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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신라인.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에 임명되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화랑 집단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배출했다.  아버지 오기는 27세 풍월주이며, 할아버지 예원은 20세, 증조부 보리는 12세, 고조부 이화랑은 4세, 5대조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였다.


삼국사기 권 제46(열전 제6) 김대문 열전 :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의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 남해 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


해동고승전 권 제1 법운(法雲) 전 : (진흥왕) 37년(576)에는 처음으로 원화(原花)를 받들어 선랑(仙郞)으로 삼았다. 처음에 임금이나 신하들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할까 근심하다 많은 사람을 무리지어 놀게하고는 그들의 행실을 보아 천거하여 쓰고자 했다. 마침내 미녀(美女) 두 사람을 가려 뽑으니 남무(南無)와 준정(俊貞)이라 하니 무리를 300명이나 모았다. 두 여자는 서로 미모를 다투다가 (준)정이 남무를 유인해 억지로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다음 강물에 던져 죽이므로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는 미모의 남자(美貌之男子)를 뽑아 곱게 단장시켜 받들어 화랑으로 삼으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혹은 도의로 서로 탁마하고 혹은 노래와 풍류로 서로 즐기니 산수를 찾아 다니며 유람하니 먼 곳이라도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천거했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세기(世記)에 이르기를 “어진 재상과 충성된 신하가 여기에서 나오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군사가 이로 인하여 나왔다”고 했다. 최치원의 난랑비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풍류라 한다. 실로 3교를 포함한 것이니 모든 백성을 상대로 교화했다. 또한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했으니 이는 노나라 사구의 뜻이고 무위의 사태에 처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하였으니 주나라 주사의 종지였으며, 모든 악한 일은 하지 않고 모든 착한 일만 받들어 행하니 천축 건태자의 교화였다”고 했다. 또 당나라 영호징은 신라국기에서 이르기를 “귀인의 자제 중에서 아름다운 자를 가려 뽑아 분을 바르고 곱게 단장해 받을어 이름을 화랑이라 하고 나라 사람들이 다 받들어 섬겼다”고 했다. 이는 대개 왕의 정치를 (돕기 위한) 방편이었다. (선)랑이었던 원(화)에서 신라말에 이르기까지 무릇 200여 명이 나왔는데 그 중에서도 4선(仙)이 가장 어질었으니, 저 세기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삼국유사 권제1 기이 1 제2대 남해왕(南解王) : 김대문(金大問)이 말하기를, “차차웅(次次雄)이란 무당을 이르는 방언(方言)이다.  세상 사람들은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그들을 두려워하고 공경한다.  그래서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자충(慈充)이라 한다”고 했다. 처음에 남해왕(南解王)이 죽자 그 아들 노례(弩禮)가 탈해(脫解)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이에 탈해(脫解)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성스럽고 지혜 있는 사람은 이가 많다 한다”면서 떡을 입으로 물어 시험해 보았다. 고전(古典)에는 이와 같이 전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임금을 마립간(麻立干)이라고도 했다. 이를 김대문(金大問)이 해석하기를, “마립간(麻立干)이란 서열을 뜻하는 방언(方言)이다. 서열(序列)은 위(位)를 따라 정하기 때문에 임금의 서열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서열은 아래에 위치한다.  그래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라고 했다.


삼국사기 권제1(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 유리 이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잇거라'라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3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


삼국사기 권제3(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김대문(金大問)이 말했다.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 15년(528)에 불교를 처음으로 시행했다. 일찍이 눌지왕 때 승려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으로 왔는데, 그 고을 사람 모례(毛禮)가 자기 집 안에 굴을 파 방을 만들어 있게 했다. 그 때 양에서 사신을 보내와 의복과 향을 보내주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그 향 이름이 무엇이며 어디다 쓸 지를 모르므로 사람을 보내 향을 가지고 다니며 두루 물었다. 묵호자가 이를 보고 그 이름을 대면서 말했다. 이것을 사르면 향기가 나니, 신성(神聖)에게 정성을 도달케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신성스러운 것으로는 삼보(三寶)보다 더한 것이 없으니 첫째가 불타(佛陀)요 둘째는 달마(達摩)이며 셋째가 승가(僧伽)입니다. 만약 이것을 사르면서 소원을 빌면 반드시 영험(靈驗)이 있을 것입니다. 그 무렵 왕녀가 병이 심했으므로 왕은 묵호자에게 향을 사르고 소원을 말하게 했더니, 왕녀가 병이 곧 나았다. 왕이 매우 기뻐하며 음식과 선물을 많이 주었다. 묵호자가 나와 모례를 찾아보고 얻은 물건들을 그에게 주면서 “나는 지금 갈 곳이 있어 작별하고자 합니다” 라고 말했으니 잠시 후 간 곳을 알 수 없었다. 비처왕(毗處王)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시중드는 이 세 사람과 함께 모례 집에 또 왔다. 모습이 묵호자와 비슷했으니 몇 년을 그곳에서 살다 병(病)도 없이 죽었다. 시중들던 세 사람이 머물러 살면서 경(經)과 율(律)을 강독하니 믿고 받드는 자가 가끔 생겼다. 이 때 와서 왕 또한 불교를 일으키고자 했으나 뭇 신하가 믿지 않고 이런 저런 불평을 많이 하므로 왕이 어쩔줄 몰라 했다. 왕의 가까운 신하 이차돈(異次頓)<처도(處道)라고도 한다>이 아뢰었다. “바라건대 하찮은 신(臣)을 목베어 뭇 사람의 논의를 진정케 하십시오”.  왕이 말했다. “본래 도(道)를 일으키고자 하는데 죄없는 사람을 죽임은 잘못이다”. 그러자  대답하기를 “만약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비록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여러 신하를 불러 의견을 물으니 모두 말했다. “지금 중들을 보니 깍은 머리에 이상한 옷을 입었고, 말하는 논리가 기이하고 괴상해 일상적인 도(道)가 아닙니다. 지금 만약 이를 그대로 놓아두면 후회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신들은 비록 무거운 벌을 받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이차돈 혼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뭇 신하들의 말은 잘못된 것입니다. 비상(非常)한 사람이 있은 후에야 비상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듣건대 불교가 심오하다고 하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왕이 말했다. “뭇 사람의 말이 견고하여 이를 깨뜨릴 수가 없는데, 유독 너만 다른 말을 하니 양 쪽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드디어 이차돈을 관리에게 넘겨 목을 베게 하니, 이차돈이 죽음에 임해 말했다. 나는 불법(佛法)을 위해 형(刑)을 당하는 것이니, 부처님께서 만약 신령스러움이 있다면 내 죽음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목을 베자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치니 그 색이 우유빛처럼 희었다. 뭇 사람이 괴이하게 여겨 다시는 불교를 헐뜯지 않았다.<이는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지만 한나마(韓奈麻)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 기록과는 자못 다르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 37년(576) 봄에 처음으로 원화(源花)를 받들었다. 일찍이 임금과 신하들이 인물을 알아볼 방법이 없어 걱정하다가, 무리들이 함께 모여 놀게 하고 그 행동을 살펴본 다음에 발탁해 쓰고자 하여 마침내 미녀 두 사람 즉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을 뽑고 무리 300여 명을 모았다. 두 여인이 아름다움을 다투어 서로 질투하여, 준정이 남모를 자기 집에 유인하여 억지로 술을 권하여 취하게 되자 끌고 가 강물에 던져 죽였다. 준정이 사형에 처해지자 무리들은 화목을 잃고 흩어지고 말았다. 그 후 다시 미모의 남자를 택하여 곱게 꾸며 화랑(花郞)이라 이름하고 그를 받드니,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혹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고 혹은 노래와 음악으로 서로 즐겼는데, 산과 물을 찾아 노닐고 즐기니 멀리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사람의 사악함과 정직함을 알게 되어, 착한 사람을 택하여 조정에 천거하였다. 그러므로 김대문(金大問)은 화랑세기(花郞世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김흠운 열전 : 논(論)한다. 신라 사람들이 인재를 알아볼 수 없음을 염려해 무리끼리 모여 함께 놀게 하고는 그 행동을 지켜본 다음에 뽑아 쓰고자 해서 마침내 미모의 남자를 뽑아 분장을 시켜 화랑이라 이름하고 받들게 하니 무리가 구름떼처럼 모였다. 서로 도의로써 갈고 닦았고, 혹은 노래로써 서로 즐기고, 산수를 유람하며 즐기어 멀리라도 가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 인해 사람됨의 그릇됨과 바름을 알아 선택해 조정에 천거했다. 대문(大問)이 말하기를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가 여기에서 나왔고, 좋은 장수와 용감한 병사가 이로부터 생겨났다』 한 것은 이를 말함이다. 삼대(三代) 화랑이 무려 200여 명이었는데 훌륭한 이름과 아름다운 일은 모두 전기와 같다. 흠운 같은 자는 또한 낭도로서 능히 왕사(王事)에 목숨을 바쳤으니 그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자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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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 시대 신라인으로 사량궁 사인으로 있으면, 다른 사인들이 관청 곡식을 몰래 빼돌리는 일에 가담하지 않아 그들에게 독살됐다. 근랑(近郞)이라는 풍월주를 따라 수양하면서 의로운 것이 아니면 사사롭게 취할 수 없다는 신념을 익혀 이를 실천에 옮겼다.     

삼국사기 권 제48(열전 제8) 검군 열전 : 검군(劍君)은 대사(大舍) 구문(仇文)의 아들로 사량궁(沙梁宮)의 사인(舍人)이 되었다. 건복(建福) 44년 정해(진평왕 49: 627) 가을 8월에 서리가 내려 여러 농작물을 말려 죽였으므로 다음 해의 봄으로부터 여름까지 큰 기근이 들어 백성들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메웠다. 이때 궁중의 여러 사인(舍人)들이 함께 모의하여 창예창(唱倉) 곡식을 훔쳐 나누었는데 검군만이 홀로 받지 않았다. 여러 사인이 말하기를 “뭇 사람이 모두 받았는데 그대만이 홀로 물리치니 어떤 이유에서인가? 만약 양이 적다고 여긴다면 청컨대 더 주겠다!” 하였다. 검군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근랑(近郞)의 문도(門徒)에 이름을 붙여 두고 화랑의 뜰[風月之庭]에서 수행하였다. 진실로 의로운 것이 아니면 비록 천금의 이익이라도 마음을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당시 이찬(伊飡) 대일(大日)의 아들이 화랑이 되어 근랑이라고 불렸으므로 그렇게 말했다. 검군이 나와 근랑의 문 앞에 이르렀다. 사인들이 몰래 의논하기를 “이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말이 새어 나갈 것이다.” 하여 드디어 불렀다. 검군이 자기를 모살할 계획을 알았으므로 근랑과 작별하며 말하기를 “오늘 이후에는 서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고 했다. 근랑이 그 이유를 물었으나 검군은 말하지 않았다. 두세 번 거듭 물으니 이에 그 이유를 대략 말하였다. 근랑이 “어찌 담당 관청에 알리지 않는가?”라고 말하니 검군이 말하기를 “내 죽음을 두려워하여 뭇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 빠지게 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어찌 도망가지 않는가?” 하니 “저들이 굽고 나는 곧은데 도리어 스스로 도망가는 것은 대장부가 할 일이 아닙니다.” 하고, 드디어 모임 장소에 갔다. 여러 사인이 술을 차려 놓고 사죄하였다. 몰래 약을 음식에 섞었는데 검군이 이를 알고도 꿋꿋하게 먹고 죽었다. 군자가 말하기를 “검군은 죽어야 할 바가 아닌데 죽었으니 태산(泰山)을 기러기털[鴻毛]보다 가벼이 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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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미진부공 전 : 미진부공(未珍夫公)은 아시공 아들이다. 어머니는 삼엽궁주(三葉宮主)이니 법흥대왕 딸이다. 꿈에 백학을 보고 낳았다. 공은 모습이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법흥대왕이 총애했다. 비대공(比臺公) 등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다. 그 때 법흥대왕의 옥진궁주에 대한 사랑이 극진해 지소태후가 (진골)정통이 즉위하기 어렵다 하면서, 삼엽과 함께 아시공이 태후를 지지했다. 이로써 태후가 삼엽(三葉)과 공을 총애했다. 태후가 정치를 맡게 되자 공을 폐신(嬖臣)으로 삼으니 그 때 공은 나이가 16살로 능히 태후 뜻에 부합할 수 있었다. 앞서 삼산공(三山公) 딸인 준정(俊貞)이 원화(源花)가 되어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 딸인 남모공주(南毛公主)는 백제 보과공주(寶果公主) 소생인데, 또한 뛰어난 미인으로 공과 도탑게 사랑했다. 태후가 공을 총애해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했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龍陽君)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자리에 있게 하고, 원화를 물러나게 했다. 그러므로 준정(俊貞)이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됨을 막고자 했다. 태후는 비록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繼夫)로 삼기는 했으나 실은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공에게 명해  물러나게 했다. 태후는 또 낭도가 부족함을 염려해 위화공 낭도를 속하게 함으로써   더해 주었다. 준정(俊貞)이 투기했다. 이에 술로 꼬득여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것을 폭로했다.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아 그 무리를 일러 풍월(風月)이라 하고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風月主)라 했다. 위화공(魏花公)이 풍월주가 되고, 공이 부제(副弟)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공은 남모를 잃은 이후에 아내를 맞지 않았다. 공은 외손으로 일찍이 법흥대왕을 모셨는데, 궁중에서 후궁(後宮)인 묘도부인(妙道夫人)과 사통했으나, 감히 말하지 못했다. 태후가 알고 허락했다. 공은 이에 묘도를 아내로 맞아 미실낭주(美室娘主)와 미생랑(美生郞)을 낳았다. 미실은 재색이 뛰어났는데 진흥과 진평을 섬겨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미생랑 또한 화랑에 들어갔다. 공은 지소태후를 섬겨 충성을 다하다 총애가 줄어들자 몸을 나라에 바치기고자 해서 낭도를 거느리고 전쟁에 나아가 과연 큰 공을 세웠다. 미실이 총애를 얻게 되자, 작(爵)이 각간(角干)에 오르게 되었다. 부인인 묘도(妙道) 또한 궁주(宮主)에 이르러 대원신통(大元神統)을 잇게 되었으니, 아! 성대하다.

찬한다 : 색으로 섬기어 충성을 다 했다. 용맹스러움으로 나라를 받들고 또한 그 공을 다했다. 부인 묘도는 위화랑공 손녀인데 배필로 삼아 미화를 낳으니 천도(天道)는 아득하고 오래도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거칠부 열전 : 진흥대왕 6년 을축(545)에는 왕명을 받아 여러 문사(文士)들을 모아 국사(國史)를 편찬하였고 파진찬으로 승진하였다. 12년 신미(진흥왕 12년: 551)에 왕이 거칠부와 대각찬(大角) 구진(仇珍), 각찬 비태(比台), 잡찬 탐지(耽知), 잡찬 비서(非西), 파진찬 노부(奴夫), 파진찬 서력부(西力夫), 대아찬 비차부(比次夫), 아찬 미진부(未珍夫) 등 여덟 장군에게 명하여 백제와 더불어 고구려를 침공하게 하였다. 백제 사람들이 먼저 평양(平壤)을 격파하고 거칠부 등은 승리의 기세를 타서 죽령 바깥, 고현(高峴) 이내의 10군을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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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세종공(世宗公) 전 : 6세 세종(世宗)은 태종공(苔宗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다. 진흥대제(眞興大帝)와 어머니가 같다. 세종전군(殿君)은 처음 이름이 의종(義宗)이다.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가 있었으며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해 말하기를 ‘짐의 막내아우’라고 하시면서 항상 곁에서 모시게 했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은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었다. 태종공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제(帝)를 찾아뵈자 공이 곁에서 부축했다. 태종공이 제(帝)에게 먼저 拜하고 공에게 다음으로 拜하자 공이 황망하게 나아가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노인은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내 신하이다. …몸으로 네게 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입니다. 어찌 신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라고 했다. 태종공이 놀라 말하기를 ‘태후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을 신화(神化)할 수 있습니다. 전군은 신자(神子)이십니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세종은) 태종공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일찍이 모후에게 전■(殿■) … 저의…를 제 아버지라고 하셨거니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라고 했다. 제(帝)는 ‘… (태후)의 신성과 예덕(睿德)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서 짐의 …이 있으니, 또한 짐의 집 경사스러운 행운이다. 늙은 신하는 어찌 반드시 피하는가. …짐의 아우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공에게 허락하여 …에게 아버지라 부르도록 했다. …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례를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했다. 공(公)은 …와 함께…. 몇 달 앞서 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골라서 궁중에 모아 놓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했다. …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물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하시오?’라고 했다. 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 입니다. 단 …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라고 했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苔宗)을 불렀다. 미실 일을 의논하기를, ‘며느리를 얻는데 지아비께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태종은 말하기를 ‘폐하 집안 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말하기를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 손녀입니다. 제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제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사도(思道)이다>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미실을 궁에 들어오게 했다. 섬긴 지 며칠 되지 않아 공과 상통하니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 때 태후는 숙명공주를 좋아해서 장차 통(統)을 잇기 위해 황후를 폐하고자 했다. 황후는 곧 미실의 숙모였다. 이에 그 계책을 황후에게 누설했다. 황후는 이에 울면서 제(帝)에게 원통함을 호소했다. 제(帝)는 본디 황후를 사랑했기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했다. 태후가 노하여…미실을 위하여 걱정하여 태후에게 나아가 간했다. 태후는 이에 미실을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짖기를 ‘네게 전군을 받들라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들라는 것이었다. 한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로 전군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에 출궁을 명했다. …진종(眞宗) 전군 딸인 융명(肜明)을 정비(正妃)를 삼았다. 제(帝)는 따져….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따라갔다. 미실이 이미 돌아와서는 슬퍼 울면서 먹지 않고 …. …일찍이 준영(俊英)의 일로서 미실에게 …한 바 되어…. …사다함과 같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은….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데는 마땅히 사다함과 같이…해야 한다. 무릇 부귀란 한 때다. 나는 …. 한 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했으나 지금은 … 이와 같다. 이에 사다함공을 불러 위로했다. 미실은 이에 정■이 일어나 서로 벗어났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노래로서 보냈다. 이르기를,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 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이에 온갖 방법(萬端)으로 위로 하고 갔다. 전군이 듣고 …괴로워했다. 태후가 전군이 상심할까 염려해 미실을 다시 입궁케 했는데, 전군은 기뻐 미친 듯 달려갔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했다. 미실은 원비(元妃)의 첩이 됐음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전군은 이에 태후에게 청해 미실을 전군부인(殿君夫人)으로 삼았고 융명은 차비(次妃)로 삼았다.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고자 했다. 미실과 함께 전군과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융명을 내쫓았다. 사다함이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픔을 노래했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했다. 해(解)하여 이르기를,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라 했다. 죽을 즈음에 이화공(二花公)이 감싸 안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이을 것인가’라고 했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화공이 이에 태후에게 아뢰어 정해달라고 했다. 태후가 말하기를 ‘내 아들은 어리고 약하니 어찌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기를 ‘사다함(斯多含) 종형(從兄)<■질(■姪)이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했다. 그러므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세종이 그렇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해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설화랑(薛花郞)을 부제로 삼았다.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과연 미실이 꿈에 사다함공이 품에 들어오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가 부부가 되고자 했으니, 그대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공에게 아뢰었다.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해 낳은 아들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세종은 금지옥엽 귀한 왕족이었으나,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幢)을 이루었다.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끌어준 것이다. 그 때 동태자(銅太子)가 이미 장성해 있었다. 태후는 이에 만호공주(萬呼公主)를 짝지어 진골정통(眞骨正統)을 잇고자 했다. 사도황후(思道皇后)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을 잇고자 해서 몰래 서로 의논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서로 친해서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后)로 삼으리다’고 했다. 미실이 크게 기뻐하며 태자와 상통(相通)해 아이를 가졌다.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또한 미실을 들어오게 하고는 색공(色供)으로 모시도록 했다. 미실은 음사를 잘해서 총애가 날로 중하여 황후궁 전주로 발탁되니 그 지위는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이에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했다. 세종은 이에 출정하고자 하니, 낭도가 많이 따랐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세종이 하던 일을 대신토록 했다. 총애를 믿고 방탕하니 설원랑과 그 동생인 미생과 통(通)했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기를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했거니와,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 봄(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라고 했다. 설원랑 등이 …. 미실은 이에 왕을 설득하기를 ‘옛날 선대 제(帝)들은 첩을 원화 …. 총첩(寵妾)을 낭도들에게 받들게 하고는 함께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습니다. …첩은 폐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았습니다. 아직 … 없습니다. 세종이 낭도를 많이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만약 첩이 … 변고가 있으면 첩이 원컨대 스스로 원화가 되어 낭도를 모두 거느리는 것(總率) …. … 기쁘게 여겨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는 설원과 미생을 봉사랑(奉事郞)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花母)로 삼았다. 세종은 이에 그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새 원화는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라’고 했다. 낭도들이 눈물 흘리며 물러가지 않았다. 제(帝)가 명하여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萬衆)를 통솔해 조알토록 했다. 대왕과 전주(殿主)는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잔치(燕饗)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 제도는 폐한 지 29년만에 부활했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했다. 이날 밤 제(帝)와 미실은 남도(南桃) 정궁(正宮)에서 합환했다. 낭도와 유화(遊花)들에게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분(奔)하게 했다. 성중 미녀로 나온 자가 또한 만중(萬衆)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지고 환성이 4해 물을 끓어오르게 했다. 제(帝)와 원화가 난간에 이러르 구경하니 낭도들이 각기 유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抃舞) 그 아래를 지나 가니, 그 때마다 만세 소리(山呼)가 진동했다. 제(帝)는 기쁨이 매우 커서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말하기를,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이고 짐과 너 또한 자웅이다’고 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품에 들어가며 말하기를 ‘비록 숙모의 존귀함이라도 이와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부림이 옥진(玉珍)의 기풍을 크게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늘 미실 가슴에 있으며 좋은 계책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실은 본래 (銅)태자를 …했는데 정숙한 어머니가 전주로 들어가니 제(帝)가 백년후 …할까 염려하여 감히 태자를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서로 이어 만났다. 태자는 …함이 없이 구함이 더욱 심해졌다. 미실은 매우 많은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미생과 의논했다. 태자가 밖에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했다. ■자와 함께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밖에서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 원년(572) 3월 동태자(銅太子)가 보명궁(宝明宮)의 개 사건(獒事)으로 죽었다.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 …. 대왕 또한 새어 나온 말을 얻어들은 바로는 미실이 방탕하여 …이 없어…. 세종이 부름을 받아 들어와 미실이 원화를 물러남을 승인했다. 그리고 세종을 …해서 다시 하니 세종이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은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원화를 물러났고, 전주가 그대와 함께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니,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줌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풍월주 지위를 전해 주었다. 그 때 금태자(金太子) 또한 미실을 좋아해 설원․미생 등과 사귀며 정을 맺고 방외우(方外友)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해서 정업(淨業)을 공언했으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금태자와 함께 후사(後事)를 약속했다. 제(帝)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하지 못하고 미실을 다시 불러들여 의논했다. 제(帝)가 붕하시고 금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하여 미실을 받아들였으나 세상의 여론 때문에 황후로 봉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다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그다지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思道太后)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태자 아들인 백정공(白淨公)을 즉위케 하니, 이가 진평대제(眞平大帝)시다. 제(帝)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後宮) 일을 맡아 조정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했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했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하나의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한다: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세계 :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니 초명(初名)은 식도부인(息道夫人)이며 법흥왕 딸이다. 처음에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가 진흥대제를 낳았다. 법흥대왕 유명에 영실공을 계부로 맞이해 황화공주(黃華公主)를 낳았다. 영실공이 멀리하지 않았는데 …. 권신(權臣)들이 물리쳤다. 이에 병부령(兵部令)을…. … 숙명공주 및 공(公)…. 태종(苔宗)은 아버지가 아진종(阿珍宗)이니 습보공(習宝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이니 …의 딸이다. 습보공은 내물왕 손자다. 지소(只召)는 어머니가 보도황후(保道皇后)이며 소지왕(炤知王) 딸이다. 보도(保道)는 어머니가 선혜황후(善兮皇后)이니 내숙공(乃宿公) 딸이다. 선혜는 어머니가 조생부인(鳥生夫人)이니 눌지왕 딸이다. 조생(鳥生)은 어머니가 아노(阿老)이고, 아노는 어머니가 내류(內留)이며, 내류는 어머니가 광명(光明)이고, 광명은 어머니가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는 어머니가 홍모(紅帽)이다. 홍모는 어머니가 옥모(玉帽)이니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일러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姻統)이 아니면 황후로 삼지말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소문국(召文國)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시집가 낳은 사람이니 옛날의 진골(眞骨)이 아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지왕 : 2년(577)...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군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천7백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 24년(577) 겨울 10월에 신라의 서쪽 변방 주ㆍ군(州郡)을 치자 신라의 이찬(伊飡) 세종(世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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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바터 


만호태후 뜻을 알고는 미리 물러난 미실. 그리하여 자기 아들 보종을 내리고, 그 자리에 만호태후가 점 찍은 15살 꼬맹이 유신을 풍월주에 앉힌 미실한테 만호 역시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했다. 역시 정치는 주고받기라, 노회한 정치가 만호는 또 다른 노회한 정치가 미실을 보답할 방법을 생각한다. 미실로서도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호가 내민 선물이 블루칩이고 가상화폐였기 때문이다. 


11세 풍월주가 하종(夏宗)이다. 갑신년(564)에 태어났으니, 아버지가 세종(世宗)이요, 어머니가 바로 미실(美室)이었다. 화랑세기 하종공 전에 의하면 15살에 화랑에 들어간 그는 역사를 사다함 형인 토함한테서 배우고, 노래는 이화공에게 배웠으며, 검술은 문노에게 터득했으며, 춤은 미실 동생인 미생(美生)을 스승으로 섬겨 습득했다. 


하종은 설원공 딸인 미모(美毛)를 배필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과 두 딸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를 두었다. 두 딸 중 맞이인 유모는 14세 풍월주를 역임하는 호림(虎林)한테로 시집가니,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선종(善宗)이라, 훗날 출가해서 자장이라는 일컫게 되는 대고승이다. 자장율사가 다름 아닌 미실의 증손이었다. 


문제는 영모를 어찌할 것인가? 그의 배필로 누굴 삼을 것인가? 만호태후가 바로 영모 카드를 미실한테 제시했다. 손녀 영모 배필로 유신을 삼았으면 하는데 어떠신가? 화해 제스처를 미실이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15세 유신공 전 기술이다. 


(유신이 중악에서 비결을 받고)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공이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만호)태후가 하종공 딸 영모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美室宮主)를 위로 하려 했다. 영모는 곧 유모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때는 건복 29년 임신년(612)이었다.


이렇게 되어 만호태후 손자인 김유신은 당대 또 다른 권력자 미실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김유신은 595년 생이니, 612년 결혼할 때 나이는 18세였다. 김유신 혼인 관련 기록은 나중에 환갑이 된 시점인 655년인가에 김춘추와 문희 소생인 지소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사건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의하면, 그는 18살에 영모를 아내로 받아들였다.  


현존하는 화랑세기 판본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그의 장남 삼광(三光)은 바로 영모 소생이고, 우리가 잘 아는 원술 이하는 지소부인 소생이다. 김유신과 지소의 결혼 역시 삼촌과 조카딸간 근친혼이었다. 


미실은 왜 저 카드를 받아들였을까? 그로서도 이렇다 할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도 했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가치로 김유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유신 정도라면, 나중에 어찌될 지 알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블루칩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김유신이 시종 미실에 맞선 것으로 묘사했지만, 역사는 전연 딴판이라, 그는 미실의 손녀사위로서, 그 후광 역시 등에 업고 서서히 정계의 중심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가 김유신으로서는 주어진 후광이라면, 이젠 그런 후광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시종일관 군인 전략가의 길을 모색했다. 마침 그 시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때라, 그 능력을 보여줄 환경이 무르익은 상태였고, 그 기회를 김유신은 여지없이 농락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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