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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보리(菩利)

by taeshik.kim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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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보리공 전 : 12세 보리공(菩利公)은 이화공의 둘째 아들(次子)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叔明公主)이니 지소태후의 딸이다. (그러니) 세종공에게는 어머니가 같은 누나가 된다. 공주가 꿈에 황색 신록(神鹿)을 보고 공을 낳았다. 나면서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으며 큰 뜻을 지녔다. 자라면서 맏형인 원광법사와 함께 배움에 힘써 게을리 하지 않았다. 원광이 일찍이 깨우치기를 ‘나는 불(佛)이 되고 너는 선(仙)이 되면 우리나라를 평안하게 할 수 있으리다’고 했다. 공은 이에 하종공(夏宗公) 문하로 나아가 그 낭도에 소속되었다. 공은 하종공보다 9살이 적었는데, 감정과 생각이 서로 투합해 같은 배에서 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공의 어머니 숙명공주는 효성과 우애가 하늘에서 타고나, 세종을 어린아이처럼 사랑했고, 세종공은 공주를 태후처럼 모셨다. 

미실이 입궁하고 세종이 출정하자 공주가 미실과 화합하지 않았으나, 하종공은 공주의 조카인 까닭에 공주가 특별히 아들처럼 사랑했다. 한 번은 말하기를 ‘내 아버지인 태종(苔宗) 각간(角干)은 곧 네 할아버지시다. 하늘에 다시없고 땅에도 다시없는 대영웅이니라. 너는 마땅히 신(神)으로 받들어야 한다’고 했다. 대개 아버지에게서 배우고 어머니에게는 배우지 말라 함을 풍자해 가르친 것이다. 하종공은 속으로 명석한 까닭에 그 가르침을 스스로 알았으나 알아듣지 못했다는 듯이 한 것은 미실이 아시공(阿時公)과 옥진궁(玉珍宮=옥진궁주)을 호신(護神)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공이 처음에 하종공에게 속했을 때 신궁(神宮)에 따라 들어가 법흥과 옥진의 교신상(交神像)에 절을 하는데, 옥진에게 먼저 절한 다음에 제(帝)에게 절을 했다. 공이 옳지 않게 여겨 말하기를 ‘우리가 오늘 귀하게 된 것은 모두 선제(先帝)께서 내려주신 바인데, 어찌 그를 뒤로 합니까’라고 했다. 하종공이 ‘선제 또한 말씀하기를 “억조창생이 나를 신으로 여기는데 나는 옥진을 신으로 여긴다”고 했으며 영실공 또한 옥진궁에게 먼저 절하고 나서 제(帝)에게 절했다. 이것이 그 상(像)이다. 대개 미실이 가르친 바이다’고 말했다. 공이 부득이 따랐다. 그 다음에 아시공에게 절을 했다 …태종공(苔宗公) …. 공은 또한 그 순서에 의심을 가졌으나 따지지 않았다. … 모제(母弟)가 어머니에게 불효했다. 하종공이 말하기를 ‘돌아가 숙명에게 말을 해 … 태종공과 함께 옳다’고 했다. 대개 두 공(公)의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마음 … 이다. 그 때가 건복(建福) 2년(585)이니 공의 나이 13살이었다. 하종공(夏宗公)이 우방대화랑(右方大花郞)이 되었다. 그러므로 공은 특별히 뛰어넘어 우방화랑(右方花郞)이 되었다. 미생공이 부러워하기를 ‘너는 나보다 났다’고 했다. 공은 주형(主兄)에게 충성을 다해 곁을 떠나거나 명을 어긴 일이 없었다. 미실 또한 칭찬하기를 ‘공주에게 좋은 아들이 있으니 행운이 나보다 많다’고 했다. 매번 궁중에서 음식을 내리면 반드시 공을 불러 주며 말하기를 ‘내 사랑하는 조카야! 네 형을 잘 도우라’고 했다. 공주는 이에 오래된 감정이 조금 누그러들었다. 만년에는 서로 왕래했으니 대개 공이 힘썼기 때문이다. 

그 때 만호태후와 (숙명)공주는 힘써 진골정통(眞骨正統)을 도왔다. 미실이 두려워하며  애함(艾含)을 공과 결혼시키려 했다. 만호가 거절하고 그의 딸 만룡낭주(萬龍娘主)를 공의 적처(嫡妻)로 삼았다. 공의 나이 겨우 13이었고 만룡은 7살이었다. 이화공이 만룡이 어리다 해서 꺼렸다. 공주가 ‘사도 또한 7살에 대제(大帝)께 시집갔음에도 오히려 부부의 즐거움이 있었다. 뭣 때문에 꺼리는가’라고 말했다. 이화공은 다시는 말하지 않았다. 

앞서 만호태후는 공의 포형(胞兄)인 정숙태자(貞肅太子)를 사랑해 만룡을 낳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의 딸 애함(艾含)을 공에게 시집보내려 한다는 말을 듣고 대원신통이 진골정통을 빼앗을까 염려해 유별나게 만룡을 주려 한 것이다. 이에 만룡을 불러 무릎에 앉히고 묻기를 ‘사도태후는 7살에 시집을 가서 제(帝)를 잘 모셨는데 너 또한 능히 할 수 있느냐’고 했다. 만룡이 말하기를 ‘지아비가 누굽니까?’라고 했다. 공이라 대답하자 만룡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제 좋은 형입니다. 시집가고 싶습니다’고 했다. 태후는 이에 친히 신궁(神宮)에 가서 공주례(公主禮)를 고하고 포사(鮑祠)에서 길례(吉禮)를 행했다. 공은 늘 태후궁에서 만룡을 업고 놀았다. 그러므로 길례가 끝나자 만룡이 공에게 업어 달라 하자 공이 기뻐하며 허락했다. 태후가 웃으며 ‘지난날 형매(兄妹)가 지금은 부처(夫妻)가 되었다. 처가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숙명이 ‘부처이자 형매입니다.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마침내 공에게 처를 업고 태후를 뵈러 가도록 명했다. 공과 더불어 낭주가 (태후를) 뵈러 업고 나아가니 당시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의 맛누이인 화명(花明)은 … 하종공과 좋아했다. 미실은 이미 공을 만룡에게 빼앗겼다. … (화)명을 하종공 적처로 삼으려 했으나 만호가 들어주지 않고 모두 (진골정통을) 받아들이니 미실이 좋아하지 않았다. 공이 좋은 말로 위로하기를 ‘비록 혼인을 하지 않았으나 조카가 숙모를 어머니로 삼고 주형(主兄)이 포형(胞兄)입니다. 이러한 상태로 세월이 가면 어찌 또 혼인하는 날이 없겠습니까’라고 했다. 미실이 기뻐하고 마음을 풀며 말하기를 ‘너는 진정 내 아들이다. 또 무슨 혼인을 하겠느냐’라고 했다. 공은 양 통(統) 사이에서 이쪽저쪽을 능히 화해시켰다. 

미실은 이에 하종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전하도록 했다. 공은 사양했으나 어쩔 수 없이 풍월주가 되었으니 건복(建福) 8년(591) 정월이었다. 서현랑(舒玄郞)을 부제로 삼았다. 서현랑은 아양공주(阿陽公主) 아들인데 영특하고 통달한 기풍이 있어 태상태후가 아꼈다. 하종공에게 명해 전방화랑(前方花郞)을 삼았다. 건복(建福) 2년(585)에 공과 함께 우방화랑(右方花郞)이 되었다. 건복(建福) 5년(588) 하종공이 풍월주가 되자 공을 부제로 삼고 서현랑을 우방대화랑(右方大花郞)을 삼아 공에게 속하도록 했다. 이에 이르러 공이 서현랑(舒玄郞)을 부제로 삼고 용춘공(龍春公)을 우방대화랑으로 삼았다. 

그 때 만룡의 형인 만명(萬明)은 나이가 들었으나 혼인을 허락받지 못했는데 서현랑과 사(통)을 했다. 만호는 원래 아양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러므로 노해서 허락하지 않고는 공에게 명해 용춘공에게 서현랑을 대신토록 했다. 서현 또한 그 지위를 사양해 용춘공에게 넘겨주었다. 그러나 만명의 정과 사랑은 더욱 굳어져 몰래 서로 도망해 만났다. 만호는 이에 만명을 가두고 서현을 만노(萬弩)로 내치니 만명은 탈출해 함께 도망했다. 태후는 더욱 노해 벌을 주려 했다. 공과 만룡이 힘써 태후의 노여움을 풀어 무사하게 되었다. 

그 때 공의 누나인(女兄)인 화명(花明)과 옥명(玉明) 모두 진평대왕을 섬겨 총애(寵)를 받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공을 중용하고자 했다. 공은 나아가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집은 화랑을 세습하는 것으로 족하다. 다시 무엇 때문에 관리가 되겠는가’라고 했다. 

공은 청렴결백하며 지조를 지켰으나 낭주(娘主)는 태후의 사랑하는 딸이었기에 내리는 재물이 심히 많았다. 그러므로 집안 생활이 몹시 사치스러웠다. 공이 낭주에게 이르기를 ‘내가 낭도의 우두머리(君)로 어찌 홀로 부귀를 누리겠는가. 내 아내는 내 마음을 헤아려 주기를 바라오’라고 했다. 낭주가 말하기를 ‘부부는 한 몸입니다. 낭군의 마음은 첩의 마음입니다. 어찌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이에 그 재물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 그 때문에 낭도들이 우러러보기를 부모와 같이 했다. 무릇 근심과 재난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공과 낭주는 함께 가서 위로하고 구호해 주었다. 그 때 사람들이 두 성인이 순행하며 다스리는 것에 비교했다. 낭주는 왕의 누이라는 귀한 신분으로 지어미의 도리(婦道)를 다했다. 공이 조금만 아파도 몸소 간호했으며 음식과 의복도 친히 조리하고 손질해 올렸는데 반드시 공의 취향에 맞았다. 그러므로 공이 고맙게 여겨 다른 여자를 거느리지 않으니 금슬이 비할 바 없이 좋았다. 

늦게 한 아들과 한 딸을 낳았는데 아들은 예원(禮元)이라 하고 딸은 보룡(?龍)이라 했으니 곧 우리 문무왕후의 어머니다. 서자는 보태(菩太)와 보호(菩好)이고, 서녀는 보단(菩丹)과 이단(利丹)인데 모두 만룡낭주의 침비(枕婢)인 후단(厚丹)이 낳았다. 처음에 비대공의 딸 후만(厚滿)이 설원공(薛原公)과 통해 후단을 낳았다. 만룡이 출생하자 후만이 비보랑의 서매(庶妹)로 들어와 유모(乳姆)가 되었다. 이런 까닭에 후단이 침비가 되었다. 혼인을 하고 나서 태후가 공은 다 자랐으나 처가 어림을 고려해 비(婢)에게 명해 공을 모시도록 했다. 공은 거절하고 동침(親)하지 않았다. 낭주가 걱정해 후단과 함께 뜰에 단을 쌓고 (낭주가) 속히 자라기를 빌었다. 

공은 건복(建福) 8년(591) 춘정월 15일에 풍월주 자리로 나아갔다. 낭주는 아직 겨우 13살이었다. 공은 어리다 해서 남도(南桃)의 예를 미루려 했다. 낭주가 말하기를 ‘군(君)은 낭도의 아버지인데 첩이 모도(母道)를 이루지 못하면 수치입니다’라고 했다. 이에 (남도의 예를) 행하고 성호(成好)했다. 공이 기이하게 여기니 낭주가 ‘후비(厚婢)가 나에게 도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낭군께서 그를 첩으로 삼았으면 합니다’고 말했다. 

공은 비록 그 공을 칭찬했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낭주가 제(帝)에게 청했다. 제(帝)는 이에 공을 불러 꾸짖기를 ‘후단(厚丹)이 비록 비(婢)이나 비대전군(比臺殿君)의 손이고 설원 상선(上仙)의 딸이니 첩으로 삼을 수 있다’고 했다. 공은 이에 (후단과) 정을 통해 아들을 낳았다. 공이 탄식하기를 ‘적자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는데 서자가 먼저 나왔으니 이는 내 잘못이다’고 했다. 낭주가 위로하기를 ‘어찌 선후가 있습니까. 만약 제가 낳고자 하면 데려다가 아들을 삼으면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후단이 이에 그 아들을 낭주에게 바치니  감히 사랑(幸)을 받지 못했다. 낮이나 밤이나 낭주에게 아들이 생기도록 빌었다. 태후가 듣고 또한 궁중에서 빌고 점을 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낭군(郞君)은 낭주를 … 때문에 출산할 겨를이 없습니다. 가히 첩이 있어 사이에…다’고 했다. 이 말을 공에게 간하니, 공이 이에 깨달았다. 이에 …에게 물었다. 예원공(을 낳자) 후단의 자녀를 돌려주도록 명했다. 그 때 공주 등이 모두 … 신첩(臣妾)이 되어 정해진 지아비가 없는데 오직 공의 처첩이 유독 배반하지 않았다. 골인(骨人)들이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3년간 풍월주 자리에 있다가 부제인 용춘공에게 전해 주었다. 위(位)는 비록 상선(上仙)이었으나 몸은 불문(佛門)에 바쳐 백씨(伯氏=원광)를 도왔다. 만룡과 후단 모두 머리를 깎고 여승이 되어 공의 뜻을 받들었다. 만룡은 늘 같은 날 성불하고자 기도했는데, 과연 그 말과 같이 되었다. 공의 만년에 관한 일은 ?고승전(高僧傳)?에 나온다.  

찬한다. 보리사문은 위화랑공(魏花郞公)의 손이고 덕은 만룡과 화합하고 은혜는 바다나 산과 같고 공은 불문에 높고 만세에 오직 우러러본다.


世系 父曰二花郞 乃魏花郞之子也 母曰叔明公主 乃只召太后之女也 二花公以毛郞公妻弟同事只召太后有寵 毛郞公卒 二花公繼毛郞爲太后私臣 叔明公主時以皇后之尊 沈服于二花公之美 棄骨品如草介 約仁穴之友 携手出宮終身不二行 若狼狽之相倚 議者有非之 靜而思之 不亦壯乎 當其出宮相奔之際 帝怒赫〃 斧鉞在前 命如寸髮 猶能抱愛不屈 以生我神國大聖人圓光大法師 固天也 而盛矣至矣

  

세계 : 아버지는 이화랑이니 위화랑 아들이다. 어머니는 숙명공주인데 지소태후의 딸이다. 이화공이 모랑공의 처남으로 함께 지소태후를 섬겨 사랑을 받았다. 모랑공이 죽자 이화공이 모랑을 이어 태후의 사신(私臣)이 되었다. 숙명공주는 황후의 지위로 이화공의 아름다움에 깊이 빠져 골품(骨品)을 초개처럼 내버리고, 동혈(同穴)의 벗이 되기로 약속하고 손을 잡고 출궁해 종신토록 배반하지 않으니 마치 랑(狼)과 패(狽)가 서로 의지함과 같았다. 평자(評者) 중에는 비난하는 자도 있으나 가만히 생각하면 또한 장하지 않은가! 눈이 맞아 출궁하자 제(帝)의 노여움이 혁혁하며 무거운 형벌이 앞에 있어 목숨이 털끝 같았으나 오히려 부둥켜 안고 사랑하며 굴하지 않아 우리 신국(神國)의 대성인 원광대법사를 낳았으니 진실로 하늘의 뜻이다. 성대하고 지극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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