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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유성환의 AllaboutEgypt] 투탕카멘과 하워드 카터(11) 잔난자 사건

by taeshik.kim 2022. 12.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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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라오에 대한 신년의례 중 하나로 투탕카멘 몸에 연고를 발라주는 앙케센아문



안녕하세요. 약 2주간 데드라인이 있는 이런저런 업무를 수행하느라 몹시 바빴습니다. 이번 포스팅이 투탕카멘에 대한 마지막 연재이자 올해 마지막 이야기가 될 것 같습니다.

한 해 동안 제 이야기에 관심 보내주시고 "좋아요"와 "최고에요" 눌러주신 페친 여러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번 감사 드립니다.

오늘은 투탕카멘(Tutankhamun: 기원전 1336-1327년) 사후 왕위계승을 둘러싼 혼란 상황, 그리고 소위 ‘잔난자 사건’(Zannanza Affair)이라고 불리는 이집트와 히타이트 사이의 외교적 불화가 발생한 이유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잔난자 사건’은 투탕카멘 대왕비(Great Royal Wife) 앙케센아문(Ankhesenamun)이 당시 이집트 적국 히타이트 신왕국의 수필룰리우마 1세(Suppiluliuma: 기원전1344-1322년)에게 자신의 남편이 될 왕자를 보내달라는 편지를 보내면서 촉발되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잠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녀가 히타이트 왕에게 보낸 외교 서신을 다시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제 남편은 죽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수필룰리우마 1세]에게는 아드님이 많다고 합니다. 아드님 중 한 명을 저에게 주시면 그는 제 남편이 될 것입니다. 결코 제 종 중 하나를 골라 그를 남편으로 삼지는 않을 것입니다. ... ... 저는 두렵습니다.” (KBo V6, A ii: 10-15: Güterbock, 1956b: 94 = J. B. Pritchard, ANET, 319; Schulman, 1978: 47, no. 1).

앙케센아문이 보낸 이 서신은 1920년대에 수집되기 시작해 1931년부터 본격적으로 출판되기 시작한 《수필룰리우마의 치적 Deeds of Suppiluliuma》이라는 문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집은 당시 히타이트 제국 수도 핫투샤Hattusa, 즉 오늘날의 튀르키예Türkiye 보가즈쾨이Boğasköy의 뷔윅칼레Büyükkale 왕궁 지역에서 발굴된 토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문헌은 수필룰리우마 아들인 무르실리 2세(Mursili II: 기원전 1267~1237년)가 작성하였으며 투탕카멘 죽음과 앙케센아문 서신에 관한 내용은 이 중 「일곱 번째 토판」(Fr. 28A = KBo V6 = BoTU 41)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수필룰리우마의 치적》에서는 사망한 이집트 왕 이름이 ni-ip-ḫu-ru-ri-ia-aš “닙쿠루리야”Nipkhururiya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것은 투탕카멘 즉위명 throne name인 nb-ḫprw-ra “넵케페루레”(Nebkheperure)를 지칭하는 것이 거의 확실합니다.

서신을 보낸 LU2.MEŠ KUR mi-iz-ra-ma “이집트 왕비”는 da-ḫa-mu-un-zu-uš “다하문주”dakhamunzu로 알려져 있는데 이것은 이집트어 정관사와 일반명사 조합인 tA ḥjmt-nswt “왕비”(the king's wife)를 단순히 음역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이집트 왕비”에 대해서는 아멘호텝 4세/아켄아텐(Amenhotep IV/Akhenaten: 기원전 1352-1336년)의 대왕비 네페르티티(Nefertiti)나 메리타텐(Meritaten)이 거론되기도 하지만 여러 정황 증거를 고려하면 앙케센아문일 가능성이 가장 높습니다.

한편, 이 서신을 접한 수필룰리우마 1세는 이제 혼자가 된 이집트 대왕비의 이런 제안에 미심쩍은 반응을 보였는데 그도 그럴 것이 이 서신이 당시 고대 서아시아 외교관례에서는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파격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히타이트 왕은 혹시라도 이것이 당시 카데쉬(Qadesh)와 암쿠(Amqu) 등지에서 시리아 북부-레바논 지역 주도권을 두고 전쟁 중이었던 이집트가 히타이트 왕자를 인질로 만들려는 음모는 아닌지 의심했습니다.

왕은 자신의 의전관 하투샤지티(Hattushaziti)를 이집트로 보내 실상을 파악하게 했는데 이집트를 직접 방문하여 앙케센아문 진의를 파악한 하투샤지티는 그녀가 함께 딸려보낸 이집트 전령 하니(Hani)와 함께 그녀의 두 번째 서신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이 두 번째 서신에서 앙케센아문은 더욱 강력한 어조로 왕자를 보내줄 것을 재차 요청했습니다.

이에 이집트 대왕비 의도를 확인한 수필룰리우마 1세는 약 90일 후 자신의 아들 잔난자(Zannanza)를 이집트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잔난자는 이집트 국경을 넘기 전 혹은 직후에 사망했습니다.

당시 이집트는 아이(Ay: 기원전 1327-1323년)의 재위기였으므로 잔난자가 당시 시리아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으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면 그를 살해한 인물은 아이 그리고/혹은 호렘헵(Horemheb: 기원전 1323-1295년)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토판」에 따르면 수필룰리우마 1세 역시 잔난자가 이집트인들에 의해 살해된 것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들이 이 토판을 가지고 왔을 [때] 그들이 이르기를, “[이집트(?) 사람들이 잔난자를] 시해하였사오며 전언하기를, ‘잔난자가 [사망했다(?)!’ 했나이다. 그러자 내 아버지[수필룰리우마 1세]께서 잔난자의 시해에 대해 들으[셨을 때], 그는 [잔난]자를 위해 애곡하셨으며 신들[에게 ...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기를, ‘오 신들이시어! 저는 [악]을 행하지 [않았으나] 이집트 사람들이 [제게 이런 짓을 행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제 국경을 [공격했습니다]!” (Fr. 31 = Bo 4543 + 9181: 5-11행)

수필룰리우마 1세는 잔난자 시해와 국경에서의 분쟁에 대한 보복 조치로 이집트 국경지대인 암쿠를 공격했고 어느 정도 승리를 거둔 것으로 보입니다.

《역병에 대한 무르실리 2세의 기도 Plague Prayer of Mursili II》 중 「두 번째 기도」에 따르면(KUB 14.8 = KUB 14.10 + KUB 26.86; CTH 378.2, §§ 4-5), 이들 이집트 전쟁포로는 히타이트 수도로 압송되었으며 수도에 도착한 후 알 수 없는 감염병으로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감염병은 이내 본토의 히타이트 인들을 감염시켰으며 이들 또한 감염병에 의해 사망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수필룰리우마 1세와 그의 후계자였던 아르누완다 2세(Arnuwanda II: 기원전 1322-1321년)와 같은 왕족 역시 병사하고 말았습니다.

앙케센아문의 대담한 시도가 역설적으로 히타이트에 당시 ‘시리아 역병’으로 알려진 전염병을 퍼뜨리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아무튼 타국의 왕에게 “종”을 골라 결혼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며 왕족으로서 혹은 적법한 왕권의 근거가 될 수 있는 자신의 지위를 그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으려 한 앙케센아문의 절박한 모험은 실패로 끝났으며 이 두 번째 서신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역사의 무대에서 완전히 사라졌는데 그녀의 분묘 역시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도 왕의 여인들이 모여 산 시골의 왕실 사저에서 쓸쓸한 말년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왕비 지위에 부합하는 왕묘를 가지지 못한 것은 호렙헴의 뜻이었을까요? 이 매혹적인 역사의 미스테리는 아직도 학계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투탕카멘 #앙케센아문 #수필룰리우마 #잔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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