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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동 이야기는 사건 발생 당대에 이미 유명했다. 그 무렵 다른 사건이 있었다. 성현의 용재총화 제6권에 보이는 이야기다. 

손님을 거절하였다는 이유로 볼기를 맞은 수원 기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어우동(於宇同)은 음란한 것을 좋아하여 죄를 얻었는데, 나는 음란하지 않다 하여 죄를 얻었으니, 조정의 법이 어찌 이처럼 같지 아니한가.” 하니, 듣는 사람들이 모두 옳은 말이라 하였다. 

매우 간단한 이 증언을 우리가 주시해야 하는 까닭은 어우동 이야기가 이미 누항까지 퍼졌다는 것이며, 나아가 그것이 기생 사회에는 어우동 이야기가 이미 하나의 성전으로 군림하기 시작한 증좌라는 사실이다. 

이 예화에서 수청을 거절하는 관 소속 기생은 그에 대한 처벌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한데 그 처벌에 대한 해당 기생의 반발이 심상치 않다. 그의 말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니미랄, 어우동이란 년은 몸 함부로 놀렸다 해서 죄를 얻었는데, 난 몸 함부로 안 놀린다 해서 왜 얻어터지냐? 이것이다. 

이 기생의 심리, 이걸 어찌 볼 것인가? 법 집행의 평등의식이 이미 발동하고 있음을 본다. 




아무리 첩이라 해도, 그가 어떤 남성과 과거에 살았건 그건 전연 흠이 되지 않았다. 그가 기생이었다 해서, 그것이 그를 첩으로 받아들이는데 그 어떤 주저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다. 이것이 조선사회다. 어떤 점에서는 요즘의 한국사회 성관념과 비교해도 훨씬 혁신적이었고, 훨씬 선진적인 면도 있었다. 과거를 묻지 않았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다음 이야기는 그런 사정을 증거한다.  

가정 경신년 겨울에 호남 지방 감사로 나갔다가 이듬해 신유년 봄에 병으로 전주에 머물며 조리하던 중에 기생 금개(今介)와 함께 산 지 한 달 남짓 되었다. 금개의 나이 겨우 20살인데, 성질이 약삭빠르고 영리하였다. 전주에서 돌아올 때 정오가 되어 우정(郵亭)에서 쉬고 있는데, 기생 또한 따라와 송별하기에 내가 시를 지어 주기를,

봄 내내 병중에서 보내다가 / 一春都向病中過

이별하기 어려운 것 넌들 어찌 하리 / 難思無端奈爾何

침상에서 몇 번이나 눈썹을 찡그렸고 / 枕上幾回眉蹙黛

술자리에서는 그저 애교의 눈웃음이었네 / 酒邊空復眼橫波

객사에 늘어진 버들 애타게 보며 / 愁看客舍千絲柳

참고 양관의 한 곡조 들어 주소 / 忍聽陽關一曲歌

문밖에 해가 져도 떠나지 못하겠으니 / 門外日斜猶未發

좌중에 누가 고민이 많음을 알아주랴 / 座間誰是暗然多

하였다. 그 후 20여 년이 지나서 내가 첩(妾)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말하기를, “전주 기생 금개가 일찍이 사람을 따라 상경했다가 그 사람이 죽어 과부로 지내는데, 마침 공의 첩을 잃었다는 말을 듣고 옛정을 사귀고자 한다.” 하기에, 내가 허락하고자 하였으나 마침 사고가 있어서 이루지 못하였으니, 헤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도 운수가 있는가 보다.


기생이라고 정조 관념이 없다고 나는 이리 안이하게 보지는 않는다. 기생은 으레 그런 존재이기에 이를 받아들이는 남자들은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고 보지도 않는다. 아무래도 우리가 배운 조선시대 통념, 성관념은 뭔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나는 본다. 물론 그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나는 성 억압이 외려 기독교 시대에 일어난 현상이라고 본다. 조선시대? 지금 기준으로 봐도 성 개방 시대였다. 혹자는 양반 사대부가에서만 성 억압 윤리가 통용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저 밑에서는 욕망이 꿈틀대는데 양반 사대부가만 그렇지 않았다고?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뭐가 통념이 잘못되었다. 

심수경(沈守慶․1516~1599)의 《견한잡록(遣閑雜錄)》에 보이는 이야기다. 두 번째 예화가 많은 상념을 낳는다. 기생이라 표현한 한 여성을 왕의 특사, 흔히 말하는 어사와 아마도 그의 기둥서방으로 보이는 젊은이가 공유하는데, 이 기둥서방도 이 어사도 아무런 도덕의 제약이 없다. 

조정에서 사명(使命)을 받아 지방에 나가면 각 고을에서는 기생을 천침(薦枕 침실을 같이하도록 천거하는 것)하는 예(例)가 있다. 감사(監司)는 풍헌관(風憲官)이라, 비록 본읍에서 천침하더라도 데리고 가지 못하는 것이 역시 예로부터 있는 전례였다. 진천(晉川) 강혼(姜渾)이 영남 지방의 관찰사로 있을 때 성주(星州)의 은대선(銀臺仙)이라는 기생에게 정을 쏟더니, 하루는 성주에서 떠나 열읍(列邑)을 순행할 때 점심때가 되어 부상역(扶桑驛)에서 쉬게 되었는데, 부상역은 성주에서 가는 곳까지의 절반 길이나, 기생 또한 따라와서 저물어도 차마 서로 작별하지 못하여 부상역에서 묵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시를 써서 기생에게 주었으니, 

부상 여관에서 한바탕 기쁘게 보내려니 / 扶桑館裏一場歡

나그네 이불도 없고 촛불은 재만 남았네 / 宿客無衾燭燼殘

열두 무산 새벽꿈에 어른거려 / 十二巫山迷曉夢

여관 봄밤이 찬 줄도 몰랐노라 / 驛樓春夜不知寒 

하였다. 이는 침구를 이미 개령(開寧 지금 김천의 면(面))에 보내어 미처 가져오지 못하였기로 이불이 없이 잔 것이다. 또 어떤 감사가 있었는데, 기생과 상방(上房)에서 자고 새벽이 되어 변소 간 틈에 따르던 사람이 와서 밀고(密告)하기를, “공이 나간 후에 연소자(年少者)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가 기생을 범하고 나갔으니, 참 해괴한 일입니다.” 하니, 감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다시는 말하지 말라. 그 자의 아내를 내가 빌려 간통한 것이니, 본남편의 그러한 일이 무엇이 괴이할까 보냐.” 하였다. 진천 강혼의 법을 준수함과 감사의 넓은 도량은 가히 어려운 일이다.

使命之出外也。有妓各官例定薦枕之妓。而監司則爲風憲之官。雖薦枕於本邑。不得馱載而行。亦舊例也。姜晉川渾按嶺南時。鍾情於星州妓銀臺仙。一日自星巡向列邑。午憩于扶桑驛。驛乃州之半程。故妓亦隨往。至暮不忍別去。仍宿于驛。翌朝題詩贈之曰。扶桑館裡一場歡。宿客無衾燭燼殘。十二巫山迷曉夢。驛樓春夜不知寒。蓋寢具已送于開寧。未及取還。故無衾而宿也。又有一監司。與妓宿于上房。曉起如廁。從人密告曰。公起出之後。有年少人。猝入房內。犯妓而出。可駭可駭。監司笑曰。爾勿復言。渠之物吾借而奸矣。本夫之事。何足怪乎。晉川之守法。監司之洪量。可謂難矣。



성현(成俔·1439∼1504)의 필기잡록 《용재총화慵齋叢話》 卷之九에 수록된 일화 중 하나다. 

허문경공(許文敬公)은 조심성이 많고 엄격하여 집안을 다스리는 데 법도가 있었다. 자제 교육은 모두 소학(小學)의 예를 써서 하였는데, 조그마한 행동에 있어서도 반드시 삼갔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허공(許公)은 평생에 음양(陰陽)의 일을 모른다” 하니, 공이 웃으면서, “만약 내가 음양의 일을 알지 못하면 (큰아들인) 후(詡)와 (둘째아들인) 눌(訥)이 어디에서 나왔겠소”라고 했다. 이때 주읍(州邑)의 창기(娼妓)를 없애려는 의논이 있어서 정부 대신에게 물었더니, 모두 “없애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공에게 이 말이 미치기 전에 사람들은 모두 그가 맹렬히 (그것을 없애야 한다고) 논박할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공이 이 말을 듣고 웃으면서 “누가 이 계획을 세웠는가. 남녀 관계는 사람의 본능으로서 금할 수 없다. 주읍 창기는 모두 공가(公家) 소속이니, 취해도 무방한데, 만약 이 금법(禁法)을 엄하게 시행하면 (국내에 임금의) 사신으로 나가는 나이 젊은 조정 선비들이 모두 그릇되어 사가(私家)의 여자를 빼앗게 될 터이니, 많은 영웅 준걸이 죄에 빠질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없애는 것이 마땅치 않은 줄로 안다”고 해서 마침내 공의 뜻을 좇아 전과 다름없이 (공창을) 그냥 두고 없애지 않았다.

許文敬公操心淸厲。治家嚴而有法。敎子弟皆用小學之禮。毫忽細行皆自謹。人言許公平生不知陰陽之事。公笑曰。若我不知陰陽之事。則詡訥從何而生。時有欲革州邑娼妓之議。 命問於政府大臣。皆曰。革之可當。惟未及於公。人皆意其猛論。公聞之乃笑曰。誰爲此策。男女人之大欲。而不可禁者也。州邑娼妓。皆公家之物。取之無防。若嚴此禁。則年少奉使朝士。皆以非義。奪取私家之女。英雄俊傑。多陷於辜。臣意以爲不宜革也。竟從公議。仍舊不革。

기생 혹은 공창의 존재를 여성 억압의 대표 증상으로 거론하는 사람들은 이런 허문경공 허조許稠야말로 역적 중의 역적으로 지목해, 그가 아니었으면, 가장 추악한 공창제는 한국사에서는 자취를 감추었을 것으로 간주하곤 한다. 하지만 맥락을 세심히 보면, 당시 사대부 혹은 권세 있는 남성 중에 허조만큼 실제와 이론 모두 철저히 남녀 관계를 포함한 도덕철학을 겸비한 인물이 없다. 허조야말로 여성을 단순한 성적 도구로 삼는 남성 본능을 스스로 가장 처절히 억제하며 산 인물이다. 

저를 보면, 공창제 폐지 논의를 붙였을 때, 압도적인 여론은 폐지로 기울었다. 그런 판국에 허조의 말 한마디로 그 흐름이 역전되어, 도로 유지하는 쪽으로 모아졌음을 알 수 있다. 허조가 권력이 강해서 그리했겠는가? 저 맥락을 보면, 허조야말로 진정한 도덕군자로서, 누구나 그 폐지에 강력 찬동할 줄 알았는데, 그렇게 기대한 허조가 다름 아닌 반대를 들고 나오니, 여론이 일시에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다른 사람, 예컨대 첩과 기생을 끼고는 질펀하게 노는 대신이 저런 주장을 했더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허조가 주장하니깐 여론은 일시에 바뀐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에서 이런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저와 같이 증언한 성현은 허조가 사망한 그해에 태어났으니, 역사적 실상을 잘못 알고 저리 기록했을 수도 있다고 말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역사가 증언하는 당대의 기록을 볼 필요가 있다. 

세종실록을 본다. 이에 의하면 허조는 세종 21년, 명 정통(正統) 4년, 1439년 12월 28일 壬寅에 좌의정에 있다가 졸(卒)하니, 향년 71세였다. 경상도 하양현(河陽縣) 사람인 허조는 자(字)가 중통(仲通), 17세에 진사시(進士試), 19세에 생원시(生員試)에 각각 입격하고 경오년에 과거에 붙어 관직에 올랐으니, 조선왕조 개창 이후 태종을 거쳐 특히 세종시대에 승승장구해 정승 반열에 올랐다. 그는 예제(禮制) 전문가로서 그 복구에 힘을 쏟았으며, 특히 막 수입되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의거해 일제 불교의식을 배격하고 시종일관 부모상을 치렀으며, 매양 어머니 기일이나 시제에는 어머니가 생전에 손수 짜준 겹옷을 입었으며, 일찍이 자손에게 명하기를 “내가 죽거든 반드시 이 옷으로 염습하라”는 유언했다. 

이 날짜 그의 졸기는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유명(遺命)으로 (그 자신의) 상사(喪事)는 일체 《문공가례(文公家禮)》에 따르게 하고, 또 외가(外家)가 후손이 없으니 삼가 묘제(墓祭)를 폐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부음이 상문(上聞)되니, 임금이 매우 슬프게 여기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거애(擧哀)하고, 〈고기〉 반찬을 거두고, 조회를 3일간 정지하였으며,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를 내렸으며, 관(官)에서 장사지내게 하였다. 시호(諡號)를 문경(文敬)이라 하였으니, 배우기를 부지런히 하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문(文)이라 하고, 낮이나 밤이나 경계(警戒)하는 것을 경(敬)이라 한다. 동궁(東宮)에서도 역시 사신을 보내어 조상하고 부의하였다. 조(稠)는 성품이 순진하고 조심하여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아니하였다. 《사서(四書)》와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과 성리(性理)의 여러 책과 《명신언행록(名臣言行錄)》을 좋아하여 읽었다. 비록 갑자기 당하였어도 빠른 말과 당황하는 빛이 없었으며, 제사(祭祀)를 받들기를 반드시 정성으로 하고, 형(兄)을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이 하고, 종족(宗族)에게 화목하고, 붕우(朋友)에게 신용이 있었으며, 반드시 경조(慶弔)와 문병(問病)을 친히 하였었다. 항상 한 사람의 창두(蒼頭)를 시켜서 명령을 전달하였고, 문 앞에는 정지해서 있는 손님이 없었다. 그러나 대(待)할 때에는 반드시 존비(尊卑)와 장유(長幼)의 분별을 엄히 하였다. 몸가짐을 검소하게 하며, 옷은 몸 가리기만을 취(取)하고, 먹는 것은 배를 채우는 것만을 취하여, 싸서 가져오는 것을 받지 아니하였다. 산업(産業)을 경영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을 가까이 하지 아니하며, 희롱하고 구경하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관(官)에 있을 때는 상관(上官)을 섬기기를 매우 존경(尊敬)히 하고, 요좌(僚佐)를 대하는 데에는 엄격하게 하였다. 낮이나 밤이나 직무에 충실히 하고, 만일 말할 것이 있으면, 지위 밖으로 나오는 것을 혐의하지 아니하고 다 진술하여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스스로 국가의 일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던 것이다. 두 아들이 있으니 허후(許詡)와 허눌(許訥)이다. 

성현의 증언과 일맥으로 상통하는 평가다. 허조는 명실공히 주자성리학이 요구한 도덕과 윤리에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물론 주자성리학이 性을 멀리하는가 하는 논제가 유발될 수 있겠지만, 그는 분명 본처 외의 여성을 멀리하려 했으며, 그에 나름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허조가 “음양의 일”, 다시 말해 섹스를 모른다는 주변의 증언에서 명확히 확인한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공창제를 유지케 한 허조를 향한 작금의 비난은 부당하기만 하다.  

참고로 사가정 서거정의 필원잡기가 채록한 허조는 다음과 같아 소개한다. 

문경공(文敬公) 허조(許稠)는 엄숙하고 방정하며 청렴하고 근신하여 언제나 성현(聖賢)을 사모하였다. 매일 닭이 울 때에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 빗고 갓과 띠를 갖추고 단정히 앉아서, 날이 다하도록 게으른 빛이 보이지 않았으며, 항상 나라 일을 근심하고 사사로운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국정(國政)을 논의할 적에는 자기의 신념을 스스로 지키고 남을 쫓아서 이리저리 아니하니, 당시 사람들은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였다. 가법(家法)은 역시 엄하여 자제들에게 과실이 있으면 반드시 사당(祠堂)에 고하고 벌을 주며, 노비(奴婢)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에 의하여 다스렸다. 공이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어 비쩍 말랐으며 어깨와 등이 굽었다. 일찍이 예조 판서가 되어 상하(上下)의 복색(服色) 제도를 정하여 엄격하게 구별하니, 시정의 경박한 무리들이 심히 미워하여 이름 하기를 수응(瘦鷹 여윈 매라는 뜻) 재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매는 살찌면 날아가고 여위면 새 잡기를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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