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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추밭에 등장한 이것이 무어냐니 마미가 이르되..소리내는 기계란다.
낮엔 가만 있다가 밤이 가까워지는 오후 다섯시 이후엔 빽빽 소리를 지른단다.


그 배추밭 옆  짜투리 땅에다간 메밀을 좀 뿌렸다. 저 멀리 파란 망이 보인다.


다시 그 옆 고구마 밭은 반짝이 허수아비 천지다.
은빛이다. 태진아 송대관 합동 공연장 같다. 


전쟁이다.
사투다.
고라니, 노루, 멧돼지와의 사투다. 이들이 논밭으로 침투해 숙대밭을 만들어 놓는다. 박정희 시대 산림녹화 사업이 성공하면서 전 국토가 급속도로 밀림이 되었다. 

흔히 근간적(나는 '대책없는'이란 말로 자주 쓴다) 환경론자들은 짐짓 동물편에 서서 하는 말이 인간이 그네들 영역에 침투하는 바람에 저들이 농토와 민가를 습격한다 하는데 이 역시 개소리라. 

입맛 때문이다. 초식성인 고라니와 잡익성인 멧돼지가 수풀 우거진 늦봄 그곳을 버리고 여름 초가을에 고구마 메밀 배추밭에 출몰하는 까닭은 못된 버릇 때문이다. 산에 먹을 것이 없어서 내려오겠는가? 수퍼마켓 편의점 터는 도둑에 지나지 않는다. 동물 주체적인 시각은 동의하나, 그 어떤 경우에도 그들의 행위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나는 궤변으로 본다. 

태초에는 인간과 동물이 각자 영역을 지키며 잘 살았다는 주장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이 언제나 동물 영역에의 침략 성향을 보이듯이, 동물 역시 언제나 인간 영역을 호시탐탐 노리며, 언제나 침략을 일삼았다. 


  1. yisabu 2018.09.25 18:47 신고

    옳습니다. 사람이면 마땅히 사람편을 들어야지 동물편에 서서 말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입니다.

  2. yisabu 2018.09.26 11:30 신고

    미국이나 캐나다 러시아 등은 짐승과 인간이 조우할 기회가 많습니다. 그래서 간혹 주택침입 맹수 기사도 나옵니다. 국내에서 이런 기사를 소개할 때 반드시 인간의 잘못이라는훈계성 멘트를 서두를 넣어주고 나서 기사 인용을 하더군요. 원문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어떻하면 인간이 동물과 싸워서 이길 수 있는 지 설명할 뿐.

"떠나면 만나고, 만나면 헤어지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 늙으면 다시 젊어질 수는 없다" - 원매(袁枚)

논문은 허심(虛心)과의 전투이며 통념(通念)과의 전쟁이다...김태식, 2013. 9. 22 

문경 고모산성 신라 목곽고..해체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지만, 그대로 매몰했다.


내 기자 생활 26년 중 20년은 문화재와 관련 있다. 그런 문화재 관련 기자 생활 중에서 고고학 발굴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문화재라는 범주가 매우 광범위해서, 고고학 혹은 발굴이 차지하는 지위는 생각보다는 얼마되지 아니한다. 그럼에도 이 업계 기자들한테  유독 발굴이 비중이 큰 까닭은 모든 발굴은 news를 생산하며, 언론 혹은 기자는 이 news를 자양분으로 삼는 까닭이다. 그런 점에서 김태식 개인으로 보아도 문화재 관련 기자 생활은 고고학으로 먹고 살았다 해도 과언은 아니며 그런 점에서 나는 언제나 고고학이 감사하다. 그렇기는 하나 그 발굴에 종사하는 작금 한국 고고학에 나는 보다시피 언제나 비판적이다. 개중 하나가 오늘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로 주제다. 

내가 이 분야에 뛰어든 직후부터 줄기차게 한 말이 있다. 유적을 파괴하는 주범은 다름 아닌 고고학도들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이에 경기를 일으킨 이유는 모든 발굴 현장마다 소위 자문위원이니 검토위원이니, 지도위원이니, 혹은 문화재위원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자들이 걸핏하면 토층(土層)이 궁금하다며, 저 아래 쪽엔, 그리고 저 뒤엔 무엇이 있냐를 밝혀야 한다는 그럴 듯한 이유를 달아 모조리 파제끼게 하니, 그리하여 결국 발굴이 끝난 다음 현장엔 빈껍데기만 남고 그 존재 이유를 가능케 한 소위 유구(遺構)며, 유물(遺物)은 깡그리 걷어내는 까닭이다. 그 빈껍데기 위로는 이내 광활한 잔디밭이 들어서고, 그 한쪽 귀퉁이에는 이곳이 얼마나 중요한 유적인지를 윽박하고 강요하는 문화재 안내판 하나 덜렁 들어설 뿐이다. 

천안 위례산성 백제 목곽고..역시 뜯자고 주장한 얼빠진 고고학도가 있었지만 매몰했다.


발굴은 그 동기와 목적에 따라 크게 구제발굴과 학술발굴로 나뉜다. 공사에 따른 전 단계 조치로써, 근간에서는 파괴를 전제로 삼을 수밖에 없는 구제발굴이야 그 대부분이 기록만 남기고는 사라지고 말지만, 연구와 보존 정비를 내세운 학술발굴 현장에서도 모두가 파괴하지 못해 환장하는 모습을 보이는 자들이 이 땅의 고고학도와 고건축학도들이다. 최근에는 이를 향한 비판도 적지는 않아서인지 어째서인지 알 수는 없지만, 현장에 따라 유구 보존을 위한 새로운 결단 방식이 더러 도입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에도 '파괴 일로주의'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자 과연 몇 명인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앞서 말한 저 토층과 혹은 구조가 궁금하다는 등의 이유로 모조리 파제끼라고 부추기는 자들이 또 매양 하는 말 중의 하나로 유구는 해체하지 않고, 유물은 수거하지 않고서는 보고서를 쓸 수 없다는 말이 있다. 그리하여 다시 모조리 파제끼고, 모조리 해체하고, 모조리 거둬 버린다. 물론 아니라 강변하는 자도 있을 터이고, 적어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또 듣자니 더러 현재의 매장법이 그래서 어쩔 수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간혹 있다. 이런 반론은 일부에서는 정당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 정당할 수는 없다. 매장법? 보고서? 내가 보는 한 핑계다. 그에서도 얼마든 빠져나갈 구멍은 있으며, 귀찮아서 하지 않을 뿐이다.  

장담하거니와, 그렇게 해서 망가져 나간 히스토릭 사이트가 대체 얼마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만큼 무수하며, 내 눈 앞에서 사라져간 사이트도 천지다. 내가 두 눈 부릅뜨고 있는 데도, 꼴난 저와 같은 완장 하나 차고는 현장에 나타나서 하는 말이, 구조를 밝혀야 하니깐, 제작 방법을 구명해야 하니깐, 어떻게 쌓았는지 토층 양상을 파악해야 하니깐, 더 파야 한다고, 다 뜯어제껴야 한다고 해서 각종 이유를 달아 부추긴 자들이 너희다.  

경주 황복사지 발굴현장..발굴 끝나고 어떤 모습을 담아야 하는지 그랜드디자인은 서 있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작 발굴이 끝난 현장은 볼 것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아, 토기 쪼가리 하나까지 박박 긁어가서는 개중 모양이 좀 좋은 것을 골라 박물관 같은 데다 전시하고, 나머지 99%는 수장고에 쳐박아 두는 악순환이 지금도 계속 중이다.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무엇 때문에 발굴했는가 하는 반문이 절로 나온다. 보존정비라 하지 않았는가? 무엇을 보존했느냐 너희 한국고고학도 고건축학도들아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러고도 너희가 유적 보존을 운위할 자격이 있느냐 말이다. 잔디밭 보자고 발굴했는가? 덩그레한 안내판 하나 읽으려 발굴했던가? 박물관 유리창 너무 안치한 유물 몇 점 보려고 발굴한 게 아니지 않는가?

저와 같은 다양한 이유로써, 저 풍납토성 미래마을지구 기와더미는 기어이 다 파제끼고 그 밑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한다며 다 들어냈다. 보고서 쓰야 한다고, 나아가 그렇지 않고서는 그 밑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이유로, 그렇게 들어낸 기와가 오백 박스다. 같은 풍납토성 경당지구 우물도 토기 그득한 그 상태로 남겨두었어야 함에도 보고서 쓰야 한다는 이유로 그 안을 가득 채운 꼬다리 뜯은 토기 243점을 몽땅 들어내고 빈껍데기를 만들었다. 대전 월평산성 백제 목곽은 그렇게 해서 뜯어제꼈다.  

뭐 뜯어제낄 땐 참 논리도 정연하고, 참 자신감 넘치기도 한다. 요즘 보존처리 기술도 못할 일이 없다고 한다.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한다. 뭐 그래? 내가 보니 이는 완전한 사기이거나 그에 가깝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전연 그것을 완벽히 보존할 수도 없고, 제아무리 보존처리 잘한다 한들, 뒤틀리기 마련이라, 이내 썩어문드러지고 만다. 월평동 목곽고가 그렇게 해서 다 망가져서, 다 뒤틀린 목재 쪼가리 몇 개 국립공주박물관 유리창 안에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저들은 아랑곳없어, 브레이크 없는 전차와 같아, 언제나 뜯어제껴야 직성이 풀리나 보다. 문경 고모산성 목곽 자문위원회 현장을 가서 보니, 그 우람한 5세기 신라시대 저습지 목곽을 해체한다 한다는 주장이 난무하더라. 더 근자엔 천안 위례산성 꼭대기를 갔더니, 그에서도 백제시대 저습 목곽고가 드러나, 물으니, 어떤 자문위원이라는 자가 뜯어라 했다는 말을 듣고는 그 놈이 어떤 놈이냐, 그 놈더러 해체해서 그 놈더러 저 목재 지고 내려가게 하라고 한 일도 있다. 


잔디밭 풍납토성


도대체 뭐가 그리 궁금한 게 많은가? 다시 얘기하듯이 그 궁금증이란 것도, 너희가 그토록이나 구명하고자 하는 한국고대문화 구명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토층? 똥개나 줘버려라. 구조? 시궁창에나 던져버려라.  

내가 지난날을 곱씹고, 그리고 오늘을 보고 또 봐도, 문화재를 죽이는 주범은 도굴이나 개발이 아니다. 고고학적 호기심이 문화재를 죽이는 제1 원흉이다. 이는 주로 고건축학도가 주무하는 보수 현장에도 같은 현상이 벌어져, 거의 모든 보수현장이 진행 양상이 같아, 애초엔 지붕만, 천장만 손본다 했다가 기어이 다 뜯어제끼니, 뭐 말은 그럴 듯해서, 막상 뜯어보니 건물 전체 안정성에 문제가 있고, 부재가 다 썩어 더는 버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결국 몽땅 해체하고 만다. 하지만 그네들이 내세우는 안정성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거개가 다 호기심 해결용이다. 구조가 궁금하다고, 그걸 처음 만든 시대가 궁금하다며, 그 증거 채집을 위한 파괴에 다름 아니다. 

이런 호기심은 내가 보니 관음증에 다름 아니다. 그 궁금증을 향한 욕구는 단언커니와 그네들의 궁금증을 풀기 위한 꼼수지 문화재 자체를 위한 충정과는 눈꼽만큼도 관계없다. 이런 놈들이 매양 하는 짓이라곤 몽땅 걷어내고 파제낀 다음 복토다. 유적 보호를 구실로 흙으로 덮어버리곤 그것이 문화재 보호라 한다. 물론 이 복토가 상징하는 정비는 고고학이나 건축학 영역을 벗어나 별도 영역이라 고고학 혹은 건축학이 간여할 수 없는 일이라 하나, 애초 그런 비극이 초래할 줄 알면서도 파제끼고 뜯어제끼는 일을 나는 계속 용납치 않으려 한다. 



첨부사진은 보다시피 1976년 7월 12일 월요일판 경향신문 2판 제5면 머릿기사로 실린 김정배 기고 시론이다. 시론이란 간단해 말해 시사 문제와 관련한 논설이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신문이 지면을 배치하지는 않거니와, 시론 같은 논설류를 모은 면이 아님에도 시론을 각종 시사 문제를 전하는 면 머리기사로 올린 점이 지금과 비교하면 독특하다. 이 기고문이 말하고자 하는 이데올로기를 폭로하기 위해서는 왜 저 시기에 저 기고문이 배태되었는지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본문 분석이 중요하다. 


기고문을 보면 크게 두 부문으로 구성한다. 첫째, 당시 광범위한 도굴 실태에 대한 고발이다. 둘째, 이를 토대로 하는 대응책 주문이다. 논설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시론은 이 두 가지가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아니한다. 시론으로서는 빵점짜리에 가깝다. 다름 아니라 도굴 실태에 대한 고발이라고 하면, 그 대응책으로서는 그 도굴을 근절하고, 도굴범들을 색출하기 위한 관계당국의 노력 경주를 주문해야 지극히 정상이겠지만, 삼천포로 빠지고 말았으니, 느닷없이 그 대응책으로 김정배가 제시한 방법은 대학에서 발굴하게 하자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뚱딴지도 이런 뚱딴지가 없다. 


그렇다면 이 시론은 어찌해서 나왔으며, 과연 저자가 주장하는 저의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 우리는 시계추를 돌려 40여년 전 그때로 돌아가야 한다. 이 무렵 고고학계 사정을 보면, 박정희 유신정권이 추진한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이 본궤도에 오르고, 그에 따라 경주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 주도 발굴이 한창 굉음을 내던 시기다. 그 일환으로 경주에서는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이 대략 마무리되고, 곧이어 안압지와 황룡사지 발굴이 닻을 올렸다. 


이 시론 기고 당시 김정배는 고려대 사학과 교수였다. 나중에는 제14대 고려대 총장까지 역임하고, 그 이후에도 고구려연구재단 이사장이며, 한국학중앙연구원장이며 문화재위원장이며, 국사편찬위원장이며 하는 각종 중책을 비교적 최근까지 연이어 역임한 사학계 거물이다. 이런 이력을 보면 그는 사학도라기보다는, 뭐랄까 역사학 tycoon 정도로 자리매김해야 할 성 싶다.  


각종 그의 이력을 보면 1940년 8월 1일생이니 저 기고문 작성 당시 그는 36살, 전도 유망한 새파란 청년 교수였다. 휘문고와 고려대 사학과 출신인 그는 미국으로 1970년 미국 하와이대학으로 건너가 그곳 대학원에서 인류학 세례를 받는다. 당시 미국 인류학은 이른바 신고고학이라 하는 흐름이 일대 유행한 것으로 기억하거니와, 그는 단순히 문헌사학도로 만족치 아니하고 역사학에 고고학과 인류학을 접목을 시도한다. 귀국해 1975년에는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그는 만 서른살 1970년에는 모교 한국사학과 전임강사로 부임하면서 긴 교수생활을 시작한다. 그러니 '古文化(고문화)의 原形(원형)을 훼손말자'는 저 칼럼은 그가 한창 교수생활로 재미를 붙일 무렵에 쓴 셈이다. 하기야 그때야 벌써 저때는 학계 중진으로 취급될 무렵이다. 


이 칼럼에서 김정배는 도굴이 대표하는 당시 문화재 관리 참상과 관리실태를 고발하면서 시종 분노에 찬 어조로 국가를 질타한다. 그런 그가 일필휘지로 붓끝을 맘껏 휘두르면서 국가까지 질타했으니, 그 기개는 높이 살 만하다. 그렇다면 과연 이 글을 김정배는 왜 썼던가? 다음 구절에 그 저의를 폭로한다. 


"지난날의 발굴이 얻은 것 못지 않게 잃은 것이 많았음을 고려해두어야 한다. 學術的 發掘(학술적 발굴)은 대학으로 하여금 조용하게 진행시키고 차분한 연구결과로 보고서가 간행되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發掘(발굴)과 盜掘(도굴)이 뒤범벅이 되고 文化財(문화재)는 黃金(황금)의 축재로 전락되며 돈이 있는 者에게는 국내외 인사에게무질서하게 물건이 들어갈 때 이 땅의 문화재는 설 땅을 잃게 된다."


왜 썼는지 그 목적성이 명확하지 않은가? 그는 당시 문화재관리국 주도 국가 발굴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한 발굴은 곧 그 몫을 담당한 대학 발굴에는 일대 위기였으며, 그것은 곧 대학 발굴의 잠식이었다. 김정배가 저에서 하고자 한 말은 국가가 대학이 해야 하는 발굴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저 칼럼에서 노출한 김정배의 문제의식 혹은 위기의식이 단순히 김정배 개인의 생각을 넘어 당시 대학사회, 특히 고고학을 주된 밥벌이 수단으로 삼은 교수사회의 그것을 고스란히 대변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 이데올로기를 간파해야만 저가 말하는 것들이 어떠한 거짓으로 얼룩졌는지를 비로소 만천하게 폭로하게 된다. 저에서 분명히 보이듯이 김정배와 '김정배들'에 따르면 국가는 대학에 돈만 주고 간섭하지 말고 대학이 자율적으로 발굴하게 하라는 것이며, 말할 것도 없이 그런 예산은 감사도 감시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은 정당한가? 아니, 그 시대에 비추어 봐도 정당했던가? 


김정배는 학술발굴은 대학에 맡기고, 대학은 차분히 연구하고 발굴보고서를 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리된 적도 없고, 대학이 제대로 발굴보고서를 낸 적도 없다. 저런 주장이 어느 정도는 관철되어 당시 고고학 발굴 현황들을 보면, 비록 소위 큰 건수 발굴은 문화재관리국이 주도했지만, 각 대학 박물관 역시 연합발굴 등의 이름으로 적지 않은 곳에서 발굴에 뛰어들었으니, 경주만 해도 고고학 교수들 전성시대라, 이곳저곳 발굴현장 하나씩은 나눠 먹기했다. 


한데 주의할 점은 차분한 연구는 고사하고, 그 발굴 현장 대부분 대학 박물관은 보고서조차 제대로 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때 발굴한 고고학 성과는 수십년이 지나도록 안낸 보고서가 수두룩하다. 보고서 비용은 도대체 어디서, 누가, 언제, 어떤 방식을 떼먹었는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최근에는 저리 밀린 보고서를 국가가 지원해 내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도 더러 나오는 실정이다. 돈은 지들이 다 빼돌리고, 국민한테 책임을 전가한단 말인가? 보고서 비용은 이제는 퇴임한 저들 발굴 책임자들한테 추심해서 강제로 빼앗아 와야 한다. 


김정배는 저에서 발굴이 파괴라는 말을 한다. 이 말, 고고학에서는 여느 개론서엔 다 나오는 말로 기억하거니와, 그렇다면 대학박물관이 차분히 발굴하고 차분히 연구하면 그건 파괴 아닌가? 발굴은 파괴라는 말이 지금도 고고학의 순수성을 말해주는 증좌로 고고학 현장에서는 언제나 금언 혹은 권리장전처럼 통용하나. 퇴출해야 할 괴물이다. 


발굴이 무슨 파괴란 말인가? 발굴은 창조다. 해당 유적과 유물에다가 새로운 바람과 생명을 불어넣는 창출이다. 언제까지 발굴은 파괴라는 구닥다리 금언을 되뇌이겠는가? 


한데 김정배가 40년 전에 제기한 저 울분, 곧 발굴은 대학이 하게 해달라 하는 읍소 혹은 협박이 40년이 흐른 지금, 고고학계에 다시금 유령처럼 강림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이르기를 첫째, 발굴조사에서 적어도 책임조사원 혹은 정식 조사원이 되려면 대학 관련 석사학위 이상 소지자여야 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지금은 완전히 퇴출된 대학 박물관의 구제발굴 현장 참여를 許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별도 마련하고자 한다. 

  1. 종부세 2018.09.16 14:56 신고

    학술적 발굴만 대학에서 조용히... ㅋㅋㅋ

우리 학계, 특히나 고물(古物) 딱지를 신주보물단지처럼 여기는 우리네 역사 관련 학계에서 고질과도 같은 믿음이 있으니, 오래에 대한 과도한 믿음이 그것이다. 그 고물이 텍스트로 옮겨가면, 덮어놓고 오래된 것일수록 그에 대한 상대적인 믿음이 더 강한 노골과도 같은 신념이 있다. 오래된 것일수록, 그것이 소위 당대(當代)의 증언이라 해서, 그것이 후대에 판본, 혹은 그 사건을 다룬 후대 문헌들에 견주어 당시의 실상을 훨씬 더 잘 전한다는 믿음이 있다. 


마왕퇴 한묘 출토 백서본 오성점(五星占)


하지만 놀랍게도 소위 당대 혹은 당대에 가까운 텍스트일수록 의심을 살 만한 구석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언제나 그 보기로 들 듯이, 나는 광개토왕비문이 진실을 말한다고 믿지 아니한다. 그것이 광개토왕 혹은 장수왕 시대 증언이라 해서, 그것이 저 시대 사정을 후대의 다른 것들에 견주어 진실성을 담고 있다고는 전연 생각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거짓과 과장과 장광설로 점철한다. 이는 우리네 일상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너무나 자주 목도하는 현상이다. 같은 사안 같은 사건을 두고 얼마나 많은 말이 오고가는가? 지금 이 순간 경찰서나 검찰, 혹은 법원에는 내가 맞고 너가 틀리다는 주장이 난무하지 아니하는가? 


텍스트 교감 분야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다. 같은 문헌 같은 기록에 대한 여러 판본이 존재하고, 그것끼리 충돌을 일으킬 적에, 언제나 상대적으로 오래인 판본이 그 본래 저자의 의도를 상대적으로 잘 전달한다는 믿음도 강고하기만 하다. 한데 이에서 우리라 유의할 점은 오래된 텍스트일수록 소리나는대로 적는 경향이 더 강고하다는 사실이다. 


제목에서 제시한 저 가차란 간단히 말해 소리만 빌려 적는다는 뜻이다. 뜻은 무시하고, 소리에만 치중한 텍스트 선호 경향이 낳은 음운 현상 일종이다. 중국의 소위 출토문헌을 볼 적에 죽간이나 목간 혹은 비단에 적은 漢代 이전 문헌을 보면 가차가 특히 두드러져, 액면 그대로 해석했다가는 낭패보기 십상이다. 이런 흔적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문헌에서도 남았으니, 《장자(莊子)》인가 《노자(老子)》인가 혹은 《순자(荀子)》인지 내가 자신은 없으나, 그에서 빈출하는 '僞'라는 글자를 곧이곧대로 '거짓'이라고 봤다가는 모름지기 원뜻을 곡해할 수밖에 없다. 많은 경우 이 僞는 '爲'에 지나지 않는다. 두 글자가 그때는 발음이 통해서 지 꼴리는 대로, 적는 사람 마음대로 소리만 빌렸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후대에 나온 텍스트가 훨씬 안전성이라는 측면에서 외려 더 믿음을 주는 일이 허다하다. 《손자병법(孫子兵法)》 판본으로 근자 저명한 것이 산동성인가 강소성에서 출토된 소위 은작산 한간(銀雀山漢簡)이란 것이 있다. 이는 현재까지 발굴된 《손자》 관련 텍스트 중에서도 실제의 손자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라 해서 보물처럼 취급된다. 우리한테 익숙한 《손자》 텍스트는 실은 삼국시대 조조가 주를 붙인 판본이 거대한 뿌리다. 그 자신 학자요 시인이며 장군이기도 한 조조는 《손자병법》을 중시해, 본인이 직접했는지, 아니면 꼬붕들을 시켜서 그리했는지는 알지 못하나, 직접 그 텍스트를 교감하고, 주석을 붙였다. 이것이 이후 이것이 확고불변한 정전의 지위를 누리거니와, 나중 당대(唐代)에 들어서는 《무경칠서(武經七書)》에 편입되어 그 수위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손자》는 《태평어람(太平御覽)》과 같은 송대(宋代) 백과사전에서는 갈갈이 찢어져 이곳저곳에 인용되기도 한다. 한데 이들 텍스트마다 문자 혹은 문구의 넘나듦이 발생하거니와, 이런 혼란 혹은 착란은 교감학이 발전하는 결정적인 토대가 된다. 한데 텍스트 변용 양상을 보면, 현재까지 주어진 각종 《손자》 텍스트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전한前漢시대 소위 은작산한간본 《손자》를 보면 곳곳에서 가차 현상을 발견한다.  이후 텍스트에 견주어 무수한 가차가 발견되거니와, 그런 까닭에 이 가차를 인지하지 못하고 텍스트를 해석하면, 오독이 빚어지거나 해독을 할 수가 없다.   


《손자》야 지금까지 텍스트가 살아남아, 그 후대 판본들을 기준으로 은작산 한간의 텍스트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지, 그렇지 않고 오래전에 망실해 버린 다른 문헌들의 죽백은 현재의 우리가 얼마나 텍스트를 오독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이런 《손자》 역대 판본을 보면, 외려 후대에 나온 텍스트가 훨씬 안전성을 담보한다. 오래된 것일수록 안전하다는 믿음은 버려야 한다.


왜 그런가? 이는 요즘 출판 패턴 경향을 보면 이해가 쉽다. 국내 출판시장 기준으로,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 수백종이 쏟아지는 단행본은 100권 중 99권이 초판 1쇄로 생명을 마감한다. 그만큼 책이 안 팔린다는 증좌이기도 하지만, 실은 안 팔리는 책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중에서 초판 1쇄를 기적으로 넘기는 책이 더러 있으니, 2쇄 이상을 넘기거나, 그 생명이 질겨 독자들한테 무한 사랑을 받아 판을 거듭하기도 하거니와, 이런 같은 책 여러 판본을 비교하면 텍스트 오류는 2쇄 혹은 2판 이후가 가장 안정적이다. 


출판업자나 필자한테 오타는 숙명이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세심히 주의를 기울여도, 오타 혹은 오류는 쉽게 잡히지 않는데, 그런 오타 혹은 오류가 가장 많이 잡히는 때가 초판 1쇄를 집어든 순간이다. 이는 연극 역시 마찬가지라,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무대에 올리는 연극 공연을 볼 적에 필연적으로 제1회 상연은 우당탕탕 삐걱거림이 많다가, 회를 거듭할수록 안정화 단계에 접어든다. 


한국고대사를 볼 적에 이 판본 문제가 심대한 역사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거니와, 백제 혹은 마한과 관련한 소위 ' 대방군(帶方郡) 기리영(崎離營) 전투'와 신분고국(臣濆沽國) 문제가 있거니와, 이 논쟁은 하도 격렬해 내가 추후 별도 코너로 정리하기로 하기로 하고, 지금 이 시점에서는 같은 책을 둘러싼 시대별 판본에서 드러나는 몇 글자의 이동(異同) 여부에 따라 어떠한 참사가 빚어지는지 그 보기를 드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한다. 



  1. yisabu 2018.09.16 16:27 신고

    잘 읽고 갑니다.

계량화할 수는 없다. 문화재청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하나일 수도 없고, 그 시선 역시 양극점을 형성하기도 하며, 그 어중간에 무수한 다른 시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그런 다양한 시선 중 의외로 이 시선이 중앙과 지방을 극단으로 가르는 가장 격렬한 원인이 되는 그것을 골라서 간단히 언급하고자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지자체 학예직 사람들은 지역 토호와 결합하거나 그네들 자신이 지역 토호라는 불신지옥이 그것이다. 


작금 문화재청과 지자체 학예직간 시선을 적나라히 보여주는 문구는 이 '불신지옥'이다.


상론한다. 문화재청에서 바라보는 지자체 학예직은 대체로 지역 논리 혹은 지역 이익에 매몰되어, 문화재는 안중에도 없고 오로지 지역 이익을 대변하며, 특히 그 고용주에 해당하는 지자체장이라든가 지역 실력자 혹은 유지와 한통속이 되어 각종 전횡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이 지역토호가 되거나 그들의 앞잽이나 다름 없다고 한다.


단도직입으로 말하지만, 지자체 학예사를 두고 이리 말하는 문화재청 사람이 있다. 내가 직접 들었다. 그리고 이런 시선이 의외로 적지는 않아, 바로 이것이 중앙의 지방에 대한 극단적 불신을 낳는 거대한 뿌리가 된다. 


그런 사람이 실제 있을 수 있다. 오늘 현재 지자체 학예직이 전국에 걸쳐 200명이 약간 넘는다는데, 이 200명 중에 그리 분류되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이런 놈 저런 사람 다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 다시 말해 지역토호화해서 지역 이익만 대변하고 문화재는 안중에도 없는 것으로 치부된 사람이 있다 해서, 나아가 그런 사람이 꽤 된다 해서, 그것이 지역에 대한 중앙의 일방적 통제, 혹은 중앙에 의한 지방 소재 문화재의 직접 관리를 관철하는 논리로 작동할 수는 없다.


지금 지자체마다 아우성이다. 국가지정 문화재 관리는 아예 중앙으로 가져가라 난리다. 실제로 몇 군데는 가져왔다. 어이없는 방화에 불타 내린 숭례문이 그리해서 서울 중구청에서 넘어왔고, 옆동네에서 벌어진 이 일을 본 종로구청은 동대문도 가져가라, 문묘도 중앙정부가 가져가라 한다. 이리 해서는 결코 문화재를 보호하지 못한다. 


왜 이런 일이 빚어지는가? 한가롭게 문화재 관리에 투입할 재원이 없다는 열악한 지방 재정도 원인일 수 있고, 여타 다른 원인도 있겠지만, 중앙정부 일원인 문화재청이 그 중앙정부 전체, 더욱 구체로는 조직을 장악한 행자부라든가 돈줄을 쥔 기재부 같은 데를 향해 맨날 쏟아내는 그 논리, 다시 말해 총만 주고 총알은 주지 않는다는 그 논리가 이에서도 그대로 작동함을 본다. 


이에 의해, 문화재청은 지자체 학예직들로 하여금 그들이 제 목소리를 내면서 자기 일을 하도록 여건과 지원은 전연 해주지 않으면서, 그들에 대한 일방적 헌신을 강요하는 구조가 계속 관철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지켜보는 지방 학예직들은 다행히도 저에 해당하는 사람은 없다. 내가 그런 사람만 골라 만나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런 사람만 우연히 눈에 띄어서인지는 자신이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지켜보는 그들을 통해 지방 학예직 전부를 일반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놈이 있는가 하면 저런 학예직도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수행하는 일을 보니 그야마로 초인이다. 뭐, 솔까 초인이라기보다는 실은 잡역부다. 미안하다 잡역부라 해서. 하지만 이보다 더 적절한 말을 찾아내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 주기 바란다. 


문화재청이 어떤 일들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좀 있는데, 이들 지자체 학예직이 수행하는 일을 보면 된다. 이들이 수행하는 일 전부가 문화재청에서 하는 일이라고 보면 대과가 없다. 그래서 이들 학예직은 언제나 말한다. 지역에서는 내가 바로 문화재청장이라고 말이다. 이 말처럼 지자체 학예직을 적절히 대변하는 것은 없다고 본다. 그래, 그들은 지역 문화재 사령관이다. 


이와 유사한 문제의식을 담은 내 어떤 글(페이스북 포스팅을 말한다)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이들 지자체 학예사가 하는 잡역 중 하나가 죽은 새 줍기가 있음을 본다. 계절별로는 겨울에 새가 많이 죽는 편인데, 그렇게 죽은 새가 천연기념물 혹은 그것으로 의심되는 신고가 들어오면 학예사들이 달려나가는 모양이다. 천연기념물이 문화재이기 때문이다. 죽은 새 문제는 언제나 지자체에서는 학예직과 환경 관련 부서에서 영역을 두고 싸우는 모양이다. 


이런 신고를 받고 달려나갔더니 천연기념물이 아닌 기러기라서 허탈했다는 웃지 못할 포스팅도 있다. 이게 실제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믿기는가? 21세기 백주대낮에 죽은 새를 두고 관할권을 다투는 이런 현상이?


내가 요즘 고고학계를 향한 비판을 다시금 쏟아냈거니와, 내 요점이 이거다. 고고학계는 당연히 고고학 관련 업무, 특히 개중에서도 발굴이 문화재 비중이 크다 하겠지만, 그래서 그네들이 하는 일이 곧 문화재를 한다고 하겠지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다. 이들 학예사가 수행하는 일 봐라. 이걸 보면 다시금 문화재 중에서 고고학 혹은 발굴은 정말로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문화재는 죽은 새 줍기를 포함한 이런 일들의 거대한 집합명사다. 고고학이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유독 고고학만 나서서, 그런 우리가 문화재 전문가니 하고 나서는 꼴, 솔직히 구토난다. 저들 학예사를 앞에 두고도 고고학이 문화재 전문가라고 하겠는가 말이다. 그들 중에 개차반이 있다 해서 그들을 향해 중앙이 일방으로 통제해야 한다거나, 중앙의 수하에 두어야 한다는 발상은 성립할 수 없다고 나는 본다.


솔까 같은 논리로 지방을 향한 저런 토호 혹은 토호성 세력이 문화재청이라고 없는가? 사람 사는 세상이다. 이런 놈이 있으면 저런 사람도 있기 마련이거니와, 문화재청에 일부 삐딱한 사람, 혹은 부정직이 의심되는 사람이 있다 해서 그 조직 전부가 삐딱하다거나 부패했다는 논리가 성립할 수 없음과 같다. 내 보기엔 이런 삐딱이 혹은 부정직한 사람이 문화재청에도 있다.


지자체 학예직들은 부패한 토호라 해서 그들을 믿을 수 없으므로, 그들을 중앙정부에서 강력히 통제해야 한다는 발상은 조선인은 스스로 국가를 경영할 능력이 없으므로, 대일본제국 식민지로 계속 두어야 한다는 그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스는 엘긴 마블을 수용 전시할 여건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그걸 돌려주어서는 안된다는 영국정부의 제국주의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같이 가야 한다. 문화재 관리 역시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어깨 나란히 하고 같이 가야 한다. 문화재청에서는 지방정부 통제가 불가능하다고 할지 모르나, 누가 봐도 갑을 관계로 보면 여전히 문화재청이 전자임을 말할 나위가 없다. 


*** 그제 이와 같은 내 페이스북 포스팅에 어느 지자체 학예연구사가 이런 댓글을 달았다. 음미할 만 하다. 


옛날에 별정직 아제들 중에 그런 분 많았습니다. 문화재는 안중에도 없고 문화재보호법이 악법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죠. 문화재청에서 그들이 누군지 구분 못하죠ㅋ 그 인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거라고 사료됩니다. 



1961년 이래 문화재관리국 시대를 포함해 2018년 차관급 문화재청에 이르기까지 역대 문화재관리국장과 문화재청장 중 소위 전문가에 속하는 국장 청장은 내 보기에는 딱 한 명이 가장 근접한다. 고 정재훈 국장이 그 사람이다. 기타 중에는 소위 문화재 전문가로 분류하는 국장 청장이 있지만 아래와 같은 이유들로써 흔히 문화재 전문가로 분류하는 어느 누구도 전문가로 분류할 수는 없다.


초인적 문화재 행적을 보인 고 정재훈



역대 문화재 수장 중 현재까지는 아마도 가장 유명한 유홍준? 미술사나 좀 알고 답사 좀 했을 뿐이지, 무슨 '문화재' 전문가이겠는가? 

이건무? 젊은 시절 발굴 좀 해 봤고, 박물관 경영을 좀 해 봤지, 무슨 '문화재' 전문가이겠는가? 

최광식? 문헌사학자로 삼국시내 전공자로, 대학박물관장 경험한 사람이지 무슨 '문화재' 전문가이겠는가?

변영섭? 생평 대학교수로 지낸 미술사가로 반구대 암각화만 좀 신경썼지 그가 무슨 '문화재' 전문가이겠는가?

나선화? 도기나 자기 연구자로 이화여대박물관에서 생평을 보낸 인물로 그가 무슨 '문화재' 전문가이겠는가?  


이들이 해당 분야 전문가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해도, 그것이 곧 그들이 문화재 전문가임을 보이는 보증수표는 아니다. 아래서 다시 상론하듯이 저들이 저런 일을 투신한 것과 '문화재를 한다'는 개념은 전연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 광범위한 문화재 행정을 두루 경험하고, 고고학과 조경, 건축학 등등에 실로 광범위한 실무 경험과 연구업적을 축적한 정재훈 국장이야말로 소위 말하는 문화재 전문가에 제일로 근접한 사람이다. 정 국장과 더불어 정기영 국장도 이에 포함할 만하다.


함에도 그 수장을 두고 틈만 나면 전문가 타령이다. 인사철만 되면, 혹은 그 경질 무렵이면, 전문가가 와야 한다는 당위가 정답처럼 군림한다. 문재인 정부 초대 문화재청장으로 정통 문화재 관료인 김종진씨가 경질되고 근자 소위 문화 전문 언론인 출신 정재숙 문화재청장이 등장하자 소위 문화재 전문가 그룹 일부에서는 몹시도 이에 불만을 품고는 그가 '전문가'가 아니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공룡화석 발굴...고생물화석도 역시 문화재 영역이다.



그 집단을 보니, 가관인 점이 그네들 역시 문화재 전문집단이 전연 아니라는 사실이다. 문화재 전문가 집단이 아닌 사람들이 그들 자신은 자연 문화재 전문가 집단이라는 의식을 바탕에 깔고는 문화재 정책 수장은 문화재 전문가가 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착각한다. 땅 파는 고고학 하면, 불상 연구하는 미술사학자라면, 건물지 연구하고 조사하는 건축사학자라면, 문화재를 보존수리하는 보존과학도라면, 그것이 문화재 전문가임을 입증하는 보증수료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이는 커다란 착각이요 오만이다. 그런 일을 하는 행위를 고고학을 한다, 미술사를 한다, 건축사를 한다, 보존과학을 한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언정 그들이 각기 하는 일이 결코 문화재를 하는 일일 수는 없다. 그 무수한 문화재를 하는 행위 중 항하의 모래알 같은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실로 오만방자하게 자기네가 문화재를 한다는 말을 하며, 자기네가 문화재 전문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문화재와 고고학은 다르다. 

문화재와 미술사학은 다르다. 

문화재와 건축사학은 다르다. 

문화재와 보존과학은 다르다.


충주 백제시대 유적 발굴..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고고학 발굴은 문화재 영역 중 일부다.



고고학을 하는 행위가, 미술사학을 하는 행위가, 건축사학을 하는 행위가, 보존과학을 하는 행위가 문화재를 하는 행위 광의에 포함될 수 있을지언정, 그것이 곧 문화재를 하는 일 전반을 커버할 수는 결코 없다. 그만큼 문화재를 한다는 행위나 개념은 더욱 포괄적이고 광의적이며 추상명사이며 집합명사다. 문화재청장은 고고학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고고학도 출신 이건무가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기는 했지만, 청장이 된 이건무는 결코 고고학자일 수는 없다. 그는 무수한 문화재정책을 입안하고 그것을 결정하는 지위와 역할이 주어졌다. 


물론 역대 청장 중에 소위 전문가로 분류하는 사람들이 이런 본분을 망각하고, 해당 분야 전문가 행적을 버리지 못한 이가 있으니, 이 경우 예외없이 문화재 정책이 울트라 난맥상을 보였다는 사실은 문화재를 한다는 것과 앞에 든 저와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왕청난 차이가 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반구대에 올인한 변영섭은 그 자신이 문화재청장이 아니었으며, 청장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반구대 운동가였을 따름이다. 그의 시대에 문화재 정책이 난맥상을 보인 까닭은 청장이 종래의 개벌 전공, 즉, 반구대를 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작금 고고학계에서는 발굴행정 때문에 난리인데, 그 난맥상 뿌리를 연 시대가 공교롭게도 고고학도 출신 이건무 청장 시대였다는 점을 어찌 설명하려는가? 


덧붙여 위에 언급한 사람들이 잘 봐줘서 문화재 전문가라고 하자. 그렇다면 그들이 문화재 전문가여서 저들 시대 한국 문화재행정이 꽃을 피웠다고 할 수 있는가? 내 보기엔 행정 관료 출신, 혹은 군발이 출신 수장들에 견주어 하나도 나을 바가 없고, 외려 퇴보한 시대였다고 간주한다. 


당신들이 말하는 문화재 전문가가 과연 무엇인지, 심각히 곱씹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문화재와 고고학은 다르다. 

문화재 관리에도 돈과 인력과 조직이 필요하다. 이 자리에서는 돈, 다시 말해 고급진 말로 예산 문제는 간단히 언급하고 사람, 곧 인력과 조직에만 집중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문화재 관리를 위한 조직을 논할 적에 항용 그 중앙사령탑인 문화재청을 이야기한다. 문화재 관리 주무 정부 조직이 문화재청인 까닭이다. 


2009년도 정부예산안



올해보다 무려 9.7%나 껑충 뛴 470조5천억원이라는 슈퍼예산으로 편성됐다는 내년도 정부예산안에서 차관급 꼬바리 청에 속하는 문화재청은 여전히 1조원도 확보하지 못했다. 정부가 9월 28일 발표한 2019년 예산 및 기금운용계획(안)을 보면 내년도 문화재청 예산은 8천693억원이 편셩됐다. 올해 8천17억원보다 8.4%가 증가한 수치다. 


8.4%가 여느 때라면 문화재청에는 슈퍼 증액이 되겠지만, 정부 전체예산안 증가치가 9.7%이니 청 예산은 외려 감소했다고 봐도 된다. 물론 예년 문화재청 예산 확정 추세를 보면, 국회 심의 단계에서 대체로 300억원 안팎이 늘어나니, 이른바 문화재 예산은 대표적인 쪽지 예산으로 분류되는 까닭에, 국회의원들이 지역구 예산을 중심으로 관심 사업 예산을 추가로 확보하는 일이 많은 까닭이다. 이렇게 보면 문화재청 내년 예산은 아마도 지금 정부예산안 증가치인 9.7% 어간에서 평균치 증가율을 기록할 것으로 나는 본다. 


하지만 이리 생각할 수도 있다. 8천억원대가 전체 정부예산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 할 테지만, 이것이 어디 적은 돈인가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그 내역을 뒤져 보면, 사적을 비롯한 문화재 지정 구역 부동산 매입에 거의 절대적인 비중이 가 있어, 여타 사업을 펼치기가 여간 곤란하지 않다. 이런 문화재청이 전국에 산재한 무수한 문화재를 다 직접 관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까닭에 항용 문화재를 다 관리하고 싶어도 돈도, 사람도 없다는 볼맨소리가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런 읍소 혹은 호소에 언론 역시 적절히 보조를 맞추기도 한다. 조직 문제에 천착하기로 했으므로, 이 점에 주목하면 그래 조직이 없다. 조직을 확대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2007년 문경 고모산성 발굴


관리할 문화재는 산더미인데 그것을 관리할 조직과 인원이 태부족인 이런 상황을 문화재청에서는 흔히 총에 비유한다. 총만 주고 총알은 안 준 꼴이랑 같다고 말이다. 문화재 관리를 왜 방치하느냐 하는 문제 제기가 있을 적마다 문화재청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다는 모습을 보인다. 우리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한다. 총만 주고 총알은 안 주는데 우리더러 어쩌란 소리냐고 외치는 것이다.


이런 모습, 그 진실성이라는 측면에서 내가 볼 적에는 절반만 믿을 만하고, 절반은 연출이다. 내가 본 공무원이라는 조직이 그리 간단치는 않아,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데는 귀신이 곡할 재주를 발휘하곤 한다. 문화재청 역시 이런 곤혹에 처할 때마다 그것을 조직 확대할 절호의 기회로 돌려세운다. 


물론 조직 확대가 정부 운용 정책 전체와 맞물리니 결코 쉽지는 않다. 생똥 싸도록 노력해도 고작 정원 몇 명 늘리거나, 부서 한두 개 추가할 뿐이니, 이런 식으로 하세월이다. 물론 이런 잰걸음을 통해 그나마 지금의 문화재청이라는 어쩌면 공룡이라고 일컬을 만한 조직을 탄생시켰을 것이다.


원하는 조직을 대폭 늘려주지 않으니, 얼마 전부터 문화재청은 다른 방식으로 이 욕구를 타개하려 한다. 기존 조직의 재편과 다른 조직의 흡수 움직임이 그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국립박물관 흡수 움직임으로 대표하는 후자는 별도 자리를 마련해 살피고자 한다. 


조직 확대 개편에 무엇이 문제인가 진단에 들어간 문화재청은 다른 정부조직과 비교하고는 언제나 지방청이 없다는 특징을 집중 부각하기 시작한다. 차관급 다른 청은 거의 다 지방청이 있어 분신처럼 움직이면서 해당 지역 업무를 직접 관장하는데, 문화재청은 없단 말이지? 옳거니, 가뜩이나 각 지자체서는 문화재청 더러 적어도 국가지정 문화재 직접 관리권을 다 가져가라 하고, 이구동성으로 못하겠다고 난리니, 이 참에 우리가 이를 다 관리하자. 그럴러면 전국에다가 그물망을 만들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지방청이다. 지방청 설립 움직임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내 기억에 문화재청이 지방청 설립 움직임을 본격화하기는 대략 10년전쯤부터인데, 갈수록 이쪽으로 조직 개편 방향을 선회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지방청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가? 안 된다. 조직, 다시 말해 공무원 정원을 틀어쥔 행자부에서 요지부동이다. 지방분권화시대에 무슨 지방청이냐 불호령이다. 조직에는 항용 돈이 따르기 마련이니, 조직이 통과한다 해서 또 기재부에서는 돈을 대준다는 보장도 없다. 산 넘어 산이다. 


이에 곰곰 돌아 생각하니, 어? 국립문화재연구소라는 직할 기관이 있고, 그 산하 곳곳에 지방연구소가 있네? 이거네? 그래 이 지방연구소를 지방청으로 확대하는 거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경북문화재지방청을 맹글고 가야문화재연구소는 경남문화재청으로 개편하며, 부여연구소는 국립충남문화재청으로 확대하며 하는 안을 세우기 시작한다. 이리 방침을 정하고 보니 그럴 듯 하기도 하다. 기존 조직을 재활용한다는데, 이것이 훨씬 부담이 적으니 상대적으로 현실성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커니와 이는 중앙집권제의 욕망이라 지방분권화라는 시대 추세에 맞지도 않을 뿐더러, 이런 방식으로 제 아무리 조직과 인원을 늘인대도 지금 제기된 문제들은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해결된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그많은 문화재를 어떻게 문화재청이 직접 관리한단 말인가?


이런 지방청 설립 움직임은 무엇보다 가뜩이나 틈만 나면 문화재 관리 업무를 중앙으로 가져가라는 지방정부로서는 문화재 업무를 더욱 왜소화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 중앙정부에서 문화재를 관리하기 위한 지방청을 세운다는데 어느 지자체가 관내 문화재에 신경을 기울이겠는가? 그런 점에서 지방문화재청 설립은 재앙이 되고 만다고 나는 본다. 


문화재청에서는 흔히 지방청 설립 근거로 산림청 같은 데를 비교한다. 하지만 유의할 점은 각 지자체에 산림과 혹은 그 비스무리한 조직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문화재 조직 개편은 어떠해야 하는지 자명하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알파요 오메가가 문화재는 현지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방정부와 그 지역코뮤너티가 초지일관 관리해야 한다. 이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지자체에 그 업무를 관장하는 전문 조직이 있어야 한다. 작은 지자체에서는 문화재계 같은 것이 생겨야 하며, 큰 지자체에는 문화재과 혹은 문화재국 같은 조직이 있어야 한다. 이런 전담 조직이 있는 지자체가 더러 있다. 


수종사에서 내려다 본 두물머리


따라서 조직이라는 측면에서 문화재가 어찌해야 하는지는 자명하게 답이 나온다? 중앙정부 조직을 공룡처럼 늘려야하겠는가? 지방정부에서 그 전담 조직을 키워야 하겠는가? 당연히 후자다. 후자를 지향하는 지방청 움직이라면 나는 언제건 작금 문화재청이 추진하는 지방청 설립을 위한 움직임을 지지한다. 하지만 그 움직임 어디에도 지자체 관련 조직 신설 혹은 증설이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이 기회를 빌려 문화재청 몸집을 불리기에만 집중했을 뿐이니, 그래서 내가 이 움직임을 반대한다. 


문화재가 많은 일부 지자체에서 그런 조직이 있기는 하나, 아직은 태부족이라, 문화재청은 자기네 몸집을 키우는데 혈안이 될 것이 아니라, 이들 지자체에서 문화재 담당 부서와 직원들이 지닌 힘을 키우는 방향으로 정책의 일대 전환을 꾀해야 한다는 뜻이다. 단순히 조직만 만들어 놓으면 그 결과는 눈에 선하다. 문화재와는 전연 관련 없는 행정직 기술직 등등이 자리를 장악할 것이다. 그 조직 전부가 반드시 문화재 관리 전문이어야야 한다는 법을 강제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계장 과장 국장 정도는 이를 위한 전문인력으로 뽑은 학예직이 해야 한다고 나는 본다. 물론 이런 전문가라 해서, 그 일을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거니와, 실제 행정직 등등이 훨씬 업무능력이 뛰어날 수도 있다. 따라서, 그 대안으로 어떤 강제화보다 관습을 통해 이런 문화재 전담 조직에는 그 전문 인력이 팀장을 하고 조직원을 구성하는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려 해야 하며, 그 점에서 나는 문화재청이 할 일이 막대하다고 본다. 


포항 출토 나무화석. 대전 천연기념물센터


문화재청은 지역 곳곳에서 활동하는 문화재 전담 인력들의 힘을 키워야 하며, 그들이 제 능력을 발휘하고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극 지원해야 한다고 본다. 이에 대해 문화재청이 그럴 힘이 있느냐 항변한다.


없을까? 문화재 없는 지자체 없다. 그 예산 누가 책정하고 누가 배정하는가? 예산 배정권이 문화재청에 있는 힘이 없을 수는 없다. 단군조선 이래, 아니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돈줄 쥔 놈이 장땡인 법이다. 


지금 이 순간도 각 지자체 학예직이나 문화재 전담부서는 문화재청을 향해 울분을 토로한다. 툭하면 공문만 내려보내서는 감내놔라 배내놔라 하면서 열라 부려먹기나 하면, 일만 터지면 지역에다가 책임을 떠넘긴다는 볼멘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져나온다. 그런 항변과 울분 적어도 80%는 나는 정당하다고 본다. 문화재청이 후원군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이들은 이미 모조리 반문화재청주의자들로 돌아섰다. 우군이 되어, 문화재 최일선에서 그 업무를 해야 할 사람들이 모조리 문화재청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이들을 문화재청 우군으로 끌어들여야 할 것 아닌가? 그들의 도움없이 무슨 문화재를 관리하겠다는 것인가? 설혹 문화재청이 지방청을 설립한다 해도, 나는 저와 같은 지자체 인력과 조직 충원없는 그것은 반대한다. 

경희궁


창덕궁을 선전하는 문구 중에 빠지지 않는 말이 자연과의 조화다. 이 논리를 유네스코까지 들이밀어 그것이 세계유산에까지 등재되는 큰 발판이 되었다. 예서 자연은 노자(老子)의 그것보다 양놈들이 말하는 nature에 가깝다고 나는 본다. 그 영문 등재신청서와 그 영문 등재목록을 자세히 살핀 것은 아니로대 틀림없이 그리 되어 있을 것으로 본다. 


한데 예서 주의할 것은 자연과의 조화 실체가 무엇이냐는 거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궁 전체와 그것을 구성하는 개별 건축물들의 레이아웃 혹은 디자인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것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에서 무엇과 다른가 하는 고민을 유발한다. 


첫째, 동시대 혹은 같은 한반도 문화권에서 여타 궁과 다르다는 뜻이니 예컨대 조선왕조 법궁인 경복궁과 다르다고 한다. 둘째,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궁과도 다르다고 한다. 북경의 자금성이 비교대상의 대표주자일 것이다. 실제 이들과 좀, 아니 왕청나게 다르다. 이들 비교대상은 무엇보다 평지에 위치하며 그런 까닭에 궁이라면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그랜드 디자인을 만족할 호조건을 구비한다. 그 그랜드 디자인은 남북 중심축을 삼되 그것을 동서로 반토막 내고 그 전면은 각종 국가의례 공간으로 삼되 그 북쪽은 내리(內裏)라 해서 왕의 사적인 생활공간으로 구성한다. 그 중심은 전면 의례 공간 정중앙 정북쪽을 차지하는 정전이니 경복궁은 근정전이 그것이니 이는 지상에 강림한 북극성이다.


이에 견주어 보면 창덕궁은 개판 일분전이라, 남북 중심축이 되지 못하고 꾸불꾸불 난장판이다. 한데 이 난장을 요새는 일러 포장해 가로대 자연과의 조화라 하니, 이는 새빨간 사기다. 창덕궁이 왜 저 모양인가? 


창덕궁 인정전



첫째, 그 전면 종묘에서 빚어진 변칙 난공사의 여파에 지나지 않는다. 창덕궁을 제대로 디자인에 맞추어 지으려면 전면 종묘를 까부셔야 한다. 하지만 종묘를 침범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것을 피하다 보니 뱀 몸뚱아리처럼 휘어졌을 뿐이다. 둘째, 공사비 문제가 무엇보다 컸다. 창덕궁이 동시대 혹은 시대와 공간을 달리하는 다른 동아시아 여타 문화권 왕궁과 디자인이 다른 듯하지만, 이도 피상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아, 실제 그를 살피면 동아시아 그랜드 디자인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다. 앞에다가 정전을 세우고 뒤에다가 제왕의 일상적 거주공간을 배치하는 구조는 한 치도 다르지 않다. 다만 직선을 맞추지 못해 어긋나 있을 뿐이니, 이 어긋남이 자연과의 조화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자연이 그 모양 그 꼴로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자연과의 조화를 논할 때 항용 풍수라는 말을 동원한다. 풍수설에 따라, 지금과 같은 창덕궁 배치가 가능했다고 한다. 실제 실록을 비롯한 각종 기록을 보면 왕궁을 택지(擇地)할 적에 풍수를 고려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것이 어찌 비단 창덕궁만의 문제이겠으며, 모름지기 한반도 문화권만의 문제이겠는가? 간단하다. 창덕궁이 지금 저 모양이 된 까닭은 그 일대 지형이 그래 돼 있었기 때문이지, 무슨 자연과의 조화옹을 구하는 그런 작업에서 기인한 것은 결코 아니다. 


경복궁 향원정


저 땅에다가 궁궐은 저리 지을 수밖에 없었다. 전면에 종묘가 있지, 뒤에는 산이 있지, 그것을 정통적인 왕궁 그랜드 디자인에다가 맞추려면, 종묘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고, 더구나 그 뒷산은 전부 까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경제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간단히 말해 그리 해서 평지를 구축해서 왕궁을 만들었다가는 나라 살림이 거덜난다. 돈 때문에 저리했을 뿐이다. 그리하다 보니, 아니 그리 해놓고 보니, 그런 대로 창덕궁이 괜찮았을 뿐이다. 숲도 좋고, 나무도 많으니 좋았을 뿐이다. 이는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해 놓고 보니 좋아서, 경복궁이 법궁으로 군림하던 시기에도 왕들은 허허벌판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좋아 창덕궁을 자주 찾았을 뿐이다. 


함에도 창덕궁이라든가 조선왕릉이라든가, 이번 전통산사는 물론이고 틈만 나면, 자연과의 조화를 전가의 보물처럼 써먹는다. 뭐 한국의 유산은 자연과의 조화, 풍수라는 말을 빼면 앙상한 뼈다귀밖에 남지 않는다. 


지겹다. 이젠 그만 써먹어라. 무슨 자연과의 조화야? 


그리고 그 내막을 봐도 자연과의 조화는 개소리에 지나지 않아, 실은 조선왕궁은 창덕궁을 비롯해 실제로는 난개발의 첨단이었다. 땅덩어리는 좁지, 사람은 많지 하니, 좁은 땅에다가 각종 건물을 마구잡이로 지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 남은 동궐도니 북궐도니 하는 궁궐 그림 봐라. 이런 난개발 지금도 보기 힘들다. 건물 들어갈 만한 곳은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건물들을 세웠다. 그래서 조선시대 궁궐 길은 미로를 연상케 한다. 


조선시대와 그 이전 우리 조상들이 유별나게 미감을 갖추었고, 그에 따라 그런 미감에다가 특출난 디자인 감각을 가미해서 궁궐을 지었다는 통념은 전연 근거가 없다. 그네들 건축기법이 아름답기 짝이 없다느니, 그래서 어디 하나 흠결이 없다느니 하는 주장은 개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네들은 나무를 십년간 바닷물에 말려 썼으니, 터짐이 없네 하는 주장이 지금도 정답처럼 군림한다. 봐라, 그네들 공사는 지금보다 더 날림이었다. 저 큰 경복궁을 복원하는데 수십년 걸렸을 법하지만, 3~5년만에 뚝딱 해치웠다. 


자연과의 조화, 혹은 그 절대의 기반인 풍수는 전통을 보는 절대 잣대가 절대가 절대가 될 수는 결코 없다. 그럼에도 작금의 문화재 현장에서는 각종 개소리가 난무한다. 우리 조상은 그렇지 않았다는 그런 낭설이 지금 이 순간에 횡행한다. 그런 낭설이 지금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어, 뭐 궁궐에서는 담배도 안 피운 걸로 아는 놈도 있다. 에라이...정조는 골초였다. 편전이건 어디서건 담배 연신 벅벅 피워댔다. 불 다 땠다. 임금이 자는 방에 군불이 없을 수는 없다. 단 한 순간도 조선 궁궐에 불이 꺼진 적 없다. 


궁궐을 궁궐답게 가꾸는 일은 담배 벅벅 피게 하고, 군불 연신 때는 일이다. 


아참...한양은 평지에 도성을 세울 수가 없다. 청계천 범람 때문이었다. 


  1. 연건동거사 2018.09.02 17:14 신고

    ㅋㅋㅋ

  2. 연건동거사 2018.09.03 02:26 신고

    동문선에 실을 만한 명문입니다요.

    이제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은 고만 할때가 되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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