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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소(智炤)라고도 한다. 태종무열왕 김춘추 딸이다. 어머니는 누구인지 언급이 없지만, 김유신 동생 문희일 가능성이 크다. 무열왕 2년(655)에 김유신에게 시집가서 원술 이하 여러 아들과 딸을 낳았다. 성덕왕 11년(712), 부인으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 권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2년(655)…겨울 10월에…왕의 딸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삼국사기 권제8권(신라본기 제8) 성덕왕 : 11년(712)...가을 8월, 김유신의 아내를 부인(夫人)으로 책봉하고 해마다 곡식 1천 섬을 주도록 하였다.


지소(智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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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병희 선생 한국어 번역본으로 헤로도토스 <역사>를 읽다가 애매한 점이 있어 영어 번역본을 보니 자칫하면 큰 실수를 할 뻔 했는데 바로잡았다. 아래 영어 번역본은 아케메네스 왕조 건국시조인 키루스 2세 탄생에 얽힌 대목 기술이거니와, 예서 저 유명한 오줌 꿈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의 어머니 만다네가 오줌을 엄청 싸고, 그 오줌물이 흘러 국도를 잠기게 하고, 더 나아가 온 아시아를 물바다로 만들었다는 꿈 말이다. 

한데 한국어 역본을 보면, 이런 꿈을 꾼 사람이 애매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 영역본을 보면 이 꿈은 만다네 자신이 아니라, 만나네 아버지, 다시 말해 키루스 대왕 외할아버지가 꾸었다. 이렇게 해야만 왜 그의 외할아버지가 이런 태몽을 안고 태어난 외손주 키루스를 죽이려 했는지가 명확해진다. 오줌에 온 도시, 온 대륙이 잠긴다는 말은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온 세상의 주인이 된다는 예고다. 이 예고가 외할아버지에게는 불길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그 외손주에게 자신의 왕위와 왕국을 찬탈당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손주를 죽이려 했던 것이다. 

이 오줌 모티브는 놀랍게도 김유신 여동생 보희와 문희에게 그대로 재연한다. 애초 이 꿈을 꾼 이는 언니 보희다. 그 꿈을 들은 문희는 아! 이거다. 내가 언니 꿈을 뺏어야지 하고는 비단치마를 주고 그 꿈을 언니에게서 산다. 그 직후 희대의 기회가 문희에게 생긴다. 오빠 유신이가 잘 생기고 전도유망하기만 한 젊은 청년, 박보검보다 더 잘생긴 김춘추를 데리고 온 것이다. 유신이 보희한테 명령한다. 

"춘추공 옷을 꾸매주레이. 내가 잡아 뜯어뿌떼이"

보희가 눈물을 흘린다. 

"쓰바, 하필 오늘이 왜 달거리란 말인가?"

그걸 지켜보던 문희가 나선다. 

"난 달거리 막 끝났으니 내가 언니 대신 춘추공한테 들어가께. 고맙데이"

이렇게 해서 단칸방에 둘이 남은 춘추와 문희는 쿵딱쿵딱 디딜방아를 찍고는 마침내 아를 배니, 이렇게 해서 태어난 이가 신라의 꿈, 일통삼한을 달성한 희대의 영걸 문무왕 김법민이었다.


107. After this Kyaxares died, having reigned forty years including those years during which the Scythians had rule, and Astyages son of Kyaxares received from him the kingdom. To him was born a daughter whom he named Mandane; and in his sleep it seemed to him that there passed from her so much water as to fill his city and also to flood the whole of Asia. This dream he delivered over[122] to the Magian interpreters of dreams, and when he heard from them the truth at each point he became afraid. And afterwards when this Mandane was of an age to have a husband, he did not give her in marriage to any one of the Medes who were his peers, because he feared the vision; but he gave her to a Persian named Cambyses, whom he found to be of a good descent and of a quiet disposition, counting him to be in station much below a Mede of middle rank. 108. And when Mandane was married to Cambyses, in the first year Astyages saw another vision. It seemed to him that from the womb of this daughter a vine grew, and this vine overspread the whole of Asia. Having seen this vision and delivered it to the interpreters of dreams, he sent for his daughter, being then with...

오빠 김유신 빼다박은 야망가, 남편 죽자 태후 돼 권력 농단

[중앙선데이] 입력 2017.03.05 02:03 | 521호 23면 

  

페르시아 제국을 반석 위에 올려놓은 군주로 키루스(Cyrus) 2세, 또는 키루스 대제라 일컫는 인물이 있다. 기원전 576년경 제위에 올라 기원전 530년에 사망했다. 페르시아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를 개창한 그는 성서에는 고레스 왕으로 등장한다. 그의 치세에 페르시아는 메디아와 신바빌로니아, 리디아를 무너뜨리고 중동의 패자가 된다.영웅에게는 어울리는 탄생담이 있게 마련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언니의 오줌 꿈 사 춘추와 결혼

큰아들 법민은 통일 후 당 축출

나머지 아들 8명은 각간 등 지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목표 이뤄


키루스는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지방을 다스리던 군주 캄뷔세스(Cambyses) 1세와 메디아 제국 마지막 황제 아스튀아게스(Astyages)의 딸 만다네(Mandane) 사이에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스튀아게스가 하루는 꿈을 꾸었는데, 만다네가 어마어마한 양의 오줌을 누어 그의 도시가 잠기고 온 아시아가 범람하는 내용이었다. 이 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아버지는 해몽가들에게 물었다.『 역사』에서는 “그들의 해몽을 자세히 들은 그가 겁이 났다”고 한다. 이는 온 세상을 뒤엎을 영웅을 딸이 낳는다는 예고이면서 아스튀아게스에게는 자신의 왕조와 왕국을 외손자에게 빼앗기고 만다는 것을 의미했다.그러자 아버지는 메디아인들 중에서 사위를 고르지 않고, 캄뷔세스라는 페르시아인에게 딸을 시집보낸다.


시집간 첫 해,아스튀아게스는 또 다른 꿈을 꾼다. 딸의 생식기에서 포도 한 그루가 자라나더니 온 아시아를 덮는 것이 아닌가. 이 역시 해몽가들이 말하는 내용은 오줌 꿈과 같았다. 이에 더욱 불안해진 아버지는 임신 중인 딸을 페르시아에서 불러들여 감시하면서 딸이 아이를 낳으면 곧바로 그 아이를 죽일 생각이었다. “딸이 낳은 아이가 그를 대신해 왕이 될 것이란 마고스들의 해몽 때문이었다”고 헤로도토스는 말한다. 하지만 영웅은 언제나 이런 위기를 벗어난다.


문명왕후 된 김서현의 막내딸

 

이와 흡사한 오줌 꿈 이야기가 신라에도 있다. 아버지 유업을 이어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한 문무왕 김법민(金法敏)이 주인공이다. 그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맏아들이고, 어머니는 김씨 문명왕후(文明王后)이니 소판(蘇判) 서현(舒玄)의 막내딸이자 김유신의 동생이다. 문명은 문희가 왕비가 되면서 얻은 이름이다. 『삼국사기』는 그의 탄생담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그 언니가 꿈에 서형산(西兄山) 꼭대기에 올라앉아 오줌을 누었더니 온 나라 안에 가득 퍼졌다. 꿈에서 깨어나 동생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동생이 웃으면서 ‘내가 언니의 이 꿈을 사고 싶소’라고 했다. 그래서 비단치마를 주어 꿈값을 치렀다. 며칠 뒤 유신이 춘추공과 축국(蹴鞠)을 하다가 그만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떼었다. 유신이 말하기를 ‘우리 집이 다행히 가까이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답시다’라 하고는 함께 집으로 갔다. 술상을 차려 놓고 조용히 (언니인) 보희(寶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서 옷고름을 꿰매게 했다. 하지만 언니는 무슨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동생이 나와서 꿰매 주었다. 옅은 화장과 산뜻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눈부실 정도였다. 춘추가 보고 기뻐하여 혼인을 청하고 예식을 치렀다. 곧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법민이다.”


이와 거의 같은 내용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에 수록된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이야기에도 나오는 것으로 볼때, 오줌 꿈 이야기는 제법 유명했던 듯하다. 이로 빚어진 언니 보희와 동생 문희 사이의 엇갈린 운명은 연재 첫 머리 ‘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2016년 6월26일자)에서 다뤘거니와, 이 자리에서는 꿈 이야기를 통해 동생 문희에 집중하고자 한다.


언니의 꿈을 가로챈 동생의 이야기는 문희의 정치적 야망을 느끼게 한다.당초 김유신이 김춘추의 짝으로 염두에 둔 건 보희였지만, 거사를 치를 그날 하필 보희가 달거리 중이었으므로,동생 문희가 김춘추의 방에 들어가게 된다.언니가 얻을뻔한 기회, 혹은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이용하는 모습에서 우리는 어쩌면 오빠 김유신의 짙은 그림자를 본다. 그만큼 김문희는 언니 김보희에 견주어 맹랑한 여성이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이 오줌 꿈 무대를 『삼국사기』에서는 서형산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서악(西岳)이라 해서 다른 곳을 연상할 수 있으나 실상은 같은 곳이다. 경주 분지를 중심으로 서쪽에 위치한 진산(鎭山)인 선도산(仙桃山)을 말한다. 서형산은 서쪽에 있는 산 중에 상위에 위치한다는 뜻이요, 서악은 글자 그대로 당시 신라 서울 금성(金城) 혹은 계림(鷄林)의 서쪽에 있는 산이라 해서 이렇게 불렸다.선도산이라고도 신라시대에 부른 까닭은 이곳에 신라 건국시조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가 진좌(鎭坐)하는 곳으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죽어서 신라라는 국토를 지키는 신으로 화한 이 어머니를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라 한다.


보희가 이곳에 올라 금성 전체를 물에 잠기게 하는 오줌을 눴다는 이 꿈은 천하를 호령할 아들을 낳을 것이란 전조(前兆)이자 예언이다.말할 나위 없이 김법민이다.문무왕 김법민은 태자시절엔 백제 정벌 전쟁에 참전하고, 아버지가 죽은 뒤에는 왕으로서 당군과 연합해 고구려를 멸했으며, 곧이어 한반도 직접 지배라는 야욕을 노골화한 당 제국과 일전을 치러 그들을 이 땅에서 완전히 축출한 불세출의 영웅이었다.


『삼국유사』 ‘태종춘추공’ 이야기 말미에서는 “태자 법민(法敏)과 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니, 전날에 꿈을 산 징조가 이에서 나타난 것이다”고 적고 있다.법민을 비롯,기라성같은 아들들을 둔 전조가 바로 서악 오줌 누기 꿈이었음을 분명하게 한다.


김유신과 김문희는 혈통을 거슬러 올라가면 금관가야 김수로에게 닿는다. 이들의 증조가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仇衡)이고, 그 아들 김무력(金武力)이 김서현(金舒玄)을 낳으니, 이 서현이 만명(萬明)이라는 신라 왕실 여인을 취해서 김유신 이하 형제 자매들을 낳았다. 그런 까닭에 김문희 소생인 문무왕 김법민 역시 가야 피가 흐른다. 『삼국유사』 기이편에서 ‘가락국기(駕洛國記)’라는 문헌을 인용한 다음 대목은 그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신라 제30대 법민왕이 용삭(龍朔) 원년 신유(661) 3월에 조서를 내렸다. ‘가야국 시조 9대손 구형왕(仇衡王)이 이 나라에 항복할 때 데리고 온 아들인 세종(世宗)의 아들 솔우공(率友公)의 아들 서운(庶云) 잡간(?干)의 딸 문명황후(文明皇后)께서 나를 낳으셨으니, 시조 수로왕은 어린 나에게 15대조가 된다. 그 나라는 이미 없어졌지만 그를 장사지낸 사당은 지금도 남았으니 종묘에 합해 계속 제사를 지내게 하라.’”


김유신은 금관가야 구형왕 증손자 


『가락국기』는 고려시대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를 지낸 사람의 문인(文人)이 썼다. 이것이 말하는 가야사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는데, 앞에 보이는 계보 역시 그렇다. 김수로에게서 시작하는 금관가야는 건국이 서기 42년이고, 마지막 구형왕이 신라에 투항할 때는 이미 500년 뒤라, 그 중간 왕들 계보가 많은 탈락이 있어 겨우 남은 이는 9명에 지나지 않는다. 구형왕 이래 문명에 이르는 계보에서도 혼란이 있다. 김유신은 구형왕 증손자로서, 그 아버지는 김서현(金舒玄)이니, 서운(庶云)이라고도 한다. 서현이 만명(萬明)이라는 신라 왕실 여인에게서 김유신과 김문희를 비롯한 형제자매들을 낳는다. 이것이 정확한 김유신의 계보다.


역사상 언니와 동생간 싸움이 적지 않다.때로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끔찍한 혈투가 되기도 한다. 자매의 난이 왕자의 난 못지 않았다는 얘기다. 예컨대 전한시대 말기 황제 성제(成帝)를 사이에 두고 총애를 다툰 조비연(趙飛燕)·합덕(合德) 자매 역시 그러했다. 비연은 동생 합덕을 후궁으로 들였다가 나중에 동생에게 성제의 총애를 뺏겨버리면서 쟁투를 벌인다. 

  

보희와 문희 역시 그러하다. 이들 자매는 김춘추라는 걸출하면서도 잘 생긴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쟁투를 벌이다가 결국은 여동생 차지가 되고 만다. 이렇게 원하는 남자를 손아귀에 넣은 문희는 남편이 왕이 되자 왕후가 되고, 남편이 죽고 아들이 즉위하자 태후가 되어 권력을 농단(壟斷)한다.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문희는 오빠 김유신을 빼닮았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소백산맥 기슭 산골에서 태어났다. 연세대영문학과에 들어가 한때는 영문학도를 꿈꾸다 가난을 핑계로 접었다. 23년간 기자로 일했는데, 특히 역사와 문화재 분야에서 한때 ‘최고의 기자’로 불리며맘껏 붓끝을 휘두르기도 했다. 무령왕릉 발굴 비화를 파헤친 『직설 무령왕릉』을 비롯해 『화랑세기 또하나의 신라』 『풍납토성』 등의 단행본을 냈다.

백제 멸망, 김춘추 사위의 치정이 부른 복수극

[중앙선데이] 입력 2016.08.21 00:46 | 493호 23면

  

백제는 660년 음력 가을 7월 18일, 사비성(泗?城)에서 북쪽 웅진성(熊津城)으로 도망친 의자왕이 나당(羅唐)연합군에 항복함으로써 700년 사직에 종언을 고했다. 이때 일은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 7년(660)조에 자세하게 나와있다. 이에 의하면 의자왕은 이달 13일 포위망을 뚫고서 가까운 신하들만 데리고 야음을 타 웅진성으로 들어갔다. 현지에 남은 의자왕의 아들 융(隆)은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 항복했다. 그리고 닷새가 지난 18일, 의자왕마저 태자를 데리고 웅진성을 나와 항복했다.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같은 달) 29일 금돌성(今突城)에서 소부리성(所夫里城)에 도착해 제감 천복(天福)을 당에 보내 싸움에서 이겼음을 보고했다”고 『삼국사기』는 적고 있다. 금돌성은 지금의 경북 상주시 모동면 수봉리에 있었고, 소부리성은 백제 마지막 수도로 지금의 충남 부여에 있던 사비성을 말한다.

  

그에 앞서 사비성이 함락되던 날 치욕의 현장을 태종무열왕 본기는 이렇게 적었다.

  

“법민(法敏)이 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는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기를 ‘예전에 네 아비가 억울하게 내 누이를 죽여 옥중(獄中)에 파묻은 일이 나를 20년 동안 마음이 고통스럽고 머리가 아프도록 하더니, 오늘에야 네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게 되었구나’라고 하니, 융은 땅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법민, 항복하는 부여융에게 침 뱉어우리는 백제 개로왕에게 앙심을 품고 고구려로 도망가서 나중에는 그 침략군 앞잡이가 되어 나타난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萬年)이라는 두 사람이 개로왕을 사로잡고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하고 임금 얼굴을 향해 침을 세 번 뱉고는” 아차성(阿且城) 아래로 보내 죽인 장면을 기억한다. 실상 그와 똑같은 치욕을 훗날의 문무왕이 되는 신라 태자 김법민은 백제 왕자 부여융(夫餘隆)에게 가한 것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개로왕을 모욕한 이들은 말에서나 내렸지, 김법민은 말 위에 그대로 걸터앉은 채 침을 뱉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20년 전 ‘네 아비가 내 누이를 죽인 일’이란 무얼 말하는가.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 백제 의자왕 2년(642) 두 나라 사이에 일어난 대야성 전투를 마주한다.

  

이 무렵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 양국의 협공에 내내 시달리는 중이었다.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몰아치고, 백제는 신라 서쪽 변경을 들이쳤다. 이해만 해도 7월에 의자왕이 병사를 크게 일으켜 미후(??)를 비롯한 신라 서쪽 변경 40여개 성을 빼앗았는가 하면, 그 다음 달에는 백제가 다시 고구려와 합세해 신라가 당과 교유하는 서해안 창구인 당항성(?項城)을 침범해 당과 통하는 길을 끊으려 한 일도 있었다. 이 와중에 저 유명한 대야성 전투가 있었다. 결과만 놓고 보면 신라는 치열한 공방 끝에 대야성을 내준 것은 물론 이곳을 지키던 성주(城主) 품석(品釋) 부부가 죽임을 당하고, 남녀 1000명이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대목을 『삼국사기』 백제 의자왕 본기는 이렇게 전한다.

  

“8월에 장군 윤충(允忠)을 보내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 대야성을 치니 성주인 품석이 처자식을 데리고 나와 항복했다.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은 목을 베어 그들의 서울로 보냈다. 남녀 1000여 명을 사로잡아 서쪽 지방 주(州)와 현(縣)에다가 나누어 살게 하고는 병사를 남겨 그 성을 지키게 했다. 임금이 윤충이 공로가 있다 해서 말 20필과 곡식 1000섬을 주었다.”

  

더 상세한 내용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와 있다. 당시 대야성을 지키던 품석 외에도 그를 보좌한 사지(舍知) 죽죽(竹竹)과 용석(龍石) 등이 함께 죽었다. 사지란 17등급으로 나뉜 신라 관위(官位)의 제10번째 명칭이다. 죽죽의 용맹함을 『삼국사기』는 별도로 그의 열전을 세워 표창했다. 한데 이 대야성 전투의 패배가 김춘추에게 준 충격은 상상을 초월했던 듯 싶다. 한국사의 흐름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명장면이 여기 펼쳐진다.

  

“(대야성 전투에서 패배한 그해) 겨울, 임금이 장차 백제를 정벌하여 대야성 패배를 보복하고자 이찬(伊飡) 김춘추를 고구려에 보내 군대를 청하고자 했다. 그에 앞서 대야성이 패배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도 죽었는데, 그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딸의 죽음을 듣고는 하루 종일 기둥에 기대어 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았고, 사람이나 물건이 자기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김춘추의 딸이자 품석의 부인은 누구인가.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으로 가보자.

  

“선덕대왕 11년 임인(642)에 백제가 대량주(大梁州)를 격파했을 때 춘추공의 딸 고타소랑(古陀炤娘)이 남편 품석을 따라 죽었다. 춘추가 이를 한스럽게 여겨 고구려에 청병함으로써 백제의 원한을 갚으려 하자 왕이 허락했다.” 

  

딸 죽음 듣고 하루종일 기둥에 기대 슬퍼해그는 다름아닌 고타소였다. 고타소는 김춘추의 딸이지만 그의 생모가 누군지는 베일에 가려있었다. 고타소 역시 김법민·인문 형제나 마찬가지로 김유신의 동생 문희(文姬) 소생 정도로 여겨져왔다. 하지만 고타소의 생모가 문희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고타소가 만약 문희의 소생이라면 오빠 김법민(626년생)보다 늦게 태어났다는 얘기가 된다. 그 이듬해에 태어났다 손치더라도 대야성에서 죽을 때 고타소는 기껏해야 만 15세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고타소가 많아봐야 죽을 때 15세라는 뜻이며, 그보다 더 어렸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이런 그가 김품석과 혼인해 대야성을 지키는 성주의 부인이 돼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결국 고타소는 문희의 딸이 아니었다는 얘기가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김춘추의 딸 고타소는 문희의 소생이 아닌 정실부인과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대목을 예리하게 간파한 것이 『화랑세기』다. 춘추공(春秋公) 열전에는 문희와의 결혼을 미적댈 당시 김춘추에게는 보량(寶良)이라는 아름답기 짝이 없는 부인이 있어 그와의 사이에는 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고 전한다. 20년 뒤, 더 정확히는 그로부터 18년 뒤에 김춘추의 아들이자 태자인 김법민이 백제를 멸하면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붙잡아 말 아래 꿇게 하고는 침까지 뱉은 이유를 비로소 헤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김법민에게 고타소는 이복 누이였지만, 고타소의 죽음으로 인한 아버지의 고통을 지켜보았기에 이리 행동했으리라.

  

대야성 전투 패배가 김춘추에게 안긴 ‘내상(內傷)’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다른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사기』 죽죽 열전에 의하면 대야주 현지 출신인 죽죽은 선덕여왕 때 사지(舍知)가 돼 대야성 도독 김품석 휘하에서 활동했다. 그러다가 642년 가을 백제군에 대야성이 함몰할 때 죽는다. 한데 이 열전을 보면 대야성 함락을 부른 장본인은 다름 아닌 김품석임을 알 수 있다.

  

내막은 이렇다. 품석이 거느린 막객(幕客)으로 역시 사지(舍知)인 검일(黔日)이란 사람이 있었다. 품석은 검일의 아내의 빼어난 미모에 반해 그만 아내를 빼앗아버렸다. 이를 갈던 검일은 마침 윤충이 거느린 백제군이 대야성을 공격해 들어오자 적과 내응해 창고를 불태우며 성안을 혼란에 빠뜨린다. 가망이 없다고 판단한 품석은 고타소와 아이들을 죽이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이후 죽죽은 용석과 함께 마지막까지 대야성을 지키며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한다. 

  

포로가 된 의자왕에게 술 따르게 해 이 전투에서 검일 이외에도 백제와 내응한 자가 있었는데, 바로 모척(毛尺)이다. 『삼국사기』 태종무열왕 본기 7년(660) 조에 의하면, 백제를 멸한 직후인 그해 8월 2일, 김춘추는 주연을 크게 베풀어 나당 참전 용사들을 위로했다. 이때 김춘추는 당나라 사령관인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단상에 앉고 포로가 된 의자왕과 그 아들 부여융은 그 아래 앉히고는 의자왕에게 술을 따르게 하니 이를 지켜보던 다른 백제 신하들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참한 장면인가.

  

한데 김춘추는 모척을 붙잡아 목을 베게 했다. 나아가 검일도 잡아다가 문초하기를 “네가 대야성에서 모척과 모의해 백제 군사를 끌어들이고 창고를 불 질러 없앰으로써 온 성 안에 식량을 모자라게 해서 싸움에 지도록 했으니 그 죄가 하나요, 품석 부부를 윽박질러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백제와 더불어 본국을 공격했으니 그것이 세 번째 죄다”라고 하면서 사지를 찢어 시체를 강물에 던졌다고 한다. 아내를 빼앗긴 검일은 모척과 함께 대야성 전투에서 백제군과 내응해 성이 함락되는 데 결정적인 공로를 세운뒤 백제로 들어가 호의호식하다가 18년 뒤에 백제가 함락될 때 붙잡혀 능지처참을 당한 것이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 했던가. 김춘추는 사랑하는 딸을 백제에 잃은 복수심에 불타 백제를 멸망시키겠다는 굳은 다짐을 한다. 돌이켜 보면 다름 아닌 사위가 빌미를 준 셈이지만 김춘추에겐 그보다 복수가 더 중요했다. 복수심에 불타 숙적 백제를 멸한 신라는 이어 고구려까지 멸함으로써 일통삼한(一統三韓)을 달성했다. 한국사의 획을 가른 위대한 역사가 치정(痴情)이 부른 복수극의 결말이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ts1406@naver.com

김유신, 춘추 방에 언니 대신 동생 들여보낸 까닭

[중앙선데이] 입력 2016.06.26 00:40 | 485호 23면 


단재 신채호(1880~1936)는 이민족인 당나라를 끌어들여 같은 혈통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고는 불완전한 민족 통일을 달성했다는 이유로 김춘추와 김유신(595~673)을 싸잡아 비난했다. “김유신은 지용(智勇·지혜와 용기) 있는 명장이 아니요, 음험취한(陰險鷲悍)한 정치가며, 그 평생의 대공(大功)이 전장에 있지 않고 음모로 인국(隣國)을 난(亂)한 자”라고 했다. 음험취한은 요컨대 음흉하기 짝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서 단재는 그 보기로 그가 김춘추와 처남 매부가 된 사연인 소위 ‘축국(蹴鞠) 사건’을 들었다.

  

혹독하기 그지없는 이런 평가는 그 이전까지 천 수백 년가량 지속된 만고의 충신이라는 김유신의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붕괴시켰다. 단재의 평가가 얼마나 타당한지는 논외로 부친다. 다만, 그 포폄(褒貶)의 정치적 목적성이야 무엇이건, 김유신이 대단한 모략가적 기질을 지닌 군인이요 정치가였음은 분명하다.

  

김유신이라고 하면 거개 가야계라는 그의 출신이 핸디캡으로 유별나게 강조된 까닭도 이에서 말미암을 것이다. 즉, 김유신은 소위 ‘골품제’라고 하는 엄격한 신분제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신라사회에서 출세를 하기 위해서는 김춘추라는 신라 정통 진골과 결합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음모가 성공함으로써 출세 가도를 달리게 되었다는 식의 이해가 주류를 이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단재가 김유신이 음험취한하다고 한, 대표적인 증좌로 거론한 저 유명한 사건, 다시 말해 김유신이 기획한 축국 사건은 어떠한 내막이 있었을까. 도대체 이 사건이 어떠했기에 김유신은 저런 악평을 들어야 했던가. 정말로 김유신은 음험취한했던가.

  

김유신에겐 보희(寶姬)와 문희(文姬)라는 여동생 자매가 있었다. 이 중 동생 문희가 보희 대신 김춘추와 혼인하게 된 사연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이에 걸맞게 이 일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전한다. 이는 최근 공개된 필사본 『화랑세기』에도 보이니, 이곳 18세 풍월주 춘추공(春秋公) 전에 그 전말이 나온다.

  

각 문헌별로 사소한 차이가 있지만 다음 골자는 같다. 김유신이 정월 기오일(烏忌日·15일)에 자기 집 앞에서 김춘추를 불러 축국(오늘날의 축구와 같은 놀이)을 하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고름을 찢었다. 유신은 이를 기워준다면서 자기 집으로 춘추를 데리고 고즈넉한 방에 몰아넣고는 처음에는 보희더러 춘추가 있는 방에 들어가도록 했다. 하지만 보희는 하필 이날 무슨 일이 있어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자 유신은 문희더러 들어가게 하니 역사는 이에서 이뤄졌다. 이때 시작한 둘의 밀회에서 아들이 태어나니 그가 바로 문무왕 김법민이다. 말하자면 문희는 보희의 대타였던 셈이다.

  

춘추가 문희를 처음 본 순간을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즉위년(661년) 조에서는 “옅은 화장과 날렵한 옷차림에 빛나는 어여쁨이 사람을 부시게 하니 춘추가 보고 기뻐하며 결혼을 청하고 예를 올렸다”고 표현한다. 이 이야기가 문무왕 즉위년 조에 나오는 까닭은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문무왕이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춘추가 문희에게 첫눈에 반해 이내 결혼한 것처럼 기술됐지만 너무 많은 비약이 숨겨있다.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 결합을 고리로 김춘추는 김유신의 절대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대권을 쥐니 그가 태종무열왕(재위 654~660년)이다. 문희 또한 덩달아 정비가 되어 문명(文明)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는다.

  

사실 단재는 이러한 춘추와 문희의 결합을 비상히 주목하면서 김유신의 모략가적 특성이 유감없이 발휘된 장면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이 사건에는 단재가 생각한 것보다 더욱 빛나는 김유신의 계략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러한 드라마틱한 결합을 보면서 궁금하기 짝이 없는 대목은 도대체 보희에게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내가 파악하기로 이에 대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기록이 있다. 첫째, 『삼국사기』 신라 문무왕 즉위원년 조에서는 “언니(보희)는 무슨 일이 있어(有故) 나오지 못하고, 그 동생(문희)이 나와서 꿰매어 드렸다”고 해서 ‘유고(有故)’ 사태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보희에게 일어난 ‘유고’가 무엇인지 더 이상 알 수가 없다. 다만 유의해야 할 대목은 김유신이 원래는 보희를 염두에 두었으며, 그래서 처음에는 보희에게 시중을 들라고 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김유신은 보희에게 사고가 생긴 사실을 이때서야 비로소 알았다는 사실이다.

  

둘째, 『삼국유사』에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이야기이니, 이에는 춘추가 문희를 얻게 된 사정을 비교적 자세히 적었다. 이에는 보희가 “어찌 사소한 일로 귀공자에게 경솔히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라는 말을 하면서 오빠의 뜻을 거부했다고 한다. 한데 보희가 내세운 논거가 소위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유교 윤리관이다. 하지만 이런 설명은 설혹 그 시대에 이런 유교적 도덕관념이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고 해도, 동생 문희는 왜 춘추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사리에 맞지 않는다. 그런 가운데서도 『삼국유사』 또한 『삼국사기』와 동일하게 김유신이 애초에 보희를 점찍었음은 주목해야 한다.

  

셋째, 앞서 인용한 『삼국유사』 이야기 중간에 달린 협주(挾註·주석)에는 “옛 책에는 (보희가) 병으로 나오지 못했다고 했다”고 했다. 보희에게 도대체 무슨 ‘병’ 혹은 ‘유고’가 있었기에 김유신은 그러한 사실도 까마득히 모르다가 병든 혹은 사고 난 보희에게 김춘추를 시중들라고 했다는 말인가.

  

넷째, 『고려사』 첫 대목에 실린 고려 건국시조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 탄생 신화다. 앞선 시대 각종 사화(史話)를 섞어 만든 이 설화는 고려 제18대 의종(재위 1146-1170년) 때 인물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편년통록(編年通錄)』에 실린 내용이라 한다. 이에 녹아들어간 설화 중의 하나가 바로 보희와 문희 이야기다. 이 작제건 탄생 설화는 그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를 김유신과 김춘추, 보희와 문희라는 신라 역사상 실제 인물을 장소와 배경 및 이름만 바꾼 채 고스란히 표절했다. 즉, 김유신은 신라의 송악(松嶽)에 사는 보육(寶育)이라는 인물이며, 김춘추는 당나라 황제로 바뀌어 있는가 하면, 시간적 배경 또한 신라 말로 옮겨져 있으며, 공간은 송악(개경)으로 둔갑한다. 심지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보희가 서형산(西兄山·경주 선도산)에 올라 오줌을 누니 서울이 온통 물바다가 되었다는 꿈을 꾸었고, 이 이야기를 듣고 그 동생 문희가 언니에게서 꿈을 샀다는 이야기조차 작제전 탄생설화에는 반복한다. 이 설화에는 “중국 황제가 신라 송악의 보육 집에 와서 묵다가 찢어진 옷을 깁는데 언니는 코피가 나서 나오지 못하고 아우가 대신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황제는 (동생인) 진의(辰義)와 동침해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작제건이다”고 한다.

  

한데 보희의 변신임이 분명한 언니가 하필 이날 코피가 났다고 한다. 『삼국사기』 말한 ‘유고’, 『삼국유사』의 협주에 인용한 옛 책의 ‘병’이 작제건에 와서는 ‘코피’가 되었다. 보희에게 피 냄새가 물씬 풍기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다섯째, 『화랑세기』 춘추공 전에는 “유신이 일부러 (춘추)공의 치마를 밟아 옷섶의 옷고름을 찢었다. 들어가 꿰매기를 청하니 공이 따라 들어갔다. 유신이 보희에게 시키고자 했으나 병 때문에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문희가 나아가 바느질을 해 드렸다”고 한다. 『화랑세기』에서도 분명히 유신이 처음에는 보희를 지목했으나 병 때문에 할 수 없어 그 동생 문희가 대신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보희에게 일어난 ‘유고’ 혹은 ‘병’으로 표현된 실체는 무엇인가. 이는 월경(月經)에 대한 은유에 다름 아니다. 작제건 탄생 설화의 코피는 결정적이다.

  

이처럼 이 사건을 전하는 다섯 가지 기록이 모두 김유신이 애초에 보희에게 병, 혹은 사고가 있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뒤늦게야 알았다고 한다. 이때 보희가 정말로 사고를 당했거나, 병을 앓고 있었다면, 어떻게 김유신이 처음에 이런 보희에게 바느질을 빙자해 김춘추를 시중드는 일을 맡기려 했다는 말인가.

  

김유신. 그는 참말로 무서운 사람이다. 애초에 김춘추의 짝으로 큰 누이를 생각하고 거사를 준비했지만, 월경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재빨리 작은 누이로 교체를 했으니 말이다. 그에게서 냉혈한의 냄새가 풍긴다.

  

- 흔히들 역사를 승자의 기록이라 한다. 하지만 숱한 사연이 그 바탕을 이루고 있음은 자명하다. 한국사 변곡점의 순간을 짚어보는 것은 그래서 흥미롭다. 언론인 출신 사학자가 풀어가는 ‘추적, 한국사 그 순간’를 새로 게재한다. <편집자 주>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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