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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거정(徐居正·1420∼88)의 《필원잡기(筆苑雜記)》 제1권에 이르기를 

유의손(柳義孫) 선생, 권채(權採) 선생, 문희공(文僖公) 신석조(辛碩祖)와 남수문(南秀文) 선생 등이 함께 집현전에 있으면서 그 문장이 다 같이 일세에 유명하였는데, 남(南) 선생을 더욱 세상에서 중하게 추대하였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초고는 대부분 남선생 손에서 나왔다. 제공(諸公)들이 모두 크게 현달하지 못하였으니 애석하다. 

조선왕조가 개창한 직후 고려사 편찬 작업에 착수했으니,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그 성과라, 다만 절요라는 이름으로 전자가 후자의 절록이라 생각하기 쉽고, 실제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나, 세밀히 살피면 둘은 별도 별개 사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 적지 않거니와, 그 이유를 편찬진이 다른 점도 심각히 고려해야 한다고 본다. 

이 증언은 《고려사》 찬수에 직접 관여하거나, 혹은 그것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이 큰 인물의 증언이라는 점에서 주시해야 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제공하는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그의 항목에 의하면 남수문은 1408년(태종 8)에 나서 1442년(세종 24)에 사망했으니, 요절에 가깝다. 본관이 고성固城인 그는 字를 경질(景質), 경소(景素)  혹은 경재(敬齋)라 했으며, 집현전 부수찬, 집현전 응교, 집현전 직제학을 역임했다 했으니, 주로 문한文翰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겠다. 

할아버지는 공안부윤(恭安府尹) 남기(南奇)이며, 아버지는 병조참판 남금(南琴), 어머니는 부령(副令) 이춘명(李春明)의 딸이다. 1426년(세종 8)에 정시 문과에서 병과로 급제하고, 1436년 중시 문과에 장원해 문명을 널리 떨쳤다. 문과에 급제한 해에 집현전의 정자(正字)가 되었다.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 등과 함께 사가독서하라는 명을 받고 학문에 정진했다. 1433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으로서 김말(金末)과 함께 세종의 여러 대군에게 글을 가르쳤다. 1435년 간행한 『통감훈의(通鑑訓義)』 편찬에도 참여해 윤회(尹淮)·권채·정인지(鄭麟趾) 등과 『통감(通鑑)』을 주해하기도 했다. 

143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한 직후 집현전 응교를 제수받았다. 1437년 집현전에서 편찬한 『장감박의(將鑑博義)』의 발문을 썼고, 이듬해한유(韓愈)의 문장에 대한 주석서의 발문도 썼다. 그 뒤 예문관 응교·지제교 겸 춘추관 기주관(知製敎兼春秋館記注官)·경연 검토관(經筵檢討官)을 거쳐, 1442년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지제교로 있을 때 왕명을 받아 많은 글을 지었으나 대다수의 글은 흩어져 없어짐으로써 전하지 않는다.

다만, 1442년흥천사(興天寺)를 짓고 경찬회(慶讚會)를 베풀 때 지은 설선문(說禪文) 등이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전하고, 전(箋)·기·묘지 몇 편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할 뿐이다.

줄곧 집현전과 예문관 등의 문원(文苑)을 떠나지 않고 당대의 이름난 문장가 윤회·권채·신석조 등과 시문을 겨루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남수문의 문장이 제일이라고 추앙했다. 술을 즐겨 도가 지나칠 때가 많았는데, 세종은 재주를 아껴 술을 석잔 이상 마시지 못하도록 경계했다는 일화가 있다. 저서로는 『경재유고(敬齋遺稿)』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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