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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현궁의 모란


농촌 출신인 나에게 종묘(種苗)라는 말은 익숙하다. 곡물 종자라는 뜻이다. 이 種苗가 좋아야 곡물 소출이 좋을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물론 종자(種子) 혹은 種苗가 좋다 해서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더불어 우리는 사람을 지칭해서도 種子를 운운한다. 사람도 종자를 받기도 한다. 고려 무신 정권 때 노비 반란을 주도한 만덕이 했다는 그 유명한 말, 하지만 실제는 秦 말기 농민반란을 주도한 진승과 오광이 했다는 말, 즉, “王侯將相, 寧有種乎?”에서 種이 갖는 sexual connotation은 매우 짙다.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저명한 문인 유몽인(柳夢寅)의 《어유야담(於于野談)》이 채록한 일화다. 정덕년이라는 사람 집에 시골에서 서생 하나가 과거 시험을 치러 올라와 머물고 있었는데 야밤에 어떤 종가를 지나고 있을 때 일이다. 장사 네댓 명이 불쑥 몰려나오더니 이 서생을 때려 엎고는 마련해온 커다란 자루에 담아 묶어 둘러메고는 이 골목 저 골목 누빈 끝에 담 안으로 던져놓더니 자루를 풀고 정중히 방안으로 모시는데 비단 이부자리가 깔린 신방이었다. 조금 있으니 성장한 여인이 들어와 동침을 청하고 파루(罷漏)의 북소리가 나자 여인은 사라지고 장정 네댓이 다시 나타나 자루에 담아 묶고 골목길을 누비더니 납치해간 종가에 풀어놓은 것이었다. 시골에서는 서생 대신 소금장수나 무시로 장수, 땜통장수 등 뜨내기를 은밀히 들여 동침시키고 입마갯돈을 단단히 주어 은밀하게 씨를 받았다. 


모란씨


이것이 바로 씨받이의 상대 개념인 씨내리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진평왕의 딸로써 아버지가 아들을 두지 못한 까닭에 여자로서 즉위했다는 선덕여왕 덕만이 씨내리를 통해 아들을 낳으려 했다는 명확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씨내리가 《화랑세기》에는 보이니, 13세 龍春 傳에 이르기를 善德에게 보위를 이을 아들을 얻고자 해서 처음에는 龍春에게 씨를 받고자 했다가 실패하자 삼서지제(三壻之制)를 들어 흠반(欽飯)과 을제(乙祭) 또한 함께 선덕을 ‘시중’들게 했다고 한다. 이 三壻之制의 결론을 말하면 실패로 끝났다. 이들 남자 세 명을 잠자리에 들이고도 아들을 얻지 못하자, 결국 왕위는 眞德에게 돌아간다. 


이에서 말하는 三壻之制는 전후 문맥으로 미뤄 볼 때, 후사인 아들을 얻을 때까지 남자를 세 명 들여 씨를 받는 제도를 말한다. 드라마 얘기가 나온 김에 《선덕여왕》에는 을제가 보이거니와, 20대 앳된 선덕여왕에 대비되어 70대 원로 배우 신구가 扮해 출연하는 바람에 ‘원작’의 묘미를 살리는 데는 아랑곳이 없는 듯하다. 


백모란


선덕이 남자 세 명을 들이고도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내용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와 같은 기존 문헌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했지만, 내가 이미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2)에서 지적했듯이 그런 흔적이 보이지 않는 것과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천양의 차이가 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에는 선덕여왕의 앞날을 내다보는 혜지를 말해주는 증거 중 하나의 예화로 기록된 이른바 모란씨 서되 얘기가 그 편린이라고밖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모란씨 서되 얘기는 익히 알려졌거니와, 요약하자면 선덕은 당 태종 이세민이 모란 그림과 함께 보내준 모란씨 서되를 보고는 그 모란이 꽃을 피워도 향기가 없을 것임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거니와, 그 근거로써 이세민이 보낸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화랑세기》를 내가 ‘괴물’로 치부하는 또 다른 까닭은 바로 이 사례에 단적으로 해당한다. 방금 말한 三壻之制를 담은 《화랑세기》라는 텍스트가 출현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이 모란씨 서되 이야기를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증좌로써만 소화할 수 있었다. 하지만 《화랑세기》가 출현한 지금에서는 이 모란씨서되 얘기가 실은 선덕이 아들을 낳기 위해 남자 세 명을 들였으나 아들 낳기에 실패한 史話의 복선이라는 점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화랑세기》가 갖는 폭발성은 바로 이에서 비롯된다. 이런 내용을 어찌 조작해 낼 수 있다는 건지 필자로서는 궁금하기 짝이 없다.  





An old woman in Bagan, Myanmar is spinning thread on cotton with a spinning wheel.  


물레로 실을 잣는 바간 할머니. 목화솜을 말아서 뽑은 실은 옷감 재료가 된다. 

<공주 정안 밤나무>


고려말 문사 백문보(白文寶)와 같은 해에 급제한 윤택(尹澤)이라는 사람은 유난히 밤나무를 사랑한 모양이다. 새로 이사하는 집마다 밤나무를 심었으니, 그리하여 당호堂號 또한 밤나무 정자라 해서 율정栗亭이라 할 지경이었다. 당호를 그리 정하니 친구인 백문보가 이를 기념하는 글을 썼다. 이름하여 '율정설栗亭說'이 그것이니, 이에서 백문보가 읊기를, 


일찍이 (택이가) 나에게 말하기를 '봄이면 가지가 성글어서 가지 사이로 꽃이 서로 비치고, 여름이면 잎이 우거져서 그 그늘에서 쉴 수 있으며, 가을이면 밤이 맛이 들어 내 입에 가득 채울 만하며, 겨울이면 껍질을 모아 내 아궁이에 불을 땐다네. 나는 이 때문에 밤나무를 고른다네'라고 했다. (원주용 옮김, 김혜원 교점 담암일집淡庵逸集, 한국고전번역원, 2012.12, pp 118~119) 


라 했으니, 이에서 내 눈길이 가는 곳은 밤송이로 불을 땠다는 점이다. 밤송이라. 내 어린시절을 떠올리니 화력은 그런대로 있다는 기억은 있지만, 이것으로써 군불을 땐 기억은 없다. 대신 밤송이라면 등떼기 맞아서 따가웠던 기억에 소스라치게 놀라기만 할 뿐. 


역대로 밤나무는 소중히 여긴 흔적이 많으니, 전라도 장성 땅에 세거하는 행주기씨 호철씨에 의하면 그 이유 중 하나가 신주를 만들 재료가 되는 까닭이라 하거니와, 그러면서 그가 이르되, "그래서 딸 낳아 오동 심어 쓸 만하면 시집가고, 아들 낳아 밤나무 심어 신주 만들만하면 죽는다"고 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밤나무는 죽음과 연동하기도 한다. 


경남 거창 출신 한문학도 박헌순 옹에 의하면 "대개 밤송이로 불을 때는 것은 화력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당에서 위험 요소를 태워없앤다는 뜻도 많았다"고 하거니와, 그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한 설명을 더 듣지는 못했노라. 



< 1928년 제1판 OED >


1999년 한글날을 코앞에 둔 그해 10월 5일,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은 마침내 《표준국어대사전》 첫 권을 선보였다. 상·중·하 전 3권으로 예정한 전질 중 상권으로 처음으로 선을 보인 것이다. 이는 사전다운 사전을 열망한 문화계 오랜 숙원을 마침내 푼 것이었으니, 문화사에서 지닌 의미야 오죽 크겠는가? 이에 당시 국어원 담당인 나는 이 소식을 다음과 같이 타전했다.  


모습 드러낸 「표준국어대사전」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지난 8년간 500명의 인력과 112억원이라는  막대한 예산이 투입된 「표준국어대사전」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이 사전은 국가가 직접 편찬한 최초의 국어사전이라는 사실과 함께 지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어느 사전보다 많은 표제어를 수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편찬자인 문화관광부 산하 국립국어연구원(원장 심재기)은 이 사전을 두고  "이제 우리도 영국의 옥스퍼드영어사전(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갖게  됐다"고 자부할 정도다.


국어연구원은 올해안으로 상··하 3권이 모두 발간될 이 사전 편찬작업을 마무리하고 오는 9일 한글날에 나올 「상권」의 전반적 모습을 5일 언론에 공개했다.


발행처가 두산동아인 이 사전은 오는 11월말 나머지 두권을 내놓게 되면 표준말과 북한말, 지방말, 옛말 등 모두 50여만 단어를 수록한 최대 국어사전이 된다.


전체 7천300쪽에 이르는 이 사전은 일반 원칙만 정하고 있는  현행  어문규정을 구체화함으로써 기존 사전들이 표기나 표준어 판정에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혼란을 막도록 했다.


또 전문어 19만 단어와 북한말 7만 단어, 지방말 2만어, 옛말 1만2천어를  수록함과 함께 단어에 따라 어원 설명을 곁들였다.


예컨대 몽골어에서 빌려온 검은말이라는 뜻의 '가라말'의 경우 '가라+말'로  풀었고 '기와'는 조선초기 한글문헌인 「석보상절」에서는 '디새'로 나타나지만 그 뿌리를 거슬러가면 '딜+새'로 이루어진 말임을 명시하고 있다.


부록으로 기본단어 중심의 용언 활용표와 로마자 순서로 정리된 외래어  표기목록 및 학명 목록을 수록해 이용자가 한글표기에 관한 정보를 찾는 데 도움이 되도록 했다.


그러나 막대한 인력과 예산이 투입된 사전이지만 수록 표제어가 많고 약간의 어원설명이 곁들여진 점을 제외하고는 기존 사전과 다를 바가 없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우선 이 사전은 시중 국어사전의 고질적 병폐인 '용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사전에서 용례는 생명과 같다. 특정 단어가 실제 문장에서는 어떻게 사용되는지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용례다.


OED의 경우 'SET'라는 단어란을 펼쳐보면 이 단어가 생성된 과정과 그것이 담고 있는 뜻풀이는 물론 이와 관련된 풍부한 용례가 무려 150쪽에 달하고 있다. 또 이런 용례도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셰익스피어나 성경을 비롯한 각종 고전에서 뽑은 것이다.


그러나 이번 표준국어대사전은 기존 국어사전처럼 심각한 용례 부족현상을 드러내고 있다. 비록 표제어에 따라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용례를 가려뽑기는  했으나 용례가 붙어있지 않은 단어가 훨씬 많은 데다 그나마 그 용례조차 편찬자가 짐짓 만들어낸 듯한 것이 태반이다.(사진있음)

taeshik@yonhapnews.co.kr(끝)


이를 보면 국어원 역시 《표준국어대사전》 모델로 옥스퍼드 잉글리시 딕셔너리(OED·OXFORD ENGLISH DICTIONARY)를 염두에 두었음을 여실히 엿보인다. 요컨대 《표준국어대사전》은 한국어판 OED로 기획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막상 그 첫 권인 상권을 든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난 8년간 500명 인력과 112억원을 투입한 사전이 고작 이 모양인가 실망을 넘어 분노로 치달았다. 왜였던가? 


나는 그 이유를 이 기사 말미에 고딕체로 처리한 대목을 통해 제기했다. 무엇보다 용례가 없거나,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분기탱천했다. 그런 분노를 나는 당시 이 사전 발간 기자회견에서도 그대로 표출했다고 기억한다. 이것도 사전이라고 만들었냐고 그대로 쏘아붙였다고 기억한다. 


나는 이런 용례 부족을 기사에서는 "시중 국어사전의 고질적 병폐"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용례야말로 사전의 '생명'이라고 했다. 한데 《표준국어대사전》은 용례 빵점인 사전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많은 시간과 그렇게 만은 인력과 그렇게 많은 예산을 쏟아부어 국립기관에서 만든 사전임에랴? 


그 용례란 것들을 살피니 "비록 표제어에 따라 소설과 같은 문학작품에서 용례를 가려뽑기는 했으나 용례가 붙어있지 않은 단어가 훨씬 많은 데다, 그나마 그 용례조차 편찬자가 짐짓 만들어낸 듯한 것이 태반"이었던 것이다. 용례가 없는 단어가 많다? 이게 사전인가 말이다. 집어치라고 호통을 쳤다. 


화딱지가 나서, 나는 《표준국어대사전》이 모델로 했다는 《OED》를 뒤져, 그것이 이 용례 문제를 어찌 처리하는지를 조사했다. 그 사례로 든 표제어가 바로 'set'였다. 이 말은 일상어인 데다가 그만큼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양할 뿐더러, 역사 역시 오래됐기 때문이다. 그 결과 《OED》는 "이 단어가 생성된 과정과 그것이 담고 있는 뜻풀이는 물론 이와 관련된 풍부한 용례"를 무려 150쪽에 걸쳐 쏟아붓고 있다는 사실을 들이댔다. 단어 하나에 150쪽을 할애한 것이다. 나아가 "이런 용례도 그냥 지어낸 것이 아니라 대부분 셰익스피어나 성경을 비롯한 각종 고전에서 뽑은 것"임을 주장했다. 실제로 그랬다. 


《OED》랑 비교하면 《표준국어대사전》은 쪽팔리기 짝이 없었다. 기자회견에서의 그런 내 호통과 기사에 국어원은 당연히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글날이랍시며 잔칫상으로 자랑한다고 저걸 내밀었는데, 어떤 독한 기자한테 걸려들어 하자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가 심했다 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리 고생한 사람들이 앞에 있는 대놓고 비판을 해대니, 속으로는 "뭐 저런 놈이 있냐"고 했을 것이다. 안 봐도 야동이다. 그것이 못내 미안하기는 했지만, 지금도 나는 그런 내 행동과 내 저 기사에 결코 물러섬이 없다. 


내 기사가 실제 이후 사전 편찬과 수정 증보에 반영됐는지는 몰라도, 이후 저 사전은 용례 보강에 총력을 기울이게 된다. 내가 요구한 대로 대충 집필자가 지 꼴리는 대로 만들어 넣는 용례가 아니라, 저명한 문학작품 등지에서 실제 용례를 뽑는 작업으로 일대 전환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 보면, 비교적 믿을 만한 용례가 그런대로 구색은 갖추게 되었다. 못 믿겠거든 저 사전 들어가서 표제어별로 검색해 봐라. 


저 사전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하는 데 나는 큰 디딤돌 하나는 놓았다고 지금도 자부한다. 무슨 한글 관련상? 그런 게 있다면 내가 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라! 


그렇다면 나는 《OED》를 어찌 접하게 되었는가? 1980년대 대학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생김새와는 달리 영문학과를 다녔다. 그것도 생김새와는 달리 Y대를 다녔다. 그 시절 나는 이런저런 데서 하도 《OED》를 자주 만나다가, 도대체 어떤 괴물이냐 궁금해서 Y대 중앙도서관에서 그것을 찾아 보았던 것이다. 그것을 처음 접한 충격은 지금도 선하다. 세상에 이런 사전이 있다니? 그러면서 나는 이렇게 물었다. 도대체 우리는 왜 국어사전을 이리 못 만든단 말인가? 그래서 그 충격은 이내 분노로 발전하고 말았다. 그 충격과 분노가 《표준국어사전》에서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을축년표류기(乙丑年漂流記) 

수주樹州 변영로(1898~1961)의 술에 얽힌 일화의 자서전인 《명정酩酲 40년》 한 토막이다. 그 유명한 1925년 을축년대홍수에 얽힌 일화다. 이 글을 수록한 자서전은 1953년 서울신문사에서 처음 출간됐거니와 내가 인용한 텍스트는 1977년 범우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초판 1쇄를 발행하고 1987년 4월15일에 발행한 2판2쇄 발행 범우문고본이다. 첫 대목에 보이는 "無爲 無收獲"은 이 문고본에 의하면 "무위(無爲) 무수확(無收獲)"이라, 어느 쪽이 옳은지 판단이 곤란하다. 혹여 이 책 서울신문사본을 지닌 분은 텍스트를 교감해 주기를 바란다. 


이거라고 특기할 만한 실태 실적으로서는 그야말로 無爲 無收獲의 4,5년이 흘러서 을축년 대홍수를 만났다. 말 아니 하여도 기억하는 분은 기억하려니와, 비라 하기로니 그때의 것 같은 줄기차고 기승스런 비는 드물었을 것이다. 幾十日을 연이어 주야의 別 없이 온다든지 나리는 것이 아니라 바다와 하늘이 뒤집힌 듯 그냥 퍼붓는 것이었다. 사람마다 개벽을 생각하고 노아의 홍수를 연상하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각 교통은 두절 상태로 그야말로 물난리는 도처에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 무렵 내가 살기는 혜화동(번지 망각)이었던 바, 이런 경황없는데 술 먹으라고 나오라고 부르는 친구도 지각없음은 물론, 그 모진 비를 무릅쓰고 나간 나도 어지간한 숙맥이나 철부지가 아니었다. 불러간 장소는 나 있는 곳에서 가깝지도 않던 종로 모 酒亭이고 초대한 사람인즉 故 강상희姜相熙 군이었다. 


及其 가서 보니 좌중에는 6,7인의 선래객先來客이 벌써 포진하고 있었는데 개중에는 酒客, 不酒客, 그 외에 말썽꾼(성명은 발표를 보류)들이 섞여 있었다. 시종일관 기분이나 감정의 절제를 벗지 못하는 나로서는 때로는 그때그때의 장면 수습을 함에 약간의 참을성은 있었던지라, 안 갔으면 모르려니와 일단 간 이상 창쾌暢快하게 끝까지 진취盡醉한 다음 헤어진 바, 표류기의 본론은 이에서부터다. 



하여간 나는 대취하여 술집을 나섰는데, 내가 잡아탔는지 누가 태워들 주었는지 상세事는 至于今 알 길이 없는 중, 인력거 한 대에 탁신托身하여 전기前記한 혜화동 내 우거를 찾아가려 한 모양이었다. 사정없이 내리퍼붓는 비와 싸우며(물론 전등도 없었다) 질주라기보다 무거운 짐을 끌고 수영식으로 가던 그때 그 당시 거부車夫의 고통이 어떠하였을지! 기진맥진하였을 것은 상상키 어렵지 않다. 

얼마를 집 있는 방향으로 걸었는지, 갑작스러이 차를 멈추고, 

“다 왔습니다. 댁 문전이올시다.” 

하는 차부 말에, 

“이 우중에 오긴 참 빠르게 왔다.” 

하며 어련하라는 듯이 앞뒤 생각 않고 인력거에서 내렸다.


막상 내리고 보니 내 집 문전은 그냥 水宮에를 들어선 듯한데 이제 와서는 술도 언제 먹었냐는 듯 다 깨버렸다. 두리번두리번 나는 사위四圍를 둘러보려 하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귀에 들리느니 요란스런 빗소리뿐이었다. 나는 비에 흠뻑 젖은 채 수건과 옷자락으로 얼굴을 닦고 눈을 부비며 방향을 알아보려 하였다. 문자 그대로 지척을 분간치 못했다. 그때 나의 실감은 앞뒤 진로를 막는 일대 '銀甁' 속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하여 그때 나의 급무는 ‘철의 장막’이 아니라 ‘은의 장막’을 뚫고 나가는 것이었다. 어디가 어디인줄 모르는 채로 한걸음한걸음 조심조심하여 가며 발의 감촉으로 길인 듯 하면 더듬어 갔다. 물론 집을 바로 찾아갈 희망에서가 아니라 어디고 비만을 거새일 때면 그만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좌우 연도에 혹여나 하는 석유불 하나 빤짝하는 창호 하나도 보이지를 아니하였다. 향하는 곳이 집 가는 길이여니만 치고 나는 걸었다. 발등 위로 흐르는 물이 차츰 무릎에까지 범하게 되며 전후좌우 뢰뢰轟轟한 물소리 귀를 찢는 듯, 나는 분명코 어느 급류권 내에를 들어선 것을 직감하였다. 


그러나 벌써 시이만의時已晩矣, 퇴각 개시도 하기 전에 뒤밀려드는 격랑에 휩쓸려 풍덩 하고 나는 걷잡을 새 없이 어디인지 빠져 들어가고 말았다. 순간, 이제는 그만이라고 모든 것을 단념하는 것이 나의 의식의 최후였다. 몇 시간 뒤인지 나는 눈을 뜬 모앙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슨 곡절이고 세음인지 분간할 길이 없었다. 희미한 눈과 몽롱한 의식으로 내 집 속 아닌 것은 짐작하였다. 强仍히 정신을 수습하고 필사의 용기를 내어 가지고 반신을 간신히 일으키어 앞뒤를 휘 한 번 돌아보았다. 허나 역시 방향 부지이었던 중, 내가 누워 있던 곳은 한 砂丘 위 - 아니 사구 위라는 것보다는 차라리 한 小砂丘 위로, 그 앞으로는 후효喉哮하는 탁랑濁浪이 분마奔馬처럼 달리고 있었다. 


추후에 조사하니 내가 물속에 전락한 장소는 혜화동 石橋이었고, 내가 얹히어 있던 그 사구는 현 서울대학을 지나서인 어느 한 곳에 급류 격랑에 복새흙이 밀리고 밀리어 형성된 한 小丘였던바, 천우신조 나는 표류타가 그 위에 얹혀졌던 것이다! 



내가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을축년대홍수는 한국전쟁 못지 않은, 혹은 그보다 더 심대한 한국근현대사 상흔을 남긴 사건이다. 그에 대해서는 별도 단행본을 준비 중이다.

<소불알..지증왕은 이 황소보다 거시기가 컸다>


오늘 이 자리에 선 나는 당돌하지만, 이 《화랑세기》 진위 논쟁 한 축이다. 1989년과 1995년에 두 종류가 알려진 《화랑세기》가 김대문의 그 《화랑세기》를 베낀 데 토대를 둔 것이라는 이른바 진본론에 나는 섰다. 그런 점에서 오늘 이 자리에서 나는 이 《화랑세기》 진위 논쟁을 공정하게 평가할 만한 인물은 되지 못한다는 점을 분명히 해 둔다. 그에 따라 내가 의도했건 하지 않았건, 이와 관련되는 언급은 자연히 위서론僞書論의 논리적 근거를 옥쇄玉碎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내가 웹상에서 주로 사용하는 이름은 두 가지가 있으니, 하나는 ‘지도로 1자5치’이며 다른 하나는 ‘모란씨 서되’다. 전자는 《삼국유사》가 전하는 신라 지증왕의 陰莖 길이를 말한다. 이 자(尺)라는 개념이 주척周尺이니 당척唐尺이니 영조척營造尺이니 해서 시대와 공간을 따라 다르지만, 그 근본은 남자 성인 한 뼘이 기준이라는 점이다. 대체로 22~33센티미터 정도로 보아 대과가 없을 것이며, 대략 30센티미터로 잡아도 지증왕은 음경이 무려 45센티미터에 달하는 셈이다. 이 정도면 사람이 아니라 말이라 해야 한다. 그렇다고 지증왕의 실제 음경이 이만했느냐 하면,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본다.  


우리에게 홀연히 주어진 《화랑세기》는 화랑 중의 화랑, 대표화랑인 풍월주風月主 역대 32명에 대한 전기다. 하지만 단순히 이들 풍월주 전기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당대 新羅사회의 다양한 양상을 노출한다. 이것이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이은 이른바 진본으로 판정난다면(물론 나는 결판났다고 생각하지만) 신라사는 물론이려니와 한국 고대사 전반은 수술이 불가피하다. 그만큼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내용으로 가득 찼다. 


그 중 하나가 지증왕 음경 얘기가 나온 김에 이와 관련한 《화랑세기》의 언급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에 의하면 11번째 풍월주는 하종夏宗이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도 새주璽主인 미실美室과 세종世宗 사이에서 난 아들로 나오는 그 인물이다. 이 夏宗 傳에 의하면 묘도妙道라는 법흥왕 후궁 이야기가 엿보인다. 이 妙道라는 이름이 벌써 심상치 않다. 《화랑세기》에 의하면 妙道가 점점 자라매 “帝(법흥제. 법흥왕)가 약속한 대로 (묘도를 후궁으로 맞아들여) 섹스[幸]를 했지만, 협착불능칭(幺窄不能稱)한 데다, 帝는 또한 太陽이라 故로 妙道는 당석(當夕)할 때마다 그것을 괴로워하니 帝가 그다지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모든 남자는 대물을 꿈꾼다> 


이 기술의 묘미는 ‘요착불능칭’(幺窄不能稱)에 있으니, 이를 이종욱은 “작고 좁아 맞을 수 없었고”라고 옮겼거니와, 비루鄙陋하다고 생각했음인지, 무엇이 작고 좁은지 언급하지 않았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妙道의 陰莖이 작고 좁았다는 뜻이니, 이 경우 칭(稱)은 《이아爾雅》 석고釋詁에 보이는 “稱, 好也”로 보아 사랑하다고 보거나, 《주례周禮》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 중 여인輿人에 대한 기술 “爲車輪崇車廣衡長, 參如一謂之參稱”에 대한 註인 “稱, 猶等也”로 보아, 묘도를 좋아하지 않았다거나, 아니면 법흥왕의 陰莖 크기에 상응하는 만큼 妙道의 陰莖이 크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화랑세기》는 밤마다 자신을 견디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妙道에 실증이 나서는 왕 자신이 아끼는 신하 미진부未珍夫에게 내려주어 아내를 삼게 했다고 한다. 《화랑세기》를 계속 따라가면 이렇게 해서 같이 살게 된 妙道와 未珍夫는 알콩달콩 잘 살았다 하며, 이 사이에서 貴女를 낳으니 그가 바로 요물 美室이라고 한다. 


이런 기술을 볼 때마다 나는 妙道가 의아스럽지 않을 수 없다. 분명 《화랑세기》에서는 妙道가 幺窄(요착)하여 밤이면 밤마다 괴로워했다고 하지만, 그 고통의 원인이 妙道의 구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법흥왕의 지나치게 비대한 陰莖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라면, 법흥왕과는 그렇게 괴로워 죽겠다고 아우성치던 妙道가 어찌 未珍夫와는 그리도 금슬 좋은 알콩달콩한 삶을 끌어갔겠는가? 아니, 그렇지도 않다면, 未珍夫는 당시 신라 성인 남성보다 陰莖이 작았을 수도 있겠지만, 나로서는 이에다가 그다지 혐의를 주고픈 생각은 없다. 


내가 처음에 《화랑세기》 이 대목을 접하고는 퍼뜩 지증왕을 떠올렸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元子다. 그 아버지에 그 아들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이에 비뇨기과 전문은 아니지만, 평소 친분이 있는 어떤 서울대 의대 교수에게 “아버지 ○지가 크면 그 아들 ○지도 클까요?”라고 물은 기억이 있다. 한데 이 교수의 답변이 걸작이었다. 


<대물을 향하여!!!>


“아버지가 큰 데 아들이 작다면 그거야말로 기네스북 감입니다.” 


이것이 내가 본 《화랑세기》가 폭로한 新羅史像의 하나다.



"이는 마치 무엇과 같은가 하니, 20세기에 활발히 출간되고 있는 우리나라 각 교사校史라든가 지방지를 보면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 항목이 '우리 학교(혹은 고장)를 빛낸 인물들'이라는 곳인데, 이것만 보면 우리는 마치 그 학교, 그 고장 출신자 전체가 모두 독립투사이며 의병장이며 뛰어난 학자인 줄 착각하게 되는 착시현상에 견줄 수 있다. 하지만 특정 집단 전체와 그 집단을 구성하는 구성원 하나하나가 그 학교, 그 고장을 빛냋 인물이 될 수는 결코 없다. 개중에는 일제에 빌붙어 나라와 동포를 팔아먹은 놈이 있는가 하면 협잡꾼도 있을 것이고 천하의 난봉꾼도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설혹 김대문(金大問)이 현좌충신(賢佐忠臣) 양장용졸(良將勇卒)은 모두 화랑도 출신이라는 말을 했다고 해서 《화랑세기》가 그런 인물들로만 득실댈 것이며 나아가 화랑도 전체가 이런 사람들의 집단이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착각이다. 어떤 집단이나 어떤 인물이 어떤 기준으로 부각되려면 그렇지 않은 인물들이 그 반대편에 항상 존재해야만 한다. 이완용이 없으면 신채호도 없다.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쓸 까닭이 없다. 모두가 현좌이고 충신이고 양장이며 용졸인데 뭣하러 현좌충신 양장용졸로 득실대는 《화랑세기》를 쓴단 말인가?"


김태식,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김영사, 2001) 중 프롤로그 '순국무사 화랑을 해체하며' 중 한 대목이다. 



이에서 보이는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쓸 까닭이 없다"는 구절이 애초엔 "화랑도 모두가 정말로 현좌충신이고 양장용졸이었다면 김대문은 그런 인물들로만 채운 《화랑세기》라는 열전을 미쳤다고 쓴단 말인가"였다.  


내가 이 얘기를 왜 굳이 하는가? 《삼국사기》에는 신라시대를 살다간 김대문이라는 사람이 그의 단행본 중 하나인 《화랑세기》에서 했다는 말 중에서도 굳이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賢佐忠臣]가 이(화랑)에서 우뚝 빼어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良將勇卒]이 이(화랑)에서 생겨났다"는 말을 인용했다고 했거니와, 《화랑세기》가 이미 일실(逸失)한 마당에, 이 구절을 접한 근현대 역사학도들이 너도나도 가릴 것 없이, 이런 말을 남긴 《화랑세기》는 화랑 출신 중에서도 그러한 현명한 재상과 충성스런 신하, 그리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만을 골라 열전으로 세운 충신 전기일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라진 《화랑세기》가 홀연히 출현한 지금에도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이영표의 그것을 능가하는 완연한 헛다리 짚기에 지나지 않는다. 첫째, 저런 말을 김대문이 남겼다는 《화랑세기》는 '花郞世記'라,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화랑을 역임한 사람들의 순차적인 전기'라는 뜻이거니와, 그 제목만으로도 벌써 신라본기 고구려본기 백제본기처럼 초대 이래 마지막까지 특정한 직위, 예컨대 왕 혹은 제후들의 순차적인 전기라는 의미이니, 아무렇게나 화랑 출신자들이라 해서 나열한 전기가 아닌 것이다. 세기(世記)라는 말은 본기(本記) 혹은 세가(世家)라는 말과 같다. 이 평범한 용어조차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연 눈치채지 못한 것이니, 이것이 《화랑세기》를 곡해한 제1의 원흉이다. 


둘째, 세기는 본기 혹은 세가인 까닭에 그러한 직책을 차례로 역임한 사람들은 여러 군상이 뒤죽박죽일 수밖에 없다. 신라본기를 보면 초대 혁거세 이래 마지막 경순왕에 이르기까지 56명에 달하는 왕이 있었으니, 개중에는 성군聖君도 있고 현군賢君도 있지만, 패악무도한 임금도 있고, 어려서 즉위해 아무 것도 못하고는 죽어간 애송이 왕도 있는 것이다. 백제본기와 고구려본기에 순차로 등장하는 왕들 역시 그러했다. 


자연 화랑들의 본기이자 세가인 '화랑세기' 역시 초대 화랑 이래 마지막 화랑에 이르기까지 이런 다양한 군상의 화랑들 열전이어야 한다. 이건 지금 홀연히 다시 출현한 《화랑세기》와는 전연 관계가 없다. 지극히 상식 수준의 추단만으로도 《화랑세기》에 등장할 화랑들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함에도 삼척동자도 간취하는 이런 특성을 정작 역사로 업을 삼는다는 자들(우리는 그들은 역사학자라 한다)만이 유독 그것을 몰라, 현좌충신 양장용졸 운운하는 구절이 《화랑세기》를 인용한  《삼국사기》에 보인다 해서, 이 말을 확대 왜곡하고는 《화랑세기》에는 현좌이면서 충신이고, 양장이면서 용졸인 신라 화랑이 그득할 것이라는 믿음은 단 한 순간도, 지금 이 순간에도 놓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화랑세기》를 망친 두 번째 원흉이다. 


셋째 원흉은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구별하지 못한 죄다. 기전체인 《삼국사기》를 구성하는 여러 편 중에서도 인물 전기인 열전이 정리한 인물 중에는 신라 화랑 출신이거나, 그렇게 추정되는 인물이 제법 있으니, 그런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현좌이며 충신이고, 양장이고 용졸이니, 김유신이 그러하고, 그의 조카 김반굴과 반굴의 아들 김령윤이 그러하며, 사다함이 그러하다. 실제 이들을 보면 용맹한 전사戰士들이다. 하지만 《삼국사기》가 정리한 신라 화랑들이 이런 인물 일색이라 해서, 《화랑세기》가 정리했을 신라 화랑들 역시 이런 인물들로 점철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위험천만하기 짝이 없다. 한데 그 위험천만한 생각들이 근현대 역사학 지난 100년을 정답처럼 군림하고 말았다. 


'현좌충신 양장용졸'은 김대문이 생각한 바람직한 화랑상(像)일 뿐이며, 실제 모든 신라 화랑이 저러했던 것은 단연코 아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김대문 자신이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저 말이 김부식으로 넘어오면서는 일대 변신을 꾀해, 김부식이 《삼국사기》 열전에 수록할 사람들을 추리는 기준이 되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 같은 현좌충신 양장용졸이라 해서, 그 맥락은 전연 달랐던 것이다. 


말한다. 


김대문이 말한 현좌충신 양장용졸과 김부식이 그것을 굳이 끄집어 낸 맥락은 전연 다르다. 이 다름을 인지하지 못한 데서 신라 화랑을 둘러싼 거대한 곡해가 빚어졌던 것이다. 김대문의 이데올로기와 김부식의 이데올로기, 이걸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은 똥과 된장을 구분치 못하는 일과 같다. 




아래 원고는 2010년 11월 6일 가브리엘관 109호에서 한국고대사탐구학회가 '필사본 <화랑세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주제로 개최한 그해 추계학술대회에 '욕망의 변주곡, 《화랑세기》'라는 제목을 발표한 글이며, 그해 이 학회 기관지인 《한국고대사탐구》 제6집에는 '‘世紀의 발견’, 『花郞世紀』'라는 제목으로 투고됐다. 이번에 순차로 연재하는 글은 개중에서도 학회 발표문을 토대로 하되, 오타를 바로잡거나 한자어를 한글병용으로 하는 수준에서 손봤음을 밝힌다. 



1. ‘괴물怪物’의 출현 


 역사는 두 개의 축을 갖는다. 둘 중 하나만 무너져도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소설’이 된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이다. 역사는 시간과 공간을 축으로 인간과 자연이 얽어내는 파노라마다. 시간 혹은 공간을 무시한 역사 구축은 이미 역사의 영역을 탈출해 신화, 혹은 판타지의 영역이 된다. 이런 점에서 작금 인기리에 방영한 MBC 사극 《선덕여왕》은 이 두 개의 축을 모두 붕괴한 토대에서 구축한 ‘소설’이요 판타지다. 


 우선 드라마는 공간을 무시한다. 예컨대 드라마 초창기에 진평왕의 쌍둥이 딸 중 동생으로 설정한 선덕은 아마도 지금의 중국 신장위구르자치구 타클라마칸 사막쯤으로 생각되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여기에서 온갖 간난을 겪는 것으로 설정한 점이 그것이다. 나아가 《선덕여왕》은 시간을 무시한다. 이 드라마를 엮어가는 주된 축 중 한 명인 김유신은 595년생임이 각종 기록에서 명백하며, 나아가 나중에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 김춘추는 604년생이지만, 이런 ‘시간’은 오직 9살 차이인 김유신과 김춘추 두 명의 관계에 대해서만 설득력을 지닐 뿐, 그 외 우수마발牛溲馬勃은 모조리 시간 무시다. 선덕에게 시종 맞서 권력욕의 화신처럼 그리는 미실美室은 드라마에서 10대 때 김유신이나 20대 때 김유신이나 똑같은 모습이다. 더불어 미실의 가장 주된 참모 역할을 한다고 묘사한 설원랑은 이 드라마의 원전 격인 《화랑세기》에 의하면 549년에 태어나 건복建福 23년, 즉, 606년 7월에는 향년 58세로 죽어 이미 퇴장해야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계속 생존했다. 문노라는 인물 또한 같은 《화랑세기》에는 설원랑과 같은 해에 저승길로 가거니와, 이 무렵 김유신은 12살에 지나지 않지만, 드라마는 이런 김유신이 청년이 되어서야 문노를 독화살에 맞아 죽은 것으로 처리해 퇴출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선덕여왕》은 사극이라면 으레 숙명과도 같은 논란, 즉, 드라마가 역사를 왜곡했느니 아니했느니 하는 논란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점이 나로서는 기이하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대하사극을 표방한 드라마는 언제나 이런 논란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드라마’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 것일까? 


  이 드라마는 이 괴물의 출현 없이는 태동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고 드라마 《선덕여왕》이 《화랑세기》라는 이 괴물을 충실히 재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선덕여왕》은 시간 무시, 공간 무시라는 기법을 통해 《화랑세기》를 파괴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드라마는 《화랑세기》를 벗어날 수는 없다. 언제나 《화랑세기》로 돌아온다. 그런 점에서 드라마 《선덕여왕》에 《화랑세기》는 족쇄다. 


 이 괴물은 여타 괴물이 그렇듯이, 그리고 봉준호가 탄생시킨 ‘한강 괴물’이 그랬듯이, 1989년에 홀연히 등장했다. 왜 홀연이라 하는가? 이름만 전해지다가, 혹은 그 편린 중 한두 조각만이 희미하게 전해지다가 갑자기 그 전모에 가까운 모습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홀연은 필연적으로 혼란을 낳는다. 


 일서(逸書)의 출현. 이런 사건은 늘 대하드라마가 역사 왜곡 논란이 휘말리듯이 ‘괴물’ 《화랑세기》 또한 텍스트 그 자체가 이미 출현과 더불어 거센 진위 논쟁에 휘말렸다. 이 논쟁은 그것이 출현한지 2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해결의 기미는 없다. 《화랑세기》라는 말은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에 보인다. 이에 이르기를 “김대문金大問은 본래 신라 귀문貴門의 자제로서 성덕왕聖德王 3년(704)에 한산주 도독이 되었으며 전기 몇 권을 지었다. 그가 쓴 《고승전高僧傳》, 《화랑세기花郞世記》, 《악본樂本》, 《한산기漢山記》가 아직도 남아 있다”고 했다. 이에 의한다면 《화랑세기》 외에도 여타 김대문의 저술은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인종 시대 무렵(1134)에도 남아있었던 듯하다. 


 더불어 《삼국사기》권제4 신라본기 4 진흥왕 37년(576) 조에서는 신라에 화랑 제도가 창설된 연원을 기술하는 와중에 金大問이 《花郞世記》에서 했다는 말로써 “어진 보필자와 충신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감한 병졸은 이로부터 생겼다”(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라고 하고, 같은 인용 구절이 같은 《삼국사기》 권제47 열전 제7 김흠운 열전에도 보인다. 


 이 외에도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더러 보이거니와, 《삼국사기》 권 제1 신라본기 제1 남해차차웅 조에 이르기를 “남해차차웅南解次次雄이 왕위에 올랐다. <차차웅을 자충(慈充)이라고도 한다. 金大問이 말했다. (차차웅은) 방언(方言)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이다. 무당은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받드는 까닭에 세상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공경하니 마침내 존장자尊長者를 일컬어 자충이라 했다”고 하며 이와 흡사한 언급이 《삼국유사》 기이편紀異篇 남해왕南解王 조에도 같은 김대문을 인용한 구절이 있다. 


 또 《삼국사기》 권 1 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條에서는 유리니사금儒理尼師今이 왕위에 올랐음을 언급하면서, 김대문의 말을 인용해 “이사금은 방언으로 잇금을 일컫는 말이다. 옛날에 남해南解가 장차 죽을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일러 말하기를 ‘내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 많은 이가 왕위를 이을지어다’고 했다. 그 뒤에 김씨 성 또한 일어나 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 불렀다”고 하고, 《삼국사기》 권 제3 신라본기 제3 눌지마립간 조에서는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왕위에 올랐다고 한 다음에 金大問의 말이라면서 “마립麻立은 방언에서 말뚝을 일컫는 말이다. 말뚝은 함조를 말하거니와 위계位階에 따라 설치됐다. 왕의 말뚝이 주(主)가 되고 신하의 말뚝은 그 아래에 배열되었기 때문에 이 때문에 (왕의) 명칭으로 삼았다”고 했다. 


 김대문에서의 인용은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제4 법흥왕 조에서 이 왕 15년(528)에 불교가 공인된 사실을 전하면서, 이를 마련한 그 유명한 사건, 즉, 이차돈의 순교를 전하거나와 《삼국사기》는 이것이 “金大問의 《계림잡전鷄林雜傳》에 의거한 것”이라고 했다. 이처럼 우리가 찾을 수 있는 김대문 혹은 《화랑세기》의 흔적이 많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삼국사기》에서 언급한 “아직도 남아있다”는 김대문의 저술은 《화랑세기》를 포함해 모조리 멸종됐다. 이렇게 멸종됐다는 그의 저술 중 홀연히 《화랑세기》가 출현했다는 데 이것이 어찌 ‘사건’이 되지 않겠으며 ‘괴물’이지 않겠는가? 



<일석 이희승>


내가 회고록 읽기를 좋아하는 편인데, 이런 글들을 훑다보면, 이런저런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접하게 되거니와, 근자에 한번 훑은 국어학자 일석(一石) 이희승(李熙昇·1896~1989) 자서전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 역시 그런 회로록 중 하나다. 내가 읽은 판본은 도서출판 선영사에서 2001년 11월 25일 1쇄가 나온 2016년 4월 20일 간행 그 재판이어니와, 그 원판은 이 책에 붙은 저자 서문에 의하면, 1975년 11월 8일에 시작해 이듬해 1월 26일까지 '나의 이력서'라는 제목 아래 《한국일보》에 연재한 글을 원바탕으로 삼고, 이후 "약간의 보충과 오기(誤記)가 뚜렷한 개소(個所)를 정정(訂正)하여" 1977년 한국능력개발사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생몰년에서 보듯이 94세로 장수한 일석의 그 긴 생평을 일석 자신이 담담히 정리했으니, 그 긴 생평만큼이나 이 한 편이 그대로 한국근현대사 단면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일석 이희승>


이에는 몇몇 나로서는 흥미로운 내용이 적지 않게 보이거니와, 해방 이전 이화여전 교수 재직 시절 일화도 개중 하나다. 일석이 지금의 이화여자대학교 전신인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하기는 1932년 4월. 해방 직전까지 이 대학 교수로 있었다. 그의 회고에 의하면 "(부임한) 그 당시 이화여전은 문과, 가사과, 음악과 등 3개 학과뿐으로 학생 수는 200명도 채 못 되었다"(102쪽)고 하며, 나아가 "정동 시절의 이화여전 교수진은 여자가 많았고 남자 교수는 몇 명 되지 않았다"고 한다. 남자로는 "문과에 월파 김상용과 한치진(철학), 김인영(성경), 그리고 나, 이렇게 넷뿐이었고, 가사과에 장기원, 김호직, 음악과에 성악가 안기영이 있었다. 상허 이태준은 나보다 2, 3년 뒤에 들어왔다"(105쪽)고 한다. 일석이 회고하는 상허(尙虛) 이태준(李泰俊·1904~?)은 이랬다.


"상허는 월파와는 달리 술은 그리 즐기지 않았으나 얼굴 모습이 유난히 준수한 사람이었다. 그의 문장은 섬세하고 깨끗해서 특히 여성 독자들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던 당대의 작가였다. 골동품 수집 취미에 탐닉했던 그는 진고개 골동품상에 자주 다녔는데, 그의 권유로 나와 월파도 한때 고미술에 취미를 붙였었다. 그는 좋은 물건을 발견할 때면 분수도 모르고 욕심을 냈고, 힘이 미치지 못하면 김활란 선생을 졸라 사들이곤 했다. 학교에 방 하나를 얻어 그렇게 사들인 물건들을 진열하곤 박물실이라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이화여대 박물관의 밑천이 된 것이다"(106쪽)


일석이 말하는 진고개란 지금의 서울 중구 충무로2가 일대를 말하는 곳으로, 남산 산줄기에 형성된 고갯길이다. 한자로는 니현(泥峴)이라고 했으니, 글자 그대로 비가 오면 진흙이 고통이었던 듯, 이 일대 남산골을 터전으로 삼은 가난한 선비들을 그들이 나막신을 신고는 딱딱 소리를 내며 다녔으므로, 이들은 남산골 딸깍발이 또는 남산골 샌님이라 부른 일이 많았다. 한데 일석에 따르면, 식민지시대엔 이 일대에 골동품상이 밀집한 듯하다. 지금 골동품상 거리라면 장안평과 인사동이 유명하나, 그땐 그랬나 보다. 이 일대를 이태준이 헤집고 다닌 모양이고, 분수에 넘치게 그에 탐닉했으며, 정 여의치 않으면 김활란 박사를 꼬드겨 본인이 탐내던 물건을 이화여전 이름으로 구입하게 했다고 하니, 이것이 종국에는 이화여대박물관 설립 뿌리가 되었다니, 혹 이대박물관을 가시는 분들은 그에서 상허의 체취를 느껴보기 바란다. 


<상허 이태준>


덧붙이건대 대학 부설 박물관 중에 별도 건물을 갖춘 시설 현황이라든가 컬렉션 규모와 질, 그리고 그 활용방법에서 이대박물관은 서울대박물관, 고려대박물관과 더불어 그 대표의 모범이라 할 한하다는 점을 특기해둔다.  




<화랑세기> 


《화랑세기》가 공개되었을 무렵, 저들 용어가 다시금 세간, 엄밀히는 고대사학계에 오르내렸다. 이들 용어는 《화랑세기》 곳곳에 등장하는 까닭이다. 이들은 실은 고려사를 무대로 하는 곳에 빈출한다. 《삼국사기》에는 단 한 번도 보이지 않고, 《삼국유사》에는 딱 두 군데만 등장하는 것으로 안다. 나아가 《해동고승전》에도 한군데 보이거니와, 그 등장 맥락이 《삼국유사》의 그것과 같다고 기억한다. 


그런 까닭에 《화랑세기》 출현 이전에는 이것이 고려시대 봉작인데, 시대를 거꾸러 거슬러 올라가 신라시대에 붙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제법 많았다. 그런 의심이 이런 용어로 넘쳐나는 《화랑세기》가 출현하면서, 텍스트 자체가 위작이라는 의심으로 번지기도 했다. 내 기억에 이들이 대표하는 용어 문제로 가장 많은 심혈을 기울여 《화랑세기》 가짜론을 설파한 이가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석·박사를 하고 지금은 부산외국어대 교수로 재직 중인 권덕영이다. 


하지만 권덕영은 틀렸다. 《화랑세기》 가짜론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다. 그 논거가 다 틀렸다는 뜻이다. 저들 봉작은 신라시대에 엄연히 존재했다. 그것도 이미 상고기 이래 있었다.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데서, 《삼국유사》에 아주 드물게 출현한다 해서, 그런 용어 혹은 개념이 삼국시대에 없었을 것이라는 추정 혹은 확신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근자에는 지금 신라사학회장으로 신라사 전공인 박남수가 《화랑세기》에 근대 일본 스포츠 용어가 보인다는 점을 《화랑세기》 가짜론의 근거로 제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거 아주 허무한 소리다. 그 텍스트에 예컨대 박남수는 '검도劍道'라는 용어인가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삼은 것으로 보이거니와, 이는 이종욱 《화랑세기》 교감본과 그 번역본을 보고 하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화랑세기》 원문을 보면 이런 용어 자체가 없다.


<상장돈장>


본론으로 돌아가 궁주宮主 원주院主 전주殿主 따위는 적어도 고려시대 개념을 보면, 후비后妃 봉작들이다. 임금의 여인들인 정비와 후궁들은 궁궐 안에 각기 거처가 있기 마련이다. 이건 고려시대만이 아니라, 신라시대에도 그랬고, 조선시대에도 그랬다. 한데 이런 건물채도 주인따라 등급이 있기 마련이다. 고려시대를 통괄하면 대체로 정궁正宮 주인은 궁주라 했고, 그 아래 등급이 떨어지는 후궁들이 사는 곳을 원주니, 전주 따위로 구별해서 불렀다.


《화랑세기》에는 후비만이 아니라 왕자들에 대해서도 각종 봉작이 있고, 그에 따른 다른 운용 시스템이 보인다. 예컨대 임금의 후궁이 낳은 아들, 곧 조선시대 개념으로 보면 정비 소생인 대군大君에 견주어 그냥 군君으로 일컬은 서자들은 전군殿君이라 했다. 한데 《화랑세기》를 보면 이들 후비와 왕자들의 운용 원리를 보면, 조작 불가능이다. 죽었다 깨나봐라 너희가 만들 수 있는지. 뭐, 그러니깐 박창화 천재론이 나오긴 하더라. 그는 천재라서 못하는 일이 없다고 말이다.


내가 《화랑세기》를 정리할 적에, 이런 후비 봉작제도를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어, 고려시대 관련 연구성과를 검출하니, 형편없었다. 관련 연구는 태부족이었고, 그나마 있는 것들도 암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궁주만 해도, 시대를 통괄해서 정궁에 내리는 봉작 같지만, 이것도 넘나듦이 있어 소위 몽골간섭기에는 일대 변화를 불러온다. 원주 역시 그랬다. 기존 궁주 원주 따위를 초월하는 원나라 공주가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남당 박창화>


한데 이런 변화 양상이 고려사학계에서는 전연 정리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런 변화양상은 고려사 후비열전을 봐도 보이지 않는다. 《고려사》, 《고려사절요》를 통독해야만 보인다. 그것도 미친 듯이, 그리고 세심히 봐야 그 실체와 그 변화양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 편찬자들이 우리의 구미에 맞게 기록을 정리한 것은 아니다. 그들이 흘려버린 저층을 파고 들어야 한다. 그렇게 정리 추출한 것 중 일부를 나는 이곳저곳 논문 형태로 정리하기도 했으니, 그 선하先河를 이룬 것이 아마 2002년 혹은 2003년인가 하는데, 국립민속박물관 잡지 《민속학》에다 싸지른 사금갑 설화 분석 논문이었을 것이다. 


이후 궁주에 대한 연구성과 몇편이 제출된 것으로 안다. 그런 저들은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단언커니와 모조리 《화랑세기》  영향이다. 아무도 《화랑세기》를 봤다는 말은 안하지만, 아무도 《화랑세기》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하지만, 설혹 그들 자신이 《화랑세기》를 의식하지 않았고, 그것을 보지 않았다고 해도, 궁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난 이유는 《화랑세기》 없이는 설명하지 못한다.


한때는 저런 양태가 몹시도 비도덕이라 생각했지만, 뭐 이제는 그런갑다 한다. 언제나 말하듯이 《화랑세기》는 그것이 진서건 위서건 관계없이 이제는 피할 수 없는 핵우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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