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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조南朝 양대梁代 소명태자昭明太子가 편집한 중국 고대 시문 앤솔로지인 《문선(文選)》 권29에 수록한 작가 미상 19종 오언시五言詩를 지칭한다. 위진 이래 극성을 구가하는 오언시 기원이 된다 해서 그 문학적 의미가 대서특필된다. '古詩十九首'라 하지만 각 시에는 고유 제목이 없다.  《문선》과 거의 동시대에 편찬된 고대 연애시가집인 《옥대신영玉臺新詠》에는 19수 중 8수를 수록하면서 전한 무제 때 인물인 매승(枚乗) 작품이라 했지만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일반적으로는 후한 중기 이래 지식인층에 속하는 사람들이 당시 민간 가요인 이른바 악부樂府를 기초로 해서 창작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는 노래를 염두에 둔 가사였을 가능성이 크다. 애초 제목이 없으니 편의상 그 첫 구절을 따서 제목을 삼아 구별하는 일이 많으니, 《문선》에 수록된 순서를 매기면 다음과 같다. 


행행중행행(行行重行行) (其一)

청청하반초(青青河畔草) (其二)

청청능상백(青青陵上柏) (其三)

금일양연회(今日良宴會) (其四)

서북유고루(西北有高樓) (其五) 

섭강채부용(渉江采芙蓉) (其六)

명월교야광(明月皎夜光) (其七)

염염고생죽(冉冉孤生竹) (其八)

정중유기수(庭中有奇樹) (其九)

초초견우성(迢迢牽牛星) (其十)

회차가언매(回車駕言邁) (其十一)

동성고차장(東城高且長) (其十二)

구차상동문(驅車上東門) (其十三)

거자일이소(去者日以疎) (其十四)

생년불만백(生年不満百) (其十五)

늠름세운모(凜凜歲雲暮) (其十六)

맹동한기지(孟冬寒氣至) (其十七)

객종원방래(客從遠方來) (其十八) 

명월하교교(明月何皎皎) (其十九)


이들 고시는 하나씩 번역과 해설을 붙이는 중이다. 밑줄 친 볼딕체 노래는 그 작업이 끝났으므로 클릭하라. 

                                        <영화 '나쁜남자' 한 장면> 


자고로 조강지처 버렸다가 쪽박찬다는 소리 있거니와, 이 시는 애절하기만 하다. 최근 도서출판 소명출판에서 전 3권으로 완역된 권혁석 역 《옥대신영(玉臺新詠)》을 참조하되, 몇 가지를 덧붙이고 간추렸으며, 번역문 또한 약간 손질했다. 나아가 인용문은 별도로 표시했다. 중화서국에서는 중국고전문학기본총서 중 하나로 전 2권짜리 《옥대신영전주(玉臺新詠箋注)》가 나왔거니와 몇 가지 사항은 주석에서 이를 참조해 대폭 보강했다.

 

출천 : 《옥대신영(玉臺新詠)》 권 제1 고시(古詩) 8수 중 제1

시대 : 한대(漢代)

 

上山采蘼蕪  산에 올라 궁궁이를 따고는

下山逢故夫  산을 내려오다 옛 남편 마주쳤네

長跪問故夫  무릎 꿇어 옛 남편께 여쭙기를

新人復何如  “새 사람은 또 어떤지요?”

新人雖言好  “새 사람 좋다 하나

未若故人姝  옛 사람처럼 곱진 않다오

顔色類相似  얼굴이야 엇비슷하나

手爪不相如  솜씨가 같진 않다오”

新人從門入  “새 사람은 대문으로 들어오고

故人從閤去  ”옛 사람은 쪽문으로 떠났지요”

新人工織縑  “새 사람은 누런 비단 잘 짜고

故人工織素  옛 사람은 흰 비단 잘 짰다오

織縑日一匹  누런 비단 하루에 1필이나

織素五丈餘  흰 비단은 5장을 넘었다오

將縑來比素  누런 비단 흰 비단과 견주어도

新人不如故  새 사람은 옛 사람만 같진 못하오”

 

《注釋》 

(1) 미무(蘼蕪):향초 이름이다. 그 잎은 바람에 말려 향료로 쓴다. 《본초(本草)》에 이르기를 “미무(蘼蕪)는 궁궁(芎藭)의 싹이다. 옹주(雍州)의 강이나 못, 寃句에서 난다. 4월이나 5월에 잎을 따서 바깥에서 햇볕에 말린다. 도은거(陶隱居·도홍경을 말함)가 이르기를 ‘지금은 역양(歷陽)에서 나며 곳곳에 있다. 집집마다 많이 그것을 심는다. 잎은 사장(蛇壯)과 비슷하며, 향이 난다'"고 했다. 이에서  《본초(本草)》는 명대 이시진의  《본초강목이 아니라  《신농본초경》일 수밖에 없다. 자세한 사정은 내가 조사를 못했다. 다만,  《본초(本草)를 인용하면서 그 뒤에 도홍경을 인용하는 것으로 보아 《신농본초경이 확실하다. 도홍경은 《신농본초경을 해설한 《신농본초경집주를 지었다. 이 집주는 망실되고, 돈황본에서 잔질이 발견되었을 뿐이며 그 외 우수마발은 다른 문헌들에 산발적으로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2) 故夫:원래 남편. 자기를 버린 옛 남자다. 아주 나쁜 놈이다. 아! 하희라 주연 아침드라마 '있을 때 잘해'가 생각난다. 배우 조재현이 미투 운동 절대 타격을 받아 곤혹스런 처지인 모양이거니와, 마침 그가 주연하고, 그와 짝짜꿍이 되어 미투 운동 가해자로 지목받은 김기덕 주연 '나쁜남자'를 이해를 돕고자 하는 첨부자료로 제시한다. 


(3) 장궤(長跪):古代 跪姿의 일종이다. 箋注에 이르기를 "長跪, 拜也"라고 했다. 跪時將腰挺直, 上身顯長, 示恭敬. 長跪-古人席地而坐, 坐時兩膝據地, 臀部放在脚跟上, 如果把腰股直起來, 上身聳起彷彿加長了, 就叫長跪. 자길 버린 남편 앞에서 길게 허리굽혀 예의를 표하면서 공손함을 잃지 않으나, 속으론 얼마나 배알이 틀렸을까?

 

(4) 新人:옛 남편이 조강지처를 버리고 새로 맞은 여자. 나쁜 여자처럼 묘사하니, 콩쥐팥쥐가 떠오른다. 이땅의 계모들이여. 부디 힘내시오!

 

(5) 未若故人姝:故人은 前妻. 姝는 好. 음은 “書”와 같다. 아름답다는 뜻이다. 《毛詩》에 이르기를 "姝, 美色也"라 했으며 양웅의 《方言》에는 이 글자를 "好也"라고 풀었다.

 

(6) 顔色:용모라는 뜻이다. 顔色類-類, 얼굴은 대체로 비슷하다는 뜻. 顔色이라는 말이 예문유취에서는 其色이라 했다. 《예문유취》 쪽이 더 자연스런 느낌을 주기도 한다.

 

(7) 手爪:手藝를 말한다. 紡織이라든가 縫紉 등과 같은 일에 女工은 모두 손을 사용하므로 ‘手爪’는 그 솜씨를 말한다.

 

(8) 門:正門.

 

(9) 閣:邊門. 從門入, 故人從閣去-門, 指大門ㆍ正門. 閣, 指側門, 邊門. 《이아(爾雅)》에서 이르기를 "小閨謂之閤"이라 했으니 대문이 아니라 측문이다. 본부인 정부인은 대문으로 당당히 출입하나, 이젠 쫓겨났으니, 그쪽 출입은 꿈도 꾸지 못할 뿐더러, 설혹 한다 해도 쪽문을 이용할 뿐이다. 

 

(10) 新人工織縑:工은 어떤 일을 잘 한다는 뜻이다. 縑은 황견(黃絹)을 말한다. 음이 “兼(겸)”과 같다. 유희는 《석명(釋名)》에서 이 글자를 "겸한다는 뜻이다[兼也]"고 풀었다. 발음이 같은 글자로써 장난을 치는 수법은 釋名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이를 가차니 전주니 하면서 지금의 언어학자, 특히 중국 본토쪽 학자들이 장난을 거듭하는데 눈뜨고 차마 못봐줄 지경이다.

 

(11) 素:백견(白絹)이다. 素는 겸(縑)에 견주어 비쌌다. 釋名에서는 이 素를 "박소다[朴素也]"라고 풀었다. 박소란 글자 그대로는 이렇다 할 만한 채색을 넣지 않은 비단을 말한다. 素는 白과 뜻이 통하나니, 백의민족 좋아하지 마라. 때가 많이 타서 좋지 않다. 백의민족=땟자국 민족이니라.

 

(12) 日一匹:하루에 一匹을 짰다는 뜻이다. 一匹이란 長 四丈을 말한다. 匹은 “疋”과 같으며 布料를 재는 수량 명사이다. 《소이아(小爾雅)》에서는 "倍兩謂之疋. 二丈謂倍"라고 하면서 "兩, 四丈也"라고 했다. 1냥 2냥 할 때 냥이다.

 

(14) 五丈 : 漢制에서는 길이 四丈, 너비 2丈2尺을 一匹이라 했다.

 

(13) 將:여기서는 用 혹은 拿을 의미한다. 《예문유취》에서는 이 구절을 "持縑將"이라 했다.

 

【語譯】 

到山上去採蘼蕪, 下山時, 遇到以前的丈夫. 恭敬的跪下問前夫一些事情:“你新娶的妻子如何?”“新娶的妻子雖然很好, 但是比不上以前的你. 容貌很相似, 可是手藝就沒有你巧.” “可是新人從正門進入, 我從閣邊門走阿.”“他較善於織黃絹, 每天大槪織一匹約五丈長的布. 用縑和素相比的話, 縑是明顯比不上素的, 哀, 就連她也沒有你好阿.”

 

【賞析】 

這是一首怨苦詩, 反映了婚姻破裂後雙方的痛苦、遺憾和悔意. 全主要採用對話來表現, 透過棄婦和故夫的問答, 揭示雙方婚變後的心情詩和感覺. 詩中語言簡練, 恰當地運用對偶句式, 也是一大特點. 

 

《情節分析》

一個被丈夫抛棄的婦人, 爲了維持自己的生活, 只能每日到山上 採野菜維生.

一個偶然的機會下, 兩人在山脚下相遇了, 婦人忍著內心的痛苦, 委屈的問著前夫:“新娶的妻子怎麼樣了?”愧疚的前夫帶著安撫的語氣娓娓說著新妻子無論在容貌及手藝上都比不上舊人, 無限委屈的婦人聽完前夫的敍述後, 不禁帶著哀怨的語氣描述出當時她離家的情況:當新人被風風光光的從大門迎娶之時, 她這個舊人只能落寞的從小門離開.

面對婦人的無奈, 前夫不知如何應對, 只能閃躲式的繼續著剛剛的話題--繼續的讚美著舊人的能幹. 故事中曲曲折折的情緖ㆍ强烈的對比氣氛, 營造出一則動人的詩歌. 


중국 대륙에 위진남북조시대가 종말을 고해 가던 무렵, 지금의 장강 일대에 명멸한 남조(南朝)의 마지막 양(梁) 왕조와 진(陳) 왕조는 문학사에서는 연애시의 전성시대였다. 이런 연애시를 당시에는 염가(艶歌)라고 하거니와, 낭만주의 시대 서구 유럽 프랑스에서 베를렌느가 그러했듯이 눈물 질질 짜는(tear-jerking) 감수성 예민한 연애시가 쏟아져 나왔거니와, 대체로 이 시대 이런 염가는 여성을 화자(話者)로 두는 경우가 많았다.

 

이 시대는 연애시가 흥성하던 전성기일 뿐만 아니라, 중국 역사상 처음으로 그런 연애시만을 모은 연애시 앤쏠로지가 편찬되던 시기이기도 했으니, 이 시대 유신(庾信)과 함께 남조의 염가 시단을 양분한 서릉(徐陵507~583)이 편집한 《옥대신영》(玉臺新詠)이 그것이다.

 

이 《옥대신영》(玉臺新詠)은 마침 한국학술진흥재단이 후원하는 ‘학술명저번역총서’ 중 ‘동양편’에 포함되어, 최근 권혁석 충주대 중국어과 교수에 의해 완역본 전 3권으로 도서출판 소명에서 선보인 바, 이에 대해 나는 서평기사는 물론이요, 이곳 블로그에서도 두어 번 언급한 바가 있다.

 

이 자리서 소개하고자 하는 시는 이 《옥대신영》 권 제1‘잡시’(雜詩)에 수록된 9수 중 하나로, 원작에 의하면 이들 시 대부분은 전한(前漢) 초기에 사마상여와 더불어 부(賦) 작가로 명성을 떨친 매승(枚乘)이란 사람을 거론하고 있거니와, 과연 매승인지 아닌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런 樂府體 연애가는 한대(漢代)에 흥성한다는 점은 이론의 여지가 없으니,

 

각설하고 그 시를 보기로 한다. 

 

蘭若生春陽 난초와 두약 봄볕에 자라고 

涉冬猶盛滋   겨울 지났건만 무성하기만 하네

願言追昔愛 바라건대 옛사랑 쫓고파  

情欵感四時   그리움에 네 계절 감동하네

美人在雲端 아름다운 님 구름 끝에 계시니 

天路隔無期   하늘로 가는 막혀 만날 기약 없네

夜光照玄陰 달빛이 어둠 비추니 

長歎戀所思   길게 탄식하며 임 그리네

誰謂我無憂 뉘 말했나? 내겐 걱정 없다고 

積念發狂癡   쌓인 그리움에 미쳐 날뛰다 바보가 되었느니 

 

아! ‘전쟁 같은 사랑’이란 노래가 요즘 노래방에서도 애창곡 중 하나로 널리 불려지거니와, 그 전쟁 같은 사랑에 견주어 그리움이 사무쳐 마침내 발광했다가, 그것도 모자라 완전히 등신이 되어 버린 사람이 2천 년 전에도 있었다. 전쟁 같은 사랑에 견주어선 발광한 사랑은 혼자만의 사랑이란 점에서 한편으로는 그 페이소스가 더하다 할 지니.

 


위진남북조시대 말기 남조의 대표적인 시인인 서릉(徐陵)이 편찬한 연애시 앤쏠로지 <<옥대신영>>(玉臺新詠) 중 권제1에는 작자를 진림(陳琳)이라 했다. 진림에 대해서는 시 아래에 첨부한 그의 행적을 보라. 아래 시를 읽으면 어째 기분이 쏴 하다.

 

 

飮馬長城窟行一首

飮馬長城窟  장성굴에서 말에게 물 먹이니

水寒傷馬骨 물은 차가워 말이 뼈 속까지 어네

往謂長城吏  장성 관리에게 가서 부탁하기를

愼莫稽留太原卒 부디 태원 출신 졸병은 잡아두지 마오

官作自有程  관청일이란 정해진 길이 있는 법

擧築諧汝聲 달구 들어 네 노랫소리에 맞추어라

男兒甯當格鬬死 사내라면 싸우다 죽어야 하거늘

何能怫鬱築長城 어찌 찌질하게 장성만 쌓고 있으리오

長城何連連  장성은 어찌나 끝없이 이어지는지

連連三千里 끝없이 이어져 3천리라네

邊城多健少  변경엔 젊고 건장한 사내 많고

內舍多寡婦 집안엔 과부만 넘쳐나네

作書與內舍  편지 적어 집으로 보내기를

便嫁莫留住 딴 데로 시집가오 홀로 살지 마오

善事新姑章  새 시부모 잘 모시되

時時念我故夫子 때론 이 옛날 남편도 생각해 주오

報書往邊地  변방으로 온 답장에 이르기를

君今出語一何鄙 당신 지금 하신 말 어찌 그리 막 되었소

身在禍難中 나야 화난에 처해 있지만

何爲稽留他家子 어찌 다른 집 여자를 잡아 둘 수 있겠소

生男愼勿擧  사내를 낳거든 제발 떠들지 말고

生女哺用脯 딸을 낳거들랑 고기 먹어 키우소서

君獨不見長城下 그대만 보지 못했소? 장성 아래

死人骸骨相撐拄 죽은 이 해골이 서로 받친 모습을

結髮行事君  머리 올리고 당신 섬긴 이래

慊慊心意關 울적한 마음엔 온통 변방 관문뿐

明知邊地苦 변경의 어려움 잘 알면서도

賤妾何能久自全 천첩만 어찌 홀로 온전하리오

 

陳琳(진림)

(?~217), 漢魏 연간을 산 文學家이다. “建安七子” 중 한 명이다. 字는 공장(孔璋)이며 광릉(廣陵) 사양(射陽. 지금의 江蘇 淮安縣 東南) 사람이다.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 수 있는 근거는 없으나 “건안칠자” 중 비교적 나이가 많았으며 대략 공융(孔融)과 비슷하다고 추측된다. 漢 靈帝 末年에 大將軍 하진(何進)의 주부(主簿)를 역임했다. 何進이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사방 변장(邊將)들을 수도 낙양(洛陽)으로 들어오라고 소집하자 그에게 간하여 저지하고자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결국 하진은 피살되었다. 董卓이 낙양을 어지럽히자 陳琳는 기주(冀州)로 피난해 원소(袁紹)의 막부로 들어가니 袁紹는 그에게 문장(文章)을 담당케 하니 軍中에서 나온 문서는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다. 가장 유명한 문장으로 《爲袁紹檄豫州文》이 있으니, 이 글에서 진림은 曹操의 罪狀을 열거하고 나아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비난했는데 그 문장이 자못 선동적이었다. 建安 5년(200)에 관도(官渡) 一戰에서 袁紹가 대패하자, 陳琳은 조조에게 포로가 되었다. 曹操가 그의 재주를 아껴 司空軍師祭酒로 삼아 記室을 맡겼다. 나중에는 丞相門下督이 되었다. 建安 22년(217), 劉楨, 應瑒, 徐幹 등과 함께 역질에 걸려 죽었다. 陳琳이 남긴 저작은 《隋書 經籍志》에 근거할 때 문집 10권이 있었으나 이미 망실되었다고 했다. 明代 張溥는 《陳記室集》을 집일해 《漢魏六朝百三家集》(漢魏六朝百三家集)에 넣었다.

<서리맞은 배추> 


수레에 몸을 실은 채 새벽길을 가다 한 때 나와 정분을 나눈 여인을 만났다. 그 몰골 보아 하니 영 말이 아니다. 간밤 외출할 때 곱게 찍어 바른 연지 분 자국 이제 얼룩덜룩하다. 기름기가 묻어 나온 까닭이다. 틀림없이 외박하고 돌아가는 길일 터. 어땠을까? 혹여 내가 버렸기 때문에 저 여인 지금과 같은 신세가 되진 않았을까?

 

남조 유송(劉宋)~양조(梁朝) 교체기를 살다간 연애시의 최고봉 심약(沈約). 그 姓으로 볼진댄 아마도 심봉사~심청이 부녀의 조상쯤 될 듯한데, 그의 입을 빌려 본다.


심약보다 반세기 이상을 뒤에 나타나 심약이 개척한 연애시를 완성한 서릉(徐陵)이란 사람이 편집한 중국 역대 연애시 앤쏠로지 《옥대신영》(玉臺新詠) 맨마지막 권 제10에 ‘조행봉고인거중위증早行逢故人車中爲贈’라는 이름으로 수록된 시다. 제목을 풀면 “이른 아침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만난 옛 사람에게 수레에서 지어준 시”란 뜻이다. 이 위진남북조시대에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후대 유교사회에서 익숙한 정조(貞操)라는 관념, 이 시대엔 통용되지 아니한다. 이혼은 많았고, 여성 또한 새로운 남편을 찾아가는 개가(改嫁)의 전통은 일반 도덕률이었다. 아울러 때가 되어 남자를 만나 사랑을 나누는 일도 흔해 빠졌다.

 

《화랑세기》 필사본이 공개되었을 때, 그에 등장하는 소위 자유분방한 것만 같은 신라사회의 남녀 관계를 학계 일부에서 문제를 삼으면서, 가짜론을 제기했거니와, 이 필사본이 진정 신라인의 저술인가 아닌가는 차치하고라도, 동아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사회사 풍속사 문화사 전반에 대한 이해 없이는 《화랑세기》 아니라 《화랑세기》 필사본이 출현한데도 같은 반응일 것이다.

 

아! 새벽이슬 툴툴 터는 저 여인을 弔하며 哀하고 誄하리라. 

 

早行逢故人車中爲贈(이른 아침 길 나섰다가 우연히 옛 여자 만나 수레에서 지어준 시)


殘朱猶曖曖 남은 연지 자국 아직 흐릿흐릿하고  

餘粉上霏霏   남은 분 자국 여직 어지럽기만 하네

昨宵何處宿 간밤엔 어디에서 잠자리 하고는       

今晨拂露歸   지금 새벽이슬 털며 집으로 가는가


주석 : 두번째 구절 上은 尙의 잘못이거나 통가자다. 



옛 사랑이 못 살면, 가슴이 아프고 

옛 사랑이 잘 살면, 배가 아프며 

첫사랑과 살면, 골치가 아프다. (첫 두 구는 내 말이요, 마지막 구는 이채경 형 보탬이다)  


작자 심약(沈約)에 대하여(네이버 백과사전을 참조하여 윤문했다) 

 

441~513년. 字는 휴문(休文), 시호는 은(隱)이며 오흥(吳興) 무강(武康. 지금의 浙江省 武康) 사람이다. 南朝를 대표하는 史學家이자 文學家이며 정치가로서 양조(梁朝) 창업에 절대적인 공을 세웠다. 어려서 빈곤했으나 공부에 힘써 시문은 당대와 희롱했다. 유송(劉宋)에 출사하려 했으나 이내 망하자 그것을 대신한 남제(南齊)에 출사했다. 소연(蕭衍)이 제위(帝位)를 찬탈하고 양(梁)을 건국하자 이를 도와 건창현후(建昌縣侯)에 책봉되어 현달을 거듭하다가 513년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은(隱)이라는 시호로 인해 심은후(沈隱侯)라고도 잘 알려져 있으며, 남제(南齊)에서 동양태수(東陽太守)를 역임한 까닭에 심동양(沈東陽)이라고는 부름 또한 익숙하다. 문재(文才)로 인해 이미 남제에서는 문혜태자(文惠太子)와 그 아우 경릉왕(竟陵王) 자량(子良)에게 총애를 듬뿍 입었다.

 

이 당시에 심약은 이미 문장의 임방(任昉)과 더불어 시의 최고봉으로 꼽혔다. 그는 염정(艶情)에 특히 뛰어나 이른바 남조시대 문단을 장악하게 되는 ‘궁체시’(宮體詩)’선구를 열었다. 불교에 조예가 깊었으며 음운(音韻)에도 밝아 사성(四聲)의 구별을 명확히 하고 시에서는 팔병설(八病說)을 제창했다. 그의 음운설은 이른바 영명체(永明體) 성립과 깊은 관계가 있고 근체시(近體詩) 성립에도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고 평가된다. 저술로는 음운학서 계열에 속하는 《사성보》(四聲譜)와 史書에 속하는 《진서》(晉書) 와 《송서》(宋書)와 《제기》(齊記)와 《송세문장지》(宋世文章志)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송서》만 현전한다. 문집 또한 100권이나 되었다고 하나 지금은 겨우 《한위육조일백삼가집》(漢魏六朝一百三家集)에 실린 집일된 《심은후집》(沈隱侯集) 2권과 《한위육조명가집(漢魏六朝名家集)》에 채집된 《심휴문집》(沈休文集) 9권이 편린을 남기고 있을 뿐이다. 

 

심약 약전 補1

少時에 독지호학(篤志好學)하고 박통군적(博通群籍)했으며 시문에 뛰어났다(擅長詩文). 宋에 처음으로 출사하여 齊와 梁에 이르기까지 三朝를 섬겼다. 宋에서는 기실참군(記室參軍), 상서탁지랑(尙書度支郞)을 역임했고, 齊가 들어서자 저작랑(著作郞)과 상서좌승(尙書左丞)을 거쳐 표기사마장군(驃騎司馬將軍)에 이르렀다. 齊-梁 교체기에 소연(蕭衍)에게 총애를 받았으며 梁朝가 들어서자 상서좌복야(尙書左伏射)에 제수되었다가 나중에 상서령(尙書令)으로 옮겼으며 영태자소부(領太子少傅)도 역임했다.

 

20여 세에 시작한 《晉書》 120권을 20여 년 만에 완성했으며, 487년에는 奉詔하여 《宋書》를 수찬하니 이는 1년 만에 완성했다.

 

심약 약전 補2

그의 아버지는 심박(沈璞)이니, 宋 文帝 元嘉 末年에 일어난 皇族간 帝位 쟁탈전에서 피살되었다. 이런 까닭에 沈約은 어린 시절에 집안이 몹시도 가난했으나 각고의 노력으로 공부에 열중했다. 劉宋 시대에 채흥종(蔡興宗)의 기실(記室)이 되었으며 입조하여 상서탁지랑(尙書度支郞)이 되었다. 齊가 들어선 초기에 문혜태자(文惠太子) 소장무(蕭長懋)의 가령(家令)이 되어 총애를 받았다. 나중에는 다시 경릉왕(竟陵王) 소자량(蕭子良) 문하에 들어가 이른바 “경릉8우”(竟陵八友) 중 한 명이 되었다. 


隆昌 원년(494), 외직으로 나아가 동양태수(東陽太守)가 되었다. 제(齊) 명제(明帝) 소란(蕭鸞)이 즉위하자 오부상서(五兵尙書)가 되었다가 나중에 국자좨주(國子祭酒)로 옮겼다. 齊 말기에 소연(蕭衍)에 적극 협력해 왕조 찬탈 작업을 했으며 나아가 蕭衍에게 양위하는 詔書를 대신 쓰기도 했다. 蕭衍 즉위와 더불어 더욱 출세 가도를 달려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고 건창현후(建昌縣侯)에 봉해졌고 나중에 상서령(尙書令), 영태자소부(領太子少傅)로 옮겼다. 사후 은(隱)이란 시호를 받으니 이런 까닭에 후인들이 그를 "은후(隱侯)"라 부른다.

 

沈約은 시사에서는 성률聲律을 강조하는 “영명체永明體”를 창시한 주역 중 한 명이다. 齊~梁 시대에 漢語 음운학은 이미 상당한 발전을 이룩했다. 이 와중에 沈約은 平上去入 四聲을 詩의 格律에 이용했으며, 나아가 비교적 完整한 詩歌聲律論을 제기했으니 《宋書》 謝靈運傳에 부친 論에서 말한 “夫五色相宣, 八音協暢, 由乎玄黃律呂, 各適物宜. 欲使宮羽相變, 低昻互節, 若前有浮聲, 則後須切響, 一簡之內, 音韻盡殊, 兩句之中, 輕重悉異”라는 말은 이런 경향을 잘 보여준다. 


四聲說 외에도 그는 팔병설(八病說)을 제기했으니, “平頭ㆍ上尾ㆍ蜂腰ㆍ鶴膝ㆍ大韻ㆍ小韻ㆍ旁紐ㆍ正紐”이란 八種 聲律의 毛病이라는 것이다. 한데 팔병(八病)이란 말이 唐朝 시대 기록에 처음으로 보인다 해서 이것이 심약이 제기한 설인지 의심하는 사람도 있다. 다만 郭紹虞가 考訂한 바에 근거할 때, 唐朝에서 八病說을 제기한 이로 沈約을 인식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 ‘八病’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해석이 분분하나 대체로 詩歌聲律에서 금지하는 각종 禁忌임은 확실하다. 하지만 그 규정이 너무 가혹하고 沈約 자신도 이에 철저하지 못했다.


심약은 워낙 문장으로 유명했기에 齊梁 兩朝에서 생산된 중요한 詔誥는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고 보아 대과가 없다. 그의 詩文 또한 수량이 엄청나 《梁書 沈約傳》과 《남사 심약전(南史沈約傳)》에는 그의 글로써 모두 100卷을 거론한다. 엄가균(嚴可均)은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全上古三代秦漢三國六朝文)》에서 그의 글을 집일하면서 8卷을 만들었는데 공문(公文)을 제외한 대량의 賦ㆍ論ㆍ碑ㆍ銘을 모으면서 “高才博洽”고 평했다.

 

그가 남긴 각석(刻石)으로 《제고안륙소왕비문(齊故安陸昭王碑文)》이 있으니 이는 文辭가 典雅하다. 《양서 심약전(梁書沈約傳)》에 수록된 《교거부(郊居賦)》는 洋洋灑灑하며, 以矯情掩蓋牢騷하다. 《고송부(高松賦)》ㆍ《여인부(麗人賦)》 또한 저명하다. 《여서면서(與徐勉書)》에서는 자기 자신의 늙은 모습을 “百日數旬, 革帶常應移孔﹔以手握臂, 率計月小半分”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沈郞腰瘦”이란 성어가 생기기도 했다.

  

沈約은 佛典에도 조예가 깊어 《광홍명집(廣弘明集)》에는 그와 관련된 적지 않은 문장이 수록됐다. 그의 작품은 張溥가 집일해서 《심은후집(沈隱侯集)》라는 이름으로 《한위육조백삼가집(漢魏六朝百三家集)》에 넣기도 했다. 

거요요편(車遙遙篇) 부현(傅玄)

 

출전 : 《옥대신영玉臺新詠》 卷九

 

작자 傅玄(217~278)에 대해서는 晉書 卷47 列傳 第17에는 그의 傳記가 그의 아들 부함(傅鹹), 부함의 아들 부부(傅敷), 부함의 종부제(從父弟) 부지(傅祗)와 함께 合傳되어 있다. 傅玄의 진서 열전은 밑에다가 첨부한다. 

 

車遙遙兮馬洋洋 수레 아득아득 말은 느릿느릿  

追思君兮不可忘 당신 그리며 잊을 수 없네요

君安遊兮西入秦 당신 왜 떠나 서쪽 진으로 가셨나요  

願爲影兮隨君身 그림자 되어 당신 따르고 싶건만

君在陰兮影不見 당신 그늘에 계시니 그림잔 보이지 않네요 

君依光兮妾所願 당신 햇볕에 서소서 첩은 바랍니다 

 

傅玄列傳(出自《晉書》)

傅玄, 字休奕, 北地泥陽人也. 祖燮, 漢漢陽太守. 父幹, 魏扶風太守. 玄少孤貧, 博學善屬文, 解鐘律. 性剛勁亮直, 不能容人之短. 郡上計吏再舉孝廉, 太尉辟, 皆不就. 州舉秀才, 除郞中, 與東海繆施俱以時譽選入著作, 撰集魏書. 後參安東ㆍ衛軍軍事, 轉溫令, 再遷弘農太守, 領典農校尉. 所居稱職, 數上書陳便宜, 多所匡正. 五等建, 封鶉觚男. 武帝爲晉王, 以玄爲散騎常侍. 及受禪, 進爵爲子, 加附馬都尉.

 

帝初即位, 廣納直言, 開不諱之路, 玄及散騎常侍皇甫陶共掌諫職. 玄上疏曰:「臣聞先王之臨天下也, 明其大敎, 長其義節. 道化隆於上, 清議行於下, 上下相奉, 人懷義心. 亡秦蕩滅先王之制, 以法術相禦, 而義心亡矣. 近者魏武好法術, 而天下貴刑名;魏文慕通達, 而天下賤守節. 其後綱維不攝, 而虛無放誕之論盈於朝野, 使天下無複清議, 而亡秦之病復發於今. 陛下聖德, 龍興受禪, 弘堯ㆍ舜之化, 開正直之路, 體夏禹之至儉, 綜殷周之典文, 臣詠歎而已, 將又奚言!惟未舉清遠有禮之臣, 以敦風節;未退虛鄙, 以懲不恪, 臣是以猶敢有言.」詔報曰:「舉清遠有禮之臣者, 此尤今之要也.」乃使玄草詔進之. 玄複上疏曰:

 

臣聞舜舉五臣, 無爲而化, 用人得其要也. 天下群司猥多, 不可不審得其人也. 不得其人, 一日則損不貲, 況積日乎!典謨曰「無曠庶官」, 言職之不可久廢也. 諸有疾病滿百日不差, 宜令去職, 優其禮秩而寵存之, 既差而後更用. 臣不廢職於朝, 國無曠官之累, 此王政之急也.

 

臣聞先王分士農工商以經國制事, 各一其業而殊其務. 自士已上子弟, 爲之立太學以敎之, 選明師以訓之, 各隨其才優劣而授用之. 農以豐其食, 工以足其器, 商賈以通其貨. 故雖天下之大, 兆庶之衆, 無有一人遊手. 分數之法, 周備如此. 漢ㆍ魏不定其分, 百官子弟不修經藝而務交遊, 未知蒞事而坐享天祿;農工之業多廢, 或逐淫利而離其事;徒系名於太學, 然不聞先王之風. 今聖明之政資始, 而漢ㆍ魏之失未改, 散官衆而學校未設, 遊手多而親農者少, 工器不盡其宜. 臣以爲亟定其制, 通計天下若干人爲士, 足以副在官之吏;若干人爲農, 三年足有一年之儲;若干人爲工, 足其器用;若干人爲商賈, 足以通貨而已. 尊儒尙學, 貴農賤商, 此皆事業之要務也.

 

前皇甫陶上事, 欲令賜拜散官皆課使親耕, 天下享足食之利. 禹ㆍ稷躬稼, 祚流後世, 是以《明堂》ㆍ《月令》著帝藉之制. 伊尹古之名臣, 耕於有莘;晏嬰齊之大夫, 避莊公之難, 亦耕於海濱. 昔者聖帝明王, 賢佐俊士, 皆嘗從事於農矣. 王人賜官, 冗散無事者, 不督使學, 則當使耕, 無緣放之使坐食百姓也. 今文武之官既衆, 而拜賜不在職者又多, 加以服役爲兵, 不得耕稼, 當農者之半, 南麵食祿者參倍於前. 使冗散之官農, 而收其租稅, 家得其實, 而天下之穀可以無乏矣. 夫家足食, 爲子則孝, 爲父則慈, 爲兄則友, 爲弟則悌. 天下足食, 則仁義之敎可不令而行也. 爲政之要, 計人而置官, 分人而授事, 士農工商之分不可斯須廢也. 若未能精其防制, 計天下文武之官足爲副貳者使學, 其餘皆歸之於農. 若百工商賈有長者, 亦皆歸之於農. 務農若此, 何有不贍乎! 《虞書》曰:「三載考績, 三考黜陟幽明.」 是爲九年之後乃有遷敘也. 故居官久, 則念立慎終之化, 居不見久, 則競爲一切之政. 六年之限, 日月淺近, 不周黜陟. 陶之所上, 義合古制.

 

夫儒學者, 王敎之首也. 尊其道, 貴其業, 重其選, 猶恐化之不崇;忽而不以爲急, 臣懼日有陵遲而不覺也. 仲尼有言:「人能弘道, 非道弘人.」 然則尊其道者, 非惟尊其書而已, 尊其人之謂也. 貴其業者, 不妄敎非其人也. 重其選者, 不妄用非其人也. 若此, 而學校之綱舉矣.

 

書奏, 帝下詔曰:「二常侍懇懇於所論, 可謂乃心欲佐益時事者也. 而主者率以常制裁之, 豈得不使發憤耶! 二常侍所論, 或擧其大較而未備其條目, 亦可便令作之, 然後主者八坐廣共研精. 凡關言於人主, 人臣之所至難. 而人主若不能虛心聽納, 自古忠臣直士之所慷慨, 至使杜口結舌. 每念於此, 未嘗不歎息也. 故前詔敢有直言, 勿有所距, 庶幾得以發懞補過, 獲保高位. 苟言有偏善, 情在忠益, 雖文辭有謬誤, 言語有失得, 皆當曠然恕之. 古人猶不拒誹謗, 況皆善意在可採錄乎!近者孔晁ㆍ綦毋<龠禾>皆案以輕慢之罪, 所以皆原, 欲使四海知區區之朝無諱言之忌也.」 俄遷侍中.

 

初, 玄進皇甫陶, 及入而抵, 玄以事與陶爭, 言喧嘩, 爲有司所奏, 二人竟坐免官. 泰始四年, 以爲禦史中丞. 時頗有水旱之災, 玄複上疏曰:

 

臣聞聖帝明王受命, 天時未必無災, 是以堯有九年之水, 湯有七年之旱, 惟能濟之以人事耳. 故洪水滔天而免沈溺, 野無生草而不困匱. 伏惟陛下聖德欽明, 時小水旱, 人未大饑, 下祗畏之詔, 求極意之言, 同禹ㆍ湯之罪己, 侔周文之夕惕. 臣伏歡喜, 上便宜五事:

 

其一曰, 耕夫務多種而耕不熟, 徒喪功力而無收. 又舊兵持官牛者, 官得六分, 士得四分;自持私牛者, 與官中分, 施行來久, 衆心安之. 今一朝減持官牛者, 官得八分, 士得二分;持私牛及無牛者, 官得七分, 士得三分, 人失其所, 必不歡樂. 臣愚以爲宜佃兵持官牛者與四分, 持私牛與官中分, 則天下兵作歡然悅樂, 愛惜成穀, 無有損棄之憂.

 

其二曰, 以二千石雖奉務農之詔, 猶不勤心以盡地利. 昔漢氏以墾田不實, 征殺二千石以十數. 臣愚以爲宜申漢氏舊典, 以警戒天下郡縣, 皆以死刑督之.

 

其三曰, 以魏初未留意於水事, 先帝統百揆, 分河堤爲四部, 並本凡五謁者, 以水功至大, 與農事並興, 非一人所周故也. 今謁者一人之力, 行天下諸水, 無時得遍. 伏見河堤謁者車誼不知水勢, 轉爲他職, 更選知水者代之. 可分爲五部, 使各精其方宜.

 

其四曰, 古以步百爲畝, 今以二百四十步爲一畝, 所覺過倍. 近魏初課田, 不務多其頃畝, 但務修其功力, 故白田收至十余斛, 水田收數十斛. 自頃以來, 日增田頃畝之課, 而田兵益甚, 功不能修理, 至畝數斛已還, 或不足以償種. 非與曩時異天地, 橫遇災害也, 其病正在於務多頃畝而功不修耳. 竊見河堤謁者石恢甚精練水事及田事, 知其利害, 乞中書召恢, 委曲問其得失, 必有所補益.

 

其五曰, 臣以爲胡夷獸心, 不與華同, 鮮卑最甚. 本鄧艾苟欲取一時之利, 不慮後患, 使鮮卑數萬散居人間, 此必爲害之勢也. 秦州刺史胡烈素有恩信於西方, 今烈往, 諸胡雖已無惡, 必且消弭, 然獸心難保, 不必其可久安也. 若後有動釁, 烈計能制之. 惟恐胡虜適困於討擊, 便能東入安定, 西赴武威, 外名爲降, 可動複動. 此二郡非烈所制, 則惡胡東西有窟穴浮游之地, 故複爲患, 無以禁之也. 宜更置一郡於高平川, 因安定西州都尉募樂徙民, 重其複除以充之, 以通北道, 漸以實邊. 詳議此二郡及新置郡, 皆使並屬秦州, 令烈得專禦邊之宜.

 

詔曰:「得所陳便宜, 言農事得失及水官興廢, 又安邊禦胡政事寬猛之宜, 申省周備, 一二具之, 此誠爲國大本, 當今急務也. 如所論皆善, 深知乃心, 廣思諸宜, 動靜以聞也.」

 

五年, 遷太僕. 時比年不登, 羌胡擾邊, 詔公卿會議. 玄應對所問, 陳事切直, 雖不盡施行, 而常見優容. 轉司隸校尉.

 

獻皇后崩於弘訓宮, 設喪位. 舊制, 司隸於端門外坐, 在諸卿上, 絶席. 其入殿, 按本品秩在諸卿下, 以次坐, 不絶席. 而謁者以弘訓宮爲殿內, 制玄位在卿下. 玄恚怒, 厲聲色而責謁者. 謁者妄稱尙書所處, 玄對百僚而罵尙書以下. 禦史中丞庾純奏玄不敬, 玄又自表不以實, 坐免官. 然玄天性峻急, 不能有所容;每有奏劾, 或値日暮, 捧白簡, 整簪帶, 竦踴不寐, 坐而待旦. 於是貴遊懾伏, 台閣生風. 尋卒於家, 時年六十二, 諡曰剛.

 

玄少時避難於河內, 專心誦學, 後雖顯貴, 而著述不廢. 撰論經國九流及三史故事, 評斷得失, 各爲區例, 名爲《傅子》, 爲內ㆍ外ㆍ中篇, 凡有四部ㆍ六錄, 合百四十首, 數十萬言, 並文集百余卷行於世. 玄初作內篇成, 子咸以示司空王沈. 沈與玄書曰:「省足下所著書, 言富理濟, 經綸政體, 存重儒敎, 足以塞楊ㆍ墨之流遁, 齊孫ㆍ孟於往代. 每開卷, 未嘗不歎息也. '不見賈生, 自以過之, 乃今不及', 信矣!」

 

其後追封清泉侯. 子鹹嗣.

아래 소개하는 시는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랑 같이 감상하면 좋다. 

https://www.youtube.com/watch?v=yE6roNkyGBM

중국 고대 연애시 앤쏠로지인 《옥대신영玉臺新詠》 권1에 後漢시대 진가(秦嘉)라는 사람이 병들어 친정으로 요양간 아내 서숙(徐淑)에게 보낸 연작시 3편이 증부시(贈婦詩)라는 제목으로 연달아 수록되었으니, 그 서문에는 작자 진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秦嘉는 字를 사회(士會)라 하며, 농서(隴西) 사람이다. 군상연(郡上掾)이 되어 그의 처 서숙(徐淑)이 병이 들어 본가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에 직접 얼굴을 볼 수 없어 시를 주었으니 그 시는 다음과 같다.(秦嘉. 字士會. 隴西人也. 為郡上掾. 其妻徐淑寢疾. 還家. 不獲靣別. 贈詩云爾)


첫 번째(其一)

人生譬朝露 인생은 아침이슬 같고 

居世多屯蹇 세상살이 고난 많다오

憂艱常早至 근심과 간난 늘 빨리 오고

歡會常苦晚 기쁨과 만남 늘 늦어 괴롭소 

念當奉時役 시절 임무 받들어 떠나려니 

去爾日遙遠 떨어질 지낼 날 멀기만 하오 

遣車迎子還 수레 보내 당신 맞으려 했지만

空往復空返 공수레로 갔다 공수레로 오구려 

省書情悽愴 편지 살피니 마음 서글퍼져 

臨食不能飯 밥을 보고도 차마 먹을 수 없소

獨坐空房中 홀로 앉아 빈방 지키니 

誰與相勸勉 누구와 다독거리겠소 

長夜不能眠 긴 밤에 잠 못 이루고 

伏枕獨展轉 베개 깔고 홀로 뒤척이니 

憂來如尋環 걱정 일어나 뱅뱅 도는 듯하지만 

匪席不可卷 내 마음 돗자리 아니라 말지 못하는구려


이에서 보듯이 첫 번째 시는 신병 치료차 친정으로 돌아간 직후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을 표현했다. 이 시는 아내의 친정 복귀 직후 집안의 휑뎅그레한 풍광과 그에서 격발하는 작자의 허전함과 애절함을 표현했다.


어느 독거중년


두 번째(其二)

皇靈無私親 신령은 사사롭게 편애 않으니

為善荷天祿 착한 일엔 하늘이 복을 주신댔소

傷我與爾身 가슴 아프오 당신과 나 

少小罹煢獨 젊을 적 기댈 곳 없이 홀로되어 

既得結大義 결혼이란 큰 뜻 이뤄지만 

歡樂若不足 함께하는 즐거움 아직 모자란듯 

念當遠離別 멀리 이별할 일 생각하며 

思念敘欵曲 그대 향한 맘 곡진히 펼쳐봅니다 

河廣無舟梁 황하는 넓어 건널 배조차 없고 

道近隔邱陸 길은 가까우나 구릉언덕에 막혔다오

臨路懷惆悵 떠나려니 가슴 속 먹먹해져 

中駕正躑躅 가다가 머뭇머뭇한다오 

浮雲起高山 뜬 구름 높은 산에서 일고 

悲風激深谷 서글픈 바람 깊은 계곡 치는구려

良馬不回鞍 좋은 말이라 안장 돌리는 일 없고 

輕車不轉轂 가벼운 수레바퀴 돌리지 않는다오

針藥可屢進 침과 약은 자주 댄다 하나 

愁思難為數 시름은 헤아리기 어렵다오 

貞士篤終始 정절 있는 남자 맘 변함없지만 

思義不可屬 그대 향한 생각 다 적을 수 없소


두 번째 시는 친정으로 떠나간 아내에 대한 그리움이 역시 주조를 이루나 배경은 작자의 心相이다.


세 번째(其三)

肅肅僕夫征 어서어서 종들이 갈길 서두르고

鏘鏘揚和鈴 쨍그러렁 수레방울 소리내네 

清晨當引邁 이른 아침 먼 길 떠나려 

束帶待雞鳴 혁대 메고 닭울음 기다리며 

顧看空室中 텅 빈 방 돌아보니 

髣髴想姿形 당신 모습 있는 듯 

一別懷萬恨 한번 이별에 만 가지 회한 인다오

起坐為不甯 일어나 앉아도 편치 않으니 

何用敘我心 무엇으로 내 마음 펼치리오 

遺思致欵誠 그리움 전하며 정성깃든 선물 보낸다오 

寶釵可耀首 보석 비녀론 머릴 빛나게 하고 

明鏡可鑒形 밝은 거울론 얼굴 비출 수 있소 

芳香去垢穢 꽃다운 향기는 묵은 때 없애고 

素琴有清聲 소금에선 맑은 소리 난다오

詩人感木瓜 시인은 모과 선물에 감동하여 

乃欲答瑤瓊 아름다운 옥으로 보답하려 했다지요

媿彼贈我厚 부끄럽소 당신이 보내준 선물에 비하면

慙此往物輕 할말없소 내가 보내는 선물에 비하면 

雖知未足報 보답이 모자람을 내 알지만 

貴用敘我情 내 마음 알림이 소중하오


이 세 번째 시는 친정에서 요양하는 아내를 두고 서울로 떠나야 하는 작자를 노래했다. 종들이 서두르는 수레는 서울로 향하는 발걸음이다. 작자는 隴西 사람이다. 한데 그는 이곳의 아전 혹은 서리로서 회계와 호구 조사 등의 예산 전반을 담당하는 군상연(郡上掾)으로 해마다 때가 되면 서울로 상경해 중앙조정에다가 郡의 재정 상황을 보고해야 했다. 서울로 가는 발걸음은 바로 이런 공무에서 기인한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편지에 병든 아내 서숙은 어떤 답장을 보냈는가?

같은 옥대신영에는 그에 대한 아내의 답가가 ‘秦嘉 妻 徐淑 答詩 一首’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著錄되었다.


妾身兮不令 첩은 몸이 편치 못하여 

嬰疾兮來歸 병 걸려 친정에 왔습니다

沉滯兮家門 집안에 틀어박혀 지내지만

歷時兮不差 날이 가도 차도가 없네요 

曠廢兮侍覲 당신 모시는 일 팽개치니 

情敬兮有違 정성스런 공경 어겼답니다 

君今兮奉命 당신은 지금 나랏일 받들어

遠適兮京師 멀리 서울로 떠나시지요 

悠悠兮離別 아득아득 이별은 멀고요 

無因兮敘懷 가슴에 품은 맘 말할 수 없네요

瞻望兮踴躍 하늘 쳐다보며 동동 구르다가 

佇立兮徘徊 우두커니 선 채 서성일 뿐 

思君兮感結 당신 생각에 감정 북받치는데

夢想兮容輝 꿈속에서 멋진 당신 모습 그려요

君發兮引邁 당신 먼 길 떠나시면 

去我兮日乖 저와 떨어질 날 갈수록 많겠지요 

恨無兮羽翼 한스럽습니다 날개 없으니 

高飛兮相追 높이 날아 당신 따를 수 없음이 

長吟兮永歎 길게 신음하며 오래 탄식하니 

淚下兮霑兮 눈물 흘러 옷깃을 적신답니다


둘은 어떻게 되었는가? 남편 진가는 서울로 갔다가 그곳에서 눌러앉아 黃門郞이라는 중앙관직에 임명되었다가 이내 죽으니, 친정에 남은 아내 또한 이내 죽고 말았다고 한다.



아래 텍스트는 《옥대신영玉臺新詠》 卷1을 저본으로 삼은 것이다. 제목 왕소군사(王昭君辭)의 '사辭'란 굴원의 대표작을 《초사(楚辭)》라 하거니와, 이는 초 지방 노래라는 뜻이니 이에서 비롯되어 왕소군을 소재로 한 노래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할 듯하다. 이 시에는 아래와 같은 서문에 있거니와, 이 서문이 《玉臺新詠》 찬자의 것인지, 아니면 왕소군사의 원래 저자인 석숭石崇의 것인지 지금 단안은 못하겠지만, 후자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왕소군상. 연합DB..북방 흉노 선우가 왕소군을 왕비로 맞이하는, 혹은 그와 함께 마상 활보하는 모습을 형용한다.



석숭(249~300)은 서진시대를 대표하는 사치가요 권력가였다가 나중에 패가망신했다. 그를 둘러싼 사치 행각은 《세설신어世說新語》를 비롯한 여러 문헌에 산발한다.

왕명군(王明君)이란 본래 왕소군(王昭君)인데, 曺나라 황제 문제文帝의 휘諱에 저촉된다 해서 이름을 고쳤다. 흉노匈奴가 강성하여 漢에다가 청혼을 하니 元帝가 詔를 내려 後宮 중에서 良家 女子인 명군明君을 골라서 그의 배필로 삼게 했다. 옛날에 公主가 오손(烏孫)에 시집을 가면 비파琵琶로 마상馬上에서 음악을 연주케 하여 길을 떠나는 이의 마음을 위로했으니 明君을 전송할 때도 이와 같았다. 그 새로 지은 곡에는 애상의 소리가 많아 그것을 종이에다가 펼치니 가사는 다음과 같다.(王明君者, 本為王昭君, 以觸文帝諱, 故改. 匈奴盛請婚於漢, 元帝詔以後宮良家女子明君配焉. 昔公主嫁烏孫, 令琵琶馬上作樂, 以慰其道路之思, 其送明君亦必爾也. 其新造之曲, 多哀聲, 故敘之於紙雲爾)

 

我本漢家子  저는 본디 한 왕실 여자랍니다

將適單于庭  선우 궁궐로 시집 가려는데

辭決未及終  이별한단 말 채 끝나기 무섭게

前驅已抗旌  앞서 끌 수레는 깃발 올렸네요

僕御涕流離  마부들이 이별에 눈물 적시고

轅馬為悲嗚  마차 끌 말은 고통스레 우네요

哀鬱傷五內  애잔한 마음에 오장이 상하는듯

泣淚霑珠纓  흐르는 눈물 진주영략 적셔요

行行日已遠  가고 또 가니 날마다 멀어져

乃造匈奴城  이윽고 흉노 도읍에 닿았어요

延我於穹廬  저를 게르로 맞아들이고는

加我閼氏名  저한테 알지라는 이름 덧붙이네요

殊類非所安  저와는 다른 족속이라 편치 않고

雖貴非所榮  귀하다지만 영광스럽지 않아요

父子見凌辱  아버지와 아들이 번갈아 욕보이니

對之慙且驚  그네들 마주하니 부끄럽고 놀랄뿐

殺身良未易  죽는 일도 정말로 쉽지는 않아

默默以苟生  숨 죽이며 살아가는 수밖에요

苟生亦何聊  구차한 삶 어디에다 기댈까요

積思常憤盈  쌓인 그리움만큼 늘 울분 가득

願假飛鴻翼  바라노니 기러기 날개 빌려

棄之以遐征  이 신세 버리고 멀리 달아나고파요

飛鴻不我顧  날아가는 기러기 저는 아랑곳없으니

佇立以屏營  우두커니 선 채 서성이기만 합니다

昔為匣中玉  옛날엔 보석함 구슬 같다가

今為糞上英  지금은 똥에 핀 꽃 신세랍니다

朝華不足歡  아침 꽃도 반길 처지 아니니

甘為秋草並  억지라도 가을풀과 함께할테요

傳語後世人  나중 사람들께 한마디 남깁니다

遠嫁難為情  멀리 시집가선 정들기 힘드노라고


2008 베이징올림픽 기간 전시한 중국 역대 4대 미녀. 왼쪽부터 차례로 초선(貂嬋) 서시(西施) 양귀비(楊貴妃). 연합DB


"나는 똥 속에 핀 꽃이랍니다." "귀하다지만 영광스럽지 않아요"

무수한 중국 시객이 왕소군이 되어 이리 읊었다. 어떤 경우에도 소군은 슬퍼야 했으며, 어떤 일이 있어도 흉노 땅에선 즐거움이 없어야 했으며, 언제나 남쪽을 바라보며, 한 왕실을 그리워해야 했다. 그렇게 소군은 언제나 중원이 그리는 한족의 슬픔과 분노를 대변해야 하는 존재였으며, 그래서 소군은 언제나 이민족에게 한족이 지배받을 수 없다는 표상이었다.

소군이 똥에서 피운 꽃이 되어야 했던 이유다.

여러 왕소군이 있다. 실제의 왕소군...아무도 모른다. 더구나 그 속내는 더더구나 알 수도 없다. 흉노왕비로 간택된 순간, 소군은 내 인생 드디어 땡잡았다 생각했을 수도 있다. 살아보니 그런 대로 권력 맛을 알았다. 그래 이 기분에 권력권력 하는구나 했더랬다. 이 참에 나를 내친 더 漢 왕조 묵사발 함 내봐? 이리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저 남쪽 漢族이 생각하는 왕소군은 언제나 그 실상에는 전연 관심이 없어, 소군은 언제나 비련의 여인이어야 했다. 

무수한 묵객이 소군을 그리 그렸다. 

  1. 연건동거사 2018.10.21 19:56 신고

    저 왕소군상이야 말로 김샘께서 웅변하신 글과 같은 취지에서 만든것 같군요. 선우하고 같이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걷는데 전혀 슬프지 않은 얼굴입니다.

《악부시집樂府詩集》에는 梁朝 武帝 소연蕭衍 撰으로 《河中之水歌》라는 이름으로 수록됐다. 《옥대신영玉臺新詠》에는 ‘歌辭’라는 두 편 연작시 중 제2편으로 실렸다. 그 전문과 옮김은 다음과 같다.



河中之水向東流 황하는 동쪽으로 흐르는데
洛陽女兒名莫愁 낙양 아가씨는 이름이 막수 
莫愁十三能織綺 막수는 열셋에 비단 짤 줄 알고
十四采桑南陌頭 열넷엔 남쪽 밭두렁서 뽕을 따다 
十五嫁與盧家婦 열다섯엔 노씨 집안 며느리 되어 
十六生兒字阿侯 열여섯엔 아들 낳아 이름이 아후 
盧家蘭室桂為梁 노씨집 규방은 계수로 들보 얹고
中有鬱金蘇合香 방에선 울금소합 향기 가득하네 
頭上金釵十二行 머리엔 금비녀 열두 줄로 꽂고
足下絲履五文章 발밑에선 비단 신발 오색 광채 
珊瑚挂鏡爛生光 거울 얹은 산호는 찬란하기만 하고
平頭奴子提履箱 하녀들은 신발 상자 들이미네 
人生富貴何所望 인생 부귀 바라서 무엇하리오
恨不嫁與東家王 옆집 총각 왕가랑 결혼했더라면


註釋:
(1) 蘭室:古代女子居室的美稱
(2) 鬱金蘇合香:兩種名貴的植物香料
(3) 五文章:縱橫交錯的美麗花紋
(4) 爛:光亮鮮麗.
(5) 平頭奴子:指戴平頭巾的僮僕
(6) 東家王:指王昌,為東平相散騎,早卒,婦為任城王曹子文女。


중국사에서 漢은 침략주의라는 단순무식한 구도로 제국주의를 규정할 때, 그 진정한 첫 왕조라 할 만 했으니, 영역의 무한 확장을 책동한 이런 움직임은 전한 무제 때 극성을 구가해 북방 강적 흉노를 처단하고자, 그 좌익을 짜르고자 서역을 정벌하고, 그 우익을 단절하고자 위만조선을 쳤으며, 남쪽 변경을 안정화한다는 구실로 남월을 정복했다. 그 이전 역대 중국 왕조와 현격히 달리, 한 무제의 침략주의가 독특한 점은 한 왕실에 의한 직접 지배를 관철하고자 했다는 점이니, 그리하여 그렇게 정복한 서역에는 서역도호부를 두고, 남월에는 7개 군을 설치했으며, 위만조선 땅에는 4군을 관할했다. 




이런 정복 전쟁은 중국 내에서는 새로운 바람을 불러왔으니, 첫째 군인 전성시대와 군수업자가 활개를 쳤고, 둘째, 새로운 인종의 대거 유입이었으니, 사실 남월이나 위만조선 혹은 흉노 영입은 인종학적으로는 이렇다 할 이채로움을 주었다고는 하기 힘드나, 서역은 종자가 조금은 다른 데다 이쪽은 특히 여성 중에는 미인이 많았던 듯, 이 서역 출신 미인들을 둘러싼 새로운 문학 환경을 조성한다. 아래 소개하는 우림랑(羽林郎)은 정확한 등장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 내용으로 보아 동한東漢 무렵이 아닌가 하거니와, 벌써 이 노래를 보면 호희胡姬를 소재 삼아 이그조틱한 분위기 물씬함을 본다. 이렇게 조성한 문학 환경은 이후 당대唐代로 내려가 더욱 극성을 구가하거니와, 그 자신 서역 출신이라는 주장이 끊이지 않은 태백 이백만 해도, 호희를 소재로 삼은 명편을 쏟아낸다.   


이 노래는 《옥대신영玉臺新詠》에 처음 수록하면서 그 작자를 신연년辛延年이라 하면서 소개했거니와, 그 직후 수대隋代에 편집된 백과사전 《북당서초北堂書鈔》에서는 작자 이름이 신연수辛延壽라 했으니, 흥미로운 점은 연년延年이나 연수延壽나 뜻은 같다는 사실이다. 작가를 둘러싸고 뭔가 장난을 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제목이 말하는 우림랑(羽林郎)이란 우림의 장교라는 뜻이거니와, 우림羽林이란 황제 근위대, 청와대 경호원 같은 조직을 말하며, 랑郞이란 그런 부대를 통솔하는 중상위급 장교 정도로 보면 대과가 없다. 




그렇다면 제목만 보면, 이 시는 황실 근위대 장교와 관련할 법한 내용이겠지만, 실은 그와는 전연 딴판이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제목만 빌려왔을 뿐이다. 당시 유행하는 곡조에 우림랑 비슷한 제목이 붙었던 듯, 그것을 빌려와 이것이 악부체樂府體 가요라는 사실 정도만을 의도할 뿐이다. 


우림랑(羽林郎)

[東漢] 신연년辛延年 


昔有霍家奴 옛날 곽가댁 사내종
姓馮名子都 성이 풍 이름이 자도
依倚將軍勢 곽 장군 권세 기대어
調笑酒家胡 술집 호녀 조롱했네
胡姬年十五 호녀 나이 열에 다섯
春日獨當壚 봄날 홀로 주막 장사
長裾連理帶 긴치마에 허리띠 매고
廣袖合歡襦 넓은 소매 합환 저고리
頭上藍田玉 머리엔 남전옥 올리고
耳後大秦珠 귓볼엔 대진땅 진주
兩鬟何窕窕 두 쪽 얼마나 이쁜지
一世良所無 이 세상엔 없다네
一鬟五百萬 쪽 하나 오백만냥
兩鬟千萬餘 두 쪽이니 천만냥
不意金吾子 불현듯 경호원 나리
娉婷過我廬 폼나게 제 주막 지나니
銀鞍何煜爚 은빛 안장 얼마나 눈부신지
翠蓋空踟躕 비취수레 공연히 머뭇하며
就我求清酒 제게 소주 달라하시기에
絲繩提玉壺 비단끈에 옥술병 달았지요
就我求珍肴 제게 좋은 안주 달라기에
金盤鱠鯉魚 금 쟁반에 잉어회 드렸지요
貽我青銅鏡 제게 청동거울 주시면서
結我紅羅裾 제 붉은비단 자락에 묶어주셨지요
不惜紅羅裂 붉은 비단 찢김이 아까우리오
何論輕賤軀 어찌 미천한 몸 따지리오
男兒愛後婦 남잔 나중 여자 아끼고
女子重前夫 여잔 먼저 남자 중하다오
人生有新故 인생살이 옛것과 새로움 있고
貴賤不相踰 귀하고 천함은 넘어서지 못하니 
多謝金吾子 금오나리 거듭 고맙습니다
私愛徒區區 사사로운 애정 부질없사옵니다


한대 악부가 다른 시가와 유별나게 다른 점은 문장이 대단히 평이하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애초에는 대중가요 가사인 까닭에, 그 형식 역시 장편이 많고, 훗날 우리의 판소리와 아주 흡사해 창을 하는 듯한 대목이 적지 않다. 이 시 역시 전반으로 보아 판소리 창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더 쉽다. 나아가 그 중간 부분 "不意金吾子 불현듯 경호원 나리 / 娉婷過我廬 폼나게 제 주막 지나니" 대목이 전반부와 완연히 달라져, 전반부는 이른바 제3자 전지적 작가 시점이라면 이하 후반부는 호희가 1인칭 화자가 되어 스토리를 전개한다. 그리하여 이하에서는 작자가 '我'가 된다. 


저들 구절에 보이는 대목들 중 작품 이해를 위한 해설은 서성 선생이 역주한 《양한시집兩漢詩集》(보고사, 2007, 246~250쪽)은 주된 텍스트로 삼아 정리하고자 한다. 곽가(郭家) 혹은 장군은 전한 무제의 고명 대신으로 소제 때 정권을 장악한 곽광郭光을 말한다. 곽광이 정권을 오롯이 하자, 권세는 그 집안을 관리하는 사람들에게도 분점되니, 姓이 풍馮이요 이름이 자도子都란 풍자도는 실제 《한서 곽광전》에 의하면, 집안 사무를 총괄한 사람으로, 곽광이 죽은 뒤에는 그 미망인과 놀아났다 한다. 조소調笑란 조롱한다는 뜻이요, 호희胡姬란 서역 출신 아름다운 여인이란 뜻이거니와, 그의 나이 15살이라 했으니, 그 옛날엔 15살을 한창 미모가 빛을 발하는 시점으로 보는 흔적이 부지기다. 

당로當壚란 로를 맡아 운영한다는 뜻이거니와, 간단히 말해 주모다. 로는 술집에서 술항아리를 놓아두고자 흙으로 약간 높인 곳을 의미하거니와 이 경우는 말할 것도 없이 술집 일반을 말한다. 연리대連理帶란 상하 대칭하는 무늬로 이루어진, 두 줄이 하나로 된 허리띠를 말하며, 남전옥藍田玉이란 남전이라는 땅에서는 나은 옥을 말하거니와, 장안 근처였다. 대진주大秦珠란 대진 땅에서 나는 진주를 말하거니와, 대진은 흔히 로마제국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 로마제국이라기 보다는 서역 먼 어느 땅이라 보는 편이 좋다. 

금오자金吾子란 집금오集金吾를 말하거니와, 경호 장교다. 이하에서는 그리 별도 설명은 필요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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