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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주최 '대고려전' 매장을 돌다가 이 고려청자 3점을 마주하고선 무심히 지나치려 했다. 상설전시실 있는 걸 내려다봤구만 했더랬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류 고려청자는 수량이 적지는 하지만, 그 폼새가 뛰어나다 해서 이런저런 자리에 자주 불려나가는가 하면, 특히 국립박물관에서는 상설전시품으로 빼는 일이 없는 까닭이다. 



 

 

특히 맨 왼편 소위 '동자 연적(童子硯滴)'은 어딘지 모르게 눈에 익었다. 하긴 저들 석 점 다 내 눈에 익기는 했다. 저 비스무리한 연적을 어디서 봤을까나는 차지하고, 그리 무심히 지나치면서 안내판을 읽어보니, 어랏? 석점 모두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에서 빌려왔네? 어쭈구리? 여튼 우리 국박은 일본이라는 사족을 못 쓰니, 뭐, 이래저래 교유도 많고, 서로 먹고 살아야 하니, 좋은 물건 빌려왔겠구나 했더랬다. 


정작 내가 주의깊게 본 것은 이 근방 어디인가 전시실 비름빡에 붙은 이규보 시였다. 천상 저 동자 연적과 같은 류 물건을 보고 읊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멋드러진 그의 시가 걸렸더라. 음, 좋군, 하고는 그것을 폰카로 찍어두었다고 조금 전 생각이 나서 그걸 찾아봤다.  





이규보(李奎報, 1169∼1241) 사후 그의 시문을 망라해 나온 문집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 제13권 고율시(古律詩)가 수록한 '안중삼영(案中三詠)'은 글자 그대로는 서재에서 마주하는 세 가지 사물을 소재로 읊은 연작시다. 이 세 가지를 순서대로 보면 '소분석창포(小盆石菖蒲)'와 '녹자연적자(綠甆硯滴子)', 그리고 '죽연갑(竹硯匣)'이다. 이규보는 시에 환장해 매일매일 시를 써제꼈으니, 놀라운 점은 그렇게 다작을 하면서도, 그 작품 대다수가 주옥을 방불한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런 다작 중에서도 작품성이 특히 뛰어난 것만 고른 편집방침이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는 바람에 수준 덜 떨어지는 작품들이야 나가 떨어졌겠지만, 그 막대한 수작秀作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이 '안중삼연'도 그렇다 할 만하니, '소분석창포(小盆石菖蒲)'는 작은 화분에 키우는 석창포라는 식물을 노래함이요, '녹자연적자(綠甆硯滴子)'는 푸른 색깔 나는 자기 연적을 제재로 삼았으며, '죽연갑(竹硯匣)'은 확실치는 않으나 벼루 보관함 같은데, 그걸 대나무로 만들었나 보다. 혹 아시는 분은 교시 바란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작품은 두 번째 '푸른 자기 연적'이다. '녹자(綠甆)'란 푸른 빛이 나는 자기를 말함이니, 말할 것도 없이 요새 청자라 부르는 기물이다. '연적자(硯滴子)'란 연(硯), 곧 벼루에 물을 따르는 도구를 말한다. 기물 중에 子를 접미사처럼 붙이는 일이 많거니와, 요새는 주전자라 하는 주자(注子)가 대표적이다. 이를 줄여 흔히 연적(硯滴)이라 하거니와, 옛날 먹 글씨를 쓸 적에는 반드시 벼루에다가 물을 부어 먹으로 갈아야 했다는 사실은 익히 알 터이거니와, 그 물을 대는 주전자가 바로 연적이다. 


먹 가는 일....이거 고역이다. 요새는 이조차 편리를 추구해, 아예 먹물을 병에다가 담가서 판다. 하지만 그 옛날에는 이 먹 가는 일도 무슨 거창한 수양이 되는양 해서 지질이 똥폼을 잡았지만, 글쎄, 실상은 글을 쓰는 놈이 먹을 직접 간 일은 없고, 이 고된 일은 언제나 동자나 종놈 차지였다. 쉴 새 없이 먹을 갈아야 했으니 그 고통 말해서 무엇하랴? 더구나 그 주인이 시 쓰기에 환장한 이규보 같음에랴? 


그렇다고 종놈이 고분고분했겠는가? 사극이나 사극 영화를 보면, 으레 종놈은 주인한테 옴짝달짝 하지 못하는 존재로 그려지는 일이 많으나,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깍지라, 그것도 주인 성향에 따라 달라, 예컨대 주인이 후덕하면 종놈도 요래조래 주인을 갖고 논다. 이 고역을 피하는 고전적인 수법은 그때나 지금이나 일단 튀고 보자다. 


한데 이규보 이 시에는 이런 저간의 사정이 무척이나 정겹게 등장한다. 그러면서 그가 사용한 연적이 어떤 모양이고, 그 효능이 무엇인지도 익살스럽게 읊었으니, 이규보를 괜히 천재라 하지 않는다. 마침 이 시 일부 구절을 국립중앙박물관이 근자 개막한 '대고려전' 한 코너 비름빡에 걸쳐 놓았으니, 그것이 무척이나 재미가 있어 그 전문을 한국고전번역원 홈페이지에서 찾아 옮긴다. 다만, 그 번역은 내가 왕창 뜯어고쳤음을 밝힌다. 


푸른 옷 작은 아이 

흰살결 백옥 같네 

꿇은 모습 무척 공손하고

이목구비 뚜렷하네 

종일토록 게으름 없어 

물병 들곤 벼룻물 주네

난 본디 읊조림 좋아해 

시 쓴 종이 날마다 천 장  

벼루 말라 게으른 종 부르니

게으른 종 부러 귀먹은 척  

천번이나 불러 대답 없어

목이 쉬어서야 그만두네 

네가 옆에 있어 준 뒤로 

내 벼루 마를 날 없다네

네 은혜 어찌 갚을까나

고이 지녀 깨지 말아야지


幺麽一靑童。緻玉作肌理。曲膝貌甚恭。分明眉目鼻。競日無倦容。提甁供滴水。我本好吟哦。作詩日千紙。硯涸呼倦僕。倦僕佯聾耳。千喚猶不應。喉嗄乃始已。自汝在傍邊。使我硯日泚。何以報爾恩。愼持無碎棄。


이 시 일부 구절을 박물관에서 따서 걸어놓은 것이다. 덩그러니 번역만 붙이고, 그것도 일부만 싹뚝 짤라내니 영 그렇다. 이리 한 까닭이야 뭐 안봐도 야동이라, 한자 덕지덕지하고, 전문을 소개하면 관람객들이 질색한다 해서 그리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저를 통해 이규보 절창 하나를 만나고, 그것을 새기에 되었으니, 고맙고 고맙도다. 


  1. 연건동거사 2018.12.12 14:33 신고

    잘 봤습니다. 재미있군염.

많다. 몇 점이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전시품이 많다. 지나치게 많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없지는 않다. 전시품이 지나치게 많으면 그에 따른 피로감도 없지는 않다. 고려 건국 1100주년을 기념하고, 나아가 최근 남북 화해 분위기 조성과 그에 따른 '민족통합'의 당위성을 선전 홍보하는 도구로 역사에서 고려만한 안성맞춤한 소재가 있었던가? 그런 시대 정신에 부응하고자 했음인지, 이번 전시는 '대고려전'이라는 타이틀을 내걸었으니 말이다. '大'한 고려전이라 했으니, 그에 걸맞는 전시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음인지, 그와 직접 관련하거나 그럴 법한 명품으로 참으로 많은 것을 가져다 놓았으니, 이를 어찌 소비할지는 순전히 관람객 몫이리라.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시실 입구.


 

그래서 한편에서는 이 '대고려전' 특별전시실은 특별전이 아니라, 상설전시실 고려 코너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실제로도 그렇다. 상설전시실 고려실이나 고려청자실, 혹은 불교미술실에서 고려라고 딱지가 붙은 것으로 이른바 괜찮다 싶은 것들은 모조리 빼어다고 이곳에다 모아놨으니 말이다. 



기린 장식 청자 향로. 상설전시품을 옮겨온 경우다.



중앙박물관 자체 소장품과 외부 대여품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얼추 보니 3대 1 내지 3대 2 정도가 되지 않을까 한다. 대여품은 다시 국경을 기준으로 나누건대, 물건너온 것이 제법이다. 특히 보스턴미술관(보스턴박물관)이니 메트박물관이니 하는 미국 쪽에서 대여한 것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이 의외이거니와, 일본 쪽은 의외로 적으니, 이는 이미 알려졌듯이 대한민국 국적을 지닌 도둑넘들이 대마도로 쳐들어가 한반도에서 유래한 불상 2점을 훔쳐들여왔으나, 말도 안 되는 내셔널리즘 논리로 한국정부와 한국 사법부가 개중 1점만 달랑 돌려보내고 나머지 한 점은 포로로 잡은 박제상마냥 그 반환을 거부하는 데 따른 반작용이라, 대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 헤이안시대 아미타(왼)와 대일여래(오른). 도교국립박물관 소장.




주최 측에 의하면, 이번 특별전 출품작 총수량은 450여 점이라 한다. 특별전은 그것을 준비하는 사람들한테는 언제나 갈림길에 서게 한다. 양으로 승부할 것이냐 질을 내세울 것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서기 마련이다. 물론 막상 현장에서 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그런 선택에 강요받지 않는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언제나 양으로 승부한다는 말이 그들한테는 치욕으로 들리는 까닭이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은 그들이 의도했던 하지 않았건 말할 것도 없이 수량으로 겁박하고자 한다. 상다리 부러지도록 음식 차려놓았으니 골라서 드십시오, 맘껏 드십시오, 배 터지도록 드십시오. 이에 초점이 간 전시라고 나는 본다. 그래서 나쁘다? 그런 말은 하고 싶지도 않다. 때로는, 아니, 상당히 많은 경우에 이 양으로 압도하는 전시가 의외로 효과는 큰 법이다. 




나란히 앉은 고려 불상님들.


그런 점에서 단순히 이번 전시가 수량이 많다고 비판적으로 내가 바라보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요리했는지, 포장을 잘 했는지, 홍동백서는 맞는지, 그런 점에서는 하고 싶은 말이 적지 않다. 이 측면에서 분명 이번 전시는 아쉬움이 많을 수밖에 없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라 국박 전시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인데, 나는 국박 사람들이 전시를 할 줄 모른다고 본다. 그네들은 적어도 국내에선 최고라 자부할지 모르나, 그 전시기법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을 때가 많거니와, 이번 전시에서도 이 전시기법이라는 측면에서 결코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는 않다. 국박은 배워야 한다. 전시가 무엇인지를 배워야 한다. 처절히 배워야 한다. 


전시품이 많은 까닭에 질은 당연히 묻힐 수밖에 없다. 나는 좋은 전시란 보물찾기 혹은 편식이 아니라 본다. 아무리 하찮게 보이는 유물이라 해도, 그 전체에서 그것이 빛나게 하는 그런 전시야말로 최고의 전시로 꼽는다. 어느 하나 버릴 것 없는 전시, 모든 전시품이 전체의 완결품에서는 없어서는 아니 되는 필수품으로서 빛을 발하는 그런 전시를 최고의 전시로 꼽는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 편식이 너무나 많다. 전시 자체가 편식을 유도한 까닭이다. 



문공유 묘 출토 유물.



이번 전시가 끝나면 이번 전시품 중 적어도 '본관 소장'이라 붙은 것들은 도로 제자리를 찾아갈 것이다. 그 도로 제자리는 상설전시실을 말한다. 특별전이 꼭 수장고에 쳐박힌 유물, 혹은 평소에는 구경이 쉽지 않은 전시품만을 선보이는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은 잘 안다. 하지만 이번 특별전 출품작에는 비단 이 자리가 아니라 해도 언제나, 같은 박물관 상설전시실을 채우는 유물이 너무나 많은 점은 분명 흠결이라 할 만하다. 이런 흠결은 자칫 왜 이런 자리를 굳이 특별전이라 해서 이름 붙였는가 하는 반론을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우리가 특히 주목해야 할 대목은 대여품이다. 왕건상 논란에 참 가오가 상하게 되긴 했지만, 희랑대사상 같은 전시품은 그 자체로도 빛을 보아야 한다. 나는 왜 희랑대사상을 북한에 있는 왕건상과 짝지으려 했는지, 그 까닭을 지금도 이해할 수는 없다. 물론 왜 이렇게 하고자 했는지, 나아가 이를 통해 국박이 무엇을 선전하고 홍보하며 무엇을 노리고자 했는지는 내가 잘 안다. 기록에 의하면 희랑은 왕건이 스승으로 섬긴 신라말 고려 초 고승이라 하거니와, 그에 착목해 남쪽 해인사에 계신 희랑대사와 북쪽 개성 왕건 무덤 현릉에서 파낸 왕건을 짝지워 줌으로써, 남북 화해 혹은 남북통일의 당위성을 선전하고자 했을 터이지만, 나는 이런 정치성의 연출에는 생득적인 반감이 있는 사람이다. 



비운 왕건상, 머쓱한 희랑대사.



희랑대사상 그 자체로도 얼마든 많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데 왜 굳이 왕건인가? 그에 대한 반발이 나로서는 있다. 물론 국박이 기획한 대로 왕건상이 왔더래면 금상첨화였을지 모르나, 그렇다고 해서 왕건 보위를 비워두고, 그 자리에 부러 연꽃 종이작품 덩그러니 놓아야 했는지, 그 취지엔 동의하고픈 생각이 없다. 희랑대사만 우습게 만들지 않았나 하기 때문이다.  


국립박물관의 과거 고려를 기억하는 사람들한테 이번 전시는 오버랩의 잔영이 있을 수밖에 없다. 내가 알기로 국박이 소장한 자체 회화는 거의 없다. 그런 까닭에 수월관음도를 비롯한 이번 전시작 대부분은 국내외 대여품으로 채웠거니와, 개중 상당수가 실은 국박기 개최해 국내외적인 센세이션을 일으킨 '고려불화대전' 찬조출연품이다. 어제 전시장을 둘러보다가 보스턴박물관 소장 치성광여래강림도를 맞닥뜨리고는 "이 불화가 또 왔네" 했더랬지만, 이런 것이 좀 많다. 



897년 제작 치성광여래와 오성도. 돈황 천불동. 브리티시 뮤지엄.



마침 전시장에서 우연히 맞닥뜨린 이수미 국박 미술부장이 하는 말을 들으니, "좀처럼 만나기 힘든 전시품이 많으니 유의해 달라"면서 "이들 외국 대여품 대부분은 12월까지만 전시하고는 돌려줄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런 작품이 제법 된다. 고려시대에 고려사람들이 직접 제작한 것은 아니라 해도, 그 시대 불교미술과의 비교라는 측면에서 영국에서 대여한 돈황 미술품도 그런 보기 중 하나다. 브리티시 뮤지엄에서 대여한 이런 불교회화 중 수월관음도는 돈황 천불동 수거품이라, 10세기 무렵 작품으로 평가되거니와, 나로서는 관음 손에 든 양류, 즉 버드나무 가지가 무척이나 뚜렷해서 인상으로 남는다. 



10세기 양류관음(서월관음). 돈황 천불동. 브리티시 뮤지엄.



나아가 몇년 전인가? 이탈리아 어느 미술관이 고려불화가 소장되었다 해서 한바탕 화제가 된 적이 있거니와, 이번에 보니 이 작품이 덩그러니 와 있더라. 이걸 기억하는 국박 사람들이 이것만은 빌려와야 한다 해서 대여했을 것이다. 


고려문화와 동시대 다른 문화권 비교라는 측면에서 동원한 전시품들도 충분히 눈길을 줄 만하거니와, 예컨대 미국 메트박물관 소장 11-12세기 대리국 천수관음상은 동시대 고려 천수관음상 같은 데가 이에 해당한다. 천수관음은 그것이 설파하는 불교 정신이야 같겠지만, 그것이 추상을 헤치고 구상으로 해체될 적에는 그 시대 니즈needs에 부합할 수밖에 없거니와, 그 다른 점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질이 되고, 그 저변에 도도히 흐르는 그랜드 디자인을 보면, 문화의 구현 양상이라는 측면에서 많은 생각할 거리를 준다. 



11-12세기 대리국 천수관음. 브리티시 뮤지엄.

 



차후 더 기회를 엿보아 이 특별전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이 기획전에 대한 소개는 아래 기사를 클릭하라. 


세계에 흩어진 문화재 450여점으로 고려를 조명하다(종합)


  1. 아파트담보 2018.12.10 23:57 신고

    화려하진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차분 하다고 하면 맞을까요? ^^;

우리 공장 문화부로 날아든 전시 안내 포스터다.
빨통에서 끄집어 내서 내 자리에 붙여봤다.
그런대로 화사한 느낌도 난다.




얼마전까지 국립부여박물관 개태사지 전시 포스터가 붙은 자린데 이젠 내릴 때가 되어 교체를 단행한 것이어니와, 국립중앙박물관이 근자 남북관계 화해무드에 편승하고 마침 올해가 고려건국 천백주년이라는 점을 고려한 전시회를 개최키로 하고 그것을 선전할 요량으로 만든 포스터다.  

배기동 관장이 회심작으로 준비하는 자리이기도 한데 그 행사 일환으로 해인사 대장경판과 희랑대사상을 최근 서울로 이운하는 과정을 이벤트화하기도 했으니, 이를 둘러싼 해프닝도 없지는 않어, 까칠이 한겨레 노형석 기자가 그 특유의 사캐즘적 성정을 유감없이 발휘한 비판 기사를 쓴 것을 보고는 내가 "송강호가 영화에서는 죽었는데 실제는 안 죽었다고 따진거네?" 하면서 파안대소했더랬다. 



 
내 바로 옆이 문화재 담당 박상현 기자 자리라, 저 포스터 보고는 내가 이랬다.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유물 잔뜩 넣어놨네? 어지럽다야. 이거이 국박의 전형적인 한계야. 하나에다가 다 쑤셔박아 보여주려 하잖아? 꼭 미술사 고고학 하는 친구들이 이렇게 만든단 말야? 지들은 입만 열면 한국 미술은 여백의 미라 하더만 이기 뭐야? 꼭 국민학생이 만든 거 거태. 이거이 미술하는 친구들 작품이구만?" 

이 말 듣고 박 기자가 열나 웃는다.

"맞아요 선배..이거 미술부 행사예요." 


<국립민속박물관>


어제 문화체육관광부 인사 중 국장급 전보를 보면 박물관 학예직 인사 이동이 있었으니, 이에 따르면 고위공무원단인 국립전주박물관 김승희 관장이 같은 고공단인 국립광주박물관장으로 가고, 문체부 산하 다른 문화기관인 국립민속박물관 천진기 관장이 국립중앙박물관 산하 고공단 자리인 국립전주박물관장으로 이동했다. 이번 학예직 고공단 인사는 송의정 국립광주박물관장이 퇴임함에 따른 후속조치라는 성격과 더불어 다른 측면도 있으니, 다름 아닌 민속박물관 인사 적체 문제가 도사린다는 점이 그것이다.


직제로 보면 국립민속박물관은 비록 그 직급이 차관급인 국립중앙박물관에 견주어 낮기는 하지만, 엄연히 같은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소속기관으로, 서로에 대해서는 엄격한 독립성을 지닌다. 문체부 산하에 이런 유사 기관으로 이명박 정부 시절에 만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있고, 나아가 국립현대미술관도 있다. 


하지만 이들 박물관˙미술관은 규모 차이에 따른 인사 적체 문제가 기관별로 그 심각성이 현격해, 국립중앙박물관은 차관급(대통령령에 따른 차관급이라 다른 정무직 청급 청장과는 위상이 다르다) 관장 산하에 학예직급으로는 학예연구실장과 경주박물관장, 광주박물관장, 전주박물관장이 고공단이라 이들끼리 호상간 수평이동이 가능하다. 다른 박물관 미술관에 견주어 중앙박물관은 그나마 고공단 인사 적체를 해소할 여지가 많다는 뜻이다. 


그에 견주어 민속박물관은 단일 조직이라, 산하에 지방박물관이 없고 고공단은 오직 관장 한 자리뿐이라 인사적체가 극심할 수밖에 없다. 이런 적체는 다른 무엇보다 그 관장 재임 기간이 대체로 다른 기관의 그것에 견주어서는 유난히 긴 특징을 지니는 일로 발전한다. 이번에 물러난 천진기 관장만 해도, 1962년생이라, 만 49세이던 2011년 5월에 관장에 취임해 물경 7년 1개월을 재직하다가 이번에 중앙박물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천진기 관장 이동은 장기 집권에 따른 기관 피로감을 해소하자는 뜻에서 문체부가 그리한 것으로 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수평 이동 자체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같은 고공단이라 해도 민속박물관과 전주박물관은 격이 현격히 다르다. 내가 정확한 자료가 없어 자신은 없으나, 예산과 조직 규모가 비교가 되지 않아, 민속박물관이 수퍼마켓 혹은 백화점이라면 전주박물관은 말만 고공단 기관이지 구멍가게, 포장마차에 지나지 않는다. 더불어 기관 성격 차이도 문제로 지적된다. 


중앙박물관과 민속박물관은 성격이 판이하다. 중앙박물관은 언뜻 그것이 커버하는 영역이 백화점을 방불하는 듯하나, 그 근간은 말할 것도 없이 고고학과 미술사학이 양대 산맥이거니와, 그에 곁들여 요즘은 보존과학이니 역사학이니 하는 인접 학문을 끌어들이는 형국이기는 하나, 그것이 차지하는 위치는 새발의 피에 지나지 않는다. 더구나 민속학 영역은 그것을 전담하는 민속박물관이 따로 있는 마당에, 민속과는 눈꼽만큼도 관련이 없다고 봐도 대과가 없다. 


그럼에도 유독 산하 지방박물관 중에서는 전주박물관이 민속학과 그나마 인연이 깊은 편이었으니, 이 박물관이 애초에 민속학으로 출발해서가 아니라, 어찌하다 보니 그리된 것일 뿐이니, 이에는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을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이종철이라는 인물의 이력에서 기인한다. 서울대 고고인류학과 2회 출신인 이종철은 이상하게도 대학 졸업 후 문화재관리국 학예사 입사와 더불어 민속학에 투신했으니, 그런 그가 나중에 연구관 진급과 더불어 국박으로 가서는 광주박물관을 거쳐 전주박물관장을 역임하게 되거니와, 이런 기관 이력에서 전주박물관은 유독 민속학과 연관이 깊은 곳으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이번 천진기 관장의 전주박물관장 이동에 대해서도 배기동 중앙박물관장이 그제 사석에서 하는 말을 듣자니 "전주는 양반문화와 관련이 깊어 민속학 전공자와도 어울리는 곳"이라고 하거니와, 어쨌거나 그 인사이동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억지 논리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전주박물관이 무슨 민속학과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번 인사 이동이 지닌 가장 큰 문제점은 중앙박물관에 견주어 엄연히 독립개체로서 전공 역시 다르고, 따라서 기관 성격도 판이한 민속박물관이 그 대표인 관장을 중앙박물관 산하 일개 지방박물관장으로 갔으니, 비록 직급은 같은 고공단이라 해도, 이는 민속박물관으로서는 치욕 중의 상치욕에 다름 아니다. 이번 인사는 가뜩이나 중앙박물관이 바라보는 민속박물관은 언제나 작은집이었고, 언제나 아래라는 인식을 더욱 강화하는 꼴을 빚고 말았다. 


이제 관심은 자연 후임 민속박물관장 인선에 쏠린다. 한데 이번 인사에서는 이상하게도 민속박물관장은 쏙 빼내갔으면서도 그 후임은 발령내지 아니했다. 내가 알기로 민속박물관장은 공모직이었다. 옛날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천진기 관장이 2011년 임명될 당시 그렇게 공모직으로 개방됐다. 그런 까닭에 나는 당연히 이번에도 그런 공모 방식을 통해 민속박물관 내부, 혹은 외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를 실시할 줄로 알았다. 한데 알아 보니, 공모가 아니란다. 공모였다가 일방적 임명직으로 도로아미타불 시켰다고 한다. 대체 언제, 무슨 일로 이리 옛날로 돌아갔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한데 이번 인사에서 일단 공석으로 비워둔 민속박물관장 자리에 중앙박물관 출신자를 앉힌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중앙박물관 혹은 그 상급기관인 문체부로서는 중박 고공단 한 자리를 민속박물관에 내어주었으니, 그 반대급부로써 당연히 중박 출신자가 그 자리로 가야 한다고 주장 혹은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들리는 말로는 민속박물관장에 고공단 진급이 예정된 현재의 중앙박물관 본부 부장급 인사 두 명이 후보자로 내정되었다 한다. 이들은 고공단 시험에는 합격하고, 그에 맞은 직급 배당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연구관 경력으로 보면, 이들은 현재의 민속박물관 과장들과 민박 출신으로 다른 기관에 나가 있는 다른 과장급들에 견주어 한참이나 후배다. 민속박물관에는 학예직 과장이 세 명인가 네 명이 있고, 문화재청 산하 몇 곳에 민박 출신 과장이 포진한다. 나아가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같은 데도 민박 출신자들이 나가 있다. 


이처럼 다른 유사 기관들에 견주어 유독 민박은 내부 출신자들을 곳곳에 내보냈다. 보내고 싶어서 보냈겠는가? 내부 인사 적체가 극심해 보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고공단이라야 꼴랑 관장 한 자리 뿐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런 고참 과장들이 민박 자체와 외부에 제법 있다. 그런 판국에 이들을 모조리 제끼고 전연 성격도 다르고 전공도 다른 고고학 혹은 미술사 전공자들을 민박관장에 내려 꽃아야 하는가? 이리 되면 민속학 전공자들의 자존심은 대체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  


정리하건대 민속관장이 중박 산하 지방박물관장으로 갔다 해서, 그에 대한 반대급부로, 중박 출신자를 민속박물관장으로 내려꽂아서는 안 된다. 이건 치욕이며 능멸이다. 민속박물관도 인사 숨통을 트야 한다. 관장 자리 하나가 비어야 그 숨통이 트인다는 역설을 문체부나 중앙박물관도 인식해야 한다.


문체부 산하에는 앞서 말한 대로 유사 박물관 미술관이 더러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인사 교류 차원을 제외하고 중앙박물관 출신이 미술관을 간 적이 없고, 그 반대도 없으며, 나아가 신생급에 속하는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는 그 관장 자리를 중앙박물관 출신이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그 역사가 일천하기 짝이 없는 역사박물관에 대해 이럴진댄, 그 역사가 환갑 진갑을 이미 다 지난 민속박물관을 중앙박물관이 어찌 접수한단 말인가? 


나는 민속박물관이라 해서 반드시 민속학 전공자이거나, 혹은 민속박물관 내부 혹은 그 출신 외부인이 되어야 한다고는 주장하고픈 생각이 가을 터럭만큼도 없다. 민속학 전공자가 아닌 사람도, 예컨대 행정가 출신이나 정치인이라 해서 민속박물관을 운영하지 말아야 한다는 법도 없을 뿐더러, 그래야 한다고도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민속박물관을 이끌 관련 내·외부 인사가 널려있는 마당에, 더구나 중앙박물관 인사 적체 해소 차원 혹은 그 반대 급부 인사교유라는 차원에서 민속박물관 사람을 받았으니, 민속박물관도 한 자리를 내어놓아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워 중앙박물관 출신 민박 관장이 임명될 수는 없는 법이다. 민박 사람이 당연히 민박관장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이 작은 기관을 지킨 사람들에 대한 자존심을 지켜주는 한 조치다. 나아가 이 참에 민박을 중박 산하기관처럼 여기는 인식 자체도 박멸해야 한다. 


나아가 이것이 인사교유 차원인가? 중박이 한 자리 내어주었으니 민박도 하나 줘야 한다? 웃기는 소리다. 중박에 난 고공단 자리 하나는 광주박물관장이라는 고공단 자리가 정년 퇴직으로 비어서 생긴 자리다. 나아가 내년에는 경주박물관장도 퇴임한다. 고공단 자리 하나가 더 비게 되어 있다. 중박이나 문체부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중박과 민박은 반딧불과 번개불만큼 다르다. 

이명박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꾸린 그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2008년 1월 16일 새정부 조직개편안을 발표했다. 그 개요를 보면 정보통신부는 해체해서 그 기능은 지식경제부, 방송통신위원회, 행정안전부, 문화부의 4개 부처로 이관하며, 산업자원부는 IT와 원자력 정책을 통합, 지식경제부로 확대개편하고, 농림부는 해양수산부의 어업수산 정책과 보건복지부의 식품산업진흥 정책을 넘겨받아 농수산식품부로 개편한다는 것이었다. 해양수산부는 해체하고 ▲해양정책·항만·물류 ▲수산 ▲환경의 3개 기능으로 쪼개 각각 관련 부처로 흡수하고, 건설교통부는 기존 업무에다가 해운물류를 흡수하고 산림청까지 산하기관으로 둔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문화 관련 조직 또한 개편 대상이었으니, 애초 계획대로는 문화관광부가 국정홍보처와 정보통신부 일부 기능을 넘겨받아 ‘문화부’로 명칭을 바꾼다는 것이었다. 이에는 문화부 소속기관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은 관장 직급을 1급으로 낮추고 문화재청으로 통합한다는 내용도 들어있었다.


역대 어느 정권의 출범 초기 조직 개편은 그에 따른 격렬한 반발을 부르기 마련이다. 계획은 계획으로만 끝나고 끝내 실행되지 못한 것도 있으니, 개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립박물관의 문화재청으로의 통폐합이 그러했다. 이는 결국 없던 일로 되고 말았으니, 그때나 지금이나 현재와 같은 상황에 하등 변함이 없어 국립중앙박물관은 여전히 문화체육관광부 소속 기관 신세를 면치 못한다.


나는 이것이 국립중앙박물관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할 절호의 기회로 봤다. 그 기회를 날린 것이다. 누가 날렸는가? 박물관 스스로가 허공에다가 날리고 말았다.


국립박물관은 문화재청으로 갔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가지 않은, 혹은 그것을 거부한 까닭은 간단히 말해 꼴난 자존심 때문이었다. 더 간단히 말하면, 얕잡아보던 문화재청에 우리가 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그 꼴난 자존심이 가장 컸다.


물론 그것이 박물관 발전의 획기였을 것이라는 내 주장을 못내 따르지 못하는 이가 많을 줄로 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함으로써 박물관은 박물관이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절호의 기회를 적어도 반세기 이상 늦추고 말았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작금과 같은 문체부 소속기관으로는 언제나 문체부의 그저그만한 하부 기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나 큰집에 기대어 빌붙어 사는 흥부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박물관 내부에서도 문화재청으로 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더러 있기는 했지만 반향없는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찬성론자에는 뜻밖에도 당시 국립경주박물관장이자,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인 이영훈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런 소수를 제외한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박물관의 발전이 아니라, 현실 안주였고,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문화재청에 굽신거릴 수는 없다는 꼴난 자존심이었다.


그런 역사적 책임에서 박물관 출신자들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이 통합 방침이 발표되자, 역대 박물관장이라는 자들이 연대 서명하여 반대 성명을 냈다. 정양모를 필두로 지건길, 이건무 등등이 그 반대에 서명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들은 나아가 초대 문화부 장관 이어령을 비롯한 노땅들한테 SOS를 쳤다. 이어령이 박물관 구출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들리는 말로는 이명박을 독대한 자리에서도 그 부당성을 설파했다고 한다.


그런 이들은 결국은 그 계획을 무산시켰으니, 지금은 내가 그에 일조했다고 자랑스러워할 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은 박물관 발전사에서는 죄인들이다. 나는 그리 본다. 


그에 더해 문화부에서도 노골적인 반대 움직임을 펼쳤으니, 당시 문화부 장관 김종민이 이 반대 움직임을 주도했다. 문화부가 반대한 이유는 작은집의 지나친 비대화였다. 자칫하다간 작은집에 큰집이 먹힐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동했다.


당시 국립박물관은 지방박물관까지 다 합친 예산 규모라 해봐야 내 기억에 1천억원 내지 1천500억원에 지나지 않았다.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 예산과 거의 같은 규모였다. 하기야 대국민 서비스 기관이니 예산이 많을 필요는 없다.


예서 문제는 그 인력이었다. 박물관은 인력 규모가 당시 550명 안팎이었다고 기억하며 문화재청은 800명 규모였다고 기억한다. 이들이 통째로 문화재청으로 가면, 전체 문화재청 직원 규모는 문화부의 그것과 거의 맞먹는 수준에 이른다. 이것을 큰집에서는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들의 공작은 집요해 결국은 국립박물관을 문화부 산하로 그대로 주저앉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10년이 흐른 지금 국립박물관 꼬라지는 어떤가? 그대로다.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제자리 걸음이다.


그때 만약 문화재청으로 갔더라면?

나는 왕청나게 바뀌었을 것으로 본다. 지금과는 수준이 달라졌을 것이라 본다. 

왜인가? 

지금의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박물관은 언제나 존재감이 미미하지만, 문화재청에서의 그것은 엄청나게 다르기 때문이다. 

이영훈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장에 임명된 직후 나는 카톡을 보냈다. 

두 가지를 요청했다. 

개중 하나가 유리건판 사진 고화질 제공이었다. 

국박에는 식민지시대에 소위 고적조사사업을 벌이면서 생산한 적지 않은 유리건판 사진이 있다. 

이런 유리건판 사진들 고화질로 무료 제공하면 그걸로도 적지않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와 관련한 어떤 사업이 진행되는지는 알 수 없다. 

그걸 내가 다시금 요청하기에는 사정이 마뜩치 않았고, 

더구나 퇴임을 대비해 대전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이영훈 관장도 느닷없이 관장이 되었다가, 당초 예정 혹은 예상보다는 반년 이상 퇴임이 가까워졌기에 설혹 내가 요청한 사업에 관심이 있었더라도 그럴 만한 여유와 시간이 없었으리라고 본다.

문재인 정부 초대 국박 관장이 누가 될지는 모르겠다. 

그가 누구건, 유리건판 사진을 필두로 하는 국박 소장 무수한 문화재자료들은 봉인을 풀고 국민 앞에 다가서야 한다. 

국박이 이런 일에 그간 적지 않은 행보를 보인 것은 안다. 

유리건판은 꽤 기초작업이 진행된 것으로 안다. 

다만 그것이 지금은 공개와는 거리가 멀어, 고화질 건판 사진들이 무료로 제공되어야 한다. 

신임 관장에게 이 일을 기대해본다. 

다른 무엇보다 내가 불편해서 미칠 지경이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기 마련이다. 

나는 새로운 관장에게도 똑같은 요구를 할 것이다.

유리건판만이 아니라 이미 공개를 시작한 식민지시대 고문서들과 

식민지시대 고적조사 관련 모든 자료를 고화질 서비스를 요구할 것이며 

그것을 체크할 것이다.

기자가 아니라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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