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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바터 


만호태후 뜻을 알고는 미리 물러난 미실. 그리하여 자기 아들 보종을 내리고, 그 자리에 만호태후가 점 찍은 15살 꼬맹이 유신을 풍월주에 앉힌 미실한테 만호 역시 무엇인가 보답을 해야 했다. 역시 정치는 주고받기라, 노회한 정치가 만호는 또 다른 노회한 정치가 미실을 보답할 방법을 생각한다. 미실로서도 그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만호가 내민 선물이 블루칩이고 가상화폐였기 때문이다. 


11세 풍월주가 하종(夏宗)이다. 갑신년(564)에 태어났으니, 아버지가 세종(世宗)이요, 어머니가 바로 미실(美室)이었다. 화랑세기 하종공 전에 의하면 15살에 화랑에 들어간 그는 역사를 사다함 형인 토함한테서 배우고, 노래는 이화공에게 배웠으며, 검술은 문노에게 터득했으며, 춤은 미실 동생인 미생(美生)을 스승으로 섬겨 습득했다. 


하종은 설원공 딸인 미모(美毛)를 배필로 맞아 아들 모종(毛宗)과 두 딸 유모(柔毛)와 영모(令毛)를 두었다. 두 딸 중 맞이인 유모는 14세 풍월주를 역임하는 호림(虎林)한테로 시집가니, 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바로 선종(善宗)이라, 훗날 출가해서 자장이라는 일컫게 되는 대고승이다. 자장율사가 다름 아닌 미실의 증손이었다. 


문제는 영모를 어찌할 것인가? 그의 배필로 누굴 삼을 것인가? 만호태후가 바로 영모 카드를 미실한테 제시했다. 손녀 영모 배필로 유신을 삼았으면 하는데 어떠신가? 화해 제스처를 미실이 마다 할 이유가 없었다. 15세 유신공 전 기술이다. 


(유신이 중악에서 비결을 받고)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 지위를 물려주겠다고 했다. 공이 사양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에 15세 풍월주가 되었다. (만호)태후가 하종공 딸 영모를 아내로 맞도록 명하여 미실궁주(美室宮主)를 위로 하려 했다. 영모는 곧 유모의 동생이었다. 형제가 모두 선화(仙花)의 아내가 되니, 그때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때는 건복 29년 임신년(612)이었다.


이렇게 되어 만호태후 손자인 김유신은 당대 또 다른 권력자 미실의 손녀사위가 되었다. 김유신은 595년 생이니, 612년 결혼할 때 나이는 18세였다. 김유신 혼인 관련 기록은 나중에 환갑이 된 시점인 655년인가에 김춘추와 문희 소생인 지소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사건 말고는 알려진 바가 없다. 하지만 화랑세기에 의하면, 그는 18살에 영모를 아내로 받아들였다.  


현존하는 화랑세기 판본에는 그런 언급이 없지만, 그의 장남 삼광(三光)은 바로 영모 소생이고, 우리가 잘 아는 원술 이하는 지소부인 소생이다. 김유신과 지소의 결혼 역시 삼촌과 조카딸간 근친혼이었다. 


미실은 왜 저 카드를 받아들였을까? 그로서도 이렇다 할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도 했겠지만, 미래를 위한 투자 가치로 김유신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유신 정도라면, 나중에 어찌될 지 알 수는 없겠지만, 확실한 블루칩이라는 판단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드라마 <선덕여왕>은 김유신이 시종 미실에 맞선 것으로 묘사했지만, 역사는 전연 딴판이라, 그는 미실의 손녀사위로서, 그 후광 역시 등에 업고 서서히 정계의 중심으로 다가서기 시작했다. 이때까지가 김유신으로서는 주어진 후광이라면, 이젠 그런 후광이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음을 증명해야 했다. 그는 시종일관 군인 전략가의 길을 모색했다. 마침 그 시대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때라, 그 능력을 보여줄 환경이 무르익은 상태였고, 그 기회를 김유신은 여지없이 농락해갔다. 

  

김유신이 금관가야 왕가의 정통 후손임은 널리 알려졌거니와, 그의 증조부가 바로 금관가야를 통째로 들어 신라로 귀부한 구형왕이라, 그의 세 아들 중 김무력이 아비와 더불어 투항하매, 진흥은 사도부인과의 사이에서 난 적통 공주 아양을 배필로 주니, 이 사이에서 난 아들이 바로 김서현이다. 따라서 부계로 보면 김유신은 금관가야만이 아니라, 진흥왕의 증손이었다. 


그렇다면 김유신의 혈통은 이것으로 끝인가? 이것만이 그의 벼락출세를 보장하는가? 이에서 우리가 쳐다보아야 할 곳이 바로 그의 모계 혈통이니, 그의 어머니는 만명(萬明)이었으니, 실은 그의 출세를 보장한 것은 바로 이 모계였다.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 上에서는 만명을 일러 "갈문왕(葛文王) 입종(立宗)의 아들인 숙흘종(肅訖宗)의 딸"이라 했거니와, 이리 되면 골 때리는 현상이 벌어지거니와, 부계는 물론이고, 모계로도 김유신은 진흥과 직접 닿는다. 입종은 말할 것도 없이 지증왕과 연제 부인 사이에서 난 두 번째 적통왕자이니, 그의 형이 바로 법흥왕이다. 


입종은 법흥왕 적통 공주인 지소를 배필로 맞아 훗날의 진흥왕인 왕자 삼맥부를 생산하니, 숙흘종 역시 어머니는 이 단계에서는 확인되지 아니하나, 입종의 아들이다. 이로 보아 숙흘종은 진흥왕과는 아버지가 같은 형제다. 


하지만 부계와 모계 모두 신라 적통 왕실 피를 이어받았다는 것만으로, 김유신의 출세를 자동보장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이다. 제아무리 혈통이 고귀하다 해도, 당대 정치 상황에 따라 권력 중심에서 배제되는 일이 흔하디 흔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만명은 아버지가 숙흘종이라는 사실이 확인되고, 나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그 아버지가 딸 만명이 서현과 결합하는 일을 극렬 반대하는 바람에 야반도주를 감행했다고 하거니와, 이를 대체 어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한다. 


이와 관련해 화랑세기는 전체 맥락은 같으나, 세부로 들어가서는 전연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뒤에서 자연히 밝혀지겠지만, 기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로는 좀체, 혹은 아예 해명하지 못한 문제들을 명쾌히 풀어준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만명은 아버지가 숙흘종이라는 사실만 드러날 뿐, 그 어머니가 누군지 밝히지 아니한다. 화랑세기에는 이 대목이 명확히 드러난다. 누구인가? 


만호태후였다. 만호는 누구인가? 


삼국사기 신라 진평왕본기에 이르기를 진평은 "이름이 백정(白淨)이며, 진흥왕의 태자 동륜(銅輪)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김씨 만호부인(萬呼夫人)으로 갈문왕 입종(立宗)의 딸"이라 했으며, 삼국유사 왕력편에서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를 기술하기를 "이름은 백정(白淨)이며, 아버지는 동륜태자(銅輪太子)인데 혹은 동륜태자(東輪太子)라고도 한다. 어머니는 입종갈문왕의 딸 만호부인(萬呼夫人)인데, 만녕부인(萬寧夫人)이라고도 하며, 이름은 행의(行義)다"고 했다. 


다시 말해 만호는 아버지가 입종 갈문왕이면서, 진흥왕 아들인 동륜태자를 남편으로 받아들여 아들 진평을 낳았다. 


뭔가 콩가루 같은 냄새가 난다. 입종 갈문왕 딸인 만호가 같은 입종 갈문왕 아들인 숙흘종에게서 딸 만명을 낳았으니 말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가능성으로 이런 것이 있다. 만호는 동륜에게 출가해서 아들 진평을 낳았지만, 동륜이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로 지내다가 어머니가 다른 오빠 혹은 동생인 숙흘종과 눈이 맞아 씌웅씌웅해서 만명이라는 딸을 낳았다. 이것이 이상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사건 전개 시나리오다. 그렇다고, 우리가 남편 동륜이 일찍 죽었는데, 그 마누라 만호가 이후 생평을 과부로 지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어떻든 이리 되면, 김서현과 바람이 나서 야반도주한 만명은 다름 아닌 진평왕과는 아버지는 다르나, 어머니는 같은 오빠 누이가 된다. 나이는 틀림없이 진평이 많았으리라. 진평이 만호의 원래 혹은 첫 남편 동륜 소생인 까닭이다. 또 이리 되면 김서현은 진평과는 처남매부이기도 하다. 


하지만 만호는 이보다 훨씬 더 복잡다단한 삶을 살았다. 화랑세기와 그 자매편인 계보도 상장돈장을 합쳐서 그의 행적을 정리하면 이렇다. 


지증왕과 그 정비 연제부인 사이에서는 기존에 알려진 법흥 입종 외에도 또 한 아들이 있었으니 그가 진종(眞宗)이라, 그의 이름은 조선후기 경주김씨 족보에서 흔히 등장한다. 이런 진종은 틀림없이 남편이자 삼촌인 입종이 일찍 죽는 바람에 과부로 지냈을 지소와 결합해 딸을 두니 그가 바로 만호다. 요컨대 지소는 삼촌으로 입종만이 아니라 또 다른 막내 삼촌 진종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신라 왕실 정통 피를 받은 만호는 애초 남편이 동륜태자가 아니라, 진흥왕 제1대 정비인 숙명공주 사이에서 난 정숙(貞肅) 태자였다. 이 정숙태자는 동륜에 앞선 태자였지만, 그 어머니가 그만 이화랑과 바람이 나는 바람에 그에 휘말려 태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여하튼 만호는 정숙태자에게 시집가서 딸 만룡(萬龍)을 둔다. 이런 만룡이 나중에 보리와 혼인해서는 아들 체원(體元)과 딸 보룡(寶龍)을 둔다. 


나아가 이런 만호가 나중에는 정숙태자가 쫓겨나면서 동륜태자의 부인이 되어 진평 말고도 국반(國飯)과 백반(伯飯) 두 아들을 두니, 이들은 진평이 왕이 되자, 나란히 왕의 적통 형제라 해서 나란히 갈문왕에 책봉된다. 


하지만 만호는 남편 운이 없었다. 동륜 역시 요절하고 말기 때문이다. 그러자 만호는 이번에는 숙흘종과 결합해 만명(萬明)이라는 딸을 두니, 그가 바로 김유신과 김흠순 형제, 그리고 보희-문희 자매의 어머니다. 


그렇다면 숙흘종은 누구인가? 그가 갈문왕 입종 아들임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거니와, 화랑세기에 의하면 어머니는 바로 금진(金珍)이다. 입종은 정식 부인 지소에게서 아들 진흥을 낳고, 후궁인 金珍에게서 서자 숙흘종을 낳은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김유신이 출세하는 발판은 바로 외할머니 만호였다! 


나아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는 만명이 서현과 결합하는 일을 아버지 숙흘종이 반대했고, 이것이 결국 둘의 야반도주를 불렀다고 했지만, 이는 말할 것도 없이 후대 부계 중심주의 시각이라, 화랑세기에 의하면 뜻밖에도 이를 반대하고 나선 이는 숙흘종이 아니라 만명 어머니인 만호였다. 


둘이 야합해서 김유신을 생산한 때가 595년 진평왕 시대였다. 이때 만호는 왕의 어머니로서 태후였다. 단순히 태후였을 뿐만 아니라, 진평 즉위 초반기에는 수렴청정하면서 신라를 좌지우지했다. 아들이 18살 성년이 되자, 수렴청정을 거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만호는 최고권력자였고, 특히 여성 영향력이 절대적인 화랑 행정에는 절대의 권력자였다. 


화랑세기 15세 유신공전에 의하면, 진골정통인 만호태후는 서현이 대원신통이라 해서, 혈통이 다르다는 이유로 혼인을 반대했다.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은 모계에 의한 신라 지배계층 붕당을 결정한 양대 혈통이니, 남자는 한 대에 한해서만 그 혈통 혹은 인통을 물려받았다. 


하지만 그 서슬퍼런 만호태후조차 결국 자식을 이기지 못했다. 딸 만명에 대한 노여움은 채 가시지 않았지만, 문제는 손자였다. 남편 서현을 따라 지금의 충북 진천 촌구석으로 도망간 만명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이 금성으로 날아들기 시작하고 만호태후 귀에도 들어갔다. 이구동성으로 말하기를, 유신이라는 손자가 그리 잘 생기고, 그리 똑똑하다고 한다. 


손자는 역시 권력욕에 찌든 할머니조차도 흔들어댔다. 할머니는 손자가 보고 싶어 미치다시피 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신라 왕국의 절대 강자 태후가 명령을 내린다. "만노로 가서 내 손자를 데려오느라." 이 대목을 화랑세기 유신공전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유신) 공이 자라자 태양과 같은 위용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보고 싶어해서 돌아올 것을 허락하니, 그리하여 막상 (손자를) 보고는 기뻐하며 말하기를 "이 놈은 참으로 내 손자이니라." 이로써 가야파가 마침내 (유신공을) 받들었다.    


유신은 이렇게 해서 외할머니 만호태후의 절대 비호를 받으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한데 그 출세의 기반 중 다른 한 축이 바로 가야파였다는 점이다. 이는 가야계 혈통이 그의 출세를 가로막는 핸디캡이었다는 단재 이래 오랜 주장을 묵살, 무효화하는 대목이다. 새로운 중심의 출현을 갈망한 가야파 앞에 나타난 김유신은 그에 더불어 만호태후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았으니, 이는 당대 신라 왕실 권력의 한 축을 분점한 미실 역시도 어찌할 수 없었다. 


당시 차기 풍월주는 그 넘버2인 부제(副弟) 자리에 있던 보종이라는 인물로 가게 되어 있었다. 보종은 바로 미실의 아들이었다. 보종은 김유신보다 나이도 10살가량이나 많았다. 하지만 미실은 역시 처신의 달인이었다. 만호태후가 손자를 끼고 도는 모습을 보고는 한 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그런 전략을 구사했다. 그리하여 아들 보종을 불렀다. "네가 유신이한테 풍월주를 양보해야겠다. 다음 기회를 보자꾸나." 


이렇게 해서 김유신은 미실의 아들 보종을 제끼고 일약 15살에 풍월주가 되었다. 그 출세의 절대 후원자는 외할머니 만호태후였다. 절대 권력자의 절대 비호 아래 15살 애송이가 차기 신라를 이끌어갈 청년세대의 선두주자로 등단했다. 이는 김유신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그의 등장으로 한반도 역사는 흐름을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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