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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진에 대한 김용래 기자 설명문은 다음과 같다. 


"호찌민, 한국인들의 저항 그대로 따라"…100년 전 프랑스 경찰 문건

    (파리=연합뉴스) 김용래 특파원 = 1920년 전후로 프랑스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지사 호찌민(전 베트남 국가주석)이 밀접하게 교류한 내용이 프랑스 정부 자료로 최초로 확인됐다.

    재불 독립운동사학자 이장규 씨는 프랑스 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엑상프로방스 소재)을 뒤져 1919~20년 프랑스 파리의 정보경찰관이 작성한 동향보고 문건을 발견해 연합뉴스에 공개했다. 

    사진의 문서는 프랑스의 정보경찰관 '장'이 작성한 것으로 "응우옌 아이 꾸옥(호찌민의 당시 이름)은 한국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자신의 근거로 삼고 있다. 그는 (일제에) 저항하는 한국인의 계획을 거의 똑같이 따르고 있다"고 적었다.

    또 "호찌민이 하려는 것에 대비하려면 미국에서 한국인들이 펴낸 간행물들을 살펴봐야 한다. 파리의 한국인들도 책자를 내려는 것 같다"고 기술했다. 2018.9.30 [파리 7대 박사과정 이장규씨 제공/프랑스국립해외영토자료관(ANOM) 소장자료]  

    yonglae@yna.co.kr

(끝)


1921년의 호치민(출처 위키피디아 '호치민')



한국시간 오늘(2018.9.30) 오늘 새벽 4시발 우리 공장 김용래 파리특파원이 작성한 '호찌민 감시 佛 경찰문건 대거발굴…한국 임시정부 활약상 생생'이라는 제하 기사가 엠바고 해제되어 풀렸으니, 메인 타이틀 아래 다음과 같은 부제가 네 줄이나 달렸거니와, 이는 그만큼 작성기자와 데스크가 이 자료 발굴을 의미 깊게 본다는 뜻이다. 


해방운동 막 시작한 호찌민,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인사들과 교류…사료로 첫 확인
호찌민, 김규식·황기환 등 임정 인사들 도움 받으며 베트남 독립의지 다져
佛 정보경찰 "호찌민 계획에 미리 대비하려면 한국인들 펴낸 간행물 살펴봐야"
재불 연구자 이장규씨, 佛 국립 해외영토자료관 샅샅이 뒤져 찾아내


이 기사 핵심은 다음 그 앞 줄 몇 대목이 응축한다.  


1920년 전후로 한국의 임시정부 요인들과 당시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찌민(1890~1969)이 파리에서 약소국의 설움과 독립에의 열망을 나눈 내용이 프랑스 정부자료로 처음 확인됐다.

호찌민이 젊은 시절 파리에 있던 한국 독립운동가들에게 감화돼 이들과 밀접히 교류하고, 독립투쟁의 의지를 다지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희귀자료다.

호찌민을 밀착 감시하던 파리의 경찰관은 이런 내용을 상세히 기록했고 이 문건들은 프랑스 자료관을 뒤지던 재불 한국사학자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했다.


1946년의 호치민


호치민이 한국독립운동가 진영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는 역사가 오래지 않는다. 탤런트 오지명과 한자 발음이 흡사한 호지명의 이에 얽힌 이야기는 내가 문화부 기자 초창기 시절에 다룬 기억이 있어, 내부 검색 통신망을 통해 '호치민+김태식'이라는 복합 키워드를 두들기니, 대략 10건 정도가 뜨는데, 개중 나로서는 데뷔작이라 한 만한 기사로 1998년 12월에 송고한 다음이 있어, 새삼 추억을 소환하고자 한다.   


<호치민과 초기 한국 공산주의자들>

1998.12.17 17:20:00 


(서울=연합) 金台植기자 = 베트남을 공식방문했던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지난 16일 하노이에 있는 호치민 묘소를 참배하고 헌화했다.

본명이 응엥 싱 콘인 호치민은 민족주의적 공산주의 활동에 투신해 결국 베트남 독립을 이끌어 냈다. 이 때문에 베트남 국민들에게 호치민은 한국인들이 갖지  못한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베트남이 프랑스 식민통치에 신음하던 1890년대 초반에 태어나 민족의식에 눈을 떴으며 독립쟁취를 위해 공산주자의 길을 걸었다.

반공 이데올로기의 위력이 여전한 한국의 대통령까지 참배한 이런 공산주의  혁명가 호치민이 초기 한국 공산주의자들과는 교류를 가졌는지, 그랬다면 누구하고 어디서,어떤 활동을 함께 했는지에 대해 지금까지 학계에 알려진 바는 전혀 없다.

멀리서 사상적으로 서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호치민과  한국 초기 공산주의자들이 직접 만났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최근 1920년대말 모스크바에서 찍은 케케묵은 사진 한장이 공개돼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계간 역사대중잡지인 《역사비평》 지난해 여름호는 그동안 언론노출을 극히 꺼렸던 박헌영의 아들 원경스님을 인터뷰한 글과 함께 문제의 사진을 게제했다.

여자 8명을 포함해 모두 19명의 젊은이가 3줄로 늘어선 채 포즈를 취한 이 사진에는 놀랍게도 호치민이 고려공산당 총아들인 박헌영,김단야,주세죽 등과 함께 등장하고 있다.

사진 설명문에 따르면 호치민과 박헌영 등은 각국 공산당 연합체였던  코민테른이 `동아시아 혁명가들을 육성하기 위해'에 모스크바에 설립했던 동방노력자 공산대학(국제레닌대학의 잘못인 듯)에 유학왔던 1929년 어느날 이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 사진 한장은 호치민이 적어도 박헌영,김단야를 비롯한 우리나라 초기 공산주의자들과 일정한 교류와 교분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런 사실을 증명하듯 호치민과 박헌영,김단야,주세죽 등은 이 사진이 촬영된 1929년 모두 모스크바에 체류하고 있었다.

이들 두나라 젊은 공산주의자들은 조국이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신음하고 있으며 그들 자신 또한 경찰의 검거열풍을 피해 모스크바에서 망명을 하고 있다는  데서 쉽게 동질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똑같이 공산주의 혁명의 길을 걸었던 이들 두나라 젊은이들은 죽고난 뒤 그들 조국에서 극단적인 평가가 내려지고 있다.

한쪽은 그 나라의 국부이기 때문에 외국국가 원수의 참배를 받지만 다른 한쪽은 남북한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사진있음)

(끝)


저 무렵, 한국근대사 전공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가 당시 박사를 취득하고 교수가 되기 전, 조선공산당 트로이카 연구에 매진하던 시절이라, 저와 같은 기사 작성에 그의 도움을 많이 받은 기억 생생하다. 기사가 언급한 사진을 임 교수는 2004년인지 그 어간에 출간한 박헌영 단행본에서도 써 먹었다고 기억하거니와, 다음 사진이 그것이다. 



이 사진에 연합뉴스가 붙인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임경석 교수가 집필한 `박헌영 일대기'에 수록된 관련 사진. 국제레닌학교 재학시설 각국 혁명가들과 함께 한 박헌영(앞줄 오른쪽 세번째).주세죽(가운데줄 오른쪽 세번째), 김단야(앞줄 왼쪽 두번째), 호치민(뒷줄 오른쪽 끝)이 보인다.//문화부 기사참조/문화/        2004.4 .1 (서울=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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