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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시대 조선 땅 문화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한명이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이다. 가만...한자 표기가 맞는지 자신이 없다. 내 기억에 의하면 이 친구 1927년 공주고보 한문교사로 부임해 1940년인지 강경여고로 옮기기까지 이 학교에서 죽 생활하면서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공주 일대 고분을 무허가로 천기 가까이 도굴했다. 이 와중에 일어난 유명한 사건이 벽화분인 송산리 6호분 도굴사건이다. 


공주고등학교 발간 <공주고60년사>



2000년 무렵,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을 코앞에 두고 그의 행적을 추적한 적이 있다. 가루베에 대해서는 공주 지역 일부 연구자가 學的으로 주목한 적이 있으나 당시까진 글다운 글이 없었다. 그나마 풍문에 의지한 글이 대부분이었다. 이 사람이 도대체 어떤 개뼉다귀냐?


가루베는 일본 제국 패망과 더불어 본국으로 돌아가 미에현인지 어디에서 교수로 봉직하다가 1970년인지, 69년인지 무령왕릉이 발견되지 직전에 죽었다. 그가 죽은 직후 그의 글을 모은 유작이 단행본 2권으로 나왔는데 이것이 그의 연구를 위한 제1의 문헌이다. 


한데 이에 수록한 글이라든가 식민지시대 신문 잡지 등등을 뒤져보면 그의 조선 행적이 더러 보이기는 한다. 이 중에서도 그가 애초에는 평양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기차를 타고 공주에 입성하는 장면을 자못 비장하게 그려놓은 글이 있거니와, 참으로 잘 쓴 小文이다.


그의 행적을 추적하던 당시 내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고리로 삼은 것이 바로 공주고등학교 敎史였다. 공주고보 후신인 공주고 역사를 정리한 그 교사에는 무엇인가 그와 관련한 행적이 있을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공주고 정도면 교사도 틀림없이 여러 번 나왔을 것이라 짐작했다. 한데 이를 어디에서 구한다는 말인가? 




그 무렵 공주에 들렀을 때다. 아마도 대통사지 인근, 혹은 공주고 근처였다고 기억하는데 거기에 헌책방 하나가 있었다. 나는 헌책방 다니기를 좋아하거니와, 무엇이 꼭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 케케한 냄새와 공기가 좋다. 무료하거나 마음이 산란할 때 헌책방처럼 멍 때리기 좋은 데도 없다. 그날도 이런저런 구경 삼아 훑어보는데, 내가 관심 있는 분야로 국한하자면, 이곳이 아무래도 공주라 그런지 공주지역 발굴보고서가 많았다.   


이날 이 헌책방에서 두 가지 중대한 자료를 구했으니, 하나는 정확한 책 제목이 지금 지금은 기억나지 않으나, 해방 직후 경성제국대학(당시 이름이 바뀌었나 모르겠다) 사학과 교수 학산 이인영이 그의 제자들과 함께 만든 두툼한 한국사 개설이었으니, 그에는 손진태 서문이 붙었고, 집필에 참여한 제자들로는 손보기와 한우근, 김성준 등등이 있었다고 기억한다. 이 책은 희귀본으로 분류되거니와, 한데 이 책이 왜 이런 곳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머지 하나가 바로 공주고 교사敎史였다. 그런 교사로 2종인가 찾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0년사와 80년사. 가루베 행적이 있다면 《공주고60년사》가 나을 듯했다. 왜냐? 이에는 가루베를 기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들이 상대적으로 많았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대강 펼쳐보니 이 교사에는 학창시절을 추억하는 이 학교 출신자의 회고담이 꽤 있었다. 그것을 대강 훑어보니 아! 이럴 수가? 온통 가루베 얘기였다. 그리고 역대 교사 명단을 보니 역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본국으로 귀환한 가루베는 1969년 조선 땅을 다시 밟는다. 이 귀국 장면이 가루베의 글에 보이는데, 강경여고 제자들이 공항으로 마중나온 사실을 감격스레 그려놓았다. 이 때 한국 여행에서 가루베는 명지대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당시 나는 그가 왜 명지대에서 강연을 했을까가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왜???? 왜????? 왜???? 


이를 나는 공주고보 교사를 보고 알았다. 명지대 설립자는 공주고보 5회인지 6회였거니와 그가 바로 가루베의 제자였다.


그의 행적에서 참으로 수상쩍은 또 다른 대목은 이런 그가 1940년 강경여고로 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 대한 궁금증을 당시 나는 강경여고 교사를 찾아서 실마리를 잡고자 했다. 하지만 이 작업도 이내 흐지부지되어 더 이상 추적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무령왕릉 발견 30주년을 맞아 우리 공장에서 그 특집을 기획하고, 내가 15회 분량인가를 집필하는 한편, 이를 토대로 직후 단행본을 준비하면서 그와 관련한 자료조사를 더했으니, 그때 조사성과가 근자 《직설 무령왕릉》으로 정리되어 나온 것이다. 


저 공주교보 60년사는 그때 내가 무령왕릉 특집을 비롯해 더러 인용하면서 요긴하게 써먹었으니, 이후 다른 사람들의 관련 글을 보니, 이 교사가 빠지지 않고 인용되고 있음을 보았다. 역사를 쓸 적에 교사가 그만큼 요긴하다. 


내가 특집과 책을 쓸 때 참고한 가루베 관련 책 두 종은 두번째 첨부사진이니, 저 자료집을 그때만 해도 나는 국립민속박물관 소장본을 이용했으니, 지금 내 서재 있는 저들은 현재 일본 규슈에 안식년을 보내는 대전대 이한상 교수가 마침 그곳 헌책방에 들렀다가 발견하고는 나한테 요긴하리라 해서 사서 일본에서 발송해온 것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 교수께 다시금 감사하다는 말을 남긴다. 

 


가루베 지온






<영일 냉수리 신라비>


예서 문법이란 grammar를 말한다. 전근대 한국사는 절대 다수 기록이 한문이거나 혹은 한자를 빌린 이두류이니 개중 한글문헌이 15세기 이후 일부 있다. 한문은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덮어놓고 읽고 쓰기를 강요하나, 엄연히 한문은 문법 체계가 있는 언어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이걸 망각하면 평지돌출 파천황 같은 억설이 난무하거니와, 하시何時라도 이를 떠나서 텍스트를 대할 수는 없다. 


내가 신라 냉수리비문에 등장하는 '此七王等(차칠왕등)'을 '이들 일곱 왕들(these seven kings)'이라고 결코 볼 수 없는 가장 주된 전거로 내세운 논리가 grammar다. 그 grammar 중에서도 호응(互應)이었다. 무슨 판결에 관여한 일곱 중 왕은 오직 갈문왕 한 명인데 어찌하여 나머지 여섯까지 왕이 될 수 있는가? 왕이 일곱이라면 '此七王(차칠왕)'이지 어찌하여 차칠왕등이겠는가? 도대체 얼빠진 등신들 아니고 누가 저 따위로 푼단 말인가?


<영일 냉수리 신라비 전면>


A boy was crying라는 말이 있고, 그 다음에 이 boy를 말할 적에 he라고 해야지 she라고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호응이다. 냉수리비문 '차칠왕등'이 결코 왕이 일곱이 될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이 한문의 호응이라는 그라마 때문이지, 기타 우수마발은 다 필요없다. 그럼에도 내 논문을 인용하는 사람 중에 그것을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단 한 명도 내가 문법을 가장 주된 근거로 이야기했음을 말하지 않으니 기이하기만 하다. 


<송산리 6호분 명문 전돌>


공주 송산리 6호분 출토 명문 전돌에 적힌 글자가 'A爲師矣'이거니와, 이에서 A가 결코 물건이 아닌 사람이 되어야 하는 이유도 말할 것도 없이 호응 때문이다. 스승 혹은 모범(師)이 되는 A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종래의 압도적인 독법인 '梁官瓦爲師矣'가 허무맹랑한 가장 주된 근거는 바로 이런 문법에서 기인한다. 이를 따른다면 양나라 관아에서 쓰는 기와를 스승으로 삼는다가 되어버리니 기와가 어찌 스승이 된단 말인가? 얼토당토 않는 주장이다. 


문법을 알아야 한다. 한문을 알아야 하며, 그런 한문이 철저히 문법에 기반한 언어임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허무맹랑한 소리가 줄어들거나 없어진다.


*** 이 글은 2016년 4월 27일, 내 페이스북에 '역사학과 문법'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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