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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320

매장문화재가 장의사였던 시절, 埋葬과 埋藏 사이 오늘 현재 전국에 걸쳐 100곳 이상을 헤아리는 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을 그 등장 초창기에는 매장문화재연구원이라 부르던 시절이 있었으니, 1994년 8월 5일, 그 시초를 알리며 출범한 기관 역시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이었다. 이 연구원은 결국 1999년 9월 9일, 이름을 영남문화재연구원으로 바꾸는데, 가장 중요한 차이라면 '매장'이라는 말을 뺀 것이다. 이 매장을 애초 '埋葬'이라 했는지, 혹은 '埋藏'이라 했는지 자신은 없지만, 그네들이 표방한 목적을 본다면 아마 후자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 '매장'이라는 말이 사회에 통용하는 가치다. 고고학계를 벗어난 데서는 모두가 전자로 받아들인 까닭이다. 다시 말해 사람이나 동물과 같은 시체를 묻는 일을 하는 곳이라 인식하는 일이 많았다는 점이.. 2019. 7. 2.
넌 농촌 출신이라 데모꾼이라 해서... Taeshik Kim June 11, 2017 언젠가 이런 말을 쓴 적 있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은 혁명을 못 한다고. 이는 실제 나를 두고 한 말이다. 찢어지리만치 가난한 농민의 아들인 나는 천성이 그러했다. 한데 세상이 참말로 웃기게도, 세상은 나를 그리 보지 않더라. 나는 1993년 1월1일자로 지금의 연합뉴스 전신인 연합통신 기자로 공채 입사했다. 연합뉴스는 지금도 그러한데 그때도 기자직을 서울주재 기자와 지방주재 기자, 그리고 사진기자 세 부류로 나누어 선발했다. 내가 합격한 그해엔 지방기자직은 없었고, 서울주재와 사진기자만을 뽑았다. 결과 10명이 기자직으로 합격했으니, 개중 2명은 사진기자였다. 서울주재 펜대 기자직 8명 중 나를 포함한 2명은 느닷없이 지방주재로 발령나, 나는 부산지사로 가.. 2019. 6. 12.
뉘였다가 세운 부여 군수리절터 목탑 중심기둥 아래 전문 인용하는 기사에서도 드러나고, 내 기억에도 분명 송의정 소장 시절이었다. 철두철미 박물관맨인 송의정이 윤형원 등과 더불어 인사교류 명목으로 2년인가 잠시 문화재청으로 파견나가 근무한 적이 있으니, 여담이나 이때 재미를 붙인 윤형원은 이후 한 번 더 문화재청 근무를 자청해 해양연구소에서 과장 2년인가 해 묵고 부여박물관장으로 튀었다. 애니웨이, 송의정 소장 시절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역점으로 벌인 발굴사업이 부여 군수리절터였다. 2005년 6월 14일자 내 기사가 이를 예고했으니,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부여 군수리 백제 절터 70년만에 재발굴1935-1936년 조선총독부 조사 이후 처음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백제 마지막 도읍 부여에 위치한 그 시대 절터로 가장 중요한 유적으로 꼽.. 2019. 6. 7.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명문판독기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292번지 관룡산觀龍山, 혹은 구룡산九龍山이라 일컫는 산 기슭에 관룡사觀龍寺라 일컫는 불교사찰이 있으니,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 통도사(通度寺) 말사인 이 사찰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으나, 경내에 지정문화재가 밀집해 그 녹록치 않은 역사성을 증언한다. 그런 성보문화재 중 용선대龍船臺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라는 불상 하나가 있다. 사찰 경내를 벗어난 용선대라는 바위 혹은 암반 위에서 사방을 조망하는 자리에 위치한 이 불상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성내력을 알 수 없었으니, 그런 가운데서도 그 양식으로 보아 9세기 신라 불상이라는 통설이 암암리에 통용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2009년에 이르러 이 불상이 8세기 초반 통일신라시대 흥성기에 만들었다는 조성기가 다름 .. 2019. 6. 4.
4대천황에서 3대천황으로...세대교체가 된 문화재기자업계 호랑이 없는 골에 승냥이가 오야붕질 한다고. 문화재기자업계에 요런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라.... 한때 이 업계를 말아드시던 원로들이 이런저런 전차로 현장을 떠나야 했으니, 요새 이 업계를 호령하는 이들로 그네들 스스로가 3대천황이라 일컬으며 지들 시대가 도래했다고 떠들고 다닌다 하거니와 듣건대 조선일보 허모, 세계일보 강모, 그리고 우리 공장 연합뉴스 박모가 툭하면 술자리 마련하고는 그네들 스스로를 일러 3대천황이라 한다더라. 그러면서 그네들이 청산해야 할 적폐로 그 전시대 이 업계를 주름잡은 네 명을 거론했으니, 입만 열면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단 말을 노래로 삼아 일고선생이라 일컬다가 어느날 훌쩍 기자 때려치고 문화재청 산하 국외소재문화재재단으로 옮겨 적응하는가 싶더니, 이내 국립진주박물관장 공모가 나.. 2019. 6. 2.
"참으로 순조로운 발굴" "발굴은 그리하는 줄 알았지 뭐"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은 그 발굴 전과정이 요새 기준으로 하면 생중계된 한국 최초의 발굴현장이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던 일이다. 뭐 그만큼 발굴이 개판이었다는 말이다. 기자들이야 언제나 발굴현장의 정보통제를 비난하지만, 솔까 언론에 완전 개방한 상태에서 발굴이 제대로 진행될 리 있겠는가? 우왕좌왕 개판이었다. 그에 더해 기자들 역시 발굴현장을 제대로 취재해 본 적도 없었다. 알아야 면장이라도 하는데, 난생 처음 접한 발굴현장은 그만큼 신기할 뿐이었다.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무령왕릉 발굴이 끝난 뒤 이 사건 보도를 내내 특종보도한 한국일보 취재기자 방담기다. 그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보인다. "발굴 진행은 참으로 순조로왔습니다" 이 한마디가 무령왕릉 발굴 모든 것을 함축한다. 그날 무.. 2019.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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