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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엉뚱한 데로 발전한 몽촌토성 이야기

by taeshik.kim 2023.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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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전에 추사박물관을 다녀왔거니와 놓친 부분이 적지 않아 다시 갈 요량이었다. 마침 그 소식을 접한 오랜 지인이 다시 갈 생각없냐 혹 그렇담 같이 갔음 한다 해서 그럼 어디서 만나 픽업할까 하다 서울대로 낙착하니

글탐 그짝에서 왕도한성 특별전을 하니 그거 보고 같이 움직이자 해서 그리 낙착했으니, 그런대로 소기한 일정은 소화했다. 보니 서울대서 추사박물관은 코앞이라 도로에서 진을 뺄 일은 없었다.


몽촌 발굴 때인듯. 김원룡이다.



서울대박물관 특별전은 이미 한성백제박물관과 공동으로 먼저 저짝에서 했거니와 나는 그만 저짝 전시를 놓치고 말았으니 어쩌다 보면 그리 지나치는 일이 한둘인가?

서울대 전시는 한때 서울대가 고고학 발굴로 왕창 돈을 벌어제끼던 시절 마침 올림픽공원 부지로 선정된 그 구역 안에 위치한 몽촌토성 발굴 주관기관으로 수행한 발굴성과와 그 역사를 증언하는 출품작으로 구성했으니

이 전시를 지휘한 박물관장 권오영은 실로 묘한 처지였으리라 보거니와, 그는 고고미술사학과 출신이 아니라 학부가 국사학과요, 부전공으로 고고학을 한 것으로 안다.

조사원 자격기준으로 본다면 꽝인 셈인데 암튼 부전공 삼은 고고학이 어쩌다가 주전공으로 바뀐 인상을 주는데 실은 이런 이미지는 그 말 많고 탈 많은 1999~2000년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로 말미암는다.


왼편이 높은 사람인가 보다. 양복이자나. 그 오른편이 박순발, 한 사람 건너 임효재다. 박순발이 군기 든 표정이다. 혹 잘못 봤다면 지적 바란다. 아, 저 양반은 오머시기 인데???



동아대인가를 거쳐 한신대로 옮긴 그가 어찌하여 한신대박물관이 풍납토성 연합발굴대에 끼고 저 조사를 맡는 바람에 일대 회오리에 휘말리게 되는데, 실은 그 평지풍파를 일으킨 원흉이 김태식이다.

그 와중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설 경당지구에서 한성백제 왕성임을 입증하는 고고학적 증거들이 쏟아지면서 2000년에는 드디어 터질 것이 터지고 말았으니 그 재건축조합장 팽 모씨에 의한 굴삭기 동원 발굴현장 무단 파괴사건이다.

이 논란 한복판에 선 그의 당시 직책이 뭐였는지 정확히 기억엔 나지 않으나 발굴단장은 이남규 아니었던가 하며 권오영은 책임조사원 아니었나 한다.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때 권오영한테서 내가 강렬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교수가 발굴현장에 상주한다는 장면이었다.

나로선 특히 서울대 출신 교수가 발굴현장에 조사원들과 더불어 같은 시간을 일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 전배 격인 김원룡은 실은 고고학도가 아니었던 까닭에 자신이 단장으로 있는 현장은 기자님이나 모실 때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고 그가 배출한 임효재 최몽룡 이선복 등등도 마찬가지였고 다른 대학에 정착한 그 대학 출신 교수들이라 해서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왼편이 박순발. 나머지는 저 사람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정체를 밝혀주길 바란다.



교수로서 학생들과 자기 현장을 끝까지 지키는 이는 손보기와 그의 제자들은 거의 다 이랬고, 이형구 선생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난 그 점에서 권오영을 매우 존경한다.

또 얘기가 옆길로 샜거니와 고고학을 부전공으로 삼은 권오영은 몽촌발굴에는 참여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서울대가 70년대에 손댄 석촌동 발굴은 배기동 윤덕향이 실무를 주도했고 몽촌은 임영진과 박순발 시대였다. 지금 학계 중추로 활약하는 이들, 그러니깐 80년대 입학생들은 당시 학부생으로 이 발굴에 참여했다. 홍형우 김낙중? 지금 뭐 지금 한 지역씩 말아먹지만 당시엔 암것도 모른 학부생이었고, 신희권은 고등학교 재학 중이었다. 나? 신촌 독수리다방에서 이대생이랑 미팅하는 중이었다.  

이번 특별전 성벽 실측 도면을 보니 연필 글씨로 김용민이라는 이름이 보인다. 참고로 몽촌발굴은 대학 연합이라 숭실대서는 김무중, 단국대서는 서영일이 참여했다고 들었다.


뉘기?



이로써 보면 몽촌은 전반으로 보아 졸속 발굴일 수밖에 없었으니 그야 위선 시대한계로 치고 이 발굴이 고고학 사관학교 역할을 톡톡히 한 셈이다.

70년대 경주가 차지한 위상이 서울로 본거지를 옮기거나 넓히는 진원지가 된 것이다.

에고 어쩌다 이야기가 예까지 이르렀는지 모르겠다. 일단 끊는다.


***

이 글에 권오 본인이 교정한 바,  87년 군제대하고 4-5월 몽촌 발굴하다가 그 후 주암댐 발굴에 투입되었다 한다.

이 주암댐 발굴 역시 한국고고학사에선 매우 중요한데, 당시 전남대 사학과 재학 중이던 기모 호철군도 이 일원이었다.

그 유명한 행주기씨 대종가 출신으로 지금은 문중 현창 사업을 하고 한문을 한다는 정도로 각인한 그가 한때 발굴현장에서 땅 파던 족속이었다는 사실이 믿기는가?

이 주암댐 발굴 역시 한국고고학사에선 훗날 남강댐 수몰지구 발굴과 더불어 댐 고고학에서 대서특필해야 하므로 코너를 독립해 다뤄볼까 한다.

***

서영일은 내 기억에 몽촌 발굴 때는 군대 있었다고 했거니와 이게 맞을 것이다.

지금은 내포에 가서 암약하는 한건택이 이르기를 단국대선 정영호 단장 아래 학부생은 당시 삼학년인 그가 대장 노릇을 했댄다. 이 부분은 복기대랑 증언이 헷갈리는데 복기대는 본인이 했댄다.

한건택은 홍천 고등학교 1년 선배지만 재수한 복기대, 그리고 서영일과는 똥파리 82학번 단국대 사학과 동기로 복기대는 아마 발굴 중에 군대를 간 것이 아닌가 하지만 복기대 본인한테 확인하니 대학을 마치고 군대 갔댄다.

몽촌 발굴 전 단국대는 충주댐 발굴에 투입되었다 한다.

당시 조사비 처리는 요즘과 달라 교수들이 쌈짓돈으로 쓰던 시절이라 몽촌에서도 이런 사건이 있었고 이것이 결국은 평지풍파를 부르게 된다. 이 얘기는 추후 정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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