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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경복궁을 횡단해 건추문 쪽으로 나가다 보니, 저 은행나무 이파리가 단 한 개도 남아있지 않음을 봤다. 이 은행나무는 단풍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이번 가을은 다른 데 은행나무에 정신이 팔려 전연 이곳 단풍은 눈길 한 번 주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서울에 서리가 내리기 전에 이미 은행은 단풍이 되어 지상으로 꼬꾸라졌다. 상엽霜葉, 즉, 서리맞은 단풍이라는 말은 무색하니, 여태까지 죽 그랬다. 



그 인근 주택가를 지나다 보니 단풍나무 단풍이 한창이다. 조만간 지리라. 서리가 오기 전에 지리라. 이때까지 죽 그랬다. 서리 맞아 생긴 단풍은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는 모든 단풍은 서리가 오기 한창 전에 이미 단풍 되어 낙엽落葉로 사라져 갔으니깐 말이다. 



그러고 보니 화려한 단풍을 묘사하는 절창 중의 절창, 다시 말해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서리맞은 단풍 2월 봄꽃보다 붉다는 말은 도대체가 어불성설임을 안다. 물론 채 떨어지지 않은 단풍이 가끔 서리를 맞기도 하나, 그렇게 서리맞은 단풍이 서리 때문에 단풍이 든 것도 아니요, 이미 단풍인 상태에서 서리를 맞은 것이니, 분명 저 표현은 문제가 있다. 

저 말을 <산행(山行)'이라는 시에서 내뱉은 당말 시인 두목(杜牧)은 이걸 몰랐을까? 그가 바보가 아닌 이상 알았을 것이요, 막상 저 말이 일대 유행했을 적에는 두목을 가리켜 서리 맞은 단풍이 말이 되느냐 하는 핀잔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뭐, 문학 혹은 문학적 감수성이 과학 혹은 엄격한 절기와는 다르다면 할 말이 없다만, 그럼에도 존재할 가능성이 제로인 서리맞은 단풍이라는 상상의 산물이 가을 단풍의 실제를 더욱 화려찬란하게 포장했으니, 참말로 기구한 운명일 수밖에 없다.  

단풍이야 서리를 맞아 들건, 그 전에 들어 떨어지건 무슨 상관이랴? 

붉기만 하다면, 그리하여 그 붉음이 내 단심丹心과 합심한다면야 그 비롯함이 서리건 아니건 무에 중요하겠는가? 피장파장 똥끼나밑끼나일 뿐....

서리맞은 단풍이야 그렇고, 서리맞은 배추이파리는 내가 무지막지하게 봤다. 

포대화상(布帒和尙)에 관한 단편 하나를 이 블로그에서 나는 '포대화상의 시대'라는 제하 글로써 간략히 초한 적 있거니와, 그에서 나는 한반도 포대화상과 관련한 증언으로 가장 빠른 글 중 하나로 이규보를 언급했으니, 당시엔 나는 이 글을 직접 인용하지 않았으나, 오늘 이 자리에서는 그것을 직접 보기로 한다. 그 글은 이규보(李奎報·1169∼1241)의 방대한 문집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권 제19 찬(贊) 중 하나로 실렸으니, '포대화상찬(布袋和尙贊)'이라는 글이 그것이다. 포대화상찬이란 포대화상을 상찬, 혹은 칭송한 글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포대화상의 생태적 특징과 그것이 지닌 특성 혹은 장점이 무엇이었는지를 파악한다. 





옮김은 한국고전번역원 제공본을 기본으로 삼아 보면 다음과 같다. 일부 대목에서는 문맥이 자연스럽지 않는 느낌이 있다.  


갈무리한 바 무엇인지

눈 감고 앉았으니 

생각 혹은 상상하는지 

주머니 차서 무거우니 

챙긴 건 어찌 그리 많은지 

시방세계 온갖 미생물까지  

갈무리하고 챙긴 것으로 베풀어 구하니 

생각이 바야흐로 이에 이르러 

눈 감고 상상하며 생각하는가 


布袋和尙贊

腹大而膰。所蓄維何。交睫而坐。思耶想耶。囊盈而重。所貯何多。方將囊括。十方蠢蠢蚩蚩。以所蓄所貯。施之度之。念方至此。閉目想思者乎。


그 펑퍼짐한 생김새가 자비 베풂을 내세우는 특장은 현대 불교계에 통용하는 그 포대화상과 완연 일치함을 본다.  

광주광역 광산 월봉서원 뒤편 고봉 기대승 부부묘



어우담(於于談) 유몽인(柳夢寅·1559∼1623)이 그의 야담 필기류 집성집인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한 증언 중 하나다. 


문장을 하는 선비는 간혹 누가 그 문장의 문제점을 말하면 기뻐하면서 듣기를 즐겨하여 물이 흐르듯 그것을 고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발끈 화를 내면서 스스로 그 문제점을 알면서도 일부러 고치지 않는 사람이 있다. 고봉 기대승은 문장으로 자부해서 다른 사람에게 굽히지 않았다. 지제교로서 왕명을 받들어 지어 올리는 시문에서 승정원 승지가 그 문제점을 표시하여 지적하면 그것을 가져온 아랫사람에게 화를 내며 꾸짖고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았다.


文章之士, 或言其文之疵病, 則有喜而樂聞, 改之如流者, 或咈然而怒, 自知其病而不改者. 奇高峰大升, 自負其文章, 不肯下人. 以知製敎, 進應敎之文, 政院承旨, 付標指其疵, 怒叱下吏, 不改一字. (柳夢寅, 「於于野談」; 洪萬宗 著, 허권수∙윤호진 교정, 原文 詩話叢林 卷秋, 까치, 1993, 167쪽)


고봉 기대승은 그 생몰년(1527~1572)으로 고려할 때, 어우담이 이를 직접 본 증언일 가능성은 없다. 그렇지만, 고봉을 직접 겪은 관료들은 많았을 것이로되, 그들에게서 채록한 전언일 것이라 나름 신빙성이 높다 봐야겠다. 나아가 동시대 다른 증언을 봐도 고봉은 건방짐과 자부심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긴 그런 담대함이 당대의 석유碩儒 퇴계 이황과 한판 붙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그를 향한 직접 비난도 당연히 많았으니, 율곡 이이 같은 이는 고봉을 아주 하찮게 보는 직접 글을 남기기도 했다. 


본문에서 말하는 지제고란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 비슷하고, 응교란 간단히 말해 연설문 혹은 명령문이다. 


이 유습이 어떤 글쟁이한테는 현대에도 강고하거니와, 내가 아는 어떤 인문학도 중에는 본인이 쓴 글이라면 조사 하나 손 못대게 하는 이가 있다. 이를 꼬장꼬장함을 말해주는 증좌라 해서 존경의 念을 바치는 일이 더러 있더라만, 글쎄, 내가 보니 그가 쓴 글을 글이 아니요 강바닥에서 막 긁어낸 자갈돌 같더라. 



임진강변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들이 나한테 자주 묻곤 하는 말이, 저기가 북한인가라는 물음이다. 내 대답은 간단하다. "남한 땅인지 북한땅인지 구별하는 방법은 실로 간단하다. 나무 한 그루 없으면 북한 땅이다." 

이런 사정은 압록강변, 두만강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야 두 강이 중국 혹은 러시아와 북한 국경인 까닭에, 어느 곳이 북한 땅인지 견줄 필요조차 없지만, 역시 이곳에서 봐도 북녘 땅 산에는 나무 한 그루 온전히 자라는 데가 없다. 남북화해 국면에 따라 남북 협력 방안이 다양하게 논의되는 형국이거니와, 개중에서도 가장 절박한 곳이 철도와 산림이라 해서, 이 분야에 집중하는 까닭이 그 완비 정비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성 인근 헐벗은 산


북한의 저 앙상한 산림 사정이 우리 역시 시계추를 거꾸로 돌려 40년 전만 가도 마찬가지다. 온산이 민둥산 붉은산이라, 비가 조금만 와도 사태가 걸핏하면 났고, 그에서 강물에 씻긴 흙이 쌓이는 바람에 평야지대에서는 하상河上이 높아쳐 또 걸핏하면 강물이 범람했다. 한강변 서울만 해도 80년대 전두환 정권에 의한 치수 성공 이전까지 언제나 홍수가 범람한 곳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런 산림 사정은 언제 어떻게 비롯하는가? 내가 각종 자료를 검토하건대 17~18세기 교체 무렵에 한반도는 급격한 산림 파괴가 일어났다. 서력기원 절대 연대로 환산하면 1700년대가 시작할 무렵, 한반도는 전체가 민둥산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그 결정적인 근거 중 하나로 내가 늘 애용하면서 끌어다대는 대목이 다음이다. 

옛날에 나의 선친께서 계미년(1703) 연간에 강릉부사로 부임하셨는데 당시 내 나이 14세였다. 부모님의 행차를 따라가느라 운교역에서 강릉부 서쪽 대관령에 이르렀다. 평지나 높은 고개 따질 것 없이 수많은 나무 사이로 길이 나 있고, 올려다봐도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한 채 무려 나홀 동안이나 길을 갔었다. 그러나 수십 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 농경지가 되었고, 촌락이 서로 이어져서 산에는 한 치 크기의 나무도 안 남아 있었다. 이것으로 미루어볼 때, 다른 고을 또한 같은 실정임을 알 수 있다. 태평성대라 백성들의 수가 점차 불어나는 만큼 산천도 조금씩 피해를 입는 정황이 엿보인다. 옛날 인삼이 나던 곳은 모두 대관령 서쪽 깊은 산골짜기였으나 산은 벌거벗고 들판은 불에 타는 바람에 인삼의 소출이 점차 드물어졌다.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어날 때마다 흙이 한강으로 유입되어 한강의 수위가 점차 얕아지고 있다.(안대회·임영길 외 옮김 《완역정본 택리지》, 휴머니스트, 2018, 81쪽) 택리지 팔도론 강원도편에 보이는 말이다. 

1690년에 태어나 1756년에 죽은 이중환의 《택리지擇理志》 중 조선 팔도별 인문지리 총람인 '팔도론八道論' 중 '강원도' 편에 보이는 말이다. 이중환이 《택리지擇理志》 를 완성한 때가 1752년 무렵임을 고려할 때, 그리고 그가 14살 때는 산림이 울창했다는 증언을 보탤 적에, 전국적인 산림파괴가 1710~40년대 무렵 급겹하게 진행된 일임을 추찰한다. 이 무렵이 역사학계 일부에서는 소빙하기였네 하는 주장을 하는 시기인 것으로 알거니와, 이 역시 고려할 사안이기는 할 것이로대, 그 원인으로 이중환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꼽았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철원 지역 북한의 헐벗은 산


저 무렵이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조선은 이미 그에서 백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이 기간 장기간 평화가 지속하거니와, 비록 정치권에서는 붕당 정치에 따른 부침이 극심하기는 했지만, 특히 근 반세기간 계속한 숙종시대는 외란이 없는 시기였다. 이 숙종 연간에 인구가 급격히 불어난 것이다. 좁은 땅에 급격한 인구 증가는 재앙을 초래했다. 먹고 살려니 산림을 개간하는 수밖에 없었다. 많은 이가 온돌 보급을 이야기하나, 내 보기엔 소빙기니 온돌이니 하는 요인은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인구 폭발기였다. 

나아가 이 짧은 글에는 그것이 초래한 재앙을 생생히 증언한다. 다른 무엇보다 하상 상승에 따른 범람이 중대하다. 이 하상 범람은 후대에는 충적대지 발달로 귀결한다. 







 




  1. 아파트담보 2018.10.24 21:18 신고

    인구증가로 본 18세기 로맨틱 조선~

조선후기 영·정조 시대에 이른바 북학파(北學派) 일원으로 중국에 다섯 차례나 다녀왔으며, 그 오야붕 연암 박지원을 추종한 이른바 ‘연암그룹’ 일원이기도 한 이희경(李喜經·1745~1805 이후)이란 사람이 남긴 잡글 모음 필기류인 《설수외사(雪岫外史)》란 책에 나오는 일화다. 




(한양도성) 서문(西門) 밖에 서른이 넘도록 개가(改嫁)하지 않은 과부가 있었으니, 그 이웃에는 아내 없는 홀아비가 살고 있었다. 사내가 결혼하자 아무리 꼬드겨도 여자는 듣지 않았다. 이 때문에 마을에서 그녀를 정조가 있다고 해서 정려문을 세워주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둥이 치면서 세찬 비가 내리더니 여자 집에 벼락이 쳤다. 이웃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서 보니 집은 전과 같이 온전했지만 남녀가 부둥켜안은 채 쓰러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정녀로 소문난 그 여자와 이웃집 홀아비가 한창 잠자리를 하다가 번개가 갑자기 방에 내리치자 남녀가 모두 겁에 질려 기겁한 것이다. 이웃집 사람이 오줌에 약을 타서 먹이자 한참만에야 깨어났다. (진재교 外 옮김, 《설수외사(雪岫外史)》,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1.2, 19쪽) 



이 일화가 주는 교훈은 간단하다. 이르노니, 천둥벼락 치는 날엔 몰래 여자를 만나지 마라. 아님, 피뢰침 시설 잘 완비한 호텔이나 모텔에서 만나든가... 


아울러 위 이야기를 통해 우리는 요즘 한문학계를 중심으로 한창 논의가 활발한 이른바 ‘열녀의 탄생’이라는 그 허망한 보기를 알 수 있거니와, 그에 더불어 벼락 맞고 기절한 사람에게 쓴 약이 '오줌'이라는 사실도 확인하는 부수입을 얻는다. 오줌은 응급처치약이기도 했다.  


덧붙이건대, 편의상 두 사람 행동을 '바람'이라 했지만, 그것은 지극한 인간의 정리 그 발로였으며, 자연스런 행동이었다. 다만, 이 일화를 수록한 까닭은 소문에는 열녀라는 평판이 자자한 여인에 대한 조롱이다. 

또 하나, 저 일화 소재 혹은 배경이 천둥 번개라, 이에 얽힌 경험이 있다. 천둥 번개...난 이걸 찍는 방법을 모른다. 한 번도 그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언제런가? 터키로 가족 여행을 간 적 있다. 그때 안탈랴인지 어디에 숙소를 잡았는데 밤인지 새벽에 천둥번개가 쳤다. 저 멀리 하늘을 보니 번쩍번쩍이라, 저거 한 번 찍어볼끼라고 카메라 매고 해변으로 나갔다. 경험이 없으니, 이래저래 버벅였다고 기억한다.  TV 모드로 갖다놓고, 연사 촬영 모드로 변환은 하고 기다린 듯한데, 니미럴....번개가 언제 칠 줄 모르니, 방법이 없었다. 다시 그런 기횔 만나면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번개 맞아 죽거나, 번개가 나한테 잡아먹히거나. 


  1. 아파트담보 2018.10.22 20:23 신고

    ㅎㅎㅎㅎㅎ

연암 박지원...조선후기 영정조 시대 재야 문단의 영수지만, 실은 노론 적통에 재산 졸라리 많은 부자요 권력자였다. 뭐, 과거로 출사하는 길을 포기하고, 그러면서도 안의현감인지는 잘해 잡수시면서, 박제가 놀러 오니 안의현에서 관리하는 기생 중에서도 가장 앳된 애를 골라다 수청 들게 해 주는가 했으니, 이런 식으로 수하엔 말 잘 들을 수밖에 없는 또릿한 똘마니들 몇몇 거느리고 재야를 호령했거니와, 박제가 말고도 유득공도 있었다. 나이도 젤로 많고, 그 자신은 적통이지만, 똘마니들은 다 서출이라, 대장 노릇할 수밖에 없었으니, 그럼에도 저이를 높이쳐야 하는 까닭은 그 속내가 무엇이었건, 그래도 저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인간 대접했다는 점이다. 뭐 이런 동호회 그룹을 요새는 백탑 근처에서 많이 놀았다 해서 백탑파 그룹이라 하는 모양이다. 





한데 이런 연암으로서도 자존심 왕창 상하는 일이 있었으니, 그 똘마니 시다들이 모조리 중국 가서 선진문물 맛보고 온 데다 그걸 기초로 《북학의》니 하는 책 먼저 내서 왕창 성공을 거두었는데, 정작 오야붕인 자신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니, 그래서 할 수 없이 본인도 나중에 연행길 나서는 육촌형님인지 쫄라서 쫄래쫄래 종사관이라는 어정쩡한 이름으로 따라나선다. 


부담이 컸다. 엄청난 부담이었다. 왜인가? 이미 먼저 다녀온 박제가 유득공은 물론이요, 그 선배들이 기라성 같은 연행록을 냈기 때문이다. 늦게 갔으니, 그들을 모조리 뛰어넘어야 했다. 


그의 《열하일기》는 그래서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고충이 토로한 기행문이다. 이 《열하일기》를 대할 적에 나는 그의 이런 부담감을 고려해야 한다고 믿는다. 한데 이런 그에게 천만다행인 점은 《열하일기》로 전대를 모조리 갈아 엎었고, 후대에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품이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열하일기》는 글자 그대로 선풍이었다. 대성공이었다. 다만, 이 때문에 그에 구사한 문체가 순정하지 못하다 해서 정조한테 쿠사리 쫑크 먹고 협박까지 받는 처지에 내몰렸지만, 그는 알았다. 정조가 그런 일로 사람을 죽이거나 유배에 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조는 성질이 더럽고 욱하면서 걸핏하면 화를 내곤 했지만, 그는 역시 호학의 군주요, 그런 까닭에 재목들은 잘 알아보았으니, 그러면서도 내가 저런 연암 같은 놈 유배 보내거나 죽여 역사의 오점을 남길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연암은 참말로 시대를 잘 만났다. 

연암처럼 공식 사절단 일원이 아니면서, 문물 맛보러 가는 사람들한테는 하나의 강박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문명으로 이름 떨치는 한 놈쯤은 사귀어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동아시아 세계의 간판급 주자라는 점을 각인해야 했다. 이를 위해 이들은 대개 그때까지 자신이 지은 시문 중에서도 짱꼴라들한테 내놓아서 부끄럽지 않은 것을 골라 여러 장 베껴가야 했다. 이걸 내밀며 나 이런 사람이요라고 소개하고, 그런 공작이 성공하면 "아! 동방에 이런 군자도 있었네"라는 소리 듣기 십상이니, 이런 방식으로 연암보다 후대에 대성공을 획책한 자가 추사 김정희다. 


그렇다면 연암은 무엇을 가져갔는가? 자기 자랑할 글을 한 편 골랐으니, 이것이 바로 아래 내가 2006년 기사에서 소개한 누이 제문이다. 이 제문은 그야말로 명문 중의 명문인데, 하필 연암이 이 글을 골라 베껴 간 까닭이 바로 이 정도 글이면 중국 식자층에서 뻑 갈 것이라 확신한 까닭이다.  


북역본 열하일기. 헌책방에 나온 것을 내가 쌔벼왔다.



<산문으로 읽는 연암 박지원>

2006.04.05 15:36:30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강가에 말을 세우고 멀리 바라보니 붉은 명정(銘旌)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는 날 쪽진 머리 같았고 강물 빛은 당시의 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수채화 같이 명징(明澄)하면서도 레퀴엠만큼 장중하다. 먼저 세상을 등진  손윗누이를 실은 상여가 배에 실려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이렇게 읊고는 다시 노래한다.


"떠나는 이 정녕코 다시 오마 기약하지만/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  적시거늘/이 외배 지금 가면 언제 돌아오리/보내는 자 쓸쓸히 강가에서 돌아가네."


다시 돌아온다 약속하지만, 그 떠남이 죽음이며, 그가 떠나는 길이 상여이고 보면 어찌 떠난 자가 돌아오겠는가? 


300자에도 모자라는 이 짧은 만가(輓歌)에서도 왜 연암(燕巖)인지가 드러난다.


연암을 중점적으로 공부하는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박희병 교수는 이렇게 묻는다.


"이런 글을 명문이라 하지 않는다면 대체 어떤 글을 명문이라 할 것인가?"


하지만 이 글을 강평한 그의 문하생 청장관(靑莊館)  이덕무(李德懋.1741-1793)도 만만치는 않다.


"지극히 작은 겨자씨 안에 수미산(須彌山)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37세가 된 영조 37년(1773) 무렵, 박지원(朴趾源)은 이덕무 등과 함께 통행금지가 내려진 밤 12시가 넘어 운종가(雲從街)로 나아가 종각(鍾閣) 아래서 달빛을 받으며 거닐다가 수표교(水標橋)에 이르러 다리를 죽 뻗어 걸치고는 야경을 감상했다.


"개구리 소리는 완악한 백성들이 아둔한 고을 원한테 몰려가 와글와글 소(訴)를 제기하는 듯하고, 매미소리는 엄하게 공부시키는 글방에서 정한 날짜에  글을  외는 시험을 보는 것만 같고, 닭의 소리는 임금에게 간언하는 일을 자기의 소임으로 여기는 한 강개한 선배의 목소리만 같았다."


절친하게 지내던 석치(石癡) 정철조(鄭喆祚.1730-72)가 죽었다. 당파로는 소북(小北)이며 남인(南人) 계열 이가환(李家煥)의 처남이다. 문과에 급제하고 지평(持平) 정언(正言)과 같은 간관직에 있었으니 친구만큼이나 적도 많았다.


이에 그의 죽음을 두고 연암은 이런 제문(祭文)을 지었다.


"석치에게 원한이 있던 자들은 평소 석치더러 병들어 죽어버려라고 저주를 퍼붓곤 했거늘 이제 석치가 죽었으니 그 원한을 갚은 셈이다. 죽음보다 더한 벌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는 한편) 세상에는 참으로 삶을 한낱 꿈으로 여기며  이  세상을 노니는 사람도 있거늘 그런 사람이 석치가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면 껄껄 웃으며 '진(眞)으로 돌아갔구먼'이라 말할 텐데, 하도 크게 웃어 입안에 머금은 밥알은 벌처럼 날고 갓끈은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지고 말테지."


사람이 죽는 일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고 생각해 부인의 죽음에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는 장자(莊子)의 우화를 빌려 연암은 석치의 죽음을 표현하고 있다.


'연암을 읽는다'(돌베개)는 박지원을 영문학의 셰익스피어나  독문학의  괴테에 비견하는 한국문학의 대문호로 간주하는 박희병 교수가 그의 산문 20편 가량을 골라 우리가 왜 연암을 다시금 봐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말로만 "연암! 연암!"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를 외면하는 현재의 우리에 대한 저돌이기도 하다. 연암의 문학이 이토록 천의무봉(天衣無縫)한데, 어찌하여 당신들은 이걸 모르느냐는 박 교수의 분통이 느껴진다. 464쪽. 1만5천원.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1. 연건동거사 2018.10.21 19:57 신고

    이런 심리는 2018년 오늘날도 한반도에 사는 식자층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닙니다. 어쩌면 한국사가 존재하는 한 영원히 계속될지도.

  2. 2018.10.22 14:32

    비밀댓글입니다

식민지시대 조선 땅 문화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명이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가만...한자 표기가 맞는지 자신이 없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 친구 1927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부임해 1940년인지 강경여고로 옮기기까지 이 학교에서 죽 생활하면서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공주 일대 고분을 무허가로 천기 가까이 도굴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이 벽화분인 송산리 6호분 도굴사건이다. 


공주고등학교 발간 <공주고60년사>



2000년 무렵,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적이 있다. 가루베에 대해서는 공주 지역 일부 연구자가 學的으로 주목한 적이 있으나 당시까진 글다운 글이 없었다. 그나마 풍문에 의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개뼉다귀냐?


가루베는 일본 제국 패망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 미에현인지 어디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1970년인지, 69년인지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직전에 죽었다. 그가 죽은 직후 그의 글을 모은 유작이 단행본 2권으로 나왔는데 이것이 그의 연구를 위한 제1의 문헌이다. 


한데 이에 수록한 글이라든가 식민지시대 신문 잡지 등등을 뒤져보면 그의 조선 행적이 더러 보이기는 한다. 이 중에서도 그가 애초에는 평양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공주에 입성하는 장면을 자못 비장하게 그려놓은 글이 있거니와, 참으로 잘 쓴 小文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당시 내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고리로 삼은 것이 바로 공주고등학교 敎史였다. 공주고보 후신인 공주고 역사를 정리한 그 교사에는 무엇인가 그와 관련한 행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공주고 정도면 교사도 틀림없이 여러 번 나왔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데 이를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그 무렵 공주에 들렀을 때다. 아마도 대통사지 인근, 혹은 공주고 근처였다고 기억하는데 거기에 헌책방 하나가 있었다. 나는 헌책방 다니기를 좋아하거니와, 무엇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케케한 냄새와 공기가 좋다. 무료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 헌책방처럼 멍 때리기 좋은 데도 없다. 그날도 이런저런 구경 삼아 훑어보는데, 내가 관심 있는 분야로 국한하자면, 이곳이 아무래도 공주라 그런지 공주지역 발굴보고서가 많았다.   


이날 이 헌책방에서 두 가지 중대한 자료를 구했으니, 하나는 정확한 책 제목이 지금 지금은 기억나지 않으나,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당시 이름이 바뀌었나 모르겠다) 사학과 교수 학산 이인영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만든 두툼한 한국사 개설이었으니, 그에는 손진태 서문이 붙었고, 집필에 참여한 제자들로는 손보기와 한우근, 김성준 등등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희귀본으로 분류되거니와, 한데 이 책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공주고 교사敎史였다. 그런 교사로 2종인가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0년사와 80년사. 가루베 행적이 있다면 《공주고60년사》가 나을 듯했다. 왜냐? 이에는 가루베를 기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대강 펼쳐보니 이 교사에는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의 회고담이 꽤 있었다. 그것을 대강 훑어보니 아! 이럴 수가? 온통 가루베 얘기였다. 그리고 역대 교사 명단을 보니 역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본국으로 귀환한 가루베는 1969년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이 귀국 장면이 가루베의 글에 보이는데, 강경여고 제자들이 공항으로 마중나온 사실을 감격스레 그려놓았다. 이 때 한국 여행에서 가루베는 명지대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당시 나는 그가 왜 명지대에서 강연을 했을까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왜???? 왜????? 왜???? 


이를 나는 공주고보 교사를 보고 알았다. 명지대 설립자는 공주고보 5회인지 6회였거니와 그가 바로 가루베의 제자였다.


그의 행적에서 참으로 수상쩍은 또 다른 대목은 이런 그가 1940년 강경여고로 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궁금증을 당시 나는 강경여고 교사를 찾아서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작업도 이내 흐지부지되어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령왕릉 발견 30주년을 맞아 우리 공장에서 그 특집을 기획하고, 내가 15회 분량인가를 집필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직후 단행본을 준비하면서 그와 관련한 자료조사를 더했으니, 그때 조사성과가 근자 《직설 무령왕릉》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이다. 


저 공주교보 60년사는 그때 내가 무령왕릉 특집을 비롯해 더러 인용하면서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이후 다른 사람들의 관련 글을 보니, 이 교사가 빠지지 않고 인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역사를 쓸 적에 교사가 그만큼 요긴하다. 


내가 특집과 책을 쓸 때 참고한 가루베 관련 책 두 종은 두번째 첨부사진이니, 저 자료집을 그때만 해도 나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을 이용했으니, 지금 내 서재 있는 저들은 현재 일본 규슈에 안식년을 보내는 대전대 이한상 교수가 마침 그곳 헌책방에 들렀다가 발견하고는 나한테 요긴하리라 해서 사서 일본에서 발송해온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교수께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다. 

 


가루베 지온






지난 10일, 민속학 분야 독보의 위치를 구축한 도서출판 민속원 홍기원 창업주 겸 회장이 타계했다. 조문을 이튿날 받기 시작한다 해서 11일 저녁 나는 적십자병원에 차린 빈소로 조문을 갔다. 고인과는 직접 인연이 거의 없다시피 하나, 그 장남으로 민속원을 물려받아 운영 중인 홍종화 사장과는 친분이 남다른 데다, 그것이 민속원 그 자체에 대한 예의 표시라 생각한다. 저녁 약속으로 좀 늦은 시간이었으니, 빈소엔 홍 사장과 친분이 남다른 동료 출판인, 그리고 민속원과 홍 회장한테 음덕을 입은 역사학도들이 삼삼오오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이었다. 


방선주 박사



중앙일보 북한 전문기자 출신인 정창현 형은 어부인과 함께 왔다가, 어이된 셈인지 나를 보자마자 자리를 일어난다. 다른 일정이 있단다. "세상도 바뀌었는데, 승님도 한 자리 제대로 찾아보슈"라고 인사를 건네고 앉아 도서출판 선인 대표 윤관백, 국사편찬위 편사연구관 김광운, 율 브린너를 연상케 하는 빡빡이 도서출판 학고방 대표 하운근 형 등과 오랜만에 만나 이런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그 자리서 관백 형이 보도자료 비스무리한 서류 한 뭉치를 넘겨주는데 보니, 북조선실록인지 뭔지 하는 자료집 마흔권짜리를 냈다면서, 곧 출판기념회를 하니 기사 잘 써 달래서 대뜸 "또 안 팔리는 책 내는구만"하고 말았다. 


앞자리에 광운 형이 앉아서인지 모르나, 갑자기 방선주 박사 근황이 궁금했다. 연세로 보아 생존해 계실까도 의심스러웠으나, 부고를 접한 적이 없으니, 적이나 궁금했으니, 그리하여 광운 형한테 방 박사 요즘 어찌 지내시는지 물었더니, 옆자리 있던 관백 형이 대뜸 "우리가 방 박사님 저작집 세 권 냈어. 출판기념회 내일 이화여대에서 해" 하는 거 아닌가? 엥? 무슨 소리여? 근데 왜 연락을 안줘 하는 둥의 얘기가 오가는데, 광운 형이 상지대 이사장 이만열 선생과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를 열어준다. 보니, 이만열 선생이 내일 방 박사 출판기념회에서 참석한다는 내용이었다. 


듣자니, 건강은 안 좋으신 편이지만, 내일 출판기념회에 직접 참석하신단다. 잘 됐다 싶었다. 이튿날 아침 출근하자마자 학술 담당하는 박상현 차장한테 출판기념회 시간과 장소를 알려주고는 현장 취재를 부탁했다. 다행히 그 시간에 특별히 중요한 일정이 없다 해서, 박 차장이 직접 현장을 갔으니, 식이 끝날 무렵 박 차장한테 카톡이 왔다. 출판기념회 소식과 방 박사 인터뷰는 내일 써서 일요일자로 내보겠단다. "다른 기자들 있더냐?" 물으니, 기자는 혼자라 해서, 그리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서 조금 전에 막 나간 기사가 다음 두 건이다. (클릭하면 기사 본문으로 연결된다.)  


한국사 사료 발굴의 전설 '방선주 저작집' 출간

방선주 박사 "사료 찾았을 때 흥분은 아직도 기억나요"


첫번째 기사는 박 차장이 보낸 제목을 약간 손질했으니, '전설'이라는 말을 부러 붙여봤으니, 방 박사는 전설을 넘어 신화다. 미국 국가가기관이 소장한 한국 근현대사 자료 중 90%는 그의 손을 거쳤다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다. 그야말로 초인적인 일을 해낸 분이거니와, 이 분야 종사자들은 방선주라는 이름을 놓칠 수 없지만, 그런 그의 면모가 일반에는 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니, 나는 언제나 이런 일이 원통하기 짝이 없었다.    

 

내가 연합뉴스 기자로 입사해 문화부로 전근해 문화재와 학술을 전담하기 시작한 때가 1998년 12월 1일이었다. 그 즈음 이미 나는 방선주라는 이름을 너무 자주 접했다. 특히 근현대사 관련 논문이나 책에서 그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람이 어떤 분이기에 이리 이름이 많이 나오냐 했더랬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방선주 개인사를 논급한 그 어떤 글도 나는 보지 못했다. 있는데 내 검색이 걸리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언론에서도 방선주를 정리한 글이 없고, 역사학계도 마찬가지라, 방선주 방선주라고 하면서, 신화적인 인물이라고만 할 뿐, 그 어떤 누구도 이 분 생애를 정리한 것이 없었다. 


당시까지 방 박사는 그가 미국에서 발굴한 자료들을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를 통해 주로 발간했거니와, 그런 까닭에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대체로 국편과 한림대 사람들은 잘 아는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공적인 문서로 정리가 되지 않으니, 근거없는 이야기들만 떠돌아다니는 실정이었다. 그런 까닭에 내가 기회가 되면, 직접 방 박사를 인터뷰하고 그의 일생을 대강이라도 정리하리라 작심에 작심을 거듭한 것이다. 다만, 주된 활동무대가 미국이라, 내가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는 한, 그의 입국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데 그런 때가 생각보다 일찍 왔다. 방 박사가 입국한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이때다 싶어, 그를 만나러 갔다. 이 만남을 토대로 쓴 인터뷰 기사가 1999년 4월 15일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한 다음이다. 

 

<인터뷰> 재미사학자 방선주 교수

(서울=연합뉴스) 김태식기자 = "일본인들이 흔히 우리를 가리켜 과거에만  매달린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처럼 과거를 쉽게 잊어버리는 민족은 아마 없을 거예요".


이는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65.워싱턴 거주) 교수가  일본과의  과거청산을 외치면서도 정작 그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게 별로 없는 한국인을 꼬집어 평소 입버릇처럼 되뇌이는 말이다.


15일 1주일 남짓한 한국방문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이  말을 잊지 않았다.


민족이나 국가,더 좁혀 가족사를 알아야 하며 이를 기록으로 반드시 남겨야  한다는 이런 신념이 어쩌면 방교수를 마오쩌뚱의 홍역 기록까지 소장하고 있다는 서울운동장 16배 크기의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와 의회도서관 서고로 내몰았는지 모른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일본인들이 조선총독부 문서를 거의 다 파괴해 버렸고 미군정이나 한국전쟁 관련 사료는 대부분 미국에 있어요. 국내에 남아있는 자료가  절대부족인 상황에서 미국 자료발굴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이 굉장히 중요해요.


그런데 일제시기나 한국전쟁을 겪은 사람들이 지금 세상을 떠나고 있는데도  증언집이 통 나오지 않고 있어요.증언 채록과 기록집 발간은 개인 연구자나 특정 연구기관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만큼 정부차원에서 나서야 해요.


일본을 보세요.일본은 이미 60년대에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중인 일본관련 자료들을 정부가 전부 복사해 갔고 태평양전쟁 관련 증언집만 100권이  넘어요.반면 우리를 보세요. 제대로 된 증언집이 몇권이나 됩니까".


일반인에게 방선주라는 이름이 아직 낯설지만 한국 근.현대사,특히  미군정이나 한국전쟁을 공부하는 국내.외 학자치고 그가 발굴,정리한 자료집을  인용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시피 할 정도로 그는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신화적 인물이다.


한국전쟁 연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는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나 일본의 와다  하루키도 방교수가 발굴한 사료에 절대의존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가 한국과 관련된 사료수집에 헌신하게 된 것은 1964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라고 할 수 있다.


방교수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를 추적하다 보면 마친 굴절된 한국 현대사의 축소판이 아닌가 착각이 들 정도다.


일제치하 1934년 평양에서 태어나 선교사인 아버지 방지일 목사를 따라  중국에서 가서 22살까지 그곳에서 보냈고 1956년 반동분자로 몰려 중국에서 추방된 뒤  한국에 돌아와 숭실대와 고려대에서 한국고대사로 석사학위를 따고는 미국으로 떠났다.


"처음 미국 가서 먹고 살기 위해 별짓 다 했어요.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중국 고대사로 박사학위를 받았어요.그때 갑골학에 심취했는데 아직까지  갑골학에  대해 저만큼 아는 사람은 국내에는 아마 없을 거에요".


이처럼 한-중 고대사로 출발한 그는 능통한 중국어와 일본어,영어 실력을  십분발휘하며 70년대 이후 미국 국립문서보관소에 상주하다시피 하면서 한국  근.현대사로 연구분야를 옮기게 된다.


"당시 문서보관소에서 나한테만 특별히 개인복사기를 안에다 설치할 수  있도록 해줬어요.처음 미국사람들이 제가 미국에 이로운 공부만 하는 줄 알았나봐요.나중에 그런게 아닌 줄 알았지만요.내 자료집을 보고 문서보관소를 들락거리던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기원」이라는 책이 미국을 해롭게 한다고 해서 출입금지를  당했지요".


이렇게 해서 방선주라는 개인이 미국립문서보관서나 의회도서관 같은 곳에서 발굴해 복사한 자료가 대락 150만건이라는 천문학적 숫자를 가리키고 있다.


이를 정리해 한림대나 국가보훈처 등지에서 책으로 묶어져 나온 자료집만  해도 1백권 남짓.미군정 자료집이니 한국전쟁 당시의 피로 물든 빨찌산 자료집이니  미국 독립운동사자료집 하는 따위가 모두 방교수가 발굴한 것이다.


그는 한국 관련 사료를 뒤지다 간간이 출현하는 위안부 관련  자료도  빠짐없이 정리해 글을 발표하곤 했다. 이 분야 연구를 일본인들이 주도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이 그나마 체면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방교수 때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쎄, 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왜 내가 사료발굴에 열성적으로 매달리게 됐는지 물어보더군요. 그때마다 전 이렇게 대답해요.진실을 알기 위해서라고. 아마 제가 힘이 있는 한 한국사 관련 사료발굴은 계속 할 겁니다".


그러나 이젠 자료나 사료발굴보다 글을 쓰는데 힘쓸 작정이라고 말한다.


"요즘은 올해안 출판을 목표로 하고 있는  「한국전쟁사」와  「한국전쟁사전」 편찬 준비 때문에 정신없이 바빠요".


키 167㎝ 가량에 몸무게는 60㎏이 될까말까한 깡마른 체구,뿔테 안경과 좋지 않은 청각 때문에 보청기를 낀 한국 근.현대사 연구의 이 거인에게 이제 그 흔한 국가 서훈으로나마 그 노력을 보상할 때가 된 것이다.

taeshik@yonhapnews.co.kr(끝)



이후 방 박사를 정리한 박스 기사 하나를 별건으로 처리한 일이 있었으니, 앞 기사에서 언급한 훈장 수여를 거부한 그가 2007년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은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하고는 입국한 그를 만나러 일부러 현장을 갔으니, 다음 기사가 이를 계기로 작성한 것이다. 송고시점은 2007년 4월 4일이다. 

  

<NARA 터줏대감 방선주 박사>

부친 방지일 목사 이어 부자 '국민훈장'

한국근현대사 자료집만 150만건 300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99년 무렵 국내 근현대사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 73. 워싱턴 거주) 박사에 대한 국가서훈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국근현대사 자료정리에 기여한 그의 지대한 공로 때문이다. 하지만 방 박사는 "훈장 받으려 한 일이 아니다"며 이를 거부했다.


그런 그가 최근 대한민국 정부가 수여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 지난달 7일 광화문 정부중앙청사 교육인적자원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2006년도 국민교육발전 유공자들에 대한 국민훈장 수여식에 방 박사는 부인과 함께 참석했다. 


그의 독특한 이력에 비춰볼 때 이날 국민훈장 수훈은 '남다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지만 그가 훈장을 받았다는 사실은 한 달이 가까워 오는 데도 관련 학계에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방 박사의 부친은 올해 97세인 방지일 목사. 9년 전인 1998년에는 방 목사가 이미 기독교계 대표 지도자 중 한 명으로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므로 부자가 국민훈장을 받은 드문 기록도 세운 셈이다. 


그에 대한 국민훈장 서훈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추진했다. 건국대 신복룡 교수를 필두로 고려대 사학과 대학원 동료인 강만길 친일반민족행위위원장, 전기호 일제강점하강제동원진상규명위원장,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권영빈 전 중앙일보 사장, 유영구 명지학원 이사장 등도 힘을 보탰다.


이런 면면들에서 방 박사가 이룩한 업적의 일단이 드러난다. 그는 한국근현대사 관련 사료의 보물창고라고 일컫는 미국국립문서기록청(NARA)의 '터줏대감'으로 불린다. 


숭실대를 졸업하고 고려대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도미한 그는 1973년 워싱턴대학에서 석사학위, 1977년에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중국 서주(西周)시대 연구로 박사학위를 따고도 미국 내 대학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1979년 이후 NARA에 '둥지'를 틀었다. 


그는 직원으로 취직한 것이 아니라 자료관 일반 이용자의 한 사람으로서 NARA 직원과 같이 출근해 문을 닫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면서 한국근현대사와 관련한 자료조사와 수집이라는 한 우물을 파게 된다. 이후 서울 동대문운동장 16배가 된다는 자료 더미를 뒤져 복사하는 일상을 지금까지 반복하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가 찾아낸 자료 중 정식으로 간행된 것이 올해 3월 현재 무려 300책을 헤아린다. 1999년 연합뉴스 기자와 만났을 때 방 박사는 자신이 발굴한 자료가 150만 건 정도 된다고 했었다.


그가 발굴한 자료를 가장 요긴하게 이용한 저명한 연구자로는 미국의 브루스 커밍스와 일본의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을 들 수 있다. 한국근현대사 연구자 가운데 그가 발굴한 자료를 이용하지 않는 이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전쟁 중에 미군이 습득한 이른바 '북한군노획문서'라든가 미군 측 자료, 중국군 관련 문서 등은  한국현대사를 새로 쓰게 했다. 이 외에도 광복 직후 미군정의 방대한 자료, 미국 특수부대 OSS의 관련 문건, 독도에 관한 연합군 자료, 일본군 위안부 운영과 관련한 문건 등 그가 자료를 발굴해낼 때마다 한국근현대사는 요동을 쳤다.


그가 발굴한 자료는 국사편찬위원회와 한림대, 중앙일보 현대사연구소 등을 통해 간행되곤 했다. 


이런 방 박사가 지금껏 갖고 있는 공식직함이라고는 국사편찬위원회 국외사료조사위원 정도 뿐이다. '돈벌이'가 안 되는 이런 활동을 위해 방 박사는 자그마한 미국 대학에 자리 잡은 부인 정금영 씨의 내조에 의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편찬위원회 윤덕영 편사연구관은 "선생이 걸어온 지난 시기의 역경과 노력, 업적에 비해 이번 서훈은 뒤늦은 감이 있다"면서 "많은 연구자와 국내 자료수집기관, 더 나아가 대한민국이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는데도 이를 방관해 왔던 것이 아닐까 자문하게 된다"고 말했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taeshik@yna.co.kr

(끝)  


저 앞에 첨부한 인물 사진이 이때 내가 촬영한 것이다. 

그 두 번의 만남에서 방 박사는 이미 건강이 좋지 못했다. 워낙 깡마른 체구인데다, 당시에도 보청기를 낄 정도로 청력이 좋지 못했다. 더불어 이런 청력이 좋지 못하는 사람들한테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 있어, 당신이 하는 말을 독해하기가 무척이나 어려웠다. 

그런 그의 저작집이 발간됐다. 박상현 기자가 일부러 기사에서는 뺐는데, 치매 증상이 있어, 기억이 왔다갔다 하며, 같은 말을 무한반복했다고 한다. 

논문 수백편 쓴다 해서 방 박사 업적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거봉이요, 전설이며, 신화다.  


천고마비(天高馬肥). 말 그대로 가을은 청명한 날씨와 함께 오곡백과가 풍성한 수확의 계절임을 압축시켜 전한다. 하지만 원래 이 말 속에는 말을 타고 중국을 끊임없이 노략질했던 북방 유목민, 특히 흉노(匈奴)의 음산한 바람이 분다. 


몽골고원


이 말이 등장하는 가장 오랜 문헌은 한(漢)나라 반고(班固.AD 32∼92년)가 당대 역사를 기록한 《한서(漢書)》의 흉노전(匈奴傳)과 같은 책 조충국전(趙充國傳). 이곳에서 반고는 '천(天)'자 대신에 가을 추(秋)를 사용해 추고마비(秋高馬肥)라는 말을 쓰거니와 글자 그대로 가을 하늘은 높아지고 말은 살찐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흉노는 가을이  되고 말이 살찌며 활이 팽팽해지기 시작하면 (중국) 변방에 (쳐)들어왔다"고 한다. 즉, 천고마비 원형인 추고마비는 가을이 깊어감에 따라 흉노가 중국을 대상으로 노략질을 일삼는 시기라는 게 원 뜻인 것이다.


유목민족이 떠돌이 생활을 하던 몽골고원이나 고비사막 등지에는 초목이  빨리 시들 뿐 아니라 겨울도 일찍 찾아왔다. 따라서 양식과 말먹이가 부족한 유목민들이 가을에 접어들 무렵부터의 생존수단은 약탈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오랑캐라 불리던 유목민 중에서도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존재는 우리나라 고대 역사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흉노였다. 나아가 북방의 말 역시 계절 변화에 무척이나 민감해, 겨울철을 버티기 위해서는 그 문턱인 가을에 엄청난 여물을 먹어 살을 찌워 놓아야 했다. 그 찌운 살로 혹독한 겨울을 나야했기 때문이다. 


이동과 전쟁 수단으로 말을 쓰는 유목민 침입을 막기 위해 중국 역대왕조는 가을이면 백성들을  군인으로 징발, 변방에 내보냈고 또한 군대를 먹여살리기 위해 인민한테 무거운 세금을 물렸다. 때문에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은 백성은 고통스럽고 말 또한 비참한  천고마비(賤苦馬悲)의 시기였던 셈이다. 그런 사정이 꼭 한나라 때가 더 극심한 것은 아니었으니, 시대를 통털어 중국 전사에 걸친 고역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라성을 방불하는 시인이 쏟아져 나온 당(唐)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몽골고원의 아이들



이태백(李太白)과 함께 당시(唐詩)를 대표하는 인물이 두보(杜甫). 그의 조부는 두심언(杜審言.648?~708)인데, 이 할애비 또한 문명이 높아 이교(李嶠)·최융(崔融)·소미도(蘇味道)와 함께 '문장4우'(文章四友)로 일컫기도 했다. 그가 남긴 시로 현존하는 43편 중 다음 '소미도에게'(贈蘇味道)가 특히 유명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에 혜성 떨어지고 

가을하늘 높아지며 변방 말은 살 오르네 

힘차게 말 달리며 날랜 칼 휘두르며 

붓 놀려 격문을 날리리라 


雲淨妖星落

秋高塞馬肥 

據鞍雄劍動 

搖筆羽書飛 


이 시가 바로 가을철을 묘사하는 천고마비(天高馬肥), 그 원류인 추고마비 출전 중 하나다. 주의할 것은 두심언은 '추천색마비'(秋高塞馬肥)라고 해서 '추고마비'(秋高馬肥)로 썼다는 사실이다. 이에서 물론 '추(秋)'는 '추천(秋天)', 즉 가을 하늘을 뜻한다. 


가을 하늘이 지닌 푸르름과 높음의 상징은 대한민국 애국가 제3절 첫  소절이 '가을하늘 공활(空豁)한데'인 데서도 확인한다. 이런  '추고마비'(秋高馬肥)가 어느 새인가 천고마비(天高馬肥)로 바뀐 것이다. 


소미도는 왜 변방으로 떠나야 했을까? 두심언 시 어디에도 가을철 낭만은 털끝만큼도 찾을 수 없다. 불길함의 대명사인 혜성이 떨어지고 변방과 칼이 등장하며, 전장의 긴박한 상황을 알리기 위한 격문이 소재로 활용된다. 두심언은 전쟁이 벌어지고 있거나 전운이 감도는 변방으로  떠나는 친구 소미도에게 무사귀환하기를 바라는 뜻을 시에 담아 보낸 것이다. 


사실 '추고마비'는 당과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던 북쪽 유목국가, 예컨대 돌궐의  침략을 알리는 전령과도 같은 불길한 징조였다. 말은 풀 먹이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가을철이 가까워지면 본능적으로 살을 찌운다. 마찬가지로 돌궐 사람 또한 겨울철을 대비해 약탈을 감행하게 된다. 


이런 음산한 천고마비가 어느 새 가을 낭만을 묘사하는 대명사와도 같은 지위를 점하니, 격세지감일까? 이 가을 몽골 고원으로 말을 타러 가고 싶다. 


*** 이 글 역시 지난날 내가 쓴 글 두어 종을 버무린 것이다. 


좀 먼 시대 이야기이긴 하나, 1996년 9월 한국마사회가 당시 과천 서울경마장 주로를 달리던 경주마 1천300여 마리를 대상으로 계절별 체중 변화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더러브렛종 경주마가 매년 9~11월 중 평균 체중이 6.3kg가량 더 늘어난 것을 비롯해 전체 경주마가 가을철 체중 증가세가 뚜렷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국산 경주마는 가을철에 살찌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 호주, 뉴질랜드산보다  평균 0.3kg가량 더 몸무게가 불어난 것으로 조사됐다.


비단 경주마뿐만 아니라 말을 비롯한 동물이 가을에 살이 더 찌는 현상은 본능적으로 겨울철에 건초 부족 등으로 먹이를 구하기 힘든 상황에서 미리 체내에 에너지를 비축하고자 하는 데다 특히 가을철에 성장호르몬 분비가 촉진되는 점이 주된 원인으로 분석됐다. 흔히 가을을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 해서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이라  하거니와 하늘이 더 높아지는 지는 모르겠으나 말이 살찐다는 속설은 참말인 셈이다. 


몽골고원



술만 마시면 시가 절로 나왔다던 중국 최대 시인 이태백(706~762). 그를 흔히  남이야 굶어죽든 얼어죽든 저 혼자만 부어라 마셔라 흥청대던 이기주의 시인의 대표쯤으로 알지만 사실 이태백만큼 서민들의 애환을 잘 읊은 시인은 드물다. 태백은 특히 그칠 줄 모르는 전쟁에 따라 민중이 겪는 고통을 잘 알았다. 그의 4편 연작시인 자야오가(子夜吳歌) 중 제3편을 보자.


長安一片月

萬戶擣衣聲

秋風吹不盡

總是玉關情

何日平胡虜

良人罷遠征


장안(長安)에 조각달 걸렸는데  

집집마다 다듬이질 하는 소리 

가을바람 불어 그치지 않으니 

이는 모두 옥관(玉關)의 시름

언제나 저  오랑캐 쳐부수고

님께선 먼 원정 마치실꼬  


장안은 당나라 서울이고 옥관은 감숙성에서 신장성으로 가는 군사 관문. 이태백은 이 시를 통해 전쟁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며 밤늦도록 다듬잇소리를 내는 여인네 입을 빌어 그들의 고통을 노래하고 있다. 계절적 배경이 가을이다. 그의 다른 시 중에 새하곡(塞下曲)이 있는데 새(塞)란 말할 것도 없이 변방이다.  연작시 5편 중 제2편 역시 계절 배경이 가을인데 이렇다. 


天兵下北荒

胡馬欲南飮

橫戈從百戰

直爲銜恩心

握雪海上飡

拂沙隴頭寢

何當破月氏

然後方高枕


천명 받은 군대는 북쪽 벌판으로 치달리는데 

오랑캐 말은 남쪽으로 달려 물 마시려 하네 

창을 비껴 들고 온갖 전투에 임하는 까닭은 

바로 성은(聖恩)을 머금었기 때문이라네 

눈을 움켜쥐곤 청해에서 밥해 먹고 

모래 툴툴 털고 농산에서 잠을 자네

언제쯤 월지 맞아 깨뜨리고

그런 다음 높은 베개 베고 자려나 


천자가 이끄는 당나라 군사는 북쪽으로 말을 몰아 유목민들을 몰아내고자  하는데 북쪽 오랑캐 말들은 남쪽, 즉 중국으로 내달리고자 한다는 이태백의 바로 이  시에 우리가 낭만적으로 알고 있는 천고마비 그 본래의 뜻이 숨어 있다. 천고마비는 그 뜻이 글자 그대로지만 원래 이 말은 음산하고 피비린내가 난다.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한 중국 변방은 고도가 높기 때문에 가을과 겨울이 일찍 온다. 그러면 초목이 말라 버려 말이나 사람 할 것 없이 먹을 것이 없어진다. 이때 말은 본능적으로 겨울을 나기 위해 가을철 초목을 닥치는대로 먹으려 한다. 하지만 초목은 이미 매말라 버렸다. 이렇게 되면 목축을 생업으로 하는  유목민들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을 친다. 바로 약탈이다. 그래서 가을 하늘이 높아지고 말이 살찌는 기운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중국은 언제 북방 유목민족들이 밀려내려와 닥치는대로 약탈을 일삼을 지 바짝 긴장했다.


북방 유목민족 혹은 국가 중에서도 한나라 때 강성함을 자랑한 흉노와 오환은 특히 중국에게 두려운 존재였다. 이 중에 고구려도 가끔 끼어든다. 중국은 고구려 왕 중에서도 걸핏하면 북경 근처까지 쳐든 태조왕과  동천왕을 특히나 두려워 했다. 그래서인지 중국역사에는 태조왕과 동천왕은 마치 괴물처럼 그린다.


이런 유목민족들의 약탈을 막아내고 때로는 원천봉쇄하기 위해 중국은 끊임없이 전쟁을 일으켰고 백성들을 군대로 강제징발해 변방으로 내몰았다. 천고마비가  중국민중들에게는 고통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천고마비 고통을 가장 잘 노래한 시인 중 한 명이 이태백이었다. 


** 이는 2000년 10월 17일 연합뉴스를 통해 송고한 내 기사 '<천고마비(天高馬肥)와 이태백>'을 약간 손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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