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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은 산하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발표 형식을 빌려 지난 4월 익산 쌍릉(대왕릉)을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하는 과정에서 수습한 인골 조각들을 분석한 결과 이에서 남성 노년층의 신체 특징과 병리학적 소견을 확인했다고 최근 발표했다. 이런 성과를 토대로 부여문화재연구소는 "그동안 쌍릉은 백제시대 말기의 왕릉급 무덤이며, 규모가 큰 대왕릉을 서동 설화의 주인공인 무왕의 무덤으로 보는 학설이 유력했는데, 이번 인골 분석 결과도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과학적 분석 결과를 토대로 했다는 이런 발표는 곧 대왕릉이 백제 무왕의 무덤임을 사실상 확인한 것인양 하는 것처럼 인식되어, 실제 이를 토대로 하는 관련 언론 보도에서는 그리 보도된 성향이 강했다. 




삼국시대 고대 한반도 왕릉급 무덤 중에서도 쌍릉은 비교적 일찍 모습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묘한 지위를 점한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보면, 쌍릉은 고려 충숙왕 시절인 서기 1327년 도굴되었다고 한다. 다만 이때는 이 무덤이 고조선 마지막 왕이라는 준왕이나 백제 무왕이 묻힌 곳이라는 양설이 병존했다. 그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 내가 자세히 정리한 글이 있으니 궁금하신 분은 아래 제목 두 글을 클릭했으면 한다.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4편 고려 충숙왕 시대의 쇼생크 탈출 - 금마군 무강왕릉 도굴범, 감옥을 탈주하다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5편 기자조선과 백제, 그 괴이한 조우 “미륵사 석탑은 백성의 고혈 짜낸 죄악”


이런 쌍릉을 1917년 조선총독부가 조선고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재조사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당시 조사성과 발표라, 총독부는 1920년 《고적조사보고서》에 단 13줄에 걸치는 기술 내용과 관련 사진 2장, 관련 도면 2장만으로 정리한 것이 전부였다. 이를 조사한 책임자인 야쓰이 세이이치는 그에서 훗날 더욱 자세한 보고를 기약했지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역시 이 블로그 다음 글을 참조하라. 


[김태식의 독사일기(讀史日記)] 6편 조선총독부가 빗장을 연 쌍릉 1917년 야쓰이 세이이치 조사, 목관 발견



아무튼 이러한 익산 쌍릉을 원광대가 지난해 지난해 8월에 재조사를 시작했다. 멀쩡한 무덤을 왜 파제끼느냐 하는 의구심이 없지는 않았고, 나 역시 그런 생각을 여전히 지닌 사람 중 하나다. 그럼에도 그 성과가 궁금하기는 어쩔 수 없다. 멀쩡한 무덤을 파제낄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른바 그것을 파야 하는 논리다. 이에 대해 이를 추진한 원광대 마백연구소는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사업" 일환임을 내세웠다. 나는 여전히 이 논리를 찬동하지 못한다. 백제왕도 핵심유적 보존관리가 곧 그 발굴조사를 말함은 아닐 것인 까닭이다. 


이에 이번 조사는 실제 발굴은 마백연구소가 진행하는 한편, 익산시와 공동이라는 형식을 취했으며,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 산하 기관 중에서도 이 지역을 관장하는 부여문화재연구소 역시 공동조사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민간한테 전적으로 발굴조사를 맡기기에는 미심쩍은 부분이 없지는 않다고 생각한 까닭인지, 혹은 국가가 개입해야 할 부분이 없지는 않으니 그리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특히 인골 수습은 조사전에 이미 기대한 까닭에, 그 조사를 수행할 책임 기관이 있어야 했기에, 그런 부분을 주로 국가기관인 부여문화재연구소가 맡아 수행한 것이라고 나는 이해한다. 




앞서 나는 100년 전 조선총독부 조사성과가 극히 일부분만 공개되었다고 했지만, 실은 그 성과 중 상당수는 이미 드러난 마당이었으니, 그건 다름 아니라 저때 발굴책임자 야쓰이 세이이치가 남겨놓은 조사기록 원본을 제국 일본이 패망하면서 고스란히 들고 튄 일본인 고고학도가 있고, 그 고고학도가 조사로부터 60년이 지난 뒤에야 그것을 정리해 냈기 때문이다. 나아가 1917년 조사 결과 수습한 관재(棺材) 조각과 토기 등의 유물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을 인수해 곧 출범한 국립박물관에 고스란히 수장된 까닭이다. 지금은 그 유물 대부분은 국립전주박물관에 소장 및 전시 중인 상태다. 



당시 조사성과를 보면, 이미 고려 충렬왕 시대에 극심한 도굴 피해를 본 쌍릉에서는 소왕릉과 대왕릉 모두 적지 않은 인골이 산재했음을 알 수 있거니와, 그 인골 처리 여부가 관심이었지만, 이번 대왕릉 재조사 결과 그에서 수습한 인골 파편들은 나무 상자를 짜서 그 안에 몰아넣고, 그것을 석실 끝부분 관대(棺臺) 위에다가 안치한 것으로 드러났다. 천수백년, 아마도 천400년이 지났을 그 인골 파편들은 당시 발굴조사를 전하는 사진이나 도면 자료와 비교할 적에 그 당시 상태로 나무 상자 안에 남아있었다. 이 인골 파편들을 대상으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는 분석을 실시한 것이며, 그 중간 성과를 이번에 발표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부여문화재연구소는 보도자료를 통해 "이 인골 자료가 무덤의 주인과 연결된다면, 백제 무왕의 능인지를 결정짓는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고고학과 법의인류학, 유전학, 생화학, 암석학, 임산공학, 물리학 등 관련 전문가들을 모두 참여시켜 인골의 성별, 키, 식습관, 질환, 사망시점, 석실 석재의 산지, 목관재의 수종 등을 정밀 분석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에는 다른 기관도 참여했으니 가톨릭의대 응용해부연구소, ㈜라드피온, 美베타연구소, ㈜퓨전테크놀로지가 그들이라고 한다. 뭐 상당히 거창한 느낌을 주는 대규모 인골 분석 프로젝트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협박성 기관 나열이라는 느낌도 강하지만, 그렇다고 겁 먹을 필요는 없다. 알고 보면 암 것도 아니다. 



조사 결과 인골 파편은 모두 102개 조각으로 드러났다. 이를 분석한 결과 이들 인골 파편들은 한 사람 개체분일 것으로 판단된다. 성별로는 남성으로 드러났다고 한다. 그 근거로 위팔뼈 안쪽위관절융기 돌출양상을 보여주는 팔꿈치 뼈 각도와 발목뼈 중 하나인 목말뼈 크기, 먼쪽 뼈 부위인 넙다리뼈 무릎 부위 너비로 볼 때 남성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넙적다리뼈 최대 길이를 추정해 인골 주인공 키를 산출하니, 161㎝에서 최대 170.1㎝로 추정됐다. 그러면서 연구소는 "훨씬 후세대에 속하는 19세기 조선시대 성인 남성의 평균 키가 161.1㎝인 것을 고려한다면 비교적 큰 키"라고 말했다. 내가 순전히 기억에 의존해 자신이 없지만, 19세기 조선시대 남성 평균키는 164㎝가량이었던 듯하다. 


이를 참조할 때, 최대 171㎝ 키는 고대인으로는 큰 편에 속하거니와, 마침 《삼국사기》에 남은 무왕에 대한 기록을 연구소는 첨부해 이들 인골 주인공이 무왕일 가능성을 높여준 것으로 보강하는 자료로 삼았으니, 그에 이르기를 무왕은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며, 기상이 걸출하다’라고 했다.  



나아가 연구소는 나이를 추정한 결과 "최소 50대 이상의 60~70대 노년층으로 봐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목 울대뼈가 있는 갑상연골에 골화가 상당히 진행됐고, 골반뼈 결합면은 표면이 거친 데다 작은 구멍이 많이 관찰되며, 불규칙한 결절이 있는 점이 그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골화란 노화로 연골이나 인대가 단단하게 굳어 뼈처럼 바뀌는 현상을 말하거니와, 이런 현상이 상당히 진행됐다는 것은 그 인골 주인공이 늙어서 죽었음을 말해준다는 것이다. 


나아가 인골에서는 남성 노년층에서 발병하는 등과 허리가 굳는 증상(광범위특발성뼈과다증), 다리와 무릎 통증(정강뼈와 무릎뼈의 척추외골화)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는 소견도 나왔다. 더불어 옆구리 아래 골반뼈(엉덩뼈능선)에 숫자 1(∣) 모양으로 골절되었다가 치유된 흔적이 있다고 한다. 어긋나지 않아 타격보다는 낙상 등에 따른 현상으로 판단된다는 것이다. 이는 치료기간이 3개월 정도 되므로, 이것이 직접 사인이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견해도 연구소는 덧붙였다. 


더불어 연구소는 인골에 대한 연대 측정도 시도했다. 가속 질량분석기(AMS, Accelerator Mass Spectrometer)를 이용한 정강뼈 시료를 방사성탄소연대측정한 결과, 보정연대가 서기 620~659년으로 산출되어 인골 주인은 7세기 초중반 어느 시점에 사망한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뼈가 심하게 부식된 상태라 유전자 분석은 쉽지 않았다. 다만 추출한 콜라겐 탄소 안정동위원소 분석을 통해 인골 주인공이 벼, 보리, 콩 등의 섭취량이 많았음을 알 수 있었고, 질소 안정동위원소 분석 결과에서는 어패류 등의 단백질 섭취 가능성도 확인했다고 한다.


쌍릉은 대왕릉이나 소왕릉 모두 질이 좋은 화강암으로 무덤방을 조성했다. 이들 화강암은 어디에서 조달했을까? 이에 대한 분석도 있었다. 이와 관련해 연구소는 "익산은 질 좋은 화강암 산지로 유명한데, 석실 석재는 (무덤에서) 약 9㎞ 떨어진 함열읍에서 채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결과를 제시했다. 


더불어 관재 역시 어떤 나무인지가 관심거리다. 이에 아마 내 기억이기는 하나, 식민지시대 조사 결과 일본열도 특산 금송이라는 분석결과가 이미 있었다고 안다. 한데 이번 분석에서도 역시 "수령이 400년 이상으로 알려진 관재(棺材)는 늦어도 7세기 전반 이전에 벌목된 것을 가공한 것입니다. 목관은 최고급 건축˙가구재인 금송으로 제작했으며, 이번에 발견된 유골함은 잣나무류의 판자로 만들었습니다"라고 한다. 


연구소는 "최신 공학기술이 반영된 이번 연구에서는 뼈의 3차원 입체(이하 3D) 모형화와 3D 프린팅을 통해 여러 분야에서 활용이 가능한 디지털 자료도 구축했습니다"고 덧붙였다. 


이런 분석결과를 토대로 연구소는 다음과 같은 중간 결론을 제출했다. 


▲ 600년에 즉위하여 641년 사망했다는 무왕의 재임 기록으로 보아 10대나 20대에 즉위한 경우 무왕의 사망 나이가 남성 노년층으로 추정되는 쌍릉의 인골 추정 나이와 비슷하며, ▲ 사망 시점이 7세기 초반부터 중반 즈음이라는 인골 분석 결과는 익산을 기반으로 성장하여 같은 시기에 왕권을 확립한 백제 무왕의 무덤이라는 역사적 가능성을 한 걸음 더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진행 중인 대왕릉 보완조사와 앞으로 진행할 소왕릉 조사˙연구 등을 통해 익산 쌍릉의 성격과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가를 규명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또한, 추가적인 인골 심화연구, 백제 후기 왕릉급 고분의 구조와 특징 등에 대해 중장기 연구계획을 수립하여 백제 왕도의 역사성 회복을 위해 지속해서 노력할 계획입니다"고 말한다. 


상대가 익산 쌍릉이라, 더구나 그 무덤 주인공이 오랜기간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무덤이라는 전설 혹은 기록이 있는 무덤이라 이미 극심한 도굴피해를 봤으며, 더구나 100년 전에 정식 발굴조사가 이뤄진 마당에 그 찌꺼기를 건져 이만한 분석결과를 얻었다는 점은 분명 상찬할 만하다. 모든 고고학 발굴조사가 이런 식으로 이뤄졌으면 하지만, 그리될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과학 분석 결과를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그에 대한 소양이 부족하기 짝이 없는 고고학이나 고대사를 비롯한 소위 인문학에서는 그런 경향이 더욱 다대하다. 그렇지만 과학 역시 인문학이 그렇듯이 정답을 제시하는 학문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저질러진 각종 역사상 폭거가 증언한다. 


이 대왕릉 분석결과만 해도, 그 직전 국립전주박물관이 주도한 분석결과를 당장 뒤집는다. 전주박물관에서는 치아 분석 결과를 토대로 대왕릉 피장자가 여성 운운하는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나는 '이빨 고고학'을 증오하곤 했으니, 그것이 저지른 패악은 무령왕릉 발굴에서도 이미 있었다. 무령왕 부부를 합장한 공주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에서는 이빨 한 점이 수습되었거니와, 그 정확한 발견 위치도 모르는 이 이빨을 치과의사가 분석한 결과 30대 젊은 여성이라고 주장했거니와, 그런 주장이 버젖이 발굴보고서에도 실리는 바람에 지난 40년간 무령왕 마누라는 30대 후처로, 젊어서 죽었다는 신화가 한동안 횡행했으니, 나는 그 부당성을 이미 20년 전부터 주장했거니와, 그런 부당성 주장은 그것이 정식으로 뒤집어져서 이제는 한시대의 유물로 뒤켠으로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번 연구성과를 깡그리 부정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그 분석 자세와 분석 결과는 나름 탄탄함을 자랑한다. 다만, 이 시점에서 하나 확실히 할 것은 이런 분석결과에도 대왕릉 주인공이 무왕임을 확정한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대왕릉이 그 무덤 양식이나 규모, 목관 관재 등을 종합으로 고려할 적에 사비도읍기 백제시대 왕릉 혹은 그에 준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 묻힌 무덤임을 의심할 수는 없다. 다만, 이번 조사까지 종합해 지금까지 확실한 점은 첫째, 이곳에 묻힌 사람이 사비시대 왕 혹은 그에 준하는 권력자임에는 틀림없고 둘째, 그 무덤이 조성된 시기는 7세기 초중반 어느 무렵이라는 두 가지 정도라는 사실이다. 그에 더해 성별로는 남성이 묻혔을 가능성이 크고, 그는 적어도 50~60대에 죽었고, 키는 큰편이었다는 점도 보강할 수 있겠다. 


그런 점에서 이번 연구성과가 대왕릉 주인공이 백제 무왕일 가능성을 한층 높여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증거들은 방증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범위를 좁혔을 뿐이다. 




The tomb of King Mu (who reigned from 600 to 641), the 30th monarch of the Baekje Kingdom (18 BC~660) has opened its door in 100 years. Archaeologists have unearthed the tomb in Iksan, Jeollabukdo Province. The excavations revealed a flat rectangular stone chamber with a short corridor inside the mound 20 meters in diameter and 5 meters high. The chamber built of granite slabs, and hexagonal stones as corbels to support the ceiling is 3.78 meters long (from north to south), 1.76 meters wide (from east to west), 2.25 meters high (from bottom to ceiling).  At the center is a flat rectangular granite coffin standing on top of which pieces of a wooden coffin were found in excavations in 1917. The short corridor leading into the chamber was blocked with stone slabs. The size and style of the chamber are similar to those from tombs in Neungsan-ri in Buyeo, the capital of the late Baekje Kingdom. 


Artifacts including the decomposed wooden coffins and pieces of pottery were retrieved and are now at The National Museum of Jeonju.  


2기 묘가 한 구역에 있어 ’쌍릉‘이라 일컫는 익산 쌍릉(사적 제97호) 중 상대적으로 봉분 규모가 커서 대왕릉이라 일컫는 무덤을 최근 발굴조사한 결과 입구가 중앙에 있으며, 단면육각형의 현실(玄室)로 축조된 전형적인 백제 사비기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 석실분)임이 재확인됐다. 조사 결과 무덤방은 대형 화강석을 정연하게 다듬은 돌로 만든 것으로 드러났다. 무덤방인 현실은 길이 378cm, 너비 176cm, 높이 225cm로, 부여 능산리 왕릉군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알려진 동하총 무덤방(길이 327cm, 너비 152cm, 높이 195cm)보다도 더 컸다. 




특히, 현재까지 조사된 사비기 백제 왕릉급 무덤으로는 처음으로 판축(版築) 기법을 사용하여 봉분을 조성했다는 사실도 확인됐다. 


나아가 이번 조사에서는 현실 내부 중앙에 있는 화강암 재질 관대(棺臺) 맨 위쪽(북쪽)에서 인골이 담긴 나무상자가 발견되었다. 1917년 일제강점기 조사시, 발견된 피장자 인골을 수습해 봉안한 것으로 보인다. 


인골은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항온항습실로 옮겨 보관 중이며, 향후 과학적 조사를 위한 학제간 융합연구를 수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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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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