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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은 보다시피 1976년 7월 12일 월요일판 경향신문 2판 제5면 머릿기사로 실린 김정배 기고 시론이다. 시론이란 간단해 말해 시사 문제와 관련한 논설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신문이 지면을 배치하지는 않거니와, 시론 같은 논설류를 모은 면이 아님에도 시론을 각종 시사 문제를 전하는 면 머리기사로 올린 점이 지금과 비교하면 독특하다. 이 기고문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왜 저 시기에 저 기고문이 배태되었는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문 분석이 중요하다. 


기고문을 보면 크게 두 부문으로 구성한다. 첫째, 당시 광범위한 도굴 실태에 대한 고발이다. 둘째, 이를 토대로 하는 대응책 주문이다. 논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시론은 이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아니한다. 시론으로서는 빵점짜리에 가깝다. 다름 아니라 도굴 실태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면, 그 대응책으로서는 그 도굴을 근절하고, 도굴범들을 색출하기 위한 관계당국의 노력 경주를 주문해야 지극히 정상이겠지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으니, 느닷없이 그 대응책으로 김정배가 제시한 방법은 대학에서 발굴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뚱딴지도 이런 뚱딴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론은 어찌해서 나왔으며, 과연 저자가 주장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시계추를 돌려 40여년 전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무렵 고고학계 사정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이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본궤도에 오르고, 그에 따라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주도 발굴이 한창 굉음을 내던 시기다. 그 일환으로 경주에서는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이 대략 마무리되고, 곧이어 안압지와 황룡사지 발굴이 닻을 올렸다. 


이 시론 기고 당시 김정배는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다. 나중에는 제14대 고려대 총장까지 역임하고, 그 이후에도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며 문화재위원장이며, 국사편찬위원장이며 하는 각종 중책을 비교적 최근까지 연이어 역임한 사학계 거물이다. 이런 이력을 보면 그는 사학도라기보다는, 뭐랄까 역사학 tycoon 정도로 자리매김해야 할 성 싶다.  


각종 그의 이력을 보면 1940년 8월 1일생이니 저 기고문 작성 당시 그는 36살, 전도 유망한 새파란 청년 교수였다. 휘문고와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그는 미국으로 1970년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건너가 그곳 대학원에서 인류학 세례를 받는다. 당시 미국 인류학은 이른바 신고고학이라 하는 흐름이 일대 유행한 것으로 기억하거니와, 그는 단순히 문헌사학도로 만족치 아니하고 역사학에 고고학과 인류학을 접목을 시도한다. 귀국해 1975년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만 서른살 1970년에는 모교 한국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면서 긴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니 '古文化(고문화)의 原形(원형)을 훼손말자'는 저 칼럼은 그가 한창 교수생활로 재미를 붙일 무렵에 쓴 셈이다. 하기야 그때야 벌써 저때는 학계 중진으로 취급될 무렵이다. 


이 칼럼에서 김정배는 도굴이 대표하는 당시 문화재 관리 참상과 관리실태를 고발하면서 시종 분노에 찬 어조로 국가를 질타한다. 그런 그가 일필휘지로 붓끝을 맘껏 휘두르면서 국가까지 질타했으니, 그 기개는 높이 살 만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글을 김정배는 왜 썼던가? 다음 구절에 그 저의를 폭로한다. 


"지난날의 발굴이 얻은 것 못지 않게 잃은 것이 많았음을 고려해두어야 한다. 學術的 發掘(학술적 발굴)은 대학으로 하여금 조용하게 진행시키고 차분한 연구결과로 보고서가 간행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發掘(발굴)과 盜掘(도굴)이 뒤범벅이 되고 文化財(문화재)는 黃金(황금)의 축재로 전락되며 돈이 있는 者에게는 국내외 인사에게무질서하게 물건이 들어갈 때 이 땅의 문화재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왜 썼는지 그 목적성이 명확하지 않은가? 그는 당시 문화재관리국 주도 국가 발굴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한 발굴은 곧 그 몫을 담당한 대학 발굴에는 일대 위기였으며, 그것은 곧 대학 발굴의 잠식이었다. 김정배가 저에서 하고자 한 말은 국가가 대학이 해야 하는 발굴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저 칼럼에서 노출한 김정배의 문제의식 혹은 위기의식이 단순히 김정배 개인의 생각을 넘어 당시 대학사회, 특히 고고학을 주된 밥벌이 수단으로 삼은 교수사회의 그것을 고스란히 대변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이데올로기를 간파해야만 저가 말하는 것들이 어떠한 거짓으로 얼룩졌는지를 비로소 만천하게 폭로하게 된다. 저에서 분명히 보이듯이 김정배와 '김정배들'에 따르면 국가는 대학에 돈만 주고 간섭하지 말고 대학이 자율적으로 발굴하게 하라는 것이며,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예산은 감사도 감시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정당한가? 아니, 그 시대에 비추어 봐도 정당했던가? 


김정배는 학술발굴은 대학에 맡기고, 대학은 차분히 연구하고 발굴보고서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된 적도 없고, 대학이 제대로 발굴보고서를 낸 적도 없다. 저런 주장이 어느 정도는 관철되어 당시 고고학 발굴 현황들을 보면, 비록 소위 큰 건수 발굴은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했지만, 각 대학 박물관 역시 연합발굴 등의 이름으로 적지 않은 곳에서 발굴에 뛰어들었으니, 경주만 해도 고고학 교수들 전성시대라, 이곳저곳 발굴현장 하나씩은 나눠 먹기했다. 


한데 주의할 점은 차분한 연구는 고사하고, 그 발굴 현장 대부분 대학 박물관은 보고서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때 발굴한 고고학 성과는 수십년이 지나도록 안낸 보고서가 수두룩하다. 보고서 비용은 도대체 어디서, 누가, 언제, 어떤 방식을 떼먹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최근에는 저리 밀린 보고서를 국가가 지원해 내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더러 나오는 실정이다. 돈은 지들이 다 빼돌리고, 국민한테 책임을 전가한단 말인가? 보고서 비용은 이제는 퇴임한 저들 발굴 책임자들한테 추심해서 강제로 빼앗아 와야 한다. 


김정배는 저에서 발굴이 파괴라는 말을 한다. 이 말, 고고학에서는 여느 개론서엔 다 나오는 말로 기억하거니와, 그렇다면 대학박물관이 차분히 발굴하고 차분히 연구하면 그건 파괴 아닌가? 발굴은 파괴라는 말이 지금도 고고학의 순수성을 말해주는 증좌로 고고학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언 혹은 권리장전처럼 통용하나. 퇴출해야 할 괴물이다. 


발굴이 무슨 파괴란 말인가? 발굴은 창조다. 해당 유적과 유물에다가 새로운 바람과 생명을 불어넣는 창출이다. 언제까지 발굴은 파괴라는 구닥다리 금언을 되뇌이겠는가? 


한데 김정배가 40년 전에 제기한 저 울분, 곧 발굴은 대학이 하게 해달라 하는 읍소 혹은 협박이 40년이 흐른 지금, 고고학계에 다시금 유령처럼 강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르기를 첫째, 발굴조사에서 적어도 책임조사원 혹은 정식 조사원이 되려면 대학 관련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지금은 완전히 퇴출된 대학 박물관의 구제발굴 현장 참여를 許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별도 마련하고자 한다. 

  1. 종부세 2018.09.16 14:56 신고

    학술적 발굴만 대학에서 조용히... ㅋㅋㅋ

김태식의 考古野談

한겨울 한밤중에 맨손으로 건진 백제금동대향로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6월 호

사비 도읍기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로 지목되는 부여 능산리 고분군 서쪽 지점에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이 있다. 모양이 조금은 독특해 전체로 보면 둔덕을 파고 들어간 땅굴 형식이다. 아마도 사비 시대 백제 무덤 전형이 주로 산기슭을 파고 들어가 그 안에다 돌을 쌓아 묘실(墓室)을 마련한 데서 착상한 디자인일 것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벽면엔 능산리 고분군 중 유일한 벽화 고분인 소위 동하총(東下塚)에서 발견된 벽화 소재 중 연꽃과 구름무늬를 잔뜩 그려놓았다. 그 내부에는 부여 일대 지형도와 능산리 일대 지형도를 안치하고, 그 뒤 중앙에는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 모형물을 놓았다.  

이 전시관의 주인공이 금동대향로임을 보여주는 배치다. 하지만 지금은 백제문화의 아이콘처럼 통하는 이 향로가 고분 전시관과 직접 연관이 있다고는 말하기 힘들다. 왜냐면 향로는 고분이 아닌 그 인근 지역 능산리 사지(寺址·절터)에서 출토됐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향로의 발견을 이끈 사건은 다름 아닌 이 전시관 공사였다는 점에서 아예 무관한 것도 아니다.  

1985년 부여군은 고분 전시관을 지으면서, 공사장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빼내기 위한 배수로를 만들게 된다. 이 과정에 백제 시대 연화문 와당(蓮花文瓦當) 몇 점이 발견된다. 이런 와당을 쓴 건물이라면 품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에 당국에서는 1990~91년 중서부고도(古都)개발계획과 맞물려 능산리 고분군과 부여 나성(羅城) 사이 계곡에 위치한 능산리 394번지 등 13필지 사유지 약 3000평을 매입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계단식 논밭이었다. 그리고 이 일대에 대해 1992년 12월 4일부터 이듬해 1월 7일까지 유적 분포 범위와 양상 확인을 위한 문화재 시굴조사를 실시한다. 

때는 엄동설한 혹한기였다. 그 결과 건물터와 초석(礎石)을 비롯해 연꽃무늬 수막새를 포함한 기와와 토기가 다량 발견됐다. 지하에 심상치 않은 백제 시대 유적이 존재한다는 징후였다. 이렇게 되자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기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훗날 이곳이 ‘능산리 사지’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중요한 백제 시대 유적이 될 줄은 누구도 몰랐다.   

논밭에서 출현한 백제

시굴조사를 토대로 하는 첫 발굴조사가 마침내 닻을 올렸다. 사역 전체에 대한 추후 발굴조사가 대략 완료되면서 밝혀졌지만, 첫 발굴 대상지는 사찰 중심에 해당하는 탑과 금당(金堂)이 있는 구역 양쪽을 담장처럼 막아선 복도형 건물인 회랑(回廊) 중 서쪽 회랑이 있던 곳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때 조사 구역을 서회랑지(西回廊址)라고 한다. 

조사는 충청남도와 체결한 학술조사 용역에 따라 국립부여박물관이 맡았다. 투입 조사비는 2800만 원. 조사기간은 10월 26일부터 같은 해 12월 24일까지 대략 2개월이었다. 계절로 보면 늦가을에서 한겨울에 걸치는 시기인 데다 혹한기가 포함된 까닭은 긴급히 발굴 예산이 책정되고, 그것을 연말까지 소진해야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당시 물가 수준을 고려한대도 3000만 원도 되지 않아 턱없이 부족한 조사비다. 당시 부여박물관장이자 조사단장인 신광섭 현 울산박물관장의 말. 

“그 예산은 나중에 초대 문화재청장이 될 노태섭 당시 문화재관리국 기념물과장이 지원한 겁니다. 과장 전결 예산 지원 한도가 아마 3000만 원이었을 거예요. ‘금동대향로 발굴은 내가 지원해서 된 거다’는 말을 그분이 지금도 하는데, 이때 향로를 찾았어요.” 

향로가 발견되고 수습된 시점은 12월 12일 한밤중. 조사 내력을 더 파고들면, 이상한 점이 더 있다. 조사 종료 시점이 성탄절 이브인 12월 24일이라 하지만, 문화재관리국이 허가한 조사 종료 시점은 12월 5일이었다. 더구나 실제 조사한 발굴 면적도 정확한 수치가 남아 있지는 않지만, 당초 허가받은 면적보다 훨씬 넓었다.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다시 신 관장의 말.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지금 같으면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제가 고발당할 일이었어요. 허가받은 기간을 넘기면서 조사했고, 허가받지 않은 지역까지 발굴했으니까요. 그 예산으로는 시굴조사밖에 못해요. 무리해서 조사했지요. 그러다가 금동대향로를 찾았어요. 그 반향이 워낙 컸으니, 이런 일들은 다 조용히 지나갔고, 더구나 이후 능산리 사지 발굴조사에서는 연간 발굴조사비가 1억 원 넘게 지원됐어요.”  

그러고 보면 백제 금동대향로는 어쩌면 배짱 발굴이 준 선물인 셈이다. 어떻든 이때 조사 결과 백제 시대 건물지로는 나중에 공방지(工房址)Ⅰ이라 일컫게 되는 제3 건물지와 서회랑지 일부인 제2 건물지, 그리고 서회랑지 바깥 소형 건물지인 제1 건물지의 3개 동이 확인됐다. 문제의 금동대향로는 이 중에서 공방지Ⅰ에서 드러났다. 이곳 유물 출토 양상이나 바닥면 상태로 볼 때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던 공간으로 생각되기 때문에 조사단은 공방지로 본 것이다. 

공방지는 건물 전면이 동쪽을 바라보는 동향(東向). 규모는 남북 길이 18.12m에 동서 폭 11.18m였다. 나아가 이곳은 대략 같은 크기의 3칸 방으로 구획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위치에 따라 이들 방은 남실(南室)·중앙실(中央室)·북실(北室)로 명명했다. 이들 중 중앙실 내부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덩이 흔적 두 곳이 드러났다. 한 구덩이는 남북 길이 72㎝, 동서 너비 48㎝, 깊이 10㎝의 타원형으로, 그 안에서는 제비 꼬리 모양 풍경판과 당초(唐草)무늬를 그린 채색 칠기 파편이 수습됐다. 

배짱 발굴로 찾은 금동대향로

한데 다른 구덩이가 문제였다. 이는 위에서 내려다본 모양이 모서리 각도를 죽인 긴 네모꼴인 말각(抹角) 장방형에 가까웠다. 긴 쪽을 기준으로 길이 135㎝에 너비 55㎝, 깊이 50㎝였다. 이곳에서 바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것이다. 조사 당시 상태와 거기에서 각종 유물이 출토되던 양상을 부여박물관이 펴낸 공식 발굴보고서는 이렇게 말한다. 

“상부는 황갈색 점토에 모래가 섞인 층으로 덮여 있었다. 이 흙을 제거하자 잘게 부수어진 와편(瓦片·기와조각)과 토기편, 토사(土沙)가 가득 채워져 있었고, 사이사이에 각종 금동제품, 금동재료, 칠기편, 토기편, 옥제품 유물 등이 섞여 있었고 그 하부, 즉 바닥 위에서는 백제금동대향로가 뚜껑과 몸체가 분리된 채 출토되었다. 그리고 이 수혈(竪穴·구덩이)의 바닥에는 길이 100㎝ 내외, 너비 9.5~13㎝, 두께 5㎜의 나무판자가 4줄로 나란히 깔려 있었다. 이 수혈의 측벽(側壁·양쪽 벽)도 나무판자를 이용하여 벽을 세웠을 것으로 추정되나 남아 있지 않았으며, 북서쪽 모서리에서 나무판을 결구(結構·이음)했던 철제 못이 발견되었다. 이 수혈은 공방에 필요한 물을 저장해 두는 수조(水槽)로 보인다.” 

이로 미루어 백제금동대향로를 이 목제 박스 안에 넣어 놓았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이 박스를 수조(水槽), 즉 물을 채우는 상자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향로는 발견 당시 상태가 어떠했을까? 다음은 발굴보고서의 그 대목이다.    

“향로는 뚜껑과 몸통이 분리된 채로 출토되었는데, 뚜껑은 주연부(周緣部·테두리)가 북쪽을 향한 채 비스듬히 놓여 있어 봉황이 하늘을 향하도록 되어 있었고, 몸통은 대좌(臺座·받침)가 북쪽을 향한 채 완전히 바닥에 누인 상태로 발견되었다.”

이런 상황은 향로가 몸체와 뚜껑이 조립식으로 만들어진 까닭이다. 이어지는 보고서 증언. 

 “이 향로는 향로의 높이와 출토 상황 등으로 볼 때 본래 세워놓았던 것이 넘어지면서 몸통과 뚜껑이 분리된 것이 아니고, 수조 속에 집어넣을 때 뚜껑을 몸통과 분리해놓은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향로를 수조에 매장할 때 일부러 분리해 안치했을 것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향로를 제외한 다른 유물 출토 상황은 어땠을까? 다시 발굴보고서.  

“그리고 향로가 놓인 부분에는 각종 금속편, 자기편, 토기편, 기와편, 옥제품 등으로 충전(充塡)되어 있었으며, 특히 기와편은 차곡차곡 쌓여 있어 향로를 고의로 퇴장(退藏·묻어 저장)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수조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 중 일부는 (공방지Ⅰ의) 본채 중앙실 바닥에서 출토된 것과 접합되는 것도 있어 이 수조 내부가 채워진 것이 이 건물이 폐기된 시점이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말은 향로를 포함한 수조 내부 유물들이 폐기된 시점과 폐기된 정황을 추정하는 데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보고서 기술을 신뢰한다면 향로를 비롯한 유물은 누군가가 무슨 사연으로 일부러 묻었다. 건물이 폐기된 시점이라 했으니, 아마도 화재 등의 비상시국에서 그것을 지키고자 묻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귀중품이라 생각해서, 그런 비상사태가 수습되고 난 뒤 어느 시점에 다시 꺼내려 했을지 모를 일이다.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일대 전경 ‘능산리 고분군 전시관’ 일대 전경 [부여군 제공]

부처님 보관인가 했더니…

그렇다면 향로 발견 당시 실제 현장 사정과 그 공개를 둘러싼 상황은 어떠했을까?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사로서 실제 현장을 조사한 김종만 국립제주박물관장은 금동대향로를 발견하고 수습한 12월 12일 그날 상황에 대해 “최초 발견 시각은 오후 세 시쯤 넘어서”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사자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이 처음 나왔어요. 향로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부처님 보관(寶冠)이 아닌가 생각했지요. 한데 조금 더 파보니깐 보관은 아니더라고요. 향로라는 건 네 시 반쯤 알았을 겁니다.”  

그날 저녁 무렵 박물관으로 들어간 그는 이런 사실을 신광섭 관장한테 보고한다. 

“당시 관장님 댁은 대전이라, 대전에서 출퇴근하셨거든요. 한데 눈이 온다 했는지 어땠는지 해서 그날따라 집에 안 가시고 관사에 계시더라고요. 보고드리니 신 관장님이 ‘그럼 내가 현장에 가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현장 나오셔서 발굴을 직접 지휘하셨지요. 이렇게 해서 현장에서 수습한 향로를 (부여)박물관으로 수습해 온 게 저녁 9시 무렵이었을 겁니다.” 

이에 대해 신 관장은 “그날 대전에 있던 집사람하고 애들이 부여로 오는 바람에 내가 대전을 안 가고 관사에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 다른 조사원들이 말하는 그날의 회상은 조금 더 상세하다. 이들의 신원을 지금 밝히기는 곤란하므로 일단 익명 처리한다. A씨의 증언.  

“12월 12일 오후 점심 먹고 나서 두세 시쯤 됐을 거예요. 수혈 2개 중 하나는 제가 파고, 다른 한 곳을 B 선생이 팠지요. 저는 일찍 조사가 끝났어요. B 선생이 불러 그쪽으로 가보니 그 수혈에서 동물무늬가 노출되기 시작했어요. 나중에 밝혀졌지만, 향로 뚜껑을 장식하는 동물이었어요. 그래서 김종만 학예사님께 보고했지요. 아마 제 기억에는 현장에는 신광섭 관장님보다 김정완 당시 부여박물관 학예실장님이 먼저 오셨던 거 같아요. 현장에서는 추우니깐 현장을 얼지 않게 잘 덮고 내일 파자고 얘기했던 거 같은데, 관장님이 나오셔서 상황이 변해 그날 밤 다 발굴하고 향로를 수습하고는 박물관으로 옮겼어요.” 

이들 조사원에 의하면, 신 관장이 커피 포트랑 랜턴을 들고 나타났을 적에는 이미 조사 인부들은 다 퇴근한 뒤였다. 믹스 커피 한 잔씩 종이컵에 타서 마시고는 랜턴을 들고 비추는 가운데 간간이 사진촬영까지 해가며 발굴을 계속했다. 수조는 흙이 가득 찬 상태였고 더구나 물까지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순서를 바꿔가며 맨손으로 정신없이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솟아오르는 물을 커피 종이컵으로 퍼내면서 말이다. 그 추운 엄동설한 밤중에 맨손으로 차가운 물이 나오는 진흙을 연신 퍼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향로가 모습을 드러내자, 이를 오동나무 상자에다 옮겨 넣어 차에 싣고는 그날 밤 박물관에 들어갔다. 흙으로 범벅인 향로는 박물관에서 따뜻한 물로 세척했다.  

문화부 장관까지 출동한 발굴 현장

그다음 날 아침, 현장은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먼저 출근한 작업반장이 “발굴 현장에 도둑이 들어 유물을 파갔다”면서 얼굴은 사색이 되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장에는 속이 텅 빈 구덩이와 그 속 나무상자가 덩그러니 노출된 데다가, 그 주변의 간밤에 퍼낸 흙더미에는 각종 금붙이가 나뒹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습한 향로가 언론을 통해 공식 공개되기는 열흘이 지난 그달 22일이다. 발견·발굴로부터 무려 열흘이 지난 시점이다. 보통 이런 고고학 발견의 대사건은 정부 당국이 즉각 공개하려 하기 마련이다. 정권 홍보에 고고학 발굴만큼 좋은 소재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때는 김영삼 문민정부가 출범한 첫해였다. 그런데도 정권 홍보에는 제격일 법한 향로 발굴 사실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야 공개됐다. 그 이유에 대해 신 관장은 “상부와 공개 시점과 공개 방식을 두고 조율해야 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부여박물관이 독단적으로 공개를 결행할 수는 없으니,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부, 그리고 청와대로 이어지는 라인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지체되었다는 것이다.  

부여박물관에서 진행된 대향로 실물 공개 현장과 발굴 현장에는 이민섭 당시 문화부 장관이 참석했다. 장관이 발굴 현장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아마도 박정희 시대 이후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정부 차원에서도 향로 발굴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엿보기에 충분하다. 

이런 대향로 발굴 과정을 보면서 못내 궁금한 점 하나를 신 관장에게 직접 물었다. 왜 향로를 한겨울 한밤중에 발굴하고 수습했느냐고. 

“무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요즘 같으면 그리 해서도 안 되지요. 다만 그것이 출현할 때만 해도 그리 귀한 것일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런 귀중한 유물을 현장에다가 그대로 두고 내일을 기약할 수는 없었습니다. 발굴 현장에는 조사원도 있고 발굴 인부도 많습니다. 중요한 유물이 나왔다는 정보가 언제 어디로 새어나갈지도 몰랐고 그리되면 도굴을 부를지 모른다는 우려도 컸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조금은 무리해서라도 그날 밤 발굴하고 수습한 것입니다. 좀 더 정밀하게 조사하지 못한 책임은 제가 통감합니다.”  

1993년 12월 12일 첫 발굴 당시 대향로. 몸체와 뚜껑(아래)이 분리돼 있다.1993년 12월 12일 첫 발굴 당시 대향로. 몸체와 뚜껑(아래)이 분리돼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김태식의 考古野談

석가탑 도굴 미수가 내린 축복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5월 호


1978년 경주 황룡사지 발굴조사 때 들어 올려진 구층목탑의 심초석.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사리공이다. 1978년 경주 황룡사지 발굴조사 때 들어 올려진 구층목탑의 심초석.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사리공이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황룡사도 우리가 도굴했다.”  

1966년 석가탑 도굴 사건은 비록 미수에 그치기는 했지만, 범행 대상이 국내 어느 문화재보다 상징성이 큰 데다, 그 수법이 대담했으며, 더구나 도굴단 뒤에는 삼성그룹 이병철 회장의 친형이 있었다는 점에서 그것이 미친 여파가 자못 컸다. 한데 경찰이 막상 도굴단을 붙잡아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마수가 문화재 현장 곳곳에 뻗쳤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시 관련 언론보도를 종합하면 이들은 1964년 이후 경주와 주변 지역 석탑과 사찰, 그리고 고분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범행 대상에 뜻밖에도 경주 황룡사지 구층목탑 사리장엄이 들어 있었다.  

이해 9월 24일자 동아일보 7면을 보면, 도굴단을 검거한 서울시경이 전날 도굴범들을 대동하고는 범행 현장검증을 실시했다는 기사가 관련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시경 수사과 제3계장 이억조 경감 지휘 아래 실시된 이날 검증에서 도굴범들은 덩그러니 터만 남은 목탑 현장에서 목탑 중심 나무기둥을 올려놓는 받침돌인 심초석(心礎石)을 어떻게 도굴했는지 재연했다. 목탑 바닥시설 한복판에 위치한 심초석은 동서 최장길이 435㎝, 남북 최장길이 300㎝, 두께 104~128㎝, 무게 30t으로 추정되는 불규칙한 타원형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였다. 

심초석 위에는 위가 뾰족하고, 그 한복판에는 기둥 구멍을 마련한 또 다른 거대한 화강암 덩이 하나가 덮개돌처럼 놓인 상태였다. 범인들은 이 덮개돌을 자동차 타이어를 갈 때처럼 무거운 것을 들어 올릴 때 쓰는 기구인 잭(jack)을 이용해 밀어 올리는 장면을 재연했다. 덮개돌 아래 심초석 위쪽 중앙에는 한 변 길이 49㎝, 깊이 34.5㎝의 정사각형으로 움푹 파인 구멍이 드러났다. 이곳이 사리공(舍利孔)이라 해서 탑을 세울 때 부처님 진신사리와 함께 각종 귀중품을 안치하는 공간이다. 도굴단은 이곳을 턴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떻게 이곳을 도굴할 생각을 했으며, 그들이 턴 것들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이보다 대략 21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64년 12월 26일 자정 무렵, 훗날 석가탑 도굴 미수 사건의 주범이 되는 김모 씨는 인부 몇 명을 대동하고 황룡사 목탑 터 현장에 나타났다. 야음을 틈타 이들은 3t짜리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오일 잭과 렌치를 이용해 심초석 덮개돌을 동쪽 부분에서 30㎝가량 들어 올리고는 사리공에서 각종 사리장엄 공양품을 걷어냈다. 범행이 알려지면 안 되므로, 덮개돌은 다시 제자리로 내려놓았다. 이들이 꺼낸 유물 목록을 당시 언론에서는 호박구슬 100점, 은제 밥그릇 3점, 동제(銅製) 도장 1점, 상자 1점, 각형 합(角形盒) 1점, 환봉(丸棒·둥근 막대기) 1점, 은술잔 1점, 기타 1점 등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이들이 도굴한 물품은 공범 중 한 명인 윤모 씨를 거쳐 서울 인사동 K골동품상 주인 김모 씨에게 15만 원에 매각됐다.  

경주박물관 수위 출신 도굴범

이 도굴사건 주범과 공범 관계인 김씨와 윤씨는 비슷한 수법으로 경주와 인근 지역 중심으로 도굴을 일삼다가 마침내 1966년 9월, 실로 대담하게도 석가탑 도굴을 시도하다가 미수에 그치고 이것이 빌미가 돼 마침내 경찰에 덜미를 잡히고 만다. 석가탑 도굴 사건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황룡사 목탑 터도 털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들이 먼저 불었을 리는 없을 테고, 아마 석가탑 도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경찰의 수사망이 전국 골동품업계로 확산되는 과정에서 꼬리가 밟히지 않았나 하는 추측을 해본다. 그렇다면 이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를 통해 황룡사 목탑 터를 털 생각을 했을까.  

이런 의문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주시할 인물이 윤씨다. 석가탑 도굴 미수사건 당시 그는 나이 38세에 경주시 배반동 거주자로 등장한다. 한데 당시 언론보도를 보면 그는 이력이 묘한 데가 있으니,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수위로 10년 정도 일했다는 점이다. 이미 고인이 된 지 오래인 그를 기억하는 경주 지역 인사는 제법 많다. 1962년 이래 1985년까지 한국일보와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경주 주재 기자로 있으면서 문화재 분야를 전담한 우병익(84) 선생은 그의 이름을 대자 대뜸 “아, 그 도굴왕?”이라고 되묻는다. “하도 오래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경주박물관 출신일 거야. 도굴을 일삼아서 도굴왕이라 했어. 첨성대 앞에 과수원이 있었거든. 그 과수원을 사서 고분을 도굴하던 친구야. 나쁜 놈이야. 그 친구가 석가탑도 도굴하고, 황룡사 목탑도 도굴했잖아”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당시 경주박물관은 명색이 국립박물관 지방 분관이었으나 “당시 직원이라고 해봐야 관장 1명에 행정주사 1명밖에 없었고, 나머지는 일용직이었다”면서 “경주박물관 학예사로는 강우방이가 처음일 것”이라고 한다. 훗날 국립경주박물관장을 지낸 저명한 미술사학자 강우방 선생 역시 “내가 1970년에 경주박물관 학예사로 갔는데, 내가 국립박물관 역사상 지방 박물관 학예사 1호야”라면서 “그전까지 관장만 있고 학예사는 따로 없었다”고 한다. 

윤씨는 이런 경주박물관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는 가운데 아마도 유물과 유적을 보는 감식안을 터득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틀림없이 사리장엄이 석탑과 목탑 어디에 주로 안치되는지도 대략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서 말한 동아일보 보도에서 도굴을 감행한 김씨 등이 “경주박물관에서 군복무 미필자로 퇴직된 윤씨의 지시를 받아 도굴하기 시작했다”고 언급한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범행 현장에 동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윤씨가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사리장엄이 있을 위치를 지목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윤씨를 도굴 현장으로 내몬 직접 원인 중 하나가 병역을 필하지 않았다 해서 박물관에서 쫓아낸 일이라는 점이다.

석가탑 도굴엔 왜 실패했나

현재의 황룡사지 구층목탑 심초석과 그 위의 덮개돌. 현재의 황룡사지 구층목탑 심초석과 그 위의 덮개돌. [김태식]

1964년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 도굴 성공에 자신감을 얻은 듯, 이들의 도굴 행각은 범위를 확대해 경주 남산 기슭 절터에서는 순금제 불상을 파냈는가 하면 양산 통도사를 털기도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1966년 9월 초에는 석가탑을 범행 대상으로 삼기에 이른다. 이들에 의한 석가탑 도굴 미수사건을 다룬 지난 4월호 기사에서 충분히 언급하지 못한 대목이 있어 여기서 잠깐 살피기로 한다.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 도굴에 성공한 이들이 왜 석가탑은 실패했던가. 경찰 수사 결과 윤씨 일당 4명은 9월 3일 낮, 경주시 배반동 윤씨 집에서 석가탑을 도굴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의해 이들은 그날 밤 11시, 3t 오일 잭을 휴대하고 경주지역 택시를 대절해 불국사에 도착한 다음, 야음을 틈타 석가탑 1층 옥개석을 올리려 했으나 실패했다. 돌이 무거워 잭이 견뎌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일당은 이튿날 밤 11시에 다시 석가탑으로 갔다. 이번에는 일당 중 한 명이 대구에서 긴급 공수한 더 큰 오일 잭을 동원했다. 하지만 허당이었다.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리긴 했지만 사리공과 사리장엄 흔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들이 탑 몸통 중에서도 1층 탑신 덮개돌인 1층 옥개석을 들어 올린 이유는 다른 석탑 사례를 볼 때 사리공은 주로 1층 탑신에서 발견되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전 정보는 아무래도 윤씨가 제공했을 것이다. 

1층에서 실패한 일당은 5일 밤 11시에 다시 석가탑으로 간다. 참으로 집요했다. 이번엔 맨 꼭대기 3층 옥개석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실패했다. 3층 탑신석에도 사리공의 흔적은 없었다. 이 장면을 보고는 실로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도굴 미수사건 여파로 그해 말, 문화재관리국이 석가탑을 해체했더니, 사리공과 사리장엄은 2층 탑신에 있었기 때문이다. 도굴꾼의 마수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 2층 탑신 사리공에서 현존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이라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이 나왔다. 

도굴에 노출된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

현재 황룡사지 현장 사정을 보면 그 사역(寺域) 대부분은 발굴조사가 완료됐고 그 결과 건물 기초 부분이 드러난 상태로 정비가 이뤄졌다. 그 남쪽 전면 사역 바깥에서는 한창 발굴조사가 이뤄지고 있다. 남쪽 정문을 통해 사역으로 들어서면 우람한 사각형 토단(土壇)이 중앙에 턱하니 버티고 섰으니, 이곳이 바로 구층목탑이 있던 자리다. 그 한복판에는 앞서 말한 심초석과 그 덮개돌이 있다. 이곳이 바로 황룡사에서만이 아니라 신라 왕국의 중심이었다. 목탑 뒤편엔 이 탑 자리보다 규모가 더 큰 또 다른 토단이 있고, 그 중앙선을 따라 동서 방면으로 거대한 화강암 받침돌들이 줄을 짓고 섰으니, 이곳이 구층목탑과 함께 신라시대 삼보(三寶) 중 하나로 꼽히는 장륙존상을 안치한 금당이 있던 자리다. 

현재의 황룡사 사역은 1970년대 박정희 유신정권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문화재 관광 프로젝트인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발굴조사와 정비가 이뤄진 결과다. 황룡사지 발굴은 이 계획 중 하나로 포함돼 1976년 4월부터 1983년 말에 이르기까지 8개년에 걸쳐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이전에 황룡사지는 민가가 들어차고 논밭으로 개간되던 곳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중앙정부와 경주시는 민가 100여 호를 철거하는가 하면 연차로 토지도 매입하기 시작해 5만6000여 평을 사들였다. 현재 황룡사 일대는 원래의 황룡사 담장 안쪽 2만5000평을 포함한 주변 일대가 국유지 혹은 시유지다. 

이 관광개발계획 추진 이전에도 황룡사지 일부에 대한 정비가 이뤄졌다. 한데 이것이 그만 도굴꾼을 불러들이는 미끼가 될 줄은 어느 누구도 몰랐다. 도굴이 자행되기 바로 직전인 1964년, 문화재위원회는 황룡사 목탑지를 점거한 민가 한 채를 철거한다. 이때 사정을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가 펴낸 ‘황룡사 유적발굴조사보고서Ⅰ’(1984)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특히 목탑지 심초석 위로 민가의 돌담장이 마련되어 있어 관심 있는 학자들에 의한 고찰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문화재위원회에서 목탑지 심초석 위에 마련된 민가 1동을 철거하기로 결정하고, 1964년도에 민가를 철거함으로써 당초에는 노출되지 않았던 심초석이 뚜렷이 확인됨으로써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아울러 심초석 상면에 놓여 있던 방형 대석(方形大石·덮개돌을 말함)이 뚜렷이 노출되었고, 이를 그 상태로 보존키로 하였던 것이다.”(33쪽)  

보고서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목탑지 민가 철거는 학자들을 위한 행정 조치였다. 현지를 찾는 연구자들이 불만이 많았던 모양이다. 민가가 점거하고 있으니, 그 유명한 황룡사 목탑 터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을 것이다. 이런 요구를 받아들여 민가를 철거해 마침내 목탑 터 바닥이 드러난 것인데 이것이 그만 학자들이 아니라 도굴꾼을 불러들이게 될 줄이야. 결과만 놓고 볼 때 민가 철거는 고양이 앞에 생선을 던진 꼴이었다. 하기야 민가 철거를 결정한 문화재위원회나 문화재관리국도 설마 이 목탑 심초석 아래에 도굴되지 않은 사리장엄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있었다고 해도 사리장엄은 당연히 도굴당하고 없었을 것이라고 여겼으니 말이다.

뒤늦게 드러난 신라사의 비밀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 관련 유물 도굴사건은 정리하면 이렇다. 사건은 1964년 12월 26일 자정 무렵에 발생했다. 하지만 이 사건이 드러난 것은 2년이 지난 1966년 9월, 석가탑 도굴 미수사건이 터지고 그 범인들을 경찰이 체포하면서였다. 이들 유물은 당연히 곧바로 국가에 압수되고 국립박물관으로 옮겨갔다. 현재 이들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 불교조각실에 상설 전시 중이다.  

한데 이 사리장엄 관련 유물이 제대로 빛을 보기까지는 다시 이보다 더 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인물을 우리는 마주한다. 황수영(1918~2011). 동국대 교수로서 이 대학 총장을 지내고 1971~74년에는 국립박물관장을 역임한 한국불교미술사의 거장이다. 문화재위원을 오랜 기간 맡았으니, 석가탑 도굴사건이 터졌을 때는 문화재위원회 피해조사반장이기도 했다.  

이런 황수영에게 실로 묘한 인연은 도굴 직후 서울로 올라온 황룡사지 목탑 사리장엄 도굴품을 그가 직접 실견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관련해 황수영은 생전에 쓴 어떤 글에서 “이런 불행한 찰나(도굴사건이 터진 그때)에 서울에서 이 사리구(舍利具·사리장엄)의 감정 의뢰를 받은 필자”라고 했다. 앞서 보았듯이 당시 경찰 조사 결과 이들 사리장엄 관련 유물은 서울 인사동 한 골동품상에게 15만 원에 팔린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골동품상이 아마도 황수영에게 감정을 의뢰한 듯하다.  

황수영이 감정한 유물 중에는 3장을 이어 붙인 가로 23.5㎝, 세로 22.5㎝인 금동판이 있었다. 황수영은 “이들 금동판에 문자가 있다는 사실만은 이것을 초견(初見)한 1964년에 알 수가 있었는데, 그 전면에는 두껍게 녹수(錄銹·녹을 말함)가 덮여 있어 오직 수삼자(數三字)의 존재만을 식별할 수 있었을 따름”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사정이 변한 것은 1971년 9월, 그가 국립박물관장에 임명되고 나서였다. 관장 취임 이후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 유물 정리에 착수한 그는 1972년에는 원자력연구소 김유선 박사에게 의뢰해 “표면의 녹을 제거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도금된 각판 내외의 명문(銘文)을 거의 판독함에 이르렀다”고 한다. 

녹을 벗은 이 금동판은 놀랍게도 황룡사 목탑 창건과 신라 경문왕 11~12년(871~872)에 걸친 탑 수리 과정을 정리한 문서였다. 글자는 금동판 앞뒤에서 총 74행에 걸쳐 905개가 확인됐다. 이에 의해 이 문서는 제목이 ‘황룡사 찰주본기(皇龍寺刹柱本記)’이며 글은 박거물(朴居勿)이 지었음이 밝혀졌다. 문서를 보면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643), 중국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탑을 조성하기 시해 같은 왕 15년(646)에 완성했다. 그러다가 90여 년이 지나 탑이 기울어져 경문왕 11년에 중수를 시작해 이듬해에 마쳤다고 한다. 이 찰주본기는 수리에 관여한 당시 관리들 명단을 적었으니 김위홍(金魏弘)이 총책임자로 등장한다. 신라 향가를 집대성한 ‘삼대목’의 편찬자이자 진성여왕의 연인으로 유명한 그 위홍이다. 이 찰주본기는 대략 황룡사 구층목탑의 내력이 삼국유사에 정리된 그것과 큰 골격은 같지만 신라사와 관련한 새로운 내용 또한 적지 않게 알려준다. 

이 찰주본기를 포함해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구는 도굴, 더욱 정확히는 석가탑 도굴 미수가 내린 선물이었다.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직설 무령왕릉’ 

[출처] 김태식의 考古野談 석가탑 도굴 미수가 내린 축복 황룡사 목탑 사리장엄|작성자 지도로1자5치

김태식의 考古野談

도굴이라는 이름의 전차, 석가탑으로 돌진하다


김태식|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언론인


2017년 04월 호


이번 호부터 문화재 발굴 막전막후 비화를 소개하는 ‘김태식의 고고야담(考古野談)’을 연재합니다. 필자인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은 언론사에서 17년 이상 문화재 분야를 담당한 베테랑 언론인 출신입니다. 한국 문화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언제 탄생했으며, 어떤 가치를 부여받아 오늘에 이르렀는지, 도굴과 발굴은 어느 지점에서 만나고 갈라지는지, 익숙한 문화재에 얽힌 사건과 인물 비화 등을 중심으로 흥미롭게 재구성해 보여줄 것입니다.



“불국사 대웅전 오른쪽에 있는 국보 제21호 불국사 삼층석탑인 석가탑(일명 무영탑)이 지난 8월 29일에 있었던 지진으로 심한 균열이 생기고 약 7도가량 서남쪽으로 기울어져 도괴 직전에 있음이 6일 뒤늦게 발견되어 김판영(金判永) 도교육감이 현지를 담사하고 이의 해체 복원을 문교부에 긴급 요청했다.”  


1966년 9월 8일자 동아일보 7면에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하는 ‘불국사 무영탑 도괴 위기’라는 제목의 4단짜리 기사가 게재됐다. 이에 의하면 석가탑은 8월 29일 오후 8시경 경주에서 발생한 규모 2의 지진으로 1층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덮개돌) 사이에 끼어 있던 부식된 쐐기가 주저앉으면서 약 5㎝의 틈이 생기는 바람에 서남쪽으로 7도가량 기울어졌다. 


이 때문에 1층 탑신 남쪽 부문 기둥에서 가로, 세로 각 30㎝, 두께 5㎝ 크기인 조각이 땅에 떨어졌는가 하면, 1층 동쪽 부문 기둥은 손바닥 크기만큼 떨어져 나갔고 2층 동쪽 갑석(甲石·반석 위에 다시 올려놓은 납작한 돌) 또한 벽돌 크기만큼이나 떨어져 나갔다. 나아가 2층 서편 옥개석 갑석은 가로 60㎝, 세로 15㎝, 두께 15㎝가량이 허물어지고, 2층과 3층 사이 탑신 모퉁이는 손바닥만큼 떨어져 나갔다.  


이 사건을 경북도교육감이 관련 중앙 부처에 보고한 까닭은 당시까지만 해도 문화재 관리 업무를 교육부에서 했으며, 이를 전담하는 조직으로 문화재청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교육부 산하였기 때문이다(현재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이런 보고를 받은 문화재관리국은 8일 오전 11시 유형문화재 분야를 담당하는 제1분과 회의를 열어 석탑 훼손 상항을 조사하기 위해 문화재위원인 황수영 당시 동국대박물관장과 임봉식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장 등으로 구성한 조사단을 현지로 급파했다.  


문화재 중의 문화재, 대한민국 대표 문화재 중 하나로 통하는 석가탑이 지진 여파로 무너지기 일보 직전에 처했다는 이 사건은 하지만 이내 엉뚱한 데로 방향을 틀고 말았다. 문화재위 현지 조사 결과 석가탑에 막대한 피해를 주고 도괴 위험으로까지 내몬 원인은 지진이 아니라 바로 도굴꾼들이 탑신에 낸 구멍이었다. 도굴꾼들이 노린 것은 부처님께 공양하기 위해 탑신 안에 안치한 각종 귀중품인 탑사리(塔舍利)였다. 하긴 천년을 버틴 석가탑이 규모 2의 지진에 저리 허망하게 망가지기는 힘든 노릇이다. 


지진에서 도굴로


이런 사태 전개에 여론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는 불 보듯 뻔하다. ‘도대체 문화재 관리를 어떻게 했기에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불국사에서 버젓이 석탑 도굴이 일어난다는 말인가’ 하는 성토가 난무할 수밖에 없었다. 도굴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이제 경찰로 불똥이 튀었다. 도굴꾼들을 색출하라는 엄명이 떨어졌으니, 경주경찰서를 뛰어넘어 지금의 경찰청 전신인 치안국이 직접 나서 정상천 수사지도과장을 현지에 급파해 사태 파악에 나섰다. 


한데 반전이 또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사태 전개가 경찰이라고 달가울 리 없었다. 도굴을 미연에 방지하지 못한 책임 추궁에서 경찰 역시 자유로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경찰은 문화재위 발표를 거부했다. 무게 수십 t가량이나 되는 탑신 돌을 어떻게 들어올리느냐면서 노골적으로 문화재위와 대립했다.  


그러면서 경찰은 실제 탑이 훼손된 부위에서는 도굴 시도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당당히’ 맞선 것이다. 9월 14일자 경향신문은 7면에 “현장에서 도굴을 위한 흔적을 육안으로는 발견할 수 없었다”면서 정확한 파손 원인을 가리기 위해 “역학 권위 교수, 물리학자 및 문화재관리위원 등 광범위한 권위자들로 구성된 합동수사반을 편성하겠다”는 경찰 발표를 전한다. 


하지만 자연풍화라고 주장하는 경찰도 못내 미심쩍기는 했는지, 불국사 파출소에다 특별수사본부까지 차리고는 사건 수사에 본격 착수한다. 합동수사반 편성을 발표한 날 경찰 수사본부는 경주시 교리에 거주하는 채모(38) 씨와 경주시 인왕리 거주 김모(44) 씨 2명을 유력한 용의자로 검거해 수사본부로 연행해서 범행을 추궁하는 한편, 또 다른 용의자 16명을 수배했다. 조사 결과 채씨는 그해 2월 중순 영덕군 영해면 이시리 신라고분에서 도굴한 물품을, 그리고 김씨는 8월 6일 통도사 경내에서 도굴한 골동품을 각각 경주 시내에서 팔다가 붙잡힌 전과자들이었다. 이런 보도로 보아 석가탑 도괴 위기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 골동품 업계는 경찰의 일제 수사로 초비상 사태에 들어갔을 것이다. 


나아가 이 석가탑 사건은 연쇄 파고를 일으켰다. 자연히 다른 문화재 현장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없는지를 새삼 살피게 된 것이며, 이 과정에서 경주 지역 국보 39호 나원리 오층석탑 또한 도굴을 시도한 흔적으로 보이는 파손 상태가 9월 14일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는 석가탑 파손이 도굴에 의한 것임을 뒷받침하는 유력한 방증이기도 했다. 석탑을 전문으로 도굴하는 자들이 꼭 석가탑 한 곳만 건드리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석가탑과 나원리 석탑은 같은 도굴단에 의한 소행일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도굴 부인하다 망신당한 경찰


이에 문화재관리국은 14일 긴급회의를 열어 석가탑과 나원리 오층석탑 국보 훼손 사건 진상을 가리기 위해 미술사학자인 진홍섭 이화여대 교수를 단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해 15일 아침 현지로 급파했다. 조사단에는 생물학 전공인 박만규 문화재위 제3분과 위원장과 지질학 전공인 같은 분과 손치무 위원, 황수영 박사, 최순우 국립박물관 미술과장이 포함됐으며, 문화재관리국 관련 직원 3명을 합친 8명으로 구성됐다. 


이를 결정한 회의에서 앞서 석가탑 훼손 상황을 조사하고 상경한 황수영은 “훼손 원인이 외부에서 가해진 인위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탑을 해체·복원할 것까지는 없으나, 사리가 있는지 없는지는 밝힐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이는 결국 정확한 훼손 상태 확인과 훼손 부위 수리를 위해 그해 연말 탑을 해체 복원하기에 이른다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더불어 이 해체를 통해 석가탑은 신라시대 김대성에 의해 건립된 이래 단 한 번도 해체된 적 없다는 신화도 붕괴된다.


이렇게 구성된 문화재위원회 2차 조사단은 16일 오전에는 나원리 오층석탑 훼손 현장을 점검한 결과 이 역시 탑사리를 훔쳐내기 위한 도굴단 소행으로 결론을 내린다. 문화재위는 그 근거로 5층 노반(露盤·탑 상부 부재 중 하나) 위에서 길이 50㎝인 ‘바(bar)’가 발견된 데다가, 4층 옥개석 지붕 위에서는 길이 11㎝, 두께 7㎝의 나무토막 3개와 길이 20㎝, 두께 7㎝인 나무토막 1개를 포함한 모두 4개의 나무토막이 발견된 점을 들었다. 이들 나무토막은 조사 결과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잭(jack)’을 대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추정됐다.  


아무튼 이런 사태 전개는 점점 경찰을 궁지로 몰고 갈 수밖에 없었다. 일단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반응이었겠지만, 석가탑 파손 부위에서 인위(人爲)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던 경찰은 이내 허무하게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것도 같은 경찰에 의해 무리한 억측이었음이 드러나고 말았다. 석가탑 도굴단이 검거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굴꾼 일당 체포는 불국사 파출소에 수사본부를 차린 현지 경찰의 몫이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서울시경에서 공을 채갔다. 국민적 관심이 집중된 이런 사건에는 그때나 지금이나 경찰의 특진(특별승진)이 걸려 있게 마련이다. 범인을 체포한 경찰관에겐 한 계급 특진이라는 은전이 주어진다.


그러니 같은 경찰이라 해도, 특진 앞에서는 양보나 아량이 끼어들 틈이 없다. 한데 그 공을 경주나 경북도 아닌 서울시경이 낚아채간 것이다. 현지 경찰은 분통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마다 나오는 볼멘소리가 중간에 가로챘다는 말이다. 실제 이 사건에서도 현지 경찰의 이런 불만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기차는 이미 떠난 뒤였다.    


재벌가로 불똥 튄 도굴 수사



경찰수사본부가 석가탑 도굴범 용의자로 체포한 채모 씨와 김모 씨 두 사람은 나중에 드러났지만, 석가탑 도굴범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들을 추궁하는 과정에서 전연 예상치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채모 씨가 경북 영덕의 신라고분을 도굴해 얻은 구슬 300여 점과 비취 9개(시가 100만 원 상당) 골동품을 대재벌 이모 씨의 형 이병각 씨에게 팔아넘긴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에서 말하는 대재벌 이모 씨는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었고 이병각은 삼강유지라는 회사 회장으로 주거지가 서울 정릉이었다. 


한데 이병각의 장물 구입 사건  결말은 이병각이란 거물의 체포였다. 나아가 실로 희한하게도 이병각을 둘러싼 고미술 도굴 커넥션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진짜 석가탑 도굴단을 붙잡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전개된다. 더욱 묘한 것은 석가탑 도굴단 검거는 현지에 수사본부를 차린 현지 경찰 몫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슨 일들이 펼쳐졌을까.


9월 18일 밤, 서울시경은 문화재 도굴단을 검거했다고 발표한다. 검거자 중에는 경주시 배반동에 거주지를 둔 주범 김모(45) 씨를 필두로 부두목 윤모(39) 씨와 유모(27) 씨가 있었다. 이튿날 오전 서울시경은 이들을 포함한 도굴단 5명을 특수절도 혐의로 구속하고 이들에게서 문화재 도굴품을 구입한 장물아비 2명을 장물취득 혐의로 구속하는 한편 달아난 일당 7명을 수배했다.  


더불어 경찰은 장물아비들한테서 유물을 구입한 이병각 씨도 장물취득 혐의로 수배하는 한편, 정릉동 이씨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았다. 도굴범 중에서 부두목 격인 윤씨의 이력이 독특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10여 년간 수위로 근무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 과정에서 문화재에 대한 감식안을 얻었을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 도굴단은 같은 해 3월 초 경주 남산사 절터를 도굴해 통일신라시대 순금 불상 2점을 수습해 이를 골동품상인 김모 씨에게 50만 원을 받고 팔았다. 김씨는 이를 다시 이병각 씨에게 250만 원을 받고 매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를 포함해 여죄 추궁 과정에서 드러난 이들의 도굴 행각은 전후 6차례에 걸쳐 이어졌다. 


이들의 범행 대상에는 경남 양산 통도사를 비롯한 유명 사찰이 포함됐다. 동아일보 9월 23일자 3면 보도를 보면 당시 경찰은 이병각 씨의 정릉 집을 압수수색해 11종 226점의 문화재를 압수했다. 경찰은 이를 문화재관리국에 감정 의뢰하는 한편 23일에는 압수품을 언론에 공개했다.   


경찰이 이들의 여죄를 추궁하는 과정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이 바로 석가탑 도굴을 시도한 주범임이 드러난 것이다. 경찰 조사 결과 이들은 9월 3일 밤, 택시를 대절해 불국사에 도착해 미리 준비한 ‘잭’으로 석가탑을 두 번 들어올렸으나 보물을 발견하지 못했고, 5일 밤에 다시 3번을 들어올렸으나 보물이 없어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석가탑 도굴범 검거라는 공로는 서울시경이 차지하고 말았다.

 

한데 이 석가탑 도굴단 중 부두목 윤씨와 유씨가 수사가 시작된 9월 12, 13일 이틀간 정릉동 이병각 씨 집에서 숨어 지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렇게 되자 경찰은 이씨를 장물취득 혐의 외에도 범인은닉 혐의로 수배한다. 결국 이씨는 21일 경찰에 검거돼 철야 조사를 받고는 구속된다.   


눈뜨고 당한 경주경찰


당시 이 사건을 전하는 언론보도를 보면, 이 도굴 사건 뒤에는 재벌이 있었다는 요지의 사설이나 시론이 쏟아졌다. 삼성의 막강한 영향력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도굴단 배후에 삼성이 있었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없었다. 하지만 이는 이병철 회장에게도 엄청난 부담으로 돌아온다. 석가탑 도굴이 국내 굴지의 재벌가를 소용돌이에 몰아넣을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경주경찰서와 경북도경을 중심으로 꾸린 현지 경찰수사본부는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석가탑 도굴 진범을 놓치고 서울시경에 그 공로를 빼앗기고 말았을까. 동아일보 9월 23일자 3면에 실린 ‘수사 경쟁으로 검거 늦어’라는 제하 4단짜리 기사에서 그 실마리를 풀 수 있을 듯하다. 경주발로 작성된 이 기사는 요컨대 실제 사건 해결은 경주경찰이 다 했지만 그 공로를 서울시경이 가로채갔다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이번 도굴단 주범 김모와 또 다른 김모를 11일 낮에 검거한 곳은 경주경찰서다. 이들을 추궁한 결과 경주경찰서는 다른 공범인 윤씨와 유씨가 서울 성북구 정릉동 이병각 씨 집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에 이들을 체포하고자 경주경찰서는 김시권 경사를 반장으로 하는 형사대를 13일 서울로 보낸다. 경찰은 주범 김씨를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리고 갔다.   


경주경찰서는 이병각 씨 집을 수색해야 한다는 데 무척이나 부담을 느낀 것으로 보인다. 이에 경주경찰서는 수사 협조를 위해 마침 경주경찰서장을 지낸 정문식 서울시경 수사과장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면서 협조를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기사에 의하면 정 과장은 “이씨 집은 영장이 있어도 수색하지 못하니 내려가라”고 지시한다. 이에 경주경찰서 형사대는 서울에서 철수하고 만다. 그 후 경주경찰서는 윤과 유 등 일당 7명에 대한 구속영장과 이병각 씨 집에 대한 압수영장을 극비리에 발부받아 17일 다시 서울로 올라가 서울시경에 보고했다고 한다.  


이런 보고에 서울시경은 이 도굴범 일당을 자기들이 붙잡은 것처럼 발표하고, 18일 서울지법에서 재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집행했다는 것이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일은 이 와중에 경주경찰서가 임의동행 형식으로 데려간 도굴단 두목 김모마저 빼앗기고 허무하게 발길을 돌렸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는 그에 대한 정문식 과장의 반박이 첨부돼 있다. 기사에서 그는 “터무니없는 말이다. 전 경주경찰서에서 있을 때 모두 내 옛 부하들이었는데 내가 그럴 수 있겠는가”라고 말했다. 진실은 알 수 없으나, 어쩐지 경주경찰서가 하는 말이 더 타당한 것처럼 들리기는 한다.  


석가탑 도굴 사건은 이처럼 반전이 거듭된 드라마였다. 도굴이 생계형 범죄였는지 알 수는 없으나, 돈을 노린 욕망이 있으며, 문화재를 노린 재벌가의 뒤틀린 욕망도 있었다. 또한 책임 회피를 위한 떠넘기기도 있었고, 출세를 향한 가로채기도 있었다.



김태식

김태식 

●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학사, 선문대 고대사·고고학 석사 

● 저서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직설 무령왕릉’ 

기사) 시신 도굴 미천왕, 그 영광과 비극


고조가 아니라 증조다 기사 내용 수정 바람 미천왕은 광개토대왕의 증조부임 미천왕의 아들이 고국원왕이고 고국원왕의 둘째아들이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인 고국양왕이다 고조는 개뿔 고조는 미천왕의 아버지인 돌고가 고조임 수정 바람” 

이 지적이 맞다. 아래 계보에서 보듯이 광개토왕에게 미천왕은 증조다. 고조라는 내 기사는 오류다. 
  
미천왕 – 고국원왕 소수림왕
고국양왕 – 광개토왕 – 장수왕 




시신 도굴 미천왕그 영광과 비극
(서울=연합뉴스김태식기자 최근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은 지금으로부터 꼭 1657년 전인 고구려 고국원왕 12즉 서기로는 342년 2(양력으로는 3)에 일어난 고구려 미천왕 시신 도굴사건과 흡사 닮아있다.
  
우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산 인물 중 한명인 고구려 15대 미천왕(美川王재위 서기 300~330)은 제16대 고국원왕(故國原王재위 331~370)의 부친이면서 정복군주로 이름 높은 광개토왕(재위 391~412)에게는 고조할아버지가 된다.(注-붉은고딕 글씨 부분을 증조로 수정해야 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는 권력투쟁에서 밀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숨기고 소금장수 생활로 연명한 그지만 폭군 봉상왕(烽上王)을 몰아낸 쿠데타 세력에 의해 일단 왕위에 옹립되고 나서는 광개토왕 못지않은 눈부신 정복활동을 펼치게 된다.
  
한나라 때부터 설치된 현도군을 침입해 8천 명을 생포해 평양으로 옮겼고 요동군의 서안평을 습격해 취했으며 313년에는 4백여 년간이나 계속된 중국의 낙랑군을 드디어 멸망시키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그러나 재위시절에는 우리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정복군주였다는 광개토왕이나 신라 진흥왕 못지않은 영광된 삶을 살았지만 죽고 난 뒤에는 이만저만한 모욕을 당한 게 아니었다.
  
그의 시신은 미천원(美川原)이란 언덕에 모셔졌다생전 이름이 을블(乙弗) 혹은 우불(優彿)이었던 그가 미천왕이라는 시호(죽은 뒤의 이름)를 얻은 것은 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의 아들인 고국원왕 재위 12(서기 342) 2월 북방유목민족 선비족이 건국한 전연(前燕)의 모용황(慕容愰)은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략서울인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릉을 도굴해 그 시신을 꺼내 왕모(王母)를 포함한 고구려 남녀 포로 5만여 명과 함께 끌고 돌아갔다.
  
치욕을 당한 고구려는 미천왕 시신과 왕모를 돌려받기 위해 전연에 구걸 외교를 펴는 수밖에 없었다.
  
이듬해 2월 고국원왕은 친동생을 보내 모용왕 앞에서 보물 수천 점을 바치면서 스스로 ()’이라 낮추는 치욕을 감수하고 나서야 겨우 미천왕 시신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모용왕은 여전히 왕모즉 미천왕의 왕비이면서 고국원왕의 어머니는 13년 동안이나 인질로 붙잡아두고 있다가 고국원왕 재위 25년째에야 돌려보냈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하고 있다.
  
무덤을 도굴해 시신 일부를 베어간 뒤 돈을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이번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부친 묘 도굴사건이 미천왕 도굴 사건과 흡사 닮아있다는 것은 두 사건 모두 아무 말이 없는 시신을 볼모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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