬피 노래 부르네 / 閨裏悲歌楊白華

사방지의 불알은 늘 살 속에 간직되어 있었으므로 양성인(兩性人)이라는 말이 생겼는데, 사가(四佳)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자세히 적혀 있다. 내가 일찍이 의주(義州)의 갑사(甲士) 최한수(崔漢壽)의 집에서 암말을 보았는데, 그 음부(陰部) 안에 양경(陽莖)이 있어 졸아들면 안으로 감추어지고 일어서면 밖으로 나오며 양경으로 오줌을 누었다. 봄이 되면 암말을 따라다니나 그 양경이 뒤로 향하여 있으므로 서로 교미(交尾)는 할 수 없었다. 만약 숫말이 다가오면 발로 차서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 물리(物理)의 알 수 없음이 이쯤 되니, 사람으로 말하면 사방지의 부류(部類)라고나 할까. 그러니 둘이 다 만물 중의 요물(妖物)인데, 사방지는 게다가 여자를 범하였으니 말보다 심한 자이다.” 했다.

佔畢齋金文簡公。作舍方知詩。其序曰。舍方知私賤也。自幼其母爲女兒服。傳脂粉學翦製。及長頗出入朝士家。多與女侍同寢。進士人金九石妻李氏。判院事純之之女也。寡居引舍方知。托以縫衣。晝夜與處幾十餘年。天順七年春。司憲府聞而鞫之。逮訊其素所通一尼。尼曰。陽道甚壯。令女醫班德捫摸。果然也。 上令承政院及永順君溥河陽尉鄭顯祖等雜驗之。河城之妹。爲李氏媳婦。河城亦吐舌曰。何其壯也。 上笑之。特令勿推曰。恐汚衊純之之家門也。將舍方知與純之區處。純之只杖十餘。送于畿內奴子家。旣而李氏潛召舍方知還。純之卒後。又縱恣不已。今年春。宰樞因燕語白之。 上杖配舍方知于新昌縣。余聞之賦二首云。縫羅深處幾潛身。脫却裙釵便露眞。進物從來容變幻。世間還有二儀人。又云。男女何煩問產婆。妖狐穴地敗人家。街頭喧誦河間傳。閨裏悲歌楊白華。蓋舍方知其外腎常藏在肉裏。故有二儀人之語。詳見四佳筆苑雜記。余嘗見義州甲士崔漢壽家有雌馬。其陰戶中有陽莖。每痿則隱於內。起則出於外。從莖口放尿。遇春月逐雌馬往來。而以其莖勢向後。故不能合焉。若雄馬來。則又蹄之使不近。物理之不可知至此。以人而言。其舍方知之類歟。然二者皆物之妖。而舍方知又有所犯。則抑有甚於馬也歟。

이 사건 전개 과정은 실록에 있으니, 참고 바란다.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문충공 신숙주가 일찍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데, 우리 국경에 몇 리(里) 남짓하게 왔을 때, 홀연 폭풍을 만나 배를 미처 언덕에 대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이 모두 놀라서 어쩔 줄을 몰랐으나 공은 정신과 안색이 태연자약하여 말씀하기를, “대장부는 마땅히 사방에 유람하여 흉금을 넓혀야 한다. 지금 큰 물결을 건너서 해 뜨는 나라를 보았으니, 족히 장관(壯觀)이 될 만하다. 만약 이 바람을 타고 금릉(金陵 남경)에 닿게 되어 산하(山河)의 아름다운 경치를 실컷 본다면 이 또한 하나의 장쾌한 일이다.” 하였다.

그때 왜적에게 포로가 되었던 백성을 데리고 오는 중인데 임산부가 배 안에 있었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임산부는 예로부터 뱃길에는 크게 금기시하는 바이니, 마땅히 바다에 던져서 액을 막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공이 말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살기를 구함은 덕(德)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다.” 하고, 굳이 만류하였는데 잠시 후에 바람이 진정되었다.

문충공이 처음 과거에 올라 집현전에 뽑혔는데, 하루는 당직이 되어 장서각(藏書閣)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덧 시간이 삼경이 지났다. 세종(世宗)께서 낮은 환관을 보내어 엿보게 하였더니, 단정히 앉아서 글을 읽고 있었으며, 사경이 되었을 때 또 보내어 엿보게 하였는데, 이와 같이 하고 있었다. 이에 어의(御衣)를 주어서 장려하였다.

내 기억에 이 사건은 신숙주의 일본 사신단 유람기인 해동제국기에도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에서 보이는 일화를 주목해야 하는 까닭은 임신한 여자를 바다에 빠뜨려 해신海神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하는 습속이 희미하게나마 당시 뱃사람들에게 남아있었다는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대략 백년 뒤 중국 청나라로 해상 조공을 떠난 조선사신단 이야기에도 비슷한 관습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꽤 인신공희 혹은 인신공양이 강고한 전통을 유지했음을 엿본다. 

요컨대 인당수에 용의 노여움을 달래고자 희생된 심청의 선배들이다.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진이 다른 점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 증언은 《고려사》 찬수에 직접 관여하거나, 혹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큰 인물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시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그의 항목에 의하면 남수문은 1408년(태종 8)에 나서 1442년(세종 24)에 사망했으니, 요절에 가깝다. 본관이 고성固城인 그는 字를 경질(景質), 경소(景素)  혹은 경재(敬齋)라 했으며, 집현전 부수찬, 집현전 응교,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했다 했으니, 주로 문한文翰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라는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다. 1433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 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의 발문도 썼다. 그 뒤 예문관 응교·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전(箋)·기·묘지 몇 편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남수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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