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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시간은 2016년03월09일 13시55분이다. 


 《삼국유사》는 승려 일연이 대부분 찬술한 가운데 그 일부는 그의 제자 무극(無極)이라는 승려가 보충했다는 주장이 이제는 적어도 학계에서는 대세를 이룬다. 하지만 그렇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목도 군데군데 있다. 특히 그 맨 앞에 붙은 가야를 포함한 네 나라 왕들과 후삼국 왕들의 계보인 왕력(王曆)이 그 이하 본문과는 어떤 관계인지는 적지 않은 논란이 있다. 지금 살피고자 하는 백제 무왕(武王) 역시 그러하다. 


미륵사지 전경미륵사지 전경 (사진제공=김태식)


 이곳 왕력 편에서는 백제 제30대 왕인 그를 일러 “무강(武康)이라고도 하는데 헌병(獻丙)이라고도 한다. 혹은 어릴 때 이름을 일로사덕(一耆篩德)이라고도 한다. 경신년(600)에 즉위해 41년을 다스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본문 중 한 편에 해당하는 기이(紀異) 편 제2에 ‘무왕’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 의하면 당장 이를 부정한다. 기이란 글자 그대로는 신이(神異)한 이야기를 정리했다는 뜻이니 이 경우 '紀'는 기록하다, 적는다는 같은 발음의 글자 ‘記’다. 그 전체 편명에 어울리게 이곳에 저록(著錄)한 무왕 관련 이야기는 그 유명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연애담과 그에 따른 미륵사 창건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 이야기를 중언부언할 필요는 없겠거니와, 이 기이 편에서 《삼국유사》는 그 제목 ‘무왕’ 아래에 그것을 주석하기를 “옛날 책에서는 무강(武康)이라고 했지만 잘못이다. 백제에 무강은 없다”고 했다. 분명히 왕력 편에서는 그의 다른 이름으로 무강(武康) 혹은 헌병(獻丙), 나아가 어릴 적 이름으로 일로사덕(一耆篩德)을 들었음에도 본문에서는 이를 스스로 부정했으니 말이다. 이런 주석이 《삼국유사》 편찬자에 의한 것이 아니라 후대 누군가가 보충해 넣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한데 이에 등장하는 무강을 백제의 무왕이 아니라 위만에게 내쫓긴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기준(箕準)이라는 주장 또한 억세게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 예컨대 조선 후기 역사서들에 집중적으로 이런 내용이 등장한다. 순암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은 그 불후의 편년체 역사 대작인 《동사강목》에서 그 정설화를 시도하니 본문에서 기준이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금마군(金馬郡)에 도읍했다”고 하면서, 그것을 다음과 같이 부연한다. 


왕이 남으로 달아나 마한을 공략하여 격파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니, 곧 무강왕(武康王)이다. 지금의 익산(益山) 오금사봉(五金寺峰) 서쪽에 쌍릉(雙陵)이 있으니 《고려사》에 후조선(後朝鮮) 무강왕과 비(妃)의 능이라 하고, 세속에서는 영통대왕릉(永通大王陵)이라 부른다. 또 기준성(箕準城)이 용화산(龍華山) 위에 있다. 


 이 쌍릉이 지금의 익산 쌍릉이다. 한데 세속에서 이를 영통대왕릉이라 부른다는 증언은 조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永通’은 말할 것도 없이 ‘末通(말통)’의 오기다.   글자가 비슷한 데 따른 인쇄 착오다. 이 말통은 곧 서동(薯童)이니, 이는 저 《삼국유사》 ‘무왕’에 보이는 대목, 다시 말해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니… 항상 마[薯]를 캐다 파는 일로 생업을 삼았으므로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는 데서 비롯한다. 서동은 곧 마동, 혹은 맛동일 것이니 이것이 곧 저 말통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실제 그 뿌리가 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련 기록을 보면 분명 말통이다.   


 나아가 순암은 같은 《동사강목》  고려 숙종 7년(1102) 조에서는 고려가 이해 겨울 10월에 기자를 모시는 사당인 기자사(箕子祠)를 세운 사실을 특기하고는 그에다가 자신의 주장을 붙이는데 그에서 이런 내용이 보인다. 


마한 시조인 무강왕 기준(箕準)은 곧 기자의 41세손으로 남쪽 땅에 나라를 열어 2백 년이나 지속되었다.


미륵사지미륵사지 (사진제공=김태식)


 이에서는 아예 마한의 시조로 발전했으며, 더구나 그가 기자의 41세손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한다. 무강왕을 둘러싼 이런 인식은 순암과 동시대 인물인 연려실(燃藜室)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의 대저(大著) 《연려실기술(然黎室記述)》에도 보인다.   이곳 권 제19 ‘역대전고(歷代典故)’ 중 ‘삼한(三韓)’ 조에는 “조선왕 기준이 위만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게 되자, 한 나라 혜제(惠帝) 원년 정미(BC 194)에 좌우 신하와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달아나 마한을 쳐서 격파하고 스스로 서서 한왕(韓王)이 되어 국호를 마한이라 하고 금마산(金馬山)에 도읍하고는 54국을 거느리니 세상에서 무강왕(武康王)이라 부른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긍익은 금마산 기슭 용화산(龍華山)을 일러 “일명 미륵산(彌勒山)이라 하는데 석성(石城)이 있어 둘레 3천900 척인데 세상에서는 기준이 쌓았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한데  《연려실기술》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이상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무강왕이 이미 인심을 얻고 나라를 세워 마한이라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왕이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용화산 위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세 미륵이 연못 가운데에서 나왔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이곳에 절을 지으소서”라고 하니, 왕이 허락하고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연못을 메울 방법을 물었다. 법사가 신력(神力)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연못을 메우니 이에 불전(佛殿)을 창건하고 또 세 미륵상을 만드니, 신라 진평왕이 백공(百工)을 보내 도왔다. 석탑이 있는데 굉장히 커서 높이가 몇 길이나 되니, 동방 석탑 중 최고이다. 


 이를 보면 기자조선과 그 마지막 왕 기준, 그리고 백제 무왕과 선화부인이 아주 뒤범벅을 이룬다. 이는 기록이 어떻게 한데 뒤엉켜 이상한 신화를 만들어내는지 그 생생한 장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흥미롭다. 


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미륵사지 당간지주와 복원 동탑 (사진제공=김태식)


 그렇다면 도대체 백제 무왕과 마한, 그리고 기자조선은 어떤 고리로 이렇게 연결되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공교롭게도 백제 무왕이 미륵사라는 대찰을 창건한 지역과 위만에 쫓긴 기자조선 마지막 왕 기준이 도망쳐 정착한 곳이 같은 지역으로 인식된 데서 유래한 착종(錯綜) 혹은 착란(錯亂)의 소행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준이라 하는 기자조선 준왕(準王)이 위만에 쫓겨 바다를 통해 남쪽으로 들어가 마한 땅에 들어갔다는 기록은 고대 중국 문헌 곳곳에서 보이거니와, 이것이 나중에는 그 정착지가 금마(金馬)라는 등식으로 발전한다. 이런 기록이 애초 등장하는 중국 문헌들을 보면 기준은 마한 땅에 들어가 그곳을 공략하여 정착했다고 하지만, 이것이 후대로 갈수록 역사가 조작되어 그가 바로 마한이라는 왕국을 창설한 시조로 둔갑하기에 이른다. 당장 《삼국유사》만 해도 기이 제1에 ‘마한’이라는 제목으로 수록한 이야기에서 그 정체를 종잡기 힘든 《위지(魏志)》를 끌어다가 “위만(魏滿)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왕 준(準)이 궁인과 좌우 신하들을 데리고 바다를 건너 서쪽 한(韓) 땅에 이르러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고 했다.  


 이런 혼란은 현재까지 주어진 자료에 의하는 한 조선 초기 완성된 팔도지리 총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인 듯하다. 이곳 제33권 전라도(全羅道) 익산군(益山郡) 조를 보면 그 싹이 보인다. 예컨대 이 지역 사찰 관련 기록을 모은 불우(佛宇) 조를 보면 미륵사(彌勒寺)를 이렇게 설명한다. 


용화산(龍華山)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무강왕(武康王)이 인심을 얻어 마한국을 세우고, 하루는 선화부인(善花夫人)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고자 산 아래 큰 못가에 이르렀는데, 세 미륵불이 못 속에서 나왔다. 부인이 임금께 아뢰어 이곳에 절을 짓기를 원하였다.…


 나아가 같은 대목 고적(古蹟) 조를 보면 쌍릉(雙陵)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오금사(五金寺) 봉우리 서쪽 수백 보 되는 곳에 있다. 《고려사》에는 후조선(後朝鮮) 무강왕(武康王)과 그 비(妃)의 능이라 했다. 속칭 말통대왕릉(末通大王陵)이라 한다. 일설에 백제 무왕(武王)의 어릴 때 이름이 서동(薯童)인데, 말통(末通)은 곧 서동(薯童)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 쌍릉이 오늘 우리가 탐구하고자 하는 지역이다. 이로써 보건대 늦어도 조선 초기에는 이미 기자조선 준왕과 백제 무왕이 혼동을 일으키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견주건대 신라 시대 김태식과 대한민국 시대 김태식, 혹는 대한민국 시대 권투선수 김태식과 연합뉴스 기자를 역임한 김태식이 짬뽕된 것과 같다 하겠다. 


 《승람》 외에도 조선 시대 그런 흔적을 보면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쓴 ‘익산 미륵사 석탑을 보며(益山彌勒寺石浮屠)’라는 시가 있다. 



귀신의 공인지 백성의 힘인지 끝내 아득하네

위로는 용화산 만 길 능선 넘어섰네

천년 두고 석재는 죄안을 이루었으니

가련토다 금마의 무강왕이여



鬼功民力竟茫茫

上軼龍華萬仞岡

千載石材成罪案

可憐金馬武康王



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해체 이전 미륵사 석탑 (사진제공=노기환)


 이때만 해도 미륵사 석탑은 온전했나 보다. 그 위용이 얼마나 대단했기에 그 뒤편 용화산보다 높게 보였겠는가? 실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반드시 그리 볼 수도 없는 까닭은 그것을 관람하는 위치에 따라 그리 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점필재는 이 거대한 석탑을 백성의 고혈을 짜내 이룩한 결과물로 본다. ‘죄안(罪案)’이라는 말은 범죄 사실 기록부, 요즘 말로 치환하면 범죄 사실 판결문 정도를 의미한다. 


 점필재는 주자성리학에 충실한 인물이라 이런 사람들은 불교는 경멸한 특징이 있다. 그 시조처럼 통하는 주희 자신이 이미 격렬한 반불교주의자라, 그를 따르는 후학들도 자연 반불교 정신으로 무장하게 되거니와, 이 시에서도 점필재의 그런 성향은 유감없이 드러난다. 한데 이를 만든 이를 점필재는 금마의 무강왕이라 했다. 실제는 백제 무왕인데도 말이다. 그에게는 아마도 금마국 무강왕과 백제 무왕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같은 인물로 인식되었으리라. 


 비단 이런 전승이 아니라 해도 실제 익산 금마면 일대는 백제 무왕과 밀접하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이곳에는 그가 창건한 미륵사 터가 있고, 실제 이는 근자 그 석탑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출토된 봉영사리기(逢迎舍利記), 다시 말해 사리를 맞이하여 석탑에 안치하면서 남긴 기록에서 더욱 분명한 사실로 확인됐다. 미세한 차이라면, 문헌에는 이 절을 무왕이 선화공주와 함께 창건했다 했지만, 백제 시대에 이를 실제로 창건하고 남긴 사람들이 작성한 이 사리장엄기에 의하면 선화공주가 아닌 다른 왕비, 다시 말해 좌평(佐平) 사타적덕(沙陀積德)의 딸이 창건 주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더구나 그 인근 쌍릉은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 무덤이라 전한다. 실제로 이 무덤이 백제시대, 특히나 사비 도읍기 왕릉 무덤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으니 정말로 이곳이 무왕 부부의 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고려 충숙왕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에 대규모 도굴단이 이 무덤을 도굴한 까닭은 바로 이곳에 바로 금은보화가 다량으로 묻혀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도움받은 곳>

한국고번역원 한국고전 종합DB

국립중앙박물관, 《유리건판으로 보는 백제의 고분》, 2015



김태식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注) 이는 문화유산신문 기고문으로 기사입력 시간은 016년03월02일 14시00분이다. 


이 《독사일기》 맨 처음에 나는 원나라 공주 눌륜의 무덤이 도굴된 일을 다루었다.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충숙왕(忠肅王) 재위 16년(1329) 여름 4월이다. 한데 이보다 한 달 전에는 금마군(金馬郡) 호강왕(虎康王) 무덤 도굴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고려사절요》  충숙왕 해당 년에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3월에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馬韓) 조상 호강왕의 능을 도굴했다. (도둑을) 붙잡아 전법사(典法司)에 구금했지만 달아났다. 정승 정방길(鄭方吉)이 전법관(典法官)을 탄핵하고자 했지만 찬성사 임중연(林仲沇)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이 옥에 갇힌 지 2년이 되었지만 드러난 장물(贓物)이 없는데도 죽은 자가 많습니다”고 했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내가) 본래 무덤 판 놈들에게 금붙이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고 하니 임중연이 부끄러워하면서도 성을 냈다.  


이를 세심히 훑어보면 뭔가 이상한 대목이 있음을 직감한다. 왕릉을 도굴한 일과 체포한 일 그리고 도굴범의 탈주에 대한 조정의 논의가 마치 한 시점에 일어난 것처럼 되어 있지만, 도무지 이런 일련의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탈주 사건 처리를 두고 두 관리가 다투는 와중에서 나온 말을 보건대, 도굴 사건 범인으로 체포된 자들이 무려 2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문맥으로 보건대 도굴범(들)은 확정 판결을 받고 소위 기결수로서 수감 생활을 한 지 2년 만에 쇼생크 탈출을 감행한 셈이다. 따라서 앞 기록만으로는 호강왕릉 도굴 사건 발생 시점이 3월인지, 아니면 탈주 사건이 3월인지 판가름하기가 심히 곤란하다. 다만, 전후 맥락으로 보아 발생이 이해 3월인데, 관련 기록을 한 군데에다가 몰아넣다 보니 조금은 복잡하게 정리되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무강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 중 대왕묘무강왕릉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 중 대왕묘 (사진제공=차순철)


앞에 등장하는 전법사는 글자 그대로는 법을 관장하는 관청이라는 뜻이니 요즘으로 치면 경찰서나 감옥 정도로 보아 대과가 없다. 전법관은 그것을 담당하는 관리를 말하니 경찰관이나 교도관 중에서도 총책임자에 해당한다. 나아가 이 사건에 연루되어 많이 죽었다는 자가 도굴 공범들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에 간접으로 연루된 이들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아무래도 공범들을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호강왕릉 도굴은 단독범 소행이 아니라 대규모 도굴단이 저지른 셈이 된다. 


한데 탈주 사건을 두고 정승 정방길과 찬성사 임중연이 치고받는 대목이 영 수상쩍은 느낌을 준다. 이에 따르면 전법관 처벌을 주장하는 정방길은 도망친 도굴범들이 진범임을 확신하면서 그 증거로 그들이 금붙이를 많이 갖고 있음을 들었다. 그 반면 임중연은 그들이 도굴범이라는 증거가 없다고 맞선다. 2년 동안 수감해 놓고 족쳤지만, 그들이 훔쳐냈다는 장물을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번 탈주 사건은 묻어두자고 한 것이다. 이로 볼 때 이 도굴 사건 배후에는 임중연 혹은 그가 뒤를 봐주어야 하는 모종의 인물이 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정방길이 묻어두자는 임중연을 호되게 몰아붙인 이유는 이 사건 배후에 다름 아닌 임중연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이 사건도 그렇고, 비슷한 시기에 발생한 눌륜공주 무덤 도굴 사건 역시 발생 시점이 고려가 원나라의 직접 지배나 다름없는 피식민 상태였고, 그에 따른 각종 중앙 정부 권력이 한창 이완된 시기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이 무렵 민생은 파탄 날 대로 난 상태였다. 그러니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주림을 견디지 못한 사람들은 살 길을 찾아 도굴로 내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이 기전체 사서인 《고려사》 중에서는 연대별 사건 일지로서 그 자체만 보면 《고려사절요》와 같은 편년체인 세가(世家)에는 보이지 않는다. 다만 앞에 나온 정방길의 행적을 정리한 그의 열전에서 이 사건이 보인다. 이에 따르면 정방길은 과거에 급제하고는 여러 벼슬을 거쳐 판전교사(判典校事)가 되었으며, 지금의 국립대 총장에 해당하는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가 밀직사(密直司)로 들어갔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당하자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백관(百官)을 민천사(旻天寺)라는 사찰에다가 모아놓고는 원나라 황실에 글을 올려 왕을 환국시켜 달라 요청하는 한편 고려를 무고한 자들을 체포해 압송해 달라고 요청한 일도 있다. 


이 뒤에 이어지는 대목이다. 


그 뒤에 정방길은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조상 무강왕(武康王)의 묘를 도굴하다가 잡혀 전법사에 수감되어 있던 도적들이 탈옥하는 일이 벌어졌다. 정방길이 전법관을 탄핵하려 하니, 찬성사 임중연이 저지하면서 말하기를 “도적들을 2년이나 억류했지만 장물이 드러나지 않았고 죽은 자도 많다”고 했다. 정방길이 말하기를 “도굴범들이 금붙이를 많이 지니고 있음을 내가 잘 알고 있다”고 했다. 또 말하기를 “거제(巨濟)의 전조(田租. 토지에 물린 세금)를 남몰래 쓴 자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하면서 임중연을 향해 여러 차례 모욕을 주니 임중연이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병이 있다고 하면서 사직해버리니 사람들은 정방길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당시 정방길의 나이가 일흔여섯이라 왕이 지팡이를 내려주고 김태현(金台鉉) 대신에 권행성사(權行省事)로 삼았다. 


이를 보면 확실히 《고려사절요》 관련 기록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한다. 나아가 임준연이 이 탈주 사건의 실질적 배후임을 이제는 여실히 알 수 있다. 임준연이 도굴범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지만, 앞선 정방길 바로 뒤에 붙은 그의 열전을 보면 아무래도 이들에게서 뇌물을 받은 듯하다. 


임중연은 일찍이 의랑(議郞) 조광한(曹光漢), 응교(應敎) 한종유(韓宗愈)와 함께 인사 행정[銓注]에 참여했다. 벼슬이 찬성사(贊成事)에 이르렀으며, 장백상(蔣伯祥)과 함께 섭정동성사(攝征東省事)를 지내기도 했다. 충숙왕이 임중연을 꾸짖기를 “그대가 나의 정사를 어지럽게 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임권(林權)이라 지목한다”고 했는데, 정권(鄭權)이라는 자도 일찍이 인사 행정을 맡아 뇌물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왕이 그렇게 말한 것이다. 


충숙왕이 말한 임권이란 바로 임중연과 정권이다. 나는 정방길의 논박을 볼 적에 아무래도 호강왕릉 도굴단도 임중연이 조직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하나 확실한 점은 도굴단을 탈주케 한 배후는 임중연이라는 사실이다. 


이때 도굴된 무덤을 《고려사》는 무강왕릉(武康王陵)이라 하고, 《고려사절요》 에서는 호강왕릉(虎康王陵)이라 하지만, 같은 말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는 무강왕릉이지만 왕건의 아들로 고려 2대 왕인 혜종은 이름이 무(武)인 까닭에 그 이름을 함부로 쓰지 못해 호강왕릉이라 했을 뿐이다. 이를 피휘(避諱)라 한다. 두 역사서는 모두 조선 초기에 나온 까닭에 ‘武’라는 글자를 ‘虎’자로 바꾸어 쓸 필요가 없었지만, 이를 알아챈 《고려사》는 본래 글자로 돌린 반면, 《고려사절요》는 그렇지 못했던 것이다. 이로써 본다면 후자의 편찬진이 조금은 더 게으른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무강왕릉이 무엇이며, 그에 얽힌 더 많은 이야기는 다음 호를 기약하기로 한다. 참, 앞에서 나온 그 무덤 소재지 '금마'란 현재도 지명이 남았거니와 전북 익산시를 금마면 일대를 말한다. 



김태식(문화유산 전문언론인)


■ 약력 ■

- 연세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 1993. 1. 1. 연합통신(현 연합뉴스) 입사

- 1998. 12. 1. ~ 2015. 6. 30. 연합뉴스 문화재 전문기자 

- 2012. 4. 28. 학술문화운동단체 ‘문헌과문물’ 창립

-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 《화랑세기 또 하나의 신라》 등 문화재와 한국사 관련 논저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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