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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흔히 국립공원으로 아는 대부분은 실은 문화재이기도 하다. 정확한 통계치는 없는데 국립공원 구역 전체 40% 정도를 문화재가 침탈한 상황이다.국립공원과 같은 환경자원은 문화재보호법상 명승 혹은 천연기념물 지정 대상이다.


명승名勝..이게 참으로 묘해서 2000년 이전까지는 전국에 걸쳐 명승으로 지정된 문화재는 5군데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유홍준이 문화재청장으로 재직한 시절에 자연유산 바람을 타고서 대대적인 영역 확장을 꾀해 지금은 백 곳을 넘었다. 이에 의해 북한산 역시 중요한 부분은 문화재보호법상 명승이기도 하다. 명승만이 아니라 국립공원 내 사찰 같은 곳은 대부분 문화재보호구역이다.


설악산 역시 상당 구역이 국립공원이면서 천연기념물 보호구역이며 명승이다. 더욱 정확히 말하면 설악산은 전체가 천연기념물 171호(설악산천연보호구역)이며, 그 안에 다시 명승이 지정된 상태다.


그 구체적 내역을 보면 명승 제95호(비룡폭포 계곡 일원), 명승 제96호(토왕성 폭포), 명승 제97호(대승폭포), 명승 제98호(십이선녀탕 일원), 명승 제99호(수렴동, 구곡담 계곡 일원), 명승 제100호(울산바위), 명승 제101호(비선대와 천불동 계곡 일원), 명승 제102호(용아장성), 명승 제103호(공룡능선), 명승 제104호(내설악 만경대)가 그것들이다.


이곳에 케이블카를 개설한다 했을 때 내가 분명히 경고한 적이 있다. 환경부를 통과해도 결국엔 문화재위원회에서 걸릴 것이라고. 이것이 최대 걸림돌이 된다고 경고했으며, 실제로 그리되었다.


이 걸림돌을 가능케 한 외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으니, 이를 밀어붙였다고 간주되는 박근혜가 개털이 되어 탄핵되자 문화재위와 문화재청에 압력을 가할 주체가 중력을 상실해 버렸다. 저런 케이블카...문화재를 모르는 사람들은 환경부 통과가 전부인 줄 알았겠지만, 정신 제대로 박힌 문화재위라면 절대로 통과시켜 주지 아니한다.


나는 여러 번 말했듯이 주요 명산에 케이블카를 놓자는 사람이다. 그 이유를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아니하거니와, 그것과 관련 없이 저 계획 자체를 문화재위와 사전 조율도 없이 밀어붙인 것은 분명한 패착이었다. 문화재위가 그런 곳이다. 그런 까닭에 문화재위는 항용 욕 되바가지로 먹지만, 그것은 어쩌면 문화재를 지키는 마지막 보루이기에 그 순기능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문화재로서의 설악산. 
이것이 큰 사회 문제로 대두하기는 두번째다. 첫번째가 1996년 무렵 세계유산 등재 때이니, 다른 근간의 이유가 많기는 하지만 무엇보다 현지 주민들이 개떼처럼 일어나 반대를 한 까닭에 결국은 세계유산 등재가 무산되고 말았다.


시대가 이리 될 줄 몰랐겠지. 지금은 세계유산 못 만들어 환장한 시대인데, 그때 세계유산 만들었더라면 설악산은 지금과 또 사뭇 풍광이 달라, 다른 모든 것 다 때려치고 결국 이번에 케이블카를 놓자는 주의가 표방하는 진정한 이유, 곧 돈벌이와 이를 통한 지역 경제 활성화는 따논 당상이었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점은 반대 주체가 다르다는 점이다. 


세계유산 등재 움직임에는 속초가 벌떼처럼 일어났지만, 이번에는 양양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난다. 
설악산 구역 상당수를 속초가 차지하는 까닭에 그랬던 것이며, 이번 케이블카 찬성론자가 양양에 득시글거리는 이유는 그에 따른 수혜 지역이 양양이기 때문이다.


문화재다. 
국립공원도 문화재라는 사실, 이걸 잊어서는 안 된다. 독도 역시 대한민국 문화재다. 겨울철이면 민통선으로 날아드는 몽골고원 독수리도 문화재다. 운석 역시 괜찮은 것이 떨어지는 날이면 그것 역시 문화재다. 문화재는 육상 수중 공중 어디에나, 심지어 우주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신임 문화재청장을 첫날 수행하는 문화재청 담당자는 항상 신임 청장을 모셔오면서 하늘을 나는 새를 가리키며 "새도 문화재입니다"라는 교육부터 먼저한다는 말이 있다.(이 글은 작년 오늘 페이스북 포스팅이다) 


임진왜란 어간을 살다간 조선의 지식인 유몽인(柳夢寅)어유야담(於于野談)에 나오는 일화 중 한 토막이다.

예로부터 교화하기 어려운 이가 마누라다. 남자 중에 강심장인 사람이라도 몇이나 부인을 두려워 않을 수 있으리오? 옛날에 어떤 장군이 10만 병사를 이끌고 드넓은 들판에서 진을 치고는 동서로 나우어 큰 깃발을 세우니, 하나는 푸른색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색 깃발이었다. 장군이 이윽고 군사들에게 거듭 말했다.

마누라가 두려운 자는 붉은 깃발 아래 서고, 두렵지 않는 자는 푸른 깃발 아래 서라.”

10만 군사가 모두 붉은 깃발 아래 모여 섰는데 유독 한 놈만 푸른 깃발 아래 섰다. 장군이 전령을 시켜 그 이유를 물으니 답이 이랬다.

제 마누라가 항상 저에게 경계하기를 남자 셋이 모이면 반드시 여색을 논하니 남자 셋이 모인 곳에 당신은 일체 가지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하물며 지금 10만 남자가 모여 있지 않습니까? 이에 감히 마누라 명을 어기지 못해 푸른 깃발 아래 홀로 섰나이다.”

이에 수록된 또 다른 일화다.

나라가 화평한 시절, 향리들은 모두 제라립濟羅笠이라는 삿갓을 썼으니 백제·신라시대의 방립方笠이다. 유순(兪洵)한테는 아끼는 여종이 있으니, (제라립을 쓰는) 향리의 마누라였다. 유순이 일찍이 그 방에 몰래 들어가니 유순의 마누라가 몽둥이를 들고 따라 들어왔다. 유순이 벽에 계라립이 걸린 모습을 보고는 응겁결에 그 갓을 쓰고는 방바닥에 바짝 엎드리니 유순의 마누라가 향리인 줄 알고는 줄행랑을 쳤다.

마누라한테 얻어 텨져 눈탱이밤탱이 되어 출근했다가 동료들한테 개망신당한 관리 이야기도 나온다조선이 엄격한 부계 중심 사회요, 남성 중심이며, 가정에서 가장의 권위는 절대적이었다. 에헴 그의 말 한마디에 온 집안이 조용해졌다? 칠거지악? 글쎄, 그런 때도 있고, 그런 집안도 없지는 않았겠지만, 전반으로 보아 적어도 집안에서 지고지존 절대의 권위는 마누라요 어머니였다. 

 남자가 여자를 이긴 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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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 꿩이 많을까 아님 원앙이 많을까? 나는 원앙이 더 많다고 본다. 원앙이 이쁜가 꿩, 특히 숫꿩인 장끼가 이쁜가? 나는 후자가 낫다고 본다. 고기는 어느 쪽이 나을까? 원앙은 먹어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꿩은 죽여준다. 오죽하면 꿩 대신이 닭이라 했을까?


설날 떡국에는 꿩기미를 쓰야는 법이다. 하지만 꿩은 귀한 까닭에 그와 비슷한 품종으로 흔한 닭을 썼다. 그래서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이 나왔다. 여러 모로 꿩은 원앙보다 귀하다. 그럼에도 꿩은 그저그런 날짐승이요 원앙은 천연기념물이라 해서 문화재로 대접받는다. 

왜 이리 된 것인가? 뭔가 잘못 아닌가 말이다. 


명맥과 전승이 단절된 기술을 선진先進 혹은 고도高度로 오도誤導해서는 안된다. 고려청자...이를 재현할 수 없다지만, 냉혹히 말해 그 기술이 단절된 까닭은 더 이상 필요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 스스로가 버린 기술이었다. 

다뉴세문경...그것을 재현하고자 하는 무수한 시도가 있었지만 모조리 실패했다. 그렇다고 그 기술이 특별히 위대하다고 나는 보지 않는다. 그것을 만든 그들에게는 어쩌면 요즘의 우리에게는 종이접이로 만드는 비행기 수준이었을 수도 있다. 

고향 김천을 지키는 엄마가 닭을 키우지 않은지는 오래다. 옛날에는 많이 키웠으나, 닭똥 냄새 때문이다. 동물 똥 중에 냄새가 가장 고약한 것으로 닭똥만한 것이 없다. 하긴 닭을 포함한 조류 똥이 대체로 길짐승에 견주어 독하기는 하다. 

작년 이맘 때다. 설을 쇠러 고향집에 내려갔더니, 온 동네를 다 뒤져도 닭은 흔적도 없었다. 어찌된 일이냐 엄마한테 물었더니 조류독감 우려로 당국에서 다 잡아갔단다. 마리당 오만 원인가 오만 오천 원을 쳐주고 잡아갔단다. 발본색원이라더니 씨가 말랐다. 

이 조류독감은 문화재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데, AI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주범으로 철새가 자주 지목되고, 그런 철새 중에는 상당수가 문화재 중 하나인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까닭이다. 그런가 하면 텃새 혹은 한반도에 자생하는 날짐승 일부가 천연기념물이기도 하다. 집에서 기르는 날짐승 가축으로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인 충남 연산 오계(烏鷄)라는 검은 닭은 그 대표라 할 만하다. 

연산 오계는 조류독감이 터졌다는 소식만 전해지면, 어김없이 피난길을 오른다. 이와 관련한 비근한 소식 중 하나로 2012312일 연합뉴스가 대전발로 타전한 ‘<“AI 걱정 없다연산 오계 500마리 미리 피난>’이라는 제하 뉴스를 본다. 

(대전=연합뉴스) 김준호 기자 = “올해부터 상시 피난체제로 전환하면서 조류인플루엔자(AI) 걱정은 한시름 놓게 됐습니다.” 12일 오전 AI 양성 반응이 나온 충남 계룡의 한 토종닭 농장에서 불과 3.8떨어진 논산시 연산면 화악리의 지산농원(대표 이승숙·49·). 이곳에서는 천연기념물 제265호인 연산 오계(일명 오골계)’ 1천여 마리가 사육되고 있다. 

전날 계룡에서 AI가 발생한 사실을 통보받았다는 농원 측은 마당 등지에서 방목해 기르던 오계를 모두 축사 안으로 몰아넣은 뒤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는 등 방역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계룡에서 발생한 AI가 고병원성으로 판정될 경우 연산 오계는 약 30~40여 일 동안 이동제한 조치를 받게 된다. 다행히 예방적 살처분 매몰 조치는 피할 수 있는 거리이다. 하지만 이 농원의 반경 1내에 오리와 닭을 기르는 대규모 농장 2곳이 있어서 AI가 확산하면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최악에는 오계 1천여 마리가 모두 살처분 조치될 수도 있다. 천연기념물이 멸종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산농원은 AI 발생 사실이 알려지기 전인 지난 연말 200마리의 연산 오계를 경북 상주의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다. 지난 11일에도 300마리를 같은 곳으로 옮겼다.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문화재청의 지원을 받아 청정지역인 경북 상주에 상시 피난처를 확보한 것이다. 

연산 오계들은 인근에서 AI가 발생한 2006년과 2008, 2011년 등 지금까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경기 동두천과 경북 봉화, 인천 무의도 등으로 피난길에 올랐다가 AI가 잠잠해지면 되돌아오기를 반복했다. 피난처가 있는 자치단체와 주민들이 오계를 받아줄 수 없다고 통보하는 등 피난처를 구하는데 애를 먹어왔다. 

이승숙 대표는 새로 지은 축사로 연산 오계를 지난 11일 옮길 예정이었는데 공교롭게도 AI 발생과 시점이 맞아떨어졌다면서 어젯밤에 실제 피난을 떠나듯이 300마리를 부랴부랴 옮겼다고 설명했다. 이 대표는 깊은 산 속 외딴곳이다 보니 AI 매뉴얼상 살처분 지역에는 농장이나 인가가 없다면서 이동 제한 조치 지역 내 한두 농가가 있을 뿐이고, 산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연산 오계를 보호하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어 일단은 천연기념물의 멸종만 방지하면 되기 때문에 농원에 있는 1천여 마리를 피신시킬지는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다른 곳에 상시 피난처를 마련할 계획이지만 계룡에서 발생한 AI가 위급한 상황은 아닌 것으로 보여 추이를 지켜본 뒤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계룡시의 한 양계농가에서 닭 45마리가 폐사한 것과 관련해 AI 간이 검사를 벌인 결과 10마리 중 6마리에서 양성 반응이 나타났다. 고병원성 AI 여부는 13일 검사에서 확정된다.

kjunho@yna.co.kr (고딕강조는 인용자)

 

조류독감 소동 때마다 나는 오계가 왜 이런 소동을 벌여야 하는지 이유를 도통 알 수가 없다. 저 기사에서 언급하듯이 자칫하다간 연산 오계는 멸종을 피할 길이 없다.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농가만 키우는 폐쇄성 때문이다. 조류독감 발생이 빈발하자, 문화재청에서는 상주 외딴 곳에다가 분산 피난처까지 마련했지만, 과연 이것이 오계 보존 보호를 위한 근본 대책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혹 두 군데 모두 조류독감이 발생한다면 어찌할 것인가? 

지금의 폐쇄적 보호정책이 외려 천연기념물을 멸종의 위기로 몰아가지 않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천연기념물 보호의 근본적 이유를 물어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을 멸실의 위기에서 구해내는 것이다. 그것을 구해낼 방책이 뻔 한데도 그것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것을 어떻게 하면 구해낼 수 있겠는가? 대량 증식하거나, 대량으로 각지에 분배하면 간단히 해결한다. 대한민국이 미덥지 않으면 이웃 중국이나 일본 혹은 몽골 같은 데다가 입양할 수도 있지 않는가? 그것이 이 땅에서 멸종하면 외국에서 살아남은 그 종자를 들여오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다. 문화재의 천연기념물에 해당하는 개념이 환경 관련 법률에서는 멸종위기동물이다. 왜 멸종위기동물로 지정해 보호하는가? 말할 것도 없이 멸종위기에서 구하고자 함이 아닌가? 멸종위기에서 구하기 위해서는 대량 증식을 하면 된다. 물론 이 대량이라는 말에도 현재의 생태계가 그것을 수용할 한계 내에서라는 제한은 있어야 한다. 

나는 시종일관해서 논산 오계는 대량 증식 혹은 각지 분양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궁극으로는 오계를 천연기념물에서 지정 해제해야 한다. 왜 천연기념물로 지정하는가? 모든 천연기념물이 그런 것은 아니나, 종 자체가 멸종 위기에 처한 동식물은 그것을 그 위기에서 구할 방책이 있다면, 그 방식을 통해 천연기념물에서도, 그리고 멸종위기동식물에서도 구제해야 한다. 그 해제가 바로 그 지정 정신이어야 한다. 

다시금 말하지만 천연기념물 지정은 그 한정된 개체를 그대로 고정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기념물 해제가 목적이어야 한다. 멸종에 의한 해제가 아니라 증식을 통한 안정 개체 확보, 이것이 진정한 천연기념물 지정 목적 아닌가 말이다. 같은 맥락에서 이제는 개체수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난 원앙은 이젠 천연기념물에서 풀어주어야 한다.

수달 역시 마찬가지다. 수달은 이젠 개체수가 넘쳐나서 대한민국 전 산하를 뒤엎어 계곡마다 물고기 씨를 말리고, 가재를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 심지어 그 개체수가 넘쳐 도심에도 자주 출현해 횟집 수족관을 털기도 한다. 그럼에도 왜 과감히 지정 해제하지 못하는가?

그 해제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기도 하거니와, 그 해제가 곧 그 해제한 동식물에 대한 무차별한 포획을 보장하는 일은 아니다. 수달과 원앙이 천연기념물이 아니라 해서 그것을 맘대로 총을 쏴서 잡고, 그물로 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까지 각종 동물보호협회니 조류협회니 하는 단체 눈치만 보며 안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부끄러운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사양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시작이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의의 시작이고, 사양하는 마음은 예의 시작이며, 옳고 그름을 아는 마음은 지의 시작이다.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맹자》 〈공손추(公孫丑)〉에 보이는 말이다. 많은 이가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이 중에 부쩍 되뇌이는 말이 수오지심이다. 수오란 부끄러움이다. 쪽팔림이다. 염치다. 더 간단히 말하면 수오지심이란 미안함이다. 박근혜 최순실이 욕을 먹는 까닭도 결국은 수오지심의 결핍에서 비롯한다. 같은 날 둘은 각각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리고 특검에 출두하며 각각 외쳤거니와, 요컨데 내가 뭘 잘못했다는 것이다. 수오지심이 없는 까닭에 저들에겐 미안함이 있을 수가 없고, 염치가 자라날 틈이 없다. 


저들에게도 과연 번민이 있을까? 쪽팔려 죽겠다는 번민 말이다. 그러면서 나를 묻는다. 그럼 나는? 비단 꼭 이런 물음이 아니라 해도 곱씹어 보니 쪽팔림 천지인 삶을 살았다. 저 심연 어디에 자리잡은 20여년전 쪽팔림이 스멀스멀 기어나와 나를 압박한다. 가끔 그런 꿈을 꾸었다. 길거리 가다 아주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다. 


미안했노라고, 미안하다고. 

(2017. 01. 26) 


현충사(顯忠祠)의 여러 층위와 박정희 현판 문제(1)

‘이충무공 유허’와 ‘현충사’, 그 괴리 


그의 탄강지 충남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방화산 기슭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해군 총독으로 맹활약한 충무공 이순신을 기리는 시설이 있으니, 이를 우리가 현충사(顯忠祠)라 하거니와, 현재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하는 이 시설은 우선 면적이 방대하기 짝이 없어, 개인 사당으로 이토록 큰 규모는 없다.

 

시민공원을 겸한 이 현충시설은 또 하나의 국립묘지에 해당한다. 첫째,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곳이 중앙정부요, 둘째 그것이 보존정비된 내력이 이미 그런 특성이 농후하게 관철되었으며, 셋째 그 연례 제례를 관장하는 기관 역시 중앙정부인 까닭이다. 제관은 대통령이 하다가 김영삼 정부 이래 현재까지는 국무총리가 집도한다.

도대체 이런 국가현충시설은 어찌해서 어떤 내력으로 탄생했는가?


현충사 전면 주차장 이순신 기념물.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卽生, 必生卽死), 곧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고 만다는 그의 필적을 새겼다.

   

이를 위해 우선 우리는 이 현충시설의 명패부터 새삼 확인해야 한다. 어떤 시설의 정체성을 간판만큼 적확히 표현하는 존재는 드문 까닭이다.

 

우리는 이곳에 당연히 현충사라는 간판이 있을 줄로 안다. 하지만 막상 그 입구 한 켠을 장식한 안내판을 보면 ‘아산 이충무공 유허(牙山李忠武公遺墟)’라는 대문 편액을 발견한다. 이곳이 더불어 국가 사적 제155호임을 적시한다. ‘현충사’가 아니다.

 

유허란 무엇인가? 남은 흔적이라는 뜻이다. 본래의 시설은 이미 망실되고, 그 터만 남았다는 뜻이다. 우리가 현충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이 시설은 왜 이름이 현충사가 아닌가? 그 해명을 위해 우선 이 안내판 본문을 보자.

 

아산 충무공 유허 안내판


“이곳 백암리 방화산 기슭은 충무공 이순신(1545~1598) 장군이 혼인하여 살던 옛집과 공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곳이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십년 간 무예를 연마하여 서른두 살 되던 해(1576년, 선조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충무공이 순국하신지 108년이 지난 1706년(숙종 32년), 이곳에 공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사당을 세웠으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 사액하였다. 그 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사당이 훼철되었으나, 일제시대인 1932년 동아일보사가 주관하여 온 겨레의 정성으로 사당을 다시 세웠다. 1945년 광복 후에는 매년 4월 28일에 온 국민의 뜻으로 탄신제전을 올려 공을 추모하여 왔다. 1966년부터 1974년까지 공의 위업을 기리고자 고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성역화사업을 시행하였으며 2008년부터 2011년까지 현충사 유적 정비 사업을 통해 충무공이순신기념관을 건립하였다.”

 

자, 이를 통해 우리는 왜 이곳이 현충사가 아닌 ‘충무공 유허’임을 안다. 이곳은 그의 넋을 기리는 현충사라는 사당만이 아니라, 그가 기거한 옛집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안내판의 충무공 유허 배치도


  1. 신건지 2018.01.25 10:47 신고

    한량 ㅋㅋㅋ

덕수궁(사적제124호) 명칭 검토 공청회  

□ 개요 

ㅇ 일 시 : 2011. 12. 2(금), 14:00 ~ 17:50 

ㅇ 장 소 : 국립고궁박물관 본관 강당 

ㅇ 내 용 : 덕수궁 지정 명칭 검토 

ㅇ 참가자 : 문화재위원, 문화재 관계자 등 120 여명 

ㅇ 발제․토론자 : 11명 

- 사 회 : 송석기(군산대학교 교수) 

- 발제자 

․역사속의 덕수궁과 현재의 의미(이민원 원광대 교수) 

․대한제국의 궁궐 경운궁(홍순민 명지대 교수) 

- 토론자 

․유지 : 김정동(목원대 교수), 김도형(연세대 교수), 김태식(연합뉴스 기자),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 

․환원 : 이태진(국사편찬위원장), 김인걸(서울대 교수), 서영희(한국산업기술대 교수), 

이희용(전 경기예총 부위원장)


요약 

김태식 (연합뉴스기자) 

▪ 덕수궁은 잔재로써 경운궁을 말살한 것이 아니라 경운궁의 지난 100여년의 역사에는 경운궁이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으며, 경운 궁 없이 덕수궁도 존재할 수 없음 

▪ 덕수궁은 경운궁의 흔적을 밀어내고 그것을 대신 차지한 찌꺼기가 아니므로 ‘덕수궁이란 간판을 떼어버리고 경운궁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덕수궁의 지난 100년의 역사를 말살하고자 하는 의도가 개입되어 있음 

※ 덕수궁 명칭 설문조사는 역사적 사실인지 후 실시 필요 덕수궁 유지


“德壽宮은 日帝 殘滓와 하등 연관이 없다” - 이른바 덕수궁 명칭 개편과 관련한 토론문 - 

김태식 연합뉴스 문화부 기자 


1. 문제의 제기 


두 달 전쯤인 지난 9월15일, 문화재청은 느닷없는 소식을 들고 나왔다. 언론에 배포한 이날의 보도자료는 제목이 “덕수궁이냐 경운궁이냐”였고, 부제는 “시민의견 수렴을 거쳐 명칭 재검토키로”였다. 요컨대 사적 제124호인 德壽宮을 慶運宮으로 명칭 변경하는 방안을 추진키로 했다는 것이다. 보도자료에 의하면 이를 위해 그에 앞서 이미 지난 7월에 문화재청은 문화재위원회 심의를 통해서 국가지정문화재 중 사적 439건의 지정명칭을 변경하여 고시했으며, 이때 덕수궁 명칭 변경안이 논의가 되었지만 뚜렷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德壽宮을 慶運宮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이며, 그리고 그 근거는 무엇인가? 


조선 후기사, 특히 대한제국시대를 전공하는 역사학계 일부에서 이런 주장이 있으며, 그에 더불어 민간운동 차원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꾸준히 이는 것으로 나는 안다. 하지만 이날의 문화재청 발표가 적어도 나에게는 느닷없이 다가오기만 한 까닭은 그 시급성이 있느냐는 의구심이 첫 번째로 들었고, 그리고 명칭 변경을 위해 내세우는 근거들이 설득력과 합리성을 갖추었는가 하는 데도 적잖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토론자 중 한 명으로 이 자리에 선 나는 오늘의 발표자 두 분 중 한 분과 같은 토론자 중 몇 분이 명칭을 바꿔야 한다는 신념을 지녔다는 사실을 익히 안다. 더불어 이들 명칭 변경론자의 논리적 근거도 劃一하지만은 않을 줄로 안다. 그럼에도 이들 명칭 변경론에는 그것을 떠받치는 主軸이라고 할 만한 공통분모를 두 가지 정도로 추출할 수 있으니, 대한제국과 고종에 대한 환상, 다시 말해 皇帝(emperor)와 帝國(empire)에 대한 욕망의 들끓음이 그 하나요, 德壽宮은 일제의 殘滓라 함이 나머지 하나라 할 것이다. 


이 중에서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 명칭변경이 여전히 추동력을 지니며, 그에 따라 때로는 이번과 같은 명칭 변경안을 실행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결정적인 근거는 ‘殘滓論’이다. 실제로 이번 문화재청 보도자료가 극명히 증명하듯이 “1907년 경운궁 명칭이 덕수궁으로 개칭된 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압력으로 고종이 황제 자리를 순종에게 양위한 뒤 이전 황제의 거처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므로 원래 명칭으로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 다시 말해 皇帝와 帝國에 대한 욕망은 그것을 주장하고 지지하는 사람의 信念이라 할 수 있으므로, 이는 사상의 자유를 배려한다는 차원에서 적어도 이 자리에서 나는 그것을 置之度外하기로 한다. 그렇다면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과연 日帝의 殘滓인가? 


2. 高宗의 皇帝位 退位와 德壽宮 


이 자리에서 명칭 변경론과 관련해 또 하나 상기할 점은 그 뒤에는 이른바 역사환원주의라고 일컬을 만한 신념, 혹은 기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그 역사를 추적해 그 근원, 혹은 뿌리, 혹은 기둥을 찾아가자는 욕망이 內在한다는 것이다. 이를 빌미로 지금의 명칭을 버리고 느닷없이 그 옛적 먼지 구덩이에 파묻힌 이름을 새로운 간판으로 내거는 추동력으로 작동한다고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慶運宮과 德壽宮의 역사를 논할 적에 주의할 대목은 慶運宮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이 1593년 10월, 임진왜란으로 의주 일대로 피난한 조선의 국왕 宣祖가 漢陽으로 還都한 이후 임시 궁궐인 時御所로 삼기 시작한 데서 비롯한 다는 점이다. 


戰亂으로 전체가 쑥대밭이 되다시피 한 漢陽에서 그나마 宮闕로 사용할 만한 건축 공간으로 남은 것이 成宗의 親兄 月山大君의 저택이었다. 궁궐이 다 타버리고 이곳에 行宮을 마련한 데서 비로소 이곳은 宮의 역사로 편입되기 시작한다. 


묻는다. 역사환원주의에 말미암는다면 차라리 덕수궁은 月山大君 私邸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필 慶運宮이리오? 


돌이켜 보면 慶運宮은 선조의 아들로 그 後嗣인 光海君이 이곳 西廳, 즉, 지금의 德壽宮 卽阼堂에서 卽位하고 2년 뒤인 1611년 10월에 慶運宮이라 개칭함으로써 비로소 그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하지만 그 무렵 창덕궁이 재건됨으로써 慶運宮은 곡절은 있기는 했지만 離宮의 일종이 되었다가 그나마도 1623년 7월에는 宣祖의 寢殿만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된다. 이로써 본다면 경운궁이 명실상부한 宮으로 기능한 것은 적어도 고종 시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단순 계산으로 두들겨도 30년 남짓할 뿐이다. 


이런 慶運宮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기는 익히 알려졌듯이 고종시대에 들어와서다. 이런 역사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선 다른 분들이 충분히 다룰 것이므로 그것을 重言復言하지 않는다. 다만 이 자리에서 논의가 집중할 大韓帝國의 선포 (1897.10)와 그 시대와 관련해 지적할 것은 고종이 이른바 헤이그 특사 사건에 휘말려 1907년 7월 퇴위한 장소가 다름 아닌 덕수궁 중화전이란 점이다. 고종은 생전에 황제위에서 퇴위했으므로 당연히 太上皇이라는 尊號를 받고 물러난다. 퇴임 뒤에 그가 머무른 곳이 바로 경운궁이다. 이런 경운궁이 그의 퇴위와 더불어 德壽宮으로 개칭해 오늘에 이른다. 


그를 뒤이은 대한제국 2대 황제 純宗은 1907년 8월에 덕수궁 돈덕전에서 皇帝位에 즉위하고 그해 11월 창덕궁으로 들어간다. 이런 경운궁과 덕수궁의 略史 어디에 日帝의 殘滓가 있다는 말인가? 고종의 강제퇴위와 덕수궁이라는 이름의 등장이 밀접한 관계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다시 묻거니와 그렇다고 해서 德壽宮이 일제의 殘滓라 함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가? 덕수궁은 강제퇴위한 고종의 거처로서 마련된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德壽宮이라는 명칭은 中國史에서 北宋과 南宋의 교체 혼란기에 즈음해 宋 왕조 高宗이 紹興 31년(1161)에 退位한 뒤에 지금의 浙江省 杭州市 望仙橋 동쪽에 있던 宰相 秦檜의 故第에 그 거처로써 마련한 德壽宮에서 비롯한다.28) 즉, 《宋史》 卷32, 本紀 第32 高宗9 그 32년 조에 이르기를 6월 “丙子에 皇太子에 詔하여 皇帝 位에 卽케 하고, 帝 자신은 太上皇帝을 稱하고 德壽宮으로 물러나 거처를 삼았으며, 皇后는 太上皇后라 칭하니 (이에) 孝宗이 卽位했다”29)고 한다. 


대한제국 황제 高宗이 퇴위하여 太上皇으로서 그 자신이 거처할 곳의 이름으로 하고 많은 이름 중에서도 德壽宮을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전통에서 비롯한다. 어떻든 이로써 慶運宮은 이름이 간판만 바꾸었을 뿐이지, 宮으로서의 기능은 여전히 유지했다. 昌慶宮이 창경원이 되어 동물원으로 바뀐 것과는 차원이 분명히, 그리고 전연 다르다. 그럼에도 명칭변경론자들은 德壽宮이 日帝의 殘滓라 강변하면서, 그 이름을 바꾸어야만 殘滓를 청산한다고 주장한다. 


돌이켜 보면 德壽宮은 殘滓로써 慶運宮을 ‘抹殺’한 것이 아니다. 德壽宮의 지난 100년의 역사에는 慶運宮이 그대로 살아 숨쉰다. 慶運宮없이 德壽宮이 존재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德壽宮은 慶運宮의 흔적을 밀어내고 그것을 대신 차지한 찌꺼기가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德壽宮이라는 간판을 떼어버리고 慶運宮으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에는 德壽宮의 지난 100년의 역사를 抹殺하고자 하는 ‘불온’한 의도가 개입돼 있다. 내가 이 자리에서 명칭 변경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때문이다. 


3. 日帝의 殘滓, 그 억울한 희생자들 


오늘 이 자리에는 德壽宮이 日帝의 殘滓라 해서, 慶運宮으로 명칭을 돌리기만 하면 그 殘滓가 淸算한다는 신념을 지닌 분이 있다. 


하지만 다시금 강조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역사 지식에서 비롯한다. 고종의 강제 퇴위와 더불어 德壽宮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해서 德壽宮이 日帝의 殘滓라는 등식은 그 어디에서도 성립 기반이 없다. 그런 주장을 하는 분들은 단언하거니와, 피식민지시대, 혹은 사실상 그런 시대에 일어난 모든 일을 日帝의 所行으로 돌리고자 하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런 시대에 일어난 일과 그런 일이 日帝의 所行이라는 것은 별개다. 


내 先親이 그 시대에 태어났다고 해서 선친 자체가 일제의 殘滓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돌이켜 보면, 日帝의 殘滓를 청산한다는 운동이 나름의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德壽宮처럼 전연 엉뚱한 피해자를 양산하기도 했다는 점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28) 張仲文이 쓴 ‘白獺髓’에 이르기를 “秦檜師垣故第, 卽今之德壽宮, 西有望仙橋 , 東有升仙橋”라 했다, 


29) 丙子, 詔皇太子卽皇帝位. 帝稱太上皇帝, 退處德壽宮, 皇后稱太上皇后. 孝宗卽位, 累上尊號曰光堯壽聖憲天體道性仁誠德經武緯 文紹業興統明謨盛烈太上皇帝. 淳熙十四年十月乙亥, 崩於德壽殿, 年八十一. 謚曰聖神武文憲孝皇帝, 廟號高宗. 


그런 보기가 너무나 많아 처참하기만 하거니와, 그 사례 몇 가지를 들건대 먼저, 2007년 2월20일자로 한자 표기를 ‘義王’으로 바꾼 ‘義旺’이 있다. 어떤 사람이 이런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는지 나로서는 참말로 알 수가 없지만 ‘旺’이 ‘日王’이라는 코미디를 방불하는 주장에 힘입어 마침내 日帝의 殘滓로 지목되어 퇴출됐다. 


마찬가지 논리로 서울의 인왕산도 조선시대 각종 문헌을 보건대 仁王山과 仁旺山이 병립함에도 仁王山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 실로 그럴 듯하게 통용한다. 더불어 ‘비로봉’과 더불어 전국 각지 산 중에서도 主峰을 일컫는 말로 더러 보이는 ‘天皇峰’이 일본의 天皇과 관련이 있으므로 日帝의 殘滓이며, 그것은 ‘天王峰’이어야 한다는 주장은 지금도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는 중이다. 더구나 그것이 권력이 되어 그 명칭 변경을 반대하는 사람은 새로운 친일파로 등극하는 실정이다. 


나아가 쇠말뚝이 日帝의 殘滓라 해서 매년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그것을 주워 뽑음으로써 쾌감을 불러내는 희대의 쇼가 지금도 우리 사회 한편에서 버젓이 횡행하기도 한다. 이번 덕수궁 명칭 변경론을 밀어붙이고자 하는 분 중 적어도 역사로 밥을 빌어먹고 사는 직업적 학문 종사자 중에는 이른바 ‘창덕궁 後苑’을 ‘秘苑’에서 건져내는 데 단단히 一助한 분이 있다고 안다. 그들이 이르기를 後苑이 바른 이름이며, 秘苑은 日帝가 조선왕실을 격하하고자 맹글어 낸 말이라고 한다. 


돌이켜 보면 지금의 창덕궁 後苑을 일컬어 조선시대에는 압도적으로 後苑이라 부른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에 더불어 그것을 대신한 秘苑이라는 명칭이 일반화하는 것도 식민지시대에 들어온 이후의 일이라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後苑으로 쓰면 민족정기가 회복되고, 그 대 신 秘苑을 쓰면 민족정기가 훼손된다는 주장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말미암는가? 


이름이 시대에 따라 바뀌었을 뿐일진댄 그에다가 어찌하여 日帝의 殘滓라는 말을 끌어다 대는가? 


덧붙이건대 後苑이건 秘苑이건 같은 말이다. 실제 중국사의 여러 사례를 볼진댄 後苑에 해당하는 말로써 秘苑을 쓴 사례는 非一하고 非再하다. 또 하나 덧붙일 것은 後苑이건 秘苑이건 그것이 결코 고유명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모든 집 건물 앞 공간을 ‘마당’이라 부르듯이 그 뒤켠 나무를 심은 공간을 秘苑 혹은 後苑으로 부를 뿐이다. 일반명사다. 고유명사도 아닌 줄도 모르고 그것을 그렇게 착각하여 그것을 되찾은 일을 마치 독립이나 쟁취한마냥 하는 일은 그만두어야 한다. 


묻는다. 德壽宮이 일재의 殘滓이므로 그 명칭을 ‘본래’로 돌려야 한다는 주장 또한 이런 무지막지한 역사의 폭거에 다름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그럴 자신이 있다면 바꿔라. 몇 가지 역사 지식 더 갖추고 있다고 해서, 左顧右眄하지 않고 자신이 아는 역사지식이 전부인양 착각해서 역사를 ‘抹殺’하는 일은 삼가고삼가얄지니라. 


欽哉欽哉라.

  1. 역문팬 2018.01.22 00:03 신고

    좋은 글입니다.

  2. 신건지 2018.01.25 10:56 신고

    아는 만큼 보이는거죠~

  3. 두소자 2018.01.31 22:36 신고

    당시 말도 안되는 짓이라고 하면서도 국편위원장 눈치 보느라 고사하던 교수들 면면이 떠오르네요. 당시 반대 토론자 찾느라 전화가 뜨거워질 만큼 전화했었죠.
    또 그전에는 반대였다가 찬성 주장을 했던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고.
    그때 고생 많으셨어요.

  4. 한량 taeshik.kim 2018.02.19 16:08 신고

    그러게나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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