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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사물을 탄생시킬 적에는 이치를 그 형상 속에 깃들게 하는 법이다. 그러고서 가장 신성한 성인에게 하늘을 대신하여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교화를 널리 펴게 하니, 그러한 말과 교화가 담겨 있는 곳이 바로 경서(經書)일 지니라. 그러나 말이란 모름지기 문자의 힘을 빌어서야만 전달되므로 하늘은 또 창힐(蒼?)을 시켜 문자를 만들게 했다.

 

문자는 처음에는 형상을 본떠 만들었기에 그 활용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하늘은 또 이번에는 사황(史皇)에게 그림을 그리게 했다. 이렇게 그림과 문자가 서로 어울리자 비로소 말과 교화를 완벽하게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숱한 세월을 거치고 드넓은 세상을 확장하는 동안, 문자는 늘 세상에서 제자리를 지킨 반면, 그림은 나타나기도 하고 깊이 숨기도 해서 ‘빈풍도’(?風圖)와 ‘왕회도’(王會圖) 이래로 세상에 드러난 그림이 얼마 되지 않는다. 간간이 재능과 기상이 출중한 사람이 나타나 넘쳐흐르는 재주로 화훼도(花卉圖)와 영모도(翎毛畵)를 그렸는데 그 빼어난 솜씨는 조화옹(造化翁)을 빼다박아 사람의 마음과 눈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그림의 세계는 무시할 수가 없느니라.

 

김군(金君) 사능(士能)은 스승이 없이도 터득하는 지혜의 소유자로서 참신한 뜻을 창출하여 그의 붓이 이르는 곳에는 그의 정신도 함께 이르렀다. 머리털 같은 비취빛과 황금빛, 실오라기 같은 붉은 빛과 흰 빛으로 그린 그림은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워 옛사람이 나의 솜씨를 보지 못해 한스럽다는 푸념도 할 만도 했다. 따라서 상당한 자긍심을 갖고서 자중하여 가볍게 그림을 그리는 법이 없었다.

 

인품이 대단히 높은 그는 고아하고 운치 있는 선비의 풍모를 지녔으므로 자기의 정신적 고민과 에술적 솜씨를 이용하여 남들과 교제하는 데 쓸 그림을 제공하여 화장대나 부엌에서 두고 보는 감상거리로 만들고픈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무릇 글씨란 비유컨대 사람의 성명(姓名)이요 그림이란 얼굴 생김새다. 어떤 사람의 성명만을 알고 그의 얼굴 생김새를 모른다면 비록 왼종일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다 해도 알아보지 못할 테니 그게 될 말인가?

 

아! 그림과 글씨는 발생이 같을 뿐만 아니라 형체 또한 동일하다. 그럼에도 세상에서는 글씨는 중시하면서도 그림은 낮잡아 보아 심지어는 화공(畵工)이나 화사(畵史)라고 불러 욕을 보이기까지 한다. 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김군이 거처하는 집에 편액을 걸고 대우암(對右菴)이란 이름을 붙였는데, 이는 ‘왼쪽에는 그림을 두고 오른쪽에는 글씨는 둔다’(左圖右書)는 옛사람의 말을 취한 이름이다. 그림과 글씨가 분리되어 각기 외롭게 제 길을 간 역사가 오래인데 지금에는 다시 합해졌으니, 서법가와 화가가 서로를 축하해 마지 않을 터이다.

 

본관 여주(驪州). 이 블로그 다른 글에 소개하는 것과 같이 평생 재야문사로 18세기 조선 문단에 우뚝한 자취를 남긴 이용휴(李用休.1708~1782)가 남긴 글 중 하나이다. 이에 의하면 김홍도는 자기가 살면서 작업을 하는 집, 즉, 당호(堂號)를 대우암(對右菴)이라 했으며, 그것은 글씨와 그림을 함께 한다는 뜻에서 취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대우(對右)란 오른쪽을 마주본다는 뜻이거니와 여기서 말하는 오른쪽은 말할 것도 없이 ‘左圖右書’의 우서(右書)와 같은 말이니, 오른쪽에 있는 글씨를 마주보는 이는 결국 화가이니, 對右란 화가를 말하며, 암(菴)이란 집을 말함이니, 대우암(對右菴)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는 ‘오른쪽에 있는 글씨를 마주하는 사람이 사는 집’이란 뜻이 될 터이다.

 

대우암의 풍경을 담은 그림으로 김홍도 그림은 현재도 전하고 있으니, 1784년에 제작한 단원도(檀園圖)가 그것이다. 이 그림 속 대우암 마루에는 세 사람이 앉아 있으니, 김홍도 자신과 다른 화가 강희언(姜熙彦), 여행가 정란(鄭瀾)이 그들이다. 

 

 

김홍도, <단원도(檀園圖)> 78.5x135.3cm, 종이에 담채, 개인소장 --- 추후 보강 예정

 

단원도(檀園圖)

 

김홍도(金弘道)

후기(1786년)

산수

종이에 담채

135 × 78.5㎝

개인소장

 

이 그림의 화제에 의하면 단원은 그의 나이 36세인 신축(辛丑,1781년) 청화절(淸和節)에 그의 집을 찾아온 창해옹(滄海翁) 정란(鄭瀾)과 평소 친교가 있던 강희언(姜熙彦)과 함께 진솔회(眞率會)라는 아회(雅會)를 가졌다고 한다. 그로부터 5년 후 강희언은 고인이 되었고 단원은 궁핍하여 산남의 객관(客館)에서 기식할 때 홀연히 창해옹을 만나게 되어 5년전 일을 생각하며 이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고 한다. 


암벽으로 둘려진 돌담집 초려(草廬)의 사랑방 들마루에서 아회가 벌어지고 있다. 멀리 뒤로는 성벽이 보이고 암벽 아래는 석상이 놓여 있다. 뜰에는 연잎이 푸르른 연못과 그 옆에 수석이 놓여 있고, 미끈한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앞마당에는 학이 노닐고 있는 매우 운치있는 곳이다. 김홍도는 거문고를 타고 있고, 큰 부채를 들고 비스듬히 앉아 있는 인물은 강희언이며, 앞쪽에서 시를 읊고 있는 사람이 창해옹이다. 인물의 의습선이며 자연스러운 자세가 그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며 뒷편의 바위는 그의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에 나오는 바위와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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