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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여러 번, 그것도 시도때도없이 이곳저곳에서 강조한 글이라, 다시금 이곳에서도 정리한다. 

일부일처제와 일부다처제가 무엇인지 헷갈리는 사람이 많고, 후첩들을 지칭하는 봉작이 과연 생전에 얻은 것인지, 혹은 죽은 뒤에 얻은 것인지, 나아가 생전이라 해도, 왕건 생존시인지, 아니면 왕건 사후인지도 구별치 아니하니 각종 억설이 난무한다. 


《고려사》 후비열전을 보면, 고려 건국주인 왕건의 여인들로 다음 29명이 적기되고, 그들의 생애가 간단히 정리된다.


1.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

2. 장화왕후(莊和王后) 오씨(吳氏)

3.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

4.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5.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

6.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

7.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

8.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9. 동양원부인(東陽院夫人) 유씨(庾氏)

10. 숙목부인(肅穆夫人)

11. 천안부원부인(天安府院夫人) 임씨(林氏)

12. 흥복원부인(興福院夫人) 홍씨(洪氏)

13. 후대량원부인(後大良院夫人) 이씨(李氏)

14. 대명주원부인(大溟州院夫人) 왕씨(王氏)

15. 광주원부인(廣州院夫人) 왕씨(王氏)

16. 소광주원부인(小廣州院夫人) 왕씨(王氏)

17. 동산원부인(東山院夫人) 박씨(朴氏)

18. 예화부인(禮和夫人) 왕씨(王氏)

19. 대서원부인(大西院夫人) 김씨(金氏)

20. 소서원부인(小西院夫人) 김씨(金氏)

21. 서전원부인(西殿院夫人)

22. 신주원부인(信州院夫人) 강씨(康氏)

23. 월화원부인(月華院夫人)

24. 소황주원부인(小黃州院夫人)

25. 성무부인(聖茂夫人) 박씨(朴氏)

26. 의성부원부인(義城府院夫人) 홍씨(洪氏)

27.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 박씨(朴氏)

28. 몽양원부인(夢良院夫人) 박씨(朴氏)

29. 해량원부인(海良院夫人)


이들 중에서 작호(爵號) 혹은 봉작(封爵)으로 보면 왕건에게 왕비라고 칭할 만한 여인으로는 6번 정덕왕후(貞德王后) 유씨(柳氏)까지이며, 그 아래 7번 헌목대부인(獻穆大夫人) 평씨(平氏)는 볼짝없이 대부인이라는 봉작으로 보아, 그 딸이 후대 누군가의 왕비가 되어 얻었음을 추찰한다. 8번 정목부인(貞穆夫人) 왕씨(王氏) 이하는 봉작이 부인이니, 앞보다 더욱 격이 떨어지는 첩들임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이를 보고 왕건은 적어도 6명에 달하는 정식 왕비를 거느렸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 박종기를 비롯한 고려사 전공자들 글을 읽어보면 조선시대와 비교해 고려는 일부다처제라고 하거나, 혹은 그런 전통이 매우 강한 것처럼 기술하지만, 이는 오판이다.


왕후 혹은 왕태후라 일컬은 저 여인 6명 중에서 정비는 오직 넘버원 신혜왕후 유씨가 있을 뿐이다.


후비열전을 보면 신혜왕후는 왕건의 첫번째 부인으로서, 죽은 후 신혜왕후라는 시호를 받고는 태조가 묻힌 현릉(顯陵)에 합장했다고 하거니와, 남편과 합장하는 자격은 오직 1명에게 주어질 뿐이거니와, 이는 그가 바로 정비임을 여실히 웅변한다.


그는 왕건보다 일찍 죽었다. 나아가 후사를 두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시호가 왕후였다.


6명 중 왕후라 일컬은 여인이 넘버2 장화왕후 오씨와 정덕왕후 유씨가 있거니와, 이들 역시 왕후라는 봉작은 죽은 뒤에 받은 이름인 시호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죽을 때는 왕비가 아니었는데 그 아들이 용케도 왕이 되어 왕후라 일컬어진 것이다.


그의 아들들이 즉위할 때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그들의 작호는 왕태후가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나머지 세 여인, 다시 말해 3번 신명순성왕태후(神明順成王太后) 유씨(劉氏)와 4번 신정왕태후(神靜王太后) 황보씨(皇甫氏), 그리고 5번 신성왕태후(神成王太后) 김씨(金氏)가 왜 왕태후인지를 여실히 안다. 그들의 후사가 왕이 되고, 그때도 살아있었던 까닭에 왕태후라는 존호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이 죽은 다음, 혹은 그 후사가 왕이 됨으로써 얻은 작호 혹은 존호들이지, 결코 왕건 생전에 왕비로 일컬을 수는 없었다.


왕건 시대를 무대로 하는 각종 사극에 왕건의 여인들이 모조리 같은 급의 왕비로서 취급하고, 그리 소개되는 것은 역사 조작이니,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박종기를 필두로 하는 기존 고려사학계의 잘못된 연구성과에 비롯한다.


말한다. 

고려는 결코 일부다처제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고, 일부다처제의 근거로 설명하는 왕건시대의 여인들도 하나하나 모조리 검토하면, 오직 왕비는 동시기에 단 한 명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비슷한 양상을 연출하는 현종시대 역시 마찬가지라, 현종 역시 그가 무슨 용가리 통뼈라고 정비를 동시에 두 명을 둘 수는 없는 법이다.


이것이 법이고 관습이다.

내가 논문이랍시며 이곳저곳에 싸지른 논문 중에 〈고구려 태조왕(太祖王)의 책성(柵城) 순수(巡狩)와 봉선(封禪)〉이란 글이 있으니, 한민족학회라는 곳에서 발간하는 기관지 《한민족연구》 제3집(2007년 6월 발간)에 수록됐다.(동 기관지 45~69쪽에 걸쳐 실렸다.)


이 글은 나로서는 적지 않은 공을 들인 것이었으나, 이것이 어찌하여 저 잡지에 기고되기에 이르렀는지는 자세한 내막을 알 수는 없지만, 당시 학회장 정영훈 교수와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저 학술지나 학회 모두 그 명칭에서 소위 말하는 국뽕 냄새가 짙기 마련이거니와, 실제 그것이 표방하는 정신도 그러했다고 기억한다. 


저 무렵 정 교수가 저 학회가 주최하는 어떤 자리에서 논문 발표를 하나 부탁했거니와, 이런저런 인연이 있어 내가 거절치 못하고, 그 자리에서 저 논문 토대가 된 발표를 하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그것을 저 논문집에 실어야 한다기에 투고했던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저 학술단체와 저 학회지가 워낙 존재감 미미한 까닭인지, 나 역시도 저 논문을 쉽사리 찾을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소위 말하는 등재지에다가 글을 실어 점수를 따야 하는 처지가 아니기에, 그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내가 내 논문을 봐야 내가 말하고자 한 논지가 다시금 정리가 되겠지만, 해당 잡지는 발간 직후 내가 정 교수한테서 받은 간행본 2부 정도가 있어 그것이 서재 어딘가에서 케케묵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겠거니와, 지금 그것을 참조하지 못하는 내가 이 자리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에 의존하는 길밖에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태조왕 46년(AD 98) 조를 보면, 다음과 같은 대목이 보인다. 

 

봄 3월, 임금이 동쪽 책성(柵城)에 가는 도중 책성 서쪽 계산(罽山)에 이르러 흰 사슴을 잡았다. 책성에 이르자 여러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고 책성을 지키는 관리들에게 물품을 차등을 두어 하사하였다. 마침내 그들의 공적을 바위에 새기고 돌아왔다. 겨울 10월, 왕이 책성에서 돌아왔다.

四十六年 春三月 王東巡柵城 至柵城西罽山 獲白鹿 及至柵城 與群臣宴飮 賜柵城守吏物段有差 遂紀功於岩 乃還 冬十月 王至自柵城. 


2년이 지난 동왕 50년(102)에는 이해 "가을 8월, 사신을 보내 책성의 백성들을 안심시키고 위로했다(五十年 秋八月 遣使安撫柵城)"는 대목이 있다. 


내가 저 글에서 천착한 대목은 바로 이것이다. 도대체 태조왕은 책성에는 왜 갔으며, 그 순수가 어떤 의미를 지느냐였으니, 결론은 이것이 동아시아 전통시대 군주가 더러 행하는 전국 순례 행사인 순수(巡狩)에서 한발 더 나아간 봉선(封禪)이라는 사실이었다. 봉선이란 무엇인가? 


역대 중국의 제왕이 태산과 그 인근 상대적으로 작은 산에 올라 각각 천신(天神)과 지기(地祇)을 각각 제사하는 광세(曠世)의 제전(祭典)이다. 이는 광의로 보면 종묘사직 제사의 일종이지만, 그 어떤 국가 단위 제사도 그 위용과 권위, 그리고 그 비용에서 봉선을 뛰어넘을 자가 없었다. 그만큼 봉선은 돈이 많이 들었고, 그 조건 역시 까다롭기 짝이 없었다. 


봉선을 하고자 오가는 황제의 행차 자체가 순수였다. 나아가 중국을 견주건대 그 제장(祭場)인 태산은 언제나 서안이나 낙양에 견주어 동쪽에 위치한 까닭에 동쪽으로 순수한다는 뜻에서 봉선을 거행하기 위한 황제의 행차를 동순(東巡)이라 했다. 


더불어 모든 봉선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절대의 조건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천하태평이었다. 황제가 이끄는 지상에서 황제가 지상의 천국을 건설했음을 하늘과 땅에 고하는 제사가 봉선이다. 하지만 말로만 천하태평일 수는 없으니, 하늘은 그에 대한 징표를 보여주어야 했으니, 이를 일러 서징(瑞徵)이라 한다. 


이 서징으로 태조왕의 책성 순수에 등장한 것이 바로 백록(白鹿)이다. 이 백록은 하필 태조왕이 계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잡은 것이니, 하늘이 내려준 것이라 생각했다. 왜 백록을 잡고 나서 책성에 이르러 태조왕은 뭇 신하와 백성을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였겠는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계산이라는 산에 올라서 봉선을 지내고 난 다음 그 위로연이었던 것이다. 


모든 봉선은 기공각석(紀功刻石)이 따르기 마련이거니와, 이는 황제가 지상에 태평성대를 이룩했으며, 이에 천신과 지기에 감사한다는 뜻을 돌에 새겨 기록하는 행위 일체를 말한다. 왜 돌에 새기는가? 그것이 영원을 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아가 봉선은 워낙 규모가 큰 행사였기에 이를 한번 치루면 국가 재정이 휘청댔다. 특히나 그 제장이 되는 주변과 황제가 지나는 길에 위치한 군현들은 출혈이 극심했다. 그래서 언제나 봉선을 치르고 난 직후에는 해당 지역에 대해서는 면세조치를 내리기 마련이다. 태조왕 역시 이에서 한치 어긋남이 없어, 책성을 다녀온 다음 곧바로 해당 지역에 대한 면세 조치를 취하기에 이른다. 


이런 점들로 볼 때 태조왕이 즉위 49년째에 행한 책성 방문은 봉선이었음이 명백하다. 허심하게 넘기기만 한 저 간단한 기록에다가 나는 봉선이라는 생명력을 불어넣었다고 자부한다. 이는 어느 누구도 못할 일이라, 나로서는 자부심이 있다. 


 



無君長,居無恆所,隨水草流移。人性兇忍,善騎射,貪婪尤甚,以寇抄為生。

군장이 없고 뚜렷한 거주지가 없으며, 물과 풀을 따라 옮겨 나니고, 성질은 흉포 잔인하고, 말과 활을 잘 다루며, 탐욕은 아주 심해 약탈을 생업으로 삼았다.




후진(後晋) 사공(司空) 동(同) 중서문하평장사(中書門下平章事) 유순(劉昫)이 봉칙찬(奉勅撰)한  《구당서(舊唐書)》 열전(列傳) 제195 회흘(廻紇) 전에서 회흘을 묘사하는 첫 구절이거니와, 표현은 약간씩 다르나, 실은 중국 역대 사서가 주로 지금의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북방을 주무대로 활동한 유목 민족을 다룰 때 동원하는 전형적인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비단 회흘만 아니라 《사기(史記)》 흉노 전(凶奴傳) 이래 무한 반복하는 같은 패턴이다. 


당(唐) 집권 이래 위징(魏徵) 등이 찬한 《수서(隋書)》 권제84 열전(列傳) 제49 북적(北狄)에서는 광범위하게 퍼진 철륵(鐵勒)이라는 종족을 묘사하기를 


雖姓氏各別,總謂為鐵勒。並無君長,分屬東、西兩突厥。居無恒所,隨水草流移。人性凶忍,善於騎射,貪婪尤甚,以寇抄為生。


비록 (철륵 종족별로) 성씨가 각기 다르나 그들을 합쳐서 철륵이라 부른다. 그들에게는 군장이 없으며 각기 동돌궐과 서돌궐에 속해 있다. 거주에 일정함이 없고 물과 풀을 따라 옮겨다니며 인성이 흉포 잔인하고 말과 활을 잘 다루고 탐욕이 아주 심해 약탈을 생업으로 삼는다. 


특히나 "隨水草流移。人性凶忍,善於騎射,貪婪尤甚,以寇抄為生"이라는 말은 중국 역대 한족(漢族) 왕조에는 언제나 북방 유목민족을 경계하는 슬로건이 되었으니, 그리하여 이들에 대해서는 시종일관해서 무력에 의한 강제적 정벌 혹은 덕치(德治)를 무기로 하는 교화 대상이라는 인식을 강고하게 심어준다. 



이는 북방 유목민에 대한 인식이며, 그에 대비되어 한반도가 상징하는 동이(東夷)와 남쪽 베트남을 주무대로 삼는 남만(南蠻), 토번을 중심으로 삼는 서융(西戎)에 대해서는 각기 그 풍토에 맞는 고질과도 같은 중화관이 있다. 이런 인식이 현재의 국민국가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이라 해서 달라졌다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국가 명칭에 벌써 중화(中華)가 들어가 있으니, 고래의 화이환(華夷觀)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건 그렇고 저 문구 중에서도 류이(流移)라는 말이 요즘 들어 노마드(nomad)라 해서 한창 각광받기 시작했다. 이는 문맥에 따라 여러 가지 옷을 갈아입겠지만, 지금은 제도나 세속에 물들지 않는 자유정신을 표상한다. 드라마틱한 변화라 할 만하다. 




“뇌물과 내 새끼는 하나” : 東漢의 제오륜(第五倫) [수정] [삭제] 2011.06.15 08:57:15


이른바 주자성리학을 완성했다고 평가되는 朱熹가 제자 유자징(劉子澄)에게 편찬토록 한 동몽서(童蒙書)로 《소학(小學)》이 있으니, 《대학(大學)》에 대칭하는 이 《小學》이란 문헌은 실상 유자징이 그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글을 모은 것이 아니라 先代 문헌 이곳저곳에서 동몽(童蒙)을 가르치는 데 적절하다 생각하는 구절들을 가려 뽑아 정리하고 나열하며 편집한 이른바 짜깁기 책이니 요즘 같으면 저작권법 위반으로 책이 회수되고 막대한 벌금을 물어야 할 일이지만 옛날 동양권에서는 이런 일이 비일하고 비재했다. 


《小學》은 실상 그 내용을 볼작시면 내 보기엔 이렇다 할 거창한 철학을 담았다고 보기는 힘들며, 다른 무엇보다 朱熹 當代의 실정과는 전혀 맞지 않는 記述이 허다했으니, 그러함에도 그보다도 다시 수백 년이 지난 뒤에, 그것도 조선 땅에다가 이를 절대도덕으로 세우고자 한 일군의 무리가 출현했거니와, 그 오야붕이 바로 조광조임은 익히 알 터이다.


《小學》은 전체 6편이니, 그 마지막 제6편은 편명(篇名)이 ‘선행(善行)’이라, 소제목처럼 이 篇에는 주로 역대 문헌에 보이는 善行과 관련된 역사상 인물의 일화라든가 言說을 모았다. 이 善行편은 다시 세분하니, 그 세부항목 중 하나가 바로 ‘실경신’(實敬身)이라. 


제목을 풀어보면 ‘敬身을 實한다’이니, 예서 實은 實證이란 뜻에 가까우니, 실례를 들어 증명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경신(敬身)’이란 무엇이냐가 그 小篇이 주장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가 노골화하거니와, 이때의 敬身을 나는 愼獨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大過는 없다고 본다. 말 그대로 몸가짐을 공손히 한다는 뜻이니, 따라서 ‘실경신’(實敬身)은 역사상 몸가짐을 제대로 한 實例들의 집합이 되는 셈이다.


이 ‘실경신’이 인용한 역대 인물고사 중 하나로 《후한서(後漢書)》에서 뽑아다 온 제오륜(第五倫)이란 사람의 행적이 있으니, ‘제오륜’은 표기로만 보면 사람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와는 하등 관계가 멀 듯 하지만 실은 사람 이름이다. 


姓이 第, 이름이 五倫이니, 벌써 이름 자체에서 그의 사상적 지향점이 어디인지가 금방 드러나지 않는가? 말할 것도 없이 그 지향점은 孔子가 대표하는 儒家之學이라 할 것이니, 《後漢書》 班彪列傳 下에서 이르기를 “第五倫字伯魚京兆”, 즉 제오륜은 字를 백어(伯魚)라 하는데 京兆(서울) 사람이라 했다.


伯魚는 또 뭐냐 하면, 글자 그대로는 물고기 중에서도 맨 우두머리, 오야붕을 말하니, 이는 바로 鯉(리), 즉, 잉어를 일컫는다. 잉어란 천년을 묵으면 龍이 된다 해서, 예로부터 靈物로 취급되었음은 무수한 일화가 증명하거니와 그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略하되, 다만 伯魚가 공자의 아들 이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공자에게 백어(伯魚)라는 아들이 있었고, 그가 아비보다 먼저 죽었다는 건 이미 《논어(論語)》에 보이거니와, 나는 제오륜이 하고 많은 표기 중에서도 伯魚를 字로 선택한 까닭은 그가 바로 공자의 아들이고자 했음을 자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어떻든 《후한서後漢書》 卷41에 수록된 그의 전기인 ‘第五倫 傳’을 중심으로 그의 행적을 정리하면, 그는 동한(東漢) 때 경조(京兆) 장릉(長陵), 곧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으로 그의 선대는 전국시대 전씨(田氏)였으니, 그 선조 전씨가 서한(西漢) 원릉(園陵)으로 강제 이주하게 되면서 성씨를 第로 바꾸었다. 


제오륜은 젊을 때는 지금의 기초자치단체 중급 공무원 정도에 해당하는 향색부(鄉嗇夫)로 있다가 지금의 서울시장 정도에 해당하는 경조윤(京兆尹) 염흥(閻興)이 불러 개인 비서격인 주부(主簿)로 삼으니, 이를 발판으로 나중에는 지금의 공무원 특채 정도에 해당하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회계(會稽)와 촉군(蜀郡)을 다스리는 지방관 오야붕인 태수(太守)를 역임한다. 그의 관직 생활은 청렴함으로 이름이 높았다.


《小學》 제6편 ‘善行’ 중 ‘실경신’(實敬身)에서는 《後漢書》 第五倫 傳 가운데 다음 대목을 인용한다.  


어떤 사람이 제오륜(第五倫)에게 묻기를 “공께서도 사사로운 마음이 있습니까?” 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나에게 천리마를 주려 한 적이 있다. 나는 비록 받지는 않았지만 三公이 모여 인물을 선발하고 천거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났다. 그러나 끝내 등용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 조카가 지난번에 병들었을 때 하룻밤에 열 번을 찾아갔지만 돌아와서는 편안히 잠들었다.


하지만 내 자식이 병이 났을 때는 비록 한 번도 병세를 살펴보지는 않았지만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런 행동들에 어떻게 사심이 없다고 하겠는가?”


或問第五倫曰, 公有私乎. 對曰, 昔人有與吾千里馬者, 吾雖不受, 每三公有所選擧, 心不能忘, 而亦終不用也. 吾兄子嘗病, 一夜十往, 退而安寢. 吾子有疾, 雖不省視, 而竟夕不眠. 若是者豈可謂無私乎.  





2009.09.26 04:00:05


제사를 지낼 때 반드시 제사상에 뒤켠에 안치하는 지방, 혹은 신주(神主)는 그것이 신체(神體)임은 두 말이 필요 없으니, 이를 쓰는 방법에서 주목할 것은 부부 중심이라는 점이다. 즉, 부부가 모두 돌아가셨을 경우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증조와 증조모, 고조와 고조모를 반드시 함께 짝을 지어 지방을 쓰니, 이 경우 다시 조심할 점은 神主 주체로써(다시 말해 남쪽을 향해 앉은 신주가 주체가 되었을 때) 남자는 오른쪽, 여자는 왼쪽을 따진다는 점이다. 이를 제사를 드리는 사람으로 볼 때는 왼쪽은 남자, 오른쪽은 여자가 된다. 


조선시대 무덤을 보면 그 묘주(墓主)를 밝히는 돌덩이(이를 묘표墓表라 한다)를 발견하거니와, 그에 적힌 문구를 보면 ◎◎之墓라 하면서 그 옆에 작은 글씨로 '配 ◎◎夫人 金海金氏 祔左(부좌)'라는 식의 표현을 발견하거니와, 이는 그 부인을 남편 왼쪽에다가 묻었다는 뜻이다. 신주나 무덤은 원리가 마찬가지라, 죽은 이를 기준으로 해서 그 왼편에 부인이 자리를 잡는다. 


신주를 쓸 때 남자로서 이렇다 할 벼슬을 역임하지 않았을 때는 顯考學生府君 神位(현고학생부군 신위-아버지), 顯祖考學生府君 神位(현조고학생부고 신위-조부), 혹은 顯曾祖考學生府君 神位(현증조고학생부군 신위-증조), 顯高祖考學生府君 神位(현조고학생부군 신위-고조)라는 식으로 반드시 ‘考’를 쓰거니와, 


반면 그에 대한 여성은 顯妣孺人金海金氏 神位(현비유인김해김씨 신위-어머니), 顯祖妣孺人星山裵氏 神威(현비유인성산배씨 신위-할머니) 따위로 현비(顯妣), 현조비(顯祖妣), 현증조비(顯曾祖妣), 현고조비(顯高祖妣)라는 식으로 반드시 ‘妣’를 쓴다.


그렇다면 신주에서 남자는 考, 여자는 妣를 쓰는 유래는 어디에 있는가? 중국 고대 각종 의례(儀禮)를 집성한 《예기(禮記)》 중 일상생활 소소한 각종 예절을 기록했다 해서 곡례(曲禮)라고 일컫는 章이 있거니와, 이는 다시 분량이 많아 上·下로 나눠지거니와, 이 중 곡례(曲禮) 下에 이르기를, 


生曰父, 曰母, 曰妻; 死曰考, 曰妣, 曰嬪.


이라 했다. 생전에 아버지는 父, 어머니는 母, 아내는 妻라 부르지만, 사후에는 아버지는 考, 어머니는 妣, 아내는 嬪이라 부른다.


는 뜻이다. 이로써 본다면, 혹여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나 그 남편이 제사를 지낸다면, 顯嬪孺人金海金氏 神位 따위로 지방을 쓰야 할 듯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지방 쓰는 법을 소개한 각종 인터넷 자료에 의할 지면


亡室孺人金海金氏 神位 따위로 쓴다고 하니, 나는 그 유래가 몹시도 궁금하다. 다만 그때나 지금이나, 대체로 부인이 오래 사는 일이 많고, 더구나 그 부인이 먼저 죽는다 해도, 자식이 있으면, 대체로 그 자식이 제사한는다는 점에서 亡室孺人金海金氏 神位와 같은 지방을 쓰는 일은 그다지 없으리라. 


이 땅의 남자들이여 오래살지어다. 추석이 다가와 객설을 늘어놔 봤다.




Being displayed at the lobby of the Yonhapnews Agency at Susongdong, Jongrogu, Seoul, the Nikon F-3 cameras and their Accessories, along with the photo taken with one of the cameras by Choi Geumyeung (최금영), a photographer of the Yonhapnews Agency of South Korea are the last witnesses of the tragedy. The photo of Korean officials waiting for President Chun Duhwan at the Martyrs' Mausoleum to commemorate Aung San, one of the founders of independent Burma was taken just before the bombing to attempt to assassinate Chun, the fifth president of South Korea, in Rangoon, Myanmar. 21 people died and 46 including Mr Choi were injured in the attack orchestrated by North Korea. The cameras were broken in the wake of the explosion. The Korean officials on the photo were all killed.  



<900살 먹은 팽조와 소녀> 

나는 매우 여러 번, 그리고 매우 여러 곳에서 동아시아 방중술(房中術), 즉 sexology 핵심은 교접은 하되, 한 순간의 오르가즘을 위해 정자를 쏟아버리는 사정(ejaculation)을 금한다고 했거니와, 그 논리는 지금으로써 보면 실로 단순해, 정액을 쏟아버리는 일을 바로 기력의 소진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이를 그 시절 문헌에서는 흔히 '접이불루(接而不漏)'라 했으니, 이 접이불루야 말로 동아시아 방중술 핵심 중의 핵심이다. 

물론 이런 논리는 철저히 남성 중심임을 잊지 말아야 하거니와, 여튼 동아시아 방중술은 섹스를 바로 신명(神明)과 통하고, 이를 통해 무병장수하는 일과 연동해 이해했으니, 그런 까닭에 방중술을 단순히 섹스를 잘하는 테크닉을 넘어 동아시아 세계에서는 심신을 수련하는 방법 중 하나로 당당히 자리를 꿰찬 것이다. 이를 가장 적절히 이용한 사상사 흐름이 바로 도교였다. 이런 방중 수련을 통해 얻는 이익을 방중보익(房中補益)이라 한다. 

물론 방중술은 음란하다 해서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 그것을 주된 무기로 내세운 초기 도교에서도 이미 육조시대 육수정에 이르면 이를 천박하다 해서 그 교단에서 내치고자 하거니와, 육수정이 신천사도(新天使道)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도교 운동을 주창했을 적에 그 새로움이란 바로 방중술의 퇴출을 의미했다. 

아래는 도교와 그 근간이 같이하는 방중술의 실체를 요란하게 보여준다. 출전은 《소녀경(素女經)》이다. 이 《소녀경》은 본토 중국에서는 오래 전에 원전이 망실되었다가 기적적으로 일본 나라시대 《의심방(醫心方)》이라는 의서(醫書) 집성집에 살아남아, 그런 사실이 20세기 무렵에 와서야 비로소 중국에도 알려져 다시금 대유행을 하게 된다.

<房中補益>

采女問曰:交接以瀉精爲樂,今閉而不瀉,將何以爲樂乎?彭祖答曰:夫精出則身體怠倦,耳苦嘈嘈,目苦欲眠,喉咽干枯,骨節解墮,雖復暫快,終于不樂也. 若乃動不瀉,氣力有余,身體能便,耳目聰明,雖自抑靜,意愛更重,恆若不足,何以不樂也?

채녀가 물었다. “교접할 때 정액을 쏟지 않아야 쾌락을 누린다 하거니와 닫아놓고 사정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쾌락을 삼겠습니까? 

팽조가 대답했다. “정액이 분출하면 몸이 나른해지고 귀는 괴로워 멍멍해지며 목이 마르고 뼈가 끊어지는 듯하니, 잠깐 쾌락이 온다 하나 결국에는 쾌락이 아닌 데에 이르지요. 교접할 때 사정하지 않으면 기력이 남고 몸이 가볍고 귀와 눈은 밝아지니 비록 사정하지 않는다 한들 성욕은 그만큼 강해져 항상 만족하지 못한 듯하니 이것이 어찌 쾌락이 아니리오?”

黃帝曰:願聞動而不施,其效何如?素女曰:一動不瀉,則氣力强;再動不瀉,耳目聰明;三動不瀉,衆病消亡;四動不瀉,五神咸安;五動不瀉,血脈充長;六動不瀉,腰背堅强;七動不瀉,尻股益力;八動不瀉,身體生光;九動不瀉,壽命未央;十動不瀉,通于神明.

황제가 말했다. “교접하면서도 사정하지 않는다 하는데 그 보람은 어떠합니까?” 

소녀가 말했다. “섹스 한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기력이 강해지고, 두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귀와 눈이 밝아지고, 세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모든 병이 사라집니다. 네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오장이 모두 편안해지며, 다섯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혈맥이 충만해지고 여섯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허리와 등이 굳세지지요. 일곱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엉덩이 넓적다리가 더욱 힘이 세지고 여덟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몸에서 광채가 나고, 아홉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수명이 끊이 없으며, 열 번에 사정하지 않으면 신명과 통하게 됩니다.

이 방식이 지금에 통용할 수는 없다. 저 방식은 요도염을 부르는 지름길이다. 하지만, 과도한 섹스를 경고하는 의미는 있다는 점에서 그 효용성이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다. 


1988년 경북 울진군죽변면 봉평(鳳坪) 2리(里)에서 발견되고, 지금은 그 발견 지점 인근 봉평신라비관에 전시 중인 울진봉평신라비는 높이 240센티미터인 변성화강암 사면 통돌 중 앞면만 대략 편평하게 다듬어 글자를 새겼으니, 판독자에 따라서는 10행 397자 또는 10행 398자로 본다. 10행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며, 행마다 글자수는 들쑥날쑥이다. 


비를 건립한 시기는 524년, 신라 법흥왕 11년이니, 그 내용은 차지하고 오늘은 비석에 적힌 총글자수가 398자임을 다시금 명백히 하고자 한다. 다시금이라 하는 까닭은 나로서는 이에 대해 이미 여러 번 강조했으며, 오늘은 그 재방인 까닭이다. 


제시하는 봉평비면 사진은 그 마지막 구절이 포함된 곳이라, 이에서 관건은 '世中◎三百九十八'라는 마지막 구절이라, 이에서 관건은 ◎ 글자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종래 이 글자는 압도적으로 아들 '子'로 읽었지만, 이 사진이 명백히 보여주듯이 이 글자는 글자 모양으로 봐도, 그리고 문맥으로 봐도 글자 字일 수밖에 없다. 


첫째, 글자 모양을 보면 이 글자가 子 혹은 字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으니, 관건은 갓머리 '宀'가 있느냐 없느냐에 모아진다. 사진이 명백히 보이듯이 분명히 '宀'가 있으니, 이 글자는 字일 수밖에 없다. 


둘째, 이는 문맥으로 봐도 字일 수밖에 없으니, 다름 아니라 이 비문에 적힌 총글자수가 398자이기 때문이다. 이 398자에는 '世中字三百九十八'까지 포함한다. 


그렇다면 왜 이 비문은 총글자수를 명백히 밝혔는가? 

이것이 법률 조문인 까닭이다. 법률 조문은 한 글자가 어찌 되느냐에 따라 그 내용이 때로는 왕청나게 달라지기 마련이라, 그런 까닭에 법률 조문은 단 한 글자도 고치지 못한다고 이미 상앙이 《상군서(商君書)》에서 강조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 비문 성격을 둘러싼 논쟁 역시 해결 기미를 마련한다. 이 비문은 법률이다. 전체가 법률 조문이다. 

판결문이 아니다. 판결문은 그런 법률을 근거로 해서 특정한 사례에 대해 내린 판단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판결문과 법률은 왕청나게 다르다. 


저 문구를 우리가 '世中字三百九十八'로 확정함으로써, 전체 비문 성격까지도 우리는 파악하는 지남철을 확보한 셈이다. 




<미세먼지 자욱한 서울>


미세먼지로 골머리를 앓지만, 역사를 통괄하면 이런 일이 비일하고 비재했다. 연례행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 그런 점에서 과연 요즘 미세먼지 원인이라 지목하는 것들이 타당성을 지녔는지 아닌지는 심각한 성찰을 요한다. 주로 산업화 차원에서 접근하는 듯하니, 이런 진단에 따라 차량 매연이 주범이라 해서 자동차 부제를 실시하기도 한다. 글쎄, 그럴까? 자동차가 없던 그 시절 토우(土雨), 다시 말해 흙비가 내리는 현상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각중에 궁금하다. 


2002.03.22 16:36:43 

<“역신을 베자 황사가 그쳤다”>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조선초 김종서 등이 편찬한 「고려사」 제131권에는 조일신(趙日新)이라는 인물의 전기가 실려 있다. ‘반역’이란 딱지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사 편찬자들에게 결코 좋은 인상을 남긴 인물은 아니다.

    본관이 평양이고 처음 이름이 흥문(興問)인 조일신은 찬성사를 지낸 조위(趙瑋)의 아들. 공민왕이 세자 때 원나라에 갈 때 시종(侍從)했으며 공민왕이 환국해 즉위하자 찬성사(贊成事)가 되었고, 이듬해 1등공신에 책록됐다.

    그는 이런 위세를 발판으로 왕을 설득해 정방(政房)을 복구하고 도평의록사(都評議錄事) 김덕린(金德麟) 등을 제거했다. 이 공으로 삼사판사(三司判事)가 되고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됐으며 원에 빌붙어 정권을 농단하던 기철(奇轍).기원(奇轅) 일파를 습격해 이 중 기원을 살해했다. 

    조일신은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왕을 협박해 자기는 우정승(右政丞)이 되고 정천기(鄭天起)를 비롯한 일당을 요직에 앉혔다. 

    하지만 이번에는 비수를 동지들에게 겨누어 함께 거사했던 장승량(張升亮) 등을 참수한 다음 정천기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투옥시키고, 스스로 좌정승 겸 찬화안사공신(贊化安社功臣)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공민왕의 밀지를 받은 삼사좌사(三司左使) 이인복(李仁復)과 김첨수(金添壽)에게 참살당하고 만다.

    이 대목을 「고려사」 조일신 열전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때 여러 날 흐리고 흙비(雨土)가 오더니 조일신을 베어버리자 날씨가 갰다.”

    여기서 ‘흙비’란 실제 비가 아니라, 요즘 말하는 황사(黃沙)를 가리킨다. 

    이런 기록을 통해 우리는 중국 고비사막에서 불어온 모래바람이 반역자 조일신이 날뛰는데 대한 하늘의 재앙으로 생각됐음을 알 수가 있다.

    「고려사」 전체를 검색하면 이와 같은 흙비 기록이 더러 나온다. 권제55는 오행(五行)의 토(土)에 해당하는 흙비와 관련된 사건만을 모아놓은 것인데, 이에 따르면 현종 9년(1018) 2월과 4월 이래 고려 멸망 때까지 모두 30여 차례에 달하는 황사 출현이 언급돼 있다.

    황사는 예나 지금이나 연례행사였을 것인데, 황사현상 중에서도 조일신 처단과 같은 정치성이 농후한 경우에 한해 기록이 남았음을 알 수 있다.

    분량이 「고려사」에 비해 형편없이 적은 「삼국사기」에도 신라 아달라왕 21년(174) 봄 2월 이후 모두 6차례 황사 출현이 보고되고 있다.

    백제 무왕 재위 7년(606)조를 보면 “봄 3월에 서울(王都)에 흙이 비처럼 내려 낮인데도 어두웠다”고 하고 있다.

    신라 진평왕 49년(627) 봄 3월에는 황사현상이 아주 심각했던 듯 “큰 바람이 불고 흙이 비처럼 닷새 넘게 내렸다”고 「삼국사기」는 전하고 있다.

    기록이 「삼국사기」나 「고려사」에 비할 바 없이 방대한 「조선왕조실록」의 경우는 황사 출현 관련 기록만 전부 모아도 「삼국사기」 분량을 초과할 것이다.

    황사와 같은 기상이변이 일어날 때마다 왕은 하늘의 재앙이라 생각해서 죄수를 사면하는 일 따위를 했다. 왜일까? 왕은 천명(天命)을 받았다고 생각했기에  황사와 같은 기상이변을 천명의 변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럴 때마다 왕이 시행한 죄수 사면과 같은 행위를 “하늘을 두려워한 우리 선조들의 경외심” 따위로 그럴 듯하게 설명하는데, 이제는 달리 보아야 한다. 스스로 왕위를 지키기 위한 제스처이자 고육지책이었던 것이다.

    taeshik@yna.co.kr 

(끝)



<김춘추 사위 김품석 부부가 전몰한 합천 대야성, 구글 어스 캡쳐>


김춘추는 진덕왕을 이어 655년 즉위하고는 그 이듬해를 기해 새로운 시대가 열렸음을 보여주는 인사 조치를 취한다. 삼국사기 권제5 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2년(655) 조를 보면 이해 봄 3월에 자식들을 분봉하니, 맏아들 법민(法敏)은 다음 보위를 점지한 태자로 삼는 한편 나머지 여러 아들 중 문왕(文王)은 이찬, 노차(老且)는 해찬(海飡), 인태(仁泰)는 각찬, 그리고 지경(智鏡)과 개원(愷元)은 각각 이찬으로 삼았다. 둘째아들 인문(仁問)이 빠진 까닭은 아마도 당에 가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렇다면 이들은 각각 누구 소생인가? 삼국유사 기이(紀異) 2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이라는 제하로 수록한 이야기를 보면 "태자 법민(法敏)·각간(角干) 인문(仁問)·각간 문왕(文王)·각간 노차(老且)·각간 지경(智鏡)·각간 개원(愷元) 등은 모두 문희가 낳은 아들이니 전날에 꿈을 산 징조가 여기에 나타난 것이다"고 하면서, "서자(庶子)는 개지문(皆知文) 급간(級干)과 거득령공(車得令公)·마득(馬得) 아간(俄間)이다.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 명이다"이라고 했다. 


이를 액면 그대로 취신하면, 법민(法敏)·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이 문희 소생이다. 예서 관건은 삼국사기가 말한 인태(仁泰)다. 그는 도대체 누구 소생이기에 삼국유사에서는 빠졌을까? 실수에 따른 누락인가? 아니면 어머니가 달랐을까? 


나아가 개지문(皆知文)과 거득령공(車得令公)과 마득(馬得)과 같은 서자들은 후궁 소생임이 분명하거니와, 그들은 어머니가 누구인가? 더불어 딸까지 합치면 모두 다섯이라 했거니와, 이것이 무슨 말인가? 서자 서녀를 합쳐서 다섯이란 말인가? 또 한 가지 정비 문희는 아들만 낳았은가도 관건이 된다. 


<대야성 원경, 문화재청 홈페이지> 


하긴 요새도 보면, 이게 무슨 유전학 조화옹인지, 딸만 주구장창 낳는 어머니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아들만 줄줄이 사탕처럼 부화하는 엄마도 심심찮게 본다. 여담이나, 내 마누라의 생물학적 어머니, 그러니깐 장모님을 볼짝시면 이 양반은 딸만 다섯을 두었다. 한데 더 요상한 점은 개중 일찍 사고사한 한 명을 제외한 딸 넷이 시집가서는 각기 자식 1명씩을 오늘 현재 둔 상태인데, 모조리 아들이다. 뭐 이것도 격세유전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문희가 아들만 낳았다 해서 요새로 미루어도 하등 이상할 점은 없다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우선 이 단계에서 우리는 김춘추 자식 관계를 이리 정리한다. 정부인이자 정비인 문희에게서 법민(法敏)·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개원(愷元)의 다섯 아들을 두었으니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적자(嫡子)라 요직을 차지한다. 나아가 문희 소생은 아닐 가능성이 크나, 인태(仁泰)라는 또 다른 아들이 있으니, 인태 역시 적자와 같은 취급을 받았다. 서자는 아니었던 것이며, 나아가 그런 까닭에 그 어미 역시 후궁 취급은 아니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나아가 서자들이 있었으니, 후궁이 있었음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한데 예서 두 가지 문제가 돌발한다. 바로 적녀(嫡女) 문제다. 적녀란 정식 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딸로서 첩 혹은 후궁 소생인 서녀(庶女)와는 신분 지위가 왕청나게 다르다. 


<대야성 성벽, 문화재청 제공>  


김춘추에게는 적어도 적녀 셋을 우리는 확인한다. 첫째, 대야성전투에서 죽임을 당한 고타소이며 둘째, 김유신에게 하가(下嫁)한 지소이고 셋째, 이 대목은 아무도 생각한 적이 없는데 영휘(永徽) 6년, 무열왕 2년(655), 백제와의 조천성(助川城) 전투에서 장렬히 산화한 김흠운(金欽運)의 부인이 있다. 


** 이 외에도 파계한 승려 원효와 관계해 설총을 낳은 요성궁 공주가 있거니와, 이 여인을 나는 미쳐 고려에 넣지 못했다. 흔히 요석공주라 부르는 이 여인이 김춘추 딸임이 확실하고, 나아가 설총 활동 연대를 고려할 적에, 그가 앞으로 말하게 될 김흠운의 부인으로 본다는 주장이 있다고 경주학연구원 이채경 선생이 말한다. 이를 부기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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