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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 琦玉县 鹤岛市 “脚折(Suneori) 祈雨祭”..이는 대나무와 풀로 용을 만들어 사용한다> 


요샌 용이라면 날개도 있고 아가리에선 핵분열하듯 불을 뿜는 이미지를 생각하겠지만, 이는 서양놈 드래곤dragon이라 동양, 개중에서도 동북아시아 전통시대 용은 물과 비구름을 관장하는 선신善神이요 영물靈物이다. 그리하여 가뭄이 들어 비를 불러오고자 할 때는 용을 불렀으니, 기우제에서 그가 빠지지 않는 이유다. 한데 이런 기우제에서 용을 대접하는 방식이 조금은 독특해 추리자면 열라 패기였다.


토룡土龍이 있다. 흙으로 만든 용이라는 뜻이다. 상상의 동물인 용이 존재할 수도 없으니, 토룡을 만들어서는 주로 동네애들을 시켜 그 토룡을 동네 사방으로 질질 끌고다니게 하면서 용을 열라리 패게 했다. 그러면 하늘이 용을 불쌍히 여겨 비를 내린다 했다. 이런 기우제 의식은 이미 전한시대 초기 인물 저명한 춘추공양학자인 동중서의 저작 《춘추번로春秋繁露》에 보이며, 한반도에서도 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그 담이 실제 사람을 열라 패기도 했다. 이때 데거리를 당하는 사람이 무당이었다. 이들은 용이 그렇듯이 비를 불러오는 신력神力이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그리하여 용에 대해 그러했듯이 뙤약볕에다가 무당을 툭진 솜옷 같은 것을 잔뜩 입힌 채 장대 같은 데다가 묶어놓는 더위 고문을 했더랬다. 그러면 하늘이 그를 불쌍히 여겨 비를 내려준다 했다. 이를 무당 뙤약볕 노출하기라 해서 폭무暴巫라 했다. 이를 요새는 曝巫로 쓰기도 하나, 曝이라는 글자는 뙤약볕에 말리는 행위를 더욱 강조하고자 해서 그것을 본래 의미하는 暴이라는 글자에다가 태양을 뜻하는 날 일(日)자를 부수로 덧붙여 만들어낸 글자다. 이런 폭무 의식 역시 같은 《춘추번로》에 자세히 보인다.


김유신이 몸뚱아리 함부로 놀려 중매쟁이를 거치지 않고 부모님 허락을 득하지도 않은 채 처녀로 애를 뱄다 해서 둘째 여동생 문희를 장작불 구이를 하려한 것이 바로 폭무의 일종이라고 나는 본다.


폭무와 토룡과 관련한 다양한 기우제 의식은 지금은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로 가 있는 최종성의 박사학위 논문을 토대로 한 일지사 단행본이 있으니, 그 책 제목을 까먹었으니, 혹 관심있는 이는 참조하기 바란다. 


짧은 장마가 지나고 그 기간 요상한 이름 태풍 하나가 스치듯 한반도 통과하더니, 한반도는 온통 찜통 더위로 몸살이다. 토룡이라도 만들어 열라 패거나, 무당 붙잡아다가 장대라도 묶어놔야 할 판이다. 


 



후직(后稷)을 시조로 삼은 주(周) 왕조 창업을 노래한 《시詩·대아大雅》 〈생민生民〉과 〈비궁閟宮〉은 주인공이 주 왕조를 개창한 시조 후직이 아니라 그 엄마 강원姜嫄이다. 이 점을 후대 모든 사가(史家)는 혼동했다. 후직을 노래한 것으로 착각, 혹은 무게 중심을 후직으로 보았으니, 이는 패착이다.


내가 늘 지적하듯이, 위대한 시조의 탄생담(이를 우리는 흔히 건국시조, 혹은 시조신화라 한다)에는 늘 같은 구도가 있어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없애 버린다. 생물학적인 아버지를 죽여 버리고 그 자리에 하늘[天]을 늘 갖다 놓는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왕조를 창업한 시조는 천자(天子), 곧 하늘의 아들[天之子]라는 도식이 만들어진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다름 아닌 예수다. 예수한테도 생물학적인 아버지가 없어, 그 자리에다가 야훼를 갖다 놓는다. 그 야훼가 곧바로 동정녀 마리아와 감응해서 아들을 낳으니, 그가 예수라는 구도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오늘의 주인공 중 한 명인 주 왕조 건국시조는 후직后稷이다. 그가 창업하는 과정을 앞서 말한 《시경詩經》 〈生民〉은 이렇게 노래한다.


厥初生民, 時維姜嫄. 生民如何? 克禋克祀, 以弗無子. 履帝武敏, 歆, 攸介攸止. 載震載夙, 載生載育, 時維后稷.


이는 종묘제사 따위에서 부르는 용비어천가 같은 노래다. 이 자리에서 그 운율까지 살려 내가 번역할 재간이나 시간 여유가 없으니 대략 의미만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주 왕조 초창기에 우리 주나라 사람을 낳은 이 강원이시라. 우리 주나라 사람을 어떻게 해서 낳았던고? (강원께서) 야외로 나아가 불을 피워 하늘에 제사하시면서 아들을 낳아주길 기도했노라. 그때 강원께서 하느님 엄지발가락 자국을 우연히 밟으시고는 오르가즘에 이르셨다. 그 오르가즘에 취하시어 잠시 머무시면서 몸을 부르러 떨다가 이내 임신을 하시고 아들을 낳아 기르니, 이 분이 바로 우리 시조 후직이시라. 


하느님[帝]이 이 땅위을 걸으시며 남기신 발자국[武] 가운데서도 유독 강원은 그 엄지발가락[敏] 자국에 발을 디뎠다가 오르가즘[歆]을 느끼고, 이 일로 임신을 하게 된다. 내가 보건대 엄지발가락은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다. 그것을 밟고는 "歆(흠)"했다 하거니와 이 말은 오르가즘에 몸을 떨었다는 뜻이다. 


보라, 天子라는 신화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우리는 이에서도 목도한다. 


결국 이렇게 해서 강원은 건국 시조 후직을 낳았으니 그 어머니 강원은 얼마나 추숭을 받아야 하는가? 그리하여 주 왕조에는 시조 후직을 제사하는 시조묘, 그리고 후직 이래 역대 제왕을 제사하는 종묘 외에도 그 뿌리인 건국시조의 어머니 강원을 제사하는 별도의 국가 제사시설을 건립하게 되니 이것이 바로 비궁閟宮이다. 


비궁은 동아시아 고대문화의 근간을 관통하는 거대한 비밀 중의 하나다. 고구려에도 주몽 어미 유화(柳花)를 제사하는 사당이 별도로 있었고, 백제에도 온조 어미인 소서노(召西奴) 를 제사하는 따로 있었으며, 신라에도 박혁거세 엄마를 제사하는 사당이 별도로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신궁神宮이다. 신궁의 주신이 박혁거세니 김알지니, 혹은 김씨로서는 처음 왕이 된 미추니 하는 말은 다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신라 신궁 주신은 바로 박혁거세 엄마다. 비궁閟宮을 후한시대 경학가 정현은 풀이하기를 바로 신궁(神宮)이라 했다.


고대 일본 천황가 뿌리를 이루는 이는 아마테라스노 오호미카미다.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이 천조대신은 성별로는 여성이다. 다시 말해 천황가를 있게 한 거대한 뿌리는 남자가 아니라 여성이다. 그를 제사하는 곳이 바로 이세신궁(伊勢神宮)이다. 이세신궁은 종묘와 같은 곳이라, 그 내궁 주신이 바로 아마테라스다. 고대 일본 역시 건국시조 어머니를 제사하는 공간을 신궁이라 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강원은 상제의 엄지발가락을 밟고는 임신을 했던가? 그것이 다섯 발가락 중에서도 유독 남자 성기와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 말은 강원이 상제와 교접을 하는 상태에서 온몸을 부르르 떨며 오르가즘에 이르러 마침내 사내 아이를 임신케 되었다는 뜻이다. 


섹스? 오르가즘?

이런 말 한다 해서 눈쌀을 찌푸려서는 안 된다. 역사는 맨눈으로 포르노를 보듯이 정면으로 대해야지, 뒷방에서 키득키득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앞선 생민 편 구절 중에서도 유독 '리제무민(履帝武敏)'에 대해서는 역대로 논란이 많다. 이에서 履가 신을 신고, 혹은 맨발로 무엇인가를 밟는다는 뜻의 동사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거니와, 문제는 목적어인 '帝武敏'을 어케 보느냐다. 이때 '帝武敏'은 "帝의 武敏"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다. 한데 이 두 가지 모두가 문제다. '帝'를 후직을 중심으로 하는 주 왕조 건국신화 혹은 그의 선조를 중시해서, 후직을 상고시대 전설적 제왕 중 한 명인 '제곡(帝嚳) 고신씨(高辛氏)'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지만, 선진시대, 특히 은상(殷商)과 주(周) 왕조 시대에 저 글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저 하늘을 주관하는 최고신인 상제(上帝)를 지칭한다. 따라서  "帝의 武敏"은 '상제의 무민(武敏)'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무민(武敏)은 과연 무엇인가? 이 역시 역대로 논란이 많지만, 나는 후한시대 저명한 경전 해석가 정현(鄭玄) 설을 따른다. 정현에 의하면, "武,  跡也。敏,拇也"라 했으니, 武란 곧 자국 혹은 자취라는 뜻이니 이 경우는 발자국을 말하며, 敏은 엄지발가락[拇]이다. 근자에는 '履帝武敏'의 의미 탐구만을 천착한 전문 논문이 중국 본토에서 더러 제출되기도 한 것으로 알고, 이에 의하면 정현 설은 그가 살던 후한시대 특유의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에 기초한 견강부회라는 주장이 많지만, 나는 그것이 정현의 견강부회건 아니건 관계없이, 저 구절을 적어도 후한시대에는 엄지발가락으로 인식했다는 사실 자체를 중시한다. 


다시 말해 아무리 늦어도 후한시대 이전에는 강원이라는 여인이 상제의 발자국 중 엄지발가락 자취를 밟고서 임신을 했다고 본 인식 체계 혹은 사고방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하필 왜 엄지발가락이었을까? 


그것이 곧 남자 성기에 대한 은유임을 알 때, 우리는 비로소 무릎을 치게 된다. 강원이 모종의 신이한 남자와 교접해서 낳은 아이가 바로 후직임을 상징하는 은유였던 것이다. 생민 편에서는 帝, 곧 상제라 표현한 상대 남자가 저 장면을 기술한 선진시대 혹은 진한시대 각종 문헌에서는 대인(大人)이라 하거니와, 대인이건 상제건 관계없이 후직은 위대한 남자의 혈통을 이은 위대한 천자라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송산리 6호분 등잔구멍>


1971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기적적으로 무령왕릉이 발견되고, 그 현실(玄室) 내부에서는 네 벽면에 모두 5군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발견됐다. 그 무령왕릉 바로 코앞에 식민지시대에 도굴 상태로 발견된 송산리 6호분이라는 무덤이 있다. 이 무덤 역시 무령왕릉과 일란성 쌍둥이를 방불해 벽돌로 무덤 주체시설을 쌓은 소위 전축분(磚築墳)이라는 점에서도 그렇고, 그 구조 역시 그랬다. 하지만 6호분은 내부가 몽땅 도굴당한 상태라 그에서 건진 정보는 얼마되지 않았다.


이 6호분에도 무령왕릉과 같은 등잔을 안치한 구녕이 현실 네 벽면에 있다. 숫자는 무령왕릉보다 2개가 많은 7개였다. 도굴 피해를 보지 않은 무령왕릉이 발견됨으로써, 6호분 그 구멍도 비로소 기능을 둘러싼 베일을 벗었다. 


한데 무령왕릉이 발견되기 전, 이 구녕을 무엇이라 했던가? 가장 그럴 듯한 설이 불감(佛龕)이라 해서 불상을 안치하는 시설로 봤다. 

하지만 이런 추정 혹은 주장은 무령왕릉이 미도굴 상태에서 발견됨으로써 개망신에 가까운 굴욕을 겪었다. 불감과는 전연 관계없는 등잔을 안치하기 위한 터널이었다. 


나아가 무령왕릉 등잔은 애초 그 발견 발굴 직후에는 비록 중국 수입제이기는 하나 이것이 한반도에서는 가장 오래된 백자 출토례라고 대서특필되었다. 언뜻 백자로 보이나, 최근 정밀조사 결과 이것이 백자가 아니라 청자로 드러났다. 


<무령왕릉 등잔구멍> 


송산리 6호분 현실 구멍을 불감으로 봤다 해서, 무령왕릉 등잔을 백자로 봤다 해서, 우리는 그런 주장을 하고, 그것을 따른 사람들을 유사역사학이라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유사역사학은 과연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인가? 나는 유사역사학을 누가 제대로 개념 규정이라도 해줬으면 싶다. 


무령왕릉 발굴 이전, 나아가 그것이 발견된 이후에도 한동안 그것과 송산리 6호분을 둘러싼 황당하기 짝이 없는 설이 횡행했다. 내가 이해하는 한, 소위 강단 역사학이 공격하는 유사 역사학의 가장 큰 특징은 황당무계함이며, 이를 발판으로 삼은 허황되기 짝이 없는 주장이다. 물론 그에 더해 강단역사학이 말하는 유사역사학은 정치성을 고도로 띤다는 말을 덧보태기도 하는 것으로 안다. 


하지만 송산리 고분군으로 볼 적에 첫째, 황당하기 짝이 없고 둘째, 정치성이라는 측면에서도 유사역사학의 그것에 못지 않아, 무령왕릉 묘권(墓券)에서 그의 죽음을 중국 천자에게나 쓴다는 '붕(崩)'으로 적었다 해서, 백제의 주체성, 나아가 한민족의 주체성을 말해준다 해서 그 의미를 허위 혹은 과대 포장한 이가 다름 아닌 강단역사학이라는 점에서 나는 도통 작금 통용하는 유사역사학과 강단역사학을 어찌 구분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무령왕릉 현실..북쪽에서 입구 방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등을 보면, 삼국 각왕이 정확히 언제 태어났는지를 알려주는 대목을 발견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으니, 이는 생일(生日)의 탄생과 밀접한 데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지금은 누구나 기념하는 생일이 삼국시대 당시에는 의미가 없거나, 거의 없었으니, 개인 일생에서 중요한 것은 어느 해 어느 날에 태어났느냐가 아니라, 어느 해 어느 달 며칠에 죽었느냐가 더욱 중요했으니, 이는 바로 기일(忌日) 때문이었다. 생일을 기념하지 않았으되, 제삿날을 그냥 넘기지 않았다. 

무령왕릉 묘권(墓卷)을 봐도, 무령왕이 죽을 때 62세였다는 사실만 적기했을 뿐, 정확히 몇월 며칠 몇시에 태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반면, 죽은 시점은 정확히 기록했으니, 이 역시 기제사 때문이었다. 사정이 이러했으니, 중국사를 봐도 위진남북조시대 이전까지 황제 나이를 알 수 있는 경우가 의외로 드물어, 한 고조 유방만 해도 언제 태어나 죽을 때 몇 살이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신라사를 볼 적에도 각 왕들의 정확한 생몰년이 없어 애를 먹는 일이 많으니, 그런 점에서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은 좀 묘하다. 익히 알려졌듯이 그의 생년을 추정하는 데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른 증언을 하거니와, 즉위할 때 나이에 대해 전자는 7살이라 하고, 후자는 15살이라 한다. 이걸 왜 밝혔느냐 하면, 7살이건 15살이건 너무 어려서 직접 통치는 하지 못하고, 이런 경우 대개 거의 어머니가 살아있다면, 그 어머니가 아들이 성년이 될 때까지 수렴청정을 하는 까닭이다. 법흥왕 외손자요 조카인 진흥은 외할아버지가 죽었을 적에 엎혀서 왕이 되었으니, 그 힘은 법흥왕 딸로서 삼촌한테 시집간 그의 어머니 지소부인에 있었다. 지소는 눈물 나는 권력투쟁에서 마침내 이겨 자기 아들을 왕위에 앉힌 것이다. 

저 두 가지 상이한 나이 중에서 《삼국사기》가 매우 우세한 지위를 점하며, 나 역시 즉위할 때 나이가 7살이라고 본다. 그 근거는 또 많은 지적이 있듯이, 나 역시 같은 이유를 달거니와, 그것은 다름 아닌 진흥왕본기 12년(551) 봄 정월에다가 저록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었다"는 흔적 때문이다. 

왜 하필 이해에 신라는 연호를 바꾸었는가? 말할 것도 없이 이해에 진흥왕이 친정(親政) 체제에 비로소 돌입했기 때문이다. 7살에 즉위했다는 《삼국사기》를 따를 때 이해에 진흥왕은 18살이 된 것이며, 이것이 당시 동아시아 사회에서 제왕이 성년이 되는 보편 나이다. 반면 15살을 따른다면, 이해에 진흥왕은 벌써 25살이나 된 시점이다. 

나아가 우리는 진흥이 연호를 바꾸고 친정을 개시한 시점이 그가 18살이 되는 해 정월이라는 점을 주시하지 아니할 수 없다. 이 대목을 선학들은 전연 주목하지 않았으니, 이를 통해서도 앞서 내가 말하는 생일이 이때까지만 해도 의미가 없거나, 거의 없었다는 내 추정은 다시금 정당성을 확보한다. 물론 진흥왕이 태어난 달이 정월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무래도 그가 18살이 되는 '해'를 기점으로 친정 개시 연도를 따랐다고 보는 편이 순리일 것이다. 

그의 손자 진평왕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혹은 기타 여느 문헌에도 즉위 당시 나이가 없다. 각종 인명사전에서 생몰년 중 몰년만 있고 생년은 항용 퀘스쳔 마크(?)를 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진흥왕한테서 그의 나이를 밝혀낸 바로 그 수법으로 진평왕 역시 나이를 추정할 근거가 있다. 

그것을 본격적으로 파기 전에 하나 확인할 사안이 있다. 진평왕은 어린 나이, 아마도 성년에 도달하기 전에 즉위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에 대해서는 번다하므로 자세한 논의는 略한다. 암튼 진평 역시 그의 할아버지 진흥이 그랬듯이 어린나이에 즉위하는 바람에 즉위 초반 한동안은 그의 어미 만호부인(萬呼夫人)이 섭정했다. 그런 점에서 《삼국사기》 다음 진평왕본기 대목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6년(584) 봄 2월, 연호를 건복(建福)으로 바꾸었다.(六年 春二月 改元建福)" 

이를 진흥왕본기에 대입하면, 이때 진평왕 역시 18살에 도달해 친정을 개시하고, 그 상징 조치의 하나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의미에서 연호를 할아버지 진흥왕 때 이래 죽 쓰기 시작한 홍제(鴻濟)를 버리고 건복이라로 바꾼 것으로 볼 수 있는 까닭이다. 나아가 연호를 개정한 시점이 하필 2월이다. 물론 이 경우 정월에 개정한 진흥왕과 대비할 적에 한 달 차이는 있지만, 이는 두 가지 가능성도 합치를 꾀할 수 있다. 

첫째, 이 기간에 책력이 변동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새로운 책력이 2월을 새해 첫 달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둘째, 신라사를 보면 정월과 2월이 새해 첫 시작을 왔다리갔다리 하는 모습을 완연히 보인다는 점이다. 그 대표 사례가 새로운 왕이 즉위한 다음 그 이듬해 예외없이 신궁(神宮)을 참배하는 모습을 보이거니와, 2월인 경우가 많다. 이로써 본다면, 정월이건 2월이건 큰 차이는 없다. 정월이건 2월이건, 그달이 신라인들에게는 새해 시작으로 간주된 것이다. 아무튼 진흥왕에 대비되어 살핀다면, 생년을 알지 못하는 진평왕은 즉위할 때 13세였다가 18세가 된 즉위 6년째에 친정을 개시한 셈이다. 

한데 놀랍게도 《화랑세기》에는 이 점이 명확히 보인다. 22세 양도공(良圖公) 전에는 "진평제가 즉위할 때 나이가 13살이었는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넘치니 (할머니) 사도태후가 보명(寶明)과 미실(美室) (두 후궁한테) 제를 이끌도록[導] 했다."

이에서 보이는 '導했다'는 말은 섹스 양육을 말한다. 양기(陽氣)를 길러주도록 섹스 보모 노릇을 했다는 뜻이거니와, 어린 진평을 수청들면서 그에게 여자 맛을 알도록 가르쳤다는 뜻이다. 왜 어린 왕을 이리 양육해야 하는가? 후손을 낳아야 하기 때문이다. 왕이 빨리 성에 눈이 뜨야, 왕자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진평은 딸만 두고 적통 왕자를 두지 못했으니 아이러니라 하겠다. 

(이상 이 이야기는 졸저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김영사, 2002 중 제15장 '진평왕과 연호 건복'(356~368쪽)에 이미 상세히 다룬 것으로, 그것을 토대로 하되 몇 가지 새로운 항목을 보강해 다시 쓴 것이다.) 



번역이 어떠한 새로운 문화현상을 창조하는지를 나는 언제나 龍을 예시로 들어 설명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작금 한국 사회에서 통용하는 龍에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관념이 중첩했음을 지적하곤 했으니, 

 

1. 동아시아 古來의 龍 - 風雨를 불러오는 일종의 神格

2. 인도문화권의 naga - 天神의 일종. 불교에서는 불법수호신

3. 서양의 dragon - 火魔. 영화 'Dragon heart' 혹은 Beowulf 참조


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편의상 龍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한 다른 문화권 개념이 침투했는지도 모르나, 그에 대해서는 내가 아는 바가 없으므로, 나아가 우리가 논하는 龍으로 가장 중대한 세 가지 층위가 저들로 보니, 저들을 중심으로 기간 생각하고 이곳저곳에다가 쓴 글들을 다시금 정리하고자 한다. 


작금 한국사회 전반에 각인한 龍이 어떤 개념 혹은 이미지로 다가오는지는 하다 못해 그와 관련한 앙케이트 조사 결과라도 있어야겠지만, 나한테 그런 객관성을 담보하는 자료로 주어진 게 없으니, 현재로서는 인상비평 수준에서 접근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인정해 주기 바란다. 


龍이라고 하면, 아마도 세대별 인식 차이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거니와, 어디까지 나이와 세대를 국한해야 하는지 자신은 없지만, 노년층을 제외한 중년층 이하 어린아이 세대에 이르기까지 龍이라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대라면 십중팔구는 아가리로 뿜어내는 드래곤을 떠올리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이는 한국이 속한 고래의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말하는 龍과는 전연 무관계하며, 실은 서구유럽 계통에 뿌리를 박는 Dragon이다. 불을 뿜는 드래곤은 각종 영화나, 번역물을 대표로 하는 출판인쇄물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해 이젠 이것이야말로 龍의 아이콘으로 化한 시대가 되었거니와, 저 앞에서 보듯이 동아시아 문화권에서 말하는 龍은 불[火]과는 전연 관계가 없어, 실은 그 상극에 위치하는 물[水]이다. 


2000년대 초반에 경복궁 근정전을 해체한 적이 있으니, 그 과정에서 水자를 가득히 적어 만든 龍 무늬 도안이 발견된 적이 있다. 이게 아마 실물이 현재도 국립고궁박물관에 전시 중이 아닌가 하는데, 이 도안을 새로운 건물에 안치한 이유는 화재를 피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이었다. 불을 막거나 끄는 것은 물이므로, 그런 염원을 담아 제작해 넣은 주술 상징이 바로 저 도안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불교 도입 이전 고래의 동아시아 龍 관념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다가 불교가 착륙하면서 龍 관념도 일대 변모를 겪기 시작한다. 우리가 잘 아는 龍王은 실은 불교가 대표하는 인도문화가 동아시아 고래의 문화와 착종한 새로운 고안품이다. 그 뿌리를 이루는 것이 이른바 나가Naga인데, 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래 바이두 사전 관련 항목으로 대체한다. 


那伽 (佛教天龙八部中的龙众。)


이에서 보듯이 인도문화권이 말하는 Naga는 뱀 종류지만, 그 항목 여러 개가 제시하는 각종 이미지가 증명하듯이 후대로 갈수록 그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龍과 대단히 흡사하게 된다. 이 말이 괜히 龍으로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은 Dragon인데, 이것이 끼친 영향 역시 심대하기만 하다. 내가 이 문제에 대한 관심이 폭증할 10여년 전에는 소위 말하는 개독 신도들한테, 성경에 드래곤이 등장하는가? 등장한다면 그 맥락은 어떠한가를 조사한 적이 있다. 그때 조사자료를 지금은 망실해 안타깝기만 한데, 혹 그에 대한 관련 자료 있으면 소개를 부탁한다. 


내가 기억하는 바는 성경 중에 드래곤이 두어 군데 등장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 맥락은 모두 惡의 화신과 같은 모습이었던 듯하다. 드래곤을 이리 간주하는 전통이 결국 베오울프와 영화 드래곤 하트를 낳은 밑천이다. 이들 양놈 문화권 드래곤은 하나같이 아가리에서 불을 뿜으면서 화재를 불러오고 농사를 망치며 난리를 피워댄다. 


한데 전연 전통이 다른 龍과 naga와 dragon이 하나로 착종함으로써 새로운 龍의 이미지가 등장하기 시작했으니, 그 거대한 원천은 바로 번역에 있다. 저들 중 코브라 같은 뱀을 실물 모델로 삼는 naga 말고 어차피 상상의 동물인 龍과 드래곤으 모조리 龍이라는 한 단어로 수렴하는 시대를 우리는 사는 것이다. 


추상은 언제나 구상으로의 해체 욕망에 시달린다. 이런 욕망이 불교가 애초 동아시아 문화권에 상륙했을 적에 격의불교라는 것을 낳았다. 도대체가 새로이 들어온 개념을 표현할 마뜩한 대응 번역어가 없는 상황에서 그것을 구상으로 해체하고자 하는 욕망이 격의불교를 만들어 냈으니, 그 일환으로 부처조차 仙이라는 간단한 한마디로 대체되어 설명되곤 했다. 요새도 부처를 금선(金仙)이라 번역하는 일이 더러 있으니, 금선이란 황금빛이 나는 신선이라는 뜻이다. 


이런 욕망에 직면한 naga와 dragon 역시 그 대응 번역어를 찾는 과정에서 龍이라는 말이 착목되었던 것이다. 복잡다단한 새로운 개념을 이렇게 기존에 사용하던 龍이라는 한마디로 갖다 놓으니 얼마나 편리한가? 마침 그 모양을 보니 기존 龍과 흡사하니 말이다. 


한데 번역은 새로운 개념과 그에 맞는 실체를 창조하는 법이다. 

저들이 한데 버무려져 새로운 龍이 탄생 중이다.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 龍은 심청이를 구한 naga이기도 하면서, 하늘을 날아다니며 불을 뿜는 드래곤이기도 하다. 


naga를 龍으로 옮기기 시작한 흔적은 불경 번역을 볼 적에 추적과 정리가 가능한데, 드래곤을 龍으로 옮기기 시작한 흔적과 뿌리는 영 추적이 용이치 않다. 천주실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땐 이 문제를 착목하지 못했다. 혹 내가 품은 이런 의문들을 푸는 초기 번역 실례를 알고 계신 분은 소개를 부탁드린다.  

 

저 표제 그림은 바이두가 naga로 소개했는데 어쩐지 dragon 같다.....


===========<추기>================

Question: 'What does the Bible say about dragons"  


Answer: The Bible mentions a dragon in Revelation chapters 12, 13. 16, and 20. Revelation 20:2 identifies the dragon: "He seized the dragon, that ancient serpent, who is the devil, or Satan, and bound him for a thousand years." The Bible is not teaching that dragons ever truly existed. Rather, it is only comparing Satan to a fire-breathing monster. 


It is very interesting to note, however, that nearly every major ancient culture has myths and legends about giant reptiles, How would these civilizations, continents and millennia apart, all come up with legends of giant reptile creatures? Evolutionary scientists tell us that dinosaurs existed millions of years before human beings. Dinosaur fossils were not discovered until thousands of years after the myths of giant reptiles began. How can this be?


The Bible mentions two creatures that seem remarkably similar to the dinosaurs, the leviathan and behemoth, in Job chapters 40-41. It is the view of creation scientists that all the "dragon" myths came from real contact real contact between human beings and dinosaurs. The Bible tells us that all animals were created around 6000 year ago and coexist with uman beings. That would explain how all human cultures have myths about giant reptiles because they actually saw them! The "fire-breathing" aspect of a dragon is possibly a myth (although there have been some interesting discoveries), but the universal legends of giant reptiles point to real contact between human beings and dinosaurs. 




<이 원초의 생명력에서 이끼 사나이 이사부가 태어났다>


신라사에 상대등(上大等)이 등장하는 시점은 법흥왕 18년(531)이니, 이해 《삼국사기》 신라 법흥왕본기에 이르기를 이해 "여름 4월에 이찬 철부(哲夫)를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나라 일을 총괄케 했다. 상대등이라는 관직은 이때 처음 생겼으니, 지금의 재상(宰相)과 같다[夏四月 拜伊飡哲夫爲上大等 摠知國事 上大等官 始於此 如今之宰相]"라 한 대목이 그것이다. 


신라사에서 관직과 관위는 쉽사리 구분이 힘든 대목이 있어, 상대등 역시 마찬가지라, 이에서  《삼국사기》 찬자는 상대등을 '官'이라 하면서, 그 직능을 《삼국사기》 편찬 당시의 고려시대 '재상(宰相)'에 견주고 있음을 본다. 상대등 임명 직전 그 주인공 철부는 관위가 1등 이찬(伊飡)이었으니, 이로써 보면 철부는 1등에서 특등으로 진급한 셈이다. 


이런 일이 비단 신라사가 아니라 해도 다른 시대, 다른 왕조에서도 쉽사리 발견되니, 대체로 국가와 왕실에 공이 많은 원로한테, 기존 관직 관위 시스템으로는 그 공로를 포상하기 어렵다고 생각할 적에, 그 시스템을 존중하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변칙으로써 그 상위 자리를 증설하는 것이 통례거니와, 일통삼한 직후 그 일등 공신 김유신을 태대서발한으로 임명한 것이 대표라 할 만하다. 김유신은 더는 받을 것이 없었다. 할 수 없이 문무왕은 외삼촌을 위해 太 혹은 大라는 글자 하나를 덧보태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려 왕건 역시 신라 마지막 경순왕이 나라를 들어 귀부해오자, 그 대접이 곤혹스러움을 처했으니, 왕건에게 필요한 것은 경순왕이 아니라 그가 들고온 천년 왕국 신라였다. 이 천년 왕국을 접수함으로써 비로소 신왕조 고려의 정통성은 확고한 지위를 점하거니와, 갓난아기가 천년 역사를 접수한 일이 어찌 보통사리오? 왕건은 그 지위를 태자 위에다가 놓았다. 태자도 경순왕을 만나면 허리를 굽혀야 했다. 


철부 이래 상대등은  《삼국사기》에 더러 누락이 있기는 하나, 그 퇴임과 임명 사실이 원칙에서는 기록이 있다. 상대등이 그 위치상 신하 자리 중 1등 혹은 특등이라 해서, 이를 매우 중시하는 전통이 있거니와, 물론 시대 상황에 따라 상대등이 중대한 위치를 점하는 시기도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보아 이는 명예직이라는 특성이 아주 강해, 냉혹히 말하면 꿔다논 보릿자루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등은 대체로 국가 원로에 대한 대접에서 나온 발상이라, 교수로 치면 명예교수였으니, 명예교수 중에 권력의 끈을 놓지 못하는 이 더러 있기는 하나, 대체로 정년퇴직이 "더는 현장으로 돌아오지 말라"는 딱지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좋다고 나는 본다. 


초대 상대등 '哲夫'는 여로 모로 관심거리인데 첫째, 그가 당시 신라 조정에서 어떤 위치를 점했느냐 하는 점이 개중 하나이며, 둘째 그 이름이 어쩐지 요상하다는 의문이 그것이다. 첫째와 관련해서는 우리한테 주어진 정보가 워낙 적어 알 수가 없다. 후대 행적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다른 상대등을 비교할 적에, 이 무렵 철부는 신라조정에서 무시하지 못할 위상을 지녔을 것이라는 정도로 상상이 가능할 뿐이다. 이 철부는 《삼국사기》에도 이렇다 할 행적이 없다. 


<거친 사나이들....이 이미지에서 거칠부는 포말을 형성했다>


그렇다면 다음 의문점 철부는 대체 무슨 뜻인가로 옮겨가면, 다행히 우리는 그 편린을 건져내니, 그건 바로  《시경(詩經)》에서 온 말이라는 점을 해명한다. 철부란 무엇인가?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말할 수 있는가?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있다. 남자는, 특히 왕자王者라면 자고로 여자를 조심해야 한다는 경구로 흔히 등장하는 말이거니와, 흔이 이를 "나라를 기울게 하는 여자"로 옮기지만, 엄밀히 말해 이 경우 '國'은 나라가 아니라, 국도(國都), 혹은 도읍(都邑)을 말한다. 물론 후대에는 國이 나라 전체를 지칭하는 말로써 개념을 확대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등장하고 그것이 보편화하는 초기에는 수도 도읍을 말했다. 그런 까닭에 경국(傾國)은 여러 변종이 있거니와 개중 하나가 바로 경성(傾城)이었다. 이 경우 城은 말할 것도 없이 도성(都城)이다. 


한데 그 역사를 보면 경성(傾城)이 원조다. 《시경詩經·대아大雅·첨앙瞻卬》 편이 수록한 시가 중 한 구절에 이런 말이 보인다. 


"哲夫成城,哲婦傾城。"


哲夫는 城을 이루고, 哲婦는 城을 기울게 한다는 말이다. 요새는 철학이라는 새로운 말로 익숙한 이 '哲'자는 심오한 뜻이 여러 가지 있지만, 간단히 '똑똑하다' 혹은 '뛰어나다'는 형용사로 보면 대과가 없다. 그러니 저 구절은 "똑똑한 사내는 국가를 흥성케 하는 반면, 똑똑한 여자는 나라를 기울게(곧 망하게) 한다"는 뜻이다. 같은 '哲'이라는 글자인데 그 맥락이 달라, 바로 그 유명한 남존여비 사상, 암닭이 울면 나라가 망한다는 언설의 거대한 출처가 바로  《시경》의 저 구절이다. 


본론으로 돌아가 신라 초대 상대등 '철부'는 바로 이 구절에서 따온 작명이다. 다시 말해  《시경》에서 습득한 이름이 철부다. 


내가 늘 말하듯이 순수 신라식 이름이건, 순한문식 이름이건 신라사에서 작명법을 보면 그 이름 자체가 뜻 뭉치라는 점이다. 그 자체 뜻이 없는 이름이 없다. 다만, 시간이 흘러 개중 상당수 이름 의미를 우리가 잃어버렸을 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몇몇 사례를 통해 그 원초의 의미를 추적하거니와, 이 철부보다 한 세대 혹은 반세기 뒤지는 인물로써 이사부와 거칠부가 있거니와, 그에 대한 한문 표기가 태종(苔宗), 황종(荒宗)이라는 사실에서 저 이름이 이끼 사나이, 거친 사나이임을 추찰한다. 심산유곡 바위에서 자라나는 이끼를 본 적 있는가? 그 이끼의 강인성에 착목한 이름이 태종 혹은 이사부였던 것이다. 


철부가 상대등으로 활약한 시점의 신라 왕자 법흥은 본명이 원종(原宗)이거니와, 이 원종을 각종 기록에서 '모진(募秦)' 등으로 표기하는가 하면, 그의 당대에 건립한 울진 봉평 신라비를 보면 아마 모즉지(牟卽智)로 등장한다 기억하거니와, 이 경우 '原'은 근원, 밑바탕이라고 할 때의 '밑'에 해당하는 표기임을 추찰한다. 


모즉지 동생이 바로 그 유명한 진흥왕 아비 입종(立宗)이거니와, 이런 그를 신라 당대 금석문에서는 '사부지徙夫知' 등으로 표기하거니와, 모르겠다, 입종은 툭하면 발기를 잘 해서 입종이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서 있는 사나이라는 의미를 담은 표기였던 것이다. 


이로써 볼 적에 철부(哲夫) 역시 분명 그에 해당하는 신라식 이름이 있었음은 틀림없다. 다만, 그 본래의 신라 이름을 역사는 잃어버리고 그에 대한 순한문 뜻 표기인 철부만이 남은 것이다. 혹 모르겠다. 그에 대한 신라 이름이 '똑띠 사내'였는지는....


신라사를 볼 적에 철부 원종 입종 황종 태종처럼 순한문식 뜻 뭉치 이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점은 법흥왕~진흥왕 시대 무렵이다. 진흥왕 시대 금석문을 보면 중앙 관료 중에 순한문식 이름이 더러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한데 놀라운 점은 점점 확산하는 한문식 이름이 지배권력 상층부보다 중하위직에서 먼저 시작한 흔적을 보인다는 사실이다. 그 명단을 보면 '舜' 같은 글자를 응용한 이름이 보이거니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요순 임금의 순 임금에서 나온 발상이다. 


중국 고전 열풍이 신라 사회에서 언제 일었는가? 혹자는 저런 현상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을 착목해 법흥왕~진흥왕시대를 지목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다. 저런 발상이 나타나는 시점은 이미 그 열풍이 반석에 오른 시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늘 얘기하듯이 봉평비 냉수리비에 보이는 한문은 이미 신라 사회가 한문을 자기네 문자로 체득한 상태에서 나온 고도의 문자 체계이며, 나아가 그 후대에 등장하는 이두는 문자 생활 초창기 흔적이 아니라 그것이 다시 몇 단계 진화를 거듭한 상태의 결과다. 


마찬가지로 법흥왕~진흥왕 시대 서서히 보이는 순한문식 이름은 그것을 가능케 한 중국 고전 학습 열풍이 이미 반석에 오른 시점이다. 아무리 늦잡아도 신라에는 실성~눌지왕 무렵에는 중국 고전을 학습하는 학교를 국가에서 운영했다. 이미 냉수리비 봉평비를 보면 유가 도가 고전만이 아니라 상군서와 한비자가 대표하는 병가 고전이 학습되었으며, 더구나 이들을 뒷받침하는 거대한 국가 통치 철학의 뿌리가 《주례(周禮)》임이 확연히 드러난다. 


언뜻 허심하게 보이는 철부(哲夫) 이름 하나로 오늘도 신라사 단편 소설 하나를 抄한다. 

  1. 연건동거사 2018.06.13 09:59 신고

    잘 읽었습니다.

하도 여러 번, 그것도 시도때도없이 이곳저곳에서 강조한 글이라, 다시금 이곳에서도 정리한다.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고, 후첩들을 지칭하는 봉작이 과연 생전에 얻은 것인지, 혹은 죽은 뒤에 얻은 것인지, 나아가 생전이라 해도, 왕건 생존시인지, 아니면 왕건 사후인지도 구별치 아니하니 각종 억설이 난무한다. 


《고려사》 후비열전을 보면, 고려 건국주인 왕건의 여인들로 다음 29명이 적기되고, 그들의 생애가 간단히 정리된다.


1.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2.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3.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

4.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5.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

6.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

7.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8.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9.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

10. 숙목부인(肅穆夫人)

11.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

12.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

13.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

14.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王氏)

15.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왕씨(王氏)

16.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

17.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

18.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王氏)

19.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김씨(金氏)

20.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金氏)

21.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22.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康氏)

23.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24.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25.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26.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

27.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朴氏)

28. 몽양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朴氏)

29.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이들 중에서 작호(爵號) 혹은 봉작(封爵)으로 보면 왕건에게 왕비라고 칭할 만한 여인으로는 6번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까지이며, 그 아래 7번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는 볼짝없이 대부인이라는 봉작으로 보아, 그 딸이 후대 누군가의 왕비가 되어 얻었음을 추찰한다. 8번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이하는 봉작이 부인이니, 앞보다 더욱 격이 떨어지는 첩들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를 보고 왕건은 적어도 6명에 달하는 정식 왕비를 거느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박종기를 비롯한 고려사 전공자들 글을 읽어보면 조선시대와 비교해 고려는 일부다처제라고 하거나, 혹은 그런 전통이 매우 강한 것처럼 기술하지만, 이는 오판이다.


왕후 혹은 왕태후라 일컬은 저 여인 6명 중에서 정비는 오직 넘버원 신혜왕후 유씨가 있을 뿐이다.


후비열전을 보면 신혜왕후는 왕건의 첫번째 부인으로서, 죽은 후 신혜왕후라는 시호를 받고는 태조가 묻힌 현릉(顯陵)에 합장했다고 하거니와, 남편과 합장하는 자격은 오직 1명에게 주어질 뿐이거니와, 이는 그가 바로 정비임을 여실히 웅변한다.


그는 왕건보다 일찍 죽었다. 나아가 후사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시호가 왕후였다.


6명 중 왕후라 일컬은 여인이 넘버2 장화왕후 오씨와 정덕왕후 유씨가 있거니와, 이들 역시 왕후라는 봉작은 죽은 뒤에 받은 이름인 시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죽을 때는 왕비가 아니었는데 그 아들이 용케도 왕이 되어 왕후라 일컬어진 것이다.


그의 아들들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그들의 작호는 왕태후가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머지 세 여인, 다시 말해 3번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와 4번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그리고 5번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가 왜 왕태후인지를 여실히 안다. 그들의 후사가 왕이 되고, 그때도 살아있었던 까닭에 왕태후라는 존호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죽은 다음, 혹은 그 후사가 왕이 됨으로써 얻은 작호 혹은 존호들이지, 결코 왕건 생전에 왕비로 일컬을 수는 없었다.


왕건 시대를 무대로 하는 각종 사극에 왕건의 여인들이 모조리 같은 급의 왕비로서 취급하고, 그리 소개되는 것은 역사 조작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박종기를 필두로 하는 기존 고려사학계의 잘못된 연구성과에 비롯한다.


말한다. 

고려는 결코 일부다처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일부다처제의 근거로 설명하는 왕건시대의 여인들도 하나하나 모조리 검토하면, 오직 왕비는 동시기에 단 한 명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비슷한 양상을 연출하는 현종시대 역시 마찬가지라, 현종 역시 그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정비를 동시에 두 명을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이 법이고 관습이다.

내가 논문이랍시며 이곳저곳에 한창 싸지르던 시절,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의 책성(柵城) 순수(巡狩)와 봉선(封禪)〉이란 제목의 글 한 편을 탈조한 일이 있으니, 한민족학회라는 곳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한민족연구》 제3집(2007년 6월 발간)에 수록됐다.(동 기관지 45~69쪽에 실렸다.)


이 글은 나로서는 적지 않은 공을 들인 것이었으나, 이것이 어찌하여 저 잡지에 기고되기에 이르렀는지는 자세한 내막을 지금은 기억할 수는 없지만, 당시 학회장 정영훈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저 학술지나 학회 모두 그 명칭에서 소위 말하는 '국뽕' 냄새가 짙기 마련이거니와, 실제 그것이 표방하는 정신도 그랬다고 기억한다. 


저 무렵 정 교수가 저 학회가 주최하는 어떤 자리에서 논문 발표를 하나 부탁했거니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 내가 거절치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저 논문 토대가 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그것을 저 논문집에 실어야 한다기에 투고한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저 학술단체와 저 학회지가 워낙 존재감 미미한 까닭인지, 나 역시도 저 논문을 쉽사리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소위 말하는 등재지에다가 글을 실어 점수를 따야 하는 처지가 아니기에,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내 논문을 봐야 내가 말하고자 한 논지가 다시금 정리가 되겠지만, 해당 잡지는 발간 직후 내가 정 교수한테서 받은 간행본 2부 정도가 있어 그것이 서재 어딘가에서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겠거니와, 지금 그것을 참조하지 못하는 내가 이 자리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태조왕본기 46년(AD 98)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봄 3월, 임금이 동쪽 책성(柵城)에 가는 도중 책성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2년이 지난 동왕 50년(102)에는 이해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다(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는 대목이 있다. 


내가 저 글에서 천착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태조왕은 책성에는 왜 갔으며, 그 순수가 어떤 의미를 지느냐였으니, 결론은 이것이 동아시아 전통시대 군주가 더러 행하는 전국 순례 행사인 순수(巡狩)에서 한발 더 나아간 봉선(封禪)이라는 사실이었다. 봉선이란 무엇인가? 


역대 중국의 제왕이 태산과 그 인근 상대적으로 작은 산에 올라 각각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을 각각 제사하는 광세(曠世)의 제전(祭典)이다. 이는 광의로 보면 종묘사직 제사의 일종이지만, 그 어떤 국가 단위 제사도 그 위용과 권위, 그리고 그 비용에서 봉선을 뛰어넘을 자가 없었다. 그만큼 봉선은 돈이 많이 들었고, 그 조건 역시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봉선을 하고자 오가는 황제의 행차 자체가 순수였다. 나아가 중국을 견주건대 그 제장(祭場)인 태산은 언제나 서안이나 낙양에 견주어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동쪽으로 순수한다는 뜻에서 봉선을 거행하기 위한 황제의 행차를 동순(東巡)이라 했다. 


더불어 모든 봉선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절대의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하태평이었다. 황제가 이끄는 지상에서 황제가 지상의 천국을 건설했음을 하늘과 땅에 고하는 제사가 봉선이다. 하지만 말로만 천하태평일 수는 없으니, 하늘은 그에 대한 징표를 보여주어야 했으니, 이를 일러 서징(瑞徵)이라 한다. 


이 서징으로 태조왕의 책성 순수에 등장한 것이 바로 백록(白鹿)이다. 이 백록은 하필 태조왕이 계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잡은 것이니,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생각했다. 왜 백록을 잡고 나서 책성에 이르러 태조왕은 뭇 신하와 백성을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였겠는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계산이라는 산에 올라서 봉선을 지내고 난 다음 그 위로연이었던 것이다. 


모든 봉선은 기공각석(紀功刻石)이 따르기 마련이거니와, 이는 황제가 지상에 태평성대를 이룩했으며, 이에 천신과 지기에 감사한다는 뜻을 돌에 새겨 기록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왜 돌에 새기는가? 그것이 영원을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봉선은 워낙 규모가 큰 행사였기에 이를 한번 치루면 국가 재정이 휘청댔다. 특히나 그 제장이 되는 주변과 황제가 지나는 길에 위치한 군현들은 출혈이 극심했다. 그래서 언제나 봉선을 치르고 난 직후에는 해당 지역에 대해서는 면세조치를 내리기 마련이다. 태조왕 역시 이에서 한치 어긋남이 없어, 책성을 다녀온 다음 곧바로 해당 지역에 대한 면세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이런 점들로 볼 때 태조왕이 즉위 49년째에 행한 책성 방문은 봉선이었음이 명백하다는 결론을 나는 도출한 것이다. 허심하게 넘기기만 한 저 간단한 기록에다가 나는 봉선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고 싶었다. 남들이야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으나, 무척이나 힘들인 글이었다. 혹 내 컴퓨터와 외장하드를 뒤져 그 글을 발견한다면, 기회를 보아 공개하고자 한다. 


無君長,居無恆所,隨水草流移。人性兇忍,善騎射,貪婪尤甚,以寇抄為生。

군장이 없고 뚜렷한 거주지가 없으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나니고, 성질은 흉포 잔인하고, 말과 활을 잘 다루며, 탐욕은 아주 심해 약탈을 생업으로 삼았다.




후진(後晋) 사공(司空) 동(同)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유순(劉昫)이 봉칙찬(奉勅撰)한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 제195 회흘(廻紇) 전에서 회흘을 묘사하는 첫 구절이거니와, 표현은 약간씩 다르나, 실은 중국 역대 사서가 주로 지금의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북방을 주무대로 활동한 유목 민족을 다룰 때 동원하는 전형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비단 회흘만 아니라 《사기(史記)》 흉노 전(凶奴傳) 이래 무한 반복하는 같은 패턴이다. 


당(唐) 집권 이래 위징(魏徵) 등이 찬한 《수서(隋書)》 권제84 열전(列傳) 제49 북적(北狄)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진 철륵(鐵勒)이라는 종족을 묘사하기를 


雖姓氏各別,總謂為鐵勒。並無君長,分屬東、西兩突厥。居無恒所,隨水草流移。人性凶忍,善於騎射,貪婪尤甚,以寇抄為生。


비록 (철륵 종족별로) 성씨가 각기 다르나 그들을 합쳐서 철륵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군장이 없으며 각기 동돌궐과 서돌궐에 속해 있다. 거주에 일정함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며 인성이 흉포 잔인하고 말과 활을 잘 다루고 탐욕이 아주 심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다. 


특히나 "隨水草流移。人性凶忍,善於騎射,貪婪尤甚,以寇抄為生"이라는 말은 중국 역대 한족(漢族) 왕조에는 언제나 북방 유목민족을 경계하는 슬로건이 되었으니, 그리하여 이들에 대해서는 시종일관해서 무력에 의한 강제적 정벌 혹은 덕치(德治)를 무기로 하는 교화 대상이라는 인식을 강고하게 심어준다. 



이는 북방 유목민에 대한 인식이며, 그에 대비되어 한반도가 상징하는 동이(東夷)와 남쪽 베트남을 주무대로 삼는 남만(南蠻), 토번을 중심으로 삼는 서융(西戎)에 대해서는 각기 그 풍토에 맞는 고질과도 같은 중화관이 있다. 이런 인식이 현재의 국민국가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이라 해서 달라졌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국가 명칭에 벌써 중화(中華)가 들어가 있으니, 고래의 화이환(華夷觀)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렇고 저 문구 중에서도 류이(流移)라는 말이 요즘 들어 노마드(nomad)라 해서 한창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옷을 갈아입겠지만, 지금은 제도나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자유정신을 표상한다. 드라마틱한 변화라 할 만하다. 




“뇌물과 내 새끼는 하나” : 東漢의 제오륜(第五倫) [수정] [삭제] 2011.06.15 08:57:15


이른바 주자성리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되는 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편찬토록 한 동몽서(童蒙書)로 《소학(小學)》이 있으니, 《대학(大學)》에 대칭하는 이 《小學》이란 문헌은 실상 유자징이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을 모은 것이 아니라 先代 문헌 이곳저곳에서 동몽(童蒙)을 가르치는 데 적절하다 생각하는 구절들을 가려 뽑아 정리하고 나열하며 편집한 이른바 짜깁기 책이니 요즘 같으면 저작권법 위반으로 책이 회수되고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일이지만 옛날 동양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하고 비재했다. 


《小學》은 실상 그 내용을 볼작시면 내 보기엔 이렇다 할 거창한 철학을 담았다고 보기는 힘들며, 다른 무엇보다 朱熹 當代의 실정과는 전혀 맞지 않는 記述이 허다했으니, 그러함에도 그보다도 다시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그것도 조선 땅에다가 이를 절대도덕으로 세우고자 한 일군의 무리가 출현했거니와, 그 오야붕이 바로 조광조임은 익히 알 터이다.


《小學》은 전체 6편이니, 그 마지막 제6편은 편명(篇名)이 ‘선행(善行)’이라, 소제목처럼 이 篇에는 주로 역대 문헌에 보이는 善行과 관련된 역사상 인물의 일화라든가 言說을 모았다. 이 善行편은 다시 세분하니, 그 세부항목 중 하나가 바로 ‘실경신’(實敬身)이라. 


제목을 풀어보면 ‘敬身을 實한다’이니, 예서 實은 實證이란 뜻에 가까우니,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신(敬身)’이란 무엇이냐가 그 小篇이 주장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노골화하거니와, 이때의 敬身을 나는 愼獨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大過는 없다고 본다. 말 그대로 몸가짐을 공손히 한다는 뜻이니, 따라서 ‘실경신’(實敬身)은 역사상 몸가짐을 제대로 한 實例들의 집합이 되는 셈이다.


이 ‘실경신’이 인용한 역대 인물고사 중 하나로 《후한서(後漢書)》에서 뽑아다 온 제오륜(第五倫)이란 사람의 행적이 있으니, ‘제오륜’은 표기로만 보면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와는 하등 관계가 멀 듯 하지만 실은 사람 이름이다. 


姓이 第, 이름이 五倫이니, 벌써 이름 자체에서 그의 사상적 지향점이 어디인지가 금방 드러나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지향점은 孔子가 대표하는 儒家之學이라 할 것이니, 《後漢書》 班彪列傳 下에서 이르기를 “第五倫字伯魚京兆”, 즉 제오륜은 字를 백어(伯魚)라 하는데 京兆(서울) 사람이라 했다.


伯魚는 또 뭐냐 하면, 글자 그대로는 물고기 중에서도 맨 우두머리, 오야붕을 말하니, 이는 바로 鯉(리), 즉, 잉어를 일컫는다. 잉어란 천년을 묵으면 龍이 된다 해서, 예로부터 靈物로 취급되었음은 무수한 일화가 증명하거니와 그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略하되, 다만 伯魚가 공자의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자에게 백어(伯魚)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가 아비보다 먼저 죽었다는 건 이미 《논어(論語)》에 보이거니와, 나는 제오륜이 하고 많은 표기 중에서도 伯魚를 字로 선택한 까닭은 그가 바로 공자의 아들이고자 했음을 자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떻든 《후한서後漢書》 卷41에 수록된 그의 전기인 ‘第五倫 傳’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정리하면, 그는 동한(東漢) 때 경조(京兆) 장릉(長陵), 곧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으로 그의 선대는 전국시대 전씨(田氏)였으니, 그 선조 전씨가 서한(西漢) 원릉(園陵)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면서 성씨를 第로 바꾸었다. 


제오륜은 젊을 때는 지금의 기초자치단체 중급 공무원 정도에 해당하는 향색부(鄉嗇夫)로 있다가 지금의 서울시장 정도에 해당하는 경조윤(京兆尹) 염흥(閻興)이 불러 개인 비서격인 주부(主簿)로 삼으니, 이를 발판으로 나중에는 지금의 공무원 특채 정도에 해당하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회계(會稽)와 촉군(蜀郡)을 다스리는 지방관 오야붕인 태수(太守)를 역임한다. 그의 관직 생활은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小學》 제6편 ‘善行’ 중 ‘실경신’(實敬身)에서는 《後漢書》 第五倫 傳 가운데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제오륜(第五倫)에게 묻기를 “공께서도 사사로운 마음이 있습니까?” 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천리마를 주려 한 적이 있다. 나는 비록 받지는 않았지만 三公이 모여 인물을 선발하고 천거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났다. 그러나 끝내 등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조카가 지난번에 병들었을 때 하룻밤에 열 번을 찾아갔지만 돌아와서는 편안히 잠들었다.


하지만 내 자식이 병이 났을 때는 비록 한 번도 병세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행동들에 어떻게 사심이 없다고 하겠는가?”


或問第五倫曰, 公有私乎. 對曰, 昔人有與吾千里馬者, 吾雖不受, 每三公有所選擧, 心不能忘, 而亦終不用也. 吾兄子嘗病, 一夜十往, 退而安寢. 吾子有疾, 雖不省視, 而竟夕不眠. 若是者豈可謂無私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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