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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사IN》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제478호


나오지 말았어야 할 유물’을 수습하는 방법

천마총은 보존과학이라는 학문이 현장에 도입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 현장이다. 발굴단은 천마도를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김정기 당시 단장은 “백발이 된 게 천마총 발굴 때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문화재 전문 언론인) 2016년 11월 18일 금요일 제478호


<시사IN> 제476호에서 1973년 8월 경주의 발굴단이 천마총 내부의 목곽에서 무덤 주인의 ‘장니(障泥)’를 발견하는 과정을 살펴보았다. 장니란, 말의 발굽에서 튀는 흙을 막기 위해 안장 밑으로 늘어뜨려 놓은 판이다. 당연히 좌우 한 쌍으로 이루어졌다. 좌우의 장니에는 각각 천마도가 그려져 있었다. 좌우로 한 쌍인 장니 두 세트가 아래위로 포개졌으니, 발굴단은 모두 네 점의 천마도를 발굴해야 했다. 발굴단은 먼저 가장 위에 있던 천마도 장니를 “숨죽여” 걷어내 수납함에 넣는 데 가까스로 성공했다. 한숨을 돌렸지만, 천마도 장니 세 점이 더 남아 있었다.


1500년 동안이나 육중한 무덤 속에 잠들어 있던 천마도가 한 점씩 깨어나는 연속적 과정들은 한마디로 “찬란했다”. 지건길 당시 학예연구사(이후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맡았다)는 모두 네 점 가운데 가장 밑에 깔려 있던 마지막 천마도 장니가 드러나던 순간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아무리 땅속이라고 하지만 연약한 자작나무 판이 그 오랜 세월을 견디어왔다는 것 자체가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마지막 장니에 그려진) 천마와 그 둘레를 에워싼 사실적 도형들에는 바로 이제 막 화공이 붓을 놓은 듯한 생생함이 묻어 있었다.”

ⓒ김태식 제공
1973년 천마도 발굴 현장. 당시 백마의 극채색 그림이 선명히 보존돼 있었다.

김정기 단장이 “나오지 말았어야 할 유물”이라 표현했던 이 천마도를 조사단원들은 ‘채화판(彩畵板)’이라 불렀다. 원색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그림판이라는 뜻이다. 당시까지는 그처럼 생동하는 색채가 고스란히 보존된 신라시대 회화 작품이 발견된 적이 없었다. 생전의 김정기 단장은 ‘마지막 천마도’에 대해 “가는 균열이 많았으나,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주위에 보상화문대(寶相花紋帶:연꽃을 모체로 꽃잎을 층층이 겹쳐놓은 문양)를 두른 채 하늘을 나는 백마의 극채색 그림도 선명했다”라고 회상한 바 있다. 가장 아래 위치한 덕분에 그림 상태가 완벽히 보존되었던 것이다.

발굴단은 해당 천마도가 생생한 만큼 오히려 더욱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면 무사히 수습할 수 있을까? 발굴단은 먼저 붓으로 천마도에 낀 먼지를 조심스럽게 쓸어내고, 촬영과 실측을 마쳤다. 다음 순서는 그 ‘마지막 천마도’를 가급적 실물과 가깝게 모사(模寫)하는 작업이었다. ‘(그림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는 경우에 대비한 것’이었다고 한다.

김정기 단장에 따르면,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졌다. “잠시 후 (마지막 천마도의) 가늘었던 균열이 눈에 보이게 굵어졌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작은 파편으로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함께 현장에 있던 지건길 연구사 역시 장니 곳곳의 균열이 커질 뿐 아니라 심지어 색채까지 퇴색되기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다. “나만의 착시였는지도 모르지만, (그림 색채의) 생생함이 공기에 닿으면서 눈에 띄게 퇴색이 진행되었다. (천마도가) 현재와 같은 색조(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천마도의 색채는 그리 생생하지 않다)로 변모하기까지 순식간의 일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연합뉴스
2009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천마도의 적외선 촬영 사진을 공개한 모습. 국립경주박물관은 발굴 41년 만인 2014년 진본 천마도 두 세트(4점)를 모두 공개했다.

마지막 천마도의 색이 거무튀튀하게 변하기 시작하자 김정기 단장이 결단을 내렸다. 모든 작업을 중단시키고 곧바로 수습하기로 한 것이다. 우선 대칼 여러 개를 장니 밑으로 끼워넣었다. 다음 순서는 여러 사람이 그 대칼을 나눠 잡고 조심스레 들어 올리는 작업이다. 그런데 잘 들리지 않았다. 무리하게 장니를 꺼내다가 파손해버릴 우려도 있었다.

그래서 김 단장은 다른 수습 방식을 강구한다. 일단 천마도 장니를 비닐로 덮어 가습 조치를 한 뒤 발굴단원들에게 함석판 20장을 구해오라고 했다. 경주시내로 헐레벌떡 달려간 조사단원들이 30분가량 지나 구해온 함석판들을 장니 밑으로 되도록 깊이 쑤셔넣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렵사리 수습된 장니가 바로 역사 교과서 등에 수록된 그 천마도다. 천마도 발굴 당시 얼마나 신경을 곤두세웠던지, 김정기 단장은 ‘천마총 발굴 회상기’에서 “내 머리카락이 지금과 같이 희게 된 것도 아마 이 시기였을 것이다”라고 회고한 바 있다. 천마총은 보존과학이라는 학문이 현장에 도입된 최초의 고고학 발굴 현장이었다.

발굴단원들도 천마도 진본 41년 동안 못 봐

이렇게 모든 천마도를 수습한 날이 1973년 8월23일. 천마도는 그다음 날 곧바로 서울로 수송되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지건길 연구사와 최병현 숭실대 교수가 천마도 장니들을 상자 두 개에 나눠 담아 경주사적공원관리사무소의 관용 승용차에 싣고 상경했던 것이다. 최병현 교수의 회상이다. “오후 5시,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경복궁 안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하였다. 천마도 장니 상자는 박물관 2층 관장실 옆 부속실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김유선 박사가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었고, 문화재관리국 문화재과의 사무관이 부속실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관장실 옆 부속실은 급히 천마도 장니의 응급처리실로 꾸며졌다.”

천마도를 보존하려면 방(급히 꾸며진 응급처리실)의 온습도를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다. 당시는 에어컨이 귀할 때였다. 문화재관리국 전체에서 에어컨이라곤 국장실에 달랑 한 대가 달려 있을 뿐이었다. 그 에어컨을 떼어내 응급처리실로 옮겼다. 천마도의 퇴색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 커튼을 내리고 자외선 차단 전구도 급히 사다가 끼웠다. 최 교수에 따르면, 원자력연구소 김유선 부소장이 큰 역할을 했다. “(김유선은) 처리실 내부에 일정한 상태의 습도가 유지되어야 한다며, 물을 담은 비커들을 배치한 가운데 30분간 (보존) 작업을 했다. (그다음엔) 다시 천마도 장니를 한지로 덮고 처리실에 분무기로 물을 뿌려 가습한 상태로 불을 끄고 30분 동안 처리실을 비웠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게 했다.” 어찌나 통제가 심했던지, 당시 보존처리 예산 집행을 담당하던 문화재관리국 직원도 필요 물품만 연방 운반했을 뿐 응급처리실에 들어가 천마도를 구경하지도 못했다.

정작 발굴단원들도 이후 오랜 세월 천마도를 만나지 못했다. 물론 국립경주박물관이 천마도라고 전시한 유물이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 ‘천마도’는 진본을 모사한 가짜였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진본 천마도 두 세트 4점을 모두 공개한 것은 2014년이다. 발굴단원들에게는 41년 만의 재회였던 셈이다.


5~6세기에 선조가 남긴 유물이 공기에 노출되는 순간 분말로 변해 영원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심리적 압박감에 줄곧 시달렸던 김정기 단장은 모든 조치가 끝난 뒤에야 이렇게 말했다. “장니에 그려진 하늘을 날 듯한 천마, 그 천마는 우리를 버리고 하늘로 날아가지 않았다. 오늘도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채 더 큰 비상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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