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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세기 세종공(世宗公) 전 : 6세 세종(世宗)은 태종공(苔宗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다. 진흥대제(眞興大帝)와 어머니가 같다. 세종전군(殿君)은 처음 이름이 의종(義宗)이다. 단아한 아름다움과 멋진 풍채가 있었으며 태후에게 효성스럽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다. 대왕 또한 매우 사랑해 말하기를 ‘짐의 막내아우’라고 하시면서 항상 곁에서 모시게 했다. 조금도 금지하고 묶어두지 않아도, 공은 타고난 바탕이 극히 좋아 잘못됨이 없었다. 태종공이 일찍이 일이 있어 사사로이 제(帝)를 찾아뵈자 공이 곁에서 부축했다. 태종공이 제(帝)에게 먼저 拜하고 공에게 다음으로 拜하자 공이 황망하게 나아가 부축하며 감히 절을 받지 않았다. 제(帝)가 말하기를 ‘이 노인은 비록 중신(重臣)이기는 하나 내 신하이다. …몸으로 네게 배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공이 울며 말하기를 ‘아버지는 …입니다. 어찌 신으로 삼을 수 있겠습니까. 덕에 대한 보답을 하고자 …’라고 했다. 태종공이 놀라 말하기를 ‘태후는 신성하여 지아비 없이도 전군을 신화(神化)할 수 있습니다. 전군은 신자(神子)이십니다. 어찌 감히 신하가 아버지가 되겠습니까’라고 했다. (세종은) 태종공을 안고 울며 말하기를 ‘일찍이 모후에게 전■(殿■) … 저의…를 제 아버지라고 하셨거니와, 아직도 귀에 쟁쟁합니다’라고 했다. 제(帝)는 ‘… (태후)의 신성과 예덕(睿德)으로 중신을 총애함으로서 짐의 …이 있으니, 또한 짐의 집 경사스러운 행운이다. 늙은 신하는 어찌 반드시 피하는가. …짐의 아우이다’라고 하셨다. 또한 공에게 허락하여 …에게 아버지라 부르도록 했다. …공은 처음으로 부자의 상견례를 …왕의 은혜가 끝이 없음을 감사했다. 공(公)은 …와 함께…. 몇 달 앞서 태후는 공경(公卿)의 미녀들을 골라서 궁중에 모아 놓고 공이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보았다. 공은 미실낭주를 가장 좋아했다. … 태후는 이에 제(帝)에게 물기를 ‘미실의 아름다움 …전군(殿君)을 …하시오?’라고 했다. 帝 또한 아름답게 여겨 말하기를 ‘오직 어머니가 정할 바 입니다. 단 … 태종(苔宗) 노신이 알지 못해서 …’라고 했다. 태후 또한 그렇게 여겼다. 이에 태종(苔宗)을 불렀다. 미실 일을 의논하기를, ‘며느리를 얻는데 지아비께 의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태종은 말하기를 ‘폐하 집안 일에 어찌 감히 말씀을 드리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말하기를 ‘이 처녀는 곧 영실(英失) 손녀입니다. 제 우군(右君)으로 영실은 제게 잘못이 많았기에 꺼렸습니다. 그리하여 좋아하지 않게 되어 결정하기 어려운 바 되어 묻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태종이 말하기를 ‘영실은 (법흥의) 총신입니다. 유명(遺命)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지나치게 나무라서는 안됩니다. 전군이 이미 좋아한다면 또한 황후<사도(思道)이다>를 위로할 수 있으니 옳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태후가 크게 기뻐하여 말하기를 ‘사랑하는 지아비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나는 잘못할 뻔했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미실을 궁에 들어오게 했다. 섬긴 지 며칠 되지 않아 공과 상통하니 정의(情意)가 얽혀 깊어졌다. 그 때 태후는 숙명공주를 좋아해서 장차 통(統)을 잇기 위해 황후를 폐하고자 했다. 황후는 곧 미실의 숙모였다. 이에 그 계책을 황후에게 누설했다. 황후는 이에 울면서 제(帝)에게 원통함을 호소했다. 제(帝)는 본디 황후를 사랑했기에 태후의 헐뜯음을 듣지 않고 황후를 더욱 사랑했다. 태후가 노하여…미실을 위하여 걱정하여 태후에게 나아가 간했다. 태후는 이에 미실을 (불러들인) 것을 후회했다. 이에 미실을 불러 꾸짖기를 ‘네게 전군을 받들라 한 것은 단지 옷을 드리고 음식을 받들라는 것이었다. 한데 감히 사사로이 색사로 전군을 …어지럽혔으니, 죄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했다. 이에 출궁을 명했다. …진종(眞宗) 전군 딸인 융명(肜明)을 정비(正妃)를 삼았다. 제(帝)는 따져…. …눈물을 흘리며 울면서 따라갔다. 미실이 이미 돌아와서는 슬퍼 울면서 먹지 않고 …. …일찍이 준영(俊英)의 일로서 미실에게 …한 바 되어…. …사다함과 같았다. 이에 이르러 미실은…. …일찍이 지아비를 맞는데는 마땅히 사다함과 같이…해야 한다. 무릇 부귀란 한 때다. 나는 …. 한 때 왕자와 전군을 모두 앞에서 배견했으나 지금은 … 이와 같다. 이에 사다함공을 불러 위로했다. 미실은 이에 정■이 일어나 서로 벗어났다. 출정할 때에 이르러, 노래로서 보냈다. 이르기를,


바람이 불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 오라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


사다함은 이에 온갖 방법(萬端)으로 위로 하고 갔다. 전군이 듣고 …괴로워했다. 태후가 전군이 상심할까 염려해 미실을 다시 입궁케 했는데, 전군은 기뻐 미친 듯 달려갔다. 태후는 부득이 다시 섬기도록 했다. 미실은 원비(元妃)의 첩이 됐음을 부끄럽게 여겨 색공(色供)에 응하지 않았다. 전군은 이에 태후에게 청해 미실을 전군부인(殿君夫人)으로 삼았고 융명은 차비(次妃)로 삼았다. 융명이 불만으로 여겨 물러나 살고자 했다. 미실과 함께 전군과 정을 배반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마침내 융명을 내쫓았다. 사다함이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중에 들어가 전군부인이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다함은 청조가(靑鳥歌)를 지어 슬픔을 노래했다. 내용이 몹시 구슬퍼 그 때 사람들이 다투어 서로 암송하여 전했다. 해(解)하여 이르기를,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무는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너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들어 구름위로 가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 말지 또 갈 것을 어찌하여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며 마음 아프고 여위어 죽게 하는가

나는 죽어 무슨 귀신 될까. 나는 죽어 신병 되리

(전주)에게 날아들어 보호하여 호신(護神) 되어 

매일 아침 매일 저녁 전군부처 보호하여

만년 천년 오래 죽지 않게 하리


라 했다. 죽을 즈음에 이화공(二花公)이 감싸 안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그대 아우는 아직 어린데 그대가 만약 일어나지 못하면, 누가 이을 것인가’라고 했다. 사다함이 말하기를 ‘신의 누이인 미실의 남편이, 모랑공(毛郞公)의 고사(故事)에 의거하면, 또한 가능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이화공이 이에 태후에게 아뢰어 정해달라고 했다. 태후가 말하기를 ‘내 아들은 어리고 약하니 어찌 될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미실이 세종에게 권하기를 ‘사다함(斯多含) 종형(從兄)<■질(■姪)이다. 그런데 그 때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면 형제라 했다. 그러므로 형이라 불렀다>이 나를 사모하여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한 말 한마디를 들어주지 않으면 장부가 아닙니다’라고 했다. 세종이 그렇게 여기고 태후를 설득해 허락을 얻어, 6세 풍월주가 되었다. 그리하여 설화랑(薛花郞)을 부제로 삼았다.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는데, 그날 밤 과연 미실이 꿈에 사다함공이 품에 들어오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가 부부가 되고자 했으니, 그대 배를 빌려 태어날 것이다’라고 했다. 이에 공에게 아뢰었다. 공 또한 이상하게 여겼다. 바로 임신이 되어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하종공은 모습이 사다함과 심히 비슷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혹 사다함과 정을 통할 때에 이미 임신을 하고서 입궁해 낳은 아들이라고 하나 그렇지 않다. 세종은 금지옥엽 귀한 왕족이었으나, 능히 사다함공의 어루만짐의 도를 이어 낭도를 많이 뽑아 당(幢)을 이루었다. 도의에 힘써 상하에 두루 미쳤다. 미실이 실로 대궐에 거하며 끌어준 것이다. 그 때 동태자(銅太子)가 이미 장성해 있었다. 태후는 이에 만호공주(萬呼公主)를 짝지어 진골정통(眞骨正統)을 잇고자 했다. 사도황후(思道皇后)는 대원신통(大元神統)을 잇고자 해서 몰래 서로 의논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좋은 아이이니, 태자와 서로 친해서 아들을 갖게 되면 곧 너를 후(后)로 삼으리다’고 했다. 미실이 크게 기뻐하며 태자와 상통(相通)해 아이를 가졌다. 대왕이 이를 알지 못하고 또한 미실을 들어오게 하고는 색공(色供)으로 모시도록 했다. 미실은 음사를 잘해서 총애가 날로 중하여 황후궁 전주로 발탁되니 그 지위는 황후와 같았다. 미실은 이에 사람을 시켜 세종이 밖에서 공을 세우도록 설득했다. 세종은 이에 출정하고자 하니, 낭도가 많이 따랐다. 미실은 이에 설원랑을 머물러 있게 하고는 세종이 하던 일을 대신토록 했다. 총애를 믿고 방탕하니 설원랑과 그 동생인 미생과 통(通)했으나, 대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설원랑과 의논하기를 ‘내가 너희들과 사사로운 관계를 했거니와,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 봄(望)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라고 했다. 설원랑 등이 …. 미실은 이에 왕을 설득하기를 ‘옛날 선대 제(帝)들은 첩을 원화 …. 총첩(寵妾)을 낭도들에게 받들게 하고는 함께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습니다. …첩은 폐하의 총애를 지극히 받았습니다. 아직 … 없습니다. 세종이 낭도를 많이 거느리고 지방에 있는데, 만약 첩이 … 변고가 있으면 첩이 원컨대 스스로 원화가 되어 낭도를 모두 거느리는 것(總率) …. … 기쁘게 여겨 세종에게 알려 풍월주를 물러나게 하고 미실을 받들어 원화로 삼고는 설원과 미생을 봉사랑(奉事郞)으로 삼고, 금진을 화모(花母)로 삼았다. 세종은 이에 그 낭도를 모두 해산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새 원화는 옛 부인이다. 너희들은 불평하지 말고 잘 섬기라’고 했다. 낭도들이 눈물 흘리며 물러가지 않았다. 제(帝)가 명하여 설원과 미생 두 화랑이 낭도의 많은 무리(萬衆)를 통솔해 조알토록 했다. 대왕과 전주(殿主)는 함께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나와 남도(南桃)에서 조알을 받고 잔치(燕饗)를 크게 베풀었다. 원화 제도는 폐한 지 29년만에 부활했다. 이에 연호를 고쳐 대창(大昌)이라 했다. 이날 밤 제(帝)와 미실은 남도(南桃) 정궁(正宮)에서 합환했다. 낭도와 유화(遊花)들에게 새벽까지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서로 예를 갖추지 않고 분(奔)하게 했다. 성중 미녀로 나온 자가 또한 만중(萬衆)이었다. 등불의 밝음이 천지에 이어지고 환성이 4해 물을 끓어오르게 했다. 제(帝)와 원화가 난간에 이러르 구경하니 낭도들이 각기 유화 한 명을 이끌고 손뼉을 치고 춤을 추며(抃舞) 그 아래를 지나 가니, 그 때마다 만세 소리(山呼)가 진동했다. 제(帝)는 기쁨이 매우 커서 원화와 함께 채전(彩錢)을 무리에게 던져주며 말하기를, ‘저들도 각기 자웅(雌雄)이고 짐과 너 또한 자웅이다’고 했다. 미실은 몸을 완전히 돌려 품에 들어가며 말하기를 ‘비록 숙모의 존귀함이라도 이와 같은 즐거움은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대개 미실이 색이 아름답고 교태를 잘부림이 옥진(玉珍)의 기풍을 크게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사람들은 사다함의 영혼이 늘 미실 가슴에 있으며 좋은 계책으로 도와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미실은 본래 (銅)태자를 …했는데 정숙한 어머니가 전주로 들어가니 제(帝)가 백년후 …할까 염려하여 감히 태자를 거부하지 못하고 몰래 서로 이어 만났다. 태자는 …함이 없이 구함이 더욱 심해졌다. 미실은 매우 많은 일이 드러날까 두려워하며 미생과 의논했다. 태자가 밖에 나가 놀 때 유화 중 아름다운 사람을 많이 천거했다. ■자와 함께 미생의 낭도가 날마다 밖에서 황음한 짓을 일삼았다. 홍제(鴻濟) 원년(572) 3월 동태자(銅太子)가 보명궁(宝明宮)의 개 사건(獒事)으로 죽었다. 태자의 종인(從人)을 가려보니 미실의 낭도에 속한 자가 많았다. 미실 …. 대왕 또한 새어 나온 말을 얻어들은 바로는 미실이 방탕하여 …이 없어…. 세종이 부름을 받아 들어와 미실이 원화를 물러남을 승인했다. 그리고 세종을 …해서 다시 하니 세종이 풍월주가 되었다. 미실은 이에 세종에게 권하여 (말하기를 ‘내가) 이미 원화를 물러났고, 전주가 그대와 함께 조용히 머물러 있기를 원하니, 그대는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는지요. 빨리 설원랑에게 물려줌만 못합니다’라고 했다. 세종이 이에 설원에게 풍월주 지위를 전해 주었다. 그 때 금태자(金太子) 또한 미실을 좋아해 설원․미생 등과 사귀며 정을 맺고 방외우(方外友)가 되었다. 미실이 비록 이미 출궁해서 정업(淨業)을 공언했으나 가만히 있지 못하고 금태자와 함께 후사(後事)를 약속했다. 제(帝)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자제하지 못하고 미실을 다시 불러들여 의논했다. 제(帝)가 붕하시고 금태자가 왕위에 올랐다. 이로 인하여 미실을 받아들였으나 세상의 여론 때문에 황후로 봉하지는 못했다. 그런데다 다른 사람에게 빠져 미실을 그다지 총애하지 않았다. 미실은 그 약속을 어긴 것에 노하여 마침내 사도태후(思道太后)와 함께 낭도를 일으켜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태자 아들인 백정공(白淨公)을 즉위케 하니, 이가 진평대제(眞平大帝)시다. 제(帝)는 어리고 미실은 이미 늙었기에 스스로 후궁(後宮) 일을 맡아 조정 일을 제 마음대로 함이 많았다. 세종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청렴결백한 절조를 지켰다. 비록 미실의 뜻에 따라 출장입상(出將入相)했으나, 깨끗하여 사사로운 마음이 없었고, 크게 체모를 잃는 일이 있으면 즉시 미실에게 간언을 하는데, 눈물을 흘리며 참된 마음을 보였다. 미실 또한 감동하여 그를 중히 여겼다. 나이 들어 다시 서로 화합했다. 아! 세종공은 태후에게 효도하고, 대왕에게 충성스러웠으며, 황후의 아들로 미실에게 정절을 바쳤다. 스스로 그것을 일생의 일로 삼았다. 평생토록 한 사람도 책망하지 않았고, 하나의 소송도 그릇되게 판결하지 않았다. 진실로 화랑 중의 화랑이었다. 찬한다: 태후의 사자(私子)이고 상국(相國)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청아하고 높은 표상은 화랑의 전형이다. 세계 : 어머니는 지소태후이니 초명(初名)은 식도부인(息道夫人)이며 법흥왕 딸이다. 처음에 입종공(立宗公)에게 시집가 진흥대제를 낳았다. 법흥대왕 유명에 영실공을 계부로 맞이해 황화공주(黃華公主)를 낳았다. 영실공이 멀리하지 않았는데 …. 권신(權臣)들이 물리쳤다. 이에 병부령(兵部令)을…. … 숙명공주 및 공(公)…. 태종(苔宗)은 아버지가 아진종(阿珍宗)이니 습보공(習宝公) 아들이다. 어머니는 보옥공주(宝玉公主)이니 …의 딸이다. 습보공은 내물왕 손자다. 지소(只召)는 어머니가 보도황후(保道皇后)이며 소지왕(炤知王) 딸이다. 보도(保道)는 어머니가 선혜황후(善兮皇后)이니 내숙공(乃宿公) 딸이다. 선혜는 어머니가 조생부인(鳥生夫人)이니 눌지왕 딸이다. 조생(鳥生)은 어머니가 아노(阿老)이고, 아노는 어머니가 내류(內留)이며, 내류는 어머니가 광명(光明)이고, 광명은 어머니가 아이혜(阿爾兮)이고, 아이혜는 어머니가 홍모(紅帽)이다. 홍모는 어머니가 옥모(玉帽)이니 미추대왕(味鄒大王)이 광명을 황후로 삼으며 후세에 일러 말하기를 ‘옥모(玉帽)의 인통(姻統)이 아니면 황후로 삼지말라’고 했다. 그런 까닭에 세상에서 이 계통을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한다. 옥모부인(玉帽夫人)은 소문국(召文國) 왕녀인 운모공주(雲帽公主)가 구도공(仇道公)에게 시집가 낳은 사람이니 옛날의 진골(眞骨)이 아니다.  


삼국사기 권 제4 신라본기 4 진지왕 : 2년(577)...겨울 10월에 백제가 서쪽 변방의 주와 군에 침입하였으므로 이찬 세종(世宗)에게 명하여 군사를 내어 일선군 북쪽에서 쳐서 깨뜨리고 3천7백여 명을 목베었다.


삼국사기 권 제27(백제본기 제5) 위덕왕 : 24년(577) 겨울 10월에 신라의 서쪽 변방 주ㆍ군(州郡)을 치자 신라의 이찬(伊飡) 세종(世宗)이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쳐서 깨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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