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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의원 유서. 연합DB



한시, 계절의 노래(197)


아들에게(示兒)


[宋] 육유 / 김영문 選譯評 


죽고 나면 만사가

공(空)이 됨을 알지만


구주(九州)가 하나 됨을

보지 못해 슬프다


왕의 군대 북벌 나서

중원 평정 하는 날에


제사 올려 네 아비에

고하는 걸 잊지 말라


死去元知萬事空, 但悲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란 말을 들어보셨으리라. 북송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금나라 장군 택리(澤利)한테 잡혀가면서 북송이 멸망한 사건을 말한다. 한족(漢族)으로서는 서진(西晉) 시절 영가의 난[永嘉之亂]으로 회제(懷帝)와 민제(湣帝)가 흉노에 잡혀간 이후 다시 겪는 민족적 치욕이다. 이후 송나라는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 高宗)가 천신만고 끝에 도성 개봉(開封)을 탈출하여 강남으로 내려가 남송을 건국함으로써 송나라 명맥을 이었다. 남송 조정은 주전파와 주화파 사이의 대립으로 편안한 날이 없었다. 당시 남송 황제 고종과 그의 간신 진회(秦檜)는 주전파 선두인 악비를 살해하면서까지 금나라와 화친을 도모하고, 그에 맞서 육유, 신기질 등 주전파는 강력한 항전을 주장했지만 소망을 이룰 수는 없었다. 현실은 주전파와 주화파 갈등 너머에 있었다. 당시 중국 북방은 티베트족 서하(西夏), 거란족 요(遼), 여진족 금(金), 몽골족 원(元) 등 막강한 유목민의 각축장이었다. 강력한 북방 민족으로서는 송나라 주전파나 주화파 모두 그들의 세력 확장에 필요한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송나라는 이들의 세력과 분쟁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처음에는 요나라에, 다음에는 금나라에, 그 다음에는 몽골족에 빌붙어 임시로 위기를 모면하려다가 멸망과 도주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역사적 전환기에는 흐름을 간파하고 대담하게 전체 국면을 이끌어나갈 대책이 반드시 필요한 법이다. 육유의 항전 시는 매우 비장하여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하지만 그것이 혹시 병자호란 이후 몇 백년간 숭정(崇禎)이란 명나라 연호를 계속 쓴 조선 지식인의 박제한 대의명분론과 겹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아비 제사에 북벌 성공을 고해달라는 육유의 유언은 실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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