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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9

몽땅 털린 몽골 노용올 흉노무덤 흉노를 내가 논할 때면 매양 써먹는 사진이라 2009년 8월 14일 그쪽 행사 취재차 몽골을 찾은 김에 일행들과 더불어 몽골 쪽 안내를 쫄래쫄래 따라 가 실견한 노용올(노인울리) 흉노무덤 발굴현장이라 당시 저 무덤은 몽골 팀이 러시아팀과 공동조사를 벌여 이른바 매장주체부까지 노출한 상황이라 그 생생한 현장을 맛보았다는 기억으로 각인한다. 저 노용올 무덤은 이 업계선 아주 유명한 데라 일찍이 알려졌거니와 조심할 점은 몽골고원 흉노 흔적은 거의 예외 없이 후기 흉노 그것이라는 사실이어니와 우리가 생각하는 강성한 흉노, 곧 한 고조 유방을 개박살내고 여태후한테는 이젠 과부되었으니 나한테 시집오라 맘껏 조롱한 그 전기 흉노가 아니다. 저 강성한 흉노는 실상 그 주무대가 중원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곳이니 곧 고비 .. 2024. 4. 14.
흉노를 어찌 보아야 하는가(1) 정재훈 국립경상대 교수가 유목국가 삼부작 대미로 흉노유목제국사(사계절)를 근자 출간한 바, 그 책을 사다 놓고는 내가 요새 수서隋書 완역본에 투신하는 관계로다가 묵히는 중이라 이러다 영영 뒤로 물릴 듯한 우려가 없지 아니해서 저를 쳐들어가기 전 유념해야 하는 사항이라 내가 생각해서 몇 가지를 적기해 둔다. 내가 생각하는 흉노론 혹은 시대론 정도로 생각해주었으면 싶다 첫째 흉노의 영역과 관련해 그 흉노를 보겠다며, 혹은 다른 이유로 요새 몽골로 물밀듯이 달려가거니와 실제 몽골을 가서 보면 그 국립박물관 같은 데에는 흉노 유물 유적이라 해서 적지 않은 물품이 요란스레 선전되는가 하면 노용올(노인울라) 같은 흉노시대 흉노 유적이 몽골초원에는 널리 분포한다. 그리하여 최초의 유목국가 혹은 유목제국을 이룩했다 할.. 2023. 8. 28.
유목제국사 삼부작 제3부 흉노 유목제국사(기원전 209~216)를 출간하며 by 정재훈 1998년 유라시아 유목제국사 고대 부분 번역을 시작으로, 2005년도 위구르 유목제국사(744~840), 2016년도 돌궐 유목제국사(552~745), 그리고 2023년 흉노 유목제국사(기원전 209~216)를 내놓게 되었습니다. 많이 부족한 부분도 있지만 저의 고대 유목제국사 연구 3부작이 이렇게 정리가 되네요. 관심이 큰 분야도 아니고 여러 가지 한계도 많은 분야라서 많이 힘들기도 하고 무모해 보일 수도 있는 작업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작업 과정에서 저의 한계를 많이 느끼는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다만 문헌을 전공하는 학자로서 초원의 유목사를 한국인의 입장에서 좀 더 객관적으로 사실에 가깝게 정리해보고자 하는 생각에서 진행해왔습니다. 중국에 치우친 역사 또는 유목민을 야만화하는 입장이 아니라.. 2023. 7. 20.
10미터 지하에 쳐박은 흉노 무덤, 그래도 도굴은 피하지 못했다 이런 흉노무덤은 깊이가 10미터 안팎인데 예외없이 도굴됐다. 내가 연전에 몽골 노용 올(노인 울라) 현장을 둘러보니 얕은 봉분이 예외없이 있다. 나는 이 표식이 도굴을 불렀다고 본다. 나 여기 있으니 도굴하라는 안내판에 다름 아니다. 저런 무덤 만들기도 지랄 같지만 도굴하기도 더 지랄 같다. 도굴하다 심심찮게 매몰사고 나서 죽었을 법한데 아직 그런 흔적 찾았다는 보고는 없다. 도굴이 가능했던 이유는 보물을 묻었기 때문이다. 기록을 보면 흉노를 뭉갠 오환이 흉노무덤을 다 팠다는데 이들이 도굴 주범 중 한 명이다. 물론 이후에도 간단없는 도굴이 있었다. 이 도굴이 두려워 칭기스칸은 유언으로 아예 봉분 흔적조차 없애버리고 말발굽으로 짓밟아 버리게 한다. 위 무제 조조 역시 이런 방식을 썼다가 근자에 그 무덤이.. 2023. 5. 1.
비수가悲愁歌-국제관계가 빚은 여인의 한恨 한漢 왕조는 유방에 의한 왕조 개창과 더불어 항우와의 쟁투를 통해 천하를 제패했다 했지만, 실은 빈쭉정이에 지나지 아니해, 다름 아닌 북방의 강가 흉노에 시종해서 시달렸으니, 유방에 의한 이른바 통일전쟁 과정에서 지금의 산서성 대동에서 겪은 이른바 백등산 참패는 두고두고 수모를 안겼다. 막대한 뇌물을 써서 겨우 목숨을 건진 유방은 굴욕적인 외교관계에 서명하니, 이후 내내 한 왕조는 흉노에 시종 굴종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다름 아닌 막대한 조공을 바쳐야 했다. 절치부심하던 漢은 마침내 무제武帝시대가 개막하면서 대 흉노 정책 공세로 전환하게 되거니와, 내실을 다진 결과이기도 하고, 마침 당시가 군수업자 전성시대라 무기상들이 권력을 쥐락펴락하던 시기라, 이들에게 전쟁은 부의 더 많은 축적과 권력 유지를 위해 .. 2019. 9. 14.
[동한東漢] 채염蔡琰 <비분시悲憤詩> 먼저 이 시가 과연 채염 작인가 아닌가는 논란이 적지 않거니와, 나는 그의 신세에 가탁한 후대 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다만, 그 후대가 실제 채염 생존시와는 멀지는 않음은 확실하거니와, 무엇보다 이 시가 《후한서後漢書》에 전문이 수록된 까닭이다. 채염은 字가 문희文姬라, 한나라 말기를 대표하는 저명한 문사文士 채옹蔡邕이 아버지다. 16살에 위중도衛仲道라는 남자와 결혼했지만 남편이 죽자 자식없이 본가로 복귀했다. 당시는 당말 절도사 시대를 방불하는 내란의 시대이기도 하면서, 흉노를 비롯한 외적과 국제전이 한창인 시대라, 이런 혼란한 시대 한복판에 말려들어 기구한 삶을 전전한다. 흥평興平 연간에 침노한 흉노군에 포로로 잡혀가 12년간 그곳에 가서 살면서, 두 아들을 낳았다. 조조가 채옹을 존경했음인지, .. 2018. 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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