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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일기를 꺼내보는 봄여름가을겨울

by taeshik.kim 2018. 1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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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공장 다른 부장들은 여전히 고래의 전통에 휘말려, 새벽 같이 출근하지만, 오직 나만은 주 52시간 노동시간 체제 정착을 위해 일찌감치 그럴 필요 없다 해서 부장 중에서는 가장 늦게 어슬렁어슬렁 편집국에 나타난다. 


고 전태관


보통 7시 무렵 집을 나서 쉬웅 하고 버스 타면 방을 나서 편집국 회사 내 자리 앉기까지 30분이면 족하다. 이것도 갈수록 차츰 늦어져 아침 편집회의 자료 올리는 시간이랑 에디터 주재 회의만 없다면, 출근조차 하지 않을 작정이지만, 이건 아마 당분간은 어려울 듯하다. 

강추위가 맹위를 떨친 오늘 아침도 그렇게 빈둥빈웅 어슬렁어슬렁하면서, 나설까말까 하면서 할 수 없이 PC를 끄려는 찰나, 틱 하면서 "기사가 왔습니다"라는 요란한 울림이 있다. 보니 봄여름가을겨울 드러머 전태관이 타계했다. 

사실 그의 죽음은 시점이 문제였지, 그것이 급박한 일이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았다. 그만큼 병색이 짙었던 것이며, 그래서 조만간 닥칠 그 일을 염두에 두고 나는 가요 담당 기자들한테 관련 기사를 준비해 놓으라 부탁하기도 했다. 

전태관, 혹은 봄여름가을겨울은 상징성이 대단한 대중스타라, 이런 중요한 인물이 타계하면, 기사 중요도라는 측면에서 보통은 제목 한 줄짜리 긴급을 때린다. 하지만, 전태관이 그만한 비중이 되느냐 아니냐 하는 논란이 없지는 않겠지만, 나는 해야 한다고 본다. 그것이 그가 남긴 막대한 족적에 대한 언론의 대접이라 생각하는 까닭이다. 


김종진 전태관 봄여름가을겨울


하지만 이번에 우리 공장은 그리 할 수가 없었다. 살피니, 이미 연예매체들은 그의 타계를 앞서거니뒤서거니 전하고 있거니와, 우리로서는 속보성에서 뒤졌으니, 뒤늦게 그런 사실을 긴급하게 전할 이유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봄여름가을겨울 전태관, 암 투병 끝에 별세'라는 제하 박수윤 기자 기사로 담담하면서 비교적 상세한 스트레이트 기사를 오늘 아침 6시 56분에 내보냈다. 

우리 공장은 박 기자 외에 가요계 대모라 할 이은정 차장 둘이서 가요를 전담한다. 이후 그의 타계를 전하는 좀 더 상세한 기사를 보완하는 한편, 가요계 추모 분위기를 별도로 정리하고, 김종진 전태관과 교유가 적지 않은 이은정 기자더러는 묵직한 냄새가 나는 박스 기사 하나를 쓰게 했으니, '봄여름가을겨울 30년 이끈 외유내강 드러머 전태관'이 그것이다. 

그의 타계 및 장례와 관련한 더 자세한 사항들이 보충되었으니, 별세 일시는 27일 23시 50분이라 하며, 입관은 29일 16시이고, 발인은 31일 09시, 장지는 용인평온의숲이라 한다. 

세상 하직한 전태관과 그의 단짝 김종진은 1962년 생이다. 나보다는 앞선 연배지만, 이 봄여름가을겨울은 실은 내 세대가 대학 생활과 함께 호흡한 같은 세대다. 각종 기록을 보면 저들이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한 시점이 1988년이라, 이를 시발로 주옥 같은 명곡이 쏟아졌거니와, 그 젊은 피가 들끓던 그 시절 이들 노래를 흥얼거리며 청춘을 보낸 것이다. 


김종진 전태관 봄여름가을겨울


요샌 도통 노래방 갈 일도 없지만, 그 노래방에서 내가 빠지지 않고 부르곤 하는 노래 중 하나가 '10년전의 일기를 꺼내어'다. 이 노래는 어찌된 셈인지, 그 발표 당시에 20대 내 심금을 때리곤 했으니, 이런 노래들을 보면서 나는 저들이 이 시대 음유시인이 아닌가 했더랬다.  

올해로 결성 30주년을 맞았다는 이들. 그들은 내게는 어쩌면 30년간의 일기이기도 했다. 그 30년치 일기를 잠시간 꺼내 들춰보니, 갖은 소회 어물전 꼴두기 숫자만큼 각양각색으로 진열한다. 그 무수한 스펙트럼 관통하는 단 하나의 분모는 humilia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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