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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황산벌 한 장면> 


영화 황산벌 이 한 장면(유투브 링크...1분20초 부분 이후)이야말로 나는 김유신의 진면목을 제대로 드러낸 명대사로 본다.  



신라 최초 여왕이라 해서 즉위 과정에 적지 않은 우여곡절을 빚었을 김덕만(金德曼)도 인간이면 누구나 겪는 순간에 도달했으니,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는 이젠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기 직전이었다. 이미 즉위할 무렵 제법 나이가 들었을 그가 마침내 쓰러진 것이다. 재위 16년(647) 새해가 개막하면서 몸져 눕자, 차기 왕위계승권자를 중심으로 권력 재편에 들어갔다. 신라 조정은 선덕과 같은 전철, 곧 또 한 명의 여주(女主)를 피하고자, 선덕에게서 후사를 생산하고자 안간힘을 썼으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아, 이젠 성골로는 남녀를 통털어 마지막으로 남은 그의 사촌동생 김승만(金勝曼)을 후계자로 정한 상태였으니, 이제 대권은 승만에게로 옮겨갈 예정이었다. 


한데 분란이 생겼다. 이제나저제나 국상 치를 일에 뒤숭숭한 신라 조정에 칼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여자 임금은 용납하지 못하겠다면서 지난 15년을 숨죽여 기다린 자들이 마침내 마각을 드러내고는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 일을 삼국사기 신라본기 선덕왕 말년 조에서는 "봄 정월, 비담과 염종(廉宗) 등이 '여주(女主)로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는 기치를 내세우며 반역을 꾀하여 병사를 일으켰으나 이기지 못했다. 8일에 임금이 돌아가시니 시호를 선덕(善德)이라 하고 낭산(狼山)에다 장사지냈다(春正月 毗曇廉宗等 謂女主不能善理 因謀叛擧兵 不克 八月 王薨 諡曰善德 葬于狼山)"고 하고, 선덕의 죽음과 더불어 그 관앞에서 즉위했을 진덕왕본기 원년 조에다가 "정월 17일에 비담을 목 베어 죽였는데, 그에 연루되어 죽은 사람이 30명이었다"고 했을 뿐이다. 실로 간단히 언급했지만, 세상 모든 기전체 본기는 저와 같아 5.16군사쿠데타나 12.12사태 역시 그에 맞추어 쓴다면, '장군 박정희가 모반을 꾀해 정권을 전복했다'거나 '장군 전두환이 하극상을 일으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를 체포, 구금했다"고 했으리라. 


<반란군 진원지 명활성>


그럼에도 우리는 이 허심, 혹은 지극히 불친절한 듯한 이 기술에서 이 군사쿠데타가 미친 여파가 자못 어떠했을지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으니, 그에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 자가 물경 30명이라는 사실이다. 쿠데타는 모두에게 기회였을 것이나, 비담과 염종 편에 붙은 자들에게 유일한 비극은 그들이 졌다는 사실이다. 이겼더라면? 역사가 바뀌어 그들이 권력 정점에 섰을 것이니 말이다. 


아무튼 이 사건이 미친 적지 않은 파장에 대한 논급을 삼국사기는 다른 곳으로 미루었으니, 그 군사 쿠데타를 진압한 최고사령관이 김유신이요, 더구나 그런 김유신은 김부식이 생각하기에 인간 이상의 롤 모델이라 해서, 삼국사기 전체 50권 중 3권을, 그것도 10권에 지나지 않는 열전 중 초반부 3권을 몽땅 그와 그의 후손 얘기로 채운 김유신 열전을 배열하는 파격을 선보인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 어떤 왕조차도 이런 대접을 받은 이가 없다. 재위 기간 일통삼한을 이룩했다 해서 그 위대한 군주라는 문무왕 김법민만 해도 고작 본기가 상·하 두 권이요, 태종무열왕은 다른 왕들과 뭉뚱거려 꼴랑 한 권인데다, 백제 의자왕과 고구려 보장왕은 나름 파격이 있어 본기 두 권씩을 배치했지만, 이는 700년 거목들이 각기 쓰러지는 시대에 마침 재위한 왕들이었던 까닭이었지, 그가 특별히 의자와 보장을 높게 친 이유는 아니었다. 


595년 생인 김유신은 쿠데타 발발 당시 이젠 53살, 노장 반열에 접어들었으며, 그가 차차기 대권 후보자로 점찍은 김춘추는 44살이었다. 이 무렵 김유신 직책은 확인이 쉽지 않다. 본기와 열전을 보면 선덕왕은 재위 11년(642), 대야성 전투 대패라는 충격파와 그에 따른 백제의 서쪽 변경을 통한 백제 침탈에 대비하고자, 김유신을 수도 서부 지역 방어 총사령관에 해당하는 압량주 도독으로 삼는다. 그는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라 군사권까지 틀어쥔 도독이었다. 그러다가 2년 뒤인 동왕 13년(644) 가을 9월에는 대장군이 되어 백제 정벌에 나서 일곱 성을 탈취하는 대전과를 올린다. 대장군은 중국과는 달리 상설직이 아니라 신라사를 보건대 임시직이지만, 이로써 보건대 이미 김유신이 중앙무대로 복귀했음을 본다. 이 전쟁은 볼짝없이 대야성 전투에 대한 응징이었다. 이를 허심히 보아넘길 수 없는 까닭은 이미 전쟁을 김유신 일파가 좌지우지하게 되었다는 신호탄인 까닭이다. 629년 낭비성 전투 영웅으로 떠오른 김유신은 출세가도를 달려 이젠 선덕왕 시대가 중기를 넘어 말년으로 치달으면서, 군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내기 시작했으니, 역사는 그를 기다린 것이었다. 


<명활성>  


하지만, 대야성 전투는 신라와 백제로서는 사활을 건 전쟁의 시대를 예고했으니, 그에 대한 저 응징에 백제 역시 가만 있을 리 없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변경을 치고 들어왔으니, 선덕왕본기 14년(645) 조에서는 이해 봄 정월에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아직 왕을 뵙지도 못했을 때 백제의 대군이 다시 변경을 노략질하니, 임금이 (다시) 유신에게 명하여 막게 하므로 (유신은)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정벌하러 가서 그들을 격파하고 2천 명의 목을 베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이 전쟁 출전과 승리, 그리고 귀환이 대략 2개월 정도 소요되었던 듯하거니와, 신라 왕경에서는 대대적인 전승 환영식 개최를 준비했지만, 귀환한 김유신을 기다린 것은 화려한 환대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침략 급보를 알리는 봉수 파발이었다. 다만, 이때는 선덕을 뵙고 전공을 보고하기는 했으니, 같은 해 3월 조 선덕왕본기에서는 "유신이 돌아와 왕에게 아뢰고 아직 집에 돌아가지 못하였을 때, 백제가 또다시 침공했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다. 임금은 일이 급하다고 여겨 유신에게 이르기를 '나라의 존망이 그대 한 몸에 달렸으니 노고를 꺼리지 말고 가서 그들을 도모해 주시오' 하니, 유신이 또다시 집에도 들르지도 못하고 밤낮으로 병사를 훈련하고는 서쪽으로 행군하는 길에 자기 집 문앞을 지나게 되어 온 집안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그를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으나 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갔다"고 했으니, 이런 일이 실제 있었는지, 혹은 김유신 미화 과정에서 생겨난 우화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김유신으로는 집에서 편안한 잠 하루 자 본 적 없는 전장의 나날들을 보내야만 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전과들이 이미 그 당대에 김유신 신화를 구축하는 밑거름이었으니, 김유신으로서도 결코 손해볼 것 없는 게임이었다. 


백제와 사투를 벌이는 이 해 겨울 11월, 선덕은 이찬 비담(毗曇)을 상대등으로 삼는다. 상대등은 아무리 내가 잘봐주려 해도 꿔다논 보릿자루에 지나지 않아 문재인 정부 아래 이낙연 국무총리나 국회의장 정세균 정도에 지나지 않는 명예직이라, 대체로 나이가 70 안팎 뇐네 중신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설치한 관직이다. 그 자리에서 이렇다 할 사고 치지 말고, 편안히 국가 원로 대접받고, 높은 연봉이나 꼬박꼬박 챙겨가시오라 해서 마련한 명예직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상대등이 그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거니와, 다름 아니라, 태종무열왕 시대에 상대등이 된 김유신은 결코 이럴 수가 없어, 이후 계속 권력의 정점에 섰다. 김유신이 함유한 여러 역사적 의의 가운데 허울뿐인 상대등을 실질로 만든 주역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명활성>


비담은 그 계보라든가 다른 행적을 엿볼 자료가 없어, 그가 쿠데타를 감행한 진정한 이유를 알 수는 없다. 그 자신이 직접 왕이 되고자 했는지, 혹은 그 자신이 옹립하고자 하는 왕위계승권자가 따로 있었는지도 알 수 없다. 그와 결탁한 다른 이로 염종(廉宗)이 있는데, 이 염종 역시 그렇다. 대체로 이런 쿠데타는 두 번째 주모자로 등장하는 이가 실질적인 기획자인 일이 많으니, 나는 아마 이 쿠데타 역시 염종이 비담을 앞세워 일으킨 정변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따라서 이 본질을 들여다 보는 핵심 키워드가 염종이라 보지만, 그걸 추적할 만한 단서가 현재로선 남아있지 않으니, 환장할 뿐이다. 


아무튼 이렇게 상대등이 된 비담이 선덕이 드러눕고 다시는 회생할 기미가 없자, 마침내 반란의 기치를 내거니, 이를 김유신 열전 上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으로는 나라를 다스리지 못한다 하면서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위하려 했다.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했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했으며,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무르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이 무렵 저 유명한 별똥 사건이 일어나니, 이것이 월성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만다. 같은 김유신 열전 증언이다. 


한밤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이 사병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주(女主)가 패할 징조이다." 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며 어찌할 줄을 몰랐다. 이에 유신이 왕을 뵙고 아뢰었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했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구족(族)을 죽였다. 


<명활성>


김유신은 이 점이 아직 제대로 부각하지 않으나, 병가(兵家)의 대가였으며, 천문(天文) 역시 일가를 이룩한 전문가였다. 유신을 단순한 무장으로 알아서는 안 된다. 그는 책을 팽개치고 무술만 익힌 사람이 아니었으니, 전두환의 결기에다가 박정희의 머리를 얹힌 인물이다. 그의 어린시절, 혹은 젊은시절은 입산수도만이 전부였던 듯하나, 천관녀 설화가 증언하듯이,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글을 읽었고, 누구보다 그렇게 습득한 탁상의 지식을 현실에 적용할 줄 알았던 사람이다. 


이 증언에서 유의할 점은 김유신이 아뢴 왕이 선덕이 아니라 진덕이라는 사실이다. 이 무렵 선덕은 이미 사망했거나, 살아있다 해도 보고를 받을 형편이 아니었으니, 신주(新主)였다. 김유신은 비담의 난 때 그 진압 총사령관이었다. 총사령관으로서 그 진압을 이끌었으니, 이제 신라 사회에서 그 어떤 누구도 김유신을 능가하는 권력을 쥔 사람이 없었다. 낭비성 전투 이래 20년 만에, 마침내 김유신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덧붙이건대 이 사건이 화랑세기에도 편린을 드러내니, 24세 천광공(天光公) 전 다음 대목이 주목을 끌거니와, 


그때 국사(國事)가 점차 어려워졌다. 공과 여러 낭두(郞頭)가 낭도(郎徒)를 거느리고 친히 활 쏘고 말달리기를 익혔는데, 모인 자들 중에서 뽑아서 병부에서 보충하였다. 공이 5년간 풍월주 지위에 있는 사이에 낭정(郎政)은 무사(武事)로 많이 돌아갔다. 선덕제(善德帝)가 병이 몹시 위독해지자,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모반했다. 유신공(庾信公)이 신주(新主·진덕)를 받들어 전쟁을 독려했다. 그때 서울[京師]의 군대가 적어 공이 낭도를 모두 동원해 먼저 그 진으로 돌격하니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되었다. 공은 그 공으로 발탁되어 호성장군(護城將軍)이 되었다. (이에) 풍월주 지위를 부제(副弟)인 춘장(春長)한테 전해 주고 오로지 왕사(王事)에 힘써 변방에 나가서는 장군이 되고 조정에 들어와서는 재상이 되며[出將入相] 많은 공적이 있었기에 증흥 28장(二十八將)의 한 사람이 되었다. 가히 공경할 만하지 않은가? 


난세를 영웅을 부르는 법이다. 이 난세가 김유신에게는 권력의 정점이라는 자리를 앉혔으며, 천광 역시 낭도들을 동원해 공을 세움으로써 출세가도의 발판을 마련했으니 말이다. 


다음 연재에서는 진덕왕 시대 김유신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만나러 우리는 남산 오지암이라는 곳으로 행차하고자 한다.  


<명활성>


 

  1. 연건동거사 2018.04.15 10:14 신고

    저 삼국시대의 잘 짜여진 석성을 보노라면 저 시대의 백성동원 능력에 대해 경악합니다. 적어도 저 시대는 왕국내의 사람들 모두를 정확히 파악하는 행정수준에 도달한 적이 있었다고 짐작해 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선시대에도 도달하지 못한 수준이라고 할수 있는데.. 한반도 남부 일대에 저시대에 고구려 신라 성들 보면 대단한 수준이라는 생각을 해요.

  2.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5 신고

    얼마나 후달렸겠어요

  3.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6 신고

    군대가는거보다 노동력 징발이 더 두렵지요

  4. 한량 taeshik.kim 2018.04.15 10:56 신고

    왜? 밥을 안주자나요

  5. 연건동거사 2018.04.15 14:40 신고

    성 하나만 봐도 정말 저 시대는 이전과 다른 시대에요.. 고려시대 천리장성을 쌓았다고 하지만 저렇게 단단히 못쌓았을거에요. 성의 짜임새를 보면 임란 이후의 일본성을 연상시키는 측면이 있을 정도입니다.

  6. 연건동거사 2018.04.15 14:41 신고

    저 시대가 얼마나 긴장에 찬 시대였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7. 연건동거사 2018.04.18 22:23 신고

    한 사람 열전을 권을 나누어 쓰는 경우는 제 기억으로 중국에서도 거의 못본것 같은데요. 김샘께선 보신적 있으세요.

  8. 연건동거사 2018.04.18 22:24 신고

    제왕의 본기를 권을 나누는 경우는 많이 본것 같습니다. 상지상, 상지중, 이런식으로.. 하지만 신하의 경우는... 제 기억에 권이 바뀌는 경우 거의 못본것 같은데요. 과문한 탓인지?

‘씨내리’ 남자 셋 들이고도 임신 못한 선덕여왕

[중앙선데이] 입력 2016.09.18 00:46 | 497호 23면 

  

“신이 듣기에 옛날에 여와씨(女媧氏)가 있었으나, 그는 진짜 천자가 아니라 (남편인) 복희(伏羲)가 구주(九州)를 다스리는 일을 도왔을 뿐입니다. 여치(呂治)와 무조(武?) 같은 이는 어리고 약한 임금을 만났기에 조정에 임해 천자의 명령을 빌린 데 지나지 않아, 사서에서는 공공연히 임금이라 일컫지는 못하고 다만 고황후(高皇后) 여씨(呂氏)라든가 즉천황후(則天皇后) 무씨(武氏)라고만 적었습니다. 하늘로 말한다면 양(陽)은 강하고 음(陰)은 부드러우며, 사람으로 말한다면 남자는 존귀하고 여자는 비천한 법이니, 어찌 늙은 할망구(??)가 규방을 나와 국가의 정사를 처리하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럼에도) 신라는 여자를 추대하여 왕위에 앉히니 이는 실로 난세(亂世)에나 있을 법한 일이라, 그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하겠습니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암탉이 새벽에 먼저 울면 집안이 망한다(牝鷄之晨)’고 하고, 『주역(周易)』에는 ‘암퇘지가 두리번두리번 거린다’고 했으니,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 최초의 여주(女主)인 신라 제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이 재위 16년째인 647년 봄 정월 8일에 죽은 사실을 『삼국사기』가 적으면서 그 편찬 총책임자인 김부식이 덧붙인 역사평론인 사론(史論) 전문이다. 아주 혹독한 평가다. 한데 같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에는 원래 이름이 덕만(德曼)인 그가 아버지 진평(眞平)을 이어 즉위한 사실을 전하면서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하니 왕이 죽고 아들이 없자 나라 사람들이 덕만을 왕으로 세우고 성조황고(聖祖皇姑)라는 칭호를 올렸다”고 해서 이율배반의 평가를 한다. 성조황고는 그 의미가 확연하지는 않지만, 요컨대 성스러운 덕성을 지닌 후덕한 어머니 혹은 할머니 같은 존재 정도를 의미한다.

  

여자가 군주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불만은 당시 신라 내부에서도 팽배했던 듯하다. 국제사회에서 빈축을 사기도 했던 모양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선덕이 여자라 해서, 당 황실에서 배필을 골라줄 테니 정치는 그 남자한테 맡기라 빈정대기도 했다. 선덕이 죽음을 앞두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이들이 왕좌 탈취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니, 이해 봄 정월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상대등(上大等) 직위에 있던 비담(毗曇)이 염종(廉宗)과 함께 일으킨 내란이 그것이다. 비담이 내세운 논리가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였다. 아마도 비담은 선덕이 곧 죽을 것이 확실한 와중에 그 후임을 같은 여자인 진덕(眞德)으로 확정하자 다시 여자가 임금이 돼선 안 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권좌를 탈취하고자 했던 듯하다. 

  

비담 “여왕은 나라 못 다스려” 난 일으켜하지만 혹평과는 달리 선덕은 매우 똑똑한 여자였던 듯하다. 즉위 당시 나이가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중년을 넘어선 것만은 확실하다. 김부식 사론에선 그를 ‘늙은 할망구(??)’라 했고, 그가 즉위하자 신라사람들이 ‘성조황고(聖祖皇姑)’라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선덕은 노련하면서도 덕을 갖춘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선덕의 총명함을 말해주는 일화가 나란히 등재돼 있다. 특히 『삼국유사』 기이(紀異)편에 수록된 이야기는 아예 제목부터가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 다시 말해 선덕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이다. 두 가지는 부산(富山) 아래 여근곡(女根谷)이라는 곳으로 백제군이 몰래 침습한 걸 알아내 그들을 몰살하고, 자신이 죽을 날을 미리 알았다는 것이다. 선덕왕이 예지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일화라 하겠다. 나머지 하나가 모란 사건이다. 먼저 『삼국사기』 선덕왕본기 첫 대목에 수록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앞선 왕(진평왕-인용자) 때 당나라에서 가져온 모란꽃 그림과 그 꽃씨를 덕만에게 보이니, 덕만이 말하기를 ‘이 꽃이 비록 지극히 요염하기는 하지만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입니다’고 했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꽃을 그렸으나 나비가 없는 까닭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무릇 여자에게 국색(國色)이 있으면 남자들이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벌과 나비가 따르게 마련입니다. 이 꽃은 무척 아름다운데도 그림에 벌과 나비가 없으니 이는 향기가 없는 꽃임에 틀림없습니다’고 했다. 그것을 심었더니 과연 말한 바와 같았으니 미리 알아보는 식견이 이와 같았다.”

  

이는 선덕이 진평왕의 공주이던 시절의 일화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선덕왕 지기삼사’엔 이렇게 적혀있다.

  

“당 태종이 모란을 세 가지 색깔, 즉 붉은색·자주색·흰색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 씨앗 석 되를 보내왔다. (선덕)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하기를 ‘이 꽃은 틀림없이 향기가 없을 것이오’라고 했다. 이에 명하여 뜰에다 (그 씨를) 심게 했다가 그것이 피고 지기를 기다렸더니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중략) 이로써 대왕이 신령스럽고 신령함을 알게 되었다. 당시에 뭇 신하가 왕께 아뢰기를 ‘어떻게 (모란) 꽃과 개구리 두 사건이 그렇게 될 것을 아셨습니까?’ 라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꽃을 그렸으되 나비가 없으니 거기에 향기가 없음을 알았소. 이는 곧 당나라 황제가 과인에게 배필이 없음을 놀린 것이오.’ (중략) 이에 뭇 신하가 모두 그의 성스러운 지혜에 감복했다. (모란) 꽃 세 가지 색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선덕·진덕(眞德)·진성(眞聖)이 그들이니 당나라 황제도 미래를 아는 명석함이 있었다.”

  

『삼국사기』와 비교해 몇 가지 미세한 차이점을 지적하면, 우선 이 사건이 발생한 때가 선덕이 왕으로 있던 시절이다. 또 『삼국유사』 쪽 기술이 훨씬 생생하며 문학적이다. 이런 차이는 참조한 원전이 각기 달랐을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원전을 참조하면서 이를 전재하는 과정에서 현재와 같은 차이가 빚어졌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 사건이 역사성을 반영한 것일까. 필자는 이 일이 선덕여왕 혹은 선덕공주 시대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한다. 그 근거는 이야기의 소재로 등장하는 모란 때문이다. 공주 시절이건, 여왕 시절이건 이 시대에는 모란이 등장할 수 없었다. 모란은 이보다 대략 100년 뒤에나 등장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모란 씨를 보내왔다고 하는데, 이세민 시대에 중국에 모란은 없었다는 역사성의 차이를 어찌 증명할 것인가.

  

중국사에서 볼 때 당 제국의 수도를 중심으로 모란이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진평왕, 혹은 선덕여왕 시대보다 무려 100년이나 뒤인 서기 750년 무렵 이후다. 아무리 일러도 730년 이전이 될 수 없다는 얘기다. 중국의 관련 기록을 모조리 검토하면 모란은 중국 대륙 북부 사막 지역에서 이 무렵에 들어왔으며, 더구나 그런 모란이 광적인 열풍을 일으킨 것은 800년 이후, 백거이가 이 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떠오른 무렵이다. 실제 중국 청나라 때 당나라 시인 2200여 명이 남긴 시 4만8900여 수를 묶은 방대한 시집 『전당시(全唐詩)』를 훑어봐도 당 현종 개원 연간(713~741) 이전에는 모란을 소재로 하는 시가 단 한 편도 등장하지 않는다. 모란이 그 무렵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각종 기록을 봐도 이 꽃은 개원 연간에 장안에 비로소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니 진평왕 시대에 당나라에서 신라에 모란씨나 모란 그림을 선물로 보낼 수는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화랑세기』에 여왕 둘러싼 ‘삼서지제’ 소개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무엇을 모티브로 한 것일까. 이 점을 해명하기 위해선 이 이야기가 선덕왕(혹은 선덕공주)을 감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꽃이 피었는데 향기가 없고, 그래서 나비가 날아들지 않는다거나 열매를 맺지 않았다는 것은 남자가 없거나, 남자가 있어도 자식, 특히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은유에 다름 아니다. 각기 다른 세 가지 색깔의 모란씨를 심었지만 향기가 없다는 것은 혹시 선덕왕에게 세 명의 남자가 있었지만 누구에게서도 자식을 두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의문의 실마리는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필사본 형태로 남긴 『화랑세기(花郞世紀)』에서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는 우두머리 화랑을 역임한 역대 풍월주 32명에 대한 전기물이다. 13세 풍월주 용춘공(龍春公) 열전을 보면 다음 왕위를 이을 아들을 생산하지 못한 선덕여왕을 둘러싸고 벌어진 ‘삼서지제(三?之制)’라는 제도가 다음과 같이 흥미롭게 소개되고 있다.

  

“(선덕) 공주가 즉위하자 (용춘) 공을 지아비로 삼았지만 공은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스스로 물러나고자 했다. 이에 뭇 신하가 삼서(三?)의 제도를 의논하여 흠반공(欽飯公)과 을제공(乙祭公)으로 하여금 왕을 보좌토록 했다. (용춘) 공은 본디 (아버지인) 금륜(金輪)이 색(色)에 빠져 폐위된 일을 슬퍼하여 성품이 색을 좋아하지 않아 왕에게 아첨할 생각이 없었기에 물러날 뜻이 더욱 굳어졌다. 선덕은 이에 정사를 을제에게 맡기고 공에게 물러나 살도록 했다. (물러난) 공은 천명공주(天明公主)를 처로 삼고는 태종(太宗·김춘추)을 아들로 삼았다.”

  

선덕왕은 아들을 두고자 용춘·흠반·을제 세 명의 남자를 잠자리로 불러들였으나, 모두 임신에 실패했다. ‘삼서지제’는 여자가 적통 아들을 두기 위해 남자를 세 명까지 불러들이는 제도였던 것이다. 이들은 정식 남편이 아니라 씨내리 남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러니 이 실제 사건을 토대로 해서 나중에 모란 이야기로 둔갑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김태식 국토문화재연구원 연구위원 ts14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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