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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sWho in Ancient Korea

진덕왕(眞德王) 진덕여왕

by taeshik.kim 2018.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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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唐書卷三 本紀第三 太宗下 : (22년) 이 해에 新羅女王 김선덕(金善德)이 죽으니 그 여동생 진덕(眞德)을 세워 신라왕으로 삼았다.(是歲, 新羅女王金善德死, 遣冊立其妹眞德爲新羅王.)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진덕왕 : 진덕왕(眞德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승만(勝曼)이고 진평왕의 친동생 국반갈문왕(國飯葛文王)의 딸이다. 어머니는 박씨(朴氏) 월명부인(月明夫人)이다. 승만은 생김새가 풍만하고 아름다웠으며, 키가 일곱 자였고 손을 내려뜨리면 무릎 아래까지 닿았다. 원년(647) 정월 17일에 비담(毗曇)을 목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 2월에 이찬 알천(閼川)을 상대등으로 삼고 대아찬 수승(守勝)을 우두주(牛頭州) 군주로 삼았다. 당 태종이 사신을 보내 부절(符節)을 가지고 앞 임금을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추증하고, 아울러 왕을 주국(柱國) 낙랑군왕(樂浪郡王)으로 책봉하였다. 가을 7월에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은혜에 감사하였다. 연호를 태화(太和)로 바꾸었다. 8월에 살별[彗星]이 남쪽에서 나타났고 뭇 별들이 북쪽으로 흘러갔다. 겨울 10월에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의 세 성을 에워쌌으므로, 왕이 유신을 보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막게 하였다. 고전(苦戰)하여 기운이 다 빠졌는데, 유신의 부하 비령자(丕寧子)와 그의 아들 거진(擧眞)이 적진에 들어가 급히 공격하다가 죽으니, 무리들이 모두 분발하여 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11월에 왕이 몸소 신궁(神宮)에 제사지냈다. 2년(648) 봄 정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백제 장군 의직(義直)이 서쪽 변경을 침공하여 요거성(腰車城) 등 10여 성을 함락하였다. 왕이 이를 근심하여 압독주도독 유신에게 명하여 이를 도모하게 하였다. 유신은 이에 사졸(士卒)을 타이르고 격려하여 거느리고 나아갔다. 의직이 이에 대항하자 유신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협격(夾擊)하였다. 백제 군사가 패하여 달아나므로, 유신은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거의 다 죽였다. 왕이 기뻐하여 사졸들에게 상을 주되 차등이 있었다. 겨울에 한질허(邯帙許)로 하여금 당에 조공케 하였다. [당] 태종이 어사(御史)를 시켜 물었다. “신라는 신하로서 대국(大國) 조정을 섬기면서 어찌하여 따로 연호를 칭하는가?” [한]질허가 대답하였다. 일찍이 천자의 조정에서 정삭(正朔)을 반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조 법흥왕 이래로 사사로이 기년(紀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대국 조정에서 명이 있었다면 작은 나라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습니까? 태종이 그렇겠다고 여겼다. 이찬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보내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태종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을 참관하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비(溫湯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어느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꿇어앉아 아뢰었다.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 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읍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 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본국으로 돌아올 때 3품 이상에게 명하여 송별 잔치를 열게 하여 우대하는 예를 극진히 하였다. 춘추가 아뢰었다. “신에게 일곱 아들이 있습니다. 바라건대 고명하신 폐하 옆을 떠나지 않고 숙위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그의 아들 문왕과 대감(大監) △△에게 [머물러 숙위할 것을] 명하였다. 춘추가 돌아오는 길에 바다 위에서 고구려의 순라병(巡邏兵)을 만났다. 춘추를 따라간 온군해(溫君解)가 높은 사람이 쓰는 모자와 존귀한 사람이 입는 옷을 입고 배 위에 앉아 있었더니 순라병이 보고 그를 춘추로 여기어 잡아 죽였다. 춘추는 작은 배를 타고 본국에 이르렀다. 왕이 이를 듣고 슬퍼하여 군해(君解)를 대아찬으로 추증하고, 그 자손에게 상을 후하게 주었다. 3년(649) 봄 정월에 비로소 중국의 의관(衣冠)을 착용하였다. 가을 8월에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왕이 대장군 유신과 장군 진춘(陳春),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에게 명하여 나아가 막게 하였다. 이곳 저곳으로 이동하며 10여일 동안 싸웠으나 해결나지 않았으므로 도살성(道薩城) 아래 나아가 주둔하였다. 유신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였다. “오늘 틀림없이 백제인이 와서 염탐할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척하고 함부로 검문[誰何]하지 말라.”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군영 안을 돌아다니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게 했다. “방어벽을 견고히 하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응원군이 오는 것을 기다려 그 후에 싸움을 결판내겠다.” 첩자(諜者)가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은 군사가 증원될 것이라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진격하여 크게 이겨 장사(將士) 1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980명을 목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을 획득하였고 병기와 같은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4년(650) 여름 4월에 왕이 명을 내려 진골(眞骨)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은 아홀(牙笏)을 갖게 하였다. 6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백제의 무리를 깨뜨린 사실을 알렸다. 왕이 비단을 짜서 오언태평송(五言太平頌)을 지어, 춘추의 아들 법민(法敏)을 보내 당 황제에게 바쳤다. 그 글은 다음과 같다. 대당(大唐) 큰 왕업(王業)을 개창하니 높디 높은 황제의 포부 빛나도다. 전쟁을 그치니 천하가 안정되고 전 임금 이어받아 문치를 닦았도다. 하늘을 본받음에 기후[雨施]가 순조롭고 만물을 다스림에 저마다 빛나도다[含章]. 지극한 어짊은 해 달과 짝하고 시운(時運)을 어루만져 태평[時康]으로 나아가네. 깃발들은 저다지도 번쩍거리며 군악 소리 어찌 그리 우렁찬가! 명을 어기는 자 외방(外方) 오랑캐여 칼날에 엎어져 천벌을 받으리라. 순후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원근에서 다투어 상서(祥瑞)를 바치도다 사철이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해와 달[七曜]은 만방을 두루 도네. 산악의 정기 어진 재상 내리시고 황제는 신하를 등용하도다. 삼황오제(三皇五帝) 한 덕을 이루니 길이길이 빛나리 우리 당나라. 고종이 가상하게 여겨 법민을 태부경(太府卿)으로 삼아 돌려 보냈다. 이 해에 비로소 중국의 영휘(永徽) 연호를 사용하였다. 사론(史論): 삼대(三代)가 정삭(正朔)을 고치고 후대에 연호를 일컫는 것은 모두가 통일을 크게 여겨 백성들이 듣고 보는 것을 새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까닭에 때를 타고 나란히 일어나 둘이 마주 서서 천하를 다툰다든지, 간교한 사람이 틈을 타고 일어나 제왕의 자리를 엿보는 경우가 아니면 변두리의 작은 나라로서 천자의 나라에 신하로 속한 자라면 진실로 사사로이 연호를 칭할 수 없다. 신라와 같은 나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국을 섬겨 사신의 배와 공물 바구니가 길에서 서로 마주 볼 정도로 잇달았다. 그런데도 법흥왕이 스스로 연호를 칭한 것은 알지 못할 일이다. 그 후에도 그 잘못된 허물을 이어받아 여러 해를 지냈다. 태종의 꾸지람을 듣고도 오히려 머뭇거리다가 이 때에 와서야 당나라의 연호를 받들어 행하였다. 비록 어쩔 수 없이 한 일이라 할지라도, 이는 잘못을 저지르고 능히 허물을 고친 것이라 할 만하다. 6년(652) 봄 정월에 파진찬 천효(天曉)를 좌리방부령(左理方府令)으로 삼았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3월에 서울에 큰 눈이 왔고 왕궁 남쪽 문이 아무 까닭없이 저절로 무너졌다. 7년(653) 겨울 11월에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금총포(金總布)를 바쳤다. 8년(654) 봄 3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진덕(眞德)이라 하고 사량부(沙梁部)에 장사지냈다. 당 고종이 이를 듣고 영광문(永光門)에서 애도를 표하고 태상승(太常丞) 장문수(張文收)를 사신으로 보내 부절을 가지고 조문케 하였으며,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를 추증하고 비단 300단(段)을 내려 주었다. 나라 사람들은 시조 혁거세로부터 진덕왕까지의 28왕을 일컬어 성골(聖骨)이라 하고, 무열왕부터 마지막 왕까지를 일컬어 진골(眞骨)이라 하였다. 당나라 영호징(令狐澄)의 신라기(新羅記)에 말하기를 『그 나라의 왕족은 제1골(第一骨)이라 하고 나머지 귀족은 제2골(第二骨)이라 한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권 제1 왕력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이름이 승만(勝曼)이다. 김씨다. 아버지는 진평왕 동생인 국기안(國其安) 갈문왕(葛文王)이며 어머니는 아니부인(阿尼夫人) 박씨다. 奴追□□□ 갈문왕(葛文王)의 딸인데 월명(月明)이라고도 하지만 잘못이다. 정미년에 즉위해 7년 동안 다스렸다. 대화(大和) 술신(戊申) 6년이다. 이상을 중고(中古)라고 하며 성골(聖骨)이다. 이하를 하고(下古)라 하며 진골(眞骨)이다. 

 

舊唐書 권 제199上 列傳 제149上 東夷 新羅國 : [貞觀] 21년(647. 新羅 眞德女王 1)에 善德이 卒하니 光祿大夫를 추증하고, 나머지의 官爵은 이전에 봉해 준대로 했다. 이어서 그의 여동생 眞德을 세워 王으로 삼고, 柱國을 加授하고 樂浪郡王에 봉했다. [貞觀] 22년(648. 新羅 眞德女王 2)에 眞德이 그의 아우 國相 伊贊干 金春秋[註026] 및 그의 아들 文王을 보내와 朝覲했다. 조서를 내려 春秋에게는 特進을 除授하고, 文王에게는 左武衛將軍을 除授했다. 春秋가 國學에 나아가 釋奠 및 講論하는 의식을 구경하겠다고 청하므로, 太宗은 이로 말미암아 친히 지은 『溫湯』ㆍ『晋祠碑』 및 新撰한『晋書』를 내렸다. [그들이] 본국으로 돌아갈 무렵에는 3品이상의 관원을 시켜 餞別宴을 베풀어 주는 등 예우가 극진했다. 永徽 원년(650. 新羅 眞德女王 4)에 眞德이 百濟의 무리를 大破한 뒤 그의 아우 法敏을 보내어 보고했다. 이때 眞德이 5言의 太平頌을 지어 비단에 짜서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唐이 큰 王業을 연 것은 / 巍巍하신 皇帝의 훌륭한 智謀. / 干戈를 멈추어 세상은 큰 평정을 이루고 / 文治를 일으켜 百王을 계승했어라. / 天下를 거느림에는 은혜를 높이 숭상하고 / 萬物을 다스림에는 공을 내세우지 않네.

깊은 仁德은 日月과 짝할만 하고 / 大運을 타고 일어남은 陶唐의 世를 초월했네. / 幡旗가 赫赫하던 그 날 / 鉦鼓는 어이 그리 鍠鍠했던가. / 外夷로 命을 어긴 자는 / 天殃을 입어 覆滅했네. / 순박한 풍속이 幽明에 같이 엉기니 / 遠近에서 앞다투어 呈祥을 하네. / 四時의 節氣는 玉燭처럼 순조롭고 / 七曜의 빛이 萬方에 고루 돈다. / 오직 諸侯라야 宰輔를 천거하고 / 오직 皇帝만이 忠良을 등용하는 법. / 五帝三王의 德을 하나로 해 / 우리 唐나라 밝게 빛내리.” 高宗이 이를 가상히 여겨 法敏에게 太府卿을 拜授했다. [永徽]3년(652. 新羅 眞德女王 6)에 眞德이 卒하자, [高宗이] 擧哀했다. 詔書를 내려 春秋로 뒤를 이어 新羅王을 삼아서 開府儀同三司를 더해 제수하고, 樂浪郡王에 封했다.


동경잡기(東京雜記) 간오(刊誤) : 선덕왕 남편은 갈문왕(葛文王) 김인평(金仁平)이고, 진덕왕 남편은 갈문왕 김기안(金基安)이다. 무열왕(武烈王) 어머니는 선덕 동생인 천명부인(天明夫人)이다. 읍(邑)에 세보(世譜)가 있으니 그 전하는 바가 이와 같다. 여러 사서에는 전하지 않는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제1 선덕왕(善德王) 지기삼사(知幾三事) : 제27대 덕만(德曼. 만<曼>은…정관(貞觀) 6년 임진(壬辰.632)에 즉위해 나라를 다스린 지 16년 동안에 미리 안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셋째는 왕이 아무 병도 없을 때 여러 신하들에게 일렀다. “나는 아무 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도利天) 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 여러 신하들이 그게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말하였다. “낭산(狼山) 남쪽이니라.” 그 날이 이르니 왕은 과연 죽었고, 여러 신하들은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호대왕(文虎(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웠는데 불경(佛經)에 말하기를, "사천왕천(四天王天) 위에 도리천(도利天)이 있다"고 했으니 그제야 대왕(大王)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 왕이 죽기 전에 여러 신하들이 왕에게 아뢰었다. “어떻게 해서 모란꽃에 향기가 없고, 개구리 우는 것으로 변이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까.” 왕이 대답했다.  "꽃을 그렸는데 나비가 없으므로 그 향기가 없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이것은 당나라 임금이 나에게 짝이 없는 것을 희롱한 것이다.  또 개구리가 성난 모양을 하는 것은 병사(兵士)의 형상이요.  옥문(玉門)이란 곧 여자의 음부(陰部)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빛은 서쪽을 뜻하므로 군사가 서쪽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 남근(男根)은 여근(女根)이 들어가면 죽는 법이니 그래서 잡기가 쉽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에 여러 신하들은 모두 왕의 성스럽고 슬기로움에 탄복했다.  꽃은 세 빛으로 그려 보낸 것은 대개 신라에는 세 여왕(女王)이 있을 것을 알고 한 일이었던가.  세 여왕이란 선덕(善德)·진덕(眞德)·진성(眞聖)이니 당나라 임금도 짐작하여 아는 밝은 지혜가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41(열전 제1) 김유신 : 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니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물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밤 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은 사병들에게 말하였다.“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女主]이 패할 징조이다.”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하였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9족(族)을 죽였다.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등 세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합 1만 명을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비령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사세가 급박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절을 하고는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적진에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 및 집종[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라서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춘추는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신은 비록 다소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구나!”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룰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전쟁의 승부는 대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경남 합천]에 이르니 백제가 맞서 대항하였다.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가볍게 보아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사신을 백제 장군에 보내 말하였다. 우리의 군주(軍主)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상주(上州)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였다. 다시 적의 영토에 들어가 진례(進禮) 등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목베고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을 만나 말하기를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고,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뼈를 고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太和] 2년(648)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왔다.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였다. 전군[三軍]을 다섯 방면으로 나누어 쳤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어 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쳐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잘 먹여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물새가 동쪽으로 날아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군과 병사들이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는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리에게 일렀다. “금일 반드시 백제인이 간첩으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검문하지 말라!”그리고는 군중에 전령을 돌렸다.“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옴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다!”간첩이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가 증원되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일시에 용감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장군 달솔 정중(正仲)과 병사 100명을 생포하고 좌평 은상,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병사 8,980명을 목베고 말 1만 마리와 투구 1천8백 벌, 기타 이와 비슷한 숫자의 기계를 노획하였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항복해 오는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과 병사 1천 명을 만나자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대로 맡겼다. 서울[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성문까지 나와 맞았고, 위로함이 극진하였다. 영휘(永徽) 5년(654) 진덕대왕이 죽고 후계자가 없자 유신은 재상 이찬 알천(閼川)과 논의하여 이찬 춘추를 맞이하여 즉위하게 하니 이가 바로 태종대왕이다.


삼국사기 권 제44(열전 제4) 김인문 : 영휘(永徽) 2년(진덕왕 5년: 651), 인문의 나이 23세에 왕명을 받아 대당에 들어가 숙위하였다. 고종이 “바다를 건너 와 조회한 충성이 가상하다.”고 하여 특히 좌령군위장군(左領軍衛將軍)의 직을 제수하였다. 영휘 4년(진덕왕 7년: 653) 황제의 허가를 받고 귀국하여 부모를 찾아 뵈니 태종대왕은 그에게 압독주(押督州)[현재의 경북 경산시] 총관(摠管)을 제수하였다. 이에 그가 장산성(獐山城)을 쌓아 요새를 설치하니, 태종이 그 공을 포상하여 식읍 300호를 주었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비령자 : 비령자(丕寧子)는 출신 지역과 성씨를 알 수 없다. 진덕왕 원년 정미(647) 백제가 많은 군사로 무산성(茂山城).감물성(甘勿城).동잠성(桐岑城) 등지를 공격해 오자 유신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막았으나, 백제 군사가 매우 날쌔어 고전하고 이기지 못하여 사기가 떨어지고 힘이 지쳤다. 유신은 비령자가 힘써 싸우고 적진 깊이 들어갈 뜻이 있음을 알고 불러 말하기를 “날씨가 추워진 후에 소나무, 잣나무가 늦게 낙엽짐을 알 수 있는데 금일의 일이 급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능히 용기를 내고 기이함을 보여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키겠는가?” 하고는 더불어 술잔을 나누면서 뜻의 간절함을 보이니 비령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지금 수 많은 사람 중에 일을 오직 저에게 맡기시니 자기를 알아준다고 할 수 있으니 진실로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답하겠습니다”고 했다. 나가면서 종 합절(合節)에게 말했다.“나는 오늘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아래로는 나를 알아주는 분을 위하여 죽을 것이다. 내 아들 거진(擧眞)은 비록 나이는 어리나 굳센 의지가 있으니 반드시 [나와] 함께 죽으려 할 것이니 만약 아버지와 아들이 모두 죽으면 집사람은 누구를 의지하겠는가? 너는 거진과 함께 나의 해골을 잘 수습하여 돌아가 어미의 마음을 위로하라!” 말을 마치고 곧장 말을 채찍질하여 창을 비껴들고 적진에 돌진하여 몇 사람을 쳐 죽이고 죽었다. 거진이 이를 바라보고 떠나려 하니 합절이 말했다.“어르신께서 말씀하시기를 ‘합절로 하여금 낭군과 함께 집에 돌아가 부인을 편안하게 위로하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자식이 아버지 명을 거역하고 어머님을 버리는 것이 어찌 효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는 말고삐를 잡고서 놓지 않았다. 거진이 말하기를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고 구차히 살면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고는 곧 칼로 합절의 팔을 쳐 끊고 적중으로 달려가 죽었다. 합절(合節)이 말하기를 “내 하늘이 무너졌으니, 죽지 않고 무엇을 하겠는가?” 하고는 또한 싸우다가 죽었다. 군사들이 세 사람의 죽음을 보고는 감격하여 다투어 나가니 향하는 곳마다 적의 칼날을 꺾고 진을 함락하여 적병을 대패시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유신이 세 사람의 시신을 거두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고 곡을 매우 슬퍼했다. 대왕이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예를 갖추어 반지산(反知山)에 세 사람을 합장하고 처자 9족에게 은혜로운 상을 풍부하게 내려주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 진덕왕(眞德王) : 제28대 진덕여왕(眞德女王)은 왕위에 오르자 친히 태평가(太平歌)를 지어 비단을 짜서 그 가사로 무늬를 놓아 사신을 시켜서 당(唐)나라에 바치게 했다(다른 책에는 춘추공<春秋公>을 사신으로 보내 군사를 청하게 했더니 당 태종이 기뻐하여 소정방<蘇定方>을 보냈다고 했으나 이는 잘못이다. 현경<現慶> 이전에 춘추공은 이미 왕위에 오른데다 현경<懸磬> 경신<庚申>은 태종이 아니라 고종<高宗> 때이다. 정방<定方>이 온 것은 현경 경신년이니 비단을 짜서 무늬를 놓아 보냈다는 것은 청병<請兵>한 때의 일이 아니고 진덕왕 때 일이라야 옳다. 대개 이때는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달라고 청할 때 일일 것이다). 당 황제(皇帝)는 이를 아름답게 여겨 칭찬하고 진덕여왕(眞德女王)을 계림국왕(鷄林國王)으로 고쳐 봉했다. 태평가(太平歌) 가사(歌詞)는 이러했다. 큰 당(唐)나라 왕업(王業)을 세우니, 높고 높은 임금의 계획 장하여라. 전쟁 끝나니 천하를 평정하고, 문치(文治)를 닦으니 백왕(百王)이 뒤를 이었네. 하늘을 거느리니 좋은 비 내리고, 만물을 다스리니 모든 것이 광채가 나네. 깊은 인덕(人德)은 해와 달에 비기겠고, 돌아오는 운수는 요순(堯舜)보다 앞서네. 깃발은 어찌 그리 번쩍이는가, 징소리 북소리는 웅장도 하여라. 외이(外夷)로서 황제의 명령 거역하는 자는 칼 앞에 자빠져 천벌을 받으리. 순후(淳厚)한 풍속 곳곳에 퍼지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상서(祥瑞)를 바치네. 사시(四時)의 기후는 옥촉(玉燭)처럼 고르고, 칠요(七曜)의 광명은 만방에 두루 비치네. 산악(山嶽)의 정기는 보필할 재상을 낳고, 황제(皇帝)는 충량(忠良)한 신하에게 일을 맡겼네. 오제(五帝) 삼황(三皇)의 덕(德)이 하나로 이룩되니, 우리 당(唐)나라 황제(皇帝)를 밝게 해 주리. 왕이 즉위하던 시대에 알천공(閼川公)·임종공(林宗公)·술종공(述宗公)·호림공(虎林公; 자장慈藏의 아버지)·염장공(廉長公)·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南山) 우지암(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이 놀라 일어났으나 알천공(閼川公)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은 완력이 이처럼 셌으며 그를 윗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모든 이는 유신공(庾信公)의 위엄에 심복(心腹)했다.신라에는 네 곳의 신령스러운 땅이 있어서 나라의 큰 일을 의논할 때면 대신(大臣)들은 반드시 그곳에 모여서 일을 의논했다. 그러면 그 일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이 네 곳의 첫째는 동쪽의 청송산(靑松山)이요, 둘쩨는 남쪽의 우지산(우知山)이요, 셋째는 서쪽의 피전(皮田)이요, 넷째는 북쪽의 금강산(金剛山)이다.  이 왕 때에 비로소 정월 초하룻날 아침의 조례(朝禮)를 행했고, 또 시랑(侍郞)이라는 칭호도 이때에 처음으로 쓰기 시작했다.


삼국사기 권 제5(신라본기 제5) 태종무열왕 :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이 왕위에 올랐다. 이름은 춘추(春秋)이고 진지왕의 아들 이찬 용춘(龍春)<또는 용수(龍樹)라고도 하였다.>의 아들이다.<당서(唐書)에는 진덕의 동생이라 하였으나 잘못이다.> 어머니 천명부인(天明夫人)은 진평왕의 딸이고, 왕비 문명부인(文明夫人)은 각찬(角) 서현의 딸이다. 왕은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하여 어려서부터 세상을 다스릴 뜻이 있었다. 진덕을 섬겨 지위는 이찬을 역임하였고, 당나라 황제가 특진(特進)의 관작을 제수하였다. 진덕이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을 청하였으나, 알천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였다. “저는 늙고 이렇다 할 덕행이 없습니다. 지금 덕망이 높기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세상을 다스릴 뛰어난 인물이라 할만 합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는 세 번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삼국유사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 진덕왕(眞德王)이 죽자 영휘(永徽) 5년 갑인(甲寅; 654)에 춘추공은 왕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린 지 8년 만인 용삭(龍朔) 원년(元年) 신유(辛酉; 661)에 죽으니 나이 59세였다. 애공사(哀公寺) 동쪽에 장사지내고 비석을 세웠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2 문호왕(文虎王) 법민(法敏) : 왕이 처음 즉위했을 때 남산(南山)에 장창(長倉)을 설치하니, 길이가 50보(步), 너비가 15보(步)로 미곡(米穀)과 병기(兵器)를 여기에 쌓아 두니 이것이 우창(右倉)이요, 천은사(天恩寺) 서북쪽 산 위에 있는 것은 좌창(左倉)이다. 다른 책에는 “건복(建福) 8년 신해(辛亥; 591)에 남산성(南山城)을 쌓았는데 그 둘레가 2,850보(步)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것은 진덕왕(眞德王) 시대에 처음 쌓았다가 이때에 중수(重修)한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헌안왕 : 5년(861) 봄 정월에 왕이 병으로 자리에 누워 오랫동안 낫지 않았으므로 좌우의 신하들에게 일렀다. “과인은 불행히도 아들은 없고 딸만 있다. 우리나라의 옛일에 비록 선덕(善德)과 진덕(眞德) 두 여자 임금이 있었으나, 이는 암탉이 새벽을 알리는 것과 비슷하므로 본받을 일이 못된다. 사위 응렴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을 가지고 있다. 경들은 그를 왕으로 세워 섬기면 반드시 선조로부터 이어 온 훌륭한 왕업을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과인은 죽어도 또한 썩지 않을 것이다.” 이달 29일에 [왕이] 죽었다.


삼국사기 권 제11(신라본기 제11) 정강왕 : 2년(887)…여름 5월에 왕이 병이 들어 시중 준흥(俊興)에게 말하였다. "내 병이 위중하니 틀림없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왕위를 이을 자식이 없다. 그러나 누이 만(曼)은 천성이 총명하고 민첩하며 뼈대는 남자와 비슷하니 경들은 마땅히 선덕(善德)과 진덕(眞德)의 옛 일을 본받아 그를 왕위에 세우는 것이 좋겠다.”


삼국사기 권 제33(잡지 제2) 색복 : 신라 초기의 의복 제도는 색채를 상고할 수 없다. 제23대 법흥왕 때에 이르러 비로소 6부(六部) 사람의 복색의 존비(尊卑) 제도를 정하였지만, 아직도 오랑캐[夷]의 풍속 그대로였다. 진덕왕 재위 2년(648)에 이르러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들어가 당나라의 의례에 따를 것을 청하니, 태종(太宗)황제가 조서로써 이를 허가하고 아울러 옷과 띠[衣帶]를 주었다. 드디어 돌아와서 시행하여 오랑캐의 복색을 중화의 것으로 바꾸었다.


☞승만(勝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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