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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계절의 노래(212)


낙엽(落葉)

[宋] 애성부(艾性夫) / 김영문 選譯評

맑은 서리 즈믄 숲
마르게 하니

누런 잎이 만 가지 춤
추려 하네

한밤 내내 북창에서
잠 자는데

마른 비 오는 소리
우수수 들리네

淸霜槁千林, 黃葉欲萬舞. 一夜北窗眠, 瀟瀟聽乾雨.

서리 맞은 단풍 잎은 이제 곧 천지 간을 휘돌며 찬란한 춤을 출 것이다. 양만리에 의하면 그건 하늘 술을 훔쳐 먹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는 단풍의 취후(醉後) 난무(亂舞)다. 밤낮을 가리지 않는다. 술주정에 어찌 밤낮이 따로 있던가? 하지만 단풍잎의 술주정은 폭언과 폭행이 아니다. 천지를 가득 채우는 오색 춤사위와 창 너머 들려오는 쓸쓸한 비 소리다. 그 비 소리에는 물기가 없다. 마른 비 즉 건조한 비다. 그것도 민폐라면 민폐다. 사람들의 마음에 가을을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마음에 가을을 가득 담은 가을 남녀들은 뭔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쓸쓸함에 낙엽처럼 거리를 떠돈다. 북창(北窗)은 은사가 잠자는 곳이다. 도연명(陶淵明)의 거처다. 왜 하필 북창인가? 세상을 등진다는 의미가 아닐까? 북창은 여름엔 이를 데 없이 시원하지만 가을과 겨울에는 찬바람이 들이치는 곳이다. 이제 그곳에 밤낮 없이 마른 비 소리가 들린다. 은사조차 불면의 밤으로 이끄는 물기 없는 비 소리다.

낙엽을 태우면서


이효석(李孝石, 1907~1942)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거의 매일 같이 뜰의 낙엽을 긁어모으지 않으면 안 된다. 날마다 하는 일이건만, 낙엽은 어느덧 날고 떨어져서 또 다시 쌓이는 것이다. 낙엽이란 참으로 이 세상 사람의 수효보다도 많은가 보다. 삼십여 평에 차지 못하는 뜰이언만, 날마다 시중이 조련치 않다. 벚나무 능금나무…. 제일 귀찮은 것이 벽의 담쟁이다. 담쟁이란 여름 한철 벽을 온통 둘러싸고 지붕과 연돌(煙突)의 붉은 빛난 남기고 집 안을 통째로 초록의 세상으로 변해 줄 때가 아름다운 것이지, 잎을 다 떨어뜨리고 앙상하게 드러난 벽에 메마른 줄기를 그물같이 둘러칠 때쯤에는 벌써 다시 지릅떠볼 값조차 없는 것이다. 귀찮은 것이 그 낙엽이다. 가령 벚나무 잎같이 신선하게 단풍이 드는 것도 아니요, 처음부터 칙칙한 색으로 물들어 재치 없는 그 넓은 잎이 지름길 위에 떨어져 비라도 맞고 나면 지저분하게 흙 속에 묻히는 까닭에 아무래도 날아 떨어지는 쪽쪽 그 뒷시중을 해야 된다.


벚나무 아래에 긁어모은 낙엽의 산더미를 모으고 불을 붙이면 속의 것부터 푸슥푸슥 타기 시작해서 가는 연기가 피어오르고 바람이나 없는 날이면 그 연기가 낮게 드리워서 어느덧 뜰 안에 가득히 담겨진다. 낙엽 타는 냄새 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가제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갈퀴를 손에 들고는 어느 때까지든지 연기 속에 우뚝 서서 타서 흩어지는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맹렬한 생활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연기는 몸에 배서 어느 결엔지 옷자락과 손등에서도 냄새가 나게 된다. 




나는 그 냄새를 한없이 사랑하면서 즐거운 생활감에 잠겨서는 새삼스럽게 생활의 제목을 진귀한 것으로 머릿속에 떠올린다. 음영(陰影)과 윤택(潤澤)과 색채(色彩)가 빈곤해지고 초록이 전혀 그 자취를 감추어 버린 꿈을 잃은 헌출한 뜰 복판에 서서 꿈의 껍질인 낙엽을 태우면서 오로지 생활의 상념에 잠기는 것이다. 가난한 벌거숭이의 뜰은 벌써 꿈을 매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탓일까. 화려한 초록의 기억은 참으로 멀리 까마득하게 사라져 버렸다. 벌써 추억에 잠기고 감상에 젖어서는 안 된다. 가을이다. 가을은 생활의 시절이다. 나는 화단의 뒷바라지를 깊게 파고 다 타버린 낙엽의 재를 - 죽어버린 꿈의 시체를 - 땅 속 깊이 파묻고 엄연한 생활의 자세로 돌아서지 않으면 안 된다.


이야기 속의 소년같이 용감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없이 손수 목욕물을 긷고 혼자 불을 지피게 되는 것도 물론 이런 감격에서부터이다. 호스로 목욕통에 물을 대는 것도 즐겁거니와 고생스럽게 눈물을 흘리면서 조그만 아궁이로 나무를 태우는 것도 기쁘다. 어두컴컴한 부엌에 웅크리고 앉아서 새빨갛게 피어오르는 불꽃을 어린 아이의 감동을 가지고 바라본다. 어둠을 배경으로 하고 새빨갛게 타오르는 불은 그 무슨 신성하고 신령스런 물건 같다.


얼굴을 붉게 데우면서 긴장된 자세로 웅크리고 있는 내 꼴은 흡사 그 귀중한 선물을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막 받았을 때의 그 태고적 원시의 그것과 같을는지 모른다. 새삼스럽게 마음속으로 불의 덕을 찬미하면서 신화 속 영웅에게 감사의 마음을 비친다. 좀 있으면 목욕실에는 자욱하게 김이 오른다. 안개 깊은 바다의 복판에 잠겼다는 듯이 동화(童話)의 감정으로 마음을 장식하면서 목욕물 속에 전신을 깊숙이 잠글 때 바로 천국에 있는 듯한 느낌이 난다. 지상 천국은 별다른 곳이 아니다. 늘 들어가는 집안의 목욕실이 바로 그것인 것이다. 사람은 물에서 나서 결국 물속에서 천국을 구경하는 것이 아닐까.


물과 불과 - 이 두 가지 속에 생활은 요약된다. 시절의 의욕이 가장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은 두 가지에 있어서다. 어느 시절이나 다 같은 것이기는 하나, 가을부터의 절기가 가장 생활적인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의 원소의 즐거운 인상 위에 서기 때문이다. 난로는 새빨갛게 타야하고, 화로의 숯불은 이글이글 되어야 하고, 주전자의 물은 펄펄 끓어야 된다.


백화점 아래층에서 커피의 낱을 찧어 가지고는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 가지고 전차 속에서 진한 향기를 맡으면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는 내 모양을 어린애답다고 생각하면서 그 생각을 또 즐기면서 이것이 생활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싸늘한 넓은 방에서 차를 마시면서 그제까지 생각하는 것이 생활의 생각이다. 벌써 쓸모 적어진 침대에는 더운 물통을 여러 개 넣을 궁리를 하고 방구석에는 올겨울에도 또 크리스마스트리를 세우고 색전기도 장식할 것을 생각하고, 눈이 오면 스키를 시작해 볼까 하고 계획도 해 보곤 한다. 이런 공연한 생각을 할 때만은 근심과 걱정도 어디론지 사라져 버린다. 책과 씨름하고 원고지 앞에서 궁싯거리던 그 같은 서재에서 개운한 마음으로 이런 생각에 잠기는 것은 참으로 유쾌한 일이다.


책상 앞에 붙은 채 별일 없으면서도 쉴 새 없이 궁싯거리고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하면서, 생활의 일이라면 촌음을 아끼고 가령 뜰을 정리하는 것도 소비적이니 비생산적이니 하고 경시하던 것이 도리어 그런 생활적 사사(些事)에 창조적인 뜻을 발견하게 된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일까. 시절의 탓일까. 깊어가는 가을, 이 벌거숭이의 뜰이 한층 산 보람을 느끼게 하는 탓일까.


*** 이 시대에 이효석은 백화점 댕기고 커피 볶아먹고 살았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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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파트담보 2018.10.27 14:37 신고

    한국적 가을 모범생 이면서도 서양문학의 영향을 받은 분 같군요.

  2. 한량 taeshik.kim 2018.10.27 17:46 신고

    이른바 댄디였죠

한시, 계절의 노래(208)


덕수궁 중명전 은행나무



낙엽(落葉)


[明] 주초(朱樵) / 김영문 選譯評 


초록 잎새 그림자

겹겹이더니


가을 오니 쑥덤불 따라

굴러가누나


나무에 기댈 힘

없는 탓이니


함부로 서풍을

원망치 말라


綠葉影重重, 秋來逐轉蓬. 自無依樹力, 莫謾怨西風.


가을은 뭐라 해도 낙엽의 계절이다. 전국시대 초나라 시인 송옥(宋玉)은 「구변(九辯)」이란 초사 작품에서 “슬프다! 가을 기운이여! 쓸쓸하다! 나뭇잎 떨어져 스러짐이여!(悲哉秋之爲氣也, 蕭瑟兮草木搖落而變衰)”라고 탄식했다.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 작품 중에서 ‘슬픈 가을(悲秋)’의 원조라 할만하다. 당나라 두보는 「높은 누대에 올라(登高)」라는 칠언율시에서 “가 없는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고, 끝 없는 장강은 콸콸콸 흘러오네(無邊落木蕭蕭下, 不盡長江滾滾來)”라고 읊었다. ‘우수수(蕭蕭)’와 ‘콸콸콸(滾滾)’이라는 자연의 소리를 견뎌낼 인간은 없다. 두보는 이 두 마디의 의성어로 세월의 무정함과 시간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의성어의 절실함을 이보다 더 심도 있게 드러낸 시는 드물지 않을까 한다. 인간은 저 ‘우수수’와 ‘콸콸콸’ 사이에서 ‘슬프다!’란 한탄만 내뱉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낙엽일 뿐이다. 심지어 위의 시에서는 가을 잎이 스스로 나무에 기댈 힘조차 없어서 떨어진다고 했다. 그렇다.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은 가을바람 탓이 아니다. 끝내는 나무에 의지할 기력조차 없어서 때마침 불어오는 가을바람에 몸을 싣는다. 나무에 기댈 힘조차 없다니... 온 산천 온 거리에 낙엽이 흩날린다.

낙엽(落葉)


[조선] 김우급(金友伋·1574~1643) / 기호철 譯 


낙엽이 누구에게 말을 하는 듯한데     落葉如和語

요즘 사람은 어리석어 듣지 못해요     今人聽不聰

희미하게 들려오는 몇 마디 소리는     依微多少響

온통 가을바람 원망하는 말뿐예요      無乃怨秋風

(《추담집(秋潭集)》 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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