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2권에 보인다. 

일본(日本)의 대내전(大內殿)은 그 선대가 우리나라로부터 나왔다 하여 사모하는 정성이 보통과 다르다 한다. 내가 일찍이 널리 전대의 역사책을 상고해 보아도 그 출처를 알 길이 없고, 다만  《신라수이전(新羅殊異傳)》에 이르기를, “동해 물가에 사람이 있었는데, 남편은 영오(迎烏)라 하고 아내는 세오(細烏)라 했다. 하루는 영오가 해변에서 수초[藻]를 따다가 홀연히 표류하여 일본 나라 조그만 섬에 이르러 임금이 되었다. 세오가 그 남편을 찾다가 또 표류하여 그 나라에 이르자 그를 세워 왕비로 삼았다. 이때 신라의 해와 달이 빛을 잃으니, 일관(日官 천문 맡은 관원)이 아뢰기를, ‘영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기였는데, 이제 일본으로 갔기 때문에 이런 괴이한 현상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영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곳에 이른 것은 하늘이 뜻이다.’ 하고, 드디어 세오가 짠 비단[綃]을 사자에게 붙여 보내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지내면 된다.’ 하였다. 드디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을 영일(迎日)이라 이름하고 이어 현(縣 고을)을 두니, 이는 사라아달왕(斯羅阿達王) 4년이었다.” 하였다. 우리나라 사람으로 일본의 임금이 된 자는 이 뿐이나 다만 그 말의 시비는 알 수 없다. 대내의 선조란 혹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싶다.

*** 대내씨(大內氏)는 일본 장문(長門) 지방을 지배하던 호족(豪族)이었다. 전(殿)은 그들을 존칭하는 말인데 옛날 사람들이 일본 풍속을 몰라서 존칭까지 붙여 말한 것이다.

뭐 말할 것도 없이 사가정이 말하는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도 보이는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다. 한데 이 필원잡기 대목이 중대한 까닭은 그 출처를 사가정이 신라수이전을 지목했다는 사실이다. 삼국유사에는 출처 기록이 없다고 기억한다. 

내가 항용 역사를 대하는 자세의 문제점 중 하나로 지적하는 것이 덮어놓고 선대 문헌에 보이는 기록이면 후대 문헌이 그 선대 문헌을 채록했다고 안이하게 간주하는 현상이 있다. 서거정의 필원잡기가 신라수이전을 언급 안했다고 하면, 틀림없이 사가정이 채록한 이 이야기는 출처를 삼국유사로 봤을 것이다. 하지만 사가정이건 일연이건 같은 수이전을 놓고 인용한 것이다. 

신라 왕실 뒤흔든 비처왕비 간통 스캔들

[중앙선데이] 입력 2017.02.05 05:35 수정 2017.02.05 06:40 | 517호 23면


조선 초기에 완성된 편년체 역사서인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서 해당 연월(年月)을 보면 안정복이 말한 사건과 분명히 대응되는 사건이 보인다. 한데 자세히 살피면 이는 『삼국유사』기이(紀異)편에 ‘사금갑(射琴匣)’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된 것과 같은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사냥 갔던 비처왕 까마귀 말 듣고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상자에 화살

사랑 나누던 왕비 선혜·승려 적발

승려는 죽이고 왕비는 폐위 시켜


사금갑은 신라를 배경으로 한 설화성 짙은 이야기다. 간단히 골자를 추리면 비처왕(毗處)이라고도 하는 신라 제21대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 때, 궁주(宮主)가 왕궁 내부에 설치한 불당에서 일하는 승려인 내전분수승(內殿焚修僧)과 몰래 정을 통하다가 함께 복주(伏誅·목 베어 죽임을 당함)되었다는 내용이다. 사금갑은 ‘거문고 박스를 쏘라’라는 뜻이다.


이에 의하면 소지왕은 이해 정월 15일에 천천정(天泉井)이라는 곳에 행차했다가 까마귀가 하는 말을 따라 궁궐로 돌아와 거문고 보관 상자를 향해 화살을 쏘았더니, 그 안에서 몰래 사랑을 나누던 궁주와 승려를 현행범으로 체포해 죽음을 내렸다고 한다. 이때부터 정월 보름날을 오기일(烏忌日)이라 해서 찹쌀로 밥을 지어 까마귀에게 제사지내는 풍습이 생겼다고 한다. 소위 약밥의 유래를 설명하는 이야기다.

  

정월 대보름날 약밥의 유래 설명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에도 이 같은 이야기가 수록돼 있다. 다만 간통을 하다 목베어 죽음을 당한 왕실 여인을 『삼국유사』에서는 ‘궁주(宮主)’라 했지만,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은 ‘왕비(王妃)’라고 표기한 미세한 차이가 보인다. 궁주의 실체를 둘러싼 논란이 있다. 고려시대에 널리 쓰이다가 조선 초기에 와서 사라지기 시작한 궁주는 처음에는 후궁을 지칭하다가 후기에 가면 왕비를 지칭하게 된다. 따라서 사금갑 이야기에 등장하는 궁주는 소지왕의 후궁일 수도 있고, 왕비일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그 실체가 무엇이건 『삼국유사』와 『삼국사절요』 『동국통감』은 내전분수승과 간통 사건을 일으킨 여인 실명을 공개하지 않았다. 한데 이보다 훨씬 뒤에 나온 『동사강목』에서 안정복은 대담하게 그가 바로 소지왕비인 선혜라고 선언한 것이다. 무엇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했을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소지왕비가 누구이며, 또 선혜는 누구인지를 알아야 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소지마립간 즉위년조를 보면 왕은 “자비왕의 맏아들이고 어머니 김씨는 서불한 미사흔의 딸이다. 왕비는 선혜부인(善兮夫人)으로 이벌찬 내숙(乃宿)의 딸이다”고 돼 있다. 소지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삼국유사』 왕력(王曆)편에서는 비처마립간(소지마립간)이 “자비왕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미사흔 각간의 딸이다. 기미년에 왕위에 올라 21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왕비는 기보 갈문왕(期寶葛文王)의 딸이다”고만 했을 뿐, 실명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왕의 장인은 갈문왕 기보라고 해서, 이벌찬 내숙이라고 밝힌 『삼국사기』와는 다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비처왕비 문제를 어떻게 봐야할까. 우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동일한 인물을 지칭했을 가능성이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벌찬 내숙과 기보 갈문왕은 동일인이 된다. 다시 말해 이벌찬 내숙이 죽고 난 뒤에 갈문왕으로 추봉되고 이름도 기보로 바뀌었다는 얘긴데, 여러모로 봐도 비합리적이다.


다음은 이 둘이 서로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다. 다시 말해 비처왕비는 이벌찬 내숙의 딸 선혜일 수도 있고, 이름은 알 수 없는 기보 갈문왕의 딸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신라는 일부일처제 사회였다. 따라서 한 남자에게 두 명의 부인이 있었다면 이는 시기를 달리하는 부인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누가 먼저이고, 나중인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비처왕에게는 선혜와 기보 갈문왕의 딸이라는 부인 두 명이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선혜가 언제 비처왕비로 간택되었는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결정적인 흔적이 『삼국사기』에 보인다. 신라 소지왕본기 8년(486) 조에는 “2월에 내숙(乃宿)을 이벌찬으로 삼아 나라 정치에 참여케 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내숙은 선혜의 아버지다. 신라 관위 체계 중 제1위인 이벌찬에 내숙이 임명됐다는 건, 딸 선혜가 왕비로 간택됐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내숙은 왕의 장인이자 왕비의 아버지라는 혈연관계를 발판으로 이벌찬까지 오른 것으로 추론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선혜가 왕비로 간택되는 소지왕 재위 8년 이전까지 소지왕비는 누구였는가. 그가 바로 『삼국유사』가 말하는 기보 갈문왕의 딸이었던 건 아닐까. 그렇다면 선혜는 왕비에 간택되고 나서 불과 2년 뒤인 소지왕 10년(488) 정월 15일에 발생한 소위 사금갑 사건으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난 셈이 된다.


사금갑 사건을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 『화랑세기』엔 여럿 보인다. 비처왕비 선혜가 폐위된 사실이 곳곳에 나오는데, 이를 종합하면 선혜 황후는 묘심랑(妙心郞)이라는 남자와 사랑에 빠져 왕비 자리에서 쫓겨나고 만다. 왕비가 간통 사건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게 아니라 왕비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대목에 차이가 있을 뿐이다.

  

꽃미남 묘심과 왕비, 딸까지 낳아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 전기는 설화랑의 어머니인 금진(金珍)의 계보를 설명하면서 “금진은 아버지가 위화랑(魏花郞)이고, 어머니는 오도 낭주(吾道娘主)다. 오도는 어머니가 선혜 황후이고, 아버지는 묘심랑이다”고 전하고 있다. 이어 묘심랑은 “천주공(天柱公) 아들인데 얼굴이 잘 생기고 색사(色事)를 잘 해서 (비처왕의) 후궁들과 사사로이 정을 통한 일이 많았다. (선혜 황후가) 복을 빌러 절을 찾아 법으로써 약속하기를 삼생(三生)…. 묘심이 주살됐다”고 한다. 중간에 텍스트가 뭉개져 나가 아쉽기만 하지만 어떤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는 않다.


묘심랑은 요즘 말하는 소위 ‘얼짱’ 청년으로, 여자들을 후리고 놀아났다. 선혜 또한 그에게 반했다. 둘이 만난 곳을 절이라고 했다. 이것으로 볼 때 묘심랑은 아마도 절의 스님이었거나, 그게 아니라면 이 절에서 몰래 왕비를 만나 사랑을 나눈 것이다. 한데 이 사건이 그만 발각되어 묘심랑은 목 베임을 당하고, 선혜는 왕비 자리에서도 쫓겨나고 만다. 둘 사이에는 오도라는 딸까지 있었다고 한다.


묘심이 사찰 혹은 승려와 관계있는 인물이었다는 다른 증거는 『화랑세기』 다른 곳에서도 찾을 수 있으니, ‘묘심사(妙心事)’와 ‘천주사(天柱事)’라는 표현이 그것이다. 둘은 지칭하는 대상이 같다. 똑같은 사건을 문맥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묘심이라는 남자와 관련되는 사건’이라 하고, 다른 곳에서는 ‘천주사(天柱寺)라는 사찰을 무대로 일어난 사건’이라고 묘사했을 뿐이다. 사금갑 관련 기록을 참조해보면 천주사는 신라의 궁궐 안에 있던 불당이다.


이런 『화랑세기』의 내용을 종합해보면,사금갑 이야기를 비로소 역사적 사건으로 완전하게 풀 수 있게 된다. 즉, 간통 사건이 발생한 주된 무대는 천주사라는 궁궐 내 사원이며, 왕비의 간통 상대는 그곳 승려인 묘심이라는 남자였고, 간통이 발각됨으로써 남자는 죽임을 당하고 왕비는 폐위됐던 것이다. 이것이 당시 신라 왕실을 뒤흔든 간통 스캔들이었다.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전대미문의 이 사건은 후대에 ‘사금갑’이라는 설화성 짙은 이야기로 포장돼 후세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사도태후, 권력욕에 눈멀어 아들 몰아내고 왕 노릇

[중앙선데이] 입력 2016.11.20 00:38 | 506호 23면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이 집적한 고대 삼국의 괴담 중에 제목이 ‘도화녀 비형랑(桃花女鼻荊郞)’인 에피소드가 있다. 도화녀와 비형랑은 모자지간이다. 어머니 도화녀는 글자 그대로는 복숭아꽃 같은 여인이라는 뜻이니 얼마나 아름다우면 이렇게 일컬었을까? 반면 그가 낳은 아들 비형랑은 그 의미를 종잡기는 힘들지만 하필 이름에 ‘가시나무(荊)’가 들어갔으니 추상(秋霜) 같은 느낌도 없지 않으면서도 조금은 을씨년스럽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형랑의 아버지는 누구인가? 그 실체는 이 이야기 첫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풀린다.

  

“(신라)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은 시호가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대건(大建) 8년 병신년(576)에 왕위에 올라(옛 책에는 11년 기해년(579)이라 하지만 잘못이다) 나라를 4년 동안 다스리다 황음무도(荒淫無道)하다 해서 나라 사람들이 그를 폐위시켰다.”

  

이야기가 사륜왕 얘기로 먼저 시작한 까닭은 그 시공간이 신라 진지왕(재위 576~ 579) 시대이며, 나아가 그 주인공 중 한 명이 진지왕이기 때문이다. 진지와 도화녀, 그리고 비형랑은 이야기를 전개하는 세 축이다. 그렇다면 진지는 누구인가? 이를 위해 무엇보다 삼국시대 정사인 『삼국사기』 그의 본기를 본다.

  

“진지왕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사륜(舍輪·금륜(金輪)이라고도 한다)으로, 진흥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도부인(思道夫人)이고 왕비는 지도부인이다. 태자가 일찍 죽었으므로 진지가 왕위에 올랐다.”

  

진흥왕과 사도 사이에서 태어난 적통 왕자로는 둘째인 그가 왕위에 오른 이유는 태자로 책봉된 형 동륜(銅輪)이 일찍 죽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진지는 즉위한 그해(576)에 이찬(伊飡) 거칠부(居柒夫)를 일인지하 만인지상 자리인 상대등(上大等)으로 삼아 국사(國事)를 위임하고, 이듬해(577)에는 봄 2월에 신궁(神宮)에 제사했으며, 10월 백제가 서쪽 변경을 침입하자 이찬 세종(世宗)에게 군대를 주어 격퇴케 했다. 3년(578) 가을 7월에는 중국 남쪽 진(陳)나라에 사신을 보내는 한편 백제 알야산성(閼也山城)을 빼앗았다. 재위 기간이 워낙 짧은 탓도 있지만 이외에 이렇다 할 공적은 없다. 그러다가 재위 4년(579) 가을 7월 17일에 죽고 만다. 그의 죽음을 적으면서 『삼국사기』는 “시호를 진지(眞智)라 하고 영경사(永敬寺) 북쪽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이것이 진지왕본기에 적힌 그의 재위 기간 행적 전부다.


[즉위한 해 거칠부에게 국사 위임]

진지왕이 죽을 때 나이는 알 수 없지만, 불과 일곱 살에 즉위한 아버지 진흥왕이 536년생이고, 형 동륜이 태자로 책봉된 시점이 566년인 점 등을 고려할 때, 40대를 넘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병이 아니었다면 쿠데타와 같은 이상 사태로 폐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 점에서 수상쩍기 짝이 없는 대목이 진지가 즉위하면서 곧바로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아 ‘국사를 위임했다(委以國事)’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진지는 왕 노릇 제대로 하지도 못하고 누군가에게, 아마도 거칠부로 대표되는 사람들에게 농락당한 셈이다.

  

진지왕의 퇴위 원인에 대해 『삼국사기』는 자연적인 죽음을, 『삼국유사』는 폐위를 각각 거론했다. 『삼국유사』에 따른다면 쿠데타로 쫓겨났다. 한데 그 이유가 황음무도(荒淫無道)다. 절제 없이 주색잡기 같은 음란한 짓을 함부로 일삼는다는 뜻이다. 이런 그를 몰아낸 주체를 국인(國人)이라 했다. 어느 특정한 개인을 우두머리로 내세우기 힘들 때 흔히 쓰는 표현이 국인이다.

  

이런 이유로 폐위된 금륜왕은 나중에 어찌되었을까?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에서는 “이 해에 왕이 폐위되어 죽었다(是年王見廢而崩)”고 한다. 그렇다면 진지왕은 쿠데타로 밀려나서 곧바로 자연적인 죽음을 맞았거나 혹은 쿠데타 세력에게 죽임을 당한 셈이 된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 아무튼 그가 죽은 시점에 대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모두 579년을 거론한다.

  

한데 ‘도화녀 비형랑’ 이야기에는 말이 안 되는 대목이 있다. 다름 아니라 죽어 귀신이 된 그가 도화녀라는 아리따운 여인을 맞아들여 사랑을 나누어 낳은 아들이 비형랑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저간의 사정을 『삼국유사』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경주의)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한 백성에게 딸이 있었는데 자색이 곱고 아름다워 당시에 도화랑(桃花娘)이라고 불렀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관계를 갖고자 하니 여자가 말하기를 ‘여자가 지켜야 하는 일은 두 남자를 섬기지 않는 일입니다. 비록 천자의 위엄이라도 남편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게 할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이에 왕이 말하기를 ‘(너를) 죽이겠다면 어찌 할 것이냐?’고 하니 ‘차라리 거리에서 죽음을 당할지언정 다른 남자를 따를 수는 없습니다’고 했다. 왕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남편이 없으면 되겠느냐?’고 하니 ‘그렇다면 가능합니다’고 했다. 왕은 그 여자를 놓아 보내주었다.”

  

이를 보면, 도화랑은 당시 유부녀였다. 그러다가 왕이 폐위되어 죽는 일이 생기고 그 2년 뒤에는 도화랑의 남편도 죽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지 열흘 뒤 갑자기 밤중에 왕이 살아 있을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그 여자 방으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그러면서 귀신이 된 진지는 “이제는 네 남편이 없으니 괜찮겠느냐?”고 해서 마침내 도화랑의 허락을 얻어 합방하게 된다.

  

“왕이 7일 동안 머물렀는데 늘 오색구름이 집을 덮었고 향기가 방안에 가득했다. 7일 뒤에 홀연히 왕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는 이로 인해 태기가 있고 달이 차서 해산을 하려는데 천지가 진동하면서 남자 아이 하나를 낳았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고 했다.”

  

이렇게 태어났기에 그랬는지 비형은 늘 귀신과 놀면서 그들을 부리니, 심지어 그들을 동원해 개천에다가 다리를 놓았는가 하면, 길달(吉達)이라는 휘하 귀신을 왕의 근신으로 추천하기도 했다. 길달이 여우로 변해 도망치자 다른 귀신들을 시켜 그를 잡아 죽인 일도 있었다. 이렇게 되자 “귀신들이 비형이라는 이름만 들어도 두려워서 달아났다”고 한다. 이후 비형은 당연히 귀신들을 물리치는 신으로 추앙을 받았다.

  

진지와 비형을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른 까닭은 김춘추 때문이다. 김춘추는 진지왕의 손자다. 진지왕에게는 용수(龍樹) 혹은 용춘(龍春)이라 하는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춘추 아버지다. 종래에는 용수와 용춘이 한 사람에 대한 다른 표기로 알았지만, 『화랑세기』를 통해 형제로 밝혀졌다. 용수가 형이다. 한데 『화랑세기』를 통해 드러난 더 재미난 사실은 김춘추는 본래 용수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죽자 그 아내가 동생인 용춘의 부인이 되면서 용춘의 양아들이 되었다는 점이다. 고대 사회에서는 형이 죽으면, 형수를 동생이 취하는 습속이 있었다.


[비형랑은 김춘추 아버지의 이복형제]

비형랑은 용수-용춘 형제에게는 어머니가 다른 이복동생이었다. 『화랑세기』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서제(庶弟)인 비형랑이 힘써 낭도(郎徒)를 모아서 형인 용춘을 도왔다고 한다.

  

그렇다면 진지는 도대체 어떠했기에 황음무도하다 해서 쿠데타의 희생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귀신이 되어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또 무엇일까? 이 비밀을 우리는 오래도록 풀 수 없었다. 그러다가 『화랑세기』가 출현하면서 일거에 사정이 변했다. 13세 용춘공 열전에 의하면, 폐위되어 궁궐에서 3년간 유폐 생활을 더 하다가 죽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죽어 귀신이 된 지 2년 만에 진지왕이 도화녀라는 여인과 관계해서 비형랑이라는 아들을 낳았다는 ‘괴담’을 비로소 이해한다. 다시 말해, 비형랑은 왕위에서 쫓겨난 진지왕이 유폐 생활을 하는 동안에 도화녀와 관계해서 낳은 아들이었다.


[진지왕, 형 죽자 형수를 황후로 삼아]

한데 용춘공 전에는 더 이상한 대목이 있다. “지도가 처음에는 동(銅) 태자(동륜 태자) 궁에 들어갔다. 태자가 아직 죽기 전이었을 때 (지도는) 금륜왕(金輪王=진지왕)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그러다 동륜 태자가 죽고, 금륜이 즉위하게 되자 (지도를) 황후로 삼아 (용춘)공을 낳았다.”

  

이로 보아 지도는 애초에는 진흥왕 큰아들이자 태자였던 동륜에게 시집갔지만, 그 상태에서 동륜 태자 동생인 금륜과 사사로이 정을 통했다. 그러다가 동륜이 죽는 일이 발생하고, 금륜이 태자가 되고, 보위에까지 오르자 황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금륜왕이 황음(荒淫)한 짓을 일삼아 폐위되어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붕어(崩御)”하는 일이 생겼다고 한다. 유궁이란 갇힌 궁궐이라는 뜻이라, 유폐 생활을 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진지는 정말로 황음무도했을까? 『화랑세기』에도 이런 표현이 두어 군데 보인다. 앞에서 본 용춘공전 말고도 7세 풍월주 설화랑(薛花郞) 열전에도 “진지대왕은 미실(美室) 때문에 왕위에 올랐는데도 호색방탕(好色放蕩)해 (어머니이자 진흥왕 왕비인) 사도태후가 걱정이 많았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도태후가 미실과 의논해서 진지왕을 폐위하기로 하고, 실제 그 일을 지도의 오빠인 노리부(努里夫)한테 맡겼다고 한다. 이를 보면 진지왕은 그 자신이 호색 방탕한 습성이 있었던 듯하고, 그래서 어머니 사도와 왕비 지도, 왕비의 오빠 노리부, 그리고 미실이 합세한 세력에 밀려 왕위에서 쫓겨나고 만다. 친위 쿠데타로 쫓겨난 것이다.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손위처남에게까지 ‘찍혀서’ 폐출된 것이다.

  

다른 데를 보면, 쿠데타 가담자가 더 있었다. 미실의 정식 남편인 세종(世宗), 그리고 미실의 남동생인 미생(美生)도 한 패가 되어 진지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다. 한데 더 놀라운 사실은 진지왕의 어머니 사도 태후의 행보다. 『화랑세기』를 보면 그녀가 “태자를 왕위에 올려놓고는 몸소 제위(帝位)에 있으면서 신왕(新王)을 통제하고, 말보(末寶)의 남편인 황종공(荒宗公)을 상대등으로 삼아 여론을 무마시켰다”고 한다. 황종공이란 거칠부를 말한다.

  

『삼국사기』에서 진지왕이 즉위하자마자 국사를 맡겼다는 그 거칠부다. 사도태후는 아들을 몰아내고 그 자신이 몸소 왕 노릇을 했다고 하니, 참으로 무서운 엄마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권력욕에 눈이 먼 여인, 자꾸만 작금의 대한민국 누군가와 오버랩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당에 사신 갔던 전쟁 영웅의 옥사, 나당 전쟁 부르다

[중앙선데이] 입력 2016.10.23 00:42 | 502호 23면

  

『삼국유사』 중 ‘흥법(興法)’이라는 이름이 달린 챕터가 있다. 불교를 일으킨 일화를 묶어놓은 것으로 ‘원종흥법(原宗興法) 염촉멸신(厭觸滅身)’이라는 제목을 단 것이 있다. 원종이라는 사람이 불법을 일으키고, 염촉이라는 사람은 스스로 몸을 희생했다는 의미다. 원종은 신라사에서 불교를 처음으로 공인한 법흥왕이요, 염촉은 바로 이를 위해 순교한 이차돈(異次頓)을 말한다. 불교를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맞서고자 법흥왕과 이차돈이 벌인 게임, 다시 말해 이차돈이 스스로 목숨을 청해 잘려나간 그의 목에서 흰 피가 솟는 이적(異蹟)이 일어남으로써 신라에서 불교가 공인되게 되었다는 그 이야기가 골자를 이룬다. 이차돈 순교 이후 법흥왕이 전개한 불교 포교 사업을 소개한 글이 있다.

  

“법흥왕이 없어진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절을 세우고자 했다. 절이 낙성하자 면류관을 벗어버리고 가사를 걸치고는 궁궐 친척들을 절의 노비로 삼는 한편 임금은 그 절에 주석하면서 몸소 (불법의) 교화를 널리 펼치는 일을 했다.”

  

중간에 일화가 삽입됐다. “이 절 노비들은 지금도 왕의 후손이라 일컫는다. 뒷날 태종왕(太宗王) 때 이르러 재보(宰輔·재상) 김양도(金良圖)가 불법에 귀의했다. 그에게는 두 딸이 있어 이름을 화보(花寶)와 연보(蓮寶)라 하니, 이들은 자기 몸을 바쳐 절의 노비가 되었다. 역신(逆臣) 모척(毛尺)의 가족 또한 몰입하여 절의 노예로 삼았다. 두 집안 자손들은 지금도 끊어지지 않는다.”

  

이차돈 순교를 계기로 법흥왕이 세운 절이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다. 그 터가 정확히 어딘지는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지금의 경주 평야에 있었던 것만큼은 틀림없다. 법흥왕의 불교 공인 이전부터 불교는 이미 신라사회에 침투해 있었다. 따라서 암자 비슷한 포교당 혹은 미니 사찰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흥륜사야말로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이래 왕실에서 처음으로 세운 거찰(巨刹)이었다. 그처럼 역사가 유구하기에 법흥왕은 일부 왕족을 절에 희사해 부처를 시봉하는 ‘노비’로 삼기도 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태종무열왕 김춘추 시대에는 재상을 역임한 김양도라는 사람의 두 딸까지 스스로 절에 들어가 노비가 됐던 것이다.

  

화보와 연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김양도의 두 딸이 절의 노비가 되는 과정을 『삼국유사』는 ‘사신(捨身)’이라 표현했다. 다시 말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자발적으로 절의 노비, 다시 말해 부처님의 노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문장·서화·중국어 능통한 팔방미인]

김양도는 신라가 국운을 걸고 일통삼한(一統三韓) 전쟁을 벌이던 시기에는 혁혁한 전과를 낸 전쟁 영웅이면서, 대(對) 중국 외교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이런 그의 두 딸이 자발적으로 흥륜사 노비가 된 과정은 아마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노비가 된 모척의 가족과는 사뭇 사례가 다르지 않을까 한다. 모척은 누구인가? 앞선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643년 대야성 전투에서 신라를 배신하고 백제에 빌붙어 성문을 열어준 바로 그 사람이다. 이로써 신라는 서쪽 변경 백제와 맞서는 가장 중요한 전진기지인 대야성, 즉 지금의 경남 합천 일대를 백제에 빼앗기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서 대야성주 김품석과 그의 아내 고타소, 그리고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고타소는 바로 김춘추의 딸이었다. 백제와 내통한 모척은 660년 백제가 멸망하면서 신라에 사로잡혀 능지처참됐다.

  

이런 모척이 느닷없이 흥륜사에서 부활했다. 물론 모척은 죽고 없었지만, 그의 자손들은 노비로 함몰되어 흥륜사에 배속되었던 것이다. 김춘추와 그의 아들 문무왕 김법민의 모척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깊었던지, 그 후손들 역시 대대로 흥륜사 노비로 사역되는 운명을 맞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김춘추의 유명(遺命)이었으리라.

  

그렇다면 김양도는 누구인가? 그에 대한 언급은 『삼국사기』 두어곳에서 발견된다. 먼저, 권제44 열전 제4에 수록된 ‘김인문(金仁問) 열전’ 말미를 보자. 태종무열왕 김춘추의 둘째아들이자 문무왕 김법민의 동생인 김인문이 당나라의 장안에서 죽은 사실을 전하면서 “그 무렵 해찬(海飡) 양도(良圖) 역시 여섯 번 당에 들어갔다가 서경(西京)에서 죽었는데 그 행적의 시말은 전해지는 것이 없다”고 적고 있다. 『삼국사기』 권제46 열전 제6에도 흡사한 기록이 보인다. 강수(强首), 최치원(崔致遠), 설총(薛聰)의 순으로 3명의 전기를 정리해 싣고 있는데, 모두 문장으로 이름을 떨친 문장가들이다. 그 말미를 보면 『신라고기(新羅古記)』라는 정체불명의 문헌을 인용해 “문장으로는 강수(强首)와 제문(帝文)·수진(守眞)·양도(良圖)·풍훈(風訓)·골답(骨沓)이 유명하다고 하나, 제문 이하 인물들은 행적이 전하지 않아 전기를 세울 수 없다”고 돼있다.

  

두 곳 다 김양도를 언급하고 있다. 서경은 장안을 지칭한다. 파진찬(波珍飡) 혹은 파미간(破彌干)으로도 불렸던 해찬은 신라의 17개 관위(官位) 체계에서 네 번째 서열로,재상급이다. 그러나 수상한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뒤져보면 열전을 세우고도 남을 정도로 행적이 많이 나와있는데도 “행적이 전해지는 것이 충분하지 않아 열전을 세울 수 없다”고 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수수께끼 같은 인물, 김양도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

  

우선, 그는 당시 중국어 실력이 출충했던 대중국 외교관이자 문장가였다는 걸 유추해볼 수 있다.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여섯 번이나 당나라에 사절로 파견된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어 실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또 당시 외교관의 절대 구비 조건이 문장력이었다는 점에서 탁월한 문장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양도는 백제 멸망 이듬해인 태종무열왕 8년(661)에 채 진압되지 않은 백제군이 사비성을 공격해 오자, 대아찬으로서 대장군 품일(品日)을 보좌한 장군이었다. 나아가 문무왕 2년(662)에는 고구려 평양성 공략에 나선 당나라 군대에 군량을 조달해 주는 군량 수송 작전에 대장군 김유신을 보좌하는 장군으로 참전했다. 이어 나당연합군이 고구려를 멸한 문무왕 8년(668) 전쟁에는 역시 대아찬으로 대당총관에 임명돼 출전했다. 요컨대 김양도는 일통삼한기 신라를 대표하는 장군 중 최상위층을 형성한 전쟁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라와 당이 일촉즉발의 대결을 앞둔 문무왕 10년(670) 정사(正使)이면서 김유신의 동생인 흠순과 함께 부사(副使)로 당나라 수도인 장안에 들어갔다가 억류됐다 끝내 옥사하면서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고 만다. 이 사건을 『삼국사기』 문무왕 본기에서는 “봄 정월에 (당) 고종이 흠순에게는 귀국하라 하고 양도는 억류해 감옥에 가두니,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했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했던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통이라 해서 특사로 선발돼 사죄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어 변을 당하고만 것이다.

  

김양도는 뛰어난 조각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 권제5 신주(神呪)편에 실린 ‘밀본이 요사한 귀신을 물리치다(密本?邪)’라는 제목의 이야기에 의하면 그는 어렸을 적에 벙어리였다. 요망한 귀신의 농간으로 벙어리가 됐으나 밀본법사라는 법력이 뛰어난 스님의 도움으로 귀신을 물리쳐 말을 할 수 있게 됐다. 나아가 이를 계기로 독실한 불교 신도가 되어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主佛)과 아미타불 존상, 그리고 좌우 보살을 빚어 만들었으며 그 불당을 금색 그림으로 채우기도 했다”고 전한다. 조각가이자 화가이기도 했던 김양도는 문장과 서화·외국어에 능통한 팔방미인이었던 것이다.

  

[백제·고구려 멸망 후 일촉즉발의 상황]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진노한 당 황제에 의해 옥사했다는 대목에서, 당시 백제와 고구려 멸망 직후 신라와 당 사이에 움트기 시작한 전쟁의 기운을 실감하고도 남음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외교관례상 사신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한데 당은 힘을 믿고 신라 사신, 그것도 재상을 죽여 버렸다. 사신을 죽이는 일은 선전포고나 다름없다. 협상은 없으며, 오로지 굴복 혹은 무력 징벌의 협박만 남았음을 당나라는 신라에 보여준 사건이다. 이 사건이 당시 신라 사회 내부에 미친 충격파가 어떠했는지는 증언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이후 전개된 전쟁 양상을 보면 신라가 가진 당에 대한 감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직감할 수 있다.

  

신라 문무왕 10년(670) 3월에 사찬 설오유(薛烏儒)는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당을 진격하고, 다음달 4일에는 당군 수중에 들어가 있던 말갈군을 개돈양(皆敦壤)에서 대파했다. 고구려를 직접 지배하려는 당에 대한 신라의 반격을 보여주는 신호탄이다. 곧이어 신라는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인 안승(安勝)을 받아들여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던 금마저(金馬渚)에 그 유민들과 함께 안치한 다음 고구려 국왕으로 책봉함으로써 고구려에 대한 직접 지배를 관철하려 했다.

  

신라는 또 백제 옛 땅에 대한 공격도 개시해 82개 성을 일시에 탈취했다. 당이 저버린 약속을 신라는 무력으로 관철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기나긴 전쟁에서 신라는 마침내 문무왕 15년(675) 가을 9월15일 매초성(買肖城)에서 이근행(李謹行)이 이끄는 당군 20만을 대파하고, 이듬해 겨울 11월 기벌포(伎伐浦)에서는 크고 작은 22회에 걸친 전투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축출하게 된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09일 13시55분이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대부분 찬술한 가운데 그 일부는 그의 제자 무극(無極)이라는 승려가 보충했다는 주장이 이제는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군데군데 있다. 특히 그 맨 앞에 붙은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왕들과 후삼국 왕들의 계보인 왕력(王曆)이 그 이하 본문과는 어떤 관계인지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백제 무왕(武王) 역시 그러하다. 


미륵사지 전경미륵사지 전경 (사진제공=김태식)


 이곳 왕력 편에서는 백제 제30대 왕인 그를 일러 “무강(武康)이라고도 하는데 헌병(獻丙)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릴 때 이름을 일로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한다. 경신년(600)에 즉위해 41년을 다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본문 중 한 편에 해당하는 기이(紀異) 편 제2에 ‘무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 의하면 당장 이를 부정한다. 기이란 글자 그대로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정리했다는 뜻이니 이 경우 '紀'는 기록하다, 적는다는 같은 발음의 글자 ‘記’다. 그 전체 편명에 어울리게 이곳에 저록(著錄)한 무왕 관련 이야기는 그 유명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연애담과 그에 따른 미륵사 창건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를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거니와, 이 기이 편에서 《삼국유사》는 그 제목 ‘무왕’ 아래에 그것을 주석하기를 “옛날 책에서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백제에 무강은 없다”고 했다. 분명히 왕력 편에서는 그의 다른 이름으로 무강(武康) 혹은 헌병(獻丙), 나아가 어릴 적 이름으로 일로사덕(一耆篩德)을 들었음에도 본문에서는 이를 스스로 부정했으니 말이다. 이런 주석이 《삼국유사》 편찬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보충해 넣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데 이에 등장하는 무강을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위만에게 내쫓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라는 주장 또한 억세게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예컨대 조선 후기 역사서들에 집중적으로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그 불후의 편년체 역사 대작인 《동사강목》에서 그 정설화를 시도하니 본문에서 기준이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니,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益山) 오금사봉(五金寺峰)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으니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이 쌍릉이 지금의 익산 쌍릉이다. 한데 세속에서 이를 영통대왕릉이라 부른다는 증언은 조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永通’은 말할 것도 없이 ‘末通(말통)’의 오기다.   글자가 비슷한 데 따른 인쇄 착오다. 이 말통은 곧 서동(薯童)이니, 이는 저 《삼국유사》 ‘무왕’에 보이는 대목, 다시 말해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니… 항상 마[薯]를 캐다 파는 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비롯한다. 서동은 곧 마동, 혹은 맛동일 것이니 이것이 곧 저 말통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실제 그 뿌리가 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련 기록을 보면 분명 말통이다.   


 나아가 순암은 같은 《동사강목》  고려 숙종 7년(1102) 조에서는 고려가 이해 겨울 10월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기자사(箕子祠)를 세운 사실을 특기하고는 그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붙이는데 그에서 이런 내용이 보인다. 


마한 시조인 무강왕 기준(箕準)은 곧 기자의 41세손으로 남쪽 땅에 나라를 열어 2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미륵사지미륵사지 (사진제공=김태식)


 이에서는 아예 마한의 시조로 발전했으며, 더구나 그가 기자의 41세손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무강왕을 둘러싼 이런 인식은 순암과 동시대 인물인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대저(大著) 《연려실기술(然黎室記述)》에도 보인다.   이곳 권 제19 ‘역대전고(歷代典故)’ 중 ‘삼한(三韓)’ 조에는 “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한 나라 혜제(惠帝) 원년 정미(BC 194)에 좌우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달아나 마한을 쳐서 격파하고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어 국호를 마한이라 하고 금마산(金馬山)에 도읍하고는 54국을 거느리니 세상에서 무강왕(武康王)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긍익은 금마산 기슭 용화산(龍華山)을 일러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 하는데 석성(石城)이 있어 둘레 3천900 척인데 세상에서는 기준이 쌓았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한데  《연려실기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이 이미 인심을 얻고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왕이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용화산 위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세 미륵이 연못 가운데에서 나왔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절을 지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연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우니 이에 불전(佛殿)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드니,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 도왔다. 석탑이 있는데 굉장히 커서 높이가 몇 길이나 되니, 동방 석탑 중 최고이다. 


 이를 보면 기자조선과 그 마지막 왕 기준, 그리고 백제 무왕과 선화부인이 아주 뒤범벅을 이룬다. 이는 기록이 어떻게 한데 뒤엉켜 이상한 신화를 만들어내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 (사진제공=김태식)


 그렇다면 도대체 백제 무왕과 마한, 그리고 기자조선은 어떤 고리로 이렇게 연결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공교롭게도 백제 무왕이 미륵사라는 대찰을 창건한 지역과 위만에 쫓긴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이 도망쳐 정착한 곳이 같은 지역으로 인식된 데서 유래한 착종(錯綜) 혹은 착란(錯亂)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준이라 하는 기자조선 준왕(準王)이 위만에 쫓겨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들어가 마한 땅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고대 중국 문헌 곳곳에서 보이거니와, 이것이 나중에는 그 정착지가 금마(金馬)라는 등식으로 발전한다. 이런 기록이 애초 등장하는 중국 문헌들을 보면 기준은 마한 땅에 들어가 그곳을 공략하여 정착했다고 하지만, 이것이 후대로 갈수록 역사가 조작되어 그가 바로 마한이라는 왕국을 창설한 시조로 둔갑하기에 이른다. 당장 《삼국유사》만 해도 기이 제1에 ‘마한’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서 그 정체를 종잡기 힘든 《위지(魏志)》를 끌어다가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이 궁인과 좌우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고 했다.  


 이런 혼란은 현재까지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조선 초기 완성된 팔도지리 총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인 듯하다. 이곳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조를 보면 그 싹이 보인다. 예컨대 이 지역 사찰 관련 기록을 모은 불우(佛宇) 조를 보면 미륵사(彌勒寺)를 이렇게 설명한다.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나아가 같은 대목 고적(古蹟) 조를 보면 쌍릉(雙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오금사(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그 비(妃)의 능이라 했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곧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쌍릉이 오늘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지역이다. 이로써 보건대 늦어도 조선 초기에는 이미 기자조선 준왕과 백제 무왕이 혼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견주건대 신라 시대 김태식과 대한민국 시대 김태식, 혹는 대한민국 시대 권투선수 김태식과 연합뉴스 기자를 역임한 김태식이 짬뽕된 것과 같다 하겠다. 


 《승람》 외에도 조선 시대 그런 흔적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익산 미륵사 석탑을 보며(益山彌勒寺石浮屠)’라는 시가 있다. 



귀신의 공인지 백성의 힘인지 끝내 아득하네

위로는 용화산 만 길 능선 넘어섰네

천년 두고 석재는 죄안을 이루었으니

가련토다 금마의 무강왕이여



鬼功民力竟茫茫

上軼龍華萬仞岡

千載石材成罪案

可憐金馬武康王



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 (사진제공=노기환)


 이때만 해도 미륵사 석탑은 온전했나 보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 뒤편 용화산보다 높게 보였겠는가? 실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리 볼 수도 없는 까닭은 그것을 관람하는 위치에 따라 그리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점필재는 이 거대한 석탑을 백성의 고혈을 짜내 이룩한 결과물로 본다. ‘죄안(罪案)’이라는 말은 범죄 사실 기록부, 요즘 말로 치환하면 범죄 사실 판결문 정도를 의미한다. 


 점필재는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인물이라 이런 사람들은 불교는 경멸한 특징이 있다. 그 시조처럼 통하는 주희 자신이 이미 격렬한 반불교주의자라, 그를 따르는 후학들도 자연 반불교 정신으로 무장하게 되거니와, 이 시에서도 점필재의 그런 성향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데 이를 만든 이를 점필재는 금마의 무강왕이라 했다. 실제는 백제 무왕인데도 말이다. 그에게는 아마도 금마국 무강왕과 백제 무왕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리라. 


 비단 이런 전승이 아니라 해도 실제 익산 금마면 일대는 백제 무왕과 밀접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곳에는 그가 창건한 미륵사 터가 있고, 실제 이는 근자 그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봉영사리기(逢迎舍利記), 다시 말해 사리를 맞이하여 석탑에 안치하면서 남긴 기록에서 더욱 분명한 사실로 확인됐다. 미세한 차이라면, 문헌에는 이 절을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 했지만, 백제 시대에 이를 실제로 창건하고 남긴 사람들이 작성한 이 사리장엄기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왕비, 다시 말해 좌평(佐平) 사타적덕(沙陀積德)의 딸이 창건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인근 쌍릉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무덤이라 전한다. 실제로 이 무덤이 백제시대, 특히나 사비 도읍기 왕릉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니 정말로 이곳이 무왕 부부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 충숙왕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에 대규모 도굴단이 이 무덤을 도굴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 바로 금은보화가 다량으로 묻혀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도움받은 곳>

한국고번역원 한국고전 종합DB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백제의 고분》, 201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