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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신라의 일통삼한 전쟁기에 김유신을 호종한 군인. 백제 멸망 뒤인 661년, 고구려 정벌에 나선 당군을 지원하고자 군량미 수송에 나선 김유신을 호종하다가 신라군이 위험에 빠지자 렬기와 더불어 특공대를 조직해 평양성으로 들어가 당군과 접선했다. 김유신 사후에는 김유신 아들인 김원정 휘하에서 서원경에 속한 술성이라는 성을 쌓는 일을 감독하기도 했다. 

삼국사기 권 제47 (열전 제7) 구근 열전 : 구근(仇近)은 원정(元貞)공을 따라 서원경(西原京)[현재의 충북 청주시]의 술성(述城)을 쌓았는데, 원정공이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일을 게을리 한다 하여 곤장을 때렸다. 구근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열기와 더불어 죽음을 헤아릴 수 없는 곳에 들어가 대각간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고 대각간은 나를 무능하다고 하지 않고 국사(國士)로 대접하였는데 지금 뜬 소문을 듣고 나를 죄 주니 평생의 치욕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하였다. 원정이 이 말을 듣고 종신토록 부끄러워하고 후회하였다.

삼국사기 권 제47(열전 제7) 열기 : 렬기(裂起)는 기록에 그의 종족과 성씨가 전하지 않는다. 문무왕 원년(661)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를 토벌해 평양성을 포위하자 함자도(含資道) 총관 유덕민(劉德敏)이 국왕에게 소식을 전하며 평양에 군량을 보내주도록 하니 왕이 대각간 김유신에게 명해 쌀 4천 섬과 조(租) 2만 2천2백5십 섬을 운반토록 하니 장새(獐塞)에 이르러 바람과 눈이 몹시 차가워 사람과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고구려 사람들이 군사들이 피곤함을 알고 요로에서 막아 공격하려 했다. 당 군영과는 거리가 3만여 보(步) 떨어져 있었는데 더 전진할 수 없어 편지를 보내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했다. 그때 렬기는 보기감(步騎監)으로 행군에 참여하고 있다가 앞에 나서며 말하기를 “저는 비록 우둔하고 느리지만 파견에 참여하고 싶습니다”고 해서 드디어 군사 구근(仇近) 등 15인에 끼어 활과 큰 칼을 가지고 말을 달리니 고구려 사람들이 바라다 볼 뿐 막을 수 없었다. 거의 이틀을 달려 소(蘇) 장군에게 명을 전하니 당인들이 듣고서 기뻐하며 위로했다. 답서를 보내기에 렬기가 다시 이틀을 걸려 되돌아왔다. 유신이 그 용기를 가상히 여겨 급찬 관등을 주었다. 군사가 돌아오자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렬기와 구근은 천하의 용사입니다. 신이 우선 급찬의 위계를 주었는데 그 공로에 비하면 미흡합니다. 바라건대 사찬의 위계를 가하여 주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사찬의 지위는 지나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유신이 두 번 절을 하고 말하기를 “벼슬은 공기(公器)이며 공에 보답해 주는 것이니 어찌 지나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왕이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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