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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꼴통 서희徐熙 졸기

by taeshik.kim 2023. 1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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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가 얻은 강동6주

 
고려사절요 제2권 목종 선양대왕穆宗宣讓大王 무술 원년(998), 송 진종眞宗 함평咸平 원년·란 통화 16년에 보이는 서희 죽음을 전하면서 붙인 그의 열전이다. 


가을 7월에 태보 내사령太保內史令 서희徐熙가 졸하였다. 서희는 필弼의 아들이다. 성품이 엄하고 성실하였다.

나이 18세에 갑과甲科에 발탁되어 성종 때 왕의 서경 행차를 호송하였는데, 성종이 미행微行으로 영명사永明寺에 가려 하자 서희가 상소하여 간하니, 성종이 이내 중지하고 안장 얹은 말을 내려 주어 그를 포상하였다.

계사년(993)의 전쟁(거란의 침입)에서 국서를 받들고 소손녕蕭遜寧의 진영에 이르러, 통역하는 사람을 시켜 서로 회견할 예절을 물으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나는 대조大朝의 귀인貴人이니, 마땅히 뜰에서 절해야 한다."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신하가 임금에게 뜰 아래서 절하는 것이 예인데,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보는데 어찌 이렇게 할 수 있느냐." 하고 두서너 번 왕복하였으나, 소손녕이 허락하지 않았다.

서희가 노하여 객사에 돌아와 누워 일어나지 않으니, 소손녕이 그제야 서희가 당에 올라와 예를 행하도록 허락하였다.

서희가 이에 영문營門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들어가 소손녕과 뜰에서 마주 서서 읍하고, 당에 올라 예를 행하고, 동서로 마주 대하여 앉아 서로 논변하는데 말의 뜻이 엄하고 바르니, 소손녕이 그제야 강화하기를 허락하고, 인하여 잔치를 베풀어 위로하고자 하였다.

서희가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도리를 어긴 일은 없으나, 상국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멀리 오게되었으므로 상하가 허둥지둥하여 무기를 잡고 한데 나와 있는 지가 며칠이 되었는데, 어찌 차마 잔치에서 즐길 수 있으랴." 하니,

소손녕이 말하기를, “두 나라 대신이 서로 보는데 서로 기뻐하는 예가 없어서야 되겠느냐?" 하면서 굳이 청하므로, 그제야 이를 허락하고 극진히 즐기고서야 자리를 파하였다.

희가 돌아가자 소손녕이 낙타 열 마리, 말 백 필, 양 천 마리, 금기錦綺·나환羅紈 합계 5백 필을 선물로 보내었다.

희가 또 임금의 행차를 호종하여 해주海州에 갔는데, 성종이 희의 막사에 행차하여 들어오려 하자, 희가 아뢰기를, “신의 막사는 임금께서 오실 만한 곳이 못 됩니다." 하였으며, 임금이 명하여 술을 올리도록 하자, 희가, “신의 술은 드릴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성종이 이에 막사 밖에 앉아서 어주御酒를 올리게 하여 함께 마시고 자리를 파하였다.

공빈령供賓令 정우현鄭又玄이 봉사를 올려 시정時政에 관한 일곱 가지 일을 논하다가 왕의 뜻을 거스르자, 왕이 재상을 모아 의논하기를, “우현이 감히 제 직책 밖의 일을 논했으니, 이를 죄줌이 어떠하냐?" 하였다.

모두 아뢰기를,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하였으나, 희만은 아뢰기를, “옛날 간하는 사람은 일정한 관직이 없었으니, 직책 밖의 일을 논하였다 하여 무엇이 죄가 되겠습니까. 신은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 외람되이 재상의 자리에 있으니, 말씀드려야 할 일이 많은데 신은 말하지 못하였고 우현은 일을 논하여 지금의 폐단에 매우 적중하였으니, 신에게는 죄를 주어야 하고 우현에게는 상을 주어야 합니다." 하였다.

성종이 깊이 마음에 느끼고 깨달아 우현을 감찰어사監察御史로 탁용하고, 희에게는 안장 얹은 말과 술 과실을 내려 주었다.

희가 병이 나자 성종이 친히 행차하여 문병하고, 어의御衣와 말을 사원에 나누어 보시하며, 또 곡식 1천 석을 개국사開國寺에 보시하여, 희의 수명을 기도하는 데에 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이때가 되어 죽으니, 나이 57세였다.

부의를 매우 후히 하였으며, 창위彰威란 시호를 내리고, 예를 갖추어 장사지내었다.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 秋七月,太保,內史令徐煕卒,煕,弼之子,性嚴恪,年十八,擢甲科,成宗朝,從幸西京,成宗,欲微行,往永明寺,煕,上疏諫,成宗,乃止,賜鞍馬,以賞之,癸巳之役,奉國書,至遜寧營,使譯者,問相見禮,遜寧曰,我大朝貴人,宜拜於庭,煕曰,臣之於君,拜下,禮也,兩國大臣,相見,何得如是,往復再三,遜寧不許,煕怒,還臥所館不起,遜寧,乃許升堂行禮,煕,於是,至營門,下馬而入,與遜寧分庭揖,升行禮,東西對坐,往復論辨,辭義嚴正,遜寧,乃許講和,仍欲宴慰,煕曰,本國雖無失道,而致上國,勞師遠來,故上下皇皇,操戈執銃,暴露有日,何忍宴樂,遜寧曰,兩國大臣相見,可無歡好之禮乎,固請,然後許之,極歡乃罷,及還,遜寧贈以駞十首,馬百匹,羊千頭,錦綺羅紈,幷五百匹,又從幸海州,成宗,幸煕幕欲入,煕曰,臣之幕,非君所臨也,命進酒,煕曰,臣之酒,不堪獻也,成宗,乃坐幕外,進御酒,共飮而罷,供賓令鄭又玄,上封事,論時政七事,忤旨,會宰相議曰,又玄,敢越職論事,罪之如何,皆曰,惟命,煕獨曰,古者,諫無官,越職何罪,臣以不才,謬居宰輔,事多可言,又玄論事,甚合時病,是臣可罪,而又玄,可賞也,成宗感悟,擢又玄監察御史,賜煕鞍馬,酒果,及患疾,成宗,駕幸問疾,以御衣及馬,分施寺院,又以穀一千碩,施開國寺,凡所以祈命者,無所不爲,至是,卒,年五十七,賻贈甚厚,諡彰威,以禮葬之,配享成宗廟庭。
 
이걸 보면 서희는 성격이 무척이나 강직했다. 대개 이런 신하는 왕도 어려워하는데, 그래서 거개 중용은 받지 못한다. 

하지만 서희는 아주 이른 나이에 과거 급제해 출사하고서는 이름을 떨쳤으니, 그런 그가 소손녕과 담판 자리에 간 이유는 바로 이런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거란 침략 당시 서희는 시중侍中 박양유朴良柔가 상군사上軍使를 맡은 가운데 내사시랑內史侍郞으로 중군사中軍使였다.

참고로 하군사下軍使는 문하시랑門下侍郞 최양崔亮이었으니, 이 무렵 이미 재상급이었음을 본다. 내사시랑은 지금으로 치면 행안부 장관 혹은 기재부 장관 정도 되지 않았나 싶다. 

그는 강동6주를 얻음으로써 일세의 영웅이 되었다.

그런 그가 누린 위광은 현재의 우리로서는 상상도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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