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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성왕은 진흥왕에게 "배신"당한 것이 아니다

by 초야잠필 2022.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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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왕이 죽는 장면은 장렬하여 읽는 사람에게 비통함을 준다.

아들을 구하기 위해 (찾아보기 위해) 가다가 신라 매복에 걸려 승하하게 되었는데 그 장면은 사서에도 자세하니 여기 따로 쓰지는 않겠다.

성왕은 일본측 사료에서도 극찬을 아끼지 않은 매우 명민한 명군으로 알려져 있는데, 성왕의 불행이라면 불행은 당시 명군은 백제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성왕은 흔히 진흥왕에게 "뒤통수를 맞아" 한강유역을 상실했다고 생각하는데 일본 측 사료를 읽어보면 그게 아니다.

아래는 흠명 5년 (544년) 기사이다. (동북아역사재단). 신라가 백제의 한강유역을 뺏어 영유한 것은 553년의 일이니 소위 나제동맹이 깨지기 11년 전의 일이다.

성명왕이 “임나국은 우리 백제와 예부터 지금까지 자제와 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지금 일본부의 인기미(印岐彌)[임나에 있던 일본의 신하의 이름이다.]는 이미 신라를 쳤고 이번에는 우리를 치려고 한다. 또 기꺼이 신라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무릇 인기미를 임나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해하려 한 것이 아니다[잘 알 수 없다.]. 예부터 신라는 무도하다.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깨고 탁순을 멸망시켰다. 신뢰하는 나라로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오히려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를 불러 같이 은조(恩詔)를 받들어 임나국을 일으키고 계승시켜, 옛날과 같이 영원히 형제가 되기를 바란다.

듣건대 신라와 안라 양국의 국경지역에 큰 강이 있는데 요해의 땅이라고 한다. 나는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 6성을 쌓으려 한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성마다 5백 명씩 두고, 이곳을 우리 병사와 함께 신라가 경작하는 것을 막으면 구례산의 5성은 자연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이다. 탁순국도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요청한 병사에게는 내가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려는 첫 번째 계책이다.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의 뜻을 거스르고 조공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겠는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강적을 물리치는 것이다.

무릇 저 흉악한 무리는 누구와도 손잡으려 할 것이다. 북적(北敵)은 강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다.

만일 남한에 군령과 성주를 두어 수리하고 방어하지 않으면 이 강적을 막을 수가 없다. 또한 신라도 누를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하여 임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마 멸망하여 조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고자 하는 두 번째 계책이다.



성왕의 국서를 보면 몇 가지 눈에 띄는 사실이 있다.

(1) 말이 나제동맹이지 신라와 백제 어느 쪽도 서로 믿지 않았다.

(2) 성왕은 가야를 도와 신라를 견제하려 했다. 성왕은 시종일관 신라를 "잠재적 적국"으로 간주했는데 이는 한강 유역을 뺏기기 전에도 시종일관했다.

(3) 성왕은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대에 왜병을 두어 지키게 하고 이들에게 옷과 식량을 제공하려 했다.

사실 이 세 가지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실상 동성왕 이후 백제가 왜와의 외교관계를 통해서 무엇을 얻어내려 했는지 자세히 써있고, 이렇게 얻어낸 것으로 무엇을 시도 하고 있었는지 잘 보인다.

백제의 전략은 성왕대에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고 동성왕, 무령왕, 그리고 성왕 이후에도 백제가 왜에 대해서 얻어내려고 한 것은 성왕의 이러한 생각 연장선상에 있었다.

한성 함락 이후 백제왕실의 이러한 전략에 왜의 "이 기회에 끼어들기" 전략, 그리고 백제와 가야지역에서 준동하던 소위 왜인들의 통제 안 되는 행동들을 합쳐서 왜의 시각에 따라 윤색하면 그것이 바로 "일본서기"이다.


함안 말이산 고분군. 소위 안라국은 삼국지 동이전 시대부터 "안야국"으로 가야의 양대 중심지 중 하나였다. (연합뉴스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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